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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공간으로서의 도시 돌아보기

The Book | 2009. 5. 9. 22:33 | Posted by 맥거핀.
마음이 머무는 도시 그 매혹의 이야기 - 6점
이희수 지음/바다출판사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가벼운 여행기다. 글쎄. 가볍다는 말이 조금 부정적인 느낌이라면 이렇게 말해도 괜찮겠다. 가볍고 깔끔한 여행기다. 이 책에는 모두 18개의 소위 '문화도시'가 소개되어 있다. 각 도시마다의 소개글은 천천히 읽는다해도 약 5-7분 안에 읽을 수 있는 짤막한 분량. TV에서 하는 짤막한 스팟 형식의 여행 프로그램을 보는 느낌이다. 도시의 주요 관광 장소 몇 군데 소개하고, "와우~정말 멋있네요~"하는 성우의 기분좋은 감탄사 몇 개 붙이고, 거리 먹거리 한두 가지 소개한 후, 야경을 배경으로 끝맺는 '~따라 세계여행'같은 프로그램 같은 거 말이다. 그게 이 책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이 책에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아메리칸 버티고>나, 유재현의 <아시아의 기억을 걷다>와 같은 인문학적인 또는 역사서술적인 글쓰기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저자는 가끔 도시의 역사적인, 혹은 문화적인 배경에 대해 소개하기도 하고, 독자들이 잘 모를 용어들에 대해 친절한 주석을 덧붙이기는 하지만, 교과서의 수준을 크게 넘지 않는다. 물론 이는 위에서 말했듯이 단점으로만 기능하지는 않는다. 세계의 문화도시를 잠깐 둘러 본다는 가벼운 느낌으로 보면, 또는 가벼운 교양서적을 본다는 생각으로 대하면 어느 정도 기대감은 충족시켜 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도 저자의 능력이다. 가벼운 교양서적의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도 꽤나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중해라는 '문명의 호수'를 끼고 인류가 일구어 낸 다양하고 풍요로운 문화를 받아들인 크레타 섬은, 그 때문에 수많은 이민족의 침략과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Ceasar Augustus, 기원전 63-14)는 로마의 대권을 장악하고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차지해 버렸다. 그 뒤 로마가 비잔틴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갈리자 크레타 섬은 비잔틴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이곳에는 초기 바실리카가 많이 세워졌다. 그런가 하면 9세기에는 아랍 사람들의 지배를 받아 모스크가 난립하기도 했다. 결국 크레타 섬은 1670년에 오스만 제국의 수중에 들어갔고, 뒤이어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1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리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복잡한 침략의 역사를 겪었기 때문인지 크레타 섬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오스만 제국 시대의 성채와 유적은 물론 고대와 현대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마치 '문명의 종합 전시장'에라도 온 느낌이다. (p.91-92)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꽤나 다양한 문화권의 다양한 느낌의 도시들을 엮어서 소개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 책에는 이탈리아 밀라노, 피렌체, 체코 프라하,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등 그간 다른 여행기나 매체에서 자주 소개된 도시들도 있는가 하면, 파키스탄 라호르, 러시아 이르쿠츠크,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의 접하기 어려운, 잘 소개되지 않았던 도시들도 있다. 이 외에도 알제리의 알제나 이집트 룩소르 같은 여러 다양한 문화들의 다양한 도시들을 폭넓게 소개하려고 했다는 인상이 짙다.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러시아 이르쿠츠크가 러시아 혁명가들의 유배지로서 시작되어 발전된 도시임을, 파키스탄 라호르가 무굴제국의 수도로서 찬란한 이슬람 문화로 번성했던 도시임을 알게 되었다. 하기사 어느 여행기가 키르기스스탄의 비슈케크까지 그 발길이 가 닿겠는가. 저자의 이슬람권에 대한 관심과 다문화적이고 잡식적인 발걸음이 빛나는 순간이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여러 다양한 도시들이 조금 더 체계를 가지고, 혹은 주제를 가지고 유기적으로 구성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시작해, 미국 시애틀에 다다르는 이 책의 구성은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를 넘나들며 다소 산만하게 느껴진다. 어떤 역사적인 흐름이라던가, 각 문화가 전파되는 경로을 따라 이동한다던가 하는 유기적인 흐름을 이 책의 구성에 도입하였으면 조금 더 체계적이고 독자들도 덜 혼란스러운 경험이 되지 않았을까.

다만, 책을 읽다보니 몇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하나는 어떠한 문화권의 어떤 도시이건, 도시의 문화(즉, 음식이나 건축물 등)는 그 자신의 역사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여러 두오모(대성당)들과 거리, 그리고 도서관과 극장 등의 오래된 건축물들은 위대한 문화유산이자 르네상스라는 하나의 거대한 역사의 일부분이다. 즉 이 건축물들 각각이 별개로서 여겨지지 않고, 그 전체가 거대한 르네상스의 유산으로 여겨질 때 그 가치는 위대한 것으로 기록된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문화들, 혹은 그 문화를 구축시켜 온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종교'라는 것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는 점,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위대한 문화유산들은 모두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구축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성당과 신전 혹은 오벨리스크 같은 명백한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건축물들은 물론이려니와 일반건물 벽면의 벽화에서부터 크노소스 유적지의 뱀 모양의 대형 항아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인간의 문화유산들은 종교적 또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거의 모든 도시들의 문화가 온전히 그들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즉 하나의 폐쇄된 체제로서 구축된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전쟁이건, 혹은 무역이건 간에 대부분의 문화는 주변의 영향을 받고, 이러한 주변으로부터 도래된 문화와 그들 자신의 문화가 섞여 또다른 제3의 문화를 만들어내며, 이러한 제3의 문화는 또 주변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이것이 한 문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자, 역사이다.

카르나크 신전과 열주의 양식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그것과 닮아 있다. 파르테논 신전보다 1000년이나 앞서 세워진 카르나크 신전의 규모와 정교함이 오히려 돋보였다. 서구 문명의 뿌리를 로마와 그리스에 두고 검은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동양의 오리엔트 문명과의 단절을 시도했던 유럽 인들의 오만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집트 문명이 그리스·로마 문명에 준 영향은 단순히 형태나 양식에 그치지 않는다. 미라와 파라오의 부활 사상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앙으로 연결되어, 기독교 부활 사상의 바탕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이집트의 많은 신들은 이름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어 그리스와 로마의 신으로 둔갑하였다. 그러나 흰 것만이 선이고 최고라고 믿었던 유럽 인들은 자신들의 가슴 속에 뜨겁게 흐르고 있는 이집트의 정신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스의 파르테논은 지금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 문화유산 제1호이지만 카르나크의 의의와 존재를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는지. (p.134-135)


글쎄. 누군가는 '뭐 또 이런 당연한 소리를...'이라고 할 것 같다. 문화가 역사를 반영한다느니, 모든 문화는 종교성을 그 바탕으로 한다느니 하는 소리는 너무나도 '교과서스러운' 말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렇다,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것, 그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교과서에 나열된 지식이 아니라, 세계의 여러 소위 '문화도시'들을 돌아보면서 문화란 어떻게 구축되고, 발전하는가를 아주 살짝 생각해보게 하지만, 결코 그 이상, 깊숙한 수준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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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책장을 덮으면서 한 가지 생각은 들었다. 이러한 문화도시들에 우리나라의 도시들은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백제시대로부터 이어진 '문화도시'로서의 고도(古都) 서울은 어떤가하고 말이다. 글쎄. 엔고 현상으로 서울 거리를 가득 메웠던 일본인들이 '명동' 이외에는 갈 곳이 없어서 한 번 방문한 후 발길을 끊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며 마음이 편치는 않다. 명동에서 화장품 사고, 쇼핑하고, 명동칼국수 먹고 청계천 살짝 보는 것 이외에는 그들이 할 일은 정말 별로 없는 건지, 몇 천년을 이어온 거대한 문화의 총합으로서의 서울은 어디에 숨어 있는건지 잘 모르겠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밀라노 또는 라호르인가, 계획된 성채로서의 두바이인가. 있는 남대문마저 홀랑 태워드신 분들, 그리고 멀쩡한 4대강 파헤쳐 운하 만드신다는 분들께 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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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고 청바지 하나 사세요

The Book | 2009. 4. 14. 23:37 | Posted by 맥거핀.
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 - 4점
TBWA KOREA 지음/알마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퀴즈 하나. 다음의 단어를 듣고 무엇이 연상되는가. '디젤'. 당신이 '디젤 엔진' 같은 걸 떠올렸다면, 아마도 당신은 기름값을 걱정하며 오늘도 조금 더 싼 주요소를 찾아 헤매는 오너 드라이버일지도 모른다. 혹은 당신이 영화배우 '빈 디젤'을 떠올렸다면, 액션영화를 좋아하는 영화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당연히 청바지 '디젤'이지, 뭐 더 있어?"라고 생각했다면 분명히 패션에 약간은 관심이 있는, 청바지를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디젤(DIESEL). 이 책의 설명에 의한다면 '전 세계 프리미엄진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 브랜드이며, 1978년 처음 선보인 이래, 전 세계에 걸쳐 200개가 넘는 매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생산량이 많아 다른 브랜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디자인이 다양하며, 초보자에게는 그만큼 실패할 확률이 적은 브랜드'다. 아..이게 갑자기 무슨 간접광고질이며, 망발이냐고? 그저 단지 나 같은 사람은 이 '디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디젤 엔진 또는 디젤 기관 외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으며, 이 '디젤'이라는 청바지 브랜드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외에도 수많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프리미엄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것을 고백하려던 것 뿐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거의 매일 청바지를 즐겨 입기는 하지만, 프리미엄진과는 거리가 멀며, 그나마도 몇 벌 없어서 두 세 개를 교묘히 돌려입는 중이다. 그러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즐겨 입는다'라는 표현은 사치스러운 것일 것이다. '즐겨 입는다'라는 것은 '입을 수 있는 옷, 혹은 입어야만 하는 옷이 무수하게 많지만, 그 중 내가 이것을 특별히 좋아하기 때문에 자주 입는다'라고 할 때나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저 나같은 경우에는 '아껴 입는다' 혹은 '헐벗은 정도는 겨우 면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두 세 벌 밖에 없는데도, 왜 거의 매일 청바지를 입는 것일까. 그것은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편하다'라는 말은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옷 자체가 편하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대로, 결코 부드러운 천이라고 할 수 없는 데님으로 이루어진 청바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판 코르셋'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며, 결코 그 자체로 편한 옷이라고 보기는 힘들다(적어도 나에게는). 여기서 '편하다'는 것은 아무 때나, 어떤 상황에서나 입을 수 있기 때문에 편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드레스 코드가 지정된 경우가 아니라면, 청바지는 언제 어느 때나 무리하지 않은, 튀지 않은 복장으로 보인다. 따라서 거의 매번 튀지 않고, 조용히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청바지를 자주 입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편하다'는 '아주 튀는 청바지가 아니라면, 대체로 별로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편하다'라는 의미에 가깝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때로 이 '편하다'를 과대해석하여, 대학원 면접시험장에도 입고 갔고, 모 대학 조교로 있을 때 시험감독을 하러 갈 때도 입고 갔다. 그리고 그 때마다 손가락질을 받았으니 내 '편하다'의 기준도 살짝 문제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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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황한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아마도 이 책에서 요구하는 것들이 이런 것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왜 청바지를 입습니까?"라는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나름의 해답. 이 책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도 이러한 부분이다. 왜, 처음에는 미국 서부 금광 노동자들의 작업복에 불과하였던 청바지가 전세계로 퍼져 나갔으며, 전 세계인의 유니폼이 되었는가. 이 책은 그러한 것을 나름의 공식으로 설명하려 하고 있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나름의 공식이란 대략 이런 것이다. 미국에서 천막용 천에 불과했던 거친 데님은 잘 찢어지지 않는다는 장점 덕분에 리바이(Levi)에 의해 광산노동자들의 작업복으로 재탄생될 수 있었고, 실용성을 강조하는 미국인들에 의해 대량 생산, 대량 판매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세계최강국으로 발전한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를 열며 코카콜라, 맥도날드, 디즈니와 함께 청바지를 전세계적으로 퍼지게 하였으며, 청바지는 자유와 저항이라는 상징성까지 얻으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후 청바지는 보보스(bobos)들에게 사랑받으며, 질적 성장을 하게 되었고,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 즉 내가 청바지를 선택하는 시대가 아니라, 청바지가 나를 선택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따라서 다음의 선언들은 이 책에서 최종적으로 주장하는 현재 청바지의 위치다.

키 176센터미터에 67킬로그램의 '스펙'을 가진 남자는 디젤의 자탄 청바지를 입을 수 있지만, 176센티미터의 키에 78킬로그램이라는 '스펙'을 가진 남자는 자탄을 입어서는 안된다는 분위기다. 이른바 '간지'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다. (중간 생략) 청바지의 스타일을 무시한 채 살이 찌면 찐 대로 큰 사이즈의 청바지를, 살이 빠지면 빠진 대로 작은 사이즈의 청바지를 '이기적으로' 입을 수 있는 시대는 갔다.
인간은 청바지의 서식지다. 이들은 변화하는 다양한 시대의 가치들을 흡수 제공하며, 대표적인 인간의 외피로 자리잡았다. 의심스럽다면 지금 당장 당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라. 당신과 청바지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도발적인 선언들은 다음과 같은 얘기다. 청바지를 입는 것에도 자신에게 맞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 즉 아무 청바지나 입어서는 안된다는 것, 또 역으로 말해서 어떤 청바지를 입었는가가 당신을 말해 줄 것이라는 것. 아주 맞는 얘기라고 할 수는 없지만, 뭐 틀린 얘기도 아니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 같다. 그랬다. 요즘 광고에서 내세우는 새로운 전략들. 즉, 이 물건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당신이 이 물건을 쓰는 순간 당신은 아주 달라보일 겁니다..라는 거. 이 핸드폰은 이런 물건들을 쓰는 센스있는 사람들의 자매품에 불과하다는 것, 잇쯔 디퍼런트 스카이 같은 것 말이다. 또는 그곳에 살게 됨으로써 달라질 당신의 삶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아파트 광고 같은 것들 말이다. 

이건 좀 의심스러운데 말이야..하고 책 부제를 들여다보니 'TBWA KOREA가 청바지를 분석하다'라고 되어있다. TBWA KOREA? 광고회사다. ('그것도 매우 괜찮은 광고회사다'라고 자신들을 소개한다.) 이 책은 이 광고회사의 7명의 사원(카피라이터, 컨설턴트, AE 등)들에 의해 A부터 Z까지 철저하게 기획된 책이다. 어떤 목적으로? 물론 당신에게 청바지를 팔아먹어 보겠다는 목적으로 말이다. 즉 당신이 노동자건, 대학생이건, 혹은 보보스이건 간에 청바지가 당신을 다르게 보이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니 사세요 라는 것. 물론, 그렇게 단정짓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조금은 가혹한 평가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청바지 발전사에 대한 꽤나 흥미로운 고찰이기도 하고, 팍스 아메리카나를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의 문제점 또한 살짝 짚어주는 영리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다. 이 책으로 어떤 인문학적인 사회문화사, 패션에 대한 조금은 진중한 고찰을 기대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실망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하는 책에 손을 들어주기란 꽤나 힘든 일이다.

이것이 진정한 종교다. 이제 트루릴리젼(True Religion)이라는 청바지 이름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줄 수 없는 초감각적인 무엇을 청바지를 통해서 얻으려는 것이다. 그 결과 공구를 집어넣던 뒷주머니에는 수를 놓아 메시지를 담기 시작했고, 사찰에 있어야 할 붓다가 기타를 들고 로고 속으로 들어왔다. 한 슈퍼모델은 자신의 청바지를 세탁기에 돌린 가정부를 해고했다. 아마도 신성모독이 그 죄목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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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이라는 명목으로 공짜로 받은 책이니, 되도록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공짜에 대한 예의겠지만, 솔직히 이 책을 사려는 사람이 있다면 재고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청바지의 역사 같은 것은 여성지의 가끔 남는 지면을 활용하기 위해 실리며, 아마도 그것은 훨씬 더 잘 요약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내용은 그런 여성지 2-3 페이지에 실릴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늘려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 요약 이상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무슨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청바지를 입는가를 알았다고 해서, 당신의 청바지 고르는 안목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그러고보니 이 책도 잡지처럼 이쁘게 구성되어 있다. 두 시간이면 읽을 분량을 한 권으로 늘려놓다보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럴 돈이 있으면, 청바지를 한 벌 사라. 그것이 이 책에서 좋아하는 실용성을 가장 잘 실천하는 길이다. 혹시 아는가? 프리미엄진이라도 사면 이 책을 부록으로 껴줄지. 그것이 이 책에 맞는 합당한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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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이들뿐일까?

The Book | 2009. 3. 7. 02:32 | Posted by 맥거핀.
나쁜 사마리아인들 - 8점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부키


요즘 예전에 샀던 책들을 조금씩 읽고 있다. 그러다보니 또 최근에 산 책들을 못 읽게 되고, 그러거나 말거나 또 새롭게 재밌는 책들은 눈에 띄고, 어느샌가 나는 그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고... 악순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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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은 다음의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부자나라들은 보호주의적인 경제정책으로 지금의 부자나라 대열에 들어섰는데, 왜 지금의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자유주의적 정책을 강요하는가?' 즉, 그들(부자나라들, 특히 미국)은 왜 자신들이 성공한 정책을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상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믿기 때문이다[각주:1]. 즉 이들은 이미 개발도상국보다는 경제규모나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이나, 기술력 등 여러 조건들이 훨씬 유리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양측이 서로 동일한 조건에서 자유롭게 경제를 운용하는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이를 장하준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브라질 국가대표 축구팀과 유소년 축구팀이 동일한 조건으로 축구 시합을 하자고 하는 것과 같다. 즉 '평평한 경기장'이 아니라 '기울어진 경기장'이 필요하다는 것. '기울어진 경기장'이라는 말이 감이 잘 안 온다면,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유소년 팀에게는 '조금 더 커다란 골대'가 필요하다는 것.

국제 경쟁은 수준이 비슷하지 않은 경기자들이 참여하는 게임이다. 우리 개발 경제 학자들이 흔히 하는 말로 하자면, 스위스에서 스와질란드에 이르는 모든 나라들이 맞붙어 싸우게 되어 있다. 따라서 약한 나라에게 유리하도록 '경기장을 기울게 만드는 것'이 공정하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약한 나라들이 자국의 생산자들에 대한 보호와 보조금 정책을 보다 강력하게 실시하고, 외국인 투자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규제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앞 부분에서 지금까지의 세계 경제의 흐름에서 부자나라들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다면, 뒷 부분에서는 따라서 지금의 세계 경제에서 모든 나라가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책들이 필요한지 말하고 있다. 즉 앞 부분에서는 반 자유주의주의적인 경제 정책으로 경제 발전에 성공한 부자나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뒷 부분에서는 현재의 개발도상국들에게 필요한 정책들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각 장으로 나뉘어 펼쳐지고 있다[각주:2].

따라서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간단하다. 부자나라들이 아닌 나라들은 물론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부자나라들도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폐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절대악이라서? 그것이 어떤 절대적이고 잘못된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에?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어떤 부분을 읽다 보면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거의 '악마의 정책'과 동일하다고 서술된다는 느낌이 올 수도 있다. 즉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어떤 주관적인 가치관'이 너무 강하게 개입된 것이 아닌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오해에 가깝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에서 담고 있는 것은 하나의 간단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왜 부자나라들은 자신들이 부자가 된 정책을 개발도상국들은 쓰지 못하게 할까? 그것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이후에 사다리를 차버리는 것과 같은 짓이지 않는가.' 그것을 장하준 교수는 많은 풍부한 통계 자료와 알기 쉬운 비유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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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얼마전 화제에 오른 적이 있다. 국방부에서 선정하는 '불온도서 목록'에 이 책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도대체 얼마나 불온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읽고 나서 보니 불온한 내용은 없다. 불온(不穩)하다는 것은 온건하지 않고, 급진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이 전 재산의 국유화를 주장한 것도 아니고, 돈 많은 사람들의 돈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자고 말한 것도 아니다. 적어도 그쯤은 되어야 불온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생각해 보니 불온한 책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책은 현재의 우리나라 정부의 경제 정책과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얘기하는 불온이란, 정부에서 제시하는 사상과 반대되는 사상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자조적으로) 일컬어지니 말이다. 예를 들어 만약 내일 정부에서 '빨간색 금지법'이 발동된다면, 배수아의 소설 <붉은 손 클럽>은 불온도서, 빅뱅의 <붉은 노을>은 금지곡이 될 것이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책을 불온도서로 선정했다는 것은 MB정부가 '우리의 경제 정책은 신자유주의 정책입니다'라고 인증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뭐 하지만 인증을 안해도 눈 앞에 보여지는 수많은 정책들이 이를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외국인 투자에 대한 확대개방, 공기업의 민영화, FTA와 쇠고기협상, 그리고 영어 중시 교육 정책 등등. 인증을 안해도 이리 눈 앞에 잘 보이는데, 뭐 인증까지 하시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니, 나는 우리나라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다면, 그것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MB정부의 경제 정책이 1년을 넘어가는 지금, 한국경제는 빈사 상태에 이르러 있다. 물론 그것을 전적으로 MB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과도한 자본의 축적이 낳은 지금의 경제위기의 바람은 분명히 외부에서 불어왔다. 그러나 그것에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와 그 정부의 태도가 낳은 현재의 한국경제의 상황은 여러모로 우려를 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쩌면 더욱 우려되는 점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러한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이 작은 땅덩어리에도 무수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유수의 대기업들은 예전 여러 보호적인 정책들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작은 중소기업들과 자유로운 경쟁을 할 것을 요구한다. 비단 기업의 예만 있을까? 현재의 영어 중시 교육 정책도 그렇다. 집이 부유해 어렸을 때부터 갖은 사교육과 해외연수로 영어를 배워온 학생과 가난하여 그럴 수 없었던 학생에게 같은 영어시험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그리고 그러한 것으로 많은 것이 결정되는 것도 그러하지 않은가.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돈없고 힘없는 서민들은 이중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외부의 거대한 나쁜 사마리아인과 그 안의 무수히 작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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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어떤 커다란 비전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이 책을 읽고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을 때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이 책은 어떤 국가적인 정책을 대부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경제라는 것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심리가 결합된 하나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실제 경제가 호황 국면에 접어들어 있다가도 사람들이 향후의 경제 상황에 불안해한다면 그 흐름은 지속될 수 없다. 무식하고 간단하게 말해서, 주식이라는 것도 결국 많은 사람들이 '떨어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내다팔면 떨어지는 것이고, '오를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사들이면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하나의 심리 게임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여러 부분에서 많은 통계자료와 객관적인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그보다는 많은 부분에서 제시되는 이해하기 쉬운 비유에서 찾을 수 있다. 많은 비유와 이야기들은 전체적으로 세계경제의 흐름을 쉽게 이해하게 하며, 그 속에서 우리나라가 처한 위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따라오는 책의 전체 논지에 대한 공감은 덤이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 공감은 많은 사람들의 심리와 생각을 바꾼다. 그리고 이 바뀐 심리와 생각은 경제의 흐름에서 상상 외로 크게 작용할 수 있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다음의 투표에는 작용할 수도 있다.

개인적인 작용에 대해 말하자면, 경제학을 어려워하고 심지어는 무서워하기까지 하는데, 재미있게 읽었다. 이에도 물론 쉬운 비유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여러모로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장하준 교수의 다른 책- 예를 들어 <쾌도난마 한국경제> 같은 -도 궁금하고, 역으로 이 책과 반대지점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책에 소개된) 토머스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도 읽어보고 싶어진다.




  1. 그러나 장하준 교수는 이 역시 부자나라들의 잘못된 판단이라고 말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부자나라들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폐기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는 것. [본문으로]
  2. 이것이 3장부터 9장까지의 내용인데, 각 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3장에서는 자유무역 정책의 위험성에 대해(특히 유치산업 보호의 필요성), 4장에서는 외국인 투자에 대한 규제의 필요성에 대해, 5장에서는 민영화의 위험한 점에 대해, 6장에서는 과도한 특허권이나 저작권법에 대한 완화의 필요성에 대해, 7장에서는 과도한 재정 건전성의 추구가 불러오는 문제점에 대해, 8장에서는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와의 관련성과 부자나라들이 말하는 '개발도상국은 부패했기 때문에 경제발전에 실패했다'라는 주장의 허구성에 대해, 9장에서는 특정의 문화가 경제발전을 촉진한다는 믿음의 문제점에 대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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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다카시에게 얻는 지적 자극

The Book | 2009. 2. 17. 17:30 | Posted by 맥거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 8점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청어람미디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꽤 오래 전에 사둔 책인데, 얼마 전에 읽었다. 처음에는 제목만 보고 500권에 대한 호평과 100권에 대한 악평이 실린 책인 줄 알았는데, 너무 축자적으로 생각한 듯 하며,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쓰는 악평은 어떤 것인가, 궁금했었는데, 그 궁금증의 해결은 조금 미뤄놓아야 할 듯 하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훌륭한 저널리스트로,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인물로, 그리고 엄청난 독서가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 일기라고 볼 수 있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다치바나가 자신의 책을 가득 모아놓은 그의 이른바 '고양이 빌딩'을 자유롭게 거닐며,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자유롭게 소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2부는 그가 <주간 문춘>에 연재하였던 독서 일기 몇 년 치를 모아 놓은 것이다. 그래서 1부에서 다루는 책들이 주로 그가 그의 지식을 형성하는 젊은 날에 읽었던 책들과 그간 여러 저널을 써오면서 읽었던 책들이 주가 된다면, 2부에서는 독서 일기를 썼던 당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책들이 주를 이룬다. 권말의 책 목록을 살펴보니 대략 900-1000권 정도의 책들이 소개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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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다카시의 관심은 사실 전 분야에 가깝다. 책 뒤편을 보면 그를 형성한 지식의 '재료'와 키워드가 나와 있는데, 그 키워드의 목록은 인간, 지구, 우주, 자연과학과 테크놀로지에서 시작하여 신화와 역사, 종교, 전쟁, 환경과 생태학을 거쳐, 성과 사랑, 현대정치의 역학, 금융공학과 세계경제에 이른다. 즉 인간사의 거의 모든 부분과 거의 알려진 지식들이 그가 관심을 가지는 전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책 소개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책들은 특정 분야, 특정의 관심에 국한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원래, 메타(meta)-책 적인 내용을 좋아하는 터라, 이런 책 소개를 위한 책들은 꽤나 관심을 가지고 즐겨 보곤 한다. 그러나 그간 여러 책 소개 책들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그런 책 소개들이 특정의 분야에 국한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책을 소개하는 대부분의 필자들은 자신의 분야에서는 상당히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지만, 다른 분야의 지식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책 소개도 특정 분야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 소개는 거의 전 범위를 넘나든다. 물론 이 책 소개는 특정 분야를 깊게 파지는 않는다. 그저 그 분야에서 읽어두어야 할 책들과 그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짤막하게 언급하는 식이다. 가끔 길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서 한편으로 이 책 소개들은 TV 뉴스 같은 데에 나오는 짤막한 스폿(Spot) 형식의 책 소개들을 연상케 한다. 어쩌면 여기에 다치바나의 저널리스트적인 면모가 드러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책은 책 소개들을 가득 담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을 대하는, 혹은 글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사회 현상들을 대하는 자세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치바나가 좋은 글에 대해 말하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그렇다.

내가 종종 하는 말이지만,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입출력비(입력 대 출력의 비율)가 100대 1 정도는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책 한 권을 쓰려면 100권을 읽어야 하는 셈이다.
전방위를 넘나드는 다치바나의 책 소개는 놀라운 지적 자극의 연속이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들어본 적 없는 철학자(예를 들어, 비코 Giambattista Vico)의 저서를 소개하다가, 갑자기 비트겐슈타인으로 돌아서서 한참 말하다가, 지바 데쓰야의 <내일의 조>를 이야기하고는 우주와 지구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식이다. 또 그러다가는 갑자기 이상한 고대 전설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성(性)의 신비로움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상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책 소개다. 꼭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어느 페이지를 열어서 보아도 상관 없고, 그 어느 페이지에서나 일정량의 지적 자극을 맛볼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수많은 책들의 상당수가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는 출판되지 않은, 그리고 앞으로도 그다지 출판의 가능성이 높지 않은 책들이라는 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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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다치바나의 사상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하고 넘어 가고자 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몇몇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소개되는 상당수의 책들이 일본 군국주의 시대를 다룬 것들이라든가, 우리나라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석연치 않은 일본 고대사나 천황을 다룬 책들이 나온다거나, 국가의 과학기술 진흥책에 대한 강조와 같은 것들이 그렇다. 그가 그동안 여러 다른 책들에서 주장한 내용들이 과학기술의 관심으로 부강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거나, 젊은이들의 지적인 쇠퇴를 지적한 것들임을 생각해보면 일견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를 쉽게 우익[각주:1], 또는 내셔널리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그 답을 주저하게 된다. 국가라는 체제 혹은 시스템을 부정하지 않는 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고, 강한 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강한 국가란, 다른 나라를 괴롭히고, 다른 나라를 억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들을 어떻게 그 국가 안에서 평화롭게 살게 해줄 것인가라는 정치 및 사회의 작동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좌익의 운동에 대한 꾸준한 관심, 생태학(ecology)에 대한 관심, 그리고 지구인으로서 그리고 우주의 일원으로서 인간에 대한 관심을 생각해 볼 때 이런 낙인은 조금은 지나친 측면이 있다.

어쩌면 그의 저널리스트로서의 모든 것에 대한 관심, 그리고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지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서의 태도가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정말 오해인지 아닌지는 그의 <천황과 도쿄대>[각주:2]와 같은 저서라든가 앞으로 나올 책을 읽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p.s. 앞으로는 읽은 책은 무조건으로 한 줄이라도 좋으니까 글을 남기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저 읽기만 해서는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http://noracism.tistory.com2009-02-17T08:30:580.3810
  1. 여러 일본 배우들에 대한 우익 논쟁이나, 요즘 제기되는 작가 오쿠다 히데오에 대한 우익 논쟁과 같은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우익인가, 아닌가하는 논쟁은 너무 간단하게 우익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규정되는 측면이 큰 것 같다. 확실한 것은 '한국을 좋아한다'라고 한 마디했다고 해서 '친한' 또는 '개념있는' 게 아닌 것처럼, 한 번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서, 혹은 책 내용 중 한 줄 이상한 것이 있다고 해서 '우익' 또한 아닌 것이다. [본문으로]
  2. 다치바나의 이 책이나 혹은 가라타니 고진과 같은 다른 일본 사상가의 책들을 읽고 보면 '일본인에게 있어 천황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다. 확실히 천황이 일본인의 사상에서 위치하는 지점은 한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어떤 것인 듯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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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The Book | 2008. 6. 8. 02:05 | Posted by 맥거핀.

글의 시작머리에서 김연수는 말한다. ‘“겨우 이것 뿐인가”라고 질문하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여행을 할 권리’. 과연 여기가 어떠하길래, 우리는 ‘겨우’ 이것 뿐인가라고 말하며 새로운 세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인가.

 

여행기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눠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이른바, 정보 전달 유형. 세계 각국의 신기한 풍물과 다양한 공간들, 음식들, 음악들, 그림들을 소개하며, 그곳에 다다르는 방법들과 즐기는 방법들을 가이드가 된 심정으로 자세하게 소개하는 유형이다. 두 번째는 자기 과시 유형. 이런 유형의 저자들은 대체로, 꽤나 방송을 통해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외우기가 힘든 긴 이름을 가진 음식을, 그보다도 더 긴 이름을 가진 와인을 곁들여 먹고는 그것을 자랑스레 사진을 찍어 실어 놓는다. 마치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음식을 찍어서 올려놓고는 밑에 짤막한 감상을 단 많은 미니홈피들이 그러하듯이, 그 커다란 사진 밑에는 아주 짤막한 감성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지나치게 매끄러운 감상이 달려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유형은 이 김연수의 책 <여행할 권리>와 같은 유형이다. 여행기를 가장한, 사실은 여행기가 아닌 유형. 이런 여행기에서는 어디에 갔고, 무엇을 보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누구를 만났는가, 혹은 누구를 만나러 갔는데 만나지 못했는가가 훨씬 중요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가가 그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여행기에는 글 전체를 꿰뚫는 맥락, 또는 스토리가 있다. 그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와 얽혀진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은 다음의 여행지의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고, 그 마지막에는 그 여행기를 쓴 저자 자신이 있다.

 

이 책에 실린 11곳의 여행기, 아니 정확히 말해서 11가지의 이야기를 꿰뚫는 키워드는 ‘월경’, 즉 국경을 넘는 것이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니 넘지 못하더라도 국경 근처까지 여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국경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물리적인 ‘국경’ - 총을 든 군인이 지키는, 혹은 철조망이 세워져 있는 - 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국경, 또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암묵적인 국경. 따라서 이 국경이라는 말을 ‘한계’라는 말로 바꿔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각의 개인들이 가지는 한계란, 어떻게 만들어져서 각 개인들을 어떻게 억압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공유되고, 어떻게 넘어서야만 하는가. 그들에게 국경을 넘는다는 것, 즉 한계를 넘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책에 실린 몇몇 여행기에서 살펴본다면, 조선족 이춘대 씨에게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향한다는 것은 그에게 깐두부를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경제적 풍요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김연수의 아버지가 해방 후 일본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리얼리티를 버리고 막연한 이상을 찾는 것이었다. 일본어로 소설을 써 아꾸따까와 상 후보가 되었던 조선인 작가 김사량이 1945년 중국 태항산 조선의용군 근거지로 탈출하는 것은 미래의 언어로 글을 쓸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 이상(李箱)이 현해탄을 건너 토오꾜오로 가는 것, 즉 국경 근처까지 가는 것은(아직 해방되기 전이었으므로), 경계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 혹은 경계 바깥의 세상을 갈망하는 것이었다. 김연수의 말을 빌자면, ‘어두운 방, 오들오들 떨면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일’.

이상(李箱)의 죽기 직전 몇 달 간의 행적을 좇는 마지막 여행기를 제외하자면, 김연수는 여행을 간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한국에서 사만부가 채 안 팔리는 소심한 작가 김연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꽤나 긴장하지만, 결국 그가 마지막에 얻는 깨달음은 하나인 것 같다. 그 사람들이라고 별 것 없다는 것. ‘시차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나이차가 있을 뿐이었다’는 것. 참 별 것도 아닌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역설적인 것은 이는 우리가 국경을 넘어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혹은 국경 근처에 가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오직 질문하고 여행할 권리만이’. 국경을 넘는다는 것, 혹은 이상과 김수영과 같이 ‘국경을 넘어보지 못한 몸으로 월경’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내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내가 할 수 없는 것, 그러면서도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일. 그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아마도 김연수가 명쾌하게 지적한 바대로 최소한의 나를 확인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김연수의 ‘공항의 우화’는 완성되는 것이다.

여권에는 나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만 기재돼 있다. 이름과 국적과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 직장에서의 평판은 어떤지, 가족들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따위는 불필요하다. (중략)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느 시공간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최소한의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우화처럼 느껴진다. 거기에는 치명적인 진실이 있다. 공항을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는 그저 여권에 적혀 있는 생물학적인 존재,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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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지음 | 창비 펴냄
소설가 김연수, 그가 들려주는 길에서 만난 사람과 문학 이야기! 작가 김연수가 1999년 도쿄부터 2007년 미국의 버클리까지, 국경과 경계를 넘어 길 위에서 만나는 문학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쓴 산문집. 계간 『한국문학』에 2004년 겨울부터 2007년 가을호까지 연재했던 산문을 중심으로 묶은 이 책은, 생생한 여행 현장과 현지인들의 삶의 기록, 문화적 차이와 문학적 고민을 재기넘치게 풀어놓은 12편의 글들이 수록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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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I, 진중권

The Book | 2008. 4. 28. 22:00 | Posted by 맥거핀.

한국사, 세계사, 음악사, 미술사, 문학사...대부분의 사람들이 ‘-사(史)’로 끝나는 책에 가지는 공통적인 선입견이 있다. 책에는 수없이 많은 인물들과 사건들과 년도들이 나올 것이며, 그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과 년도들은 종국에는 우리를 매우 지치게 만들 것이라는 점. 하기는 이것은 그간 우리나라의 수많은 교육에서 행해온 방식이기도 하다. 역사 그 자체를 다루는 국사와 세계사 시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어라는 과목도 따지고 보면 결국 하나의 문학사를 배우는 과정이며, 물리나 수학 등도 그간 물리학자나 수학자들이 구축해 놓은 거대한 그 나름의 역사들을 배우는 과정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무튼 간에 우리는 1492년과 1592년 중 어느 것이 임진왜란이고, 어느 것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인지 고등학교 이후로 내내 헷갈려하며, 여전히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 <서양미술사 I>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역시 마찬가지로 겁이 더럭 났다. 이 책에는 또 얼마나 많은 년도들과 작가들과 작품들이 출현하여 머리를 아프게 할 것인가.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단지 진중권의 ‘말빨’ 때문이었다. 그가 여러 지면이나 방송에서 보여주는 현란한 말솜씨를 또 여기서는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그는 복잡하고 고루한 이야기들을 또 어떤 방법을 써서 가공하여 들려 줄 것인가. 그리고 그런 나의 기대는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이 책은 각 장을 시대 별로 분류하면서도 교묘하게 시대별 분류가 낳을 수 있는 지루함을 피해간다. 즉 언뜻 보면, 1장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미술을 다루고, 2장은 중세의 예술을 다루는 식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 책에서는 그러한 표면상의 시대구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이 책에서 각 장을 구별하는 것은 미술의 근원적인 요소이다. 즉 미술의 근본 요소인 ‘형태’를 1장에서 다루고, 또 다른 근본 요소인 ‘색채’를 2장에서 다루고, 다른 요소인 ‘공간에 대한 투시법’을 3장에서 5장까지 다루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서술이 시대 구분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진중권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미술의 각각 원리들의 발전이 곧 서양미술의 발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형태를 구상하고 그것의 색을 생각하고, 그 형태를 공간에 배치하듯이, 서양 미술은 인체의 적절한 비례 묘사를 중시했던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의 미술에서부터, 초감각적 빛(색채)을 중시했던 중세의 예술, 그리고 자연과 공간의 재현을 중시했던 르네상스의 예술로 발전해나가는 식이었고, 결국 이 자체가 미술의 역사인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단순한 시대구분을 놓고 서술하는 방식을 벗어남으로써 역사 서술에서 독자들이 가질 수 있는 지루함의 함정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각 장을 형태, 색채, 공간, 양식의 변화, 비평 등 하나의 소주제들로 통일성 있게 이끌어갈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동시에 위에서 말했듯이 ‘서양미술사’라는 큰 흐름도 놓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구성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를 의도적으로 각 장을 하나의 중요한 미술사의 문헌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도 있다. 즉 1장에서는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논문을 토대로, 각 시대와 문화가 인체의 묘사에 각각 어떤 비례를 사용했는지를 고찰한다면, 2장에서는 로사리오 아순토의 저서를 토대로 미와 예술에 대한 중세인의 생각을 살펴본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은 12장으로 이루어진 서양미술사임과 동시에 12권의 논문(저서)을 효과적으로 재구성한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공시성과 통시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하다 보면 이러한 구성이 갖는 단점이 생길 수 있다. 12개의 주제를 12권의 논문을 통해서 살펴보다 보니 책이 어려워지고 방대해지기가 쉬운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생각 외로 상당히 쉽다. 미술에 대한 문외한인 나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유명한지 처음 알았다;) 쉽게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을 정도다. 아마도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효과를 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나는 각각의 내용을 실제의 작품을 놓고 설명하듯이 서술하고 있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자 ○○○의 이 작품을 보자”는 식의 문장이 매우 많이 나온다. 용어나 설명이 어려워도 대부분 그림을 보다보면 이해되는 부분이 많다. 또 하나는 문장력이다. 진중권 씨의 인터뷰 기사 등을 자주 보는데, 그 때마다 내용 자체를 떠나서 비유를 써서 설명하는 능력이나, 주어와 서술어의 일치, 조리 있게 문장을 끊어서 말하는 능력 등에 감탄할 때가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런 ‘화술’이 ‘문장력’으로 어느 정도 살아나는 느낌이다. (아무리 쉬운 내용도 문장이 엉망이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와 반대로 아무리 어려운 내용도 문장이 정확하고 깔끔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예전의 서양 철학 책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용 자체가 난해하기도 하려니와, 엄청나게 난삽한 번역 문장들이 한 몫을 했다면 내가 지나치게 말하는 것일까.)

 

361페이지로 이루어진 17000원의 책. 책의 가격을 단순히 페이지와 가격의 비례로 따질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비싸다. 그러나 비싼 만큼 값어치가 있고, 게다가 모든 그림은 올 컬러다.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ps. 다만 몇몇 오기나 이상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165페이지의 표에서 ‘해석의 교정원리’를 다루는 부분을 보면, I과 III이 모두 똑같이 ‘양식사’로 되어 있는데, 책의 내용상으로 보면 III에는 ‘상징사’가 들어가는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330페이지의 그림 18은 내용상으로 보면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이 아니라 ‘앵그르’의 그림이 맞는 것 같다.

서양 미술사. 1 상세보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예술 감각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술 이야기! 미학의 시각으로 보는 서양 미술사! 미학의 눈으로 읽는 고전 예술의 세계『서양 미술사 1』. 《미학 오디세이》로 잘 알려진 진중권이 이번에는 미학의 눈을 통해 보는 서양의 고전 예술을 소개한다. 이 책은 시간적 흐름에 따라 소개하던 여느 서양 미술사 도서를 벗어나 '서양미술의 원리'와 '서양미술의 역사'를 하나로 묶어낸 것이 특징이다. 서양미술의 원리를 그 시대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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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The Book | 2008. 3. 19. 22:20 | Posted by 맥거핀.

1.

‘소설’이라는 말에 대하여 여러 그 기원에 대해 논의들이 있었겠지만, 단순히 그저 축자적으로 해석하여 ‘작은 이야기’라고 보자면, 소설은 누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 혹은 자신이 머리속에서 만들어낸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던 것에서 시작하였으며,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자신의 맘에 들지 않은 부분은 골라내어 다른 이야기로 대체하여 점점 살을 붙여 나가 하나의 틀에 잡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허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라 함은 그 소설의 효용에 대한 것이다. 그 이야기가 사실에 기초한 것이든, 혹은 정교하게 축조된 허구이든 간에, 그 소설은 듣는 사람에게 어떤 즐거움을, 혹은 어떤 깨달음을, 혹은 어떤 정신적 고양을 주는 데에 그 일차원적 효용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역시도,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주는 데에서 느끼는 정신적인 쾌감, 이야기를 내려놓음에서 느끼는 안도감,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것을 주었다는 만족감 등이 복합된 또 다른 효용을 가지게 될 것이다. 혹은 어쩌면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누군가와 누군가가 연결되었다는 것, 그 자체가 어쩌면 이야기의 가장 큰 효용일지도 모른다.

2.

김연수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1990년대 초 불안한 시국에서 살던 운동권 대학생인 ‘나’의 이야기를 전반부에는 여자친구인 ‘정민’과의 연애담을 중심으로 후반부에는 그가 대학생 예비대표로서 북한에 입국하라는 지령을 받고 독일에 건너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 및 그가 겪게 되는 이야기, 특히 그 중에서도 그가 비디오로서 그리고 나중에는 실물로서 만나게 되는 ‘이길용(강시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큰 흐름 속에서 ‘나’의 할아버지 이야기, ‘정민’의 삼촌 이야기, 독일에서 만나게 되는 ‘이길용’, ‘레이’, ‘헬무트 베르크’ 그리고 그 외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다.

여기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각각 저마다의 특징과 저마다의 다른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정민’과 ‘나’는 ‘더이상 이야기가 하고 싶지 않게 된다면, 우리 둘의 관계는 그 순간 끊어질 것 같’아서 어떻게든 자신의 이야기를, 혹은 자신 주위의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애쓰며, 이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길용’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종내에는 서로 뒤엉켜 서로의 존재를 입증하는 도구가 된다. 즉 나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이야기부터 먼저 받아들여야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즉 누군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그 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야기 속에서 ‘나’의 할아버지와 '이길용'의 할아버지가 연결되고, 또 ‘정민’의 삼촌이 연결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현재의 ‘나’의 존재를, ‘정민’의 존재를, ‘이길용’의 존재를 증명하는 도구가 된다.

3.

소설이 앞에서 말한대로 ‘작은 이야기’라고 한다면, 소설은 줄곧 거대담론에 맞서서 사람들 각각의 작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애써왔다. 거대담론 속에서는 ‘1987년 5월에 몇 만의 군중이...’라는 식으로 숫자로만 모든 것을 기록하지만, 그 몇 만은 각각의 이야기를 가지고 그 거리로 나섰으며, 그 각각의 이야기들은 또한 무수한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는 것이다. 여기 소설 속에 있는 ‘나’, ‘이길용’, ‘정민’도 그러한 역사의 거대담론 속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숫자로 밖에 기록되지 않을 그런 일들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에게, 그리고 소설을 읽는 우리들에게 말을 건다.

다른 누군가는 절대 알지 못할 -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포장마차에서 이야기하던 사람들처럼 - 오로지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러한 이야기들로 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결코 그 자신으로서는 가치가 없다. 이 이야기들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들을 증명하며,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를 하는 그 존재를 증명해주며, 그것을 다른 말로 말하자면 거대담론 속에서 인간이 ‘살아남게’ 해주기 때문이다.

4.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들은 거짓일는지도 모른다, 아니, ‘이 소설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허구이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소설의 모든 작중 화자들이 자신의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 이야기를 하는 상대방이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며,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끼워맞춰’ 말이 되는 것으로 만들고 말았을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그들은 거대한 시대에 거대한 힘에 맞서서,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작가 김연수가 의도한 바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거대한 어떤 것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 그 자신의 이야기를 동력 삼아, 살아나갈 것. 거대한 어떤 것을 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가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거대한 세계가 될 것이라는 점 말이다.

5.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거대한 이야기, 거대한 힘이 몰락했다고 말해지는 지금 이 세기. 이 세기에서 개인은 이제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야기들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야기들은 분절되고, 개인은 자신의 존재들을 증명할 기회를 잃고 있다. 왜냐하면 서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 할 뿐, 이야기라는 것은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듣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만난 것이 반갑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네 얘기를 해봐. 들어줄테니. 이것이 바로 개인들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작가의 답이다.


(전략)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부분에는 ‘인간의 수명이 70살이라고 할 때, 우리는’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글이 있었어.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

인간의 수명이 70살이라고 할 때, 우리는

1. 38300리터의 소변을 본다.

2. 127500번의 꿈을 꾼다.

3. 2700000000번 심장이 뛴다.

4. 3000번 운다.

5. 400개의 난자를 생산한다.

6. 400000000000개의 정자를 생산한다.

7. 540000번 웃는다.

8. 50톤의 음식을 먹는다.

9. 333000000번 눈을 깜빡인다.

10. 49200리터의 물을 마신다.

11. 563킬로미터의 머리카락이 자란다.

12. 37미터의 손톱이 자란다.

13. 331000000리터의 피를 심장에서 뿜어낸다.

할아버지는 4번과 7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손수 종이에다 계산을 했어. 이번에는 곱하기 문제가 아니라 나누기 문제였어.

540000÷3000=180

“하루에 사십이해일천이백만경 번 이산화탄소를 배출해내는 인간들로 가득 찬 이 지구에서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이 180이라는 숫자 때문이다. 인간만이 같은 종을 죽이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만이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180이라는 이 숫자는 이런 뜻이다. 앞으로 네게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테고, 그중에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이 일어나기도 할 텐데, 그럼에도 너라는 종(種)은 백팔십 번 웃은 뒤에 한 번 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할아버지가 말했어.

“그러니 네가 유명한 작가가 된다면 우리 인간이란 백팔십 번 웃은 뒤에야 겨우 한 번 울 수 있게 만들어진 동물이라는 사실에 대해 써야만 하는 거야.”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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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펴냄
2005년 겨울부터 2007년 봄까지 계간 「문학동네」에 연재했던 장편소설을 한 권으로 모아 엮은 김연수 장편소설. 1990년대의 굵직한 사건들을 학생회의 간부로 있는 작중화자의 눈으로, 한 발짝 물러나서 바라보고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역사적 기록들의 틈새에 처박힌 개인의 진실을 파고들어, 역설적으로 '밝힐 수 없는 공동체'의 내면을 밝히고 있다. 소설에는 1990년대를 살았지만 그 주변부에 내팽겨져 있던 수많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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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惡人), 요시다 슈이치

The Book | 2008. 3. 19. 15:23 | Posted by 맥거핀.

   
   그런게 일종의 트렌드였다. 폼나게 지하철에서 일본 소설을 한 권 꺼내서 읽는 것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각수의 꿈>이니, 시마다 마사히코의 <악마를 위하여> 같은 그런 일본 소설들 말이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니, 스탕달의 <적과 흑>을 들고 있는 것도 꽤나 폼나 보이기는 하나 너무 고루해보이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들고 있자니 얼치기 운동권 같고, 그렇다고 무협소설이나 판타지소설은 너무 경박해보이고. 그래서 적당히 가볍고, 또한 적당히 무게 있어 보이는 그런 조건에 충족되는 소설들로는 일본 소설들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걸까. 그 당시(1990년대 말) 도서관에는 일본 소설 코너에는 은근히 사람이 붐볐고, 마음먹고 도서관에 임무 수행을 떠났다가는 쓸쓸히 빈 손으로 돌아오는 패자들이 생겨나곤 했다. 아무튼 그 때부터 내 독서에는 하나의 패턴이 생겼다. 조금 무겁다 싶은 것을 하나 읽은 후에는 중간중간 일본 소설들을 하나씩 끼워 넣어 읽는 것이다. 그리고 적당히 자만심에 빠져서 ‘자기를 동정하는 것은 가장 비열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따위의 문구들을 나우누리 자기소개란에 올려놓고 슬며시 웃는 것이다.

   그런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무게 있음- 이것은 오늘 날의 한국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일본 소설 에도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재미있기는 하되, 너무 무겁지 말 것, 그러면서도 너무 경박하지는 말 것. 그것이 오늘날 한국에서 잘 팔리는 오쿠다 히데오니, 요시모토 바나나니, 히라노 게이치로니 하는 작가들의 하나의 공통된 흐름이 아니겠는가. (물론 여기에서 또 일군의 경향을 이루고 있는 추리물이나 에쿠니 가오리 류의 일종의 로맨스 소설은 제외하고 말이다.) 여기에 또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방금 다 읽은 <악인>의 작가 요시다 슈이치다.

   이 소설 <악인>은 한 여자에게 일어난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그 살인사건에 휘말린 그녀 주위의 친구들, 가족들, 그리고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 그 남자들이 만났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과연 악(惡)이란 무엇인가’를 좇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범인이 누구인가를 밝히고자 하는 추리물이나, 범인을 밝히면서 긴박함을 강조하는 스릴러물은 아니다. 단지 이 소설은 사건의 전개를 조용히 따라가며, 우리 인간에게 악의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악의란 것을 가지게 되며, 그 악의에서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를 등장인물을 따라가며 영화를 찍듯, 그리고 등장인물이 사건의 경위를 경찰에게 설명하 듯, 조용히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일단 먼저 느끼게 된 것은, 때로는 그 묘사가 지나쳐서, 우리에게 너무도 친절하게 답을 알려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면, 가끔 어쩌다가 낮에 집에 있게 되면, 청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로 드라마가 방영될 때가 있다. 그 때 난감한 것은 이러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남녀주인공이 서로를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고 치자.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화면을 보고 그냥 ‘느끼면’ 된다. 그러나 화면해설 방송은 ‘남녀주인공이 서로를 바라봅니다’라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서로를 적의를 가지고 바라보는지, 애틋하게 바라보는지, 그냥 한 번 무심히 본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oo이 oo을 애틋하게 바라본다. oo도 oo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이렇게 설명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느낌이 그런 것이라고나 할까. 그저 이 정도만 설명해주어도 좋을 텐데 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만다. 즉 묘사와 설명의 중간에서 무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이 무리한 줄타기가 자꾸 엇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솔직히 ‘독자의 사유가 선과 악을 판별하도록 남겨두는 것이다’라는 옮긴이의 말은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지를 보여주는 것 자체도 비교적 명확할 뿐 아니라, 혹 그것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드라마에서나 보여주는 어떤 트렌드적인 경향에 길들여진(혹은 지나치게 패턴화된) 선과 악이기 때문이다. (즉 이는 이미 많은 독자들에게 너무 익숙한 이야기 구조이며, 일견 복잡한 듯하나 너무 평면적인 주인공들이라는 것이다. 이미 시작부터 그런 기미가 조금 보여지고 있기도 하다. 부잣집 도련님과 어머니가 항구에 자기를 버리고 간 청년. 뭐가 느껴지는가?)

   여기에서 다른 많은 일본 소설들과 같이 이 소설도 같은 한계점에 머무른다. 잘 짜여진 드라마 한편을 보긴 하였고, 잘 짜여진 좋은 이야기들과 좋은 대사들도 있으나, 일시적인 감정 그 이상의 무게를 주지는 않는 것. TV를 끄고 나면, 그 불우한 청년이 어쩌다 실수로 한 사람을 죽였으나 사실 그는 나쁜놈이 아니라는 것, 실제로 나쁜 놈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산’이 노론 척신들의 반발을 잘 무마하건 말건,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이라는 점과 동일하듯이 말이다. 좋은 소설이 가지는 공통점인 일시적인 감정의 고양 그 이상의 어떠한 것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 나의 삶에의 어떤 것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는 이는 우리 독자들이 져야 할 책임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간 독자들이 요구해온 일본 소설의 경향이 그런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것이었으니, 출판사도 그런 작가들의 책을 중심으로, 또 ‘아쿠타가와상’이니, ‘나오키상’이니 그런 적당히 무게감 있는 수상작들을 중심으로 번역하고 출판해온 것일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분명히 나에게도 일정 부분은 책임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분명히 번역문학이라는 것의 태생적 한계가 존재할는지도 모르겠다. 이 번역문학이라는 것은 결국 번역가의 문장을 읽는 것이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레이먼드 카버’의 간결한 문장을 읽는 것이 아주 좋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에 대한 것은 기회가 있으면 나중에.)

악인 상세보기
요시다 슈이치 지음 | 은행나무 펴냄
그 사람, 악인인거죠? <랜드마크>, <첫사랑 온천>의 작가, 요시다 슈이치 신작소설. 일본 아사히신문에 연재된 작품으로, 인간 심연의 '악의'를 날카롭게 파헤친 감성 미스터리이다. 저자는 '선과 악', '강자와 약자'라고 하는 굵직한 테마를 선명한 묘사화 독특한 기법으로 그려내며, 하나의 살인사건으로 시작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후쿠오카와 사가를 연결하는 263번 국도의 미쓰세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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