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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에 해당되는 글 2

  1. 2008.05.16 타락천사(Fallen Angels), 왕가위
  2. 2008.04.30 중경삼림 (Chungking Express), 왕가위
 

타락천사(Fallen Angels), 왕가위

Ending Credit | 2008. 5. 16. 00:45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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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천사>는 1997년 홍콩반환에 관한 더없는 엘레지일 것입니다. 천사들이 떠나가 버린 도시, 아침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도시, 홍콩. 저는 이 영화가 홍콩영화의 마지막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홍콩영화는 끝났습니다. 홍콩을 무대로 한 중국영화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아마도 또다른 일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이 코멘터리는 끝난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이어지고, 스피커에서는 정성일 평론가가 홍콩의 유명 라디오 시그널 음악이었다고 소개했던 ‘Only You’가 이어진다. 그리고 나는 지친 상태로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 즈음 플레이어의 정지 버튼을 누른다.

정성일 평론가의 코멘터리를 듣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는 1997년 홍콩반환의 의미부터, 왕가위에게 부끄럽게도 물어보았다는 한국어간판의 의미까지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것만 듣고 있을 틈이 없다. 그와 동시에 나는 눈으로는 화면을 바라보고, 머리 속으로는 옛날 일들을 생각하고, 자막을 읽고, 자리를 고쳐 앉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정성일 평론가는 이 모든 이야기를 적어놓고 읽는 것일까, 머리 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일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 철자를 잘못 읽는 류의 실수를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이 이야기를 적어놓고 읽는 게 틀림없다는 섣부른 판단을 내린다.

 

도대체 평론가의 코멘터리를 듣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마도 나에 있어서는 그게 두 가지로 기능을 하는 것 같다. 하나는 일종의 정답을 맞춰보는 기분이다. 영어듣기평가가 끝나고, 뒤에 해설지문을 보며,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처럼, 나는 그가 한 씬에서 구술한 해설이 나의 애초의 생각과 얼마나 들어맞는지를 가늠한다. 그리고 혹여 운 좋게 비슷하기라도 하면, 잠시 우쭐한 기분에 빠져 다음의 해설을 놓쳐 버린다. 그리고 또 하나는 - 이게 더 큰 이유라고 말할 수 있는데 - 단지 목소리 때문이다. 물론 정성일 평론가에만 해당되는 것이지만, 이 목소리는 묘하게 중독성이 있다. 어딘지 어눌하고, 종종 발음도 틀리지만, 어딘지 사람을 잡아끄는 목소리. 목소리에도 진정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 있다면, 이 목소리는 진정성이라는 게 있다.

물론 이것은 오류이고, 허구다. 목소리만 가지고 진정성을 판단할 수는 없다. 단지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빚어낸 허구일 뿐이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그의 글을 연상시키고, 그 글에서 느껴지던 한 영화에 대한 절절한 애정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이미 이 코멘터리는 이동진 평론가 등의 코멘터리와는 이미 다른 지점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우열을 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이동진 평론가의 코멘터리가 분석적이고, 학술적인 어떤 것이 느껴진다면, 정성일 평론가의 코멘터리는 따스하고, 감정적이고, 설득적인 어떠한 것이 느껴진다. 전자의 코멘터리가 관객들에게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공하는 것, 따라서 영화가 새롭게 분석되고, 다른 어떤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어떠한 지점을 제공한다면, 후자의 코멘터리는 관객들에게 영화감상의 폭과 깊이를 넓게 하여 관객들에게 영화에 대해 새로운 감동을 제공한다. 두 가지 모두 영화를 한 번 더 보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 <타락천사>의 코멘터리는 내가 잊고 있었던 새로운 두 가지 사실을 환기시킨다. 하나는 이 영화는 정성일 평론가의 마지막 말대로 1997년 홍콩반환 직전의 홍콩의 분위기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사람들과, 떠나야 함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남는 사람들. 이곳에 살아남아 삶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망기타(忘記他)’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카메라가 말해준다. ‘그대를 잊겠다’는 가사가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는 것, 그것 자체가 아직 떠나간 사람을 잊지 못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찍지 말라고 화내는 자신을 찍은 화면을 아버지가 몰래 보면서 웃고 있고, 그것을 다시 하지무(금성무)가 몰래 보고 있는 장면. 이 장면에 흐르는 하지무의 독백은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독백은 필연적으로 아버지가 이미 세상에 없는 어떤 후일의 시점에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화면이란 결국 최종적으로는 관객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배경이 있고, 배우가 있고, 그 배우들이 아무리 움직이고 있어도 모든 화면이란 그것을 밖에서 바라보는 관객이 있어야만 가능해질 수 있다는 점.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유일하다는 점. “이 장면은 투샷으로 찍기는 했지만,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향해서 앉아있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은 한 번도 마주보지 않습니다. 혹은, 청부업자는 그에게 얼굴을 돌리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의 표정을 모두 볼 수 있는 사람은 영화를 보는 우리들 뿐입니다.....그 때 이 영화는 영화 바깥에 있는 우리들을 포함해서 영화를 진행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화란 결국 ‘관객들에게 말걸기’라는 사실을 다시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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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Chungking Express), 왕가위

Ending Credit | 2008. 4. 30. 01:23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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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의 개봉일은 95년 9월 2일이었다. 물론 나는 이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겨우 날짜를 알았을 뿐이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개봉일로부터 한참 지나고 아마도 98년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 날짜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날짜를 기억도 못하는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이 영화를 보기 전후의 일들은 꽤나 난삽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와 관련지어서는 하나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학회 사람들과 영화를 보러 갔었다. 영화관에 간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하는 소규모의 영화제였다. 학교는 외대였고, 날짜는...아마도 봄이나 가을이었던 것 같다. 새벽에는 꽤나 추웠으니까. 밤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나는, 야외에 대형의 스크린을 걸어놓고 하는 그런 영화제였다. 말이 영화제였지,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대학의 영화동아리에서 주관하는 작은 행사였었던 것 같다. 거기에 왜 가기로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 학회의 누군가가 외대에 친구가 있었거나, 우연히 PC통신 게시판에서 그런 내용을 보았거나, 우리 학회에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었거나...하는 그런 시덥잖은 이유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다른 기억이 모두 틀렸다고 해도 지금 하나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우리가 매우 화면 가까이에 앉아서 영화를 봤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화면은 매우 컸다는 것이다. 스크린에 배우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 그 배우의 코가 적어도 웅크리고 앉은 나 정도의 크기는 되었으니까. 왜 그렇게 가까이에서 영화를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자리가 없어서였을 수도 있고, 그 곳의 구조가 이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나의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모두 세 편이었는데, 가장 처음에 나온 영화는 롱테이크가 무던히도 반복되는 영화로, 무언가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영화였다. 조금 늦게 도착하여 영화의 줄거리도 전혀 모르는데다가, 바라보는 화면은 곧 나를 지루하게 만들었으므로 꾸벅꾸벅 졸다가 옆의 친구가 옆구리를 찔러 다시 일어나서 보다가, 다시 졸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였다. 아주 훨씬 나중에야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그 영화는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영화가 <하류>였는지, <구멍>이었는지 모르겠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 때문에 지루했던 기억이 있으므로 <구멍>이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미묘한 관계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여 <하류>같기도 하다.

두 번째 영화부터는 비교적 생기를 가지고 졸지 않고 영화를 즐기며 볼 수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같이 갔던 일행 중에 한 친구가 계속 영화를 보며 비명을 질러대는 통에 졸음이 올래야 올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는 나 역시도 지금까지 본 공포영화 중에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그리고 아직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압권 장면 중 하나일 듯한 피바다가 되는 방과 ‘REDRUM’ 그리고,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는, 거대한 스크린에 클로즈업으로 비췄던 잭 니콜슨의 눈빛. (아마도 그 스크린이 과도하게 컸던 것으로 기억되는 것은 클로즈업된 잭 니콜슨의 눈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영화가 끝나고 난 후 다들 너무 공포에 떨어 피곤해진 데다가, 새벽도 꽤 이슥해지는 터라 우리 일행도 자리를 뜰 준비를 하였다. 그러자 영화제 관계자 한 명(아마도 그 동아리 학생 중의 하나인 듯한)이 살짝 다가와 우리를 잡았다. 그리고 미끼를 던졌다. “이 영화도 보고 가세요. 아주 야한 영환데.” 글쎄. 왜 우리를 잡았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많은 관객들이 이미 빠져나갔으므로 우리라도 잡아야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말에 이끌렸는지, 새벽이라 갈 곳도, 갈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정말 많지 않은 관객 속에서 그 날의 마지막 영화이자, 상당히 야하고 상당히 슬픈 영화를 보았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 포르노스타의 등장과 씁쓸한 몰락, 그리고 퇴장. 우리는 초반에는 은밀한 웃음을 교환하며 좋아하다가, 곧 속았다고 생각했고, 종국에는 우리도 역시 씁쓸해졌다. 그리고 슬퍼졌다.

슬퍼서 그랬는지, 아니면 마지막 장면에 쇼킹을 받아서 그랬는지 우리는 그곳을 나오며, 학교 앞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씩을 사서 몰락한 포르노스타 마냥 편의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차가 다니는 시간을 기다리며 나눠 마셨고, 나는 다시 우리 학교 앞까지 와 비디오 방에 가서 이 영화 <중경삼림>을 보다 잠이 들었다. 아마도 다음날 오전 수업을 기다리며 시간이나 때우자는 심산이었겠지만, 학교에서 수업이나 제대로 들었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 영화 <중경삼림>은 어느 날 TV에서 이 영화를 하는 것을 발견하고 비스듬히 누워 볼 때까지 내 기억 속에는 초반부의 임청하의 까만 선글라스와 노란 가발로 기억되거나, 뚝뚝 분절되던 이상한 화면(‘스탭프린팅’이라 불리우는)으로 기억되거나, 차이밍량과 <샤이닝>과 <부기 나이트>와 그저 한 세트로 기억되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을 되새기며 비스듬히 누워서 보다가, 어느 순간 자리에 앉았고, 그 영화가 좋아졌다. 그 후에 나는 이 영화를 주기를 가지고 습관적으로 반복해 보게 되었고, 내 기억 속에서 기억은 다시 <중경삼림>의 내용들과, 그리고 다른 영화들과 합쳐지고 분절되고, 더욱 난삽해져만 갔다.

 

이 모든 기억을 다시 떠올린 이유는 며칠 전 정성일 평론가의 음성해설로 <중경삼림> DVD를 다시 보았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사놓은 DVD인데, 그 동안 이런 음성해설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보게(듣게) 되었다.

정성일 평론가의 목소리는 꽤나 차분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가진 수많은 이야기들을 빨리 청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욕심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음성해설에서 정성일 평론가는 책 한 권으로 내도 될 만한 분량의, 수많은 알려진,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들려주는 동시에, 중간중간 의미 있는 장면을 짚어주는 것 또한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의 배경과 영화의 주제를 다시 되새겨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지만, 영화를 여러 번 본 나도 놓치고 지나갔던 장면들(예를 들어, 영화의 전반부에 왕정문이 가필드 고양이 인형을 안고 가게에서 나오는 장면이라든가)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는 그런 재미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도대체 정성일 평론가는 대본을 써놓고 이 이야기들을 읽어내려 가는 것일까, 아니면 영화를 보면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영화에서 평론가의 음성해설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평론가의 음성해설이란 결국 누군가의 하나의 영화를 본 감상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 되었지, 왜 이것을 본다(듣는다)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난삽한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 것은 정성일 평론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성일 평론가가 해설 중간에 왕가위와 차이밍량을 비교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주문해 놓은 <스틸라이프> DVD가 보고 싶어졌다. 그 DVD에도 정성일 평론가의 음성해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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