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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용 곤충 스카우팅 리포트

The Book | 2011. 4. 18. 22:45 | Posted by 맥거핀.

당신은혼자가아니에요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영미에세이
지은이 조슈아 아바바넬 (함께읽는책,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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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키에르케고르가 알면 썩 좋아하지 않을 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책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는 그 제목이 의미하는 바대로, 지금도 당신의 아주 가까이에서, 혹은 당신의 살 속에서 멋진 성찬을 즐기고 있을 가정용 곤충들을 설명하고 있다. 빈대, 이, 진드기, 파리, 개미, 바퀴벌레, 흡혈진드기 등등의 이 가정용 곤충들은 인간의 거의 모든 부분을 공격하고, 나무를 뜯어먹고, 애완동물의 피를 빨아 마시고, 수많은 2세들을 낳고, 서로서로를 잡아먹기도 하고, 이곳저곳 쉴새없이 뛰어다니면서 소동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우리네 인간들은 사실 그것을 거의 감지하지 못한다. 우리들은 눈에 보일 때마다 그들을 때려잡고, 가끔은 보이지도 않지만 후려치기도 하고, 이상한 가려움증을 느끼면서 손톱 끝으로 긁어내기도 하고, 더이상 못견디면 때로는 '벌레와의 전쟁'을 선포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극히 일부분에 대항하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지만, 우리가 어떤 벌레 한 마리를 우연치 않게 발견한다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 근처에는 그 개체가 분명히 한국시리즈 7차전을 관람하는 인파만큼 북적거리고 있으리라고 장담해도 좋다.

사실 이 책의 제목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보다 그 부제 '가정용 곤충에 관한 은밀한 에세이'는 이 책의 보다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벌레들은 가정용 곤충(Household Bugs)들이다. 그리고 그 '가정용'이라는 말이 함의하는 것처럼 이 책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다. 사실 이 가정용이라는 말이 어떻게 보면 참 웃긴 것이, 어떠한 '가정용 동물(가축)'도 우리에게 그렇게 불러줄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은 그저 우리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그들에게 '가정용'이라는 명찰을 붙이고, 우리 곁에 놓아두고, 우리 멋대로 인간과 가장 친한(!) 동물의 지위를 그들에게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점은 이 '가정용'이라는 말이 '곤충'이라는 말 앞에 붙을 때에, 그 관계는 역전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동물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들은 이번에는 그들이 최대한 우리들에게서 멀어지기를 바란다. 바퀴벌레 구이나 불개미 만두를 좋아하는 몇몇 사람을 빼놓고는, 우리 모두는 그들이 우리 눈에 최대한 띄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곤충들이 철저하게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우리 인간들의 곁에 달라붙어 있다. 그러므로 '가정용 곤충'이라는 말은 사실 어쩌면 다음과 같이, 즉 우리 인간들이 사실은 이 곤충들의 '가정용 숙주'라는 것으로 바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익살스러운 경고문구를 표지에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생물학 서가에 놓일 책이 아닙니다. 당신과 한집을 쓰는 '작은 가족'에 대한 은밀한 에세이입니다.' 위 경고문구가 말하는 바대로, 이 책은 생물학적 도감이라기 보다는, 위트를 담은 에세이에 가깝다. 예를 들어 각 곤충의 소개 말미에는 이 곤충들을 퇴치하기 위한 방법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소개방법을 그대로 따라하다가는 당신은 아마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러나 이 책의 방법들을 탓할 것도 못되는 것이, 기생생물을 퇴치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그 숙주(바로 당신!)를 없애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책의 내용들을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일종의 호러 영화(ex. 에일리언)를 보는 마음가짐으로 그저 나와는 먼 일이라고 상상하고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에일리언이 당장 내일 지구를 습격할 것이 명백하다면 우리가 그 영화를 즐길 수 있겠는가. 그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이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처럼, 우리가 이러한 일이 지금 우리 곁에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이 책을 훨씬 즐겁게 즐기는 방법이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는 내내 TV에서 하는 <스펀지>를 보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프로그램을 썩 좋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도대체 그 정보들이 우리에게 유용한 것인지 전혀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병 속에 있는 달걀을 뒤집는 방법을 알 수 있다고 해서, 우리 삶의 뭔가가 달라질까. 잘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가정용 곤충들의 아주 세부적인 생김새와 그들이 어떤 먹이를 좋아하는지 안다고 해서 우리가 이 곤충들과의 동거를 더 잘해낼 수 있을까. 역시나 잘 모르겠다. 어차피 그들과 같이 살아가야만 한다면, 어쩌면 모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덧.

이건 조금 다른 얘긴데, 요새 프로야구 스카우팅 책자를 열심히 보고 있다. 게임을 자주 볼 수 없으니, 그 대안으로 그렇다면 책이라도 사서 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보고 있는데, 꽤나 재미있다. 그래서 그런 건지 몰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왠지 이 책은 가정용 곤충들의 스카우팅 리포트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특성, 습관, 그리고 상세한 사진, 그리고 (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와 같이) 특정의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일종의 백과사전적이라는 점에서. 그래서 그저 재미로 적어보는 이 책에 나온 가정용 곤충들의 스카우팅 리포트. 인간이라는 투수를 상대로 한 타자 편이다. 컨택(어떤 범위에 나타나는가), 장타력(얼마나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가), 타석에서의 끈질김(얼마나 퇴치하기 어려운가)라는 관점에서.

빈대: 전천후로 타구를 보낼 수 있는 스프레이 히터이다. 장타가 좋은 편은 아니나, 경기 후반 치명적인 뜬금포를 종종 터뜨린다. 타석에서 아주 끈질기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볼을 골라내어 1루로 출루할 수 있다. 발도 빠르니, 전형적인 1번타자 유형.

이: 투수가 비듬을 발라 던지는 스핏볼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타격이 좋은 편이라 보기 힘들고 장타력도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다. 타석에서도 볼을 길게 보지 못하고 쉽게 휘두르는 스타일. 맞춰잡는 투구가 필요하다.

집먼지진드기: 이와 마찬가지로 비듬스핏볼을 아주 좋아한다. 장타력은 별로 없으나 타석에서 선구안이 아주 좋아, 낮은 타율에서도 높은 출루율을 자랑한다.

모낭진드기와 옴진드기:  무시무시한 생김새로 타석에서 투수에게 위압감을 주며, 넓은 컨택 범위와 한 시즌 20개 이상의 홈런을 칠 수 있는 장타력을 소유하고 있다. 전형적인 중거리 타자 유형.

서양좀벌레와 집게벌레: 언더핸드와 같은 특정 유형의 투수(책)에만 강점을 가지고 있다. 타석에서도 상당히 인내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니 경기 후반 대타로 사용하면 좋다.

파리: 투수의 구질이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좋은 타격을 자랑하는 특이한 유형의 타자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플라이볼을 많이 양산하는 타자이며, 결승타를 유독 많이 쳐낸다. 실투는 아주 치명적일 수 있다.

개미: 투수의 공보다는 투구시의 습관이나 버릇 등을 관찰하고, 그것을 타격으로 연결해낸다. 컨택이 좋지는 않으나, 맞았다 하면 장타이다. 타석에서도 아주 끈질긴 편이며, 연습벌레, 일명 '기계'로 알려져 있다. 집안 대대로 야구를 해온 야구 가문.

바퀴벌레: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는 가정용 곤충계의 이대호(심지어 이대호와 체형도 비슷하다). 투수에게 아주 공포스러운 타자로 각인이 되어 있으며, 뛰어난 선구안을 자랑하며, 어떤 투수의 어떤 볼도 가리지 않는다. 컨택, 장타 모두 뛰어난 타자로 지난 수만년간 좋은 시즌을 이어오고 있으며, 이번 시즌도 당연히 기대된다.

흰개미: 서양좀벌레와 같이 특정 유형의 투수(나무)에만 강하다. 역시 특정 유형의 투수가 등판했을 때 기용할 수 있는 타자.

벼룩과 흡혈진드기: 넓은 컨택 범위를 가지고 있으며, 거의 모든 구질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 힘이 아주 좋아 단타보다는 주로 장타를 생산하는 유형. 벼룩의 경우 넓은 외야수비를 자랑하는데, 특기는 펜스 위로 점프하여 홈런 타구를 걷어내는 것. 일명 '홈런 도둑'.

의류해충과 부엌해충: 타격보다는 대주자, 대수비 요원으로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 단, 작전 수행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는데, 감독의 지시를 거의 안듣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게임에 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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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대칭, 완벽하지 않은 대칭

The Book | 2011. 3. 29. 22:42 | Posted by 맥거핀.

대칭자연의패턴속으로떠나는여행
카테고리 과학 > 교양과학 > 교양수학/수학이야기
지은이 마커스 드 사토이 (승산,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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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흐 이전의 침묵>에는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는 (말그대로 사람없이 혼자 연주하는) 자동피아노가 나온다. 그 자동피아노는 긴 두루마리에 일련의 천공(穿孔)을 가진 악보로 연주되는데, 바흐의 음악도 음악이지만, 그 악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였다. 흰종이에 구멍이 뚫려 있을 뿐인데, 그 구멍들의 놀라운 대칭적인 배열이란. 이 책 <대칭>을 보면서 그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았다. 바흐의 음악에서 수학적인 대칭은 어떻게 활용되는가. 이 책 <대칭>은 그 대칭의 세계를 수학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차분히 들려준다.

우리가 수학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수학의 세계는 일종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집합과 명제로부터 시작하는 고등학교 수학 과정은 그렇게 짜여진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수학에서는 전 단계를 모르고서는 다음의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인수분해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다음의 이차방정식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점핑은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아주 일부의 천재에게는 허용된다). 갑자기 책의 중간을 펴서 그것을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수학의 세계에서는 당연히 낙오자들이 생긴다.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알지만) 어느 순간 수학의 끈을 놓아버린다. 수학은 일종의 마라톤 랠리와 같다. 가장 기본적이고 정석적인 인내심을 요구한다. 수학은 지름길을 보여주지도 않고, 중간에 자동차를 타고 다음의 코스로 이동하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마지막 완주의 환호를 느끼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뛰는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논의를 보면서도 그런 인상을 받았다. 처음 가장 기본적인 회전 대칭과 반사 대칭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알람브라 궁전의 17개의 서로 다른 대칭을 거쳐, 고차방정식의 해들과 그 속에 담겨진 대칭들, 거의 관계가 없어 보이는 대수들과 기하와의 환상적인 연결을 지나, 마침내 가장 근본적인 대칭의 언어인 군(group)으로 대칭을 말하고, 그 대칭의 지도에 셀 수도 없는 큰 대칭을 가진 몬스터 대칭을 그려넣기까지의 여정은 일종의 작은 마라톤 게임을 닮았다. 그러나 오해는 마시라. 이 마라톤은 별로 학생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수학 선생님의 인솔 하에 몇 명이 낙오되어도 상관없이, 그저 앞만 보고 나아가는 그런 서바이벌 마라톤 게임은 아니다. 저자 마커스 드 사토이는 때로 잠깐 앉아서 휴식을 할 것을 권하기도 하고, 뛰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주위의 풍경에 집중하게 하면서 독자들을 마지막 도착점까지 끝까지 데리고 간다. 아니, 아예 뛰고 싶지 않은 독자는 뛰지 않아도 된다. 중간중간 뛰어야만 하는 부분들을 건너 뛰고도, 즉 천천히 걸으면서 주위 풍경만 둘러보아도 볼 것은 아주 많다. 그 속에는 그간 힘든 여정에 기꺼이 뛰어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수학자들의 드라마가 있고, 수학적 논의보다 기차시간표에 열광하고, 술의 도수에서도 소수를 찾는 유머가 있고, 바흐의 음악이 있고, 에셔의 그림이 있다. 밑의 인용문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 책에서 몇 가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다른 부분이 뒤얽혀 있기 때문에, 이 책 전체의 재미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현재로서는 설사 그 논문에 어떤 오류나 결함이 남아 있더라도 그리 치명적이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스미스는 '증명의 신뢰성은, 증명의 많은 부분들이 극도로 병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나온다. 추리 소설 같은 것에서 논리적 결함이 나오면 작품의 전체 구조가 완전히 망가지는 일과는 다른 문제다.'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증명은 수많은 실들로 뒤얽혀 있기 때문에 그중 하나를 뽑아낸다 해서 전체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p. 433)


인용한 문장에서 말하는 그 논문이란, '아틀라스'라고 불리는 대칭군들을 기록한 거대한 지도가 이제 완결된 것임을 말하는 논문을 말한다. 수학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 지도에 새로운 대칭군들을 추가하기 위하여 애썼다. 그리고 새로운 대칭군이 발견되면,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지도에 기록하였다. 그렇다. 이것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이는 마치 새로운 별을 발견하는 것과 닮았다. 사람들은 새로운 별을 발견하고는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거대한 별의 지도에 그것을 추가하였다. 별은 거기에 이미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대칭군도 거기에 이미 있었다. 수학자들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지루한 계산들로 그것을 끄집어내기 전까지 그저 묻혀 있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수학자들은 그 지도에 이제 새롭게 더 추가할 대칭군이 없음을 밝히려 한다. 그러나 이 책 <대칭>의 마지막 한 장까지 이 논의는 완결되지 않는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언제 어디서 새로운 군이 추가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더 추가될 수 없음을 증명한 논문에 오류가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남아 있다. 어느 순간 우주의 반대편에서 외계인이 날아올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이 책에 가장 인상을 받은 순간은, 대칭을 둘러싼 전체적인 논의보다도, 수학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이다. 대칭군을 분류하는 것이 이제 거의 끝났음을, 그 분류의 지도(아틀라스)에 더 이상 기록할 것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도, 일말의 가능성을 남겨놓는 앞의 태도도 그러하지만, 저자 마커스 드 사토이의 자신의 연구를 대하는 태도도 그렇다. 대칭의 한 부분을 파고드는 저자의 연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난점이 있다. 저자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하지만, 그는 그 난점을 인정하고, 그대로 그 연구를 발표하려 한다. 저자가 말했듯이 모든 수학자들은 자신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놓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아주 극소수의 수학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이 책에서 보여지는 갈루아와 아벨 등의 많은 수학자들의 드라마에서 말해지듯이, 한 사람의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가 일종의 완결을 이루기를 꿈꾸지만, 그것은 완결로 가는 하나의 여정일 뿐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새로운 시작에 가깝다. 완벽함이란 불가능하다. 어떤 증명은, 그 증명 자체로는 완벽할 수 있어도, 수학이라는 거대한 지도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그 완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어떤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 책 <대칭>은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것들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곳에는 완벽하지 않은, 아니 결코 완벽해질 수 없는 것들이 숨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조금 인용하자면, 페르시아의 직공은 완벽한 대칭 문양을 가진 직물을 만들면서도 한 부분을 무너뜨려 그것이 완벽해지지 않도록 했다. 일본의 건축가들은 대칭된 건물을 축조하면서도, 한 곳은 미완성의 상태로 남겨두었다. 완벽함으로 신의 노여움을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전한 대칭은 도리어 공포의 대상이 된다. 바이러스는 완전한 대칭의 모양을 가진다. 그것이 에너지를 최소화시켜 바이러스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읽으며, 영화 <올드보이>를 생각했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오대수가 갇혀 있던 방의 벽지에는 대칭적인 문양들이 수놓아져 있었고, 비밀이 밝혀지는 마법의 상자에도 대칭적인 문양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인간은 완벽한 대칭을 꿈꾸지만, 완벽한 대칭은 도리어 사람을 불안하고, 무섭게 만든다. 대칭의 요소를 담으면서도, 일종의 창의적 변형을 남겨두었던 바흐의 음악은 아름답지만, 완벽한 대칭을 가진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은 듣기에 거북한 면이 있다. 그래서 영화 <블랙스완>에서 완벽한 공연을 만들기 위해 니나(나탈리 포트만)는 변형과 결여를 실행한다.

그래서 아마도, 완벽한 대칭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책 <대칭>은 완벽함을 끝내 이야기하지 않고, 일종의 미스테리를 남겨둔 채로 이야기를 끝맺음한 것은 아닐까. 이 책은 1장에서 12장이라는 12면체의 구조로 목차가 이루어져 있지만, 1월에서 12월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8월에서 시작하여, 다음해 7월에 끝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한해로서) 완결되지 않고, 다음의 8월 이후의 이야기를 남겨놓고 있다. 물론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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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평전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문인/작가
지은이 E. H. 카 (열린책들,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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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만한 말이 용서될 수 있다면, 그의 평전을 읽고 도스또예프스끼에 드는 솔직한 감상은 '연민'이다. 물론 이 대작가의 삶에 내가 이러한 감상을 말한다는 것의 근저에 있는 여러가지를 모두 고려한다면, 이런 말은 웃기지도 않은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E. H. 카의 몇몇 문장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멈출 도리가 없다. "극단적인 쾌활함과 극단적인 침울, 익살맞은 허풍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수치심과 자기 비하가 거듭되는 이러한 그의 정신적 증세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서도 나타났다. 바보스러운 행위를 범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 행위의 근저를 눈치채고, 그 어리석은 행위와 거의 동시에 후회를 하게 되는, 그는 이런 불행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p.42)""도스또예프스끼의 비애는 자신이 자제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마찬가지의 명석함을 가지고 그 원인도 분석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p.43)"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카의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은 위의 문장들에서 보여지듯이, 일견 차가워보인다. 카는 도스또예프스끼와 시종일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에 대해 공정한 기술을 하기 위해 애쓴다. 여러 자료들은 조심스럽게 취사선택되고, 몇몇 의심스러운 자료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그에 대한 반박이나 해명을 시도한다. 또는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자료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을 인용하면서 신뢰를 보내기도 한다. 아마도 이는 이 책의 어떤 야심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이 평전이 가지는 야심 또는 함의는 도스또예프스끼라는 한 개인의 삶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것을 넘는다. 저자의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한 관심은 그의 삶이라기보다는, 그의 문학에 담긴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도스또예프스끼라는 한 개인의 문학 자체로 그치지 않는다. 카의 궁극적인 관심은 (영국인으로써)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이 대변하는 '러시아적인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카는 러시아인들의 어떤 특질을 잘 나타내는 도스또예프스끼라는 한 개인의 삶과 그의 문학을 보여주는 것으로 러시아라는 세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러므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이나 그의 사상 못지않게,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나 당시의 어떤 분위기를 때로 필요 이상으로 정밀하게 묘사하는 것, 그리고 그의 작품 하나하나를 면밀하게 살피는 것은 카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즉 도스또예프스끼는 카에 있어서는 러시아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작은 현미경이었고, 카는 그 현미경이 가지는 특징적인 왜곡에 휘둘리지 않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평전의 약간은 독특한 구성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의 전체적인 제목들을 살펴보면 이 책이 가지는 어떤 특징적인 면을 볼 수 있다. 이 평전은 크게 네 개의 구분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삶을 나누고 있다. 성장기, 격동기, 창조기, 결실기. 제목들에 드러나듯이 이것은 그의 문학을 염두에 둔 구분이다. 즉 성장기, 격동기, 창조기, 결실기라는 이 제목들은 그의 삶의 성장이나 어떤 힘들었던 부분이나 좋았던 부분을 염두에 둔 구분이 아니라, 그의 문학이 성숙되는 시기, 흔들리는 시기, 꽃피우는 시기, 그리고 가장 문학적 최고의 정점에 오른 시기의 구분이다. 일례로 성장기와 격동기를 가르는 구분을 들 수 있다. 그의 삶으로 보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집필하는 시기는 그의 삶의 격동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의 문학을 중심에 둔 구분으로 보면, 이는 그의 문학의 기반을 성장시켜 준 성장기에 해당한다. 그의 문학적 격동기는 (카의 구분대로라면) 시베리아 유형이 끝나고 저널리즘에 몰두하며 상대적으로 좋은 작품을 써내지 못했던 <죄와 벌> 집필 이전까지를 의미한다. 즉 이 네 가지의 챕터는 그의 삶의 흐름보다는 그의 문학의 어떤 흐름을 생각하도록 한다. 그의 문학적 삶은 초기의 급격한 문학적 성장에 뒤이어, 일종의 침체기를 겪다가 폭발적인 창조의 시기로 접어들었고, 그것의 최정점에서 그는 급작스럽게 운명을 다하였다. 이런 문학 중심적인 평전의 구조를 반영하듯이, 평전의 구성으로는 특이하게도 이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은 그의 대표작 <죄와 벌>, <백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등에 대해 각각 하나의 챕터를 할애하여 거의 평론에 가까운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그러나 이 평론은 한편으로는 너무 인물중심적인 비평으로 흐르고 있어, 온전한 비평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그 외의 챕터들도 어떤 시간의 흐름으로 나누어져 있기 보다는 특징적인 키워드를 중심으로 나누어져 있다. 즉 각각의 챕터들은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지만, 어떤 특정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뭉쳐져 있으며, 그 중심적인 이미지들은 읽는 사람들에게 그 시기에 대한 특징적인 인상을 남긴다.

그러므로 이 평전을 읽고나면, 도스또예프스끼 개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어떤 불안정하고도 복잡한 면들,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과 그에 따르는 일종의 연민 혹은 안타까움이라는 복잡한 인상을 가지게 되지만, 그의 문학과 그 기저에 깔린 것들에 대해서는 일종의 흐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윤리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는 <죄와 벌>에서 윤리의 이상, 정치를 다루는 <백치>, <악령>으로의 발전, 그리고 죄와 수난이라는 종교적 도그마를 담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까지 궁극적으로 이르는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의 사상적 흐름과 그것들에 공통적으로 깔린 '러시아적인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그 대표적인 것들이란 이 책에서 러시아적인 것으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러시아인들의 마음에는 하나의 원칙을 확인하는 것이, 그것에서 나타날 어떤 실제적인 결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p. 228)""우리는 감정과 의견에는 관대하지만 행위에는 관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뒤늦게 회개하는 탕자의 방탕이 큰아들의 질투보다 왜 더 용서받을 만한 것이며 참회하는 한 사람의 죄인이 죄짓지 않은 99명의 존경받는 시민들보다 더 격려받고, 예수의 발 앞에 앉아 묵상하는 마리아가 식사를 차리는 마르따보다 더 사랑받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감정에 치중하고 행위에 냉담한 러시아인들은 그 이유를 이해하며, 미쉬낀은 바로 이 정신의 체현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의 규율에 관련해서 다른 나라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p.253)"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에 깔린 이러한 러시아적인 것은 뚜르게네프나 똘스또이, 그리고 그가 초기에 영향을 받았던 고골에서 보여지는 러시아성과 다른 그만의 특징적인 것이다. 마지막 챕터 '에필로그'에서 카는 이러한 도스또예프스끼 문학만이 갖는 특질을 소설의 등장인물이 전형을 벗어나는 것, 부조리한 인간에 대한 묘사,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그러므로 불합리하고 불가해한 세계에 대한 천착, 그러면서도 거기에 내재된 신학적인 힘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전세대나 동시대 문학들의 특징을 뛰어넘는 것이며. 그 후의 전세계의 작가들에 크게 영향을 미친 요소이다. 카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뿌쉬낀의 생애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위대한 시기가 시작하고 있음을, 도스또예프스끼의 죽음은 그 시기가 끝나고 있음을 표지해 주었다.(p.374)" 즉 그는 기꺼이 한 시기를 닫았고, 새로운 시기의 기틀을 만들어주었다. 그 후의 많은 소설들에서 도스또예프스끼적인 인간은 빈번하게 등장하였고, 라스꼴리니꼬프 같은 인간, 혹은 이반 까라마조프 같은 인간은 일종의 원형이 되었다.

카는 마지막에 어떤 예언을 덧붙인다. 앞으로 백년 후(이 책의 출간년도는 1931년이다)가 되어서만이 그의 작품의 진정한 비중이 드러날 것이라는 점, 그리고 20세기 초의 논쟁으로부터 벗어난 후세대만이 그 예술의 전모를 생각할 것이라는 점. 이 예언은 맞을까. 20세기의 혼돈을 넘어, 21세기에 이른 지금, 우리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도스또예프스끼적인 세계를 맞고 있다. 그러나 카가 말한 바대로 우리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전제는 받아들였지만, 그의 결론은 거부하였다(혹은 거부되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마지막에 러시아정교의 세계로 달려갔지만, 우리가 달려갈 곳은 없다. 거의 모든 종교는 해체되거나, 혹은 자체의 모순도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고, 현대인은 내재된 분열과 이중성을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견딘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은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다. 그러나 이 위안은 우리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을 일종의 심리적 치유물로 받아들였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카의 예언은 이어진다. "현대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심리학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작품에 대한 예술적 평가를 도와준다기보다 오히려 훼방한다. 그것은 우리의 관심을 예술적으로는 부적절한 쪽으로 기울게 하고, 흔히 우리의 예술적 인식을 왜곡시킨다.(p.385)"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들을 새롭게 읽어봐야겠다. 분열을 견디며. 예술적으로 생각하도록 애쓰면서.

리뷰에 인용한 부분 외에 흥미를 끈 문장들.

안티테제를 제거해 버리면 인간은 결코 완전한 진테제에 도달할 수 없다. 죄악감을 없애 버리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 (p.307)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 인간, 다시 말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든다>라고,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한 인물은 말한다.(p.77)

그는, 그의 신관과 떨어진 그의 인간관이 불가피하게도 오늘날 함몰되고 있는 도덕적 무정부 상태, 불모성, 비관주의로 인간을 몰고 가게 된다는 것을 인정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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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져도 향기는 남는다

The Book | 2011. 2. 28. 20:57 | Posted by 맥거핀.
리영희평전시대를밝힌사상의은사
카테고리 시/에세이 > 인물/자전적에세이 > 정치가/법조인
지은이 김삼웅 (책보세,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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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의 평전을 읽는 것은, 우리의 현대사를 읽는 것과 같다. 리영희 선생의 삶은 분단과 한국전쟁,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 유신독재, 신군부와 광주, 6월 항쟁과 문민정부, 진보 정권, 그리고 이명박 정부까지 한국의 현대사와 오롯이 굴곡을 같이 한다. 리영희 선생은 그 숱한 현대사 굴곡의 최전선에서 가장 필요한 말들을,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해왔다. 그러나 이 평전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리영희 선생의 말들은 대부분 우리를 향한 것이었지만, 그의 눈은 항상 밖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사상은 분단과 독재로 점철된 갇힌 사고에 의해 끊임없는 제약을 받았지만, 그는 그 사고의 틀에 갇히지 않고, 세계사의 넓은 흐름 속에서 사고하려고 애썼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리영희 선생을 '의식화의 원흉'이라고 부르거나, '진보적 지식인, 언론인' 혹은 더 나아가 '사회주의자'로 부르는 것은 오해와 이분법으로 점철된 우리의 현대사를 그대로 평가에 투영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가 지향하는 바를 왜곡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리영희 선생이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상을 부수는 것이었다. 그의 저작의 제목 <우상과 이성>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선생은 이성의 힘으로 우상을 부수고자 하였다. 당시의 우리를 둘러싼 많은 우상들, 예를 들어 박정희 독재체제, 반공, 북한이라는 악마, 미국이라는 선, 중국에 대한 편협한 시각, 베트남전쟁의 당위성, 지역주의 등이 그가 원하는 파괴의 대상들 중 일부였다. 그것들이 이성의 힘에 의해 파괴되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그러한 우상들 때문에 우리들 대부분이 올바른 사고를 하지 못하여, 가치관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올바르게 사고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의존과 중국을 하찮게 보는 태도는 우리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쳐서 우리의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따라서 리영희 선생을 사회주의에 경도 되었다거나, 혹은 너무 진보적 관점에서만 세상을 바라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한편으로 그간의 진보 보수의 이분법적 프레임에, 즉 다른 말로 하면 이분법의 우상에 사로잡혀 그를 평가하는 것의 다름 아니다. 그의 발언이 그간 진보적 관점에 너무 치우쳤다는 것은 그저 우리 사회에서 그동안 그런 우상들의 힘이 너무 강력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우상들이 얼마나 강력함을 이 짧은 리뷰에 길게 적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인터넷 게시판에 가서 더도말고 딱 1시간만 '눈팅'을 한다면, (리영희 선생의 많은 노력에도) 그 강력한 힘들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을 얼마나 휘어잡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관점에서 이 평전의 이러한 진술을 이해할 수 있다.

리영희가 유럽 중세에 태어났으면 이단심문소에 끌려가 화형을 당했을지 모르고, 나치시대에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살았으면 레지스탕스가 되었을 것이다. 제정러시아나 스탈린 시대 소련의 지식인이었다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을 터이고, 문화혁명기 중국에 살았다면 하방下放의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해방정국에서 북한에 머물렀다면 아오지 탄광에 일생을 묻었을 터이고, 조선시대의 선비였다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출척을 당한 끝에 역모의 누명을 뒤집어 쓰고 사약을 받았을 것이다. (p.29)


그래서 아마도 리영희 선생에 가장 가까이 있는 말로는 휴머니스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휴머니스트를 여러 결로 정의해 볼 수 있겠지만, 가장 간단하게는 인간의 생존과 삶을 제1의 가치에 두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의 정확한 이론적 탐구와 정세분석의 가장 밑바닥에는 우리 민중들의 삶과 생존에 대한 분노와 걱정이 깔려 있다. 안과 밖에서 이중으로 속박당하는 민중의 삶과 생존에 조금이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 그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리영희 선생은 글을 쓰고 행동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가장 존경한 인물 중의 하나였던 루쉰의 삶과도 맥이 닿아 있다. 루쉰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너무 오른쪽이라고,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너무 왼쪽이라고 공격을 받았지만, 그가 가장 걱정한 것은 이중의 속박에서 고통당하는 중국 민중의 삶과 생존이었다. 그가 존경한 루쉰을 보면, 그의 삶 속에서 결국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것은 휴머니즘이 아니었겠는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휴머니즘은 인간을 그저 생존시키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다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다운 사고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외세에 의한 분단이라는 아픔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그 외세에 동참하여 타인에게 같은 아픔을 안겨준 베트남전쟁에 대하여 진정으로 참회하고 반성하는 것, 그것은 리영희 선생이 말하는 인간다운 사고이며, 삶이며, 리영희 선생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 책 <리영희 평전>이 평전으로서의 균형감각을 잃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균형감각이라는 것을 말하려면, 적어도 그 평균대가 놓여진 평평한 대지를 우리는 상정하여야 할 것이다. 하워드 진의 유명한 말을 다시 한 번 가져와본다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달리는 기차 위에서 억지로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다가는, 기필코 넘어지고야 만다. 그리고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까, 넘어질 때는 힘을 더 가진 쪽으로 넘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차는 보통의 기차가 아니다. 이상한 방향으로 달리는, 아주 고르지 못한 땅을 달리는 고속의 기차이다. 그 고속의 기차 위에서 리영희 선생은 어떻게든 모든 핍박받는 자들을 안전하게 기차에 앉히려고 애썼다. 그것은 그 사상적 어린아이들을 어떻게든 부여잡아 다독이는 억센 손이다. 그 억센 손을 세밀하게 묘사할 때도, 균형감각이라는 것을 상정해야 할까. 그러한 무서운 고속의 기차 위의 균형이란 무엇을 위한 균형일까.

그런 리영희 선생은 2010년 12월 5일 타계하셨다. 우리는 최근 연이어 사상의 은사를 잃고 있다. 그러나 꽃은 졌지만 향기는 남는다. 아직도 수많은 우상은 우리곁을 맴돌지만, 선생이 남겨준 우상을 없애는 이성의 무기, 사상의 무기는 여전히 벼려진 채 우리에게 남아있다. 그러므로 그를 추도하고 기억하는 또다른 방법은 그가 남겨준 힘을 이용하여 우리 삶에 아직 남아있는 우상들을 조금씩 밀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조금씩 더 인간다운 사고를 하게 될 때 우리는 조금씩, 리영희 선생에게 진 빚을 갚아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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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불가능한 수탈

The Book | 2011. 2. 25. 17:04 | Posted by 맥거핀.


반자본발전사전자본주의의세계화흐름을뒤집는19가지개념
카테고리 경제/경영 > 경제이론 > 자본론
지은이 볼프강 작스 (아카이브,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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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이라는 것은 어느 논쟁에도 비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발전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이며, 이뤄내야 할 것이다. '김예슬 선언'에서 비슷한 표현을 가져와 본다면, 보수가 발전을 원한다면, 진보는 의식있는 발전을 원한다. 자본주의자가 자본주의식 발전을 원한다면,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식 발전을 원한다. 부자가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발전을 원한다면, 빈자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전을 원한다. 북반구의 여러 나라들이 초일류대국을 위해 발전을 원한다면, 남반구의 여러 나라들은 북반구의 나라들의 대열에 올라서기 위해 발전을 원한다. 그러나 이 책 <反 자본발전사전>은 그러한 발전의 레이스에서 벗어날 것을, 이제 발전에 대한 헛된 희망을 버릴 것을 우리에게 권한다. 아니, 권한다기 보다는 강력하게 경고한다.

책임 집필자인 볼프강 작스를 비롯한 이 책의 저자들이 이러한 발전 본위 사회에 경고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 문제이다. 하나는, 문화적인 식민화, 상상력의 식민화의 문제이다. 정치적 의미의 탈식민화는 상당수의 국가들에서 이루어졌고, 경제적 의미의 탈식민화 역시 일부 국가들에서 이루어졌지만, 발전 담론이 세계를 휩쓸면서 문화적인 식민화, 상상력의 식민화는 오히려 강력해졌다. 발전 담론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인 세계 어느 곳의 사람들이나 공통적으로, 서구 유럽인, 혹은 미국인처럼 사는 것을 꿈꾼다. 그 여파로 세계 곳곳의 고유한 생활 양식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즉, 문화적인 다양함은 사라지고, 오로지 소비 중심인 서구인들의 생활 양식이 하나의 규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태학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소비 중심의 북반구식(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활 방식은 지구의 자연을 절대적으로 소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두들 잘 알고 있듯이, 지구의 자원들은 한정되어 있고, 동시에 이러한 생활 방식은 지구 전체의 기후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이러한 발전 중심 모델은 지구와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경제 중심 세계관이 강화되는 문제이다. 이러한 발전 중심의 세계관은 오로지 경제만을 중심에 놓고, 전 세계의 모든 국가를 1등에서 꼴찌까지 줄을 세운다. 그래서 아무도 원치 않았고, 아무도 의식하지 않았는데,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1949년 1월 20일의 취임 연설로, 세계의 일부 지역은 '저발전 지역'이 되었으며,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낙후되고, 좋지 않은 것'으로 규정되어 버렸다. 이는 한 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경제력만이 규준이 될 때 나라안의 일부 지역은 경제적으로 낙후된 곳이 되어버리며, 그 곳 사람들의 인간적인, 문화적인 가치는 완전히 무시된 채, 그저 '가난한 사람들'로 인식되어 버린다. 동시에 이러한 경제 중심 세계관이 가지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경제력만이 중심이 되다보니 경제력이 낮은 사람들의 기본권은 여러 가지 이유로 무시되고,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다는 것이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예를 들어 지난 용산 철거 문제에서 오로지 경제적인 문제로, 그 사람들의 기본적인 권리가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돌이켜보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탈발전 운동을 끌어올릴 것을 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탈발전 운동은 크게 두 가지 주제를 포괄하는데, 첫째는 화석 연료 자원에 기반을 둔 경제에서 생물다양성에 기반을 둔 경제로 탈바꿈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구의 자원을 소모하는 경제 체제가 아니라, 지역 생태계의 에너지 흐름을 중시하는 미국와 유렵의 '녹색 경제', 타이의 '자급 경제', 인도의 '지구 민주주의' 요청, 페루의 '안데스 세계관' 같은 것들이다. 또한 동시에 이러한 경제 체제는 현지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운영된다는 강점도 있다. 둘째는, 위에서도 말한 경제 위주의 세계관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이는 발전 위주의 경제 체제에 매몰된, 공동체의 고유한 생활방식과 문화, 민주주의, 정의의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복구함으로써, 물질에 덜 기반한 번영을 모색하면서, 인간의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복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의 행복이란 경제에 달려 있지 않다는 믿음에 기반을 둔 시도이다.

이 책 <反 자본발전사전>은 이러한 주제를 조금은 특이한 방식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발전의 여러 키워드들을 하나하나 끄집어올려 논파해 가는 방식이다. 즉 발전에 뒤따르는, 혹은 발전이라는 전체를 구성하는 여러 키워드들을 각 장에서 한 가지씩 제시하며, 그 키워드들의 역사적인 기원과 현재적 의미, 그리고 그 이면에 담겨 있는 뜻들을 새롭게 살펴보며, 그 키워드들을 다시 재정의하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이 책에서는 총 19개의 키워드를 17명의 저자가 각각 논파하고 있는데, 이 키워드에는 우리가 예상 가능한 '시장'이나 '생산', '자원', '국가' 등만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여기에는 의외의 키워드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평등'이나 '사회주의', 혹은 '도움'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평등'은 범세계적인 평등이라는 줄세우기적 사고에 기반한 것으로, 실현 불가능하며, 동시에 실현되어도 (지구적인 관점으로 볼 때는) 재앙에 가까운 것이며, 결국은 현실의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일 뿐이라는 이유로 '발전이 약속하는 먼 미래'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받는다.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사회주의도 결국 사회주의식 발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발전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레닌과 스탈린의 러시아는 결국 무엇을 만들었는가. 그것은 어쩌면 '국가 자본주의' 혹은 그것이 너무 앞서나간 표현이라면, '권위주의 국가' 혹은 '관료주의적 집단주의'가 아니었는지를 이 책은 묻는다. 그리고 결국 '사회주의'란 '오해와 오류의 역사'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누군가는 이러한 이 책의 논의들에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이러한 물음. 이 책에서는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지구 자원의 한계를 말하며, 지금의 소비적인 생활 양식을 버리자고 말한다. 그러나 전지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어떤 불평등을 내포한 것이 아닌가. 즉 발전이 이미 상당수 이루어진 서구 사회가 발전 과정에 놓인 국가들을 '저발전' 상태에 묶어두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이다. 이 책에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중국인도 얼음처럼 차가운 콜라를 바로 냉장고에서 꺼내 마실 권리가 있지 않은가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타당하지 못한데, 하나는 그 질문은 이미 전체적인 발전 레이스에 기반한 질문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즉 '전지구 수탈'이라는 발전 레이스에 뛰어들어서 끝이 뻔히 보이는 파멸로 같이 달려가는 선수가 될 필요는 절대 없다는 점. 다른 하나는, 이미 그러한 생활 방식은 인간의 삶의 질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즉 다른 말로 하면, 그 콜라 꺼내 먹어 본다고 해서, 우리 삶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또다른 예상되는 질문은 조금 더 생각해볼 만한 질문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제시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가 발전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서는, 어떤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책을 읽다보면 그런 의문이 들기는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들이 원하는 것은 어떤 농업 위주의 경제체제, 혹은 예전의 삶으로 회귀하는 것인가. 지금보다 평균 수명도 훨씬 낮고, 지금의 관점으로 보자면, 우리가 쾌적하게 누리는 많은 것들을 거의 포기해야 하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물론 이러한 질문 자체가 지금의 발전 위주의 체제에 매몰된 시각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책에서 말하는 공유지에 대한 강조, 생물과 밀착된 경제 체제, 특수한 개별의 공동체적 가치를 되살리는 삶이 어렴풋하고 흐리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우리 모두가 발전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는 뜻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즉 이러한 생활 양식 이외의 다른 삶을 우리가 상상해 본 적이 없는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상상해야 한다. 새로운 삶을. 그 대안이 미심쩍더라도 거의 가까이에 다가온 파국을 우리 모두는 알기 때문이다. 지구가 몇 백만년 동안에 차곡차곡 쌓은 자원을 우리는 거의 수십년 만에 다 썼다. 이 책에서 말하듯이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거짓말에 가깝다. 지속 가능한 발전은 없다. 오로지 '지속 불가능한 수탈'만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읽으면서 무릎을 쳤던 구절(이 책에는 이밖에도 새롭게 깨닫게 되는 써먹고 싶은 구절들이 많다).

경제학자들의 경제는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사람과 사회는 경제적 본성을 가진 제도와 접촉 형식을 만들어낸 다음에도, 경제를 들여앉힌 다음에도 경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경제 규칙은 현대 사회에서 만성이 된 희소성에서 비롯된다. 희소성은 모든 인간 사회를 관류하는 철의 법칙이기는커녕 역사적 우연일 뿐이다. 그것은 시작이 있었기에 끝도 있을 수 있다. 희소성이 막을 내릴 때가 왔다. 지금은 주변부와 보통 사람이 나설 때다. (p.68)


그리고 이것은, 다른 책에서 본, 우리 대통령 혹은 우리 시장님에게 들려주고 싶은 구절.

라틴아메리카의 한 대통령이 "우리는 제1세계로 진입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제1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제1세계가 되자면 범죄를 유도해야 하기 때문에 그 대통령은 투옥시켜야 마땅합니다. 요컨대 당신이 "나는 몬테비데오가 로스엔젤레스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다면 몬테비데오가 파괴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말, <시대의 양심 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 중에서,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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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더 나아가는 모습을 기대하며

The Book | 2011. 1. 26. 22:36 | Posted by 맥거핀.


진보집권플랜:오연호가묻고조국이답하다다시불꽃을피우기위한신명프
카테고리 정치/사회 > 정치/외교 > 각국정치 > 한국정치일반
지은이 조국 (오마이북,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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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생활에서 때때로, 아니 의외로 꽤나 자주,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도마 위에 오른다. 그리고 술자리에서건 어디에서건, 많은 경우 그것은 의도치 않은 논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생산성있는 논쟁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왜냐하면 대부분 그것은 어떠한 '반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래 그건 알겠는데, 그래서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하자는 거야,라는 말에 이르면, 논쟁은 이미 김이 빠져 버리고 만다. 뭐..그걸 내가 꼭 신경써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런 건 정치인들이 열심히 생각해야지. 그러나 아주 불행하게도, 사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그런 건 잘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책 <진보집권플랜>을 읽기 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책의 대부분의 내용에는 MB정부의 실책들이 들어있을 것이고, 그것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 주를 이루겠지, 그리고 말미에는 그래서 진보가 집권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논의하고 있겠지. 그러나 이 책의 전체 줄거리는 내가 생각한 내용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오마이뉴스의 기자 오연호가 서울대 법대 교수인 조국과 문답을 벌인 이 책 <진보집권플랜>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앞으로 진보가 만들어가야할 세상의 모습을 그려보이는 것이다. 조국 교수는 사회 경제 민주화, 교육, 남북 문제, 권력의 크게 4가지 부분에서 앞으로 진보가 나아가야 할 방향, 진보가 만들어야 할 세상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진보 세력이 실제로 집권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을 짜야하는지, 실제의 인물들과 조직들을 거론해가며 논의를 펼치고 있다.  즉 이 책의 제목인 '진보집권플랜'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플랜'이란 '진보가 집권하기 위한 플랜'이 아닌 '앞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방법(디자인)'이라는 측면에 가깝다. 다른 말로 하자면 '권력'이라는 말보다는 '정의'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단, 물론 이 점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권력이든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되는 것이 사실이라는 점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이 '反 MB'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음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좋은 세상은 '反 MB'로는 요원하기 때문이다. 결국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좋은 세상을 어떠한 형태로,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것인가라는 디자인이, 플랜이 필요하다. 그것은 진보가 흔히 공격을 받는 지점과도 맥이 닿아 있다. 진보는 대체로 '듣기 좋은 소리를 하지만,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즉, 되면 좋기야 한데, 그것이 실현 가능하냐,는 논리이다. 그러나 조국 교수는 이 책에서 현재의 실정들을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부분에까지 새로운 대안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제시된 대안들의 상당수는 정책의지만 있다면 실현 가능성이 높고, 일정 부분에서는 기존에 논의되지 않았던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엿보인다. 즉 조국 교수의 말들은 과거에 무게중심이 놓여있다기 보다는 명백히 현실지향적이며, 미래지향적이다. 

그러나 한 두 가지 부분에 있어서는 마음에 걸리는 점도 있다. 먼저 한 가지는, 미래에 대한 논의는 과거에 대한 뼈저린 반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 소위 '진보 정권'(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동안에 이루어진 몇몇의 실정(失政)들에 의한 비판은 이루어지지 않거나, 두루뭉술하다는 인상을 준다. 한미 FTA 문제,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문제, 카드 대란,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등등. 물론 몇몇 말들을 첨언할 수 있다. 먼저 조국 교수가 사실 이에 대한 반성을 할 직접적인 의무가 없다는 점을 말할 수도 있다. 또한 이것이 실정인지 아닌지의 문제도 여전히 일종의 진행선상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문제들을 보는 시각이 앞으로의 진보 세력의 연합에 있어서 하나의 무게추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단적인 질문들이 그렇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한 민주당 정부를 진보 세력과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인가. 조국 교수는 이에 대해 사실 이미 '그렇다'라는 답안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짜여진 정치지형에서 '反 MB'의 구도에 주목하면 민주당을 넣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지만, 조국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사실 '反 MB'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떤 세상을 이야기할 것인가,라는 점이 아닌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두 가지를 첨언하고 싶다. 하나는 전체 논의의 틀을 '진보'가 아닌 '진보, 개혁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조국 교수의 단적인 선택임은 부인할 수 없다는 점, 한편으로는 책의 전체 논의가 너무 故 노무현 대통령의 유산에 기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점이다(오연호 기자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논의가 더 필요한 부분은 이외에도 있다. 예를 들어 아직도 남아 있는 민노당의 북한에 대한 태도, 국민참여당과 민주당과의 차별성의 문제, 진보신당의 비유연성 등등. 물론 누군가는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달을 보랬더니, 달을 가리킨 손가락만 보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같이 그려나가야 할 좋은 세상을 이야기하려면 그 좋은 세상의 모습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만들어놓고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정권을 잡기 위한 연대는 긍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자면 현재 진보 진영의 각 당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세상들의 '다른 점' 그리고 연대가 어려운 점들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그 다른 점들을 깎아 나가야 한다. 두루뭉술하게 감춘 연대는 언젠가 깨질 수 밖에 없다.

이 책에서, 달을 보랬더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이는 점은 또 있다. 좋은 세상도 좋은 세상이지만, 그 좋은 세상을 이야기하는 '사람'만 자꾸 보이는 탓이다. 오연호도 뒤의 에필로그에서 말했지만, 조국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조국 교수에 주목하게 된다. 진보 진영에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책에서 거듭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그 조건들에 부합하기로는 조국 교수만한 인물도 몇 없다. 한국 사회의 전체적인 문제점을 이렇게 조목조목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면도 그렇거니와 (약간 농담을 섞자면) 그의 외모만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다. 꼭 농담만은 아닌 것이, 정치에 있어 겉보기의 중요성은 한나라당의 모 의원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은 조국 교수의 전체적인 틀을 딱히 가늠하기가 주저되는 면도 있다. 그의 전체적인 논의 중에는 우리나라의 아직 수준으로는 이 정도, 더 나아가고 싶지만 이 정도..라고 이야기하는 부분들이 종종 있다. 물론 그의 말에는 우리의 현 지점에 비추어 긍정되는 면도 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는 실제로 더 나아가고 싶은 것일까. 그는 처음부터 이 정도만을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과연 그에게 그가 말한 세상의 조건들이 일정정도 성립되면, 그는 거기에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러니 그의 앞날이 궁금할 밖에. 책의 말미에 그는 '폴리페서'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나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폴리페서가 된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 하긴, 누구에게나 정치 행위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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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교과서적인 타격폼

The Book | 2010. 12. 27. 01:18 | Posted by 맥거핀.
왜도덕인가우리사회에던지는가장뜨거운질문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 인문교양
지은이 마이클 샌델 (한국경제신문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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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다. 이 '잘 모르겠다'는 것은 책의 내용 그 자체보다는 책을 둘러싼 다른 여러 것과 연관된 물음이다.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2010년 서점가를 주름 잡았고, 급기야 마이클 샌델은 한국에도 다녀갔다. 나는 사실 그런 열풍이 미스테리했다. <시크릿>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1Q84>가 일종의 신드롬이 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난데없는 '정의론'이 2010년의 우리나라 서점가를 주름잡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것도 푸른 기와집에 계신 그 분이 새로운 정의론을 내뿜으며 독야청청한 이 시대에. 물론 모든 의문은 그 책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트렌디한 열풍에 맞추어 책을 구입하였음에도, 대책없는 게으름으로 끝끝내 책을 펼쳐들지 못했고, 뒤늦게 그 후속작 격인 <왜 도덕인가?>를 억지춘향의 심정으로 읽게 되었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왜 이 책이 그렇게 놀라운 화두가 되고 있는지. 그리고 총체적 난국의 우리사회에 어떤 비전을 던져줄 수 있을지. 아니, 거꾸로 말해보자. 우리 사회에서 '정의론'을 읽는 사람들은 그렇게도 많은데, 왜 우리 사회는 어떤 '정의'를 찾아보기 어려운지 잘 모르겠다.

조금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이클 샌델은 <왜 도덕인가?>에서 현재 미국의 상황에 대해 내내 우려를 표한다. '옳음(정의)'이 '좋음(선)'에 우선했던 지난 시대, 즉 어떤 공동체적인 가치는 쇠퇴하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서의 개인의 권리만이 우선되었던 지난 시대의 빈 가운데를 스며든 것들에 대해 마이클 샌델은 걱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 '스며든 것들'이란 절대적인 거대한 시장의 힘이기도 하고, 거대기업들에 의한 권력의 집중 현상이기도 하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근본적인 보수주의 가치관이기도 하고, 공화당 정부이기도 하다. 또 때로는 그 스며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그것은 일정한 조류의 흐름이기도 하다.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미국의 거대한 두 정당은 때로는 '옳음'을 강조하면서 그 대세를 장악하기도 하고, 그 장악된 대세 속에서 '옳음'만이 강조되면서 사라져간 공동체의 종교와 도덕적 가치들을 재빨리 선점하면서 다시 다른 대세를 가져가기도 한다. 그래서 마이클 샌델은 걱정한다. 앞으로 이 오바마 행정부가 그간 민주당 정부가 해온 대로 '옳음'만을 강조하면서 공동체안에 그야말로 공동(空洞)만 남겨놓는다면, 공화당의 무책임한 시장주의와 근본적인 보수주의적 가치들이 그 공동을 채우게 될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그러나 나의 이 어리둥절함, 혹은 부러움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럼 우리는 뭘까. 우리는 그저 비어있기만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우리 푸른 기와집 사시는 분과 그들의 친구들은 그저 비어계실 뿐이라는 점이다. 즉 문제는 그들이 '나쁜 철학' 혹은 '동의하지 못할 철학'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은 그 '철학'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들은 그 '철학' 대신 다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4대강을 위한 힘찬 발걸음이기도 하고, 북한에 대한 단호한 의지이기도 하고, '공정 사회'를 향한 멋진 슬로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아무리 잘 봐준다고 해도, 그것을 '철학'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들이 공정 사회를 이야기할 때, 그들은 '공정 사회'라는 것이 그간 전통적으로 무엇을 의미해왔는지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니 그저 부럽고 어리둥절할 밖에. 부럽다는 것은 그 정도 '철학'이라도 가지고 있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부럽다는 것이고, 어리둥절하다는 것은 왜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심심한 인기를 끌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은 철저하게 미국의 상황과 그간 미국사회에서 논의되었던 맥락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작금의 한국사회는 이 책에서 말하는 미국의 자유주의적 맥락과는 상당히 다른 맥락에서 형성된 사회다. 길게 논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일본의 식민지배와 한국전쟁, 오랜 독재정치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의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지형도는 상당히 왜곡되어 버렸다. 즉 우리에게는 현재 '옳음'도, 그렇다고 '좋음'도 없다.

또 철지난 패배주의의 관점에서 '한국적 특수성'을 운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이 그야말로 들끓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나 사실은 대부분 텅 비어있는 한국사회에 마이클 샌델의 이 트렌디한 정의론은 조금은 수상해 보인다. 왠지 이 정의론은 익지 않은 라면 위에 올려놓은 양냄새 나는 치즈조각 처럼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고 고소한 냄새가 풍겨 오지만, 속에는 익지 않은 면발이 꼬들거리는 그런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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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잡설이 이 책 <왜 도덕인가?>가 '읽을 만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책은 마이클 샌델의 흥미로운 정의론이다. (책 제목은 <왜 도덕인가?>이지만, 도덕론이라기 보다는 정의론에 가깝다.) PART 1은 일종의 워밍업 단계로서 다양한 도덕적, 종교적, 사회적 이슈들에서 왜 사회에 도덕적 가치가 우선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한다. 즉 이 부분은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전 단계로서 독자에게 한 가지 사태를 여러가지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하며, 동시에 일종의 논리적 사고를 위한 연습문제들이다. 마이클 샌델의 본격적인 자기목소리는 PART 2의 말미와 PART 3에 집중되고 있는데, PART 2는 지난 여러 철학적인 논의들에서 일관되게, 자신의 정의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거들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그것은 칸트의 선험적 주체와 무연고적 자아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고, 권리를 집착하는 자유주의를 버리고, 듀이의 공동체적 자유주의로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며,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종교 및 도덕성 간의 대립에서 도덕성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PART 3에서는 그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다시 한 번 요약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그간 정치적 자유주의가 초래한 공동체의 비어버린 중심에 도덕적 가치를, 즉 공공선을 불어넣자는 것이다.

사실, 진정으로 궁금했던 것은 그 마지막에 관계된 것이었다. 마이클 샌델은 책의 내내 공동체의 중심에 공공선이 자리잡도록, 즉 미국 자유주의 공공철학이 자리잡도록 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과연 그 공공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 핵심은 마지막에 와서야 비로소 소개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4가지이다. 첫째, 자유주의 진영은 시민자치와 공동체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 둘째,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해하고 거기에 참여할 이유를 발견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간곡한 권고로도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 셋째, 정치권은 현대 경제구조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소비 중심의 경제가 아닌 자치 중심의 경제로), 넷째, 도덕적인 혹은 종교적인 담론을 공공생활과 분리시키려는 충동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 즉 정부가 중립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는 점. 혹 마이클 샌델의 다음의 정의론에 관계된 내용이 또 출간된다면, 그것은 이 4가지의 요점을 다채롭게 논의 발전시키는 내용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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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간에, 나는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이러한 일종의 작은 독서 열기가 공정하지 않은 공정사회에 저항하는 어떤 심리들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글쎄. 적어도 이 책만 놓고 본다면, 이는 절대 푸른 기와집과 친구들에 반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보다는 트렌디한 전범(典範)에 가깝다. 우리에게는 아주 잘짜인 본보기보다 조금 더 거친 목소리들이 필요하다. 원래 잘 치던 타자가 타격폼이 무너지면, 깨끗하고 교과서적인 타격폼을 다시 유심히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폼을 되찾을 수 있지만, 기초가 아예 없는 타자에게는 혹독한 러닝이 때로 답일 수 있다. 아,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깨끗하고 교과서적인 타격폼을 가지고 있다고 꼭 안타를 많이 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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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의 세밀화 작품

The Book | 2010. 12. 24. 00:21 | Posted by 맥거핀.
바다
카테고리 과학 > 지구과학 > 해양학
지은이 미슐레 (새물결,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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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진도가 안 나가는 책이었다. 이 책은 왠지 그 자신 '바다'를 닮은 것 같다.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 저자 쥘 미슐레는 거대한 폭풍우의 무서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아름다운 바다생물의 모습을 찬양하기도 하고, 믿기 힘든 인어의 모습을 닮은 바다생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다가는, 그 모든 가설들에 갑자기 의심어린 시선을 던진다. 그 때마다 책장은 내 손 끝에서 조금씩 부서져 하얀 포말로 변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버리고, 여전히 나는 바다 안에 들어가보지 못한 채, 바다 주위에서만 맴돈다. 그리고 바다는 여전히 먼 곳에 떨어진 어딘가에 있다. 알 수 없는 어딘가에 있다.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단순한 이유 몇 가지. 이 책은 바다의 거의 전부를 담으려는 불가능에 가까운 대담한 시도를 하고 있고, 저자는 그 시도를 완수하기 위해, 당시(이 책이 출간된 것은 1861년) 존재하고 있던 바다와 바다 주변에 관한 상당수의 문헌들을 자유롭게 이 책에 인용하고 있다. 그 자유도는 생각보다 꽤 높은데, 아주 널리 알려진 책들도 있는 반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책들도 있고, 후에 다른 책에 인용된 내용들이 재인용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위에서 말했듯이 이 책은 19세기 중반부에 출간되었으며, 당시 최신의 과학적 지식을 담고 있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심쩍거나 아리송해 보이는 부분들도 있다. 그런만큼 책에는 확인할 수 없는, 동시에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는 내용들이 상당수 존재하며, 그것은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지속적인 어지럼증을 안긴다. 또한 저자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묘사하려고 시도한다. 그것은 프랑스의 어느 한 해안가이기도 하고, 때로는 알려지지 않은 바다생물의 모습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물의 모습을 닯은 무엇인가이기도 하고, 가끔씩은 실체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 - 예를 들어 폭풍우의 형상 - 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누구나, 끊임없이 머리 속에 어떤 심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심상의 모습은 항상 흐릿하다. 우리 머리 속에 박힌 몇 가지의 관념들이나 그간 알고 있던 바다생물들의 모습은 그 심상들을 그리는 데에 계속 방해만 줄 뿐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묻고 싶어진다. '그라브의 환한 곶'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뗏목처럼 생긴 '벨렐'은 어떠한 모습인지, '캉크르'는 상대방을 위협할 때 어떤 '폼'을 잡는지 말이다. 조악한 그림이라도 좋으니 그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사실 보다 근본적인 책읽기의 난관은 다른 데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의 주된 글쓰기가 그간 우리가 접해왔던 글쓰기와 다른 것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1800년대 중반은 낭만주의가 절정을 지나고, 거의 끝마무리에 이르던 시기였고, 새로운 기술과 과학문명의 발달로 실증주의 및 사실주의가 촉발하던 시기였다. 이 책에서도 그런 사조의 분위기가 여실히 녹아들어가 있다. 즉 이 책 <바다>는 멸종해가는 바다생물에 대한 과학적 보고서이기도 하고, 새로운 지리상의 발견과 과학적 발견들을 전하는 탐험기이기도 하고, 바다를 둘러싼 인간들의 사투와 침략을 보여주는 문명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의 예찬이기도 하다. (각 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부는 바다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그것의 거대함과 위엄에 대해, 2부는 생명의 원천인 바다의 신비함에 대해, 3부는 바다에 대한 인간의 정복욕과 그것이 불러온 비참한 실패들,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생명(다른 류의 인간을 포함한)의 고갈에 대하여, 4부는 (은유적인 의미가 아닌) 치유의 힘을 지닌 바다에 대하여) 즉 이 책은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두 가지의 글쓰기 방법론을 동시에 실천하고 있다. 그것은 정밀한 분석과 아름다운 예찬이다. 저자 쥘 미슐레는 대상을 캔버스 가까이에 올려놓고는 아주 극사실주의적인 묘사로 그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묘사하고는, 뭉툭한 유화물감으로 그것을 뭉게고 덧칠해버리고는 우리에게 그것의 아름다움을 볼 것을 주창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당연히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세밀화인가, 아니면 어떤 인상파 화가의 작품인가, 아니면 그 둘 다 아닌가.

그것의 답을 모른다고 해도, 적어도 한 가지 거의 확실해보이는 사실, 혹은 이 책에서 얻는 교훈은 있다. 그것은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들에서 우리 인간들은 지금까지 그다지 많은 발걸음을 해나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심쩍거나 아리송해 보이는'이라는 오만한 표현을 나도 썼지만, 우리가 그 이후에 바다에 대해 알게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노력을 해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다가 그만큼 거대하고, 수많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폭풍의 회전 법칙을 처음으로 찾아낸 쥘 미슐레의 시대보다 폭풍에 대해 무엇인가를 조금 더 알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폭풍을 두려워하고, 폭풍이 오거나 오지 않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힘을 넘어선 어딘가에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천재지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저 수동적인 시도만이 가능할 뿐이다. 우리들은 그저 여전히 예보를 듣고, 그것에 대비하는 것 외에는 큰 방법이 없다. 인간은 여전히 바다의 바깥에서 바다를 바라볼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의 3부에서도 새로운 바다길을 찾기 위한, 또는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곳에 가보기 위한 인간들의 노력이 나온다. 그러나 그 탐험기들은 사실 대부분이 나약한 인간들이 거대한 바다에 부딪힌 실패의 기록들이다.

그리고 조금 더 엄밀히 말한다면, 우리 인간들이 바다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모르고 지내는 것이 이 바다에도, 그리고 이 지구에도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을 읽기 얼마전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전"을 다녀왔다. 그 사진전들의 수많은 사진들에서 내가 얻은 교훈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자연은 자연 그대로 놔두었을 때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의 자연을 향한 많은 시도들은 자연을 망가뜨렸고, 수많은 동식물들을 멸종위기에 빠뜨렸다. 자연은 그 나름의 자정작용으로 근근히 버텨왔지만, 그 한계는 거의 가까이에 보인다. 그것은 바다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의 저자인 쥘 미슐레는 마지막 4부에서 바다의 치유의 힘에 대해 말하며, 해수욕을 적극 권장했지만, 나는 그것에는 별로 동의하지 못하겠다. 바다의 치유의 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치유의 힘이 너무 강력한 것을 우려하는 탓이다. 

그 바다의 거대한 힘을 말하는 미슐레의 문장들을 사진전에서 보았던 몇 장의 사진들의 설명으로 마지막으로 붙여본다.


지난 세기 동안 엄니 때문에 무차별적으로 사냥당해야 했던, 평균 몸무게 1,000킬로그램의 바다코끼리 떼가 이제는 미국 알래스카 주 인근 추코치 해의 한 작은 부빙 위에서 또 한번의 위기를 맞고 있다. 태양계의 한 작은 행성 위에 앉아 있는 인간 떼의 모습이 이럴까? 지금 당장 가라앉지는 않을 것 같다. ⓒ Alaska Stock Images / National Geographic ('지구를 담은 사진전' 내셔널 지오그래픽 展 도록에서)

그 옛날 생물 가운데 가장 자유롭게 바다를 누비던 선량한 해표와 정다운 고래, 대양의 태평한 자부심, 이 모든 것들이 극지의 바다로 얼어붙은 살벌한 세계로 도망쳤다. 그렇지만 놈들은 그토록 힘든 생활을 모두 견딜 줄 안다. 여전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놈들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쥘 미슐레 <바다> p.232)


바닷물 한 방울 속에도 생명의 드라마가 가득하다. 약 15배로 확대한 바닷물 속에 벌레처럼 생긴 요각류, 화살벌레, 필라멘트 같은 시아노박테리아, 직사각형 조류(藻類), 물고기 알, 쌀알만한 게의 유생 등이 보인다. 거대한 것에서 미세한 것까지, 인간에서 미생물까지,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찬란하다. ⓒ David Liittschwager / National Geographic ('지구를 담은 사진전' 내셔널 지오그래픽 展 도록에서)


그 표면에 젤라틴 성분의 도톰한 박피가 형성되었다. 나는 바늘 끝으로 그 작은 티끌을 떼어내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이런 모습이 나타났다.

통통하고 작달막하며, 힘차고 악착같은 소용돌이가 생명에 취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기묘한 바쿠스 축제로 탄생을 축하하는 듯했다.
그 배경에서, 아주 작고 미세한 장어나 뱀 같은 것들이 헤엄친다기 보다는 그냥 앞으로 튀어나오려고 떨고 있었다(이것을 '비브리오' 또는 콤마균이라고 한다). (쥘 미슐레 <바다> p.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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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가의 숙명들.

The Book | 2010. 11. 21. 22:23 | Posted by 맥거핀.
책을읽을자유로쟈의책읽기2000-2010
카테고리 인문 > 독서/글쓰기 > 독서 > 독서일반
지은이 이현우 (현암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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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서평단 리뷰의 하나로 썼습니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의 사진을 한참을 들여다 본다. 지젝의 책 <시차적 관점>과 다른 지젝의 책 몇 권, 그리고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책(혹은 그를 다룬 책) 사이로, '한 그루의 사과나무'라는 제목과 함께, 이현우라는 이름이 보인다. 우리 시대의 성실한 북리뷰어, 혹은 '인터넷 서평꾼' 아니면 '서평가' 로쟈의 본명. 한 그루의 사과나무? 출판된 책 같지는 않고, 혹시 기약없는 출판을 기다리고 있는 책인지, 아니면 그의 그저 노트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이 사진은 서평가의 숙명같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서평가의 숙명이란, 결국 언젠가 출판될 자신의 책을 기다리는 것. 그 책의 서평을 써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다른 경우에도 아마도 비슷할 것이다. 수없는 영화를 본 영화평론가들은 언젠가 자신의 영화를 만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 정성일이나 김정 등 여러 평론가들의 영화를 우리는 접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요리를 맛본 미식가는, 자신만의 완벽한 요리를 언젠가 만들어낼 것을 꿈 꿀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수많은 책을 읽고, 그에 대해 글을 써온 서평가는....누군가의 글이 아니라, 자신의 글을 읽는 것을 고대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재능과는 크게 관계가 없는 문제다. 재능이 없어도 꿈 꾸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것은 숙명과도 같다.


아마도 그런 이유 중의 하나겠지만, 로쟈의('이현우의'라고 해야겠지만, 우리에게 더 친숙한 이름이니 이렇게 부르도록 하자) 이 책 <책을 읽을 자유>에는 아직 탄생하지 않은 여러 복잡하고도, 흥미로워 보이는 주제를 가진, 미래의 책들이 등장한다. 로쟈가 앞으로 쓰게 되거나, 혹은 결국 쓰지 못하게 될 몇 권의 책들. 언젠가 그 책들이 써질 수 있을까? 글쎄. 뒤의 발문에서 신형철이 그를 '기계'라고 표현한 내용도 있고, 로쟈 자신의 약간은 자조적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앞에는 그가 읽는 속도의 몇 배나 될 정도의, 그가 아직 읽지 않은, 그러나 그가 어쩔 수 없이 손을 대고야 말, 수많은 책들이 등장할 것이고, 그는 그 책을 읽고는 무언가 몇 개의 짧은 코멘트들, 혹은 긴 논의들을 남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분명 나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가 쓰고자 하는 새로운 주제를 가진 책들의 출판 시기는 조금씩 유예될 것이다.
 
그것은 자신만의 책을 쓰고자 하는 욕망과 더불어, 모든 서평가에게는 또다른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조지 오웰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서평가의 일단을 밝힌 바대로, 어쩌면 대다수의 서평가들은 서평을 쓰는 것을 괴롭게 생각하며, 최대한 그것을 마감이 다가올 때까지 미뤄두려고 하고, 또한 그 책들의 상당수를 쓰레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좋다, 나쁘다의 기준을 내린 후에는 그것을 합리화하는 작업을 재빠르게 해내는 족속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맞다고 해도, 적어도 확실해 보이는 한 가지는, 서평가들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아마도 죽을 때까지도 한 권의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리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 책은 정말 쓰레기군. 이제 다시는 책 같은 것은 읽지 않겠어."라고 결심한다해도, 그의 흥미를 자극할 다른 책은 그가 말하는 그 순간에 어디선가 출판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위대한 저작이 말이다.

그럼 서평가의 숙명을 생각해 보았으니, 그런 서평모음집을 읽는 사람들의 숙명을 생각해보자. 서평모음집을 읽는 사람들은 아마도 두 가지 부류일 것이다. 소개된 그 책들을 읽을 마음이 있는 사람과 그 책을 읽을 마음이 없는 사람들. 누군가는 읽지 않고서도, 그것을 읽었다는 지식을 내세우려, 혹은 읽었다는 충만감을 느끼려 이러한 서평모음집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반면 다른 누군가는 앞으로 읽게 될 책들의 어떤 길잡이로 생각하고 이러한 책들을 볼 것이다. 즉 앞으로 읽게 될 책들의 어떤 맛보기로. 아무튼 확실한 것은, 전자이든 후자이든 간에 서평모음집을 읽는 사람들은 머리 속이 꽤나 복잡해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또한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하나는 그가 별로 관심없던 주제들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내용을 머리 속에 단편적으로나마 집어넣게 될 것이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앞으로 그가 사게 될 책들의 목록을 생각하고, 그 가격을 어림잡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전자의 사람이나, 후자의 사람이나 이 책 <책을 읽을 자유>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전자의 사람들은 인문학적인 교양에다, 지젝, 데리다, 라캉, 고진 등 주요 현대철학자들의 간단한 이론적 개괄까지 머리 속에 넣게 될 것이고, 후자의 사람들은 어떤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구입해야 할 책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 책은 전자의 사람들보다는 후자의 사람들에게 조금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신형철이 얘기한 바대로, 로쟈 서평들의 강점은 두 권 이상의 책을 무리없이 연결하는 것이다. 즉 로쟈는 어떤 주제에 대한 개괄적인 책들에서부터 심화된 책들까지 부드럽게 독자를 이끌고 간다. 그리고는 그 주제에 있어서 읽어볼 필요가 있는,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책들도 은근슬쩍 끼워넣는다. 그리고 책의 내용에서부터 번역 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각 책들을 짚어 나간다(이 책의 또다른 강점은 로쟈의 번역에 대한 지적이다. 로쟈만큼의 인문학적 내공을 갖춘 번역가들이 많지 않은 탓이다 -). 그것은 아마도 로쟈의 오랜 독서 내공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누구나 쉽게 흉내내기란 어려운 것이다.

글쎄. 그럼에도 이 책을 추천하기에 약간 주저되는 부분은 있다. 전체적으로 주제별로 서평들이 잘 분류되어 있으나, 철학이나 문학비평 등 일부의 주제들로 편중된 경향이 있고, 일부의 글들은 너무 깊게 파고 들기도 하고, 혹은 너무 훑고 지나가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발표되는 지면들이 달랐던 탓으로 보인다. 그는 책의 앞 부분에서, 서평꾼과 서평가, 서평자와 그들이 쓰는 리뷰를 구분하고 있는데, 지면의 성격에 따라 요구되는 리뷰의 급도 다르며, 내용적인 밀도도 분명히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주간지, 문학비평지, 신문, 인터넷 공간 등 여기에 실린 글들이 다양한 매체에 수록된 것이었던 것 만큼, 약간은 산만한 경향이 있고, 중첩되는 내용의 글들도 있다. 즉 그만큼 책의 전체적인 구성의 밀도는 떨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괜한 트집잡기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로쟈의 책읽기 2000-2010'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는 대로, 이것은 그저 지난 10여 년간 로쟈가 성실하게 써 온 독서일기들을 묶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매체가 요구하는 대로, 다양하게 써온 것이 아마도 로쟈의 잘못은 아닐 터. 그저 독자는 취사선택하여 잘 읽으면 될 일이다.

어쩌면 나의 이 볼멘소리는 다른 것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다른 것이란, 무엇보다도 로쟈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리송해 보인다는 물음이다. 신형철은 "예나 지금이나 로쟈는 "회색인"이다"라고 썼고, 또 "그러나 나는 인간 이현우가 아니라 필자 로쟈에 대해서밖에 모른다. 인간 김해경이 필자 이상李箱으로 변신한 뒤 김해경을 거울 속에 가둬버린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로쟈의 글에서도 이현우의 모습은 흐릿하다."고도 했다. 내가 보기에도 로쟈는 자신의 여러 글들에서 모호한 입장들을 내비친다. 그것도 아주 군데군데에서만. 그것은 분명 이 서평집이라는 책의 속성에서 기인된 문제일 것이다. 영화평론가들이 영화 뒤에 숨어 있는 것처럼, 음악평론가들이 객석 한 귀퉁이에 앉아 있는 것처럼, 서평가들은 책 뒤에 숨어서 책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자신을 아주 조금씩만 내비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로쟈의, 아니 이현우의 책들을 어서 보게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그가 자신의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에 어서 굴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책을 읽을 자유'가 있는지를 가만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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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에게 깊은 연민을, 그리고 고귀함을.

The Book | 2010. 11. 13. 00:03 | Posted by 맥거핀.

나는왜쓰는가조지오웰에세이
카테고리 정치/사회 > 정치/외교 > 정치일반 > 정치비평에세이
지은이 조지 오웰 (한겨레출판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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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서평단 리뷰의 하나로 썼습니다.


조지 오웰은 1903년에 태어나서, 1950년에 죽었다. 1903년에서부터 1950년은 전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특히 유럽에 있어서는 격동의 시대였고, 구체제가 몰락하는 시기였으며, 일종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시기였다. 책 뒤의 조지 오웰의 연보를 살펴보면, 그가 이러한 격동의 시대에서 얼마나 다이내믹한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명문 이튼 스쿨을 졸업했지만,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버마에서 경찰 생활을 하였고, 유럽의 밑바닥 생활을 스스로 자원하여 체험하였으며,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였다가 적과 내통하는 자로 몰리기도 하였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 BBC에서 라디오 프로듀서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의 다양한 경험들은, 그가 집필한 수많은 에세이에 여실히 녹아들어가 있다. 그 일부인 29편의 에세이를 묶은 것이 바로 이 책 <나는 왜 쓰는가>인데, 이 에세이집은 그간 <동물농장>과 <1984>의 작가로만 널리 알려졌던 조지 오웰의 여러 다른 면모를 잘 드러내 준다.


먼저 드러나는 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및 '정치와 영어', '작가와 리바이어던' 등에서 보이는 엄정한 작가로서의 면모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작가의 글을 쓰는 동기를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의 4가지로 나누어 말하면서, 본인이 지난 10년을 통틀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중 방점을 찍어야 할 부분은 '정치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부분이다. 물론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라는 그의 말에서 비추어 보듯, 그가 정치적 사유와 그에 따른 태도를 글쓰기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놓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글들이 어떤 정치적 팜플렛이 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리고 정치적인 글들이 정치적인 팜플렛의 지위를 벗어나는 순간은 그것이 하나의 예술이 될 때이다. 그의 그런 태도는 짧은 에세이 '작가와 리바이어던'에서 적확히 드러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정치와 영어'를 보면, 그의 작가로서의 언어를 다루는 태도, 그리고 동시에 그가 하나의 예술가인 작가로서, 좋은 영어를 구사하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가가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한 번의 붓터치에도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단 한마디의 글에도 가장 최적의 표현을 찾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것은, 그가 생각하기에 작가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또다른 면모는 그의 정치 저널리스트로서의 면모,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가로서의 면모이다. 그의 정치적인 에세이들을 읽어보면, 사실 그의 정치적인 소견이 상당히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자신이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라고 밝힌 것처럼, 그는 생애 내내 전체주의에 맞서는 것을 일종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또한 식민지 시대 버마에서 경찰 생활을 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르지만,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가졌으며, '간디에 대한 소견'에서 밝히는 것처럼. 맹목적 평화주의에도 그것의 비현실성을 들어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숙청 등을 예로 들며, 공산주의에도 내내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애국주의에 찬성하였으며, 본인 스스로 2차 세계대전 중 국가에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에 좌절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사실 그가 말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것도, 이에 비추어 보면 조금은 모호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가진 정치적 견해의 의미보다도, 이러한 견해들의 원천이 된 그의 경험이다. 즉 그의 이러한 일견 복잡해 보이는 정치적인 스탠스는 그의 철저한 경험의 산물이다. 이 말은 역으로 그가 그저 앉아서 사색과 글쓰기에 몰두하는 그런 류의 인간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소위 '행동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었고, 그가 쓰는 거의 모든 글들은 그가 휘두르는 일종의 무기였다. 그는 그가 가진 거의 유일한 무기가 글쓰기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꽤나 강력한 무기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스페인 내전에 달려가 직접 총을 들고 전장으로 나서기도 하였고, 전쟁 기간 중 국가의 선전물로 이용되는 BBC에 기꺼이 군에 복무하는 심정으로 일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전생애에 걸쳐 글과 그의 온몸으로 일종의 정치적인 투쟁을 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그럴싸한 철학 이론을 내뱉다가, 스위치 하나를 바꿔다는 것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태연하게 그와 가장 극에 있던 이론을 내뱉는 '앉아서 말만 하는 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이었다.  

동시에 이 에세이집의 많은 글들에서 그의 통찰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난다. 그것은 어떤 정치적인 통찰에서부터 미래 세계의 세상에 대한 통찰, 우리 일상 생활에 대한 통찰에까지 미쳐있다. '당신과 원자탄' 같은 글에서는 어떤 정치적인 통찰이 소름을 돋게 하며, 일부의 글들은 지금 시대에도 어떤 미래 리포트의 일부로 가져다 놓아도 손색이 없다. '코끼리를 쏘다', '행락지'와 같은 글들은 우리 미래의 생활에 대한 일종의 예언으로서, 더 나아가 인간의 삶에 대한 깊숙한 통찰로서 놀라운 식견을 보여주며, '"물속의 달"'을 통해 일종의 자기반영적 예언이 된다.  

(전략)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고의 행복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포커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한꺼번에 하는 데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울러 삶이 점점 더 기계화되는 현실에서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가, 옛것을 선호하는 감상적 취향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십분 정당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행락지' 中, p. 247-248.


한편으로, 그는 현실을 꿰뚫어보는 사람들이 늘 그러하듯, 냉소적이었다. 그의 어떤 냉소들은 그가 쓴 글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미래 사회의 끝을 어느 정도는 예견하고 있었고, 동시에 현 시대의 세상이 어떠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굴러가는지 막연하게나마 깨닫고 있었다. 그의 그런 깨달음은 분명히 막연한 것이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막연한 깨달음이나마 갖추고 있지 못하기에 그것은 분명히 가치 있는 것이었고, 동시에 그를 괴롭히는 것이기도 하였다. 어쩌면 그가 이튼 졸업생으로서 유일하게 식민지 경찰 생활을 택하고, 그 이후에 빈민의 삶에 스스로 뛰어든 것은 천재적인 통찰가들이 흔히 보여주는 일종의 '부조리함에 스스로 처하기' 혹은 '운명에 맞서기'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많은 글들은 그가 밝힌대로, 전체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이지만, 동시에 어떤 불안한 예감 같은 것들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냉소로 나타나기도 하고, 우려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가 <1984>와 같은 소설을 구상한 것도 아마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어쩌면 그는 우리의 세계가 이대로 진행된다면, 분명히 1984년에는 그와 같은 전체주의의 세계가 거대한 권력을 이루리라고 믿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의 글로서, 그리고 온 몸으로서 끊임없는 투쟁은 나에게는 어떤 두 가지의 심상을 불러 일으킨다. 그 하나는 일종의 연민이다. 이미 끝을 아는 사람들, 혹은 전체적인 면모를 아는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일종의 패배주의가 깃든 자기방어. 그리고 현실주의자들이 가지게 되는 냉소들과 그것이 자아내는 일종의 자기 혐오들이 일으키는 연민 말이다(물론 이것은 조지 오웰에 대한 연민만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고귀함이다. 패배가 주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개의치 않고, 자신의 병약한 몸의 뼛가루를 재료 삼아 글을 쓰며, 계속 맞설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세는 고귀함 외에 다른 무엇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는 현실의 통찰을 통해 인간이 결코 선한 동기로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 선함을 믿으려고 애썼다.

오웰의 예상과는 달리 1984년에 우리는 조금은 다른 세계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조금은 다른 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1984년도 세계의 상당수는 전체주의의 세계였으며, 전체주의의 세계는 아직도 여기저기 곳곳에 그 기운이 남아있다. 그리고 내가 오웰만큼의 통찰력은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적어도 거의 확실해보이는 것은 이 전체주의의 기운은 영원히 어딘가에는 남아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지나간 역사를 바꾸려 들 것이고, 단어의 의미를 바꾸고자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아직도 수많은 오웰들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오웰들에게 깊은 연민을. 그리고 고귀함을. 

스코티 말고는 모두가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압수당해 혼자만 담배 없이 있는 그를 보기가 너무 딱해서 나는 담배 말아 피울 재료를 그에게 좀 주었다. 우리는 부랑자 감독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린 학생들처럼 숨겨가며 담배를 피웠다. 담배는 묵인해주되 공식적으론 금지였던 것이다. (중략)
그 때 뒤에서 서둘러 다가오는 발소리가 나더니 누가 내 팔을 두드렸다. 키 작은 스코티였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우릴 쫓아온 것이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녹슨 깡통 갑 하나를 꺼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신세 진 걸 갚으려는 사람의 표정 같았다.
"자 이거, 친구."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자네한테 담배를 좀 빚졌잖아. 어제 나한테 선심을 썼지. 아침에 나올 때 부랑자 감독이 내 담배꽁초 갑을 돌려주더라구. 친절은 베풀면 돌아온다니까. 자 여깄네."
그러면서 그는 내 손에 눅눅하고, 다 썩어빠지고, 구질구질한 담배꽁초 4개를 쥐여주는 것이었다.

'스파이크' 中, p. 1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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