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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끝났다

The Book | 2013. 10. 16. 16:57 | Posted by 맥거핀.
왜우리는불평등을감수하는가가진것마저빼앗기는나에게던지는질문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지그문트 바우만 (동녘,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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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유동하는 근대' 시리즈로 잘 알려진 지그문트 바우만의 새 책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123페이지라는 짧은 쪽수와 사륙판이라는 작은 사이즈, 그리고 비교적 작지 않은 폰트를 가진 간단하게 읽을 수 있는 팜플렛이나 선언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만큼은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질문은 명확하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왜 우리는 가지고 있는 작은 것마저 빼앗기면서 가만히 있는가(혹은 그 '빼앗김'을 도리어 옹호하고 있는가)? 그러나 원래 질문이 간단하고 명확할수록 대답은 조금 더 긴 사색을 요하는 법이다. 바우만의 방법은 이렇다. 먼저 우리가 얼마나 경제적 불평등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객관적인 수치로 보여줌으로서 우리의 사실적인 판단력이 작동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 불평등의 옹호에 내재한 4가지의 '부정의의 교의'를 살펴보고, 그 '부정의의 교의'를 깨부숨으로써 우리가 논리적 정당성을 갖추고, 이것이 행동의 의지를 일으키도록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사실에 의거한 판단과 논리가 결합된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다.

바우만이 먼저 제시하는 것은 여러 자료들에서 찾아낸 불평등의 양상들이다. 경제적으로 '20대80의 사회'라는 이야기는 이제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자료들이 보여주는 것은 현재는 거의 1대99의 사회이거나 0.1대99.9의 사회, 혹은 그 이상의 사회라는 사실이다. 대략적으로 '전 세계 최고 부자 1000명의 부를 모두 합하면 가장 가난한 25억 명의 부를 모두 합한 것의 거의 두 배가 된다.'(p.18) 혹은 전 세계 인구 중 상위 20퍼센트가 생산된 재화의 90퍼센트를 소비하고 있는 반면, 가장 가난한 20퍼센트는 불과 1퍼센트만을 소비하고 있다(p. 19). 문제는 이것이 계속 악화되고 있으며, 급격하게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1960년에 미국 최고 대기업들 최고경영자의 세후 평균 보수는 공장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의 12배였다. 1974년에는 이것이 35배가 되었고, 1990년대 중반에는 135배, 1999년에는 400배, 2000년에는 531배가 되었다(이와 비슷한 수치들은 다른 부분에서도 수없이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세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는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의 경우만이 아니고, 전세계에서 중산 계급들은 점점 '프리카리아트(불안정한 고용이나 노동 상황에 놓인 비정규직, 파견직, 실업자, 노숙자들을 총칭하는 말)'로 전락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런 경제적 불평등은 비단 경제 부분만이 아니고, 사회의 전부분에 걸쳐서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점증하는 경제적 불평등은 점증하는 사회병리와 큰 상관관계가 있음을 관련한 연구들은 보여준다. 마지막 하나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일텐데, 그것은 이 마지막에는 파국이 기다리고 있으며, 이 파국은 매우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평등은 왜 감소하지 않는가? 아니 감소하기는 커녕 왜 도리어 가속도를 붙여가고 있는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소수의 부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기이한 믿음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용어로는 '낙수효과'라고 부를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비슷한 다른 표현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이러한 것들이다. 부자들의 감세가 경제를 발전시킨다. 삼성이 잘 되어야, 우리나라가 잘 된다.) 바우만이 이러한 기이한 믿음을 부수기 위해 채택한 전략은 이 표면에 자리잡은 '교의'를 직접 공략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교의'에 내재한 '부정의의 교의'의 기만들을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다. '부정의의 교의'는 큰 소리로 선언되는 확신들을 뒷받침하고 '타당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암묵적인 전제들로서, 지금까지 숙고되거나 검토된 적이 거의 없다. 그것들은 언제나 암시만 될 뿐 분명하게 표현되는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믿음들을 가지고 생각한다(p. 35~36).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고 있는 이 '기이한 믿음'에는 몇 가지의 암묵적인 믿음들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 믿음들을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바우만의 말이다.

바우만이 보여주는 네 가지의 내재된 믿음, 즉 부정의의 교의는 다음과 같다(p.49).

1. 경제성장은 공생에서 생기게 마련인 과제들을 처리하고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새로운 소비 대상들의 가속적인 교체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거나 혹은 적어도 중요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길일 것이다.
3.  인간들만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의 가능성들을 삶의 불가피성에 맞춰 조절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반면, 삶의 원칙들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손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4. 경쟁(가치 있는 사람들은 올라가고 가치 없는 사람들은 배제되거나 추락하는 양면을 지닌)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정리하자면 불평등과 경쟁은 사회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할 수밖에 없거나 필요한 것이고, 그러한 것을 감수하고라도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소비가 필요하다는 교의, 혹은 믿음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이 교의들이 거짓말이거나, 혹은 더 큰 거짓말을 불러올 수 있는 믿음임을 다음의 이야기로서 보여준다.

1. 경제성장은 사회의 모든 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낙수 효과는 없고, 경제성장은 이미 많이 가진 사람들의 부만 더 늘려주고 있음을 수치들은 보여준다. (예를 들어 2007년의 신용 붕괴 이후 미국의 GNP 증가분의 90퍼센트 이상이 가장 부유한 1퍼센트의 미국인들에게 돌아갔다.)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p.59).
2. 행복에 이르는 것이 소비라는 말은 현재의 부정의를 잊게 하는 당의정에 불과하다. (9.11 다음날 당시 대통령 부시가 제시한 최선의 행동 수칙은 '쇼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현재 공공연하게 제시되는 소비 권장 메시지는 소비를 놓고 대중들이 서로 경쟁하게 만듦으로써 대중들의 협력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소비사회에서 (슬로푸드 운동과 같은) 공공의 협력으로 나아가야 한다.
3. 불평등이 당연한 것이라는 오랜 믿음은 사회적 불평등을 무리없이 수용하게 하면서, 오히려 그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불평등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회의 질서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옆에 사람이 조금 더 가지거나, 자신의 생활수준이 조금 더 나빠지는 것을 부정의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우리는 작은 불평등에 분노하지만, 커다란 불평등은 정상적인 것, 혹은 자연의 섭리라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는 오랜 교육과 훈련으로 만들어진다.
4. 소비사회에서 소비자와 물건이라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우리는 인간사회에마저 적용하고 있다. 상대방을 주체로 대하는 정당한 인간관계는 상대방을 객체로 대하면 되는 경쟁관계보다 더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협력과 공생보다는 경쟁이 우선 순위가 된다. 이는 소비사회의 특징이며, 그것을 쇼핑몰들은 보여준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인간의 선의와 친절보다는 입구에 있는 CCTV나 무장경호원에 더 의존한다.

...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맥이 풀렸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이렇게 얘기하고 싶을지 모른다. 아니 겨우 그런 얘기하려고...그거 별로 안 좋은 거는 우리 모두 잘 알잖아요. (혹은) 별로 좋은 건 아니지만, 그거 어쩔 수 없는 것이잖아요. 그런 말 많이 해왔지만, 여전히 사회는 이 모냥, 이 꼴이잖아요. 모두들 다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경쟁하고 소비하면서 사는데, 나 혼자 협력하고 선의와 친절을 보여주고 소비를 줄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후....맞는 말이다. 그것은 바우만도 인정한다. "우리가 소망하거나 없애버리기에는 너무 강력하고 벅찬 것들을 지칭하기 위해 '현실'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p.111) 그러나 여전히 포기해서는 안되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두 가지의 이유라기보다는 하나의 모순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이제는 끝났다. 이제는 다가오는 파국을 멈출 기회도 희망도 없다. 둘째,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말하고 생활방식을 바꿈으로써 말과 행위의 간극을 줄이려, 파국을 막으려 노력해야 한다.

바우만은 말한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하는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p.114) 어느 작가는 1939년 8월 23일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끝났다. 내가 진짜 작가라면, 나는 전쟁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끝났다'는 진술이 아니라, 그가 이 진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 진술을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작가를 '진짜'작가로 만드는 것은 현실에 대한 말의 영향력이고, (진술을 한다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말이 현실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후...당신이 이것으로도 마음이 조금이라도 동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혹은 차라리 파국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또 어쩔 수 없다. 그러나 1925년생으로 나치와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겪은 노학자는 파국을 막기 위해 글을 쓰면서 애쓰고 있다. 나도 파국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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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의 자기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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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과학 > 교양과학
지은이 로버트 트리버스 (살림,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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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저자 로버트 트리버스 박사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서 기만(속이는 것)과 자기기만(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다. 가정에서, 남녀관계에서, 사회적인 관계들 하에서, 일상생활의 사소한 부분에서, 보다 큰 국가적인 영역에서, 종교에서, 혹은 사회과학 분야와 같은 학문 영역에서 그러하다. 특히 비행기 사고나 챌린저호 폭발과 같은 거대한 항공 우주 재난이나 전쟁과 같은 부분에서 이러한 기만과 자기기만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저자는 챌린저호 폭발에서 나타난 NASA의 경우, 미국의 이라크 전쟁,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과 같은 여러 예를 통해 그 양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자기기만은 기만에서 출발하고 있고, 기만이 하나의 개체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러한 기만은 우리 인간들만이 아니라 인간 외의 거의 모든 종이 행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뻐꾸기가 자신의 알을 다른 새의 둥지에 낳아, 그 새가 기르도록 하는 탁란과 같은 것이나, 암컷을 흉내내 수컷 옆에 자리잡고 있다가 진짜 암컷이 오면 재빨리 그 암컷과 먼저 교미를 해버리는 의사(疑似) 암컷(그러니까 사실은 수컷), 혹은 자신의 몸짓을 더 커보이게 하거나 색깔을 바꿈으로서 위장하는 것, 포식자가 나타났을 때 죽은 척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 등등도 모두 기만이며, 이러한 기만의 형태는 한 인간이라는 각각의 개체 내부에서 자기기만의 형태로 나타난다. 

즉 인간은 다른 인간을 속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마저도 속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마도 다른 동물들도 자기기만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저는 그것이 제 알이 아니라고 제 자신마저도 속였답니다."라고 울먹이며 고백하는 뻐꾸기가 보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것의 양상은 예를 들어 자기(의 능력 혹은 외모 등등)를 부풀리거나 과신하는 것, 남을 폄하하는 것, 내집단 구성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이나 내집단 사람들이 더 뛰어나다고 믿는 것(한글의 우수성!), 자신이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느끼거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을 통제할 수 있다 혹은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 것(저번 주에는 로또 번호 1이 나왔으니 이번 주에는 나올/안나올 거야), 편향된 사회이론을 구축하거나 거짓된 개인 서사 혹은 집단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자신의 긍정적인 행동만을 기억하는 것) 등등의 여러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기만은 대체로 일시적으로는 어떤 위안이나 이득을 그 자기기만을 행하는 개체에게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전쟁이나 국가적 자기기만 서사의 위험성을 일일이 설파하지 않더라도, 사소한 예만으로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로또 번호를 면밀히 분석하여 이번 주에는 반드시 로또가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적어도 한 주 동안은 행복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다음 주에 다시 새로운 분석기법을 개발해야 할 것이고, 다음 주에는 분노에 휩싸여 더욱 많은 로또를 구매할 것이고, 더욱 많은 소주를 소비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아마도 자신에게 해가 될 가능성이 더욱 높은 자기기만을 왜 행하는 것일까? 저자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진화적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라고 종합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자기기만을 하는 것은 내 어떤 의식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 무의식이 혹은 내 유전자가 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의 극단적인 예가 남녀관계, 섹스에 얽힌 문제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남녀관계, 부부문제에서의 수많은 자기기만이 이것에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남성은 섹스를 하기 위해서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거짓 감정(자기기만)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번식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두말할 여지도 없다. (아..얼마나 많은 수많은 여자들이 "너를 사랑해."라는 말에 속아 침대로 기꺼이 따라 들어갔던가. 물론 이것은 여자만 속이는 것은 아니며, 남성들 자신들도 실제로 이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또한 여성은 배란기에 전반적으로 성적으로 활기를 띠며, 배란기에는 노출이 더 잦아진다. 또한 배란기에는 상대적으로 우수한 유전적 자질을 지닌 남성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진화적으로' 개체에 이익을 준다.) 물론 이것은 수많은 자기기만들 중에 일부에 불과하며, 의식적이라기 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음..배란일이니까 조금 더 파진 옷을 입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여자는 거의 없다는 말이다.) 즉 이것은 유전자가 시켜서(이기적 유전자) 하는 것이며, 그것의 상당 부분은 그 개체의 유지, 진화와 관련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 이러한 대목들에서 스즈키 코지의 <링> 시리즈가 생각났는데, 결국 비디오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자체의 번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디오는 이후 다른 형태로 진화해나갔다. <링> 시리즈는 공포물이 아니라 아마도 진화생물학적 과학 영화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즉 그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종의 진화적 이익과 관련된 것이라고 해도 저자 로버트 트리버스는 결국 우리는 그 자기기만들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의 마지막 14장의 제목은 '우리 삶에서 자기기만과 싸우기'이다.) 그것의 이유를 저자가 마지막에 이야기한 간단하고 개인적인 이유, 즉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던가,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즉 자기기만을 줄이려 애쓰는 것이 멸종으로 내몰릴 일이 없는 전략이기 때문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책 전체를 놓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책의 나머지 전체에서 그러한 자기기만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는 계속 되풀이하여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승리를 과신하고, 상대방의 전력을 한껏 폄하한 상태에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나(이것은 또한 전쟁이 결국 개체수를 줄이고 강한 개체만 남김으로써 진화에 이익을 주는 것이라는 이상한 합리화와도 연관된다. 물론 이 말들이 추운 나라의 열차를 만들었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자신들이 마땅히 살아야할 곳으로 돌아간 것이라는 자기기만적인 논리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자 대학살, 혹은 명확한 불안신호들을 애써 무시함으로써 죄없는 7명의 우주비행사의 생명을 앗아간 챌린저호의 비극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이 책의 수많은 예들은 자기기만의 논리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 자기기만이 빚어낸 크고 작은 댓가(비용)들을 반복하여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한탄, 아..얼마나 수많은 여자들이 "오빠 믿지?"라는 말에 속아 모텔에 따라 들어갔던가. 그러나 비(희)극적인 건 그렇게 말하는 그 자신도 그 믿을 수 없는 '오빠'를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저자가 마지막에 애써 제시하는 자기기만과 싸우기 위한 전략들 - 정신이 혼란스러울 때는 생각 중인 행동을 피하라던가, 어떤 변수를 추정할 때는 처음 추정한 값에서 30%를 줄이라던가, 불편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미리 생각해 두라던가, 기도와 명상을 활용하라던가 등등의 - 이 영 미덥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맞서서 싸우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어 보이기는 한다. 물론 그 싸움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싸움일 것이 거의 분명하지만 말이다. (당신은 당신의 무의식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덧. 
그러므로 이 책을 읽고나서 보다 긍정적인 반응은 이런 '이 정도 썼으면 그래도 욕은 안 먹겠지'싶은 자기기만이 가득한 리뷰보다는 보다 곰곰이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자기기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일 터이다. 물론 저자가 "기만과 자기기만 연구의 한 가지 좋은 점은 사례가 부족할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이다."(p.524)라고 말한 것처럼 내가 한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기기만은 15년 동안 사설감옥에 갇혀서 자신의 악행을 기록했던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노트 한 두 권으로 끝날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 한정하여 지금 리뷰를 쓰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서만 생각해보면 사실 글을, 특히 이런 리뷰를 쓴다는 것 자체가 사실 일종의 지속적인 자기기만에 가깝다. 나는 이 책의 내용 중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 혹은 내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 혹은 내가 조금 더 잘 떠들 수 있는 것을 자유롭게 취사선택하며, 사실은 내가 좋은 리뷰를 쓰고 있다고 자기기만을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물론 자기기만은 분명히 '글'을 쓰는 아주 큰 동력을 제공해주기는 한다.) 이 책의 리뷰가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 영화 리뷰 같은 어떤가. 영화 리뷰란 결국 자신이 보고자 하는 대로 영화를 보는 것이고, 쓰면 쓸수록 계속 그 자기기만을 강화하여 나름의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영화라는 것 자체가 어차피 편향된 창작물이며, 어차피 자기기만을 하는 것이 자신만족 뿐인데 무엇이 상관인가,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타인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9000원을 날리게 하거나, 2시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 수도 있다. 또 그것이 아니더라도 다른 많은 것과 연관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수많은 차가운 혹은 뜨거운 반응은 감독의 창작 욕구를 저해시키거나 증진시킬 수도 있고, 혹은 영화에 대한 논쟁은 다른 방향으로의 논쟁으로 번질 수도 있다.)

아니면 서평단의 경우라면 어떨까. 예를 들어 자기기만과 관련된 것이라면 다음과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서평단들은 각자 나름 몇 권의 책을 추천하고, 그 추천한 책들 중에서 한두 권이 선정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체로 본인이 추천한 책에는 리뷰 시에 더 좋은 별점(점수)을 주는 경향이 있다. 시험 삼아 지난 서평단에서 선정된 책 중 6권을 뽑아 그 책을 추천한 사람과 추천하지 않은 사람의 별점을 비교해 보는 잉여짓을 해봤다(이런 잉여짓은 LG 야구를 보면서 해야한다. 요즘 LG 야구는 열심히 보면 빡치고, 대충 보면 이기는 것 같다. 오늘도 이겼다. - 그리고 물론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자기기만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한다고 믿는 것). 예상대로 6권 중에 5권의 경우에 추천한 사람들의 별점평균이 추천하지 않은 사람의 별점평균보다 최소 0.3 이상 높았다(다른 한 권은 거의 같았다). 이것을 서평단의 자기기만이라고 부른다면, 이 자기기만은 내집단/외집단 문제와 관련된 것일 터이다. 즉 내가 추천한 책이니 이 책은 '내집단'이 되는 것이고, 더 좋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악영향을 미칠까. 여러가지를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책을 보는 안목을 더 떨어뜨릴 수 있고(사실상 안좋은 책인데, 본인이 좋은 책이라고 믿어버림으로써) 실제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게 함으로써 별 관심없던 타인에게 그 책을 구매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타인에게 그 책을 구매하게 한다는 것은 온라인 서점이나 출판사의 이익이며, 그것은 이 서평단을 계속 유지시킬 하나의 필요성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서 이 자기기만은 이 서평단이라는 '종'의 유지와 진화에 기여를 하고 있다. 이 책의 다른 모든 자기기만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자기기만이기 때문에 우리는 맞서 싸워야 할까. 잘 모르겠다. 적어도 이 책은 내가 추천한 책이 아니니 나는 상관이 없다. 그러니 나는 내 마음대로 점수를 주겠다. (그러므로 내 별점은 신뢰할 만하다고 나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자기)기만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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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폭력의 자유>는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라는 부제에 걸맞게 일제시대부터 이명박 정권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언론의 모습을 시기별로 나누어 추적하고 있다. 저자 김종철 씨는 그 자신의 삶이 곧 한국현대사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는 1967년도에 처음 동아일보사의 기자로 들어가서 1975년 강제해직 당했으며, 그 이후 몇 차례의 옥고와 더불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대변인과 사무처장을 지내다가 한겨레신문 창간에 동참하여 1998년까지 논설간사 및 편집부위원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현재에는 동아일보사 해직언론인 모임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 즉 그의 경력 자체가 권력의 개입과 굴종, 또한 그에 맞선 언론인의 양심적인 투쟁으로 점철된 우리의 파란만장한 언론 현대사의 모습을 드러내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만큼 그는 때로 이 책에서 시대별로 일어난 사건들을 그대로 나열하는 것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1960년 4월 혁명에서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겪었던 혁명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1975년에 있었던 동아일보사 기자 및 직원들의 강제해직 사건, 80년대 전두환 정권에 맞선 해직언론인들의 투쟁, 1988년 국민 모금에 의한 한겨레신문의 창간 등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로 생생한 경험을 들려주기도 한다. 

책의 구성 및 내용에 있어서 두 가지 점이 눈에 띄는데, 먼저 하나는 책의 이야기가 ('네오'님도 지적하셨듯이) 1910년도 일본의 강제 조선 병합과 제국주의 일본의 소위 '문화정책'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강제병합 후 강력한 경찰력을 바탕으로 무단통치를 자행하다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정책의 방향을 바꾸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문화통치'로 사실상 그 이름의 의미와는 다르게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조선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 한 부분이 '합법적 언론'의 허용이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탄생한 것이 김성수의 '동아일보', 예종석(후일 방응모)의 '조선일보', 민원식의 '시사신문' 등이었다. 즉 근대 언론의 시작에서 흔히 언급되는 서재필, 윤치호 등의 '독립신문'을 건너뛰고, 일제의 사실상의 간섭과 통제 하에서 창간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흥미로운데, 이는 아마도 특히 권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언론의 역사를 보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저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현재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를 포함한 한국의 근대 언론의 시작은 자유로운 의지의 탄생이 아닌, 사실상 관과 합작하여 탄생된 반쪽짜리 언론이었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현재까지도 자신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은 민족지였음을 자랑스레 내세우지만, 그것은 '일장기 말소사건' 등 일부의 경우 뿐이고(책에 따르면 이 역시도 젊은 기자들이 주도한 거사일 뿐, 사주와 고위간부들은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탄생부터 일제 말기까지 친일의 모습을 보인 '反 민족지'에 가까웠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밝히듯 한국언론의 역사를 '민중의 벗인가 공공의 적인가'라는 관점으로 살펴보려 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한국언론의 역사가 결국 어디에 더 가까웠는지를 밝히는 것은 뒤를 굳이 읽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썩은 씨앗에서 올곧은 줄기가 나오기는 힘든 법이다.

다른 하나는 일제시대부터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각 정권 별로 챕터가 나뉘어 구성되어 있으며, 각 챕터가 다른 비중 및 분량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책에서 가장 큰 비중 및 분량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박정희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시기인데, 책의 성격 및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이 시기가 언론이 가장 큰 통제 및 고난을 겪었던 때였으며, 또 그에 따른 언론의 투쟁 역시도 가장 격심했던 때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기관원이 신문사 편집부에 상주하여 신문의 편집과 발간에 일일이 간섭을 하고, 동아일보사 및 여러 언론사에서의 대량 해직 및 그에 맞서는 기자들의 노조 창립과 복직 투쟁이 잇따르던 때였다. 또한 이명박 정권 시기에는 전례 없었던 방송사들에 대한 낙하산 사장들의 투입 및 마음에 안드는 언론인 솎아내기, 그리고 그에 대한 언론사 총파업 및 대 정권 투쟁이 불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정권 시기에 정부가 언론에 개입하거나 언론이 정부에 맞서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른 정권 시기에도 여전히 언론과 정부는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것은 폭압적 독재정권 시기에는 정부의 회유 및 간섭, 그에 따른 굴종이나 투쟁의 양상으로 또한 소위 진보정권 시기에는 보수언론과 정부의 대결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즉 한국현대사에서 언론은 사주 및 구성원들의 성향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줬으며, 또한 동시에 각 시기별로도 재빨리 가면을 바꿔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단지 대형 보수매체들의 문제만이 아니었으며, 소위 진보언론도 때로는 여론을 호도하기도 했다. 저자의 관점대로라면 지금까지 한국현대사에서 언론은 민중의 벗이라기 보다는 공공의 적에 가까웠으며, '압제를 극복하는 자유언론'도 아직은 멀다.

물론 그것은 언론인이나 이 책이 타겟으로 하고 있는 '언론인이 되려는 젊은이'들이 조금 더 고민해야 할 문제고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면 몇몇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 먼저 한 가지는 책이 너무 정치와 권력과의 상호작용적인 관점에서만 언론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이 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언론이 다루는 모든 내용이 정치에 대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현대 언론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거의 모든 내용이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 그에 따른 투쟁, 또는 각 정치 사안에 대한 여러 언론사의 반응들로만 채워지다 보니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친 느낌이다. 전체적인 사회의 감시자로서 여러 다양한 시각에서 각 언론들의 모습을 다루는 것이 보다 더 '한국 현대언론사'를 조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각 시기별 주요 사건들이 너무 수박겉핥기 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현대언론사의 격랑 한 가운데에서 여러 사건을 넘나든 저자의 이력으로 비추어 볼 때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가 너무 전체 사건을 편년체 형식으로 기술하려다 보니 특정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결여되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한겨레신문의 창간 과정에 있어서도, 당시 시작부터 깊숙이 개입했던 저자로서, 당시 내부의 이야기나 어려운 점들, 혹은 창간 과정의 문제점 같은 것을 자세히 들려줄 수도 있을 텐데, 저자는 너무 알려진 사실들로만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것은 여러 사건들에 대한 각 언론의 보도 양상을 다루는 부분들 같은 데에도 마찬가지인데,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에서 어떤 언론사가 어떤 보도를 하였는가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왜' 그런 보도를 하였는가의 문제일 것이고, 그것에는 언론사 내부의 경제,권력구조 및 여러 역학관계, 정부와의 관계, 사주의 성향, 기자들의 취재방식, 언론사 간의 관계 문제 등등 우리가 실상 잘 모르는 여러 문제들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언론사 내부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저자라면 이 '우리가 실상 잘 모르는 여러 문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내부자의 목소리로) 자세히 들려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각 현안들에 대한 여러 언론의 상반된 리포트는 이미 수없이 알려진 내용이다. 이를 반복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읽다보면 이것이 한국현대'언론사'인지, 아니면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인지 잘 모르겠다.) 즉 이 책은 사실 조금 어중간하다. 한국현대언론사라고 부르기에는 언론의 모든 내용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내용, 즉 한국현대사에서의 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그리 깊숙이 추적하고 있지도 못하다. (부록에서 보여주는 미국의 머독과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와 같은 권력과 결탁한 언론을 다루는 부분은 본문 내용의 반복에 가깝고, 위키리크스를 다루는 부분은 '압제를 극복하는 자유언론'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좀 쌩뚱맞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왓치맨>에서 나온 것처럼 '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언론이 사회의 감시자라고 했을 때 그 감시자들을 감시하지 않는다면, 감시자들은 곧 또다른 권력자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지난 역사는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위 진보언론들은 물론이거니와 책에서 하나의 예처럼 제시된 위키리크스도 마찬가지이다(어쩌면 그들의 힘이 꽤나 강력하다는 점에서 보다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결국 각각의 개인들이 감시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보수언론들의 잘못된 보도 행태를 꾸준히 지켜보고 스스로 걸러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난 이명박 정권이나 현 박근혜 정부 하에서 정부에 대한 언론인들의 투쟁에 지지를 보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지를 보낸다는 것은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지켜본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언제까지나 민중의 벗인 언론은 없다. 그것은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의 생리이다. 꾸준히 그들을 감시하지 않으면 언제 감시자들이 우리를 억압할지 모를 일이다.


덧.
책 제목은 참 아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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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보다 빠른 텔레파시가 가능할 날

The Book | 2012. 12. 3. 16:19 | Posted by 맥거핀.
얽힘의시대대화로재구성한20세기양자물리학의역사
카테고리 과학 > 물리학
지은이 루이자 길더 (부키,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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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자 길더의 이 책 <얽힘의 시대>는 양자물리학의 근본 개념 중의 하나인 '양자 얽힘' 현상과 그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나에게 그렇다면, 양자물리학, 양자얽힘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조금이라도 알게 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양자물리학의 세계는 매우 복잡하고, 어지러우며, 그것을 이해하기는 매우 힘들다,라는 점이 아닐까.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아있다. 그것은 그 '이해못함' 마저도 이해했는지가 불확실하다는 점, 즉 '양자물리학이 복잡하고, 어지럽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했는지의 여부마저도 상당히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일찌감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좌절할 필요는 없다. 위대한 물리학자 보어마저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으니까. "만약 양자론에 대해 어지럽게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은 양자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에 누구보다도 가깝게 다가간 아인슈타인마저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아인슈타인은 그가 1935년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발표한 논문(EPR)에서 양자역학은 불완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그마저도 양자역학의 모든 비밀을 밝혀내지도, 그러므로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그가 이런 견해를 밝히게 해준 '양자 얽힘' 현상은 그로부터 몇십 년 후 존 벨과 일단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그 면모가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양자물리학이 그렇게 이해가 어려운 까닭은 무엇인가? 이 책을 읽고 난 후 어렴풋하게 생각하게 된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보면 그것의 이유 중의 하나는 양자물리학의 세계에는 그간 우리 세계를 작동시킨다고 믿어졌던 일반적인 원칙, 고전물리학의 법칙, 또는 만물의 근본적인 작동 원칙에 반하는 몇몇 현상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고전물리학의 법칙에 일차적으로 균열을 일으킨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그러나 이 양자물리학은 이 상대성이론의 몇몇 원칙들과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 양자물리학은 양자의 세계, 그러니까 극소의 세계, 에너지와 물질이 더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질 수 없는 궁극적인 조각인 양자의 성질에 대해 다룬다. 그런데 이 양자의 세계에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와 무엇인가 다른 일들, 우리가 그간의 상식으로 '그러하다'고 여기는 일들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진다. 그 큰 부분이 바로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양자의 '얽힘' 현상이다. '얽힘'은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둘 이상의 물질이나 빛이 떨어져 있어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물리학의 토대가 되었던 '국소적 인과성'을 가지지 않을 뿐더러, '관찰과 무관한 실재'도 아니다. 

즉 양자역학 이전의 물리학은 국소적인 인과성이나 관찰과 분리된 실재라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인과성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며, 이는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국소적 영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간의 믿음이다. 즉 한 물체는 오직 국소적인 연쇄 작용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한정된 시공간에서의 연쇄 작용에 의해서 다른 물체에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그 영향은 빛의 속력보다 빠를 수 없다(빛보다 빠른 물질은 없으므로).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다면 그의 음파가 그의 성대에서 출발해 우리의 고막에 도착했기 때문이며, 그 속도는 당연히 빛의 속도보다 느리다. 그러나 양자 얽힘 현상에서는 두 광자가 아무리 먼 거리를 떨어져 있어도(비국소성), 어떤 동시적인 운동방식을 보인다. 물론 이 동시성을 어떤 무선통신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즉 한 광자가 자신이 운동하기 전 '재빨리' 다른 광자에게 어떤 것(그러니까 데이비드 봄이 이야기한 '양자 포텐셜'과 같은 것)을 보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으려면 그 '재빨리'는 빛보다 훨씬 빠른 '재빠름'이어야만 한다. 겨우 빛의 속도로 전파되는 물리적 신호로는 그런 현상(얽힘 현상의 동시성)을 설명해낼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완전히 다른 계에 있는 두 광자라도 한 번 얽히게 되면, 그 얽힘이 아무리 먼거리에서도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오늘 아침 당신이 출근길에서 만난 한 사람과 우연히 옷깃이 한번 스쳤을 뿐인데, 그 이후로 두 사람이 얼마나 떨어져 있든 동일한 운동패턴, 혹은 동일한 상태를 보인다는 것,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빛보다 빠른 텔레파시? 

더군다나 이는 관찰과 분리된 실재도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물리학은 아니 우리의 세계는 분리가 가능하다는 믿음, 그러니까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으며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아인슈타인의 말)를 가정하고 이루어진다. 즉 예를 들어 우리가 무엇인가를 관찰할 때(물리학 때문이든 다른 어떤 것 때문이든), 그것은 관찰자의 외부에 분리된 실재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양자얽힘에서는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한 양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알 수가 없으며(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그것은 어떤 확률에 의해서만 기술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그것의 실재에 대해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확률로서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그 확률이란 측정의 확률, 관찰자의 확률이기 때문에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비분리된다. 슈뢰딩거의 실험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살았을 수도 있고, 죽었을 수도 있으며, 그것은 오직 관찰자가 보았을 때에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관찰자가 보지 않았을 때에는 이 고양이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전체 시스템에 대한 파동함수는 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살아 있는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가 섞여 있거나 스며들어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하지만) 있다고 할 것이다.(p.294)" 즉 고양이의 생사는 관찰행위의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해서 이런 관점에서는 양자적 실체들은 관찰되기 전까지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또 얼마나 웃긴 소리인가? 관찰자가 관찰대상에 영향을 미치다니?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하다는 말인가? 역시 텔레파시?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터무니 없는 발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보지 않으면 달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p.30)"

그러나 아무튼 문제는 양자물리학의 세계에 있어서 이 터무니없는 현상들이 실제로 '측정'된다는 데에 있다. 아인슈타인이나 보어, 드 브로이, 슈뢰딩거 등의 이론물리학자들의 세계에서는 사고실험(생각으로만 이루어지는 실험)에서 나타나던 것들이 존 벨이나 클라우저, 혼 등의 실험물리학자들의 세계로 넘어오며, 그러한 얽힘 현상은 실제로 실험실에서 나타났으며, 그것의 작동원리의 여러 부분은 많은 물리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의문 속에 남겨져 있다(예를 들어 그 의문 중의 하나는 양자세계에서 일어나는 얽힘 현상이 왜 그보다 큰 물질, 그러니까 양자들이 합쳐진 보다 큰 물질에서는 일어나지 않는가 등등이다. 차일링거 등은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려 한다). 그래서 아직도 어떤 물리학자들은 말한다. 양자역학은 (아인슈타인의 견해와 같이) 아직도 불완전하다고. 고전물리학은 물론이고, 상대성이론마저도 아주아주아주 쉽게 설명한다면 중고생들에게도 그것의 본질을 이해시킬 수 있지만, 양자물리학에 대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양자역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폴 디랙의 견해로는, 그러므로 현재는 양자물리학의 풀리지 않는 여러 문제가 이해되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이기이며(1급 난이도 문제- 현재로선 해결될 만한 여건이 성숙하지 않은 문제), 얽힘 현상의 구성에 큰 기여를 한 존 벨마저도 이러한 것을 1964년 마이클 나우엔버그와 공동으로 쓴 논문 <양자역학의 도덕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양자역학적 설명은 대체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 이론은 인간이 만든 모든 이론들과 마찬가지다. 특이하게도 그 이론의 최후 운명은 그 내부 구조에 명백히 잠재해 있다. 그 자체에 파괴의 씨앗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p.540)" 

그렇다면 양자역학은 단지 어렵고 불완전할 뿐인, 언젠가 다른 것(예를 들어 초끈이론)으로 대체될 한정적인 이론일 뿐인가? 분명히 그렇지는 않다. 모든 물리학은 과거의 이론에서 얻어진 어떤 것들을 가지고 새로운 것들로 발전해나가며, 그것이 과거의 이론을 모두 뒤집는 어떤 것이라도, 그것은 과거의 그 이론 없이는 탄생되지 않았다. 양자물리학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며 그것은 고전물리학과 상대성이론의 어떤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그 토대가 만들어졌다. 이를 이렇게 이야기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루이자 길더의 이 책 <얽힘의 시대>는 양자물리학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하는 방식은 조금 특이하다. 책의 각 장은 특정의 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실제의 대화, 실제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으며, 그 수많은 대화들의 장면이 중첩되어 이 양자물리학의 역사가 만들어진다. 즉 이것은 거시적인 양자물리학의 역사가 아니라, 미시적인 양자물리학의 장면들의 집합이다. 다시 말해서 이 미시적인 장면들은 모두 이 거시계 속에서 '얽혀 있다'. 그것은 개별적인 물리학자들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다. 양자물리학의 역사를 만들어낸 이 물리학자들은 책 속에서 모두 각자 나름의 역사를 부여받고 있으며(이 책은 모든 학자들에 대해 '그들이 왜 양자물리학에 빠져들게 되었는가'의 관점으로 그들의 약사(略史)를 기술한다), 이들은 양자물리학에 한 번 얽히게 된 이후에는 평생 그 양자물리학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들은 그렇게 얽혀 있었다. 즉 양자물리학이라는 것에 한 번 얽힌 이후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미스테리에 대해 동시에 골똘히 생각했다. 그들은 비국소적인 개체로서 얽혀 있었다. 이를 보다 더 큰 관점으로 보면 양자물리학은 고전물리학과 상대성이론과도 얽혀 있다. 즉 하나가 사라졌을 때 다른 하나가 존재할 것이라 가정할 수 없다.   

(책에서 한편으로 실제적인 양자물리학의 가치로서 이야기하는 예들은 양자컴퓨터, 양자를 이용한 암호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파인먼에게 있어서는 그 양자컴퓨터의 가치 또한 그것의 어떤 실생활에서의 목적보다는(양자컴퓨터는 일반 컴퓨터에서 상상할 수 없는 속도의 연산이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양자역학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한 것으로서의 가치였다. "파인먼에게 있어서 양자 컴퓨터가 지닌 위대한 의미는 그것을 만들고 작동시킴으로써 벨이 제시한 서로 관련된 입자들에게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p.533)" 즉 이것은 양자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것이 무엇을 보여주는가가 양자론의 작동방식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즉 물리학자들이 가지는 양자역학에 대한 난점을 '실제로 그것이 획기적으로 작동하는 어떤 방식'을 봄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고전물리학적인) 귀납적인 믿음으로의 회귀라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이 얘기는 하고 끝내고 싶다. 양자컴퓨터나 양자를 이용한 암호 등의 예에서 보듯이, 양자론, 양자물리학의 가치는 무한하다. 양자컴퓨터나 양자 암호 등의 발전 정도가 아직 무궁무진하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19세기의 이론물리학자인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도 "전기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p.536)), 다른 많은 부분에서도 양자물리학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작가 루이자 길더는 마지막에 이를 일종의 유머로서 살짝 암시한다. 책의 마지막에서 양자론의 비실재성과 인간중심성(관찰자가 존재하여야 한다는)에 의문을 제기하는 물리학자 테리 루돌프는 물리학자가 된 후에 어머니에게 숨겨진 비밀 하나를 듣게 된다. 

외할머니는 아주 순진한 아일랜드 카톨릭교도였는데 스물여섯 살 때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와 관계를 가진 후 임신을 했다고 한다. 처녀의 몸으로 딸을 낳은 후 아이 아버지가 달라고 하자 아이를 그에게 주었다. 하지만 딸과 떨어져 지낸 지 2년이 지난 후 더블린의 한 공원에서 유모가 이끄는 유모차에 실려 있는 자기 딸과 우연히 마주쳤다. 외할머니는 유모차에 있는 딸을 낚아챈 다음 그 길로 딸과 함께 멀리 남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런데 1년 전에 처음으로 얽힘 현상에 대해서 알게 되어 그 결과 물리학 연구에 헌신하게 된 스물한 살의 루돌프는 이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자기 외할아버지가 슈뢰딩거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p.550)


전혀 다른 환경에서 아무 교류도 없이 오랜 기간 자라난 청년과 그의 외할아버지가 모두 물리학에 그것도 양자물리학에 헌신한다는 것, 이 미스테리에 담긴 것이야말로 얽힘 현상의 (보다 큰 물질에 있어서의) 재현이 아닌가. 얽힘 현상은, 그리고 양자물리학은 언젠가 세상의 모든 비밀을 밝혀낼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빛보다 빠른 텔레파시가 가능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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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뭐라도 먹어야지

The Book | 2012. 10. 22. 15:30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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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하비 리벤스테인 (지식트리,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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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식품과 관련된 몇 가지 상식들이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 요구르트는 장에 좋은, 심지어는 수명을 늘리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식품이다, 가공식품에 들어간 첨가물들은 유해하며, 그러므로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규제에 언급되지 않은 첨가물은 안전하다),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유기농으로 재배된 채소는 그렇지 않은 채소보다 좋다, 비타민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하며, 비타민이 많이 함유된 식품을 섭취해야 한다, 지방이나 콜레스테롤, 포화지방, 트랜스지방 등은 우리 몸에 유해하며, 따라서 섭취를 극도로 제한하여야 한다 등등. 이 책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는 이러한 식품에 대한 상식들이 어떻게 형성이 되어 왔는지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추적하고자 하며, 그 중의 상당수는 '어느 정도' 만들어진 상식일 수도 있음을 밝히는 책이다. '어느 정도'를 강조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은 곧 만만치 않은 벽들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구르트가 장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인가(어제 밤에 요구르트를 먹고 폭풍적으로 변비를 해결한 난 뭐지?), 비타민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비타민을 까드시고 갑자기 왕성한 식욕을 보이며 늘 점심에 밥 두공기를 해치우는 우리 회사 김과장님은 뭐지?), 유기농으로 재배된 채소와 일반 채소는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건가(유기농 마니아로 유기농 채소가 암을 낫게 해주었다는 옆 503호 아줌마는 그럼 뭐지?) 등등.


물론 오해는 마시라.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위의 상식들은 모두 과장된 것이며, 그것은 모두 거짓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 하비 리벤스테인은 역사학자로서 이러한 주장들이 처음 어떤 식으로 생겨났고, 무엇으로 인해 강화되거나 버려졌으며, 현재는 어떤 위치에 와 있는지 여러 사례와 일화들을 통해 추적해 나가고 있다. 즉 이 주장들의 상당수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며,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연구결과들이 발표될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지방과 콜레스테롤의 경우만 하더라도, 처음 주목을 받았던 것은 포화지방과 콜레스테롤이었지만, 콜레스테롤의 경우 고밀도 지단백(HDL) 콜레스테롤과 저밀도 지단백(LDL) 콜레스테롤을 구분하여 봐야한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고, 또 포화지방보다는 최근 트랜스지방의 존재가 새롭게 알려지면서 건강을 해치는 주범의 지위를 트랜스지방이 새롭게 물려받게 되었다. 즉 이 책에서 실질적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주장이 거짓인가, 사실인가, 어떠한 식품이 몸에 좋고 나쁜가가 아니라, 식품에 관련한 어떠한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일종의 상식으로 굳어지기까지 개입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것에 거대자본들과 학자들과 여러 이해관계자들은 어떤식으로 결합하게 되는지, 그래서 결국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소비자의 주머니를 열게 하는지에 대한 경과들이다.

그 경과들에는 우리가 보다 예상하기 쉬운 것과 보다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메치니코프의 장에 대한 혁신적인 주장과 불가리아 목동들이 주로 마시던 요구르트에서 그 해법을 찾는 과정이 대형 식품회사들에게 어떠한 환호성을 올리게 해주었는지를 보는 것이 보다 쉬운 예라면, 식품에 대한 특정의 첨가물을 규제하는 것이 식품 회사들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인지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보다 복잡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식품에 대한 특정(화학)첨가물을 규제하는 것은 식품회사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식품회사들은 이러한 첨가물에 대한 규제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꾀했고, 실제로 이런 첨가물에 대한 규제는 특정회사의 제품이 유리해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예를 들어 케첩 생산에 있어서 벤조산나트륨에 대한 규제는 벤조산나트륨 없이도 케첩의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하인즈와 같은 업체에게는 득이 되었지만, 아직 그러한 기술력을 갖추지 못한 경쟁업체들에게는 독으로 작용했고, 동시에 첨가물이 들어간 경우라고 해도, 기준치를 적용함으로서 기준치 이내에서 첨가물을 사용한 제품은 마치 정부의 공인을 얻은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도록 해주었다. 또한 식품회사와 같은 거대자본만이 이러한 이해 메커니즘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AHA(미국 심장 협회)의 경우 자신들의 영향력을 높이고, 조직의 세를 키우기 위한 방편의 일환으로 심장병에 대해 위협이 되는 식이지방의 위험성에 대해 관심을 높이는 방법을 택했고, 이는 식이 지방, 식이 콜레스테롤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했다. (이것이 콜레스테롤의 비중이 낮다고 광고하는 수많은 식품들의 판매에 득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사실 이러한 것들의 대부분은 현재진행형이다. 과연 포화지방이 몸에 좋지 않은 것인가, 혹은 트랜스지방이 그야말로 모든 성인병의 적인가, 비타민의 효과가 실제로 미미한 것인가 등등의 식품의 안전성, 유해성에 대한 논쟁의 측면에서도 그러하지만, 보다 넓게는 이러한 공포를 이용한 마케팅, 혹은 이와 관련하여 파생되는 여러 사회적인 문제에서도 그렇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예를 들어 요즘 방송에서 새로운 금맥으로 각광받고 있는 소비자고발 류의 프로그램들에서도 그렇다. 특히 종편 등에서 요즘 킬러 콘텐츠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 이러한 음식점 고발, 소비자 고발 류의 프로그램들인데,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소비자에게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목적하에 음식점들, 혹은 특정 식품들의 점검에 나선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특정의 제품들, 특정의 음식들을 잘못된 먹거리로 소개하기도 하고, 이에 더 나아가 특정 식당, 특정 제품들을 거의 반홍보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착한 식당'이라고 이름을 달아주며 말이다. 이 식당들은 이 프로그램이야말로 '착해서' 미칠 지경일 것이다). 물론 이는 저자가 논했듯이 최근의 현상만은 아니다. 계속 새로운 이슈들은 출현하고 있으며, 우리는 새로운 이슈가 출현할 때마다 특정 식품을 먹지 않거나, 혹은 광적으로 먹는다. 그 누구도 자신의 건강이 망가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음식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공포 마케팅이 잘 먹혀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누구나 자신의 건강을 도외시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 외에도, 아마 두 가지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는 저자의 논의대로 음식의 생산과 유통 과정이 점차 거대화되고 산업화되면서 그 음식을 섭취하게 되는 사람들과 이 과정들이 분리되는 것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즉 먹을 거리를 자신의 주위에서 찾아야만 했던 과거, 혹은 자신이 재배한 작물들만 섭취해야 했던 과거에 비해, 현재는 수많은 음식들이 만들어진 완제품의 형태로 소비자에게 배달되고, 거의 모든 소비자들은 그 제품이 어떤 식으로 재배되고, 유통되고, 무엇이 첨가되고, 무엇이 제거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간에 가지고 있지 않던 식품에 대한 공포가 새롭게 고개를 들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음식의 맛이나, 혹은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유지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식사를 한다는 개념이 점차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즉 요즘 사람들은 그저 배를 채울 것이 있음을 감사했던 과거와 달리 먹을 것이 건강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며, 건강을 유지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조건으로 음식을 대한다. 즉 맛있고 싼 음식보다는 몸에 좋은 음식, 일일 권장량, 칼로리 따위가 더 큰 문제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건강에 대한 판단 권한은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건강에 대한 담론, 몸에 좋은 음식을 판정하는 기준은 아직도 소위 '전문가'들의 손에 놓여져 있고 앞으로도 그들 손에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의학적 발견이니 성분의 분석이니 하는 것은 일반인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고, 그러한 담론의 개발과 유통은 항상 ('내'가 아닌) 전문가의 손에 놓여져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사, 영양학 전문가들의 한마디가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여담으로 한 마디 더 하자면, 이것은 다른 상당수의 분야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교육학 같은 분야를 보면, 여러 교육 분야에서 새로운 개념들을 어떤 식으로 팔아먹는가를 보면 이 책과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특히 아동교육 분야에서 이러한 산업은 번창하고 있는데, 감성지능(EQ), 다중지능, 몰입, 피아제, 몬테소리의 뭐니 하는 것은 그 효용과 별개로 여전히 잘 팔리는 상품이다.)

그러므로 사실 맥이 빠지는 것은 이 마지막이다. 우리는 이런 이유들을 사실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콜레스테롤의 어떠한 부분이 정말 유해한지를 밝혀내고, 비타민이 실제로 우리 몸에 큰 효과를 미치는지 스스로 밝혀낼 수 있으면야 좋겠지만, 그건 우리 몫이 아니다. 집앞에 커다란 밭을 만들어 거기에서 나오는 음식들만 섭취하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더구나, 그 밭을 어떤 식으로 경작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여러 '전문가'들의 조언을 참고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거기서 어떤 영양소가 파괴될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마지막에 내놓고 있는 조언, 즉 식품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발표될 때 '누가 이익을 얻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라든가, 혹은 다양한 음식을 먹되 과식하지는 말고, 과일과 채소를 많이 섭취하라, 모든 음식은 '적당히' 먹어라 등의 이야기를 보면 '이러한 당연한 얘기 할려고 지금까지 이 긴 얘기하셨쎄요?'라고 묻고 싶지만, 뭐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무엇인가를, 그것도 뒤에 식품첨가물의 목록이 잔뜩 나와있는 가공식품 같은 것을 조금이라도 먹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만, 두 배 더 비싼 유기농 식품 코너를 기웃거리거나, 비타민 정제 같은 것은 안 살 것 같기도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비타민 정제를 먹으며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오줌줄기의 색깔 외에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다. 어떤 신화의 기원에서부터 그것의 발전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해 나가는 방식은 흥미로웠고, 그것의 쇠퇴를 보는 과정도 꽤나 재미있었다. 또한 그것은 현재의 어떤 음식이나 건강 문제를 둘러싼 신화들이 어떻게 만들어져 가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생명 연장의 꿈을 꾸었고, 140세까지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71세에 사망함으로써 그 자신이 몸소 반증을 보여준 메치니코프 박사에게는 명복을 빌어 드릴 뿐이다. (광고 속 사진은 거의 100세 넘은 산신령처럼 보였는데...)     


덧.
아..하나 덧붙이자면, 저자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편집의 문제인지 모르겠으나, 이 책에서 'O157균'을 '0157균'이라고 표기하고 있어서 자꾸 걸렸다. 여기서의 O(알파벳 오)는 균체항원(O항원)을 말한다(고 백과사전에서 말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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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피의 역사

The Book | 2012. 10. 5. 23:06 | Posted by 맥거핀.
코뮤니스트마르크스에서카스트로까지공산주의승리와실패의세계사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로버트 서비스 (교양인,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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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먼저 두 가지 정도를 이야기하면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이 책에 나온 시기 구분과 그에 따른 명칭들이다. 이 책 <코뮤니스트>는 1917년 11월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이것이 10월 혁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당시 러시아가 쓰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이기 때문이다)을 기점으로 그 이전을 '기원'으로 그리고 그 이후에 만들어진 체제를 '실험'으로 명명한다. 이 코뮤니스트들이 '도약'을 시작하는 것은 스탈린이 트로츠키와 부하린을 밀어내고 집권을 확고히하는 1929년부터이다. 이 '도약기'는 소비에트 정권과 소비에트 블록 건설의 시기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1947년 소련을 중심으로 한 코민포름의 결성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마셜플랜의 대응으로 만들어진 냉전체제인 '확산'의 시기로 넘어가게 된다. 소련 자체만 놓고 보아서는 미소냉전의 축에서 소련이 소비에트 블록 안에 어떻게 보면 갇혀있던 시점이라 확산으로 보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국과 북한, 동유럽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은 이것이 공산주의의 '확산'의 시점으로 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1957년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으면서 '변형'되기 시작한다. 데탕트가 일어났고, 쿠바, 중남미 등에서 혁명이 일어났으며, 마르쿠제, 알튀세르, 사르트르 등이 맑시즘의 방향을 새롭게 잡으려고 하였다. 이 공산주의가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고 '종언'으로 들어가는 것은 1980년 레이건이 미국에서 정권을 잡으면서부터이다. 브레즈네프나 안드로포프 등의 당시의 소련 서기장들은 레이건 이후의 미 행정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1985년 등장한 고르바초프는 그 가느다란 생명줄을 거의 끊어버렸다.

다른 하나는 이 책에서 제기하고 있는 질문들이다. 질문과 답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책은 아니지만, 이 책은 책 속에서 몇 가지 질문들을 하고 있고, 나름의 답을 내리고 있다(그 답은 마지막 40장에 정리되어 있다). 1부 '기원'에서는 소련 체제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나, 당 독재였나, (공산주의자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된 나라가 아닌, 왜 가장 가난한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였는가 등의 질문을 한다. 2부 '도약'에서 묻는 것은 왜 소련은 공산주의 확산의 길이 아니라, 일국공산주의의 길을 갔는가, 주변국, 미국 등에서의 국제적인 봉기는 왜 일어나지 않았는가 등의 물음이다. 3부 '도약'에서는 권력 투쟁 중에서 어떻게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는지, 소비에트는 나치즘과의 대결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 왜 그토록 커다란 억압의 체제가 필요했는지 등에 대해 묻는다. 4부 '확산'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냉전 체제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 냉전 체제가 왜 스탈린에게 필요했는지, 그리고 작은 조직에 불과했던 마오쩌둥이 어떻게 거대한 장제스 군대를 이길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5부 '변형'에서는 왜 모든 공산주의가 변형되며, 동일한 실패의 길을 걷는지, 그리고 공산주의가 모색한 탈출구는 왜 결국 실패로 가는 출구였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마지막 6부 '종언'에서는 중국과 소련의 개혁이 어떻게 달랐으며, 왜 중국은 성공하고, 소련을 실패하였는지, 그리고 공산주의는 왜 그토록 허망하고 급속하게 붕괴되었는지 돌아본다.

로버트 서비스의 이 책 <코뮤니스트>는 이 많은 질문들에 대해 나름 성실히 답변하려고 노력한다. 단편적인 사실이나, 의견의 제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과 풍부한 사료의 제시를 통해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고, 되도록 여러 정황들을 제시하여 독자의 판단을 이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 질문 자체가 그렇게 신선하지만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뒤에 옮긴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파 역사가들에 의해 이 질문들의 상당수는 거의 결론이 내려진 이후이고, 로버트 서비스가 다른 점은 보다 성실한 자료조사를 통해 나름의 근거를 더 많이 확보했다는 것 뿐이며, 그 답 자체는 예전의 역사가들과 동일하게 상당히 편향적이다. 사실 이 질문들에 대한 각각의 답을 뭉뚱그려 보자면, 결국 로버트 서비스가 보는 최종의 답은 공산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념이었다는 것이다. 즉 공산주의 체제는 태어날 때부터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권력욕이나 생존욕과 결합하여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괴물의 체제였다는 것이 로버트 서비스가 내놓은 최종의 답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급속히 무너질 것이라고 계속 오판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기묘한 개념을 발명해 낸 순간부터 당의 독재는 시작되었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공산주의 체제에서 스탈린이나 마오쩌둥, 차우세스쿠나 폴 포트 등의 잔악한 폭군들이 등장한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사회는 감시와 억압으로 기능하는 체제이고(그것은 거의 모든 공산주의 체제가 비슷한 형태를 가진 소비에트 모델을 모방함으로써 생존이 가능했다는 점이 그 증거가 된다. 즉 소비에트 모델은 결국 실패했지만, 그나마 그 모델이 일시적인 유지라도 가능케했다), 그런 체제라면 감시와 억압과 폭력을 가장 잘 수행해낼 자, 그러니까 가장 잔악하고 폭력적이며, 교활한 자가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즉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것은 그가 말 그대로 '강철'이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서비스가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한 가지 방법은 코뮤니즘의 역사에서 코뮤니즘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이를 사상의 흐름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으로 치환하고, 모든 '주의'의 개념들을 독자의 머리 속에서 효과적으로 제거한다. 이 책에는 일견 비슷비슷해 보이는 수많은 '주의'들의 명칭이 나온다. 공산주의, 맑시즘, 사회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아나키즘, 나로드주의, 아나르코생디칼리즘, 사파티즘, 카스트로주의 등등 거의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에 대한 효과적인 설명을 대체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자가 모르거나 귀찮아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소비에트 권위주의나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각각 한 챕터를 할애하여 열심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코뮤니스트들을 탈코뮤니즘화하는 것은 이들 코뮤니스트들을 자신들의 이익이나 정권을 잡기 위한 정복욕의 화신, 혹은 쓸데없는 투쟁에 골몰하는 골치아픈 종자들, 혹은 죽은 마르크스나 엥겔스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꼭두각시처럼 보이게 한다. (예를 들어 1920년대 독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카우츠키의 맑시즘과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맑시즘은 얼마나 다른가.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위한 맑시즘이고, 무엇을 위한 수정인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단지 권력에 목마른 멍청한 꼭두각시들로 보인다.) 이는 책의 내용 전체를 지루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저 이들이 결국은 사라질 권력을 잡기 위해 각종 잔악한 일을 저질렀던 그야말로 오류로 가득찬 인물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와 관련하여 같이 읽을 책으로 한형식의 <맑스주의 역사강의>를 추천.)

물론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이 있다. 공산주의의 역사에서 수많은 폭력과 학살, 기근, 감시와 억압이 실제로 있었고, 공산주의는 현재 거의 종적을 감춰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 책 역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며, 그 질문에 담긴 함의는 결코 작지 않다. "마르크스주의의 희망은 왜 절망이 되었나?" 즉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출발은 다르다. 자본주의는 이미 그 태동에서부터 그 잔악성을 수많은 사람들이 감지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마르크스주의가 출현하였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희망을 안고 탄생하였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그것이 잔인한 뒷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많은 이들은 그래서 더욱 절망했다. 그러나 이 질문을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그 희망이 절망이 된 것일까. 로버트 서비스의 이에 대한 답은 예스다. 즉 공산주의의 희망이라고 믿어졌던 요소들, 그것들은 이미 잘못 만들어진 뿌리에서 길러졌으며, 따라서 공산주의 체제는 자연스럽게 절망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보면 농업의 국유화는 생산성 저하와 마치 직결되는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즉 땅이 내 소유가 아니면 모두 생산을 할 생각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문제의 요소는 이미 공산주의 그 자체에 들어있었으며, 미국이 조바심을 내지 않았어도 이 소비에트 체제는 언젠가 무너졌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이 질문에 내린 답이다. 즉 희망처럼 보였던 그것은 사실은 절망이었다는 것. (이의 반대편, 그러니까 수정주의적, 좌파적인 시각에 물론 다른 해석이 있다.)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정치형식과 그렇게 밀접한 관계가 없는 것처럼도 보인다. 자본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고, 동시에 독재나 전제정치와도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공산주의의 경우 민주주의라는 정치형식과 도리어 밀접한 관련을 가져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중들이 분배하여 나눠같자는 공산주의의 이상은 민주주의의 이상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수많은 공산주의 정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교묘한 용어를 내세워 어느 틈엔가 그것을 당 독재로 교묘하게 치환하였으며, 그런 측면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절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용어를 교묘하게 변질시킨 레닌 등의 인물들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그리 고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한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도 있다. 그것은 그 희망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열광적인 찬성을 보내고 때로는 목숨을 걸었다는 것.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그 오류를, 오류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 바보들이었는가, 단지 멍청한 꼭두각시들에 불과했을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것에 희망을 보았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어떻게든 가능성을 발전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공산주의의 폭력적인 현실들이 드러나고 그것이 거의 종말에 다다른 지금에도 여전히 자본주의의 폭력성에 대항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내용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내재된 가능성들이다. 저자 로버트 서비스도 책의 뒤편에서 쥐꼬리만큼 밝히기는 했지만, 자본주의가 저지른 폭력들도 결코 공산주의에 뒤지지 않기 때문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더 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공산주의의 완전한 종언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책을 보며 저자의 시각과 다르게 사실 역으로 놀랐던 것은 온 세계에 공산주의자들이 이렇게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공산당을 콩사탕으로 말해야만 했던 우리의 시각에서는 신선하기까지 하다.) 그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의 등장과 스러짐을 보며, 도리어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공산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적어도 자본주의의 폭력성이 살아있는 한.


덧.
그러므로 사실 내가 보기에는 이 책은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사람이나 비우호적인 사람이나 어딘가모르게 아쉬운 부분이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사람이면 공산주의의 피의 역사만을 줄기차게 서술한 부분이 마음에 걸릴 것이고, 비우호적인 사람이면 도대체 이 책을 읽어야할 이유를 찾기 못할 테니. (시작부터 망가져서 어차피 언젠가 당연하게도 끝날 운명이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읽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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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배신긍정의배신바버라에런라이크의워킹푸어생존기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바버라 에런라이크 (부키,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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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에런라이크는 취재하여야 하는 대상들과 적당한 안전 거리를 둔 채, 사실은 아니지만 그럴듯해보이는 사실들과 사실이지만 적당한 왜곡을 뒤섞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타입은 아니다. 그녀는 이른바 일을 죽어라고 하지만 여전히 빈곤의 늪에 빠져 있는 '워킹 푸어' 계층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직접 워킹 푸어가 되어 그 한가운데에 뛰어들기로 한다. 즉 현재까지의 자신의 삶을 버리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도시로 가서 웨이트리스, 청소부, 판매원 등으로 일하며 최대한 버텨보기로 한 것이다. 결과는 예상했던 것처럼 신통치 않다. 임금은 거의 바닥이었고, 근무환경은 열악했으며, 생활환경은 상당한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고, 결국에 길게는 서너달, 짧게는 몇 주를 버티지 못하고 다시 새로운 도시로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물론 이 책 <노동의 배신>에서 저자의 성공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아니 어떠한 의미에서는 중요할 수도 있다. 저자는 여러모로 좋은 조건에 속했으니까. 그녀가 버티지 못했다는 사실은 다른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들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들 '워킹 푸어'의 생활에서 어떠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가.

이러한 저자의 체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러한 일을 열심히 하지만 생활의 영위가 어려운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에서 문제거리, 일종의 위협이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그 위협은 실제적인 위협과 정신적인 위협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다시 이 실제적인 위협은 다시 두 가지의 문제, 주거의 문제와 예기치 못하는 사태의 문제로 살펴볼 수 있다. 저자가 이런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을 하기 위해 새로운 도시에 가게 되면 늘 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주거공간을 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구할 수 있는 직업의 수준에 따라 구할 수 있는 주거의 형태가 달라지는 가장 큰 이유 외에도, 주거공간과 직업공간이 얼마나 떨어져있는가, 주거의 공간이 얼마나 불편한가에 따라 고려해야 하는 문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저임금 노동자에 있어서 주거의 공간을 어떻게 확보하는가는 매우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이며, 늘 위협이 되기도 한다. 다른 나머지 실제적인 위협은 예기치 못하는 사태에 대비하는 안전장치가 없다는 문제이다. 실제로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은 소득의 거의 전부분을 주거비와 식비 등으로 소비해야만 이어질 수 있는데, 이것에는 예를 들어 의료의 문제나 이혼, 갑작스런 해고, 사고, 범죄 등으로 일어나는 급작스러운 부수적인 비용이 전혀 고려될 수가 없다. 더구나 이러한 것은 대부분 노동자의 수입보다 훨씬 큰 비용부담을 초래하는 바, 저임금 노동자들은 이러한 돌발사태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 못지 않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정신적인 위협과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저임금 노동자들이 구직을 하는 순간에서부터, 일을 하는 모든 부분에 걸쳐서 회사나 관리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심리적 굴욕감, 모욕감은 일상화의 단계에 이르며, 이것은 단순히 특정 관리인의 특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보다 큰 시스템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저자가 볼 때 구직 시에 이루어지는 심리검사나 약물검사 등은 실제로 일할 만한 사람을 골라낸다는 실제적인 이유에서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스스로 자신의 낮은 위치를 파악하게 하고, 심리적으로 회사에 복종하게 하려는 의도가 보다 큰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런 심리적인 모욕감이나 굴욕감은 직업활동 시에만 사람을 짓누르는 것은 아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걸쳐서 이런 저임금 노동자들을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사람들',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로 보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고, 여러 다양한 시스템으로 구별해내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들의 복지를 담당하는 기관의 종사자들마저도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즉 가난은 거의 순전히 이들의 잘못, 즉 일종의 범죄와 같이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이야기들이 가지는 몇 가지의 함정이 있다. 즉 우리가 이것이 바로 저임금 노동자들이 가지는 진정한 실상이라고 완전히 믿어서는 안되는 몇 가지 함정 말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첫 번째는 저자 자신이 밝혔듯, 저자는 중년의 여성이라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간 꾸준한 건강관리로 일단 신체가 건강한 편에 속했으며, 가사노동이나 가족에 대한 부양에 따로 에너지를 쏟을 필요도 없고, 다른 여러 귀찮은 상황들을 크게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에 속했다는 점이다. 일례로 주거의 문제에서만 봐도, 저자는 다른 많은 저임금 노동자와 달리 혼자서 지내는 비교적 여유로운 주거공간에 머무를 수 있었다(물론 범죄의 위협이라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두 번째는 저자가 마지막 후기에서도 밝혔듯, 이 체험은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의 미국, 그러니까 닷컴 버블의 마지막에 들어서 있던 미국의 경제호황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즉 저자의 경험에서도 비추어 볼 때 당시는 여러 저임금 일터에서 일할 사람을 많이 모집하던 시기였으며, 저임금일망정 노동의 유연성은 분명히 지금보다는 더 있던 시기였다. 세 번째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는데, 저자의 심리상태는 분명히 실제의 저임금 노동자와는 다르리라는 점이다. 이것은 저자가 이 체험을 대강 했다는 의미도 아니고, 보다 더 최선을 다했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저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저자에게는 그 심리적 무력감은 사실 거의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지긋지긋한 쳇바퀴말이다. 즉 저자에게는 이것이 언젠가 끝이라는 믿음, 그 믿음을 가지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고 해도, 이미 그것을 의식하는 데에서 만들어지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이 믿음의 강도는 아마도 다를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내가 이 심리적 무력감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하는 말도 아니다.) 다르게 말해서, 이 책에는 저자의 세 도시에서 세 번의 다른 경험이 나와있는데, 사실 진정한 문제는 책에 집필되지 않은 그 이후일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이 마지막 한계에 봉착했을 때 저자는 다른 도시로 옮기거나, 혹은 그만두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면 되지만, 다른 저임금 노동자들은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이러한 함정들은 이 이야기들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더 덧붙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그 사실은 예를 들어 왜 이런 상당히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은 뭔가 행동을 보이거나, 연대하지 않는가, 혹은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가, 라는 질문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것에는 저자가 여러 분석을 하고 있지만, 사실 한 가지 힌트가 될만한 이야기들이 있다. 앞의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각각의 실험 장소에서 떠날 때 선택한 동료 몇 명에게 자신의 정체를 '커밍아웃' 했을 때 그들의 반응이 깜짝 놀랄만큼 실망스러웠다고 이야기한다. 그 중 제일 재미있었던 반응은 "그렇다면 다음 주 저녁 근무에 나오지 않을 거라는 말이에요?"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이야기가 뭔가 시사해주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즉 그들의 관심사는 어떤 노동에 대한 문제점의 파악 혹은 그 문제를 바탕으로 한 대안의 모색 같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오지 않음으로서 다음 주에 새로운 동료를 만나거나, 본인의 일이 많아질 것이라는 사실인 것이다. 이것은 물론 저임금 노동자들이 시야가 좁거나,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환경에서 '서바이벌'하는 것이며, 현재의 어떤 시스템이 그들에게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몰아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저자의 '사람들을 빈곤하게 만들고 계속 그렇게 만드는 짓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 '정부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나 길에 나앉은 극빈자들을 제도적으로 괴롭히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 '그들이 원한다면 더 나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 환경을 얻기 위해 조직을 결성한 권리를 주자'는 것 등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은 미국에서나 우리환경에서나 여전히 멀고도 험한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것은 분명히 쉬운 싸움은 아닐 것이다.

........................

한 마디 더 덧붙인다면, 이 책 <노동의 배신>은 쉬운 이야기 접근 방식과 그녀의 시니컬한 유머들로 술술 읽히는 책이긴 하지만, 중간중간 책을 덮고, 이 책이라는 것의 작동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물론 이 책의 타겟은 저임금 노동자들이라기보다는 명백히 중산층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에 가깝다(물론 우려를 담아 말해두건대, 분명 이것에는 상당수 내 편견이 들어가 있으며, 동시에 나는 이 두 그룹을 구분지으려는 의도로 이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자신의 책을 많은 이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과 같은 워킹 푸어들이 읽어줘서 기쁘다고 말했지만, 저자가 묘사한 생활대로라면 이들의 생활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상당히 모험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 말에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이 책이 흥미로울까. 매일매일 최저임금을 받으며, 관리자들의 감시와 모욕, 전 사회적인 굴욕을 견뎌내며(애써 의식하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이어나가는 것을 묘사한 이 이야기가 흥미로울까. 혹은 분노하게 될까, 잘 모르겠다. 반면 나는 책이 흥미롭고 저자의 문체도 매력적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저자의 이 시니컬한 유머들 - 그의 상당수는 자신의 중산층 이상 계급의 허위를 자각하는 데에서 나온다 - 을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때로는 분노를 느낀다는 이 사실이 나의 어떤 계급과 연관되는 것인지, 혹은 고등교육 이상이라는 학력과 연관되는 것인지, 역시나 확신하기 어렵다.

(누군가가 노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이 시간들에) 워킹 푸어의 체험을 담은 이 책을 읽는다, 그리고 재미있다고 말한다, 혹은 읽을 만한 책이라고 블로그에 끄적거린다,는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 아마도 이 덧붙인 이 모든 이야기가 나의 허위를 드러내는 것 같다. 그것은 적어도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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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들은 진화중

The Book | 2012. 8. 26. 17:26 | Posted by 맥거핀.
뱀파이어끝나지않은이야기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 예술일반
지은이 요아힘 나겔 (예경,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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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몇 가지가 궁금하기는 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 뱀파이어라는 것은 왜 탄생되었는가(왜 발명되었는가), 왜 특히 최근에 들어 뱀파이어들은 각광받고 있는가, 뱀파이어가 마늘, 햇빛 등에 치명적인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뱀파이어는 왜 하필이면 박쥐로 변신하는가, 뱀파이어는 왜 늙지 않는가(도리어 젊어지는가), 뱀파이어는 피를 그렇게나 마셔대는데, 왜 그렇게 늘상 창백한가. 즉 내 질문은 '뱀파이어의 양상'에 관계된 것이라기 보다는 그 '기원'이나 '이유'와 관계된 것인데, 요하임 나겔의 이 책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그리 마땅한 해답을 주고 있지는 못하다. 이 책은 뱀파이어의 기원이나 존재가치에 대해 고찰하는 책은 아니고, 그것을 다른 여러가지 것들과 연계하여 설명하는 책도 아니다. 즉 이 책은 문학, 미술, 음악, 오페라, 뮤지컬, 영화 등에서 나타난 뱀파이어의 여러 다양한 존재양상들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일종의 '뱀파이어 백과사전'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며, 수많은 예술작품들 중에서 뱀파이어의 '정수'만을 다루고 있는 것들을 일별하여 잘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뱀파이어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위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내 관심은 그런 존재의 양상이라기보다는, 존재의 이유나 기원에 관계된 것이므로 이 책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몇 가지 이유에 대해서 추측해보기로 한다. 책에 나온 이야기들에 따르면 뱀파이어의 기원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여러 여자 악령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낙원에서 추방당한 신생아를 잡아먹는 여자악령인 릴리트나 소년들의 피를 갈망하는 라미아, 복수의 여신들 에리니에스, 밤중에 나타나 몰래 동침하는 수쿠부스 등이 그러한 것들인데, 이는 죽은 자들이 되살아난다는 중세의 미신들과 결부하여 점점 뱀파이어라는 존재로 발전하게 된다. 물론 흥미로운 것은 이 기원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드라큘라 백작과 같은 남성 흡혈귀가 아니라, 여성형 악령들이라는 것인데 이는 아무래도 반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남성 중심의 사회에 대한 위협, 남성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이면으로서 설계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이러한 기독교적 믿음이 제시하는 남성 중심적 세계의 안정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여성들이 남성보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뱀에게 유혹당한 이브)을 끊임없이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들에게 구원이란 남성들에게보다 엄청나게 멀리 있는 것, 남성들에게 복종하여야만 구원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확고히 할 필요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이러한 여성형 악령들의 출현이 에로스나 타나토스와 결합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이러한 악령들은 괴상하고 혐오스럽게 그려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때로는 매우 아름답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이는 또한 한편으로 남성들의 이중적인 심리와도 연관되기도 한다. 즉 위험하다고 여겨질수록 그 매혹의 강도가 더해진다는 묘한 역설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늘 성립하게 마련이고(모든 팜므파탈의 그 위험성의 강도와 매력의 강도는 정비례한다), 따라서 거의 모든 (여성형) 악령들은 극도로 위험해서 매혹당하지 않아야 하지만, 동시에 기꺼이 매혹당하고 싶은 존재로서 그려진다. 즉 이것에는 성적인 것에 대한 매력(에로스)과 죽음에 대한 유혹(타나토스)이 비슷한 비율로 결합되어 있는데, 이는 물론 남성의 경우에만 성립되는 역설은 아니다. 이는 현대에 들어와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가지는 위험은 최대한 제거되고, 그것의 매력만이 최대한 강조되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즉 (죽음이 그다지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예전보다) 종교가 가지는 구원의 힘이 상당히 약화되고, 현세의 삶이 중시되는 현재에 이르면 죽음의 근처에 머물러있는 뱀파이어로서의 위치가 아니라, 도리어 영원한 젊음의 상징으로서 뱀파이어의 능력들이 중심에 위치하게 되고, 뱀파이어들은 거의 슈퍼히어로와 비슷한 위치를 점한다. 즉 중세에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 예를 들어 늙지 않음, 변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 날 수도 있음 등에서 그 죽음의 그림자가 떨어져 나가면서 현재에 들어서는 도리어 이것이 부러운 슈퍼히어로적인 능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피부마저도 창백하고 으스스한 피부가 아니라, 하얗고 깨끗한 피부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최근에 들어 뱀파이어에 대한 어떤 각광들의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마늘과 박쥐에 대해서는 책에서도 그다지 자세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다. 십자가나 성수, 햇빛에 대한 위험은 반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어느 정도 이해되는 반면, 마늘이나 박쥐는 조금 이해되지 않는 면도 있다. 단편적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마늘은 그 생경한 맛과 향 때문에, 박쥐는 동굴에서 산다는 특징과 검은 색, 날카로운 이빨 등의 형상이 뱀파이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을 것이다.)

뱀파이어에 대한 부분보다도 도리어 이 책을 읽고 새삼 생각하게 된 것은 모든 음악과 미술, 영화, 문학 등의 예술작품들은 당대의 습속과 지식, 사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잉글랜드와 트란실바니아를 오가는 육로와 수로에 대한 상세한 묘사들이 덧붙여져 있는데, 이는 1897년이라는 당대의 지리학적 관심과 문명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 있고, 또 이 소설은 흡혈귀라는 비과학적인 사실이 이야기의 원천이면서도 이야기의 내용에는 당대의 정신병리학과 범죄학의 최신사실들이 큰 비중으로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현재와 가까운 시기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 책에 나온 1994년 닐 조던 감독의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보면 이야기 자체는 200년을 아우르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1980년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이르는 미국의 경제호황의 쾌락주의적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아마도 이의 상징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뱀파이어 레스타(톰 크루즈)가 모는 빨간색 무스탕 컨버터블일 것이다). 그런만큼 이 책 <뱀파이어, 아직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뱀파이어를 다룬 예술들이 당대의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며 변화해 왔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의 기회를 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덧 1.
그래서 나도 당대의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 간단한 뱀파이어 이야기의 줄거리를 써본다. 장르는 <안녕 프란체스카>의 뒤를 이은 풍자시트콤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짧은 리뷰라 뭐 지면이 많이 남기도 하고. (...)

뱀파이어들이 공공연하게 출몰하는 근미래의 우리나라. 뱀파이어들의 자잘한 범죄들(이 시기의 뱀파이어들이 저지르는 것은 절도 등의 범죄들이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뱀파이어들은 더 이상 인간의 피를 빨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피는 혈색을 좋게 만드는 피 성형, 각종 환경호르몬의 영향이 있는 음식들을 주식으로 먹은 탓으로 변해버려, 뱀파이어들이 마시게 되면 죽게 되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들은 특수처리된 정제된 피를 주기적으로 먹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매우 비싸다)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자 정부는 '뱀파이어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뱀파이어 진압 작전에 나선다. 그러나 무자격 신부들을 용역으로 투입하고, 초강력 마늘탄 등의 사용으로 진압 과정에서 뱀파이어들이 죽음에 이르는 등의 문제가 거듭되자 여론은 급속히 나빠지고, 마침 이 때 한 진압현장을 다루는 뉴스에서 우연히 아름다운 어린 소녀 뱀파이어의 모습이 찍히는데, 인터넷에서는 이 소녀는 스타가 되고, 급기야 소녀의 가족들은 TV 토크쇼에 출연하게 된다.  

소녀의 가족은 TV에 출연하여 그간 어렵게 살아왔던 여러 이야기를 밝히는데, 쉬운 농장일이라고 찾아갔더니 알고보니 마늘농장이었던 사연, 나무막대기 두 개만 붙이면 되는 단순노동이라고 해서 일하러 갔더니 십자가 제조 공장이었던 사연, 너희들은 원래 밤에만 일하는 종족이니 야간알바비를 주간알바비로 책정하여 지급하겠다는 악덕 편의점주의 이야기 등이 시청자의 심금을 울린다. 또 한편으로 이들 가족이 시킨 피자에 몰래 마늘 소스를 뿌리고, "뱀파이어가 마늘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다"며 변명한 피자가게 알바녀가 '뱀파이어 마늘녀'로 불리며 거센 비난을 받기도 한다. 여론이 뱀파이어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흐르자 정부는 곧 태도를 바꿔서 이것도 다문화 정책의 일환이라며 뱀파이어들에 대한 진압을 멈추고 뱀파이어를 법의 테두리 안에 살게 하겠다고 공표한다.

그러나 관심도 한 때 뿐이고, 이들 뱀파이어 가족을 비롯한 뱀파이어들은 곧 법의 사각지대에 내몰리게 되는데, 정부는 '뱀파이어 자격 시험'을 치러 합격을 한 뱀파이어들에게만 정제된 피를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하고, 뱀파이어들은 멸종 위기에 몰린 자신들을 '뱀파이어 특별 보호법'으로 희귀종으로 지정하여 보호해 달라고 하지만, 너희들이 이 사회에 기여한 게 뭐냐며 묵살당한다. 뱀파이어들은 다시 길거리에 나와 각종 알바를 하지만 돈은 모이지 않고, 급기야는 정제된 피가 가득있다는 트럭을 습격하지만, 그 트럭에는 인기가수 싸이코가 '뱀파이어 스타일'이라는 곡을 가지고 '피 흠뻑쇼'라는 공연을 할 때 쓸 가짜 피만 가득 담겨 있었던 일 등의 각종 사건을 겪는다. 결국 뱀파이어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인간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대통령 및 모든 정부 각료들, 국회의원들을 모두 물어 그들을 모두 뱀파이어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즉 뱀파이어 공화국을 만들겠다는 최후의 계획.

치밀한 계획 끝에 청와대와 국회에 잠입한 뱀파이어들은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모두 그들의 손아귀에 넣고 그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울린다. 시트콤의 마지막 장면은 드디어 대통령의 목에 이빨을 넣고 그들의 피를 빨아내려는(물론 삼키지 않아야 한다) 뱀파이어 대장과 흥분과 기대감에 차서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뱀파이어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아무리 빨아도 피가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놀란 뱀파이어 대장은 급한 마음에 다른 정부각료들이나 국회의원들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에도 피가 나오지 않는다. "아...나랏님들이 피도 눈물도 없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를 내뱉으며 긴 탄식을 내뱉는 뱀파이어 대장과 망연자실한 주위의 뱀파이어들을 비추며 시즌 1 마무리.


덧 2.
개인적으로는 이 음악을 들으면서 이 리뷰를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책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괜찮은 블랙 메탈, 데쓰 메탈 그룹인 'Cradle of Filth'의 곡 중에서 하나. 책에 어울리도록 그들의 1996년도 앨범 <Vempire Or Dark Faerytales in Phallustein>에서 뽑아봤다.

Cradle of Filth - Queen of Winter, Throned (with lyr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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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살수없는것들무엇이가치를결정하는가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지은이 마이클 샌델 (와이즈베리,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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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책들에서도 그랬지만, 마이클 샌델은 여러 가지 풍성한 사례들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그가 말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여러가지다. 1장에서는 이른바 '새치기 할 수 있는 권리'다. 우선 탑승권, 진료 예약권, 무료로 배부되는 방청권들을 돈으로 구매하려는 행위 등에 대한 비판이 주로 이루어진다. 2장에서는 '인센티브'와 관련된 항목들이다. 불임시술을 장려하기 위한 현금보상, 상금으로서 어떤 좋은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 벌금이 그 행위를 하도록 허가하는 일종의 요금으로 변질되는 것들이 이야기된다. 3장에서는 시장이 점차 도덕을 밀어내는 현상에 대해 말한다. 대리 사과 서비스와 결혼식 축사의 판매, 현금으로 선물을 하는 것,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에 돈의 문제가 개입되는 것 등이다. 4장에서는 삶과 죽음과 관련된 문제가 전면에 나선다. 타인의 생명보험 증서를 거래하는 '말기환금'의 문제, 유명인사의 죽음을 놓고 벌이는 내기인 '데스풀', 시장에서 테러를 예측하고자하는 테러리즘 선물시장 등이 도마에 오른다. 마지막 5장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명명권'이다. 예를 들어 스포츠경기장에 차별적인 자리들이 생겨나는 것, 모든 것으로 가능한, 심지어는 신체 일부를 사용하여 이루어지는 광고들, 특정의 지명이나 명명을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 등이 이야기된다.


좋은 얘기다. 이 이야기들을 놓고 어떤 비판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옳음이나 좋음의 문제, 아리스토텔레스나 롤스, 칸트 등이 이야기했던 공동체와 개인의 정의의 문제, 공화주의인가 공동체주의인가의 문제를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사실 이와 같은 것들은 오랫동안 '돈으로 거래될 수 없는 것들'의 범주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새치기의 권리, 생명보험, 명명권 등은 시장과 시장주의의 공세가 어느정도 위세를 떨치게 된 이후에 시장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장 이전의 세계, 그러니까 현재에는 가장 거래해서는 안된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목숨에 대한 권리가 공공연하게 거래되는 세계(예를 들어 노예제)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는 여기서 말하는 시장지상주의와 관련된 문제보다는 인간의 기본권리와 연관된 문제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인권신장과 관련된 인류의 역사를 되짚을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현재에도 노예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즉 이것들은 시장지상주의에서 새롭게 생겨난 거래항목들이다. 예전에 돈(재화)으로 거래되어서는 안된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새롭게 거래의 대상으로 여겨졌을 때, 그것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도덕적) 가치들과 충돌을 일으킨다. 따라서 마이클 샌델의 이 세심한 논의들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내 질문의 몇 가지는 이와는 약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마이클 샌델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지금 현재이다. 바로 지금 미국 혹은 세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돈으로 거래되어서는 안되는) 가치들의 거래. 즉 그는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즉 그는 시장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 있는 시장지상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이 시장이 왜 중심에 서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이러한 타락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물론 그것은 이 책의 주제를 넘어설 수도 있고, 그것은 샌델 외의 다른 논의자들의 몫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만, 그런 전후 맥락이 없이 이루어지는 이 이야기들은 (본의 아니게) 특정의 한계들을 이 논의를 읽는 사람들에게 덧씌우고 있다. 즉 이 시장은 우리들에게 이미 주어진 상수이고, 그것의 근본적인 한계는 이 책의 관심영역이 아니다. 즉 시장에서 '거래해서는 안되는 어떤 것을 거래하려는 행위'가 문제일 뿐, 그 시장에는 혐의를 씌우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문제가 그 시장 자체라면? 시장의 근본적인 한계가 바로 그러한 거래행위를 권장하고, 부추기고 있으며 그러한 거래행위 자체를 막는 것이, 그 시장의 근본적인 구조를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어떨까.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샌델은 인간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이 책에서 대놓고 자주 나오는 단어들은 시장, 재화, 가치와 같은 단어들이지만, 은근히 출현하고 있는 단어들은 회복, 훼손, 변질과 같은 단어들이다. 시장의 회복, 공공선의 훼손, 가치의 변질. 즉 좋은 시장이 있고, 좋은 공공선이 있고, 좋은 가치가 있다. 그것을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것은 일부 정신나간 경제학자들이고, 정치인이며, 시장지상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다. 그것은 이러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거래하는 행위에 관련되어 비판을 할 때 주로 제시되는 두 가지의 중심축과도 연관된다. 그 하나는 공정성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이다. 즉 어떤 특정의 가치가 거래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모든 이에게 그것을 구매할(혹은 판매할)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것은 동시에 그 가치를 다른 것으로 변질시키기, 부패시키기 때문에 그렇다. 즉 우리가 이러한 특정가치들의 거래를 막았을 때, 우리는 공정한 우리로, 부패되지 않은 가치를 지닌 본래의 우리로 '돌아간다'. (아마도 이것이 샌델이 그래도 여전히 시장에 어느정도의 믿음을 보이는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시장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그 시장을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누군가가 문제지. 우리는 도덕적이고 선한 인간으로 돌아가 공공선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에게는 도덕적인 인간은 없다. 오로지 경제적인 인간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긍정적인 사람은 못된다. 이렇게 시장지상주의의 늪에 깊게 빠져있는 미국과 FTA를 하며 신자유주의의 넘실대는 파고에 흥겹게 올라타고 있는 우리사회에 샌델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 그리고 경제지 '한국경제신문'에서 '왜 도덕인가'라는 샌델의 책이 출판되고, 보수적인 신문들에서마저 샌델의 이야기들이 화두가 되며, MB가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공정사회'를 제창했다는 해프닝을 보며 가졌던 어떤 의심이 이렇게 꼬리를 드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들에게는 마이클 샌델은 그래도 건드려서는 안되는 것은 잘 지켜주는 합리적인 사람이니까. 설혹 샌델의 주장이 실현된 세계가 되어도 그것은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으니까. 시장은 여전히 굳건하고, 시장은 여전히 이 사회에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건드려서는 안되는 성역을 다시한번 일깨울 것이므로 그다지 손해볼 가능성은 없다.) 실패해도, 하버드 교수의 주장을 수용했다는 이미지는 남는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그런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샌델은 2장에서 도덕적 가치들에 적용되는 인센티브의 폐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막장인 나는, 그 폐해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오..이런 것에도 인센티브를 주네..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당연히 주어야할 다른 과업과 관련한 인센티브마저도 떼먹는 우리의 회사들을 너무 많이 본 탓이다. 그런 인센티브도 없는데 무슨 도덕적 가치에 따른 인센티브. 우리가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인센티브를 논하는 사이에, (과업에 따른) 정당한 인센티브를 주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린다. 그리고 (그럴리야 당연히 없겠지만) 이때다 싶은 이 회사의 CEO들이 이 책을 읽고 "우리가 그래서 인센티브를 안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물론 이는 농담이다. 그러나 아무튼 우리는 주어야하는 인센티브마저도 당연한 듯이 없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무슨 도덕적인 행위에 주어지는 인센티브랴. 핵폐기장도 '유치'되고 당연히 주어야 하는 보상금도 떼먹는 사회에서, 무슨 '핵폐기장이라는 폭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도덕적인 선택에 반하는 평균 월수입을 훌쩍 넘는 보상금의 부도덕성'인가.

어쩌면 이 책의 비밀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What Money Can't Buy'라는 이 책의 제목에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정한다는 것은 역으로 다른 모든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되니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정하는 사회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정하는 사회, 어느 쪽이 더 나아보입니까. 막장인 나는 그런 것보다도, 그저 이번에 내한한 마이클 샌델의 강의의 방청권은 얼마에 거래되었을까, 그게 더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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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그대여, 시를 써라

The Book | 2012. 6. 16. 02:23 | Posted by 맥거핀.



김수영을위하여우리인문학의자긍심
카테고리 인문 > 한국문학론
지은이 강신주 (천년의상상,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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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키워드가 맴돌고 있는 책이다. 시, 시인, 시대(정신), 인문(정신), 자유, 자기 힘으로 도는 팽이, 단독성, 행동, 불온함, 그리고 김수영. 처음 나열한 키워드들과 마지막 '김수영'이라는 키워드는 이 책에서 무게가 같지 않다. 아니 무게가 같지 않다기 보다는 모든 키워드는 결국 '김수영'으로 수렴된다. 그러니까 김수영은 이 시대에 시를 쓰는 사람이며, 그래서 시인이고, 엄혹한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자기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고자 했으며, 일반성/특수성의 공식에 매몰되지 않고 단독성을 지키려고 했으며(그럼으로서 보편성이 되었고), 생각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나아가려 했고,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고 불온했으며, 그래서 자유와 불온함으로 표상되는 인문정신의 구현자가 되었다. 즉 강신주의 책 <김수영을 위하여>에 따르면, 이 모든 키워드들은 김수영이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했던 가치들이자, 김수영의 다른 이름들이며, 인문정신 그 자체이기도 하다. 


처음에 이 책을 보고서는 뭔가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표지의 바탕과 글씨, 그리고 내부의 속지, 그리고 책날개에 실려 있는 '김일성만세'라는 시가 모두 붉은색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굳이 붉은색일 이유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책을 보니 그럴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가독성'이라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모든 글씨를 붉은색으로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마지막 장의 제목이 '불온함은 긍지다'로 귀결되는 것처럼, 결국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김수영을 이야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키워드, 그것은 '불온함'이기 때문이다. 불온함은 자유와 행동으로 완성된다. 자유 하나만 놓고서는 결국 불온함에 이르지못한다. 머리 속으로만 행하는 자유, 생각에 그치는 자유는 결코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 자유로움은 권력과 우상에 반하는 자유로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즉 누군가가 줄로 감아서, 혹은 채찍질로 도는 팽이가 아니라 각자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로운 궤적을 그리며 도는 팽이. 그것이 불온함이며 그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인문정신이다. 김수영의 경우에는 그것이 시를 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김일성만세'와 같은 시를 쓰는 것. '김일성만세'/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중략)/나는 잠이 깰 수 밖에.

물론 불온함이 꼭 붉은색일 이유는 없다. 불온함과 붉은색. 발음이 언뜻 비슷하기는 하지만, 이것에는 어떤 태생적인 연관성은 물론 없다. 우리가 불온함에 언뜻 붉은색을 연상하는 것(그리고 그런 이유로 이 책의 표지가 붉은색이 된 것)은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며, 같은 역사를 거쳐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역사와 관련된 김수영의 두 번의 전환점이 나온다. 첫 번째는 한국전쟁과 그에 이어진 거제포로수용소의 경험이다. 김수영은 북한 의용군에 징집되어 끌려갔으나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잡혔고, 묻어두었던 인민복과 총을 다시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다시 남한 경찰에 체포되어 인민군 첩자로 낙인찍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졌고, 포로수용소에서 친공포로임도 반공포로임도 내세우지 않는, 회색인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두 번째는 1960년 4월 학생혁명이다. 그는 초기에 학생혁명을 지지하며 집회와 시위에 참가하고 여러 시들을 발표하였으나 곧 그 혁명이 어떤 식으로 마무리가 되는지를 목도하여야만 했다. 그것은 위에 이야기한 '김일성만세'라는 시에 여실히 나와있는데, 4월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 정부 역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던 이승만 정부와 전혀 다를바가 없다는 점. 즉 방을 없애자고 혁명을 하였지만, 그저 단순히 방이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점, 자신(과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은 친공이냐, 반공이냐의 이분법적 도식만이 있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힌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불온함을 붉은색으로만 내세우는 이 책의 표지가 사실은 도리어 어떤 씁쓸함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불온함에 붉은색을 연상하여야만 하나.)

김수영이라는 인간에게 있었던 이 두 번의 전환점은 물론 그의 시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그의 시에도 두 번의 전환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첫 번째 전환은 그가 휴전협정이 되던 1953년에 발표한, 그의 첫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했던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팽이가 돈다/팽이가 돈다. 너도 나도, 그러니까 각자 스스로 도는 팽이, 공통된 무엇을 위하여가 아니라 스스로 도는 팽이. 북한이니 남한이니, 친공이니 반공이니, 정치나 이념이니 하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모두 각자 스스로가 혼자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는 그래서 4월혁명이 스스로의 힘으로 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알게 된다. 시 '육법전서와 혁명'. 혁명을-/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그대들뿐이다/그놈들이 배불리 먹고 있을 때도/고생한 것은 그대들이고/그놈들이 망하고 난 후에도 진짜 곯고 있는 것은/그대들인데/불쌍한 그대들은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시를 통해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는 비탄함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힘, 그러니까 불온한 자유의 목소리를 놓지 않았다. 불온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외부의 정치적 억압과 내부의 노예적 습성에 대해서 말하며 행동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그의 두 번째 전환이다. 시 '푸른 하늘을'. 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은/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시 '하......그림자가 없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우리들의 전선은 됭케르크도 노르망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보이지는 않는다/(중략)/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하......그림자가 없다.

..................

뭔가 좀 묘하게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라 생각했다. 일단 이 책은 정확한 형체를 알 수가 없다. 김수영의 전기나 평전도 아니고, 시작(詩作)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철학에 대해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는 책도 아니다. 김수영의 시를 읽은 개인적인 느낌에 대한 글이라고 보기에도 약간은 이상한 점이 있고, 그렇다고 김수영 시에 대한 비평문도 아니다. 더구나 전체적으로 글의 온도는 시종일관 높다. 책의 앞과 뒤에 붉게 열을 가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저자의 김수영에 대한 사랑 혹은 찬양의 온도는 시종일관 높아 종종 딴죽을 걸고도 싶어진다. (특히 가장 압권은 에필로그로 실은 저자 자신과 김수영에 대해 이야기할때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많은 분들도 약간은 느꼈겠지만, 그렇다면 김수영만이 시인인가, 다른 시인들은 모두 가짜시만 써낸 허위의 시인들에 불과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 따르면 순수시도 참여시도 아닌 김수영의 정신을 가지고 써낸 시, 즉 자신의 시마저도 끊임없이 새롭게 넘어서려는 시(그것도 단지 형태만이 새로운 시여서는 안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제스처로 써낸 시만이 올바른 시니까. 순수시도 아닌, 참여시도 아닌 각자 자신만의 제스처로 각자 도는 각각의 시.

어쩌면, 바로 그것이 묘한 불편함의 원인이 아닐까. 즉 이 책에서 결국 원하는 것은 각자 자신의 중심을 가지고 도는 팽이가 가득한 사회다. 즉 각자의 중심을 가지고 도는 팽이가 각각 토해낸 시가 자유롭게 어우러져 있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는 시인이라는 특이한 존재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아니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시인이므로. 모두가 자신만의 자유로운 시를 써내는 사회이므로. 그러므로 이 책은 김수영에 대해서만, 혹은 그의 시에 대해서만, 혹은 시쓰기나 철학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저자가 원하는 것은 김수영에 대해서 자세히 알거나, 그의 시쓰기를 모방하게 되거나, 특정의 철학사조를 전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모든 것에 대해 자신만의 제스처, 자유와 행동이 결합된 불온을 우리 각자 스스로가 얻는 것이므로 말이다. 그러니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불편할 때만이 우리는 움직이므로. 편할 때의 우리는 결코 불온해질 수 없으므로.

시끄러운 여름밤이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김수영의 기일이다. 불온한 그대여. 시를 써라.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도록.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천둥이 번쩍인다
여름밤은 깊을수록
이래서 좋아진다

- 시 '여름 밤'(1967.7.27)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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