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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조중동의 치명적 실수

생각거리 | 2008. 5. 30. 21:51 | Posted by 맥거핀.
'박노자 글방'에서 가져왔습니다.
박노자 님의 글 입니다.


조중동의 치명적 실수


요즘 국내에서 "쇠고기 정국"이 돌아가는 걸 보니 한 가지 생각이 계속 머리에 듭니다. 제가 애당초에 삼성과 현대, LG의 대주주나 조중동과 같은 한국 보수 지배층의 표현 기관들의 주역들이 상당히 똑똑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똑똑하지 않았다면 일부 사익 집단의 대변자이면서도 어떻게 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민족지" 탈을 써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니 저들이 교활하긴 해도 생각보다 똑똑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정말 똑똑했다면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그렇게 올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올인을 해서 결국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어버렸는데, 그게 자충수이었습니다. 소탐대실의 태세입니다.

왜 그러는가요? 보수 지배 집단에는, 민중에 불리한 신자유주의적 사회 재편을 진행시키면서도 민중의 저항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대통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재벌가나 조중동 분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정치적 집단과 관계가 안좋기에 제 말을 믿으려 하지 않겠지만, 사실 준주변부 국가의 지배층에 이상적인 대통령은 브라질의 룰라나 한국의 김대중 정도입니다. 오랜 투쟁 생활 동안에 쌓인 "경력"을 무기로 삼아 지식인층을 잘 포섭하고, 민중 지도자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권위를 확보해 민중 진영을 잘 분열시키고, "민주, 인권" 노래를 부르면서 민중에게 실제로 꽤나 아픈 신자유주의적 사회 개악을 강요하고... 그래야 민중을 분열시키고 분리, 통치하고 좌절시키는 데에 성공합니다. 만약에 1997년에 이회창이 대통령이 됐다면 IMF사태로 인해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아도 적어도 몇 군데의 상당한 민중적 저항이 일어났을 것이고 지속적 총파업 정도는 현실화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 지도자의 상당부분마저도 "비판적으로 지지한" DJ가 되니 민주노총의 일부 보수파가 정리해고 등을 사실상 받아들이고, 비정규직의 대규모 양산과 신용불량자 대량 속출 사태의 문이 열렸습니다. DJ의 포섭력, DJ의 "민주, 인권적" 수사학, DJ의 평양 방문과 김정일과의 뜨거운 포옹, DJ의 노벨 평화상이 아니었다면 가능했겠습니까? 민중과 지식층에 대한 교묘한 의식 조절이란, 아무나 할 줄 아나요? 지금 한국이 노동자를 쮜어짜는 데에 세상에 가장 편리한 사회가 된 데에 대해서 조중동의 주인님 분들께서 DJ에게 "감사합니다"하고 큰 절을 올려야지요.


그런데 이런저런 이해 관계로 DJ쪽과 불편한 그들은 결국 그들 자신과 "한 몸"이라고 볼 수 있는 이명박을 권좌에 앉히고 말았지요. 그게 꼼수 중의 꼼수이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시지요. 만약 새 대통령이 김정일과 한 번 더 뜨겁게 포옹하고, "자주 국방"과 "동북아 균형추"를 몇 번 더 언급하고 그리고 농가에 대한 지원책 등에 돈을 약간 더 쓴 뒤에 쇠고기 수입 규제를 차차 풀었다면 지금처럼 민란이 일어났겠습니까? 좌파야 당연히 반대하고 나섰겠지만 대중들이 아마도 크게 동요되지 않았을 걸요. 대한민국처럼 나름대로 복합화되고 여론 형성 과정이 시민 사회 등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에서는 자유주의 좌파 (통합민주당)처럼 개혁 사기를 주도면밀하게, 온갖 좋은 말, 민주적인 말, 민족적인 말을 해가면서 해야지요, "전봇대 뽑기" 식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여기가 1970년대 사우디에서의 공사 현장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자들은 개혁 사기꾼들을 대통령직에서 해고시키고 이명박을 고용한 것이 꼼수입니다, 꼼수! 시민 단체 출신들에게 장관, 차관 등에 해당되는 벼슬과 운전수가 달린 자동차를 주면서 잘 달래고, '네덜란드 모델"이나 들먹이고 그리고 뒤에서 전력 사업 민영화 등 "필요한 일"을 다 하고... 이게 "한국형 신자유주의"의 이상적인 모델일 것입니다.


이 사회의 지배자들이 실수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아주 똑똑하지 않다 하더라도 끝내 자기 실수를 고치려 하지 않는 하우 (下愚)는 아닐 수도 있어요. 즉, 불도저 식의 신자유주의적 사회 개악이 지금처럼 계속 결사 저항에 부딪치고 이명박의 지지율이 계속 바닥을 친다면, 새 마름을 쫓아내고 옛 마름들을 복귀시키려 할 수도 있지요. 즉, "공사판 감독" 식의, 군대 식의 신자유주의자를 용도폐기하고 지난 10년 간에 나름대로 검증된 개혁 사기꿈 무리이거나, 아니면 그들과 구조적으로 닮은 또 다른 정객 (문국현도 있지 않습니까?)을 등용시키려 할 수도 있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박근혜 쪽으로 기울 수도 있구요. 어쨌든 우리 민중이 다시 한 번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10년 동안의 유사 개혁, 모조품 개혁으로 지금 이 지경에 왔는데, 또 그 무리에 속는다면 이는 정말 하우 (下愚)에 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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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25일 새벽 청계 광장

생각거리 | 2008. 5. 25. 20:12 | Posted by 맥거핀.

Ozzyz Review 허지웅의 블로그
에서 가져왔습니다.

25일 새벽 청계 광장


뭔가 심상치 않다는 말을 듣고 새벽에 청계천을 향했다. 새벽 3시에 목격한 청계천 광장의 풍경은, 그러나 드물게 평화로웠다. 촛불을 든 젊은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자유롭게 발언하고 종종 소리도 지르며 웃음을 섞었다. 잠시 지켜보다 먼저 와 있던 정곤이 형과 청진옥에 들려 해장국에 소주를 삼켰다.

4시 30분 즈음 김작가 형에게 전화가 왔다. 속보가 떴는데 살수차에서 시위대에 물대포를 발사했다는 이야기였다. 에이 설마. 나올 거야? 응. 광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서둘러 나섰다. 동아일보 사옥 뒤로 돌아가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2시간 전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그곳 광장에 분노가 가득했다. 경찰 병력과 시위대가 대치했다. 본격적인 진압에 들어선 듯 보였다. 광화문 우체국 정문 앞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 두 명이 탈진해 쓰러져있었다. 누군가 맞았다고 소리쳤고 밀려 밟혔다고도 했다. 화가 치밀어 올라 도로로 나섰다. 경찰과 시위대의 열이 팽팽하게 맞섰다. “평화시위 보장하라”를 입이 닳도록 물어 외쳤다. 내가 본 시위대는 결코 이성을 잃지 않았다. 경찰들의 안전을 염려하는 건 오히려 시위대 쪽이었다. 밀고 밀리는 가운데 나는 “다치지 맙시다”라고 소리쳤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가 밝아오자 여론을 의식한 탓인지 살수차가 사라졌다. 문득 경찰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여경들이 나타났다. 곧 연행에 들어가리란 예고다. 주변 CCTV가 모조리 꺼져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앞줄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끌려가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이다. 끌고 가려는 사람과 끌려가지 않으려는 사람, 그리고 지키려는 사람들의 완력이 한데 뒤엉켰다. 구호는 "폭력경찰 물러가라"로 바뀌어 있었다. 저 뒷줄의 전경과 눈이 마주쳤다. 어느 영화처럼 증오로 완연한 그 눈이 내게 무어라 욕을 했다. 나는 발끈했다. 그러나 화를 주고받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어 이내 한심해졌다. 너랑 나랑 서로 미워해야할 이유가 뭐니. 눈 안 깔어. 얼씨구.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앞줄의 연행이 시작됐다. 옆에 김작가 형이 끌려갔다. 나도 끌려갔다. 어깨를 잡혀 끌려가는 도중 뒤 쪽에서 누군가 당겨 몸이 허공에 떴다. 다시 땅으로 처박혔다. 몸이 땅에 닿자마자 군화발이 날아들었다. 머리도 잡아당겼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 자꾸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왜 때립니까. 어휴 진짜 아파서. 그렇게 당기고 끌려 우체국 앞까지 밀려갔다. 더 이상 날 끌고 갈 의지가 없었던지, 정신을 찾고 보니 도로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옆에 선, 어느 선량해보이는 청년이 내 대신 화를 내주고 있었다. 왜 사람 머리를 잡아당깁니까. 아끼는 겉옷이 찢어져 걸레가 됐다. 손바닥이 찢어졌다. 검지 손톱 절반이 씹혀 너덜거리며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얼굴에 땀을 닦다가 뺨에 온통 피가 묻었다. 주위 사람들이 걱정해주는 바람에 알았다. 겸연쩍었다. 나는 람보가 아니다. 그래도 꽁지머리를 지탱하던 고무줄이 사라진 걸 알았을 때는 화가 많이 났다. 난 간지남인데. 어디 거울 없나. 처량해서 처연하다.

핸드폰 진동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김작가 형은 닭장차에 실려 연행되는 중이었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다고 했다. 어느 매체에 고자질 기사를 쓸까 농 삼아 재잘거리다 전화를 끊었다. 시위대는 결국 도로를 뺏기고 물러섰다.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이성을 놓지 않았다. 다시 자유 발언이 시작되고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말들이 광장의 하늘을 덮었다.

드물게 피가 묻고 옷이 찢겨 나풀거리는 내 꼴이 유난스러워 창피했다. 옷도 갈아입고 지혈도 해야겠다. 택시에 올라타 집으로 향했다. 6시 10분이었고 날은 완전히 밝아있었다. 귀신같은 꼴을 사진이라도 찍어둬야 하나 싶어 핸드폰을 더듬거리다 관두고 피식했다. 맹장수술을 하고 병원에 누워있는 엄마가 생각났다. 난 일을 핑계로 한 번도 안 가봤다. 일러바칠까. 아마도 엄마는 아이고 아이고 누가 내 새끼를, 안아줄 테다. 연희동을 지나 가좌동을 향하는 동안 창밖의 풍경은 고요하고 청량했다. 평소에는 채 귀에 닿지 않던 새소리마저 드문드문. 아침은 이렇게 아름답구나. 아무 일도 없는 동네 골목길이 너무 평온하고 서운해, 나는 조금 울었다. 허지웅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1211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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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 (GQ 1월호)   / 블러그 'ozzyz review  허지웅의 블러그'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사람들이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일은 언뜻 상식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같은 상식은 상식이 아니다. 왜 그럴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하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한다. 얼핏 분열증 같아 보이는 이 현상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처럼 진보진영의 논객들을 괴롭혀왔다. 논객과 진보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계급적 정체성에 밝지 못하고, 눈을 뜨지 못하고, 상식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데 분노한다. 그리고 계몽하려 애쓴다. 하지만 이 계몽은 쉽게 작동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인간이 결국에 사사로운 이익관계를 좇아 움직일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실제 대부분의 인간은 사익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한다. 이는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이 상식은 머릿속의 상식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자신의 주머니 사정에 따라 투표하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많은 수의 진보 운동가와 논객, 정치인들은 선택받은 가정에서 온갖 혜택을 받고 자랐다. 그러고도 분배를 논한다. 많은 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와 같은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러고도 집중을 논한다. 앞서 말한 상식이 통했다면 소수의 집중되고 편향된 자본을 위해 종사하는 보수 정당은 절대 집권할 수 없다.  

그 같은 상식이 현실의 상식이라면 다음과 같은 권유는 정당하다. - 당신의 주머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정당과 후보에게 투표하라. 당신의 주머니를 지지하라는 말은 요구라기보다 질문이며, 이는 곧 당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묻는 것이다. - 하지만 사실 이런 식의 주문은 헛되다. 왜 당신의 계급에 따라 투표하지 않느냐고 지적하고 계몽하는 일은 끔찍할 정도로 소모적이다. 궁극적으로, 이런 식의 주문은 실제 가난한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귀에다 대고 소리 질러도, 동의를 구할 수 없다. 실제 들리지 않는다! 가난한 당신이 이명박을 선택했을 때 당하게 될 온갖 종류의 불이익을 도표로 만들어 오른손에 들고, 권영길을 선택했을 때 얻게 될 온갖 종류의 혜택을 도표로 만들어 왼손에 들고 그들에게 외쳐봐라. 당장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가난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결국 이명박을 선택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도대체 왜? 

이 나라에서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70퍼센트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 한국의 중산층은 4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이 놀라운 통계의 마술은 한 가지 명징한 진실을 환기시킨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가상의 필터를 ‘가치관’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장르영화들이 이 같은 소재를 다뤄왔다.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다. 바로 이 가치관에 따라 투표한다.

요컨대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한 정책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들이 부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부유함이나 풍요로움 같은 부자의 가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함께 수반돼 연상되는 보수적 언어를 ‘옳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누가 혹은 어떤 정당이 서민을 대변하고 말고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사람들은 부자를 보며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성공신화에 매료될 뿐이다. 부와 이익이라는 (그들이 생각하기에) 긍정적 에너지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적지 않은 부자들이 적당한 부패와 조작과 위장을 즐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는 않는다. 그저 부자라면 그 정도는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훌륭하게 입신에 성공한 저 부자들은 그만한 권리와 폭력을 응당 행사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것은 단순한 존경이나 예우와 다르다. 겨우 존경심 때문에 사익과 반대되는 선택을 할 정도로 인간의 두뇌가 간단하지는 않다. 그건 우리가 여태 태어나서 자라고 배우고 번식하고 경쟁하고 버티고 버텨 살아온 이 사회가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언어의 토대 위에 건설된 탓이다. 사람들은 부자 - 성공 - 상위 3퍼센트 - 대기업 - 수출 - 재벌 - 시장주의 같은 단어들에서 긍정적 에너지를 느낀다. 반대로 복지 - 중소기업 - 88만원 세대 - 분양원가공개 등에선 무언가를 박탈당하는 듯한 상실감 따위의 부정적 에너지를 느낀다. 시장주의에 반대되는 입장을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단어가 고작 '반시장주의'다. 세상에, 얼마나 부정적인가. 그 내밀한 사정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사람들은 보수적인 단어와 인식의 틀 위에서 살아왔다. 보수성을 ‘궁극적으로 안전하고 탄탄한‘ 것으로 인식한다. 

간단한 예로 TV와 영화 속 가부장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짚어보자. 철옹성 같은 권위를 가진 아버지는 온갖 폭력과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결국에 가서 아들과의 화해에 이른다. 설명되지 않는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으며 관계의 정상화를 이룬다. 가부장으로 대표되는 보수 이데올로기가 뜨거움과 결합하면서 ‘설명되지 않는 끈끈함’ 따위의 수사로 포장된다. 놀라운 건 대중이 이 같은 광경을 보며 감동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천하장사 마돈나>같은 예외도 있다. 그건 그 영화를 만든 자들의 진보성과 현실인식의 탁월함을 증명한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흥행에 실패했다. 간단하다. 사람들은 소위 진보적인 상식이나 언어들을 ‘머리로’ 인식한다. 반대로 보수적인 상식이나 언어들은 ‘가슴으로’ 인식한다. 따로 학습이나 교육이 필요하지 않다. 

그럼으로써 ‘택시기사 농담’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택시기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보수정권을 옹호하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대다수 노동직 근로자들이 그들의 가정에서 가부장적인 권위에 목말라 있으며,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실추되는 가정 내 권력에 대해 큰 피해의식을 갖고 있음을 상기해보자. 간단한 이야기다. 택시기사는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노동자라는 계급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치관과 정체성은 보수주의에 닿아있는 거다. 미국의 고속도로 트러커들 대다수가 공화당을 지지하는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렇다면 지난 10년간 자칭 진보 정권이라고 불린 두 정부의 집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보수와 진보 사이의 경쟁이었다기보다, 개혁세력의 안티 담론이 성공적으로 작동한 것에 더 가까웠다. 실제 이 두 정권의 정책은 조금도 진보적이지 않았다. 그저 과거와의 단절과 안티 담론의 연장선상 위에서 지루한 말싸움을 해온 것에 불과하다. 가끔씩 진보진영의 수사만 빌려왔는데, 이건 그저 한나라당과 자리싸움하는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노무현 정권의 집권은 눈여겨볼만 하다. 그는 보수의 언어를 들고 나와 진보의 탈을 쓰고, 이를 뜨거운 개혁의 이미지로 치환하는데 성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했고, 결국 대선 승리의 드라마로 이어졌다. 욕할 게 아니라 공부해야 할 일이다. 그는 진정 언어의 마술사였던 것이다.

많은 수의 진보주의자들이 노무현 정권에 속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덤을 판 건 진보진영 스스로다. 정권 내내 진보진영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들의 행동에 옳고 그름의 틀을 가져가 비판했다. 어떻게 부정부패 우익 세력을 지지할 수 있냐고 꾸짖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수적 가치관 안에서 살아왔을 뿐이다. 그 위로 당위성을 겹쳐 놓으면 격렬한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아서 보지 못하는 건데, 그에 대해 욕을 하고 보수반동꼴통 소리를 서슴치 않았다. 보수진영이 가지고 있는 언어는 안정적으로 보였지만, 진보진영이 가지고 있는 언어란 고작해야 ‘쟤들은 안 돼’ 정도였다. 조롱이 팔할이었다.

현실 정치에서 진보진영이 얼마나 그릇된 전략에 따라 움직이고 있느냐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안티 담론에 의해 움직이다간 결코 긍정적인 이미지의 틀 안으로 진입할 수 없다. 기껏해야 상대하기 피곤한 사람 취급 밖에 받을 수 없다. 그런데도 진보진영은 도덕의 황폐화를 부르짖고 세상이 당장 망할 것처럼 시일야방성대곡을 목 놓아 불렀다. 유동적인 중간층은 서슬 퍼런 진보진영의 손을 들어주기 힘들어진다. 도무지 안정적인 비전을 제시할 그룹으로 비춰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보수진영에선 진보진영의 언어를 가져다가 잘 활용했다. 이회창 후보가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 천민자본주의, 이거 안 됩니다”라고 말했을 때,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술자리 안주삼아 실컷 비웃었다. 하지만 언어의 힘이란 무섭다. 불안정한 진보주의자보다는 안정적인 보수주의자의 개혁적 언동에 솔깃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명박 후보도 ‘청년 실업’이나 ‘비정규직 문제’ 같은 진보진영의 화두를 고스란히 가져가 자기 언어로 흡수해버렸다. 진보진영은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진보진영의 선동가와 계몽주의자들은 스스로 판 무덤 속에 기어들어갔다. 여기서 탈출하고 싶다면 보다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대중에게 꾸준히 진실을 알리고 보수진영의 부조리를 밝힘으로써 마침내 상식이 통하게 될 것이라 낙관하는 자세는 금물이다. 그 진실은 진보진영에게만 들리는 진실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틀에 의해 판단한다. 이 틀은 그들의 세계관이고 가치관이다. 이 가치관은 주머니 사정과 별개로 작동한다. 상식을 운운하면 반감만 산다. 보수진영의 움직임에 일일이 대응하는 방식으로 무게중심을 가져가다간 결코 집권할 수 없다. 대중이 어떻게 진보의 언어에 관심을 기울일 것인지 연구해야 한다. 그런 관심 안에서 진보의 가치관과 인식의 틀이 보수의 그것 못지않은 안정적 이미지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진보진영이 입에 문 언어들이 닮고 싶고 갖고 싶고 추구하고 싶은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는 다소간의 패션화 전략도 필요하다. 진보의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한국의 진보진영에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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