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 이안

Ending Credit | 2013.01.11 00:24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한 TV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내용을 보니, 원주율이 주소명인 사이트가 있다.  일본의 한 기업에서 만든 '3.1415926535898.com'이라는 주소를 가진 이 사이트는 외계인에게 지구를 홍보하는 사이트인데, 다른 건 몰라도 그 주소의 발상이 재미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라면 적어도 원주율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는 것. 다시 말해서 비록 숫자라는 제한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의 값 만큼은 우주불변의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일종의 우주의 소통언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 <미지와의 조우>에서 '화음'이 일종의 언어였던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1977년 쏘아 올려져 하염없이 외계로 날아가고 있는 보이저호에는 55개의 언어로 된 인사말과 함께 아름다운 화음이 담긴 여러 음악과 원주율(파이)을 포함한 수학기호들이 실려있었고, 외계의 지적인 신호를 찾는 SETI 프로젝트 같은 것에서도 원주율은 일종의 소통언어로서 사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파이(수라즈 샤르마)가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의 어떤 아름다운 수영장에서 수학기호 파이로 바꾸어 설명하는 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특정의 맥락을 알아야만 이해하게 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는 심지어 외계인도 알고 있는 보통의 언어로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것, 다시 말해서 외계인에게 보내는 우리가 당신들과 공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던 원주율(파이)로 그의 이름이 바뀌면서 이야기가 시작하는 것은 꽤나 흥미롭다.

이름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이제 '리처드 파커'라는 기이한 이름을 가진 호랑이에 대해서 말해보자. 영화 속에서도 나오듯이 '리처드 파커'라는 이 이름은 원래 호랑이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이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외계인도 알 수 있는 보통명사를 이름으로 가진 한 소년과 어떤 고유의 내막을 가지고 있는 특정의 이름을 가진 호랑이가 같이 지내는 227일 간의 공존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름만을 놓고 보면 사실 이 두 개체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며 이 두 개체가 사실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즉 호랑이는 인간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인간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러므로 사실은 '호랑이'와 같은 보통명사 형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 파이의 아버지가 파이에게 가르치려는 이성에 바탕을 둔 메시지, 즉 인간과 짐승은 다르다는 메시지와 조금은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파이의 아버지가 파이에게 가르치려던 것은 일종의 동물의 생존본능이다. 즉 호랑이가 작은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며, 이는 종교나 인간의 감성으로 재단할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을 아버지는 이야기하려 했다.

다시 말해서 생태계라는 큰 계는 그런 식으로 유지가 된다. 더 힘이 센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으며, 대신에 약한 동물은 왕성한 번식력에 따른 많은 개체수로 보상받고, 또 먹이사슬의 구조에 의해 그 개체수는 일정하게 유지가 된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수없이 많은 날치떼가 더 큰 고래에게 잡아먹히지 않는다면 바다는 곧 날치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그 반례가 영화 속 미어캣으로 뒤덮인 섬이다.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그 섬이 식인의 섬, 죽음의 섬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지만, 그것은 미어캣의 존재로도 설명이 된다. 그 수많은 미어캣의 존재는 그곳이 생태의 섬이 아님을, 생태계의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 곳임을 말해준다. 물론 이것에는 영역의 문제가 있다. 이런 수많은 힘이 다른 동물들이 이 지구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은 그들 모두가 각자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게는 배 위에서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공존하기 위해 각자의 영역이 필요했음을 통해서 볼 수 있기도 하고, 크게는 바다 위에 던져진 파이와 리처드 파커의 존재로도 알 수 있다. 즉 바다라는 짠물은 그들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다라는 지금까지 지냈던 곳과 전혀 다른 영역에서 생존의 사투를 벌어야만 했다. 


즉 이 파이라는 인간과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의 바다 위의 227일은 다른 여러 가지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공존의 원리라는 것을 일깨운다. 그것에는 생태계의 균형과 영역의 확보가 들어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살아있는 인간과 살아있는 호랑이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이성적인 믿음으로 생각해보면 둘 중의 하나는 이야기 속에서 사라졌어야 사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그래서 이야기를 들은 이성적인 일본인들은 그 이야기를 믿지 못하고, 파이에게 다른 이야기를 요청한다. (예를 들어 그들이 내세우는 논거는 바나나는 물에 뜨지 않는다는 '과학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가 지적했듯이 사실은 두 이야기는 형태는 같다. 차이가 있다면 첫 번째에는 종의 차이가 있었고, 두 번째에는 같은 인간 종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이 수긍한 것은 결국 두 번째 이야기이다. 즉 같은 종 사이에서 벌어진 지극히 배타적인 이야기가 사실은 이성적인 그들이, 어쩌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태계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라. 사실은 다른 종이 다른 종을 잡아먹는, 공격하는 이 첫 번째 이야기가 실제 생태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며, 두 번째 이야기는 아주 지극히 특수적인 상황에서 벌어진 그로테스크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므로 사실 첫 번째의 이야기,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본 이야기는 지구에서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하이에나는 오랑우탄이나 얼룩말을 공격하며, 물론 그런 하이에나는 호랑이 앞에서 꼼짝을 못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은, 즉 개체가 멸종하고 있지 않는 것은 이들이 각자의 영역을 확보하고, 이것에는 위에서 말한 절묘한 생태계의 공존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생태계는 너무나도 절묘하게 짜여져 있어 그것에서 우리는 그것을 관장하는 어떤 다른 존재, 예를 들어 신을 상상하게 된다. 이 신이 정해준, 각자의 영역에서 적절한 숫자를 유지하며 존재하는 커다란 동물원, 그것이 어쩌면 배, 혹은 지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파이의 이야기를 믿는다면 우리는 그 둘의 기적적인 생존에도 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파이는 리처드 파커를 물에서 건져주었고, 파이는 그가 되뇌이듯 리처드 파커가 있었기 때문에 그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또한 파이가 인간으로서는 유일하게 큰 배에서 살아남은 것은 신을 경배하기 위해 선상으로 나왔기 때문이며, 그가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겼을 때 신은 그에게 떠다니는 섬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계속 버텨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공존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신 외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공존이라는 것에는 '매우 다름' 혹은 '차이'가 이미 들어 있다는 것. 우리가 '호랑이와 인간의 공존'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둘이 이미 매우 다름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즉 공존은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이 같이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이 같이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것은 물론 호랑이와 인간만의 관계에서만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파이 안의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의 종교의 공존, 혹은 채식주의자와 비채식주의자와의 공존 같은 경우에도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오늘날 우리는 흔히 공존보다는 비공존을 믿는다. 즉 서로 다른, 그것도 아주 이질적인 호랑이와 인간이 공존했다는 이야기는 믿지 않지만, 같은 종인 인간 끼리 비공존했다는 이야기를 결국에는 믿으며, 절대 같이 공존할 수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런 믿을 수 없는 공존이 실제로 이 지구상에는 벌어지고 있다. 생태계라는 거대한 계에서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면서, 그러면서도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 말이다. 그것은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잘짜여진 계라 가끔은 우리는 그 계 위의 어떤 것, 그 계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노아의 방주' 같은 이야기들. 그 비가 쏟아지는 동안 노아의 방주 속 한쌍의 동물들은 어떻게 서로서로를 잡아먹지 않고 버텼을까,라는 질문 같은 것 말이다. 물론 그것은 <라이프 오브 파이>의 다른 버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다시 결국 믿음의 문제로 돌아간다.


덧.
이 영화를 3D로 감상하였기에, 몇 가지의 이야기를 붙여둔다. 3D는 영화라는 매체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지만, 사실 이 3D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물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기술상의 문제이다. 가장 기본적인 3D의 형태를 예로 들어 이야기하면 3D는 두 대의 카메라의 2D 이미지를 붙이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즉 이 붙여진 두 개의 2D 이미지 사이의 간극은 컴퓨터의 계산이 메꾸고 있다. 그러나 이 컴퓨터의 계산이 아무리 빨라도, 즉 아무리 사이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도, 우리의 뇌가 만들어내는 계산, 눈이 실제로 지각하는 이미지의 층을 완벽하게 메우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종종 3D 영화에서 인물이나 물체는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일종의 포토샵에서 사용되는 레이어와 같은 것이랄까. 여기에는 몇 개의 층이 있어서 인물이나 물체는 이 사이 어딘가에서 입체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단순하게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놀랍게도 이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는 이상한 위력을 발휘하는데, 그것은 이 영화가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떠 있음'이 만들어내는 이중의 부력은 이 영화의 3D를 종래의 다른 3D와 다른 것처럼 보이게 한다.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이 영화의 3D를 너무 폄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안 감독의 이 3D 영화가 가장 놀랍게 하는 것은 이 영화는 그것을 보는 자에게 종종 3D임을 잊게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못 만들어진 3D영화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란, 어쩌면 역으로 그것이 3D임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런 영화들에서는 종종 3D의 효과를 과시하듯 내보이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불쑥 끼어드는 그런 장면들이 3D의 효과를 극대화하여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나, 동시에 그것은 영화의 이야기를 종종 잊게 만든다. 즉 이 장면을 3D효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넣었군, 이라고 관객이 생각하는 순간 관객은 그 영화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에서 처음 소리라는 것이 등장했을 때, 혹은 음악이 거슬릴 때와 비슷하다. 지금의 우리는 영화에서 소리(음성)가 나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그것이 영화의 감상을 저해하지 않는다. 즉 '음..지금 배우의 목소리가 나오는군'이라고 (당연히)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 처음 소리가 등장했을 때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것이 영화의 감상을 저해한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에는 한편으로 영화에 소리를 통합하는 영화적 문법이(기술이 아니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지금 어떤 영화에서 음악이 계속 거슬린다면 그것은 감독이 영화에 음악을 넣는 문법을 잘못 적용한 탓이다.) 즉 3D가 완전해지는 때는 사람들이 아..이거 3D효과군,을 더 이상 인식하지 않는 미래의 어느 때, 당연히 3D안경도 필요없는 미래의 어느 날이다.

그런 면에서 이안 감독의 이 3D영화가 3D영화로서 좋은 점은 그것이 이야기의 흐름을 끊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에는 지금부터 3D가 나와요, 그 효과를 만끽하세요,라는 과시의 장면이 없다. 그 3D효과는 상당부분 이야기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종종 나는 이것이 3D영화임을 잊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예전 안경을 쓸 때의 버릇처럼 코를 계속 문질렀지만 어느틈에 나는 코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영화를 보았다.


- 2013년 1월, 메가박스 동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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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1.20 2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아! 3D로 봐야할 영화였구나 싶었어요. 아직 3D영화체험이 없답니다.(혹시 배벌미할까 싶어서;;) 하지만 그냥 영화로도 정말 훌륭한(이런 표현이 좀 그렇긴하지만요)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양위에서 펼쳐지는영상들은 압도적이었고 고래가 헤엄치던 장면은 환상 그자체였어요! 조난당하고 뱅골호랑이와 단둘이 남은 십대소년이 227일간을 사투를 벌이는 스토리인데도(물론 놀라고 가슴은 졸였지만) 한편으론 편안하더라구요.. 이상하게 ^^; 아마 파이의 이야기를 들은 작가는 두개의 스토리중에서 저랑 똑같은쪽을 믿고 그렇게 소설을 쓸거같아요 ㅎㅎ

  2.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1.20 2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참! 글 너무 잘 읽었답니다. 그냥 하는 이야기아니고 이번 글은 전한테 아주 중요한 것들을 알려주셨으니까요 감사 ~

  3.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1.21 0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저도 사실은 3D를 그다지 즐겨서 보지 않아요. 3D로 같이 개봉하는 영화들도 왠만하면 2D를 선택하고는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안경을 너무 견딜 수가 없어서요. 그런데 이 영화는 여러 소개글을 읽고는 3D로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도 3D는 절대 찍지 않을 것 같은 감독이 굳이 3D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거든요.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 있길래,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근데 이 영화의 재밌는 것은 이 영화를 다룬 여러 리뷰들에서 그런 믿음의 문제가 다시 반복이 되더군요. 즉 첫 번째의 믿음을 2시간이 넘게 영화속에서 재현해줬지만, 어떤 재현도 없이 그 이야기로밖에 나오지 않은 두 번째의 믿음을 선택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할까요. 그래서 기꺼이 불신이라는, 혹은 상징의 해석이라는 '다른 형태의 믿음'을 선택하는 기이한 현상. (그러나 저는 여전히, 영화를 다루는 글은 자신이 본 것을 쓸 뿐이라는 그 간단한 믿음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상징적인 해석마저 자신이 본 것이라고 한다면 더 할 말이 없습니다만...)

    자신이 보는 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보게 된다는 말이 이 영화에서도, 그리고 이 영화를 둘러싼 이차적인 담론에서도 다시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그리고 제 글도 크게 다를 바는 없구요.)

    기꺼이 들러서 늘 읽어주시니, 저야말로 늘 감사드립니다.:)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탐 후퍼

Ending Credit | 2013.01.02 18:16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스펙터클(spectacle), 즉 영화에서 보여주는 장관, 혹은 볼거리라는 것에 대해 미심쩍어하는, 특히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스펙터클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쪽에 가깝지만, 이 영화 <레미제라블>의 스펙터클은 확실히 인상적인 데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에서 스펙터클이라 불릴 수 있는 장면은 특이하게도 영화가 시작하는 부분과 끝나는 부분 두 군데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두 장면의 스펙터클은 대규모의 인원이 동원된 씬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실 내용상으로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 첫 장면의 스펙터클은 대규모의 죄수들이 큰 배를 독으로 끌어당기는 장면이다. 돛이 부러지고, 거의 침몰 직전의 배는 순수하게 인력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 마지막 장면의 스펙터클은 광장에 드넓게 펼쳐진 바리케이트와 그 바리케이트 위와 뒤편의 군중들이다. 그 바리케이트의 재료들, 그러니까 가득 쌓아올려진 각종 가구들은 이것이 순수하게 인력에 의해 만들어진 바리케이트임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한 가지의 공통 요소가 있다. 그것은 대규모의 인력이다. 이 대규모의 인력이 만들어내는 어떤 거대한 힘은 분명 보는 이를 압도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이 두 장면은 반대되는 면을 가지고 있다. 첫 장면의 죄수들은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채로 존재한다. 그들의 육체는 시키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머리속은 모두 어떻게든 이 지옥같은 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반면 마지막 장면의 군중은 누군가 시켜서 그곳에 나와 바리케이트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목적을 이루려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이의 대비는 이것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 장면에 바닥에 끌리는 프랑스 국기와 마지막 장면의 바리케이트 위에서 나부끼는 프랑스 국기의 차이. 즉 이 두 장면은 일종의 대구이다.

이 스펙터클은 혁명이라는 것의 어떤 보이지 않는 것, 말로만 이야기 되는 그 실체의 어떤 실루엣을 아주 조금은 드러내보인다. 이를 이런 질문으로 바꿔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혁명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가. 영화를 보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여 대답하면 그것은 그러니까 바리케이트의 크기의 차이다. 영화의 중간, 마리우스(에디 레드메인)와 일단의 청년들이 만든 집 앞에 존재하는 바리케이트와 그 마지막 바리케이트를 비교하여 보자. 마지막 장발장(휴 잭맨)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혹은 천국에서 존재하는 그 거대한 바리케이트와 실제의 봉기 - 뭐 '혁명'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혁명'과 '봉기'의 용어상의 차이에 대한 논의들이 있지만, 솔직히 그 간극이 그렇게 넓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에서 만들어진 바리케이트의 크기의 차이가 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즉 혁명은 직관적으로는 크기의 문제이다. 포악한 제정, 혹은 독재 정권은 거리에 쏟아진 수많은 시민들의 '크기'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겁을 집어 먹는다. 그러나 마리우스와 일단의 공화파 청년들이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에서 계획한 영화 속 봉기 - 역사적으로는 1832년 6월의 봉기 - 는 영화 속에서 이야기하듯이 그 크기를 키우지 못했기 때문에, 즉 민중들의 호응을 불러오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다. 그 실패와 성공을 이 영화는 직관적인 바리케이트의 크기의 대비를 통해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 바리케이트의 크기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이 '민중'이라는 존재에 대해 영화가 취하고 있는 태도를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민중'이라는 용어는 단일한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지만, 그 민중이란 사실 수많은 욕망들의 집합이다. 이 영화는 그런 수많은 욕망들의 집합이 움직이는 양상을 때로는 약간 부정적으로 보여주는데, 대표적인 예가 판틴(앤 헤서웨이)이 공장에서 쫓겨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결국 겉으로 보여지는 판틴을 공장 밖으로 내보내는 존재들은 판틴과 공장 안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 여공들, 그러니까 민중들이다.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판틴이 공장 밖으로 쫓겨나는 것에는 물론 동료 여공들의 시기심만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시스템'이 있다. 그러나 이 트리거가 동료 여공들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양상은 판틴이 거리의 여자가 되어서도 계속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동정과 시기심과 체념과 질투와 같은 것들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이러한 민중이라는 존재의 어떤 복잡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두 갈래가 나오는데, 하나는 여관을 운영하는 부부이고, 하나는 자베르 경감(러셀 크로우)이다.

여관을 운영하는 부부는 이런 민중의 욕망이 극대화되어 만들어진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오로지 주위 사람을 등쳐먹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는데, 물론 이들의 주위 사람들이란 같은 민중들이다. 자베르 경감은 보다 복잡한 캐릭터인데, 자베르 경감은 이 <레미제라블>의 전체 구도 속에서 장발장의 거울상이다. 자베르 경감이 법의 영역을 상징한다면, 장발장은 그 법의 이면에 있는 휴머니즘(인간)의 영역을 상징하는데, 이 둘이 거울상임은 예를 들어 이 두 인물이 모두 영화상에서 한번의 기회를 얻지만 그 기회를 배반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즉 장발장은 신부님이 재워주고 먹을 것을 주지만 성당의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며, 자베르는 장발장이 죽이지 않고 살려주지만, 다시 그런 장발장을 잡으러 나타난다. 그러나 무릇 거울상이라는 것이 그렇듯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났다는 점이다. 자베르 경감은 영화 속에서 자신이 감옥에서 자라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자베르 경감이 자라나 결국 장발장과 대결하게 되는 것이 이 영화의 민중상과도 연관이 있을 것인데, 자베르 경감은 자본주의적으로 말하면 중간관리자이고, 봉건주의적으로 말하면 마름이다. 중세의 지배계층은 이 봉건제도를 만들어 내며, 또하나 결정적인 것, 후세에도 계속 영향을 미칠 어떤 것을 발명해냈는데, 그것은 바로 이 마름의 존재이다. 영화 <정복자 펠레> 등에서도 잘 보여지듯이 이 마름, 중간관리자는 그들 역시 지배 계층이 아니면서도 거의 대부분 지배 계층보다 훨씬 더한 잔학성을 보여주며, 이것에는 물론 마름들 자신의 지배계층을 향한 욕망, 그리고 작은 권력의 쾌감이 작용을 한다. 즉 지배계층은 결국 뒤에 멀찍이 서서 손안대고 코를 풀게 되는 것은 마름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며, 이 마름의 활용은 그 이후에도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까지 지배의 한 원리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촛불집회에서 사람들에게 곤봉을 날리던 전경, 혹은 두 개의 문이 있는지도 모르고 건물에 오르던 경찰 특공대원, 아니면 그것을 지시한 한 기업의 중간관리자 출신인 MB의 경우라면 어떨까.

그런 자베르 경감이 결국 강물에 몸을 던지는 것은 두 가지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다시 '민중'이라는 것. 그런 자베르, 즉 민중이 민중을 괴롭히던 것의 상징인 자베르가 강물에 몸을 던질 때 결국은 던져지는 (낯간지럽지만) 메시지 같은 것. 그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바리케이트의 크기와 통한다. 왜냐하면 결국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런 나쁜 민중일지라도, 즉 판틴을 내쫓고, 숙박자들의 몸을 털고, 설혹 자베르와 같은 민중일지라도, 그런 모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죽어가는 청년들 앞에서 문을 닫고 그들을 외면하는 민중들이 바로 동시에 혁명의 주역들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자베르 경감의 죽음이, 그리고 그 거대한 상상의 혹은 천국의 바리케이트가 보여준다. 그 거대한 가재도구의 집합이 말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자베르 경감은 법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불변성'을 거의 하나의 원칙으로 삼고 있던 인물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든 결코 변할 수 없다는 그의 믿음. 그리고 그의 반대편에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장발장의 믿음이 있고, 그것을 장발장은 단지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려 했다. 그런 원칙의 상징인 자베르가 강물에 스스로 몸을 던질 때, 이는 그 원칙이 깨질 수 있음을 장발장과 동일하게 단지 믿음이 아니라 어떤 삶으로서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이 두 가지는 연결된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움직이는 것 같은 이 민중들이 변할 수 있다는 점, 그 불가능성을 믿어야 한다는 것. 그것의 불가능성을 어떻게든 믿으려 애써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민중들을 믿어야만, 그들이 무엇인가를 위하여 공동으로 움직일 때에만 무엇인가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금 2013년에 <레미제라블>이 필요하다면 그런 이유다. 그 '고통받는 사람들', 그렇게 고통받으면서도 때로는 같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더한 고통을 안겨주는 그 사람들을 왜 끌어안아야 하는가,라고 물을 때 할 수 있는 대답이 있다면 그건 <레미제라블>이고 '장발장'이다. 새벽 5시에 투표장에 나와서 투표하고, 고엽제로 고통받으면서도 그 고엽제를 뿌리는 곳으로 보낸 사람의 딸을 지지하고, 방이 추워서 어쩔 수 없이 탑골공원에 나오면서도 그 방값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멍청해서, 혹은 콘크리트라서, 라고 말한다면 그건 자베르 경감의 다른 버전이다. <레미제라블>의 숭고함은 그러니까 절대 변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변할 수 있다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믿음을 가지는 것에서 시작되는 숭고함이다. 그것을 영화는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그 바리케이트로서 말이다. 그들이 없으면 바리케이트를 만들 수 없다.


덧.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이 글은 <레미제라블> 영화만을 본 이후에 썼으며, 원작은 참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원작과 비교해서 뭔가 잘못 쓴 부분이 있다면 아직 원작을 보지 못한 내 게으름과 우둔함 탓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이 영화가 원작을 얼마나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가는 관심이 없으며, 또한 사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과거의 이야기를 얼마나 스크린에서 잘 보이고 있는가가 아니라, 왜 이 이야기가 2013년인 지금에 필요한가, 영화는 어떤 부분에서 이 이야기의 방점을 찍는가, 어떻게 재해석을 하고 있는가의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새롭게 재해석해도, 무엇인가 끄집어낼 것이 있는 것, 그것이 고전이 가지는 힘이 아닐까.

어쩌면 이 영화가 보다 정치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 직접적인 메시지의 힘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그 대사들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그나마 노래이기 때문인데 - 그 노래가사들을 직접 대사로 한다고 생각해보라 - 뮤지컬 혹은 오페라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영화화했을 때의 장점 역시도 놓치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이야기한 대규모 스펙터클은 물론이고, 여관에서 부부가 등쳐먹을 때 이어지는 그 현란한 편집은 쾌감이 느껴질 정도. 평론가 듀나 씨는 이 영화의 영화로서의 힘을 도리어 빈번한 클로즈업에서 찾던데 그건 생각해 볼만한 부분.  



- 2012년 12월, 롯데시네마 에비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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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소년, 조성희

Ending Credit | 2012.12.11 16:53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적 내용이 들어있음)


영화 <늑대소년>은 동화다. 조성희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했듯, 이 영화는 철저하게 '동화'라는 컨셉을 가지고 시작을 했으며, 조성희 감독은 그 컨셉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플롯이 아니라, 단선적인 기승전결의 구조와 캐릭터들의 활용이 그런 부분일텐데, 예를 들어 엄마(장영남)나 마을 사람들의 캐릭터, 악역인 지태(유연석) 등을 보면, 이들은 철저하게 기능적인 활용에 머물러 있으며, 적시적소에 나타나,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고 나가는 데에만 도움을 줄 뿐, 그 활용이 제한되어 있다. 즉 외로운 산골 마을에서 딸 둘을 데리고 사는 엄마의 어려움이나, 지태의 내면적 갈등 같은 것은 이 영화가 동화를 표방하고 있는 한, 이 영화에는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동화 <빨간모자>에서 늑대가 소녀를 잡아먹을까, 말까 내적갈등을 겪는다면 그건 이미 동화가 아닌 것이다. 물론 이를 한편으로는 순이(박보영)와 철수(송중기), 이 두 메인 캐릭터에게 덧씌워진 어떤 적절한 한계와 같은 부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즉 이 두 메인 캐릭터는 사랑을 하되, 그것은 동화적인 사랑이어야만 한다. 즉 이 영화는 호소다 마모루의 <늑대아이> 혹은 <트와일라잇> 시리즈처럼, 두 메인 캐릭터가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는 데에까지 나아갈 생각은 없다. 두 사람이 이루어지지 못해서가 아니라, 설혹 사랑을 이루어냈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왜? 동화니까. 동화는 '그 후로 오래도록 잘 살았습니다.'로 끝내야지, '그 후에 섹스도 하고, 애도 낳고, 부부싸움도 하면서 잘 살았습니다.'로 끝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늑대소년>은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고,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도 그런 부분이다. 앞과 뒤에 액자를 씌워 놓고, 여기에 할머니가 된 순이를 등장시킨다는 것. 이게 명백히 동화를 표방하고 있다면, 이것은 상당히 이상하게 느껴진다.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동화 <백설공주>가 다 늙은 백설공주가 나와 과거를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할 때를 상상하는 그 이질감 말이다. 즉 영화 <늑대소년>은 동화, 판타지를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그 시작과 끝은 그 판타지를 스스로 무너뜨리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감독이든 혹은 제작사이든 이것이 판타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판타지를 강화해주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일단 하나. 다시 현재로 돌아온 마지막 씬들에서 과거의 모든 것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시골집도, 카라멜도, 심지어는 철수도 말이다. 그 모든 것이 보존된 공간이 순이에게 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전과 완전히 똑같아, 라고 말해줄 때, 이것이 어떤 판타지를 강화한다고 보는 것일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꿈이 깼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꿈속의 인물이 나타나, 아니야 너는 아직 깨지 않았어, 라고 말하는 것이 그 꿈을 억지로라도 지속시킨다고 보는 것일까. 아니면 여기에 어떤 영화의 잠재된 핵심, 그러니까 여기에 영화의, 혹은 감독의 무의식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이 앞과 뒤의 액자들은 영화의 주플롯과 분리되어 있으며, 당연히 그것이 존재하지 않아도, 이 아름다운 동화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니 모든 영화제작사들은 1분이라도 영화에서 줄어들기를 바라므로, 이 액자가 사라지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리뷰들을 보면 상당수의 관객들도 이 액자를 그렇게 바라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필요치 않은 것을 억지로 집어넣었다는 이 사실이, 다른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늑대소년>을 다룬 글(씨네21)에서 철수를 '어정쩡한 타자'로 규정한다. 즉 철수는 '10대 소녀의 백일몽(김혜리)'이라는 견해와 '근대의 정상성에 맞선다(이용철)' 라는 견해 사이에 어정쩡하게 위치해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10대 소녀의 꿈속에 나타날 수 있는 미소년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기도 하다. 철수라는 늑대와 인간 사이에 위치한 이 존재는 도대체 어떠한 존재인가. 이 질문은 영화의 마지막 철수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질문이기도 했다. 지태나 군인의 의견은 철수가 위험한 존재이므로 - 그 자체로 위험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어떤 것을 감추기 위해서 -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고, 박사나 순이의 가족, 마을사람들의 의견은 철수가 위험한 존재가 아니므로 이곳 인간세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타자를 만났을 때 제기되는 즉각적인 질문, 이 타자는 나에게 위험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영화가 의도한 바대로 대부분의 관객은 순이의 편, 그러니까 철수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에 동조하게 된다. 왜? 우리는 지금까지 철수의 '길들여짐'을 보았기 때문이다. 즉 철수는 위험한 존재였을지도 모르지만, 순이의 조련으로 인해 길들여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철수는 기다리라는 순이의 간절한 외침에도 다시 야수성을 드러내 보이고, 철수의 인간세상에로의 편입은 실패한다.

즉 이 영화 <늑대소년>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 간단하게 말해 '괴물'을 인간과 비슷한 어떤 것으로 길들이려다 결국에는 실패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이 생긴다. 인간이 되는 것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몇십 년 후 순이가 돌아왔을 때, 그 괴물은 스스로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 길들여짐은 몇십 년이 지나서야 완성이 된다. 그것도 조련사의 도움이 없이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괴물은 조련사가 길들이는 데 실패하였지만, 기어이 스스로 길들여졌고, 더 나아가 조련사보다 훨씬 나은 위치에 서 있다. 즉 조련사는 늙고, 괴물이 되었지만, - 영화의 첫 대사를 기억해보라. 할머니는 거울을 보며 말한다. "이런 괴물을 봤나..." - 괴물은 잘생기고, 뽀송뽀송한 예전의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내가 묻는 것은 물리적인 가능성이라기 보다는, 이 영화에 깔린 어떤 전제이다. 즉 철수는 길들여지기 훨씬 이전부터, 괴물인 적은 없지 않았나, 이미 시작부터 이 영화는 철수를 인간이라는 틀 안에 집어넣고 시작하지 않았나,하는 물음이다. 즉 순이의 길들이기는 어쩌면 '가짜 길들이기', 아장아장 소꿉장난과 같은 것은 아니었나 하는 물음이다. 

몇 가지의 힌트들이 있다. 철수와 순이의 첫 조우. 예를 들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철수는 왜 순이를 공격하여 잡아먹지 않았나. 그가 늑대라면 도리어 인간인 순이를 공격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누군가는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철수는 늑대가 아니라, '늑대인간'이라구요. 그래서 철수는 순이와 엄마가 내민 감자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감자를 먹는 늑대인간이라. 그런데 우리는 그 전에 사실 철수의 먹이를 이미 본 적이 있다. 철수를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인물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들고 있던 양동이에 가득담긴 생고기 조각들. 그런데 이제 와서 감자와 밥과 국과 잡채를 먹는 늑대인간이라. 뭐 좋다, 늑대인간은 잡식성일 수 있으니까. 다음의 장면. 김혜리는 짤막한 글(씨네21)에서 예리하게 다음의 장면을 집어낸다. 철수가 마을의 염소를 해쳤다는 누명을 쓰자 순이가 "네가 그런 거 아니지?"라고 캐묻는 장면. 그러면서 설명을 단다. '그녀도 영화도, 늑대소년을 슬픈 인간으로 볼 뿐, 그의 수성(獸性)까지 받아들이진 못한다.' 김혜리의 지적대로 늑대소년이 염소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것이 도리어 당연한데도, 그녀도 영화도, 나를 포함한 관객들도 그가 그럴 리 없다고 굳게 믿는다. 지태가 저지르는 일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그것도 그것이지만, '처음부터' 그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반농담으로 돌아가자면, 그가 처음부터 감자를 먹었기 때문이다. 즉 그가 괴물이라는 가능성은 순이에게도, 마을사람들에게도, 그리고 관객들에게도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그는 완벽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송중기니까.    

즉 우리는 이 영화에서 어정쩡한 타자 늑대소년을 보며, 그의 밝은 면만 들여다본다. 늑대소년의 기원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박사에게 엄마가 "아..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구요."라고 말하는 영화 속 장면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관객이 나빠서가 아니라, 영화의 구조가 그렇게 짜여진 탓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에서 '늑대소년'이라는 사실 이 복잡한 타자는 무엇인가가 제거되어 있고, 소녀도, 영화도, 관객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 예를 들어 수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타자가 가지는 불온성이라고 할 수도 있는 - 가 제거된 늑대소년, 혹은 송중기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과거의 모든 것이 그대로 보존된, 심지어는 당연히 변해야 할 늑대소년마저도 그대로 보존된 공간을 본다. 그래서 이를 과거로의 타임머신, 혹은 과거의 박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제를 하겠다는 것은 그것을 어떤 상징으로 만들고, 그 상징에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냥꾼들의 동물 박제이건, 북한의 김일성 박제이건 간에 그 박제물에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뒤따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굳이 액자로 만들어낸 과거의 박제는 무엇을 담고 있는가?

그것은 혹시 시간의 망각과 같은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북한의 김일성 박제가 시간을 망각시키는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시작부 "이런 괴물을 봤나...'라고 중얼거리는 할머니를 보며, 그것은 어떤 중의적인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늙고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대한 한탄이면서, 동시에 과거의 어떤 시간에 대한 회한이나 안타까움 같은 것을 담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결국 과거로 돌아가 보게 되는 것은 과거 자신과 늑대소년을 둘러싼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더욱 완벽히 제거되어 완전히 인간이 되어버린 괴물, 아니 그 괴물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은, 아름답고 뽀송뽀송하게 스스로 정화된 과거의 어떤 박제물이다. 즉 이 과거에는 과거 그 시간 이후로 사십 여년이 넘게 흐른 그간의 세월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깨끗하게 보존된 김일성의 박제에 몇십 년 간의 인민들의 고난의 행군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이 늑대소년은 김일성이 아니라 송중기다. 과거의 괴물에게는 이미 어느정도 이 수성이 제거되어 있기는 했지만, 다시 퇴행하여 돌아간 이 현재적 과거에서는 그 수성의 흔적조차 이제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소녀의 성장담도 아니고, 철수의 성장담도 아니고, 그저 박제담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액자의 시작부분에서 그녀의 대사 "이런 괴물을 봤나...'에만 정신이 팔려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그녀가 거울을 보며 그 대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 싸이보그지만 (예쁘니까) 괜찮아. 괴물이라도 잘생겼으면 괜찮아. 인간이라도 늙었으면 괴물인걸. 늙음, 그 늙음이 보여주는 시간은 그렇게 망각되어 다시 타자들을 분리해낸다. 물론 여기에는 근대가 만들어낸 '정상성'이라는 기제가 여전히 작동된다. 아름다운 아리아인, 아름다운 육체, 아름다운 인간성. 

아..물론 글의 첫머리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이 이야기는 동화다. 동화는 물론 동화로 남겨두어야만 한다. 하지만 모든 동화는 동화 이면의 기담을 담고 있음이 또 사실이 아니던가. 한 잉여의 늑대소년 기담, 쯤이라 해두자.



- 2012년 12월, CGV 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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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 쿠스쿠스, 압델 케시시

Ending Credit | 2012.12.06 18:01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결말부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영화를 뒤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영화의 마지막, 이제 새롭게 선상(船上)식당을 시작하려는 늙은 슬리만의 배 위에서 시범 운영 겸 개업 축하 파티가 벌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대접하여야 할 전처가 만들어준 생선 쿠스쿠스는 자식들 간에 벌어진 소동 끝에 어디론가로 없어져 버리고, 슬리만은 그것을 찾으러 나가지만, 그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생선 쿠스쿠스가 아니라 아들과 며느리의 부서질듯한 관계와 자신의 오토바이를 몰고 달아나는 어떤 아이들이다. 손님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에 이르고, 그녀의 새 딸, 그러니까 새로 만나고 있는 여자의 딸인 림은 그런 손님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갑자기 밸리댄스를 춘다. 그런 밸리댄스는 손님들의 열광 속에 농밀하고 아슬아슬하게 하염없이 이어지고, 슬리만은 자신을 거의 데리고 노는 듯한 아이들의 뒤를 쫓다가 그만 쓰러지고 만다. 그런 쓰러진 슬리만의 모습과 이국적이고도 이질적인 밸리댄스의 음악이 겹치며 엔딩크레딧이 오른다. 


이 마지막은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프랑스 사회를 살아가는 슬리만 가족을 비롯한 아랍계 이민자들의 모습과 그들의 문화가 들어 있으며, 예전 세대의 퇴장과 새로운 세대의 등장의 문제,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화합의 문제가 들어 있고, 구성된 가족과 가족의 해체, 분열, 그리고 새로운 가족의 결합과 그런 가족들 사이의 미묘한 갈등의 문제가 나타나며, 동시에 계층과 계급의 문제, 즉 그 선상식당의 수많은 손님들의 다양한 동상이몽이 드러난다. 이것을 감독 압델 케시시는 거의 마법과 같은 솜씨로 마지막에 압축시키며, 드러내 보이면서 동시에 감춘다. 즉 이 수많은 문제들은 수면 아래에 여전히 남아 있으면서 수면 위에는 오직 두 가지만을 드러내 보인다. 그 하나는 밸리댄스, 그 중에서도 밸리댄스를 추는 림의 풍만한 - 아니 이 표현으로는 사실 다 담기 어렵지만 - 배이며, 다른 하나는 오토바이를 타면서 와서 가져가보라고 조롱하는 아이들의 뒤를 쫓는 슬리만의 달리기이다. 이 두 가지가 교차하며, 여기에 밸리댄스의 흥겹고도 농밀한 음악이 겹쳐질 때, 그것은 어떤 이상한 축제가 된다. 예를 들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가 축제가 아닌 축제, 그럼으로써 더 축제가 된 어떤 마법과 같은 풍경을 보여주던 것처럼 말이다.

즉 이 마지막은 산적한 문제들을 드러내 보이면서도 이상하게도 활력과 축제의 힘이 만들어내는 희망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것은 마치 한편으로는 여성들의 힘, 여성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힘과 같이 보이기도 하는데, 어딘가로 사라져버리는 아들, 그리고 결국 길에 쓰러지는 아버지와 달리, 이 축제를 지속시키는 것은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밸리댄스를 춤으로써 모든 이들의 곤경을 누그러뜨리는 림의 행동은 물론이거니와 새 딸인 림과 전처와의 사이에서 난 딸들과의 불편한 관계는 림의 밸리댄스로 약간은 해소되는 것처럼도 보이고, 그 사이에 슬리만의 새 여자는 다른 음식을 해가지고 가져온다. 그리고 동시에 슬리만의 전처는 남은 생선 쿠스쿠스를 어느 노숙자에게 전해준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에서 마지막에 생선 쿠스쿠스를 유일하게 맛보게 되는 것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다. 물론 이것이 수렴되는 것은 위에서 얘기했듯이 밸리댄스를 추는 림의 풍만한 배이다. 이는 어떤 성적인 느낌이라기 보다는 다산성이나 모성과 같은 느낌인데, 이 림의 배와 슬리만의 달리기가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어떤 이미지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즉 슬리만의 아이들을 뒤쫓는 달리기는 마치 그의 생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닿을듯이 닿을듯이 오토바이에는 닿을 수 없지만, 그는 달리기를 멈출 수 없다. 그 오토바이는 그때 그가 가진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가족들을 건사한다는 목표로 한평생 공장에서 일했지만, 공장에서는 버려졌고, 성적으로는 불능의 상태가 되었으며, 이제 선상식당을 시작한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지만, 그 목표는 이제 위기에 처해있고, 그는 그 목표가 가장 가까이에 와 있을 때 달리기의 끝에서 예정된 쓰러짐을 맞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길한 마지막이고, 안타까운 결말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여전히 슬리만의 다음 세대, 그러니까 그의 자식들과 그들이 만들어낼 세계는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선상식당의 밸리댄스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새 딸 림이 축제를 지속시키기 위하여 추는 춤, 그것으로 조금은 가까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가족들간의 화해, 그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나갈 발걸음을 이 마지막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이 곳 프랑스는 그들이 계속 이어나가 살아야할 공간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중반부 슬리만은 선상식당을 하기 위해 낡은 배를 구입하고, 그것을 고쳐나간다. 그리고 선상식당을 열기 위해 여러 복잡한 절차, 그러니까 식당허가를 받고, 투자를 받고, 위생에 대한 감독을 받는 등의 통과의례를 거친다. 이 배는 그러니까 어쩌면 슬리만이라는 사람의 재현일지도 모른다. 그라는 존재는 오랫동안 이 이민자사회에 적응하려 애쓰느라 점점 낡아졌으며, 그 마지막에서 그는 새롭게 수리되어 새로운 용도로 사용하려는 배처럼, 새로운 삶의 길로 나아가려 한다. 그러나 사람은 배와 달리 완전히 고쳐질 수 없는 것. 대신 사람은 배와 달리 다음의 세대를 낳고, 그들에게로 삶은 이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는 전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새롭게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민자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민자들은 새로운 땅에 들어온 낡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고기잡이 배가 식당용 배가 되려면 여러 복잡한 규칙과 절차를 따라야 하는 것처럼 낯선 땅에 적응하기 위해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규칙에 적응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동시에 과거의 습관, 과거의 문화를 완전히 버릴 수가 없다. 그 완전히 버릴 수 없는 과거의 어떤 것들은 새로운 땅에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그 일부는 또 새로운 세계로 긍정적으로 수렴되어 새로운 문화가, 새로운 삶의 양식이 된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이 영화에서의 '생선 쿠스쿠스'와 같은 것이다. 쿠스쿠스(couscous)는 파스타의 일종으로 그것에 채소를 곁들이면 채소 쿠스쿠스, 생선을 곁들이면 생선 쿠스쿠스 등이 되는 음식이다. 이는 슬리만 가족과 같은 튀니지 이민자들에게는 흔하디흔한 음식이지만, 그것을 접할 기회가 흔치 않은 선상식당의 손님과 같은 프랑스 인들에게는 조금은 낯설고 이질적인 음식이며, 따라서 그 선상식당에서 처음으로 이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긴장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음식은 한편으로는 이민자 사회의 상징, 즉 전통의 보존과 새로운 규칙의 습득 속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긴장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긴장들은 다음의 세대들로 여전히 이어지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감독 압델 케시시는 이러한 것을 그들의 육체로서 효과적으로 드러내보인다. 나는 이 영화를 음식, 그 음식을 소비하는 육체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 영화의 모티브는 음식이면서, 그 음식을 소비하고 활동하는 육체이기도 하다. 압델 케시시는 이 영화의 거의 모든 부분을 인물의 곁을 바싹 따라붙는 클로즈업에 가까운 화면들의 교차로 채우고 있는데, 이는 인물들간의 갈등과 그들의 미묘한 생각을 드러내는 도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육체를 선명하게 드러내보이며, 이는 마치 세대들의 육체성의 차이를 드러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여성들의 가슴이나 배를 스치고 지나가는 씬이 많고, 이것과 연관한 이야기 등이 나오는데, 이는 성적인 느낌이라기 보다는 어떤 세대간의 연속성을 만들어낸다는 느낌이 있다. 예를 들어 뚱뚱하고 축 늘어진 전처의 몸매는 한편으로는 영화에 등장하는 슬리만의 여러 자녀들,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며, 림이 그 몸매를 흉보는 것은 그 자식들에 대한 미움을 드러내보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 슬리만의 자녀들 세대 역시도 이미 그 다음 세대의 어머니, 아버지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 계속 등장하는 아기들이나, 더 나아가 그 림의 풍만한 배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싫든 좋든 이민자 사회는 새로운 세대를 이어나가야만 한다. 그리고 슬리만이 새로운 것들에 적응하기 위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도 새로운 것들에 적응하기 위해 복잡한 규칙들을 배우고, 또 새롭게 생겨나는 문제들에 적절히 대응하여야만 할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이 영화는 축제가 아닌 축제를 보여주며, 그리 쉽게 해결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도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따스함을 읽지만, 누군가는 폭력을 읽고, 또 누군가는 밸리댄스에 흥겨워할 테지만, 다른 누군가는 사라진 생선 쿠스쿠스에 답답해 할 것이다. 삶이란 그렇게 쉽게 희망이나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단지 이어나갈 뿐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그들은 그렇게 싸우고, 화해하고, 의심하고, 험담하고, 애정을 보여주고, 서로를 돕기도 하면서 그렇게 별다른 도리 없이 다음 세대로 삶을 이어나갈 것이다. (영화 속에서 슬리만을 위해 연주를 해주는 노인들의 대화가 이 양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는 전세대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길로 나아갈 것이다.



-  2012년 11월, 서울아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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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 민병훈

Ending Credit | 2012.11.22 16:35 | Posted by 맥거핀.





민병훈 감독의 영화 <터치>는 영화 그 자체보다 다른 것으로 화제가 된 안타까운 영화다. 뭐 그것은 알려진대로 교차상영과 그에 반발한 감독의 종영 선언과 관련한 이야기. 교차상영에 관련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가 끄적거릴 이야기도 그렇게 영화의 내용과 관련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튼 웃긴 것은 이 교차상영은 멀티플렉스의 등장과 함께 나타났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만은 아니고, 모든 책임을 배급사나 멀티플렉스에 돌릴 수도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멀티플렉스는 많은 영화를 보여주겠다는 명분으로 탄생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행동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여러 사람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요즘의 관객들이 '이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일단 간단하게는 요즘에는 거의 모든 것들이 즉각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요즘에는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도중에, 심지어는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영화들에 대한 판결이 내려지며, 판결은 수치화되어 바로 점수와 랭킹이 매겨진다. (최근에 들어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트위터에 그 영화의 단평을 남기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어떠한 영화이든 간에 영화는 보는 이에게 머물러 있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바로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뀌어 급속하게 빠져나간다. 그러나 그보다 더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요즘의 '이해'가 보여주는 어떤 양상들이다. 이상하게도 요즘의 관객들은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는 것에는 관대하지만, 주인공들의 어떤 감정이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에는 점점 관대해지지 못하는 것 같다. 아니,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다음과 같이 좀 바꿔보자. 요즘의 관객들은 이야기가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로 만들어진 것은 보다 잘 견디지만, 주인공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것에는 보다 잘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여러 사람들의 이해도, 이해의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해에 대한 태도를 말하고 싶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 이해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해의 능력보다는 이해의 태도가 문제가 되니까.) 이야기가 복잡하거나, 일부러 결락을 만들어 놓은 영화들을 보고 나서는 여러 다른 것들을 찾아보며 어떻게든 이야기의 얼개를 맞추려는 관객들은 많아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인공이 어떤 행동, 생각을 보여줬을 때 그것이 나의 생각과 다르면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기 보다는 바로 낮은 평점으로 징벌을 내리는 관객들 또한 많아졌다.

물론 이것의 책임을 다른 여러 곳에 돌리거나 영화 그 스스로에게 물을 수도 있다. 요즘에는 이야기는 한껏 복잡해지지만, 주인공들의 감정이나 생각을 너무 쉬운 방식으로 표출하는 경향이 점차 심해지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어떤 작품들은 설명하는 씬들, 잉여의 씬들이 너무 많아서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주인공의 감정은 과도한 클로즈업과 구슬픈 음악들로 설명조로 제시되고, 그것도 모자라 대사로서 주인공은 자신의 감정을 다시 설명하고야 만다. 반면 이야기는 소위 반전을 만든다거나, 관객의 허를 찌른다는 이유로 쓸데없이 복잡해지고 있으며, 멀쩡히 놔두는 것이 훨씬 나은 이야기들을 억지로 뒤집고 자르고, 숨기고 있다. (한편으로 드라마나 영화는 아니지만, 예능 프로그램들을 가지고도 이러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요즘의 예능들은 보는 이들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컨트롤하니까.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내용을 보고 그 내용에 감동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에 커다랗게 쓰여진 '감동!'이라는 글자를 보고 감동하는 것일까. 물론 예능들은 아예 대놓고 자신들은 시청자가 10세 이하의 아동이라고 생각하고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10세 이하의 아동들에게도 "여기서 감동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것들이 관객들의 인내심을 혹은 역치를 점점 낮추는 것은 아닐까. 상당수의 관객들이 그것에 놓여져 있는 어떤 공백의 상태(사실 정확히 말하면 공백인 경우는 없지만)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그런 것들을 쉽게 설명해주는 방식에 너무 길들여졌기 때문은 아닐까. (아마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도대체 왜 견뎌야 하지, 영화는 견디지 않기 위해서 - 그러니까 즐기기 위해서 보는 것이 아닌가. - 그렇게 묻는 사람에게는 답해줄 말이 없다. 아니 우리의 인생도 그런 수많은 공백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라고 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이 영화라는 데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민병훈 감독의 영화 <터치>에서 주인공들은 조금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한다. 이 영화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주인공들에게는 계속 퀘스트가 주어지고, 계속해서 악마의 시험이 들이닥친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괴롭다. 괴로운 99분의 체험. 그러나 그 1시간 39분을 견디는 것이 바로 영화라는 것이다. 영화라는 것은 그 시간 동안을 견디며 앉아있는 것이 필요하기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므로 어쩔 도리가 없다(만약 30분 견디고 10분 쉬고 하는 것이 영화의 감상에 더 좋다면, 모든 영화를 그런 식으로 상영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그런데 그렇게 견디다 보면 이상한 감동이 온다.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내몰린 사람들이 영화의 어떤 시점에 이르러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선택으로 나아갈 때에 그것을 보는 감동. 정성일 식대로 말하자면, 그들은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내내 내몰려 있다가 비로소 선택할 수 있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 결국 비범한 선택을 한다(그러니까 그들에게 선택지를 주는 것처럼 보이는 초반의 설정들은 사실 선택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으니까. 정성일의 말대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선택'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선택은 선뜻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분명히 나도 그런 위치에 놓여지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므로. 그러니 나는 그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그때서야 비로소 선택할 수 있는 시점에 겨우 이르렀기 때문에, 즉 다른말로 하면 그 선택은 그들이 선택할 수 없는 체험의 끝에 결국 주어진 것이므로,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때로 영화는 이해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다. 그것에 대한 어떤 감동의 필수조건은 이해가 아니다. 역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주인공의 어떤 행동을 이해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그들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의 범주 안에 들어있다는 이야기이다. 즉 그것을 흔히 리얼하다거나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류의 감동은 때로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했을 때 우리 안에 나타난다. 영화는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을 견뎌내는 것이기도 하며, 그렇게 견뎌냄으로써 우리는 도리어 현실에 가깝게 다가선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에서 수많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이 현실을 벗어남으로써 도리어 현실에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영화, 혹은 예술의 가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 그의 이해 여부와 예술의 가치는 무관하다. 아니 도리어 예술은 이해를 벗어남으로써 예술로서 나아간다. 예술은, 아니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관객을 앞질러 나가야 한다. (이것은 관객을 계몽하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관객이 무지몽매하니 그들을 앞질러 나가야 한다는 더더구나 아니다. 이야기를 잘라내거나 복잡하게 꼬아버림으로써 앞질러 나가는 것, 혹은 관객에게 메시지를 주입하여 앞질러 나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앞질러 나가려는 하나의 시도는 예를 들어 이러한 것이 아닐까. 최근에 아트시네마에서 진행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프랑스 영화 특별전'에서 자크 리벳의 <도끼에 손대지 마라>를 보았다. 19세기 프랑스 귀족사회에서 앙투아네트(랑제 공작 부인)와 아르망 장군의 사랑을 그린 발자크의 소설 <랑제 공작 부인>을 영화화한 작품인데, 영화의 어떤 특이한 형식적인 시도가 눈에 띈다. 그것은 자막의 활용인데, 이는 화면과 병치하여 존재하는 영화적인 시도로서의 자막이 아니라, 검은 바탕화면에 흰글씨로 나오는 무성영화, 혹은 오페라나 연극식의 자막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서의 자막은 이야기의 진행을 돕는 보조도구로서 기능하는데 '다음날', '그날 저녁' 식의 자막은 물론이고, 며칠이 지나 어디로 이동했다거나, 몇 시간째 그를 기다렸다거나 하는 자막이 계속하여 나온다(즉 '이동한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리고 싶으면 이동수단을 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대사로 처리하는 일반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그것을 그저 자막으로 처리하여 버린다). 그것은 극의 진행을 넘어서, 사랑으로 괴로워했다는 식의 간략한 감정을 설명하거나, 지금까지 본 부분은 사랑의 사회문화적 양상이니 이제 사랑의 종교적 양상을 보자는 식의 논평적인 부분까지 나아간다.
 
그렇다면 이 영화야말로 관객에게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관객을 바보 만드는 영화의 전형적인 예인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가장 큰 흐름, 아르망 장군과 앙투아네트의 사랑에 담긴 게임적인 요소의 미스테리는 이것으로서 도리어 강화되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에서의 자막들은 영화의 중간중간 관객에게 그저 보여주는 감독의 패이다(어떤 게임도 패를 아예 보지 않고서는 게임을 진행할 수 없다. 아니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패의 일부는 보여주어야만 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사소한 전개에 관계된 내용들은 간단하게 전달하겠다는 감독의 일종의 전략인 셈이다. 며칠이 지났는지, 어디로 이동했는지 같은 것에 왜 쓸데없이 머리를 써, 그보다 이 영화에 머리를 쓸 것은 이 두 사람의 관계라는 감독의 대답이라고 할까. 즉 전적으로 이것의 힘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이 자막들은 관객이 이 두 사람의 관계에 주목하게 하고, 이들의 관계의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게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우리는 그 자막들로서 영화에 조금 더 가깝게 들어오게 된다. 

그러니 쓸데없이 그만 좀 비틀고, 관객을 어떻게하면 좀 더 영화에 들어오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필요없는 수식들로 영화를 잔뜩 포장한 후 영화를 보고나서 그 내용에 대한 질문을 인터넷에 올리게 하는 것은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을 점점 밀어내는 것이다. 영화를 어떻게 하면 사람들 안에 오래 머물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영화는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뭐 그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이나, 자막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실험이나 시도일 수 있다. 아무튼 할 수 있는 마지막 이야기는 하고 글을 끝내야 겠다. 이 <도끼에 손대지 마라>는 1928년생 영화감독이 2007년에 만든 영화이다. 그리고 <터치>는 교차상영으로 종영하기에는 상당히 아까운 영화이다. 


- 2012년 11월, 필름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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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칭 포 슈가맨, 말릭 벤젤룰

Ending Credit | 2012.11.12 19:58 | Posted by 맥거핀.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안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영화의 전체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며칠 전 이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을 얘기한 리뷰에 나는 처음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페이크 다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댓글을 썼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도 어쩌면 페이크 다큐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진짜처럼 만들어진 가짜가 가짜처럼 만들어진 진짜를 밀어내는 시대에 만들어진 잡동사니형 인간. 그 인간은 그래서 위키 검색을 해보기로 했다. 인터넷 시대에는 아무리 가짜여도 많이 언급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진짜가 되니까. (그래서 누구나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즉 많이 수정되면 수정될수록 더 진짜일 확률이 높다고 받아들여지는 이 위키라는 것은 현생 인터넷이 만들어낸 최고의 물건이자 최고의 판정가가 아니겠는가.) Rodriguez 혹은 Sixto Diaz Rodriguez 혹은 Jesus Rodriguez라는 이 인물은 곧 위키가 판정을 내려준다. 1942년 7월 10일이라는 태어난 날이 기록된 진짜. 죽은 날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살아있는 뮤지션이라는 판정.

영화를 보고 나서도 여전히 믿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몇 가지의 이상한 얘기들이 여기에는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도 기록되어 있고, 위키에도 기록되어 있는 몇 가지의 이상한 이야기. 그는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미국에서 몇 명의 프로듀서에 의해 발굴된 후 <Cold Fact>와 <Coming From Reality>라는 두 장의 앨범을 냈으나, 그 앨범은 거의 사장되어 버렸고, 그는 그대로 묻혀버렸다. 뭐 여기까지는 흔히 있는(뭐 그에게 앨범을 내준 레코드사 사장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참담한 실패'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는 그의 앨범이 미국에서 총 6장이 팔렸다고 주장하니까) 그저 그렇고그런 실패담이다. 그런 그가 다시 되살아난 것은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지구 반대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이다. 알 수 없는 경로로 들어온 그의 앨범은 당시 폭압적이고 체제에 의한 검열이 횡행하는 남아공에서 자유와 해방의 상징으로 각광받았고, 그는 남아공에서 비틀즈나 앨비스 프레슬리 못지 않을 정도로 알려진 뮤지션이 되었다. 단, 무대 위에서 오래전에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미스테리 뮤지션으로서 말이다. 물론 위키에서도 친절하게 요약하고 있듯이 그가 죽었다는 것은 잘못된 소문이고, 그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채로 1990년대 말의 어느날 남아공에서 걸려온 한 전화를 받게 된다. 당신은 남아공에서 비틀즈만큼 유명하며, 수십만장의 앨범이 팔렸으며, 당신을 보고 싶어하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있다는 그런 전화를 말이다.

이 이야기 자체에는 표면적으로 몇 가지의 이상한 사실들이 들어있다. 남아공에서는 그가 이미 죽은, 그것도 무대에서 분신을 꾀한 전설적인 뮤지션으로 알려져 있었던 사실이나, 로드리게스 역시 남아공에서 자신의 앨범이 그렇게나 많이 팔리고 유명한 뮤지션이 되었다는 점을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은 물론이거니와 그 로드리게스가 그 이후 남아공에 지속적으로 머물지 않고, 단 몇 번의 공연 후 건설노동자라는, 음악 실패 후 20년 동안 생계를 지탱하게 해준 직업으로 돌아갔다는 사실도 그렇다. 물론 가장 놀랍고도 믿기 어려운 사실은 그의 앨범이 남아공에서 수십만장 넘게 팔리며 큰 인기를 얻었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 영화의 힘은 바로 그 부분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에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바로 그의 노래가 체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검열과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과 그의 삶을 병치하여 보여주는 이 영화의 후반부 구성이 만들어내는 힘 말이다. 그가 다시 평범한 노동자라는 자신의 삶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증명하는(우리네 상식으로는 이제 남아공에서 추억팔이 공연이나 하면서 평안하게 사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 것 같은데도) 그의 삶에 대한 태도로 만들어진 노래가 남아공에서 체제의 검열과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부분 말이다. 즉 그는 차갑고 비참하나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디트로이트의 가난한 이민 노동자의 의식을 그대로 그의 노래에 반영했고, 그의 노래들은 그러므로 노동의 노래, 노동자의 노래, 도시빈민의 노래, 가난한 자들의 노래였다. 그리고 그 노래들은 지구 반대편이라는 거리와 20년이라는 시차를 넘어 더 나은 삶을 희망하던 남아공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에게 따스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상한 일이면서 동시에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참하고 억압된 삶을 살지만,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들은 비슷한 것을 공유하니까 말이다.

영화의 전반부에 흐르는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대체로 디트로이트의 차가운 풍경을 부감으로 찍은 화면이나 남아공의 과거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여 흐르나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의 음악이 현재의 그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여 흐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노동일을 하러 나가면서도 정장을 갖춰입는 그, 더 나은 삶을 만들어내기 위해 실현가능성이 별로 없음을 알면서도 시장 후보에 출마하고, 가난하게 살지만 문화적으로는 풍성하게 딸들이 자라나기를 바라면서 박물관, 도서관에 늘 딸들을 데리고 다녔던 그가 비틀비틀 쓰러질 듯한 걸음걸이로 일을 하러 나갈 때 울려퍼지는 그의 음악들과 그의 현재의 삶이 겹치는 순간을 보는 것 말이다. 희망을 잃지 말자고, 언젠가는 그 희망이 삶이 될 거라고 말하는 수십년 전 그가 만들어낸 음악들이 현재의 그에 겹치는 것을 보는 것은, 극도의 보수적인 체제 억압에 시달리던 남아공 사람들에게 진보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영화 전반부의 사실 외에도, 동시에 희망을 가지고 그 희망의 성취를 결국 본 현재의 그에게도 일종의 자기충족적인 예언이 됨을 받아들이게 된다(크리스마스 2주 전에 실직될 것을 예언하던 그의 노래처럼 말이다). 물론 이 자기충족적 예언은 로드리게즈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십여 년만의 남아공 공연에서 로드리게즈가 단지 무대에 서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쏟아지는 기립박수들, 그 박수들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타나준 로드리게즈에게 보내는 박수이자, 지난 십여 년간을 잘 버텨낸 자신들에게 보내는 박수이며, 십여 년전에 자신들이 로드리게즈에게 위안받았듯이, 이제는 로드리게즈가 자신들에 의해 위안받음을 알고 있는 박수이다. (아마도 로드리게즈가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 것은 그 박수들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만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은 아닐까. 결국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온전히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그 노래를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합쳐서 이루어진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니까. 그러므로 그도 돌아가 자신의 삶을 계속할 밖에. 위안은 어딘가에서 얻어질 수 있으나, 그 위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자신이므로.) 그렇게 지구 반대편의 거리와 몇 십년간의 시차를 두고 위안은 반복되며 결국에는 되돌아온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그러니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 관객들도 위안받지 혹은 위안을 보내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위안은 반복되니까. 지금 우리가 받는 혹은 보내는 어떤 위안은 언젠가, 어느 곳에서나 알 수 없는 형태로 돌아와 우리에게 위안이 되거나, 우리가 누군가의 위안이 되도록 할 것이다.


덧.
다만 한두 가지 정도는 더 언급해두고 싶다. 먼저 한 가지는 이 영화의 어떤 선택에 대한 부분이다. 로드리게즈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며, 그런 로드리게즈가 어떠한 뮤지션이었나를 추적하는 형식으로 전개되는 초중반부까지의 흐름에 대해서 말이다. 즉 현재 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시점에서는 감독과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로드리게즈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있고, 이미 그와의 재회도 이루어진 후다. 즉 이것을 일종의 추적의 형식으로 구성하는 것(그리고 제목을 'Searching for Sugar Man'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감독의 선택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선택이 유용했는지, 그리고 어떤 효과를 낳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물론 후반부의 극적인 효과를 더 강화하며, 전반부에 관객이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하는 측면이 있다. 또 한편으로는 후반부의 로드리게즈의 삶의 궤적을 더 도드라지게 하는 면도 있다. 즉 로드리게즈가 죽었다고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말 그대로 음악적인 활동을 완전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노동자라는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여기는 그의 어떤 삶의 태도와도 연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에 관객을 로드리게즈의 미스테리에 대해 궁금해하며 그의 삶을 추적하던 남아공의 그의 팬들과 동일한 위치에 놓음으로써 그들이 로드리게즈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았을 때 받게 되는 위안을 관객들 역시 고스란히 경험하도록 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후반부에 남아공에서 그의 공연이 펼쳐질 때 우리도 눈물을 흘리며 그들 남아공 관객들과 같이 박수를 보내고 싶은 충동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조금은 비정직한 방식이 만들어낸 어떤 위안, 서사적인 강화가 만들어내는 힘이 다큐라는 것에 작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다큐를 보는 것은 극영화를 보는 것과 달리 환영 바깥에 우리를 위치시키는 것이며, 환영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게끔 하는 것에 일반적인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다큐도 '그것이 거짓'이라고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원치 않는다.) 그런데 그런 환영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그 환영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다큐의 서사가 작동할 때, 우리는 그 힘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그 환영인가, 아니면 그 환영의 작동방식인가, 아니면 그 환영을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인가. 우리가 환영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계속 그 환영의 형태만을 구체화해나갈 때 우리는 분명 위안을 받기는 하지만, 그 위안은 점점 의심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그 위안마저도 환영이 아닌가 의심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와 많은 다큐멘터리들은 이야기를 점점 서사적인 방향으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들의 서사화가 가끔 의심스러워지는 때가 있다. 극영화의 환영은 적어도 그들 자신이 환영임을 밝히는 데 비하여 다큐의 그것은 종종 그것 자신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잊게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는 조금 다른 의문인데, 이 영화를 보고 남아공의 당시의 현실에 대해서 조금 궁금해지기는 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로드리게즈의 공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모두 백인들이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잘 알려져 있듯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제도로 극심한 흑백차별이 존재하던 국가였다. 그들에게 위안이 된 이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오로지 백인들만의 한정된 위안이었나? 영화에서 극도로 보수적인 남아공의 당시 상황, 검열과 억압, 그에 따른 젊은이들의 저항에 대해 나오는데, 이것과 흑백차별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또 현재 남아공의 상황은 어떤지 (젊은이들의 분노와 저항은 무엇을 위한 분노와 저항이었나, 그 저항은 흑백문제와는 또다른 위치에서 존재하고 있었나) 잘 모르겠다. 관련 책을 찾아서 좀 들춰봐야겠다.



- 2012년 11월, CGV 상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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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2.11.12 2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슈가맨의 음반이 미국에서 남아공으로 유입된건 미국의 한 여학생이 남아공에 있는 남자친구를 만나러갈때 음반을 가져갔고 몇몇 친구들이 듣고 너무 좋으니까 복사해서 듣고 그러다 유포가 된거로 기억해요(그저께 영화 봤거든요 ^^;) 영화보기전까지 슈가맨으로 불리운 로드리게즈에 대해선 아는바가 전혀 없었어요. 그의 노래도 처음 들어봤죠. 그가 만든 음반의 노래가사들은 참 놀랍더군요. 집에와서 유투브 찾아 여러번 들었답니다.

    영화속 누군가 말했듯이 슈가맨에겐 현자와 같은 면이 있다고봐요. 전 그의 딸들이 아버지를 회상하는 인터뷰에서 특히 그런걸 많이 느꼈어요.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2.11.14 12: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맞아요. 그런 내용이 있었죠. (약간 미심쩍은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그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면 참 놀라운 일 아닙니까. 말 그대로 '밑바닥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니까요. 저도 그의 노래가사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참 놀랐어요. 이거 보통 인물이 아니구나 싶었죠. 요즘에 '기적'이라는 말이 남발되는 경향이 있는데, 참 이야말로 기적같은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삼스럽지만, 늘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씨가 추워지는데 건강관리 잘 하시길..

바비, 이상우

Ending Credit | 2012.11.04 16:22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싸늘하게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날아와 꽂히는 것은 아귀의 말이나 화투장 뿐만은 아니다. 가끔 어떤 영화들은 눈과 귀와 머리를 통과하여 그대로 가슴으로 날아오기도 한다. 나는 물론 영화의 우열에 대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들이 어디에 머물러있는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가 눈이나 귀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그렇게 나쁠 것도 없고, 가슴에 머무른다고 해서 그렇게 인상적일 것도 없다. 다만, 어떤 영화들은 이상하게 밀고 들어오기도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밀고 들어오는 영화들은 눈이나 귀에서 특정의 장면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나, 가슴을 가지고 심장을 가지고 숨쉬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예를 들어 <바비>와 같은 영화. 마지막 순자(김아론)가 공항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성조기를 흔들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 때, 그것은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순자는 누구에게 저렇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가. 그것의 어떤 상징적인 것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그 장면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의 위치를 돌아보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결국 무력한 우리를 자각하도록 이 영화는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부, 우리는 한 작은 중소도시 공항에 도착하는 미국인 부녀를 본다. 그리고 곧 그들이 이곳에 한 소녀의 입양을 위해 왔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좀 이상하다. 입양을 위해 이 초라해보이는 도시에 잘 알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왔다는 설정도 이상하거니와 조금은 사려깊어 보이는 딸 바비와 달리 아버지 스티브는 입양하려는 순영(김새론)의 가족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언행을 서슴치 않는다. 더구나 입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순영의 작은아버지(이천희)와 달리 순영과 순영의 아픈 동생 순자, 그리고 장애를 가져서 어린아이와 같은 그들의 친아버지는 이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원하지도 않는 듯이 보인다. 도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일까. 비밀은 이들 미국인 부녀가 데려오지 않았던 또다른 딸에게 있다. 그 딸은 심장에 문제가 있었던 것.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순영이 혹은 순자가 필요했다. 새로운 딸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심장으로서 말이다. 

이 사실을 애초에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미국인 아버지 스티브와 작은아버지 뿐이다(딸 바비는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물론 순영과 순자와 그들의 아버지는 모른다. 아니 이 사실을 중간에 새롭게 알게 되는 사람은 한 명 더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이라는 존재 말이다. 그러므로 순자를 앞으로 보지 못하게 되어서(원래 미국에 보내려고 했던 것은 순영이었지만, 적극적으로 미국으로 가고 싶어하는 순자가 결국 가게 된다) 슬퍼서 우는 순영과 친아버지에게 순자가 몇 번 반복하여 내뱉는 "내가 미국에 죽으러 가? 울긴 왜 울어!"와 같은 대사들은 그들에게 하는 대사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우리의 위치를 일깨우기 위해 하는 말들처럼 들린다. 그것을 보는 우리들은 망연해지기 때문이며, 아득해지나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영화에서 관객은 실제로 물러나 있으며, 관객이 물리적으로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그러므로 '관객'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영화는 그 물리적인 불가능성과는 별개로 동시에 이야기와 미장센을 구축하며 관객과의 거리설정을 하며 관객은 때로 주인공이 되거나, 주인공의 곁에 머물러 있거나, 혹은 상당히 먼 거리에서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이 영화 <바비>에서 이상우 감독이 택한 것은 관객이 한층 물러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의 중간에 순영이 낯선 남자로 인해 위기에 빠지게 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뒤로 물러나 있으며, 이 물러난 위치에서 카메라와 그 뒤의 관객들은 지켜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영이에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어서 단지 불안한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위치에 처하게 된다(그러므로 조마조마하게 된다). 이는 한편으로 이상우 감독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는데, 이상우 감독은 <엄마는 창녀다>, <아버지는 개다>와 같은, 제목으로 한 번 놀랐다가, 영화 내용으로 더 놀라게 되는 단지 제목만 도발적이 아닌 영화들을 찍었다. 이 중 내가 본 것은 <아버지는 개다>인데, 이 영화를 보면, 카메라는 이들 형제에게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이들을 관찰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 관음의 시선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일종의 사육의 기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이는 어떤 날 것의 어떤 것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초기의 김기덕 영화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으나, 그 영화들과의 차이점을 한편으로 도드라지게 한다. 즉 이미지적인 측면에서 이 영화는 김기덕의 초기작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인물들의 가까이에서 보는 이를 한껏 불편하게 만들었던 김기덕의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보기에 보다 덜 불편하며, 그것은 사육자나 관찰자의 위치에 관객을 머무르도록 하는 이 영화의 거리설정에 그 하나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 <바비>에서의 가족관계를 전작의 기묘한 가족들과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 <바비>에서의 아이들과 어른들은 뒤바뀌어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장애를 가져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친아버지와 돈을 받고 아이를 팔아넘기려는 작은아버지는 어른이라 볼 수 없으며, 꼬박꼬박 극존칭의 존대말을 쓰고, 다른 두 가족을 건사하는 순영과 일반적인 어른보다 훨씬 영악하게 행동하는 순자는 어린아이의 몸을 가진 어른과 같다. 아무도 어른이 되줄 수 없을 때 아이들은 스스로 어른이 된다.) 

즉 우리가 이 영화 <바비>에서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은 딸 바비가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과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상태에서 이들을 멀리서 관찰하는 우리들은 유일하게 미국인 부녀의 딸 바비에게 희망을 걸게 된다. 그러나 그 바비가 괴로워하다가 결국 아버지의 뜻을 뒤늦게 추인했을 때, 우리의 기대는 헛되이 무너지게 되며, 영화의 마지막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는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상우 감독은 관객과 이들 자매의 사이에 거리를 만들지만, 전작과 다른 점은 그 거리의 길이를 관객에게 깨닫게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 거리의 길이는 마지막의 에스컬레이터의 길이만큼의 길이이다. 공항의 출국 게이트가 있는 이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의 끝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순자와 그 에스컬레이터의 밑에서 그 인사를 받고 있는 우리와의 거리. 즉 이 마지막에서 우리는 무력해질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바비가 기꺼이 공범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순자를 미국으로 보낸 공범이 된다. 무력한 자신을 자각함으로써, 무력한 우리와 그들 사이의 거리를 느낌으로써 말이다. (물론 이를 정치적인 어떤 것으로 치환하여 말할 수도 있다. 미국이라는 아버지는 그들의 약한 딸, 그러니까 그들의 취약한 부분을 메꾸기 위해서 이 작은 땅에서 무엇인가를 도려내간다. 물론 도려내는 지점은 늘 그렇듯이 가장 약한 지점이다- 나는 FTA가 결국 서민에게 피해가 된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더 나아가면 이런 얘기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누군가가 그들을 돈을 받고 팔아넘겼기 때문인가. 그것은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때로 영화의 순자와 같이 기꺼이 미국인이 되고싶어 하니까(혹은 미국인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을 지지하니까). 영화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바비인형이 그려진 가방, 그러니까 맨 처음 딸 바비가 들고왔던 가방에 이제 순자의 이름표가 붙은 것을 본다. 그렇게 순자는 스스로 바비인형이 되었다. 물론 인형에게는 심장이 필요가 없으며, 혹은 심장을 도려내어도 그 바비인형들은 여전히 웃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제 가장 어렵고 큰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그렇다면 그 무력한 자신으로 남아 순자의 인사를 받는 것, 그 구원불가, 구조불가의 거리를 느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할 수 있는 답은 없다. 다만, 할 수 있는 말은 때로 영화의 윤리는 가장 비윤리적인 것을 '보는' 순간에 작동한다는 것. 그 영화의 윤리라는 것이 이 현실에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 2012년 11월, 스폰지하우스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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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김기덕

Ending Credit | 2012.09.13 22:57 | Posted by 맥거핀.




(전체적으로 영화의 줄거리와 결말부가 들어있습니다.)



화제의 중심에 올라있는 김기덕의 <피에타>를 보았다. 사실 그간 김기덕의 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모를까, 김기덕의 예전작들을 보아온 관객이라면 무엇인가 약간은 낯설다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어떤 가시적인 부분에서라기보다는 비가시적인 어떤 '느낌'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이야기의 측면으로 봐서는 여러 평자들이 지적했듯 박찬욱이나 봉준호의 그림자를 언뜻언뜻 보게 되는데, 예를 들어 이 <피에타>의 이야기를, <마더>의 어머니가 <친절한 금자씨>의 공간으로 들어와 금자씨가 된다면, 혹은 <복수는 나의 것>의 공간으로 들어와 동진이 된다면 벌어질 일들을 김기덕 식으로 풀어낸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즉 김기덕의 이 이상한, 그러나 아주 낯설지만은 않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언뜻 봉준호의 냄새나 박찬욱의 향취를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김기덕 고유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박찬욱이나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우리는 종종 영화 바깥에 머물러 있다. 즉,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그 고통을 내부에서 견디는 것이 아니라, 때로 바깥으로 빠져나오게 되며, 그 증거 중의 하나로 우리는 그 영화의 위계와 구조를 분석하고 싶은 충동에 빠지게 된다는 점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전) 김기덕의 영화는 관객을 가장 가까이에 데려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으며(물론 관객이 원할 경우에 한해서), 일단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때로 '불가해' 그 자체, 끔찍스러운 이물의 어떤 것으로 남았다(우리는 고래의 뱃속을 빠져나가야만 비로서 그곳이 고래의 뱃속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그런 것이 뒤섞여 있다. 처음 관객을 압도하면서 시작했던 이 영화는 중간 부분에 이르러 그 전체의 구도를 보여주는 듯 하다가, 다시 관객을 몰아붙이며 끝낸다.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그 종교성을 드러내는데, 성모가 죽은 아들(예수)을 안고 있는 '피에타'라는 이 제목과 (그리고 포스터는) 어떤 종교적인 심상 몇 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예를 들어 이 전체 이야기를 단테의 <신곡>에 느슨하게 빗대어 볼 수도 있는데, 처음 강도(이정진)의 악행은 <신곡>의 '지옥편'이다. <신곡>의 9층으로 이루어진 지옥, 그리고 청계천의 나뉘어진 수많은 지옥들. 이 지옥들에는 죄를 지은 자들, 그러니까 이 사회에서 '죄'라고 명명되는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한 자들, 혹은 갚을 마음이 없는 자들'이 각각의 공간에 숨어 있다. 그리고 이 곳을 단테, 아니 강도가 차례로 방문한다. 그러나 물론 강도는 단테가 아니다. 강도의 악행은 그 이름대로 차라리 '강도'짓을 하는 게 더 나아보일 정도인데, 그는 이 지옥의 마지막에서 엄마(조민수)를 만나고 '연옥'으로 들어선다. 속죄자들이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단테의 <신곡> '연옥편'처럼 강도는 거부하던 엄마를 일단 받아들인 후에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급속한 변화를 보여주는데, 갑자기 존대말을 쓰는 것은 기본이고, 급기야는 돈을 받아내는 일을 포기하는 정도에까지 이른다. 그럼 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천국을 인도했던 것처럼, 강도에게 엄마가 속죄와 천국의 길을 인도할 것인가. 그러나 이야기는 새로운 측면으로 나아가고, 그는 연옥에서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 지옥과 비슷하지만 다른 공간, 이번에는 누구나 그를 증오하는 지옥. 불에 타 죽어버려라, 제발, 이 인간백정아.

물론 성모마리아와 아들 예수를 표현한 '피에타'가 그렇듯이 <피에타>는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아버지는 없었다. 아니 종종 있기도 했지만, 그건 아버지라기보다는 아버지의 탈을 뒤집어쓴 괴물에 가까웠고, 그 아버지들은 종종 아들에게 잡혀먹혔다. 그래서 늘 어머니와 아들만 남았다. 이번 영화에서도 하나 특이한 점은 이 세계 역시 아버지들은 이미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린 세계라는 점이다. (아니 유일하게 직접적인 부자 관계가 나오기는 한다. 연필을 손에 든 소년 말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 소년은 불구 아버지를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그 아버지는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까.) 강도와 엄마, 엄마와 그녀의 죽은 아들, 그리고 또다른 늙은 엄마와 불구가 된 아들. 그럼 아버지들은 어디 갔을까. 극 중 한 아버지는 '보험금을 받는 게 복잡해진다'는 만류에도 옥상으로 올라가고(이렇게 표현하는 게 온당할까 싶다. 올라가는 아버지와 내려가는 강도를 잡는 이 씬은 인상적이다), 다른 아버지는 아버지가 되자마자 아들을 위해 두 손을 기꺼이 잘라서 먹이려 한다. 그러므로 옥상으로, 혹은 프레스기계 밑으로 아버지를 밀어넣은 강도는 동정심 따위는 가지지 않는다. 그곳으로 아버지 세대를 밀어넣는 것은 자신이 아니니까. 주의 영광, 할레루야 따위의 구호가 붙어 있는 이 청계천 공간 어디에도 주의 영광 같은 것은 없다. 아니 없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 어디에도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누군가가 없다. 예를 들어 이곳에서 새건물을 지으려고, 이들에게 건물을 비워주고 나갈 것을 요구하는 누군가, 그 누군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싸움이 어려워지는 것은, 그 적이 거대해지거나 더 무서워지기 때문이 아니다. 도대체 그 적이 누구인지 점점 알 수가 없게 되어가기 때문이다. 적이 아무데서도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누구와 싸워야한다는 말인가? 일주일만에 10배를 받아내려 하는 사채업자, 200원에 물건을 만들어내라는 전화 속 누군가, 그들이 적인가? 아니면, 그 10배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허가해주는 그 누군가, 아니면 200원에 만들어낸 부속물들을 사가서 그것으로 더 반질반질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누군가, 그들이 적인가? 아니면 그들을 이렇게 만드는 소위 '시스템'이 적인가? 알 수가 없어진 세상.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이 온다. 다시 단테의 <신곡>. <신곡>에서 단테는 베아트리체에 이끌려 마지막 천국을 본다. 그는 그 곳에서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 새롭게 배운다. 즉 이 '사랑을 배운다'라는 것. 영화 <피에타>에서 강도는 뒤늦게 나타난 엄마에게 무엇인가, 그러니까 뭐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무엇인가를 배운다. 영화 속에서 엄마가 강도의 악행에 대해 변명하듯이 반복하는 말들이 있다. 그건 얘의 잘못이 아니예요. 내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일찍 이 아이를 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즉, 강도의 악행은 어떤 근원적인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라는 것이 이 엄마의, 그리고 이 영화의 논리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풍선을 가지고 노는 강도의 천진난만함이나, 보다 더 근원적으로 마치 문명 자체를 배우지 못한 늑대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거칠게 거의 생식에 가까운 육식을 하고, 닭을 직접 잡는 그의 모습. 왜 그는 손질된 닭을 사지 않는 것일까. 손질된 닭이라는 것을 판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농담이다.) 혹은, 엄마에게 "내가 뭐 잘못한 것 있어?"라고 되묻는 모습일 수도 있다. 아무튼 간에 그래서 이 엄마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강도가 불쌍하다. 왜냐하면 무엇이 어찌되었건 간에, 이 강도에게는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그 누군가가 없었음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다시 어머니 성모와 아들 예수의 '피에타'. 그렇다면 우리는 강도를 죄를 대속하고 떠난 예수로 볼 수도 있을까. 예수와 강도의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어떤 것, 오로지 그것만을 알고 있던 존재였다는 점이다. 악마의 기원은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자들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가르쳐준 자들. 그래서 선과 악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자들. 그러나 예수는 이의 반대편에서 하나만 아는 사람들이 하는 이해되지 않는 말들, 예를 들어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내밀라는 식의 말을 한다. 그것은 너무 많이 아는 자들에게는 바보 같은 말일 뿐이다. 내 오른뺨을 1대 때리면 네 왼뺨을 10대 때리라고, 그것이 악마의 논리이다. (그러고보면 이 인물의 이름 '강도'도 심상치 않음이 사실이다. 예수 대신 풀렸던 자도 강도이고, 예수와 같이 못박혔던 자들도 강도였다.) 그래서 (물론 기독교식으로 볼 때) 유일하게 아는 사랑으로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와 같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강도가 유일하게 엄마에게 배운 것, 혹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바로 그것이 강도를 속죄의 길로 이끌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마도 그 마지막의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줄일 것이다. 그것은 강도의 피가 아니니까. (예수의 마지막에 기적이 있었던 것처럼, 이 마지막에도 기적이 있다. 고속도로에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피의 선은 기적의 현장이다.) 그것은 아마도 강도에게 빼앗겼던 모든 사람의 피, 아니 보이지 않는 적과 계속 싸워야만 했던 사람들의 피니까. 김기덕이 늘 원했던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 참혹함을 기억해달라, 그 피를 기억해달라는 것. 그 피는 실제의 피니까. 실제의 청계천이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아직 나는 마지막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것을 속죄로 볼 수 있을까. 솔직히 정말 잘 모르겠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늘 육체의 고통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늘 정신적인 고통이 더 크게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자해를 하거나,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에게 육체의 고통을 가하곤 했다. 그것이 정신의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이라는 것을 아니까. 이 마지막도 사실 그런 비슷한 것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복수가 완성되려면 이 마지막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되었다. 그는 아무 것도 몰라야 했고, 살아 있는 채로 더 고통스러워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여자의 차 밑으로 들어갔고, 우리는 그녀가 이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리고 나면, 집에 돌아와서는 더 큰 고통에 맞닥뜨리게 될 것임을 안다. (남자가 숨긴 것.) 영화 속에는 불길한 이미지들이 떠돌지만,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깊게 남아있는 것은 그 공간들이다. 강도가 텅빈 눈으로 들여다보는 흐릿한 창 안쪽의 공간들. 강도가 올까봐 공포에 떠는 사람들이 숨어 있는 그 이상한 작은 지옥들, 그리고 그 작은 지옥이 합쳐진 거대한 지옥 청계천이 있다. 강도가 사라졌어도 그 수많은 지옥과 지옥에서 만들어지는 증오들은 여전히 건재하고(그것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죄많은 인간들의 죄를 모두 다 떠안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지 2000년 가까이 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수많은 증오들로 가득하니까.) 김기덕은 기억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했던 것은 예수의 부활과 샤방샤방한 천국이 아니라, 예수가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흘리던 그 피였다. 그 피를 기억하라.


덧.
마지막으로 이 얘기는 덧붙이고 싶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봉준호나 박찬욱의 그림자를 보게 되는 것은 사실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단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김기덕이 봉준호나 박찬욱 식이 된다면 김기덕은 어디에 있지?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간 김기덕 영화를 둘러싸고 있던 불가해한 '무언가'가 이 영화에서는 한결 약해진 느낌이고, 그것은 어떤 장점을 드러내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동시에 그 '불가해함'에 가려져 있던 김기덕 영화의 단점들을 도드라지게 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라면 거친 감정선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강도는 너무 빨리 엄마와 가까워지고, 너무 빠르게 변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박찬욱이나 봉준호 식이 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비교의 도마 위에 스스로 오르게 된다는 의미도 된다.) 즉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두 가지의 영화가 있다. 보는 이를 버티게 하는 영화와 버티게 하지 못하게 하는 영화. 김기덕의 예전 영화들과 <피에타>가 다른 점은 텐션을 끌어올리기는 하지만, 이 <피에타>는 결정적인 순간에 숨쉴 공간을 남겨놓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그 숨쉴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하려고 그간 김기덕의 영화를 보았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결국 김기덕 영화의 매력이었으니까. 인간은 불가해한 것에 대해서는 무서워하거나, 경외하지만,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곧 관심을 잃어버리게 마련이니까. 다음 영화를 기다려본다.



 - 2012년 9월, 롯데시네마 피카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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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루 2012.09.15 2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두 개의 문, 김일란, 홍지유

Ending Credit | 2012.07.16 19:39 | Posted by 맥거핀.





영화 <두 개의 문>을 본 것이 일주일도 더 넘었는데, 여전히 몇 개의 단상들이 머리속을 떠돌고 있다. 여전히 주저되지만, 기록을 남겨두는 것이 나을 듯 하다.

1.
영화는 전체적으로 이 용산참사의 본질이 국가폭력이며, 일종의 '본보기'로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속 제시되는 몇 개의 근거들이 있다. 이 용산 사건의 경우 다른 시위나 농성의 경우와 다르게 점거 25시간만에 경찰, 그것도 특공대의 투입이 실시되었고, 이것은 몇 가지의 이상한 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는데, 하나는 나중에 경찰의 주장대로라면 도심 한가운데에서 화염병을 사용하는 등의 폭력을 저질렀기 때문에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특공대 투입이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사실 점거 현장에 화염병이 등장하기 2시간 전에 이미 전화로 특공대의 투입이 결정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경찰이 그러한 폭력을 유도한 정황에 대해서도 영화는 밝히고 있다.) 다른 하나는 그렇다면 그토록 신속하고 위험한 작전이었음에도, 경찰은 건물에 몇 명의 사람이 있고,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알기는 커녕, 건물의 내부구조도 모르는 상황에서 투입이 결정되고 시행되었다는 점, 즉 건물안 사람들의 안전은 둘째치고, 그들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기이한 작전이었다는 점. (이는 이 영화의 제목 '두 개의 문'과도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의 배경에는 MB의 '불관용 원칙'이 있다. 폭력시위에 대해 '좌시'하지 않겠다던 그 이야기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MB 정부는 이 사건을 하나의 본보기로 쓰려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정부가 원했던 것은 아마도 일종의 '경고'선일 것이다. 즉 원했던 것은 신속한 진압으로 앞으로 이어질 다른 수많은 (재개발 등의) 사례에서 일종의 겁을 주려던 것이지, 수많은 죽음들까지 원했던 것일 리는 없다. 물론 그러한 죽음들을 결코 원치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MB 정부가 최소한의 윤리의식이 있는 정부라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정부가 그것을 원치 않았던 것은 그 죽음 자체에 대한 윤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발생할 경우 정권 유지에 큰 타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사건을 처리하는 사법부의 태도가 말해주는 부분이 있다. 영화에서 보여진 대로 결국 중요한 증거는 드러나지 않았으며, 사건에 대한 진술들도 한쪽으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만약 최소한도의 상식이 있는 사법부라면 백번양보하여, 경찰과 철거민의 공동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어떻게 결론이 지어졌는가. 그것에 대한 모든 책임은 철거민들에게 부여되었으며, 당시 경찰 책임자는 그 이후에 국회의원 출마를 하게 되고, 판단을 내려준 사법부는 영전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2.
다만 이 영화의 형식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조금은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거리들이 있다. 먼저 영화의 감독이 새롭게 찍은 어떤 화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화면들을 재구성하는 이 다큐의 방식에 대해 논란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씨네 21> 859호에서 한국 다큐씬에서 오랫동안 활약해 온 홍형숙 감독과 김동원 감독이 이 영화에 대해 놓고 벌이는 논쟁들도 그러한 부분과 조금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김동원 감독은 "기록의 힘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의 입장에서 보면, <두 개의 문>은 노력을 안 하고 만든 작품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지적하며, "발가락으로 찍었어도 찍어야 할 장면을 찍었다면 거기서 엄청난 가치가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김동원 감독의 지적이 어느 정도 유의미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작품의 힘이 도리어 거기서 생겨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의 관객들은 매끄러운 화면보다 도리어 화질이 나쁘고 흐릿하고 흔들리는 화면에 진실이 들어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TV 뉴스를 믿는가, 몰카를 믿는가. 요즘의 관객들은 매끄러운 편집으로 만들어진 몰카에 대해서 단박에 알아차린다. 이거 홍보네.) 이것은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나는 찍히는 피사체가 이것이 촬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촬영되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자꾸 일종의 '만들어진 이미지' 그러니까 '거짓에 가까운 이미지'라는 인식을 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찍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미리 의도를 가지고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존의 다른 의도로 촬영된 화면(예를 들어 이 영화라면 경찰의 채증 영상들)을 재구성하는 것은 요즘 관객들의 정보수집의 자세와 더 비슷한 형태가 된다는 점이다. 즉 요즘은 어떻게 보면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중요한 결정적인 정보의 수집이 아니라, 여러 정보의 재배열이다. 즉 최근의 관객들은 하나의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대신 여러 정보들을 취합하여 자신의 방식으로 재배열하려 하고, 그 어딘가에 진실이 들어있다고 믿는다. 이 영화 <두 개의 문>은 그런 관객들의 정보배열 형식을 닮아 있다. 칼라TV, 사자후TV 등 인터넷 매체에서 촬영한 화면, 경찰의 채증 영상, 법정진술, 인터뷰, 재연 화면 등이 어지러이 얽혀 있고, 중요한 것은 그 중 어느 하나의 '결정적인 정보'가 아니라, '정보의 재배열'이 된다. 물론 여기에서 가장 조심할 점 중의 하나는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판단의 권한, 정보의 재배열의 권한을 관객에게 넘겨준다는 식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전히 우리는 영화를 봄으로써 정보를 재배열하는 누군가의 관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3.
그보다는 도리어 나의 관심은 조금 다른 쪽이다. 크게 두 가지라고 말할 수 있는데, 먼저 하나는 이 영화의 어떤 비어있는 부분에 대해서이다. <시사인> 248호에서 김세윤은 이 영화가 다른 여러 다큐들처럼 피해자의 삶과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간극장'이 아니라 진실을 쫓는 '그것이 알고싶다'라고 말하며 "냉정을 잃지 않고 차근차근 '범죄의 재구성'에만 집중하는 다큐멘터리"라고 말한다. 옳은 지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조금 더 이야기하겠다.) 다만 여기에서 의아한 점 중의 하나는 그러한 형식을 취하기에는 이 영화가 한 가지 약점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하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 몇 가지가 이 사건에는 누락되어 있으며, 영화도 끝내 그것을 찾아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사라진 3천쪽에 달하는 초동 수사 기록(후반에 부분적으로 나오기는 한다)과 사라진 경찰의 채증 영상들을 이 영화는 공백으로 비워두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 중요한 순간에 다다라서는 한 불친절한 메시지와 만나게 된다. 'No Signal', 경찰이 촬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존재하지 않는 채증 영상. 이는 과연 정말 촬영되지 않은 것일까. 아니 그 주장을 설혹 인정한다고 해도,  이 순간을 알지 못하고도 우리는 진실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씨네 21> 862호에서 정한석이 훌륭한 글로 이미 이야기했기 때문에 더 덧붙일 말은 특별히 없다. 정한석에 따르면, <두 개의 문>이 원했던 것 혹은 그것의 운명은 결국 '증거가 없음을 증거하기 위한 증거가 되기'였다. 이는 정한석이 글에서 인용한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다시 재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아우슈비츠에 대해 직접 증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다." 즉 "증거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절멸해버렸다는 그 사실이 현실적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엄청난 비정상적 학살이 실재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 사건의 경우로 말하자면, 결정적인 증거가 그것을 가졌던 측(그러니까 국가)에 의해 사라져버렸다, 혹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실 그 자체가 이 용산에서 국가폭력이 실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를 사법부의 측면에서도 말할 수 있다. 영화를 보다보면 우리는 조금 이상한 점을 느끼게 된다. 여러 정황 증거들, 그리고 여러 경찰의 증언들이 이 참사가 모두 철거민이 잘못임을 증거하지 않는데, 왜 모든 책임이 철거민들에게만 부여되었는가. 그 정황 증거들과 경찰 증언들과 최종적인 사법부의 판단 사이에 있는 빈공간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 빈공간, 그 초반의 여러 증거들에서 최종의 판단으로 넘어가는 중간의 연결고리가 비어있음을 보여주는 '이 공백들'은 무엇을 최종적으로 의미하고 있는가.

4.
다른 한 가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조금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음을 느낀다. 위에서 나는 이 영화가 '인간극장'이 아니라 '그것이 알고싶다'라는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영화의 주제적인 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TV에서 하는 '그것이 알고싶다'의 경우 상당수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먼저 시작부분에 가장 충격적인 영상을 제시하고, 보는 이에게 그 이유를 궁금하게 만든다. 그리고 프로그램은 다시 사건의 처음으로 돌아가 배경에서부터 차례로 그 뒤를 밟아나가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그 초반부의 그 영상, 그러니까 보는 이가 기다리고 있던 결정적인 사건에 이른다. 이 영화도 비슷한 형식이다. 처음에 우리는 가장 충격적인 사건, 즉 사건이 일어나던 그날 아침과 만난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처음으로, 그러니까 MB 정부의 불관용 선언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영화는 점증되는 양상을 보인다. 즉 영화는 배경에서 시작하여 그 전날, 그 밤, 그 새벽을 거쳐 최종적으로 화재가 일어났던 아침에 이르며, 우리는 그것을 스릴러 영화에서 많이 활용되는 둥둥대는 음악을 들으며 보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는 '화재 발생 2분전'이라는 자막과 만나 그 2분이라는 시간을 지속하여야만 한다.

나는 이것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다. 즉 처음의 그 사건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 구조. 그 둥둥대는 음악을 들으며 두근두근 버텨야하는 시간들과 최종적으로 만나게 되는 그 사건. (여기에 효과를 더하는 것은 그 재연이다. 방송에서 사건사고를 다루는 다큐들이 가장 흔히 활용하는 부분인 바로 그 재연말이다. 즉 우리는 이 영화에서 경찰들의 증언을 바로 영상으로 눈앞에서 리플레이하며 보게 된다. 이는 물론 관객들에게 사건을 더 쉽게 이해하게 하기는 하지만, 부수적으로 어떤 효과들을 낳게 하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다.) '그 사건을 기다리는 우리들은 윤리적인가,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윤리적인가'라고 묻는 것은 조금 지나치다고 느끼지만, 여전히 뭔가 꺼림칙한 부분이 남는다. 물론 우리는 수많은 영화들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누군가의 죽음을 보고 쾌감을 (때로는) 느낀다. 그러나 이 다큐에서마저 뭔가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과연 필요할까,라는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예를 들어 이것을 이와는 조금 다른 지점이 있기는 하지만 다큐 <아르마딜로> 같은 것에서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결정적인 사건, 그러니까 전투를 기다리게 만드는 그 영화의 구조에 대해서도 말이다. <두 개의 문>이 이와 다른 점은 <두 개의 문>은 그 결정적인 영상을 비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이는 정한석이 위의 글에서 영화 <쇼아>를 놓고 말한 대로 이를 '반드시 보아야 하는 이미지와 보아서는 안되는 이미지를 사이에 둔 윤리적 쟁점의 대립'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테지만, 이 영화에 대해서는 조금은 다르게 물을 수도 있다. 우리는 경찰의 'No Signal' 때문에, 혹은 파란 슬레이트 때문에 그것을 보지 못하지만, 과연 그 영상이 실재했다면 이 영화는 그 영상을 어떻게 했을 것인가. 그 영상이 실재했다면 이 영화가 그런 구조, 일종의 점증의 구조를 택했을까, 택하지 않았을까.)

5.
그것은 한편으로 '그것이 알고싶다'를 소비하는 방식과 연관지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TV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를 둘러싼 어떤 기이한 현상을 보며 느끼는 우려에 대해서 말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 사이에 종종 물음이 올라오는 경우들이 있다. 가장 레전드 편이 뭔가요? 여기에서 레전드라는 것은 자극적인 측면, 미스테리적인 측면에서 가장 강도가 높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말이다. 쉽게 얘기해서 가장 재미있게, 혹은 공포스럽게 볼 수 있는 편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 이 프로그램은 그 요구들에 발맞추듯 어떤 사회적인 현상에 대해서보다는 특정의 사건, 예를 들어 자극적인 살인사건들로 소재가 미묘하게 달라져가고 있다.) 먼저 간단하게는 실제의 사건, 누군가의 죽음을 일종의 자극, 재미, 미스테리적인 일종의 장르물로서 소비하게 되는 것의 불편함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른 한편으로 결국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불러일으키게 되는가,라는 것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 가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 프로그램을 보고 가지게 되는 것은 공포 혹은 분노에 가깝지 않을까. 즉 우리도 저런 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다시 말해서 하나의 '본보기'로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 위의 '본보기'와 달라지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와 그 사건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분노가 동시에 양산되게 된다. 그리고 보는 이들은 그 '분노'를 어느정도 즐긴다.

<두 개의 문>에 대해서라면 그것은 국가폭력에 대한 공포와 그것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용산의 그 건물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우리네 보통사람들이었으며, 바로 지금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는 아버지이며, 아들이었다. (실제로 그 건물 안에는 한 부자가 있었다. 아버지는 죽었고, 아들은 수감되었다. 즉 경찰의 논리대로라면 아들이 아버지를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즉 누구나 그런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었다(영화에서 말한대로 철거민과 경찰 모두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에 대한 분노일까. 예를 들어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하는 것처럼 괴물을 점점 걸러내게 하는 것, 그에 대한 분노에 매주 에너지를 쏟아붓게 만드는 것만이 필요한 것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6.
왜냐하면 이 용산 사건에는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은 두 가지의 문제, 즉 욕망과 폭력의 구조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먼저 발전과 재개발의 욕망,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 욕망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무엇인가를 부수고, 새롭게 지으려는 욕망, 그것이 국가의 발전이고, 개인의 발전이라고 믿었고, 그 발전이 자신에게도 이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현 정부에 표를 주었고(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재개발을 내심 반겼고), 그 욕망에 기꺼이 몸을 실었다. 재개발의 욕망, 철거의 문화에서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동시에 우리는 많은 국가폭력을 방조해왔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폭력에 깊숙이 동참하고 있다. 왜냐하면 국가폭력이란 사회와 동떨어진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폭력에 둔감해진 사회에서 작은 폭력을 용인하게 되는 것, 혹은 그 작은 폭력에 참여하는 것이 점점 더 큰 폭력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결국에는 국가폭력과도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쌍용차 사태에서의 진압을 보며, 쌍용차는 회생불가능하기 때문에 저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게시판에서 말하는 것, 그것과 실제로 폭력을 휘두르는 전경의 방패는 얼마나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에 쉽게 대응하는 것은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하는 방식대로 자꾸만 괴물을 양산하는 것이다. 혹은 무엇인가를 자꾸 적으로 돌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위 진보정권 때도 국가폭력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자. 실제로 대추리나 기륭전자의 예에서 보듯이 진보정권에도 국가폭력의 양상들이 있었다. 여기에 쉽게 말하는 것은 그 정권이 가짜 진보, 잘못된 진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진보의 탈을 쓴 다른 무엇인가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일말의 진실이 숨어있다고 해도, 이 대답이 무엇인가 꺼림칙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그런 것일까, 어쩌면 그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무거운 것이 여기에는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이 여전히 남아서 괴롭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그들을 가짜라고 규정지음으로서 남게 되는 '진짜 나, 선한 나'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그 선한 나는 여기에서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일까, 라는 물음이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가해자, 즉 현장에 투입된 경찰도 또 하나의 피해자임을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가해자-피해자 구도를 넘어선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넘어섰는지는 의문이 든다. 영화 속에서 여전히 적은 어딘가(예를 들어 출동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전화기 바깥)에 있다고 믿어지며, 그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시간을 영화는 주지 않기 때문이다.)

7. 
그러므로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포와 분노보다는, (자기반성과 맞닿아 있는) 성찰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성찰이 부족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이 영화는 나쁘게 말하면 재미와 자극을 느끼게 하고, 그것이 너무 가혹한 평가라고 해도, 아무리 좋게 보아도 결국 공포와 분노의 지점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국가폭력의 역사성을 파고들었던 문정현의 <용산>이나, 현장의 자료화면이나 사진들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관련자들의 회상만으로 영화를 이끌며 관객을 결국 현재라는 시간에 대해 성찰하게 만드는 김응수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 등과 비교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또 한편으로는 철거의 문제를 오랜시간 그 철거의 공간에 살아온 사람들을 비추는(그리고 사라지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 정재훈의 <호수길>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물론 성찰이란 결국은 관객의 몫이며, 강제로 이끌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당연히 저절로, 혹은 영화적 처치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최종의 판단은 결국 관객이 하는 것이며, 영화가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두 개의 문일뿐. 그 문으로 한걸음 들어설 수 있게 하는 자는 문을 만든 자가 아니라, 그 문 앞에 선 오로지 자신일 뿐이다.
 



덧.
몇 개의 단상들과 몇 개의 질문들이 어지러이 떠도는 탓에 하나의 글이 되지 못하고, 조각보같은 누더기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몇 개의 질문들은 하기가 어렵고 조심스럽다. (특히 정치의 문제에 대해서는 말이다.) 그저 잘 기억해둔다.




- 2012년 7월, 씨네코드 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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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변영주

Ending Credit | 2012.07.04 18:18 | Posted by 맥거핀.




(글에 영화의 내용 및 결말과 관련된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뒤늦게 본 영화 <화차>는 예상보다 훨씬 막막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영화였다.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대강의 스토리와 결말을 알고 영화를 봤음에도, 영화는 생각했던 것보다 막다른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철저히 영화에 기반한 글이다. 소설과의 비교를 원하시는 분들은 다른 글을 읽으시길.) 아마도 이는 변영주 감독의 선택일 것이다. 처음 변영주 감독이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를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약간 고개를 갸웃했는데, 이 소설의 어떤 부분이 감독의 흥미를 끌었을지 대략 상상이 간다.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리뷰들을 보면 소설은 흔히 말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로서 말그대로 추리적인, 미스터리와 관련된 지점에 상당부분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미스터리적인 부분이 상당히 걷어내어져 있고, 그 나머지 부분들을 어떤 정서적인 부분이 메우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의외로 상당히 잉여적인 씬들이 많이 보인다. 즉 영화의 흐름상 전체 구도와 크게 관계가 없는 부분인데도, 짚고 넘어가는 부분들이 있다. 만약 이것이 추리물을 지향하고 있다면, 이 부분들이야말로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체로 추리물들에서 단서들은 이런 부분에 숨겨져 있었으니까. (반면 최근에는 이를 역이용하여 도리어 이 부분에 맥거핀을 심어놓는 경우들이 더 많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잉여적인 부분들은 대체로 정서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남자주인공 문호(이선균)가 동물들을 진료하고 수술하는 모습이나, 문호의 사촌형이자 차경선(김민희)의 뒤를 쫓는 종근(조성하)과 관련된 부분들은 걷어낸다 해도 전체 흐름과 크게 관계가 없으며, 그게 단서나 맥거핀의 기능을 하지도 않는다. (예외적으로 한 장면이 있다.) 그것은 도리어 이 영화의 정서적인 부분을 이끌어가는데 기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로 인해 이 영화를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물로 보게 되면 리듬이 자꾸 끊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이를 추리물로 보면 필요할 때마다 알아서 단서가 주어지는, 말 그대로 관객의 '추리'가 필요하지 않은 기이한 추리극이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는 그 잘짜여진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버리고, 어떤 정서적인 세태극으로 가려는 것일까. 변영주 감독을 위해 한가지 변명을 해주자면, 원작 소설 <화차>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20여년 전에 출간된 소설이라는 점이다. 20년 전의 일본과 사회적 배경과 사회적 정서도 많이 달라졌을 뿐더러, 단순히 스토리만 놓고 보았을 때, 그것은 이미 읽을 사람은 어느 정도 읽은, 사건도 범인도 어느정도는 예상가능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즉 이것이 소설과 동일하게 미스터리로 갔을 경우에는 원작의 팬들은 그 재현을 환영할지 몰라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뭔가 뻔한 예상치를 벗어나지 않는 영화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아마도 감독은 이 소설을 가지고 지금의 우리의 이야기를 해보자는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원작의 활용, 혹은 리메이크는 과거 그 원작이 탄생한 시점이 아니라, 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 현재에 재현되는 그 원작의 의미이다. 즉 왜 하필이면 지금 2012년에 이 <화차>의 이야기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 현재에 근거하지 않는 과거의 단순 재현은 그저 회고적 취미일 뿐이다.) 그렇다면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아마도 이 영화로 이야기하고 싶은 현재적 시간들일 것이다. 변영주 감독이 보는 현재의 우리 사회는 어떤 곳인가. 그것은 이미 얘기한대로,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막막한 세계이다.

원작이 있는 영화들의 경우 그 영어제목이 보다 직접적으로 그 영화의 주제를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완득이'나 '은교' 같은 경우는 원작의 제목을 그대로 따온 경우이면서, 그 고유명사인 제목들은 영화의 배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아무런 추측도 제공하지 못하지만, 그 영어제목인 'Punch'나 'Muse'같은 경우에는 그 내용이나 주제에 보다 직접적으로 가깝게 다가가 있다. 이 영화는 조금 케이스는 다르지만, 영화의 내용을 보면 '화차'라는 제목보다 그 영어제목인 'Helpless'가 조금 더 가까이 가있지 않나 싶다. 즉 신용사회의 이면에 있는 숨겨진 낭떠러지로 어떠한 제어도 없이 달리는 '화차', 그 욕망이 촉발한 작은 불씨의 무서움과 관련된 제목인 '화차'와 달리 이 영화 <화차>에서 그려내고 있는 세계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속수무책인 세계, 예를 들어 아오야마 신지가 동명의 영화 <Helpless>에서 그려냈던 것처럼 어떠한 도움도 가능하지 않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기어나올 수밖에 없는 세계, 그야말로 'help'가 'less'되어 있는 세계다.       


마지막에 문호는 경선을 다시 만나지만, 그녀를 다시 보내준다. 아니 고쳐서 말하면 그녀를 보내준다기 보다는 그녀를 감당할 재간도 의지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것은 비겁해보이기도 하지만, 이 과정을 보는 관객은 아마도 문호를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전남편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즉 과정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문호는 경선의 전남편과 동일한 선택을 했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그녀는 일종의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본인이 지옥으로 달리는 불수레이자, 그 옆에 있는 사람까지 같이 태워 달리는 시한폭탄이다. 즉 그러므로 이러한 문호의 행위는 일종의 폭탄돌리기가 된다. 그러니 문호가 자신을 사랑하기는 했었냐고 묻고, 경선이 아니라고 답하자 그녀를 놔주는 것은 일종의 거짓된, 비겁한 퍼포먼스(이나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이다. 아마도 문호의 죄책감은 그런 것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눈앞에서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으니까. 그가 그녀를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포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더라면, 그녀의 (적어도) 그곳에서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다. (이 마지막 뒤에 문호의 품에 있는 경선의 모습을 돌려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그런 부분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대신 문호는 묻는다. "니가 사람이야?" 여러 리뷰들에서 보면 이 우문이 여러 사람들의 실소를 터뜨리게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그다지 웃기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질문이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조건을 묻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될 수 있는 조건, 그것 중의 하나는 물론 파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강현이 다큐멘터리 <파산의 기술>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파산한 자는 일종의 범죄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들에게 하는 협박과 폭력은 상당수 정당화되며(이 영화에서도 사채꾼(조폭)이 경찰을 부르라며 큰 소리를 치는 장면이 있다), 그들은 TV에 나와 돈을 다 갚고 다시 보통인의 지위를 회복할 것을 간증한다. 그리고 경선은 대답한다. "나 사람 아니야. 나 쓰레기야." 이 대답이 막막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이야기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청소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인간쓰레기가 잉여인간이 되려다 그나마도 실패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차경선이 타겟으로 삼았던 강선영은 종근이 말한대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다해도 아무도 알 수 없는, 아무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잉여인간이다. 그러나 차경선에게는 가능한 선택지가 없다. (뒤에 나오는 선택지들도 그렇게 나아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 뒤를 쫓고 있는 종근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말한대로 이 영화에는 잉여적인 씬들이 상당히 나오고, 그것의 대부분은 종근의 배경과 관련되어 있다. 왜 이 영화에는 그토록 종근의 이야기가 필요한 것일까. 아마도 그것이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근의 삶 역시, 그 자신이 말한대로 거의 끝난 것처럼 보이는 잉여의 삶이니까.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어떤 비정함일 것이다. 즉 변영주가 보는, 그려내는 이 세계는 한 인간쓰레기가 그보다 겨우(이 단어를 쓰는 것을 용서하시길) 한 단계 위인 것처럼 보이는 잉여인간이 되려다 다른 잉여인간의 추적으로 인해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이 무섭고도, 막막한 세계에는 어떤 엘리베이터도 어떤 에스컬레이터도 어떤 출구도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긴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어디론가로 가려다 결국 막다른 낭떠러지에 몰리게 되는 이 마지막은 아마도 예정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에스컬레이터의 중간에는 그 에스컬레이터에 어쩌면 같이 올라타 줄 수도 있는 문호가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놔버렸고, 그녀는 끝까지 올라가버렸다. 그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 낭떠러지로 그녀를 보냈고, 스스로 청소하도록 했다. 그러고보면 그녀가 처음 사라진 장소는 고속도로 휴게소였고, 다시 나타난 곳은 역의 대합실이었다. 역과 고속도로 휴게소. 끊임없이 이동하여야만 하는 사람들의 공간. 유목하는 자들은 늘 정주하는 꿈을 꾸고, 그 정주의 시도는 늘 한낱 꿈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아마도 경선은 모델하우스를 찍은 사진을 그렇게 몰래 끼워두었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정주에 실패했고, 그녀의 시체는 여전히 기차길 한 가운데에 놓여져 있다. 더 절망적인 것은 아마도 그 이후에 문호도 꿈을 꿀 것이라는 사실. 이 모든 것이 그저 없었던 과거로 돌아가는 꿈. 그녀의 전남편이 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덧.
결국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회적인 안전망이다.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종교도 이들을 구원할 수 없다면, 이 사회가 무엇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좋은 사회를 꿈꾸는 감독 변영주가 2012년의 한국사회에 다시 이 이야기를 끌고 들어온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 우리는 이 사회에서 기껏 폭탄돌리기나 하고 있어도 좋습니까, 라는 물음. (물론 세상은 늘 반대로 가니까.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종교가 버리기 전에 늘 먼저 나서는 것은 사회이니까. 폭탄을 안전하게 제거할 사회적 안전망은 커녕, 폭탄의 세기만 점점 커진다.)  

미스터리물의 껍질을 벗겨내도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여전히 문호의 캐릭터와 관련된 부분이다. 정서적인 부분을 강조하려는 영화라면 어떤 심리적인 요인, 동기를 묘사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일 텐데, 문호가 그녀를 끝까지 추적하려는 동기는 여전히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왜 그는 그녀의 실체를 알고난 후에도 그녀에 대한 추적을 멈추지 않는가. 동물을 돌보고, 수술하는 잉여적인 씬들과 이러한 부분들이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단순히 로맨스로 치부하기에는 여전히 모호한 구석이 있다.

조성하 씨는 예전에 다른 작품들에서는 그다지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이 아저씨가 꽤 연기를 하는 편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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