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Ending Credit | 2013.04.29 19:39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자세히 들어 있습니다.)



2002년 3월 개봉한 박찬욱의 네 번째 장편 <복수는 나의 것>은 이른바 '복수 연작'의 서두이며, 박찬욱 특유의 세계를 시작하는 첫걸음이다. 영화 그 자체로 보면, 이 <복수는 나의 것>은 영화의 중반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둘로 나뉘어지는 듯한 구성을 하고 있는데, 전반부는 아이러니한 사건의 중첩이다. 일은 계속 예상치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한 가지 사건은 다른 한 가지의 사건을 불러오며, 사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양상을 띤다. 그리고 그 결과 영화 중간의 한 가지 사건, 즉 아이의 죽음이 발생한다. 그리고 후반부는 아이의 죽음이 불러오는 죽음의 연쇄들이다. 그리고 그 결과 전반부에 등장했던 거의 모든 인물이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이 <복수는 나의 것>의 플롯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

먼저 전반부의 사건을 짚어보자. 사실 돌이켜보면 아이의 죽음, 그러니까 중소기업체 사장 동진(송강호)의 어린 딸이 유괴되어 죽음을 맞게 되는 이 사건은 매우 발생할 확률이 낮았다. 아니 어떻게보면 낮다고 말하기보다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싶을 정도다. 아이의 죽음은 다음의 사건들이 중첩되어 발생했다. 1. 신장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아픈 누나를 둔 류(신하균)가 장기밀매업자들에게 사기당해 가지고 있던 돈 전부와 자신의 신장을 털린다. 2. 그런데 그 때 누나가 이식을 받을 수 있는 기증자가 나타난다. 3. 류는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영미(배두나)와 함께 유괴를 계획한다. 4. 원래 유괴하려던 아이는 다른 아이였지만, 자신들이 노출될까 두려웠던 류와 영미는 유괴의 대상을 그 아이의 친구, 즉 동진의 딸로 바꾼다. 5. 이때 자신 때문에 유괴를 저질렀음을 누나가 우연히 알게 된다. 6. 누나가 죄책감에 자살한다. 7. 누나를 어릴 때 같이 놀던 곳에 묻으려한다. 8. 그 누나를 묻으러가면서 아이를 혼자 둘 수 없어 데리고 간다. 9. 아이는 류가 누나를 묻을 동안 차에서 자고 있었지만 목에 건 목걸이를 뺏으려던 동네 지체장애인에 의해 깨어난다. 10. 류를 찾으러 차 밖으러 나온 아이는 실수로 강물에 빠진다. 11. 구해달라고 소리치지만 류는 청각장애인이라 듣지 못한다. 12. 뒤늦게 아이를 발견한 류는 아이를 구하려했지만, 물이 자신의 키를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뛰어들 엄두를 못낸다. 그러나 이는 류의 착각이었다(어릴 때 이후 그곳에 가보지 못한 류는 물의 깊이보다 훨씬 자신의 키가 자랐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1. 류가 사기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2. 기증자가 그 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3. 유괴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했더라면 4. 원래의 아이가 유괴되었더라면 5. 누나가 그 사실을 몰랐더라면 6. 누나가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7. 누나를 다른 곳에 묻으려했다면 8. 아이를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9. 아이가 차에서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10. 아이가 강물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11. 류가 청각장애인이 아니었더라면 12. 그리고 류가 자신의 착각을 빨리 알았차렸더라면, 적어도 동진의 딸이 유괴되어 죽음을 당하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즉 이 '아이의 죽음'이라는 무서운 사건은 무려 12개의 우연이, 혹은 12개의 운명이, 아니면 12개의 오해, 오인, 혹은 잘못된 선택이 중첩하지 않았더라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으로, 아니 박찬욱의 잔인한 장난으로 사건은 발생했고, 동진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 즉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뚝뚝 물을 흘리는 죽은 아이의 환영 혹은 실재(아이가 나타난 뒷날 동진을 찾아온 형사는 바닥에 흥건한 물을 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환영이 실재였다는 보장은 없다)나 아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게 된다. 물론 그로 인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만나는 것은 이들 뿐만이 아니다. 류와 영미는 자신을 추적하여 찾아온 전기고문기를 손에 든 동진을 보고, 장기밀매업자는 자신을 찾아온 가위를 든 류를 보고, 다시 동진은 칼과 성명서를 손에 쥔 4명의 사내들, 즉 영미의 복수를 하러 온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을 본다. 

즉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에서 보게 되는 것은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하나의 복수가 아니라 돌고도는 복수의 양상, 혹은 복수의 연쇄를 본다. 동진은 류에게 복수하고, 류는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복수하고, 영미는 다시 동진에게 복수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복수는 이것이 전부인 것일까? 어쩌면 동진이 류에게가 아니라, 류가 동진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는 동진의 딸의 죽음을 류의 복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류가 동진의 딸을 죽게 만든 것에 큰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복수의 실행 같은 것이 아니라 실수였다.  영미의 논리대로라면 유괴에는 좋은 유괴와 나쁜 유괴가 있으며(이 논리는 나중에 <친절한 금자씨>에 그대로 반복된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류와 영미는 돈을 받으면 아이를 얌전히 돌려줄 생각이었다(혹은 받지 못했어도 돌려주었을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그 12개의 오해 또는 실수를 재론할 이유는 없으리라. 문제는 그 이후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 나타났을 때이다. 이들은 스토리 상으로는 영미의 복수를 위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불현듯 나타난 시점은 참으로 수상쩍다. 이들은 동진이 류에 대한 복수를 완결한 후, 아이의 보호자임을 부인한 후에 나타난다. 여기서의 아이란 동진의 딸이 아니라, 동진이 병원에 데리고 간, 자신이 해고하여 죽은 노동자의 아이다. 류를 죽이고 노동자의 아이를 내팽개친 후에야 어디에선가 유예되었던 그들이 나타난다. 즉 스토리로 보았을 때 이들이 여기에 동진을 죽이러 나타나는 것은 뜬금없지만, 플롯으로 보았을 때, 즉 아이의 보호자를 거부한 후에 나타나는 이들은 유예되었다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영화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뒤로 물러나 있다가, 동진이 노동자 류를 죽이고, 노동자의 아이를 부인했을 때 비로소 어디에선가 불려나와 이 자리에 섰다. 아이의 보호자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동진에게 걸려왔던 전화는 동진에게 주어진 마지막 살 수 있는 기회였고, 그가 노동자의 아이를 거부했을 때, 비로소 그들에게 의해 사형이 언도되었다. 물론 그 기회는 처음이 아니었다. 무려 그 전에 3번의 기회가 있었다. 동진은 영화에서 3번의 배를 칼로 가르는 장면을 본다. 첫 번째에는 자신의 회사에서 해고된 노동자(바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배를 칼로 자해하는 장면을 보고, 두 번째에는 자신 딸의 시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고, 세 번째에는 류 누나의 시체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본다. 그리고 그는 첫 번째에는 놀라지만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았고, 두 번째에는 차마 쳐다보지 못했으며, 세 번째에는 마치 물건을 보듯 무심하게 보았다. 마지막 그의 배에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성명서가 꽂히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닐까. 그의 무심한 시선, 타인의 배를 가르는 장면을 보는 이 무심한 시선, 자신의 딸의 배를 가르는 이 장면을 차마 보지 못했던 그 시선과 너무나도 달랐던 그의 무심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미가 중간에 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한 몸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 머리를 두 개 가졌으니까 그만큼 머리가 아팠고, 그래서 하나의 머리를 잘라버렸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왼쪽과 오른쪽 중에 어느 쪽을 잘랐느냐고 물었던 류의 멍청한 질문으로 이 장면은 끝났지만, 우리는 영화 속에서 제시되지 않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안다. 아마 그 사람은 죽었을 것이고, 이제 그는 다시는 머리가 아플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 동진과 류를 연상시킨다. 동진과 류는 한 몸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다. 물론 정치적으로 이야기해서 하나의 사회에 공존하는 자본가와 노동자, 그리고 그들이 공존하는 것이 아닌 하나를 자르는 것을 선택했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류와 동진은 처음에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방음이 되지 않아 온갖 소음이 들려오는 류의 집과 전자동으로 커튼이 쳐지는 동진의 집의 대비 같은 것 말이다(류의 집에 온 아이는 묻는다. "아빠 후배(류는 자신을 아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가 왜 이렇게 못 살아요?"). 그런 그들이 어느 틈에 점점 비슷해지다가, 중후반부 류가 장기밀매업자들을 추적하고, 동진이 류를 뒤쫓을 때 보면 거의 같아진다(이 때 박찬욱은 <스토커>에서도 여실히 보여준 그의 장기인 교차편집을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들 둘은 모두 동일하게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진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없는지에 대해 묻는 형사에게 나름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고, 류에게는 그의 목숨을 거둬가기 전에 네(류)가 착한지 알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이 사회의 나름 착한 사람들이고, 착한 두 머리이다. 그러나 착한 그들은 왜 모두 죽음을 맞아야만 했을까. 착한 그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 <복수는 나의 것>의 영어 제목은 한글제목과 조금 뉘앙스가 다른데, 'Sympathy for Mr.Vengeance'이다. 어쩌면 이것에 힌트가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이 sympathy(동정)라는 것. sympathy의 어원은 'syn(같이 혹은 함께)+pathy(고통, 치료법)'이다. 즉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동정(同情)'이라는 한자어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마음 혹은 뜻, 생각 같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 함께 느끼는 것이다.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타인이 되어 본다는 것이다. 즉 타인의 위치에 진정으로 섰을 때만이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고, 그것은 그 타인이 나와 그렇게 다른 사람이 아님을, 혹은 한 몸뚱아리에서 자라난 두 개의 머리 중 하나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장난을 시작한 김에 조금 이어가보면) '복수는 나의 것'의 '복수'란 어쩌면 復讐가 아니라 複數, 즉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가 아닌 두 개란 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 즉 '복수는 나의 것'이란 두 개의 머리가 나의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혹은 腹水이거나 말이다. 타인의 배에 들어찬 물을 보는 것. 그 물을 보면서 그의 고통을 짐작하는 것, 동진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단지 사물로만 보았고, 그래서 자신의 배에 꽂힌 성명서를 내려다보려고 낑낑대는 신세를 피할 수 없었다.

물론 이 sympathy 혹은 동정은 동진에게만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류나 영미에게도 그렇게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푸른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블루워커 류(이 영화에서의 류의 노동의 장면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고, 전반부의 분위기를 크게 좌우한다. 거의 지옥과 같은 소음이 울려퍼지는 공장의 풍경과 밤샘근무를 하고 녹초가 되어 공장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남자들의 눈을 부시게 하는 햇살, 그리고 거의 얼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거리를 걷는 류의 모습)와 붉은색의 전단지를 나눠주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영미(그러나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라는 이 단체의 이름과는 달리 이들의 구호는 조금 수상쩍은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영미가 주로 외치는 두 개의 구호인 '미군축출'과 '재벌해체'는 학생운동의 두 가지 세력의 각각 가장 대표적인 구호이다. NL의 미군축출과 PD의 재벌해체)가 결국 선택한 것이 단지 유괴라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유괴라는 행위가 아니라, 그것에 내재한 어떤 속성과 같은 것이다. 아까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영미의 논리대로라면 유괴에는 나쁜 유괴와 착한 유괴가 있으며, 나쁜 유괴는 아이를 죽이는 것이며, 좋은 유괴는 아이와 돈을 얌전히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아이와 돈을 얌전히 교환하는 것이 가능할까. 예를 들어 아이와 돈은 동일하게 교환될 가치가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세계이고, 그 교환의 표면적인 원칙은 '등가'라고 이야기된다. 예를 들어 노동자의 밤샘근무는 보수(돈)와 교환되고, 이것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교환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논리이다. 그러나 그 가치의 비중이 같은가의 여부는 둘째치고, 그 가치를 동일하게 맞추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즉 애초에 그것들이 교환할 수 있는 것들일까. 앞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또 있겠지만, 박찬욱의 복수 연작과 후속작들은 등가교환을 매번 시도한다. <올드보이>나 <박쥐> 등에서 나오는 등가교환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 <복수는 나의 것>에서만 예를 찾아보자면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복수하려 찾아간 류는 자신의 신장을 탈취해간 장기밀매업자들에게 똑같이 신장을 탈취하고, 자신의 딸이 익사했음을 아는 동진은 류를 동일하게 익사시키려 한다. 즉 이것은 일종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세계이고(이 <복수는 나의 것>이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공권력을 해체한 후에 후반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점인데, 이는 <올드보이>에서 사설감옥이 등장하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사설재판이 등장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동진을 찾아온 형사는 사건의 해결을 동진에게 맡겨버리는데, 따라서 스토리로 보면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거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어간다. 즉 서사적으로 구멍이 생긴다), 거의 정신병적일 정도의 등가교환의 시도이다(예를 들어 일부 정신병을 가진 환자들의 경우 동일한 물건, 혹은 신체의 훼손은 반드시 동일하게 보상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경우 실제 등가교환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교환되는 것의 가치가 달라서가 아니라, 교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교환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환은 동시에 잉여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 잉여들이 어떠한 것을 낳는지는 이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가. 동진이나 류는 복수나 유괴로 동일한 교환을 시도했지만, 복수는 잉여를 낳았고, 잉여물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돌고돌아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서 자신을 해했다.) 밤샘근무라는 노동과 보수는 혹 교환이 가능할 수가 있더라도(물론 이도 논의의 여지가 있다), 아이의 생명, 혹은 아이의 존재와 돈은 교환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영미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그리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선생(최민식)도 그게 가능하다고 금자(이영애)를 속였다. 백선생은 아이들을 죽인 이유가 요트를 사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다), 그것은 그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 혹은 당대의 학생운동에 대한 허상 같은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샌델의 일부 논의처럼 현재의 자본주의는 점점 무엇이든 교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교환, 등가교환에 대한 환상. 그 환상은 점점 커지고 거의 정신병적이 된다. 그 등가교환에 대한 환상은 박찬욱의 다음다음다음다음 영화 <박쥐>에서 부서질 것이고,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에서 먼저 몇 개의 죽음들, 혹은 죽음을 피하려는 시도들을 만나야만 한다. 

  

덧.
그리고 박찬욱의 계단이나, 거미와 개미 같은 것도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이 영화가 개봉한 10년 전 그 때, 나는 군복무 중이었고, 누나와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로 기억한다. 그 때 누나는 "너는 이런 영화가 좋니?"하고 물었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이상하게 그 질문만 또렷하게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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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5.02 2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그런 장면도 있었구나,스토리가 이랬었지.. 하면서 리뷰를 읽었어요. 한편으론 동진이 사진속의 벽지를 보고 딸이 유괴된 곳을 찾았다는게 불쑥 생각났구요 (근데 맞나요?^^;) "너 착한거 안다"라는 대사는 영화 볼때도 가슴에 확 꽃혔던것 같아요. 그 착한사람들이 죽음에 이르는,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시스템들, 그 착한 표정뒤에 놓인 무관심과 결핍된 것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오락가락하네요.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5.06 16: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맞아요. 사진의 벽지와 실제의 벽지가 동일하다는 것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죠. (그런데 사실 그것을 염두에 두더라도, 이 영화에서 동진이 류를 결국 찾아내는 과정이 좀 아귀가 안 맞아요. 영화가 나중에는 거의 서사가 말이 안 될 지경이 되기는 하죠. 일부러 그런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요.)

      저도 다시 봤을 때 이게 이런 내용이었나..싶었어요. 어떻게 보면 거의 말도 안되게 이야기가 짜여져 있잖아요. 아마 실제로 시나리오 공모전 같은 데에서 시나리오를 이렇게 쓰면 바로 읽자마자 쓰레기통에 던져질 것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를 희생시키면서 박찬욱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생각이 되었어요. 아마도 또 보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오멸

Ending Credit | 2013.04.18 01:22 | Posted by 맥거핀.





최근 어떤 글에서 허문영은 세르쥬 다네의 말을 빌려 세상의 영화를 역사적 영화와 지리적 영화로 구분지었다. 허문영의 설명에 따르면 역사적 영화는 사건의 영화이고, 지리적 영화는 장소의 영화이며, 예를 들어 서부극이 미국의 건국신화라는 설명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서부극이 역사적 영화라기보다 지리적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 비슷한 구분법을 영화 <지슬>에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지슬>은 역사적 영화인가, 지리적 영화인가. 

일단 영화 <지슬>은 역사적인 요소와 지리적인 요소를 둘다 가지고 있다. <지슬>은 흔히 4.3사건이라 불리는 1948년부터 시작된 미군정과 우리군에 의해 저질러진 제주도민 학살사건, 혹은 그에 맞선 민중들의 항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동시에 이는 제주도라는 좁고 한정된 고유의 지역성을 크게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다. 물론 <지슬>이 역사적 영화이자 지리적 영화라고 답한다면 굳이 이 구분법을 끌고 들어온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지슬>은 지리적 영화다. 이는 역사적인 이 사건이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동시에 이 영화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감독 이하 제주도 사람들이 만든 제주도 말로 진행되는 영화라고 하는 말도 아니다. 그저 아주 간단하게 말하고 싶다. 이 영화에서 역사적인 배경을 지울 수는 있지만, 그래서 4.3사건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전혀 알지 못하고도 이 영화를 관람하는 데에는 크게 문제가 없지만, 이 영화에서 지리적인 배경을 지울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제주도 방언으로 진행되고, 표준어 자막이 계속 밑에 따라붙는 특이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제주도를 지운다면, 즉 예를 들어 이 배우들에게 표준어로 연기하도록 했다면, 이 영화는 어떤 형태를 띄었을까, 아니 이 영화가 존재할 수가 있었을까. 아마도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거나, 영화로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N사이트 같은데서의 20자 평에는 지리는 없고 역사만 있다. 아니 역사는 없고, 이념만 있다. 그것도 이상한 이념만 있다. 지독한 인간들.)

앞에서 허문영의 구분을 따르자면, 그러므로 이는 사건의 영화가 아니라 장소의 영화이고, 그러므로 보아야 할 것은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아니라, 이어지는 일련의 장소들이고, 장소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군인들이 있는 집과 이들이 있는 동굴의 대비 같은 것 말이다. 바닥에 나뒹구는 제기(祭器)들을 보여주는 첫 장면이 보여주듯이 군인들이 머물고 있는 이 집은 제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집이다. 그리고 군인들은 태연하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시체 혹은 원혼의 옆에서 태연하게 과일을(아마도 제사상에 올라가 있었을 과일을) 깎아서 먹는다. 시체와 원혼과 군인들이 함께 머무는 집. 그래서 이 집은 한없이 으스스하고, 그들이 설혹 귀신들린 행동을 해도(예를 들어 이 부대의 지휘관인 김상사는 마약에 취해 흙바닥에서 헤엄를 치지만, 그것은 동시에 귀신 들린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카메라는 때로 의도적으로 인물의 포커스를 지워버리고, 그들을 종종 흐릿하게 보이도록 한다. 즉 이들을 일종의 영화적인 유령으로 만든다.

반면 이들이 숨어 있는 동굴은 제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영화는 형식적으로 신위-신묘-음복-소지라는 전통 제사의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그들은 그곳에서 음복을 하고(무동 할머니가 죽으면서 남긴 감자를 나누어 먹고), 소지를 한다(군인들이 동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날려보내는 매운 연기는 소지의 연기이고, 동시에 울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실제의 제사에서 소지를 하는 것, 그러니까 죽은 이를 적은 신위를 불사르는 것은 동시에 울기 위함이 아닐까). 물론 이는 앞서의 으스스한 집과 다르게 공동체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곳에서 감자를 나누어 먹고, 서로를 걱정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힘을 북돋운다. 그것은 감독이 이 좁은 동굴을 그려내는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이 동굴에서 인물들은 길게 늘어 앉아있고, 카메라는 그들을 각각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모두 꽉 들어차도록 잡으며, 그들 모두에게 포커스를 배분한다(딥포커스). 그것을 그들이 감자를 나누어 먹으며, 대화하는 씬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이 때는 대화를 이루어내는 몇 개의 무리를 잡되, 그 대화의 상대자가 매번 바뀌며, 앉는 위치도 미묘하게 달라져 있고, 카메라는 마치 끝없이 계속 패닝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 때의 카메라는 이 좁은 동굴을 무한의 공간으로 확장하는 마법을 부리고 있으며, 그것은 이 좁은 공간에 가득 담겨진 그들의 공동체성, 그 무한의 힘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가지의 비교를 변성찬은 영화와 연극으로 나누어 보았는데, 그것 역시 생각해 볼만한 부분이 있다. 변성찬의 구분에 따르면 군인들의 장면은 영화적인 장면들이고, 주민들의 동굴에서의 장면은 연극적인 장면들이다. 기법상으로 보면 이는 영화적인 기법을 주로 활용한 군인들의 장면과 연극적인 기법을 많이 활용한 주민들의 장면이라는 대비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것은 영화라는 매체의 어떤 죽음과 관련한 은유들(유령들이 뛰노는 스크린과 죽어 있는 관객들)과 연극이라는 매체의 어떤 살아있음의 대비로 볼 수도 있다. 즉 <지슬>은 하나의 제의이자 연극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이 제의이자 연극은 죽은 영화 속 이들을 위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우리 관객들)이 살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제의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이듯이 말이다. 다시 말해서 제의는 온전히 죽은 이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살아 있는 나머지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죽은 혼령을 달램으로써 살아 있는 후손에게 나쁜 기운이 아니라 좋은 기운을 보낸다는 관점에서도 그렇고, 동시에 제의는 죽은 이들이 우리와 그다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점을 일깨우고(죽은 이의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남은 하루하루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즉 제의는 죽은 이와 우리를 연결지으면서도 동시에 선을 그음으로써, 우리에게 삶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케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로 이루어지는 제의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고, 동시에 그것은 지슬(감자의 제주도 방언)이기도 하다.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의 제목이 '지슬'인 이유일 것이다. 지슬은 누구에게나, 즉 주민에게나 군인에게나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동시에 <지슬>이 역사적인 영화가 아니라 제주도라는 땅에서 나는 지리적 영화, 아니 감자적 영화이고, 동시에 역사로서의 과거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 현재를 다루는 영화이기도 한 이유다. 삶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으니까. 그러므로 제의(祭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덧.
이 말은 덧붙이고 싶다. 이 영화의 이미지는 때로 아름답다. 예를 들어 이 영화는 살인, 학살의 장면 후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까 자연의 모습을 마치 한편의 수묵화처럼 비춘다(물론 살인 장면도 그다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 혹은 오멸 감독의 '어떤 태도'라는 것일 터이다. 동시에 그것은 한편으로 아무도 이 죽음을 보고 있지는 않지만, 이 자연, 자연의 정령만큼은 이것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들의 처참함 이후에 이런 아름다움을 보아도 좋은 것일까. 아니 처참한 것을 아름답게 찍어도 되는 것일까. 처참한 것은 처참하게 보이도록 찍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이 남았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 영화 전체적으로도 그렇다. 사실 우리는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처음에 보인 거의 모든 주민이 죽을 것을 안다. 그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4.3 사건이라서가 아니라, 앞에서 말한대로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제의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즉 이 영화가 이들에게 바치는 제의가 되려면 그전에 이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어떤 우스꽝스럽고 순박한 모습을 보면서도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마치 이들이 진짜 죽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실제의 제주도 사투리를 쓰고, 자막을 넣는 것이나,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배우를 쓰는 것은 이 영화를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받아들이게 했으며, 더욱 웃음을 짓지 못하게 했다. 곧 죽을 사람들을 보는 것, 혹은 그들의 죽음을 실제처럼 받아들이는 어떤 불편함이 나를 지배했으며, 그것은 어떤 실제의 죽음 혹은 학살을 보는 것, 혹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쇼아)를 다룬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에서 실제의 자료화면(죽음의 장면)을 쓰는 것을 '외설스런 짓'이라며 피하고, 오로지 인터뷰만으로만 영화를 구성하는 것, 혹은 그 반대로 전쟁 다큐 <아르마딜로>에서처럼 의도적으로 실제의 죽은 시체, 혹은 죽어가는 인간을 보여주는 것 - 등에 담겨진 질문들과 나오지 않는 답을 생각해보게 했다.

앞에서는 제의가 죽음이 아니라 삶을 위한 것이라 말하고, 그것을 보라고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거기에서 죽음이 먼저 보이나 보다. 이렇게 이성과 감정의 거리가 머니 제대로 영화보기는 아직도 멀고도 멀다.





- 2013년 4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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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스포가 들어 있습니다.)





1.
아마도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번역에 따라서 약간 뉘앙스가 다르기는 하지만)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문학동네 버전) 그리고 이 영화 <안나 카레니나>는 이 이야기의 또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레빈의 고뇌에 찬 질문에 대한 일꾼의 뭐 그런 것을 묻느냐는 식의 간단한 답과 함께 끝난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지요."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조금 바꿔서 이야기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사실은 불행한 가정에 나름나름의 이유가 있다면, 행복한 가정에도 나름나름의 이유가 있다(혹은 사실은 둘다 없다). 그러나 그것이 나름나름이 아니라, 고만고만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행복에는 아무도 그 이유를 캐묻지 않기 때문이다. 즉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이유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어떤 자세가 그 행복을 행복한 것으로 만들거나, 그 불행을 불행한 것으로 만든다. 불행한 사람이 더욱 불행해지는 것은 그 불행에 무엇인가 이유를 계속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불행한 자는 그 불행의 근원을 찾아, 어떻게든 그것을 해결하려 하고, 대부분의 불행은 사실 해결할 수 없거나, 사실은 이유가 없기 때문에(즉 본인이 이유라 생각한 것은 대부분 이유가 아니므로) 그런 생각은 그를 더욱 불행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악순환에서 겨우 벗어나게 된 실마리를 찾게 된 레빈과 달리 안나 카레니나(키이라 나이틀리)는 그 불행의 이유를 찾는 것이 더욱 불행이 되는 그런 악순환에서 벗어날 길을 끝끝내 찾지 못했고, 결국 뱅글뱅글 도는 기차바퀴에 몸을 던졌다. 그가 왜 나를 사랑하는지, 혹은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는지에서 계속 '왜'에 방점을 찍고, 그 '왜'가 또다른 '왜'를 낳는 순환지옥, 끊임없이 뱅글뱅글 도는 악순환의 기차바퀴. (이 영화에서 계속 이 돌고도는 이미지가 반복됨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것이 내가 이해한 이 <안나 카레니나>의 이야기이다.

2.
물론 이 영화 <안나 카레니나>에는 이 이야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이야기 외에 다른 이야기들도 들어있으며, 그 이야기 자체 외에도 주목할 만한 형식적인 부분이 있다. 많이 이야기되었듯이 이 영화는 연극 기법의 많은 부분을 차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를 통해 영화의 어떤 것을 생각해 보게 하며, 따라서 이 영화를 도리어 일종의 영화적인 텍스트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 즉 이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부재시키거나, 다른 방식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우리가 영화라는 것의 작동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야기가 전환될 때 카메라와 배우는 그대로 둔채 무대 배경을 바꾸거나, 문이 열리면서 새로운 배경이 펼쳐지고,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을 씀으로써, 영화에서의 씬의 전환, 즉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씬과 씬의 연결의 기이함(즉 예를 들어 우리는 영화에서 누군가 집 안에서 잠자리에 들고, 바로 다음 장면에 그가 거리에서 돌아다니는 장면을 보더라도 그것에 대해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즉 그가 잠자리에 든 다음에 일어나는 장면이 없더라도, 그가 당연히 일어나서 집밖으로 나왔겠거니 하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혹은 충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 씬과 씬의 연극적인 연결 외에도 다른 방식으로도 펼쳐지는데, 예를 들어 무도회 장면에서 안나와 브론스키(애런 존슨) 커플을 부각시키거나, 극장에서 안나가 여러 사람들의 경멸어린 눈초리를 받는 장면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영화에서라면 한 커플을 부각시키는 방법은 카메라를 활용한다면 그렇게 문제될 것은 없다. 원경에서 줌으로 잡거나, 혹은 클로즈업을 활용하면 된다. 그러나 연극을 보는 관객의 눈에는 줌 기능이란 없고, 그러므로 연극에서라면 다른 방식을 써야할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그 커플에만 조명을 주거나, 이 영화에서처럼 다른 커플을 정지시키고 안나 커플만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안나가 극장에서 여러 사람들의 경멸어린 주목을 받게 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의 경멸적인 수군거림과 안나의 미세한 떨림을 클로즈업으로 잡아내는 것이 일반적인 영화의 방법이라면, 이 영화에서는 대신 다른 사람을 정지시키고, 안나의 히스테리컬한 반응만이 움직이도록 하는 방법을 쓴다. 이는 물론 '실제'가 아니지만, 훨씬 더 극적이고, 적어도 보는 이를 자극시킨다는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다.

3.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종종 바깥으로 멀찍이 물러나 이 영화가 연극 무대라는 하나의 공간 위에서, 계속 사실은 하나의 연극으로서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명이 둘러져 있는 단 위의 무대, 그 안에서 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와 카레닌(주드 로)은 위태로운 치정극을 펼친다. 그리고 카메라는 종종 뒤로 물러나 그것이 하나의 무대임을 다시 관객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치정극 속의 주인공들만은 아니다. 그 무대 바깥에 위치한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 만나는 기차 객실 안이라는 무대 안의 공간과 그 바깥에서 안나가 마주치게 되는 검댕을 잔뜩 뒤집어쓴 기차 화부의 대비. 즉 그 무대 안에 안나와 브론스키와 카레닌이 있다면, 그 무대 밖에는 그 치정극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있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가 흥미로운 것은 무대 안의 이들을 보여주면서도 그 무대 밖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인데, 레빈과 같이 일하는 레빈 집의 일꾼들이나 레빈에게 낮은 신분의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충고하는 아마도 사회주의자이거나 혹은 공산주의자일 듯한 레빈의 형과 같은 인물이 그들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와 브론스키와 카레닌의 이야기를 무대 위로 올림으로써 그 무대 밖에서 존재하고 있는 이들을 상기시킨다. (<씨네21>에서 보니 제작비 및 기타 문제로 러시아 현지 로케이션이 무산되자 감독 조 라이트가 주요 배경을 (스튜디오에서 찍을 수 있는) 극장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이는 도리어 영화에 상당한 플러스로 작용하고 있다.) 즉 무대 위에 이들 구체제의 귀족들이 있다면, 그 무대 바깥에는 그 무대에 오르지 못한 러시아 하층민이 있다. 즉 이들 러시아 하층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의 처절한 치정극은 있는 자들의 한판 연극이며, 환한 불이 켜진 무대 위에서 펼치는 한편의 꼭두각시놀음이다. 영화에서도 잠깐 스치듯 지나갔지만, 낭만적 사랑, 혹은 한껏 격식을 갖춘 사랑놀음은 구체제의 유물이다. 사교계의 어지러운 밀당은 하층민의 입장에서 보면 있는 자들의 감정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브론스키가 죽은 화부에게 건넨 한움큼의 돈은 한순간의 시혜이고 가난한 자들이 아주 잠깐 보는 화려한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연극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고, 언젠간 끝난다. (안나의 오빠는 카레닌에게 이혼은 하더라도 식사는 하고 가라고 한다. 그렇다. 이혼은 해도 식사는 해야한다, 누구나.) 영화를 보다보니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치정극이자, 혁명극이기도 하다.


4. 
물론 그 무대의 바깥에는 러시아 하층민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연극을 혹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이 있다. 무대 위에 귀족들의 사랑싸움이 있고, 무대 밖에 그것과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는 하층민들이 있다면, 그 더 바깥에는 스크린 밖의 우리들이 있다. 즉 우리는 사실 무대와 혹은 영화와 거의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아까 씬과 씬의 연결, 혹은 숏과 숏의 연결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므로 숏과 숏의 연결은 한편으로 무대 밖의 우리를 어떻게든 참여시키려고 하는 영화의 전략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누군가의 대화를 본다고 했을 때 우리가 아주 최선을 다해 좋은 위치를 잡아도 두 사람의 옆모습을 볼 수 밖에 없고, 우리는 그 대화의 바깥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영화는 대신 당신에게 숏과 반응숏(리버스 숏)을 제공한다. 어떤 반응숏을 보여준다는 것은 여러가지 효과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그것을 보고 있는 당신이 그 반응에 반응하라는 것이다. 이런 노골적인 반응숏 외에도 아까의 예를 다시 가져와본다면 누군가가 잠을 자고, 그 다음에 그가 거리를 돌아다니는 씬을 붙인다면 영화는 이 때 당신에게 그 중간에 당신이 참여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즉 그가 일어나서 신발을 신고, 집밖으로 나가는 장면에 대한 당신의 상상의 개입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눈속임이고 미봉책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그 영화에서 분리되는 것을 막을 길은 없다. 당신이 개입하지 않아도 영화는 계속 씬을 이어나갈 것이고, 언젠가는 끝날 것이고, 영화관은 당신에게 나갈 것을 요청할 것이다. 이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5.
그것의 하나의 대답은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와 같은 것이 아닐까. 저명한 극작가 앙트완이 죽고 생전에 그의 연극 '에우리디스'에 참여했던 여러 배우들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할 것을 요청받는다. 그들을 모아놓고 대형화면에 등장한 앙트완은 그들을 이자리에 모이게 한 이유가 있다며, 그들이 그의 유작인 젋은 배우들로 새롭게 구성된 연극 '에우리디스'의 리허설을 보고 이것을 무대에 올려도 괜찮을지 판단해 달라고 한다. 그런데 이 촬영된 연극 '에우리디스'가 스크린에 상영을 시작하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이 참석한 배우들이 상영하는 화면에 맞춰 연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이 화면과 참석한 배우들의 연기가 혼합되고, 배우들이 앉아있던 장례식장은 연극 '에우리디스'의 무대로 확장되고, 없던 공간들이 생겨난다. (이와 비슷한 것을 <안나 카레니나>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문이 열리고, 없던 눈밭이 나타난다거나 하는 것은 이와 거의 유사하다.) 즉 이 앙트완의 장례식장에서 상영되는 연극의 관객이 될 것을 이 배우들은 요청받았지만, 이들은 단지 관객에 머무르지 않고 그들 스스로가 이 연극의 배우가 됨으로서 관객의 지위를 벗어난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으로 영화는 관객들에게 하나의 모순된 지위를 부여한다.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영화는 관객이 영화의 무엇인가에 개입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그 개입은 제한적이어야 한다. 즉 그 개입은 영화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즉 일반적으로 어떠한 영화감독도(동시에 어떠한 옆자리 관객도) 주인공의 대사에 맞춰서 당신이 연기를 해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관객은 영화에 들어올 것을 끊임없이 유혹받지만 동시에 그 영화에서 물러날 것을 끊임없이 요청받는다. 그러므로 스크린 위에서 존재하는 것은 유령들이다. 우리는 환영들, 유령들을 보며, 두 시간 동안 그 유령들의 움직임에 빠져있고, 사실은 그 두 시간 동안 그 유령들의 움직임에 홀려 거의 죽어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일종의 임사체험이다. 영화가 끝난 후 밖으로 나왔을 때 뭔가 세상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당신이 그 사이에 잠깐 죽어있었기 때문이다. 당신 안에 있던 무엇인가가 당신이 그 유령들의 움직임에 홀려 있던 사이에 스멀스멀 기어나왔다가 겨우 다시 기어들어갔기 때문이다.    
 
6.
그러므로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의 시작은 거의 임사체험의 시작이다. 알 수 없는 상대방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적인 목소리를 듣게 되는 이 반복의 시작은 임사체험을 알리는 포고다. (그 화면은 참으로 으스스하다.) 그리고 그들은 앙트완의 장례식, 현계와 선계의 사이에 있는 듯한 오묘한 공간에 들어와 죽은 자의 환영을 받는다. 자 나는 유령일세, 자네들도 나처럼 유령이 되어보지 않겠는가. 유령이 되어보라는 것은 이 영화의 관객이 되라는 말이다. 관객이 되어 이 유령들이 펼치는 향연을 맛보는 유령이 되어달라는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참석한 배우들은 앙트완의 청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연기를 하기 시작하고, 곧 그들은 이 영화의 관객이 아니라, 이 영화의 배우가 된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지금 죽음에 대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한 번 죽어보라는 요청에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고 있다. 필사적으로 연기를 함으로써 말이다.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붙이면 더 재미있다. 바로 이들이 벌이는 연극이 '에우리디스'라는 것. 흔히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로 알려져 있는 그 이야기. 저승의 신 하데스가 데려간 에우리디케를 찾아 저승으로 내려간 오르페우스가 하데스를 감복시켜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나오는데 성공하지만, 거의 지상에 다다랐을 무렵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는 약속을 어겨 다시 저승으로 에우리디케가 영영 사라져버린다는 슬픈 이야기. 어쩌면 우리가 여기에서 방점을 찍어야 되는 것은 그들의 슬픈 사랑이나 그 얼마를 참지 못한 오르페우스의 인내심 부족이 아니라 혹시 '돌아본다'는 사실은 아닐까. 그 본다는 것. 우리가 돌아보았을 때 다시 환영이 되고 마는 무엇인가에 대해. 아무튼 그랬다. 오르페우스에게 필요한 것은 빠른 발놀림이었지, 결코 보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면 조금 이상한 질문. 혹시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가 갑자기 무서워진 것은 아닐까. 자기 손을 잡고 따라오고 있는 이것이 혹시 괴물은 아닐까 무서웠던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에우리디케인지 뭔지 모를 그것을 저승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일부러 뒤를 돌아본 것은 아닐까. 아무튼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에서 앙트완은 저승에서 귀환했지만, 그는 결국 다시 저승으로 끌려들어갔고, 어쩌면 앙트완이 주최한 임사체험에서 달콤한 죽음의 유혹에 맞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친 이들은 앙트완의 장례식장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른다. 혼자 저렇게 가서 얼마나 다행이야. 그러나 안심은 이르다. 스크린 속의 유령은 그들의 옆에서 몰래 몸을 숨기고 있으니까.)

7.
알랭 레네는 말한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이것은 아마도 두 가지 중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니 곧 놀라운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 하나, 아니면 영화를 다 본 당신에게 건네는 조소. 당신은 무엇인가를 보기는 했으나, 사실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당신이 바보처럼 그 곳에서 넋놓고 앉아있는 동안 사실은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당신은 그저 잠깐 죽어있던 것 뿐인걸.

영화는 2-3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깜깜한 극장에서 좁은 의자에 앉아서 봐야한다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가진다. 그러므로 영화는 보는 이에게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기 위한 몇 가지의 마법을 쓴다. 예를 들어 플래쉬백을 사용하는 것은 시간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이고, 분할화면으로 여러 공간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은 공간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일종의 마술, 눈속임일 뿐, 그렇다고 해서 시간과 공간은 극복되지 않는다. 알랭 레네는 시간과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그것은 기억과 상상이다. 기억은 과거의 시간을 당신에게 돌려놓으며, 상상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공간을 당신에게 제공해준다. 그리고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이 기억과 상상을 당신에게 요청하는 영화, 죽음으로 유혹하지만, 그 죽음에 발버둥치라고 이야기하는 영화다. 아직도 기억하고, 상상할 것은 많으니까. 우리는 그럼으로써 무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 2012년 3월 서울아트시네마, 롯데시네마 에비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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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4.06 14: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에 영화보면서 연극적 장치나 안나-카레닌-브론스키,키티와 레빈커플에 너무 집중했는지 그외 등장인물들, 무대밖의 사람들이나 배경에 대해선 놓친 부분이 많아요. 맥거핀 님 리뷰읽으며 그런 부분들을 확인하게 되는군요. 두번째 사진은 경마장에서 안나가 알렉세이!라고 외치면서 일어나는 장면이네요.공교롭게도 카레닌과 브론스키 모두 알렉세이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안나가 불렀던건 물론 후자였죠. 연극무대로 연출된 장면이라서 그 충격과 여파가 무대를 흔들정도로 느껴졌었어요.무대 위 카레닌의 독백장면도 그랬구요.

    이제 영화가 끝났고 영화관을 나왔으니 홀려있던 유령들과 작별을 하고 상상의 밭을 가꿔보고싶은데 그러러면 아무래도 원작 소설을 읽어보는게 좋겠죠. 실은 영화보고 소설 읽고싶어서 얼마전 책을 구입했어요. 금방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쨋든 읽기 시작은 했으니까요.. ^^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4.09 14: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에 고전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꽤 나오더군요. 그것도 단순히 고전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영화가 아니라, 영화적으로 재해석한 영화들이어서 흥미로워요. 이 <안나 카레니나>도 그렇고, 얼마 후에 나온다는 <위대한 개츠비>도 그렇고요. 감독이 바즈 루어만이라니 보통의 개츠비는 아니겠지요.

      아무튼 저는 뭔가를 새롭게 해보려는 영화는 좋아요. 그게 과잉된 시도이고, 때로는 무엇인가 많이 안맞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새로운 시도들 끝에 좋은 무엇인가가 탄생하는거니까. 이 영화도 이런 시도가 조금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은데, 저는 지지하고 싶은 입장입니다.

      아..저는 1권이라면 모를까, <안나 카레니나>와 같은 대작은 쉽게 시작할 엄두가 안나네요. 요즘엔 단편도 잘 못 읽어요. 집중력이 영 떨어졌음..^^

스토커, 박찬욱

Ending Credit | 2013.03.11 17:45 | Posted by 맥거핀.



(<스토커>에 대한 전체적인 스포, 그리고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박쥐>, <친절한 금자씨>에 대한 부분적인 스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들을 보신 분이 읽으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토커. stalker. (그러나 이 영화 <스토커>의 영문 스펠링은 우리가 그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올리는 어떤 이미지와는 달리 'Stoker'이다. 그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자.) 사전에서 이 단어를 찾으면 몇 가지의 뜻이 나온다. 명사로는 '남을 괴롭히는 사람', 혹은 '(슬그머니 접근하는) 사냥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익히 알려진 이런 의미 외에도 stalker라는 단어는 다른 것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명사로는 '(식물의) 줄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동사로는 '몰래 접근하다'는 뜻 외에도 '성큼성큼 걷다' 혹은 '활보하다', '만연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영화 <스토커>는 이의 모든 의미를 포괄하는 어떤 총체인 것처럼 보인다.

1. 괴롭히는 자 혹은 사냥꾼

이미 많은 리뷰들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먼저 이 영화를 흔히 말하는 '스토킹'으로 생각한다면 그 스토킹은 삼촌 찰리(매튜 구드)에 의해 행해지는 조카 인디아(미아 바시코브스카)를 향한 행위이다. 그것은 영화 초반부터 여러 결로 반복하여 이루어지는데, 인디아에게 집요하게 따라붙는 깜빡이지 않는 시선으로, 혹은 그녀의 뒤를 밟고, 그녀의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 방식으로, 그리고 아주 오래 전부터 그녀에게 같은 모양의 구두를 보내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을 예를 들어 인디아의 신체에 달라붙은 거미의 모습으로 보여진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영화의 초반부 인디아의 발목 근처에서 맴돌던 포식자 거미는 점점 그녀의 신체의 은밀한 부위로 조금씩 그 발걸음을 옮긴다. 물론 거미는 모두가 알다시피 기다림의 아이콘이다. 아주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그물을 펼쳐놓고 목표한 무엇인가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거미는 사실 박찬욱 영화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캐릭터다. (앞으로도 종종 이야기할테지만) 박찬욱의 할리우드에서의 첫 영화 <스토커>에서 우리는 수많은 전작의 그림자들, 그러니까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등의 무늬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영화 <스토커>는 그런 박찬욱의 격자무늬들이 촘촘이 수놓아진 영화이고, 오랫동안 특정의 목적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기다렸던 박찬욱의 인물들이 그 영화에는 있었다. 예를 들어 <올드보이>의 무엇인가를 위해 15년간이나 기다린 우진(유지태), 혹은 오랫동안 기꺼이 음식에 락스를 몰래 탔던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이영애), 아니면 축축하고 어두운 방에서 핏기하나 없는 얼굴로 죽어가고 있었던 <박쥐>의 태주(김옥빈). 그리고 그 인물은 이 영화 <스토커>에서 삼촌 찰리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의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삼촌 찰리가 이 집으로 하필이면 인디아의 생일날 돌아온 이유를 알게 되고, 그동안에 그가 그토록 같은 모양의 끈달린 구두를 보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한다. 물론 한편으로 우리는 이 영화에서 박찬욱의 전작 <올드보이>의 그림자를 다시 한번 발견할 수도 있다. 오대수(최민식)가 15년간이나 사설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던 이유가 있으니까.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오대수가 <올드보이>에서 사태를 정확하게 추론하는데 실패한 이유는 질문을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즉 오대수가 아니, 우리가 계속 신경써야만 했었던 것은 그 빌어먹을 '이유'가 아니라, '15년'이라는 사실이었으며, 그것은 한편으로 어쩌면 이 <스토커>에서도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있을 때 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일단 그 구두에 주목하자. 구두? 그 구두 역시 사실 그렇게 낯설지가 않다. <박쥐>에서 신부 상현(송강호)은 맨발로 거리를 헤매던 태주에게 구두를 신겨주었다. 그리고 그 구두는 <박쥐>에서 태주의 욕망을 깨우는 트리거였다. 그 구두를 신었을 때, 비로소 태주는 그 어둡고 축축한 공간만이 세상을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구두는 결국 그녀를 이상한 욕망의 롤러코스터로 이끌었고, 그 욕망의 롤러코스터는 그녀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결국 상현에 의해 제어되는데, <박쥐>의 마지막에서 바스러지는 발끝에서 툭 떨어지던 그 한 켤레의 구두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영화 <스토커>에는 중간에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는데, 인디아는 그 가득 놓여진 구두를 이제 벗고, 하이힐로 갈아신는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 <스토커>는 구두로 시작해서 구두로 끝났던 그 전작을 넘어서, 하이힐로 갈아신는 진화된 캐릭터를 보여준다. 즉 그녀는 제어되지 않고, 다른 다음의 단계로 넘어갔고, 그것을 '사냥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담을 한 마디 붙여두자면, <스토커>에서 그녀의 공격방식을 떠올려보라. 날카로운 물건으로 푹 찌르는 것. 자, 하이힐을 신은 당신이 적을 만났다. 당신은 어떻게 해야할까.)

인디아의 아버지는 어린 인디아에게 사냥을 가르치면서 말한다. 나쁜 짓을 하게 되어야, 더 나쁜 짓을 안하게 된다고. 물론 이 말을 듣고 일차적으로 관객이 떠올리게 되는 사람은 그녀의 삼촌 찰리지만, 이와 비슷한 말을 하는 박찬욱의 전작의 캐릭터가 하나 있었다. <박쥐>의 신부 상현은 영화 속에서 한가지 딜레마에 빠져 있다. 그것은 그가 신부이면서도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그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피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 그는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사람의 피를 먹고, 자살하려는 사람의 피를 먹고, 심지어는 인터넷으로 사람을 모집한다는 등의 별별 생각을 하지만, 끝내 이 딜레마를 넘어설 수 없었고, 옆에서 폭주하는 태주를 더 두고 볼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끝내 결단을 내렸고, 그 결단이란 마지막 차의 보닛 위에서 태주를 꽉 껴안은 그의 손이었다. 즉 그에게도 역시 나쁜 짓과 더 나쁜 짓이 있었고,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의 피를 먹거나, 자살하려는 사람의 피를 먹는 것은 더 나쁜 짓을 하지 않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나쁜 짓이었다. 물론 그런 상현이 대단한 것은 그가 나쁜 짓으로 더 나쁜 짓을 멈추려던 그녀의 아버지와 달리(한편으로 그녀의 아버지 역시도 이 집안의 한 사람이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나쁜 짓마저 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버리는 선택을 했다는 점이다. 인디아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물론 그는 구두로 끝난 캐릭터가 아니라, 구두에서 하이힐로 진화한 캐릭터이기 때문에 분명히 상현 같지는 않을 것이지만, 또한 분명한 것은 그의 삼촌 찰리와 같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성일의 말대로 본편은 아직 시작도 안했다.)


2. 성큼성큼 걷는 혹은 활보하는

이 영화의 영화적인 가장 큰 특징은 박찬욱 본인과 많은 리뷰들에서 말한 것처럼 교차편집(네이버 주: 교차편집은 서로 대조적인 독립된 장면을 엇갈리게 보여주는 편집 기술을 가리킨다. 글자 그대로 말해, 동시에 혹은 다른 시간대에 발생하고 있는 서로 다른 행위들 사이의 커팅)이다. 물론 그것이 어떤 하나의 기교로서가 아니라 영화의 특징으로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이 영화는 거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셀 수도 없는 교차편집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교차편집이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장면들 사이의 긴장과 서스펜스, 혹은 묘한 조응을 넘어서 대체로 제3의 의미를 관객들에게 상상할 것을 요청하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그것은 영화 속에서 인디아가 두 개의 서로 다른 그림을 빠르게 넘겨보는 것과 비슷하다(혹은 영화 속에서 이야기된 자신이 절대 찍을 수 없는 각도에서 찍힌 자신의 사진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그림이 겹쳐서 아주 빠르게 번갈아 보여지는 순간 그것은 다른 제3의 무엇인가가 된다(원이 그려진 그림과 역삼각형이 그려진 두 장의 그림을 아주 빠르게 번갈아 본다면 우리는 다른 무엇인가, 예를 들어서 역삼각형 위에 원이 있는 콘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영화 속 장면을 예로 들어 보자면, 인디아가 엄마의 머리를 빗겨주는 장면에서 엄마의 머리가 갈대밭으로 바뀌며 사냥하는 장면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머리를 빗겨주는 장면으로 돌아오는 것 같은 부분을 말할 수 있는데, 이 장면에서 머리를 빗겨준다는 장면이 사냥하는 장면과 겹치면서 그것은 단지 머리를 빗기고, 사냥하는 것을 넘어서, 서스펜스와 긴장을 낳는 동시에 다른 어떤 것을 관객에게 묻게 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어느 것이 나쁜 짓이고, 어느 것이 더 나쁜 짓인가,와 같은 질문이 될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 질문은 옳은 질문일 수도 있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오해한 질문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교차편집은 너무 남용되면 관객이 이야기의 전체 구도를 잘 이해할 수 없도록 하거나, 혹은 관객을 쉽게 피로하게 만들 수 있는데, 박찬욱이 좋은 감독인 것은 이와 함께 신의 길이와 카메라의 움직임을 적절히 이용하거나, 혹은 몇 번의 재미있는 트릭을 씀으로서 관객의 이해를 돕고, 피로를 중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찰리와 인디아의 엄마 이블린(니콜 키드만)이 몰래 밤에 처음 밀회를 가지는 장면을 보면 이런 훌륭한 움직임을 잘 볼 수 있는데, 인디아가 문 옆에서 몰래 엿듣다가 밖으로 나가서 창밖에서 몰래 지켜보게 되는 이 장면을 숏의 커팅으로 구성하지 않고, 롱테이크로 가져가면서 카메라를 움직이는 방법을 씀으로써 관객을 새롭게 즐겁게 함과 동시에, 긴장감을 적절하게 구축한다. 또한 반대로 영화의 후반부 이블린과 찰리가 맞서는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캐릭터가 폭발하여 움직이는 이 결정적인 장면을 이번에는 반대로 두 개의 문을 고정하여 놓고 촬영하면서 양 문을 한번씩 여닫는 것으로 각각의 캐릭터만 보여지게 함으로써 그들을 한 번씩 번갈아 주목하게 하면서(아마 연극이라면 양 캐릭터에 한번씩 헤드라이트를 주는 방식을 택했을 것 같다) 동시에 관객을 인디아의 입장에서 번갈아 상상하도록 한다. 즉 이런 간단한 트릭을 통해, 관객은 이 삼각형 구도에서 인디아와 찰리의 관계, 혹은 인디아와 이블린의 관계, 혹은 찰리와 이블린의 관계를 각각의 다른 범주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3. 스토커라는 가문 혹은 줄기

물론 우리는 여기에서 지금까지 한 가지를 오해하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스토커란 stalker가 아닌 영어 철자로는 대문자 S를 가진 Stoker이며, 그것은 영화의 시작부 이 가문의 이름으로 설명이 된다는 점. 즉 인디아는 인디아 스토커이며, 찰리는 찰리 스토커이다. 즉 이들은 Stoker라는 거대한 줄기에서 나온 각각의 열매들이고, 그 속에는 비슷한 피가 흐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 <스토커>는 이 Stoker 가문의 어떤 잔혹한 피의 속성에 대한 일종의 인트로이다. 영화의 마지막부, 인디아는 그 가문을 상징하듯 아버지의 벨트와 어머니의 옷과 이제 그 자신만의 하이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Stoker라는 성을 가지는 유명한 이가 한 사람 더 있다. 1847년 태어나 1897년에 <드라큘라>라는 작품을 써서 유명해진 작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이다. 그리고 물론 박찬욱은 이 저주받은 가문의 이름을 그 작가에게서 가지고 왔다.

사실 그러므로 <스토커>는 또 하나의 뱀파이어 영화이며, <박쥐>의 후속편이다. (다시 여담, 아까 전에 그녀가 공격하는 방식, 그러니까 푹 찌르는 그 방식을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그 부위에 주목하자. 그녀는 마지막 어디를 쏘고 어디를 찌르는가.) 그것은 영화의 설정에서부터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눈을 거의 깜빡이지 않는 찰리나 인디아의 모습이나, 두 캐릭터가 모두 비슷하게 공유하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는 점은 명백한 뱀파이어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한편으로 자신의 힘을 활용할 줄 모르는(혼자 외롭게 자신만의 내면에서 침잠하고,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뱀파이어가 다른 뱀파이어에 의해 자신의 힘을 각성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그러므로 이 마지막은 사실 조금은 상투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뱀파이어 서사에서 한 뱀파이어를 각성하게 해준 다른 뱀파이어는 이제 주인공 뱀파이어에게는 더 이상 그 존재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하나의 피를 놓고 경쟁하여야 한다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그 존재의 무분별한 활동은 자신의 존재를 쉽게 드러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 <스토커>에서도 찰리는 그렇게 현명한 뱀파이어는 못되었고(그러므로 그는 오랜시간 그가 원하는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인디아라면 보다 다른 방식으로 사냥을 실시했을 것이다.


4. 오인(誤認) 혹은 오해

어쩌면 그것에 중요한 무엇인가가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스토커가 Stoker인가, stalker인가, 혹은 괴롭히는 자인가, 사냥꾼인가, 스토커 가문인가, 혹은 뱀파이어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Stoker가 아니라 stalker로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 즉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오해' 혹은 '오인'이라는 점. 다시 말해서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혹은 우리가 했었어야 하는 질문. 그 이유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하필이면 왜 그런 긴 시간이어야 했나,라는 것.

오인은 박찬욱의 영화에서 그렇게 낯선 키워드는 아니다. 박찬욱의 영화에서는 꽤나 흔치 않게 그런 오해들, 오인들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런 오인들은 때로는 그 캐릭터들을, 때로는 그 관객들을 이상한 아이러니나 혹은 (심리적인) 파멸로 이끌고 갔다. 그것은 때로는 한 씬에서 나타나고, 전체 영화를 통해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기억나는 몇 가지의 씬들이 있다. 예를 들어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한 장면. 청각 장애인 류의 누나가 극심한 병의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를 몰래 벽에 붙어서 듣고 있는 옆 방의 남자들은 자위 행위를 한다. 음성 정보의 오인. 아니면 다음의 장면, 허문영이 말한 <박쥐>에서의 오인. <박쥐>에서 태주를 죽인 상현은 라여사(김해숙)의 눈빛을 본 후 그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린다. 시각 정보의 오인. 이러한 오해 혹은 오인은 박찬욱의 영화들에서는 씬에서만이 아니라 전체 영화를 통해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위에서 말한 <올드보이>의 오인 같은 것도 그렇고, <복수는 나의 것>과 같은 경우에서도 동진(송강호)은 류의 여자친구의 말을 단지 허세 혹은 거짓으로 들음으로써 파멸적인 최후를 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시 반복하자면 이미 영화들은 끝났고, 오해는 모두 영화에서 단지 오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실물로, 그러니까 <복수는 나의 것>에서라면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으로 혹은 <올드보이>에서라면 모든 것이 담긴 보라색 상자로 되돌아온다. 즉 여기에서 오해하거나 오인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무엇에 대한 오해인가, 오인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오인이 단지 우연이었는가, 혹은 의도된 오인인가에 대한 질문이라는 점이다. 

<스토커>도 역시 몇 가지의 오인 혹은 오해의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살인이 저질러진 후 인디아가 샤워를 하는 씬이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녀의 어떤 넋이 나간 표정과 이상한 움직임을 보면서 인디아가 어떤 죄책감을 가지거나, 혹은 후회하고 있거나, 혹은 공포에 떨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은 살인의 쾌감에 정신을 못차리는 중이다. 중간에 진 할머니가 살해되는 장면도 일종의 오인의 구성인데, 우리는 교차편집과 맞물려 여기에서 이번에는 범인을 오해한다. (이 오인에 교차편집이 큰 몫을 차지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지적하고 싶다. 즉 이 영화에서의 교차편집은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제3의 다른 의미를 발생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그것을 보는 우리를 오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아니면 (박찬욱의 표현을 빌리자면) 앞과 뒤가 같은 북엔드처럼 동일한 장면이 앞과 뒤에 위치한 서두와 마지막을 보자.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 장면을 볼 때는 영화가 시작할 때 보았던 감정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가지게 된다. 즉 마지막에 이르러 처음의 그 장면은 우리의 단순한 오인이거나, 혹은 매우 정교하게 의도된 오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 단순한 오인, 혹은 정교하게 의도된 오인은 몇 가지 씬에서만이 아니라 영화의 전체 플롯에서도 드러나는데, 우리는 처음에 이 영화의 어떤 주플롯을 오인한다. 즉 우리는 이것을 어머니에게 경쟁의식을 느끼는, 혹은 아버지의 대체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린 소녀의 서사와 묘하게 비슷한 것으로 오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까지 우리에게 어떤 무엇인가를 묻게 만든다. 예를 들어 그것은 자, 그렇다면 이제 인디아는 누구를 사냥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전작과 다른 점은 이 오해가 실물로서 되돌아왔던 전작과 달리 <스토커>에서 이 오해는 아직 어떠한 것으로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해가 어떤 무엇으로 되돌아왔던 전작들, 그러니까 사건이 돌고돌아 자신에게 돌아왔던, 그래서 그 사건을 스스로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던 전작들과는 달리, 이 <스토커>의 사건은 이제 시작이다. <스토커>의 마지막은 닫힌 파멸만이 있었던 전작들과 달리 이제 넓고 먼 세상으로 나서는 소녀에서 여인이 된 캐릭터의 시작이다. 그 오해가 무엇으로 되돌아올지는 이제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상당히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래야만 박찬욱 캐릭터의 다음 진화를 볼 것이다.  
    


- 2013년 3월, CGV 신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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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3.18 2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를 보고나서야 포스터를 제대로 살펴봤어요. 나무넝쿨이라고 지나쳤는데 그 안에 영화, <스토커>를 표현할 수 있는 상징물들이 다 들어가있군요. 마치 죽음과 탄생을 동시에 예고하는듯한 포스터예요.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3.19 23: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메인 포스터보다는 저 포스터가 마음에 들어요. 저 안에 들어간 상징들을 하나하나 떼어서 살펴보는 것도 재밌으리라는 기분이 듭니다만, 너무 그러라고 하는듯 하여 도리어 내키지가 않는군요. (앙탈) 가운데 있는 거 저거는 관인가요?

    •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3.20 16: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관인것 같은데요. ^^ 그런데 피아노때문에 얼핏 하모니카로도 보인다는;;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3.22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게 관이라면, 찰리는 저 속에 들어가있는 게 되겠군요. 어째 이 포스터에서 안 보인다 싶더라니..아닌가?

  2.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3.22 21: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찰리는 포스터 왼쪽 맨윗쪽에 있어요. 제 생각엔관은 아무래도 인디아 아버지의것이 될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3.23 00: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그런가요? 노안이라 침침해서..쿨럭쿨럭;; 아버지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정가운데에 관이 위치하고 있는게 재밌네요.^^

라스트 스탠드, 김지운

Ending Credit | 2013.03.07 17:26 | Posted by 맥거핀.




보안관이 할 일이라고는 길 잃은 고양이를 집에 데려다주는 것이 다인 국경 근처에 위치한 조용한 시골 마을 섬머튼. 그 곳으로 슈퍼카를 타고 국경을 넘어 탈주하려는 마약왕이 그의 군대를 이끌고 온다. 그러나 이 조용한 시골마을에 이들과 대적할 사람들이라곤, 은퇴한 후 조용한 시골마을이 좋아 일부러 이곳을 선택한 이제 다 늙어빠진 보안관과 총조차 제대로 못쏘는 것처럼 보이는 몇 안되는 그의 부하들과 각종 무기를 모으는 것이 취미이나 그 무기를 다룰 수나 있는지 의심스러워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괴짜와 한때 촉망받았던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사고를 치고 유치장에 들어가 있는 청년 뿐. 이들이 이에 맞서서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이쯤되는 이야기라면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야기이다. 프레드 진네만의 <하이 눈>이나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많은 서부극, 혹은 현대의 변형된 서부극들에서 익숙한 구도이고, 익숙한 스토리이다. 그러므로 이 짧은 줄거리가 익숙한 사람들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몇몇 숨겨진 사실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사실은 이 늙어빠진 보안관이 사실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 이 마약왕을 뒤쫓기 위해 애쓰는 FBI가 사실은 별로 이 영화에서 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 혹은 이 마약왕이 이 국경 근처의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어떠한 운명을 맞게 된다는 것 쯤은 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여기에는 소위 B급 무비, 혹은 블랙스플로이테이션 무비 같은 것의 익숙한 클리셰들이 있다. 여기에는 먼저 실패한 자들, 루저들이 벌이는 축제라는 요소가 있다. 즉 예전의 전투에서 부하들을 잃고 낙향한 나이든 보안관과 어떻게든 이 시골마을을 벗어나려 애쓰는, 그러나 그 능력으로 봐서는 이곳을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신참과 좋은 재주를 가졌으나 술과 범죄에 빠져 사랑하는 여자마저 잃어버린 남자와 사회부적응자 밀덕 같은 시골마을의 패잔병들이 모여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적을 상대하여 승리를 쟁취한다. 동시에 그것들은 감각적이고 말초적이다. 즉 근육이 터질듯한 남성들과 매력적인 여성들, 혹은 강인한 여전사 등을 보여줌과 동시에 기꺼이 그 매혹적인 육체들을 파괴시킴으로써 이같은 목적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이런 영화에서 사실 개연성을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예를 들어 이 영화 <라스트 스탠드>에서 나이든 보안관은 그렇다 치고, 변변한 경험이 없어 보이는, 시작부에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허둥대던 보안관의 부하들이 갑자기 왜 총격전은 그렇게 잘 할 수 있는지, 혹은 그 빗발치는 총알들이 왜 그 보안관과 그의 부하들을 그렇게 잘 비껴나가는지, 왜 뜬금없이 시골마을에 그렇게 또다른 슈퍼카가 떡하니 등장하는지 등등의 질문을 캐묻는 것은 그렇게 현명한 질문이 못된다. 그것은 일종의 장르적 전통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뱀파이어 무비에서 뱀파이어가 박쥐로 변할 때 아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박쥐로 변해요,라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 도리어 중요한 문제는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라면 더 중요한 것은 그 총기에 장탄이 몇 발이 되는지, 실제 그 슈퍼카가 그런 방식의 이동액션이 가능한지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동시에 카덕과 밀덕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고 가장 즐거워할 부류 중의 하나를 꼽는다면 그런 카덕과 밀덕들이 아닐까 싶은데,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실제성이 아니라, 무기 혹은 슈퍼카의 실제성이다. 개인적으로도 얼마전 개봉한 영화 <베를린>에 대한 리뷰들 중에서 그 무기와 관련된 문제의 개연성을 지적하는 글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예를 들어 그런 관점에서라면 그 무기들이 과연 요원들이 사용할 만한 무기들인지, 그리고 장탄수를 정확하게 지키고 있는지(화면에 총탄의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 갯수를 꼼꼼이 세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가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것을 감독 김지운은 의식하고 있는지 그것을 노련하게 이용하는데,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는 중간중간 총알이 떨어지거나, 새로 장탄을 하는 장면들이 몇번 의식적으로 등장한다. 또한 본인이 아마도 밀덕이거나 카덕일 듯한 김지운은 물론 이에 대한 안전장치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개조'라는 무기이다. 즉 그 슈퍼카가 그런 속력을 내거나, 특이한 기능을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하다, 혹은 그 무기의 장탄수를 지키지 않았다,고 볼멘소리를 해도, 뭐 한 마디면 끝난다. "개조되었으니까."

물론 김지운이 노련함을 보여주는 것은 그런 부분에서만은 아니다. 서부극과 B급무비의 결합이라는 틀 안에서 그 장르적 규칙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서 별로 야심을 보여주지 않는 것 같은 김지운은 이야기의 뼈대를 단순하게 구성하면서도 그 안에서 능수능란한 리듬을 보여줌으로써 도리어 그의 야심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야기의 전체 구도는 아주 전통적인 구성을 따른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있고, 전초전 격인 처음의 대결에서 아군은 상처를 입지만, 그것은 도리어 아군의 결속력을 다지는 계기가 된다. 더욱 규모가 커진 중간부의 대결에서 아군은 승리를 거두지만, 적의 보스를 놓치는데, 이는 적의 보스와 우리의 영웅 간의 일대일 대결을 위한 익숙한 장치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마을에는 평화가 되돌아온다는 식의 이런 단계적 구성의 뼈대는 익숙하지만, 그 안에서 액션과 그 액션의 휴지기에서 액션을 준비하는 과정의 감정과 유머들을 적절히 뒤섞음으로써 영화는 단지 정해진 액션으로만 질주하는 영화 이상의 것이 된다. 또한 김지운은 단지 이야기의 구성에서뿐만이 아니라 액션의 구성에서도 이런 리듬을 적절히 구사하는데, 예를 들어 마을의 도로에서 이루어지는 총격전이 느슨해질 즈음에 그것을 좁은 계단에서의 총격전으로 바꾸고 다시 긴장감을 부여하는 장면 등에서 그가 상당히 세심한 구성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누군가는 이 영화 <라스트 스탠드>가 별로 김지운의 영화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확실히 이 영화에는 예전 김지운의 영화들에서 보여줬던 이상한 서걱거림들, 혹은 잉여처럼 보였던 이상한 이질감, 이물감들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는 그 어떤 불안감이 없다. 심지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조차 있었던 어떤 부조화, 그러니까 이런 것이 왜 여기에, 하는 그 묘한 불안감은 이 영화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이 영화에서 김지운은 본인이 잘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선을 그어 놓고, 그 잘할 수 있는 것을 확실히 잘 살려서 보여준다. 그것은 예를 들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터득한 체이싱의 노하우 같은 것이다(물론 말 체이싱과 카 체이싱이라는 차이점이 있지만). 그리고 여기에는 여전히 김지운 식의 검은 유머들이 있다. 예를 들어 피와 살이 터지는 순간들, 혹은 아주 심각한 장면들에서도 싱긋 웃을 수 밖에 없는 장면들을 넣음으로써 영화에 적절한 이완과 활력을 부여한다. (이 영화에서라면 영화 속 괴짜가 총격전 중에서도 사람이름을 붙인 자신의 총기를 애지중지하는 장면이라든가 혹은 <달콤한 인생>에서의 총기 구매씬 같은 것.) 아니 어떻게 보면 그 검은 유머가 거의 한 편의 영화 전체로 보여진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보안관 레이로 나오는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한 때 인류의 명운을 걸고 싸웠던 그(<터미네이터>)가 이제 늙고 힘이 빠진 상태에서 한 시골마을에서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무기들을 휘두르며 루저들과 어울려 잘나가는 마약왕과 맞선다는 이 이야기 자체가 바로 그런 것 아닐까.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개인적인 추문과 미국의 총기난사에 대한 불편한 시선 속에서 영화는 비록 흥행에 실패했지만, 이 정도라면 김지운의 할리우드에서의 시작은 꽤 괜찮다고 본다. 물론 그것은 영화가 꽤 괜찮기 때문이다. 스필버그의 초기작 <듀얼>은 별다른 야심 없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달려갔지만 그 영화에서 우리는 그의 스타일을 봄으로써 대가의 시작을 느껴볼 수 있을 뿐더러, 그럼으로써 그 자체로도 오락영화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 되었다. 이 김지운의 <라스트 스탠드>는 마치 그것을 연상시키는데, 그의 스타일도 약간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잘 드러냄으로써 앞으로의 작품을 기대하게 한다. 물론 이 자체가 오락영화로도 일정 수준에 올라있다. 자신의 장기를 효과적으로 잘 드러내는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은 즐겁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아직 보여줄 것이 많은 것 같은 느낌이다.


- 2013년 2월, CGV 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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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박훈정

Ending Credit | 2013.02.28 16:27 | Posted by 맥거핀.




(글에 영화의 결말에 대한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 특히 남자들의 세계를 그린 영화들을 즐겨 보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몇 가지의 참조 목록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유위강, 맥조휘의 <무간도> 시리즈,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 코폴라의 <대부>, 두기봉의 <흑사회>, 그리고 그 외 수많은 누아르 영화들. 감독의 인터뷰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영화는 그런 수많은 영화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으며, 그 몇몇의 설정들과 이야기의 전개 구도, 그리고 씬의 구성에서까지 그 입김들을 드러내 보인다. (<씨네21> 893호 박훈정 인터뷰 "그런 영화들과 비교되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장르영화라면 어차피 그 장르의 이야기틀에서 벗어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틀 안에서 훌륭하게 잘 만들었다는 말을 들어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 영화가 말 그대로 '신세계'인가, 아닌가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즉 그 영화들과 이 <신세계>가 얼마나 비슷한지, 혹은 얼마나 다른지가 아니라, 얼마나 그 세계를 잘 그려내고 있는지, 그 신세계가 얼마나 잘 짜여진 세계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아직까지는 영화감독으로서가 아니라, <악마를 보았다>, <부당거래> 등의 시나리오 작가로서 더 알려진 박훈정 감독은 이 영화 <신세계>에서 예의 그 장기를 잘 펼쳐보인다. 시나리오로서 이 영화가 가지는 몇 가지 강점들이 있다. 먼저 하나는 <부당거래> 등에서도 잘 보여줬듯이 여러 겹의 꼬인 이야기를 상당히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부당거래>나 <신세계>에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은 여러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통상 이런 이야기에서는 둘 중의 하나, 즉 캐릭터나 이야기 중의 하나는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두 영화에서 모두 개별의 캐릭터는 살아 있고, 인물들의 구조화된 관계는 특징적인 씬과 몇 가지 장치들에 의해 훌륭하게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예를 들어 정청(황정민)이 처음 등장하는 씬을 보면, 정청과 이자성(이정재)이라는 캐릭터와 이 두 사람의 역학관계를 동시에 잘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또 하나의 좋은 점은 관객에게 미리 공개를 해야할 패와 숨겨놓아야 할 패를 상당히 영리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 영화에서 관객이 이 전체 구도, 즉 '신세계' 작전의 전모를 깨닫게 되는 것은 영화의 중반부가 한참 지나서이다. 시나리오를 하나의 건물이라고 생각해본다면, 관객은 그 건물 안에서 완전히 길을 잃지 않을 일정 정도의 지도를 확보해야 하지만, 건물안에 총 몇 개의 방이 있고, 몇 층 구조로 되어 있는지 알 필요는 없다. 그것마저 다 알게 된다면 관객은 그 건물에 대한 탐험을 중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점은 감독이 이야기를 조급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보인다는 점이다. 할 이야기가 많은 영화들에서 때로 보이는 악수 중의 하나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초반에 털어내려고 하는 방식이다. 즉 많은 배경과 많은 이야기들을 초반 30-40분 안에 쏟아 부은 후, 나머지 시간들은 그 이야기를 수습하는 데 소모하고, 관객은 그 소모전을 보느라 지쳐간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사건은 단계적으로 드러나고, 인물들의 숨겨진 역학 관계는 하나씩 차근차근 그 패를 드러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느긋함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박훈정 감독이 이 전체 이야기를 영화에서 보여준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미리 구조화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훈정 감독의 말대로라면 이 <신세계>는 전체 이야기에서 중반부에 해당하며, 속편이 제작된다면 아마 이 앞이나 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즉 이 앞에는 이자성이 정청과 손을 잡고, 정청과 이자성이 이 정도 위치에 오르기까지의 나름 파란만장한 이야기(그러니까 여기에 '왜 정청이 끝내 이자성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는가'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가 들어있을 것이다)가 있으며, 이 뒤에는 이자성이라는 새 수장을 맞은 골드문과 경찰의 반격이 있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무간도> 시리즈의 진한 그림자를 볼 수 있다. <무간도> 시리즈 역시 1탄은 중간의 이야기였으며, 2탄은 그 이전, 3탄은 그 이후의 이야기였다.)


좋은 이야기를 했으니, 몇 가지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해야겠다. 먼저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박훈정이 아니라, 감독으로서의 박훈정. 영화의 어떤 촬영스타일이나 편집으로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서도 최근 한국영화들의 어떤 고질병 같은 것이 드러나는 것 같다. 그것은 클로즈업의 남발과 필요 이상의 숏나누기인데, 이 영화에서 클로즈업은 상당히 많으며, 때로는 상당히 익스트림한 클로즈업까지 서슴치 않는다. 물론 이 영화는 액션 영화가 아니라 누아르 영화이고, 이런 누아르 영화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배우의 실제 액션이 아니라, 액션의 전과 후, 그 액션의 전조와 여운을 잡아내는 것이며, 따라서 상당한 클로즈업이 필요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영화의 클로즈업은 필요 이상이라는 인상을 주며, 화면 구도를 계속 답답하게 느끼게 한다. 모든 장면에 방점을 찍으려는 것은 어떠한 장면에도 방점을 찍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그것은 최근 영화들의 특유의 숏나누기와 결합되어 조금 더 관객을 몰아붙이는데, 이 영화도 역시 숏을 잘게 나눔으로써 영화의 리듬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어떤 최근의 착시 경향들에 보조를 맞추는 것 같다. 그러나 리듬이 일종의 강박적이고 기계적인 메트로놈이 되는 순간, 그것은 실제로 리듬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영화의 어떤 이상한 소실점. 영화의 시작부, 이 '신세계' 작전에 대해 영화는 배우의 입을 통해 스스로 점수를 매긴다. 시나리오가 좋군, 한 번 해봐.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으니, 이 작전에 대해 이제 이야기할 수 있다. 시나리오는 좋았고, 작전은 거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마지막에 결국 이 작전은 어떻게 되었는가. 최종적으로 보면 작전은 실패하였고, 그 작전은 실패를 넘어서 그 시나리오를 써내려간 작가, 그러니까 강과장(최민식)을 잡아먹었다. 그것은 어쩌면 시나리오가 너무 잘 짜여졌기 때문이 아닐까. 즉 강과장이나 고국장(주진모)은 그 시나리오의 완벽함에 스스로가 너무 도취된 것은 아닐까. 그런데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 이야기는 단지 '신세계'라는 작전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 영화 자체에 대입해도 그렇게 틀려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거의 완벽하게 짜여져 있지만, 그 완벽한 시나리오가 어딘지 모르게 너무 잘 들어맞는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이야기가 너무 잘 맞아들어 갔을 때 우리는 대체로 이렇게 묻는다. 이거 짜도 너무 짠 거 아냐? 다시 말해서, 이야기에는 하나의 딜레마가 있다. 즉 이야기는 '짠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 짠 것'처럼 보여서는 안된다. 즉 이야기가 최종적으로 성공하는 순간은 그것이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는 순간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우리는 여기에서 '개연성'이라는 하나의 장벽을 만난다. 즉 이야기가 너무 잘 짜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인상을 주는 순간, 그것은 도리어 이야기가 잘 짜여져 있지 않다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너무 잘 짜인 이야기는 실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도 예를 들어 몇 가지의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세부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보다 큰 부분에서도 그렇다. 보다 큰 부분에서의 질문이라면 이러한 것들일텐데, 이중구(박성웅)는 그 자신이 그것이 독배였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음에도 왜 그 독배를 기꺼이 마셨는가. 혹은, 정청은 왜 이자성의 정체를 끝내 밝히지 않았는가. 아니면, 강과장은 자신이 그토록 몰아치면, 이자성이 어떻게 나올지를 정말 몰랐을까. 강과장 정도의 캐릭터라면, 뭔가 어떤 대비책을 만들어 놓았어야 하지 않을까, 같은 질문들. 즉 이 영화는 묘하게도 저건 영화네, 하는 인식을 우리에게 심어주는 때가 있다. 예를 들어 형사들이 몰아닥쳤을 때, 여자의 양수가 터지는 부분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이 시나리오에 감독 자신이 너무 취한 결과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좋은 시나리오는 '신세계' 작전처럼 때로 감독 자신을 잡아먹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많은 참조목록을 가지고 있는 이 영화 <신세계>는 아쉽게도 그 참조목록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양쪽의 일종의 아버지들을 등장시켜, 마치 거대한 두 세계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던 <무간도>를 넘지 못하고(이 <신세계>의 강과장과 이자성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기보다는, 사이 엄청 안좋은 직장선후배처럼 보일 뿐), 인간의 정체성, 악의 기원에 대한 탐구, 어떤 종교성에 대한 질문에서는 <이스턴 프라미스>에 미치지 못하고, <대부>의 묘한 숭고함과 절제미나 <흑사회>의 잔인한 비정함에는 꽤나 모자르다. 그러나 뭐 그렇게 실망할 것도 없다. 위에 든 영화들은 누아르의 대표격인 작품들이고, 거장의 작품들이 아닌가. 박훈정 감독은 이제 고작 이 영화로 두 번째 작품을 만들었을 뿐이고, 나는 영화는 찍으면 찍을수록 크게 나아질 수 있으나, 이야기를 직조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어떤 천부적인 능력이 중요하다고 믿는 편이고,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박훈정 감독의 능력은 어느 정도 검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세계>는 잔재주가 아닌, 이야기의 구조로서 승부하려는 스트레이트한 영화이고, 그 스트레이트한 주먹의 상당 부분은 아직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웃음기 없이 이만한 크기로 직선으로 밀어붙이는 한국 누아르 영화는 적어도 최근에는 없었다. (감독 말대로 이 영화들이 같이 언급된 자체가 영광이 아닐까?) 감독의 다음 펀치를 기대한다.




- 2013년 2월, CGV 명동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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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본 영화들

Ending Credit | 2013.02.20 17:28 | Posted by 맥거핀.
 
(<또 다른 길>,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 <1999, 면회>에 대한 약간의 스포 있음)


최근에 본 영화들에 대한 리뷰라기보다는 수다성 잡담 혹은 잡담성 수다.


또 다른 길, 카롤리 마크, 야노스 크산투스, 1982

1957년, 실질적으로 소련의 지배를 받는 공산국가였던 헝가리를 배경으로 오직 자유를 꿈꿨던 한 레즈비언 기자의 이야기를 그린 카롤리 마크와 야노스 크산투스가 만든 헝가리 영화 <또 다른 길>은 두 가지의 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에바와 그 에바에게 이끌린 리비아의 사랑 이야기라는 감성적인 축,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각종 검열과 거짓과 프로파간다와 억압이 존재하던 당시 헝가리의 분위기와 특히 언론인들의 진실된 보도를 향한 갈망이라는 이성적인 축. 헝가리 국민들은 스탈린의 충실한 개였던 지도자 라코시를 1956년의 봉기로 끌어내고, 잠깐 '부다페스트의 봄'을 맞이하였으나, 그해 11월 소련 지도부는 부다페스트로 전차를 진격시켰고, 새로 지도자가 된 임레 너지는 소련에 반기를 든 대가로 처형당했다. 그러므로 그런 1957년의 헝가리에서 자유로운 보도를 갈망하는 레즈비언 기자인 에바는 영화 속의 표현대로 허리 위에서나 허리 아래에서나 일종의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였고, 그러므로 이 영화 속에서 이런 감성과 이성의 문제는 여기자 에바의 안에서 하나로 통합된다. 

이것을 일종의 정치적인 멜로라는 하나의 비유로서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이 에바라는 자유로운 영혼의 바이러스는, 아무 것도 모른 상태에서 군인 남편과 함께 이것이 당연한 삶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던 리비아, 그러니까 군부를 등에 업은 독재의 억압 속에서 살아가던 일반 국민들에게 침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에바와 함께 도피를 꿈꾸던 리비아는 결국 그 군인의 총탄을 받고 살아있으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며, 이것은 다시 소련의 전차의 침공을 받은 헝가리의 상태를 하나의 비유로서 보여준다. 즉 헝가리의 국민들, 더 나아가 이 헝가리라는 하나의 나라는 존재하고 있으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련의 지배를 받는 일종의 괴뢰 국가와 마찬가지였던 대외적인 상태로서도 그렇고, 대내적으로도 당시의 사람들은 겉으로는 자유롭게 존재했으나 속으로는 철저하게 자유가 억압된 상태였다. 그것을 영화 속 에바와 리비아가 취재하게 되는 협동농장의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자발적인 농민들의 참여로 이루어졌다고 선전된 협동 농장이 강요와 억압 속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그들은 취재하면서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듯이, 공산주의 사회는 혁명으로 시작하였지만, 그 혁명은 구호로서만 존재하였고, 혁명의 실질적인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상 금기되었다. 그러므로 그 혁명의 바이러스를 잔뜩 담고 있던 에바는 당연히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어냈던 많은 혁명가들이 그 공산주의 사회에 의해 제거된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속에서 두 가지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영화 속 후배 기자들의 갈망과 상부의 억압 속에서 고뇌하는 늙은 편집장과 관련된 일화. 이 편집장은 오래전 어떤 이유로, 아마도 뭔가 정부에 밉보일만한 기사들을 썼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사형 직전에 사형선고는 취소되었고, 그 사형집행인이 지금까지 이 모든 것이 농담이었다고, 죽는 것보다는 농담이 낫잖소?,라고 말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공산주의 사회의 어떤 비인간성, 즉 아마 혹 그대로 죽었어도 그것은 그대로 농담으로만 치부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 다른 하나는 진실된 기사를 쓰지 말라고, 그 내용을 듣기 좋은 다른 이야기로 바꾸어 실으라고 억압하는 상부의 사람에게 그 편집장이 들려주는 이야기. 한 소년이 사소한 버릇을 고치기 위해 병원에 갔다. 의사는 최면 요법을 통해 그 소년을 치료했고,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그 버릇은 놀랍게도 사라졌다. 그러나 몇 달 후, 그 버릇은 사라졌지만 그 소년에게는 다른 증상이 생겼다. 바로 시도때도 없이 심한 경련을 하는 증상이. 그것은 비단 1957년의 헝가리의 경우만일까. (서울아트시네마)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 존 무어, 2013

쇠락해가는 시리즈를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 전작들에게 엿을 먹이는 것을 보는 일이다. 이 마지막 작품(그렇다, 나는 이것이 마지막이리라고 확신한다. 이것이 조금 나았더라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이 상태로는 후사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운명이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강약, 중강약을 구사하던 전작들의 액션 리듬은 사라졌고(영화의 구조로서 가장 이상해보이는 점은 그나마 가장 매력적이고, 거대한 액션을 영화의 초반부에 배치해놓고, 뒤에는 심심한 잔재주들로 채운다는 부분), 매력적인 악인들은 자취를 감췄다. 아니, 알아서 자취를 감춰주신다.  존 맥클레인의 부루퉁한 유머는 약간은 살아있으나, 이제 그는 땀과 피에 절은 러닝셔츠를 입고 뛰기는 힘들어 보이고, 뜀박질은 그 대신 그의 차와 헬리콥터, 혹은 그의 아들이 대신해준다.

가장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이 영화가 존 맥클레인의 캐릭터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4탄에서 맥클레인은 왜 이렇게 거대한 적에 맞서는지 그냥 도망가자는 제안에 대답한다. 이거는 귀찮고, 힘들고, 한 마디로 할 거 못되는 짜증나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되는 거라고. 그게 바로 NYPD 존 맥클레인의 매력이었다. 아이, 정말 하기 싫어 죽겠네,가 얼굴에 가득 쓰여져 있지만(그는 항상 술이 약간 덜 깬듯한 얼굴이다), 그래도 그거 안하면 많은 사람이 죽으니까,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살려야 하니까 해야한다는 뭐 그런 닭살돋는 거.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 이 <다이하드> 시리즈의 매력이기도 했다. 아니 고작 너 따위가 내 적수가 되냐는 식의 악당들의 태도, 그리고 그에 맞서는 마누라에게 구박당하고, 상관에게 욕먹는 존 맥클레인, 그리고 그 옆에서 같이 뛰고, 때로는 권총 한 자루로 맞서는 다른 경찰들. (좀 다른 얘기지만, 드라마 <24>에서 가장 슬펐던 장면 중의 하나는 잭을 도와주던 스쳐 지나가던 어떤 여경찰의 죽음이었다.) 그래서 존 맥클레인은 그래도 그나마 최대한 시민의 피해를 줄이려 한다. 그것이 경찰의 임무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존 맥클레인은 3탄에서 어쩌다가 같이 임무에 뛰어든 제우스(사무엘 잭슨)가 공중전화를 오래 쓰는 여자에게 강제로 전화를 끊게 하자, 그에게 화를 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부루퉁한 뉴욕경찰 존 맥클레인의 예의있는 매력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맥클레인 씨, 이번에는 안면 하나 없는 러시아로 날아가고, 그 덕분에 이제 그는 뉴욕경찰이 아니라 자식새끼 건사하려 애쓰는 휴가나온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아들의 말마따나 잘 돌아갈 수 있는 작전을 이상하게 망가뜨리는 민폐 캐릭터로 전락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달아나는 나쁜놈을 쫓기 위해 시민의 차를 빼앗으면서 그 시민에게 주먹질을 날리는 존 맥클레인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영화 속에서 볼 만한 순간들은 존 맥클레인이 나는 단지 휴가왔을 뿐이라며 징징댈 때와 루시 맥클레인이 특별출연할 때 뿐. 나는 루시 맥클레인으로 나오는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이 배우 좋아한다우.

아무튼 맥클레인 씨, 지금까지 수고하셨고, 이제 그만 세 가족 함께 휴가 즐기세요. (CGV 대학로)


1999, 면회, 김태곤, 2013

그러니까 1999년에 두 친구가 한 친구의 군대 면회를 가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1999년이라는 시간과 '면회'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그 독특한 공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마 재수를 하고 있는 친구가 수능을 보았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아마도 98학번 세대이고, 이때는 1999년 초인 듯하다. 이들과 매우 가까이에서 대학을 다닌 내 입장에서 당시 대학에 다녔던, 혹은 대학을 준비했던 젊은이들을 생각해 볼 때, 1997년은 전년의 통칭 '연대사태'와 한총련 이적단체 규정으로 지도부 구속 및 잠적 등으로 이념이 위태로운 시기였고, 1998년은 1997년말 벌어진 소위 'IMF 사태'로 경제가 위태로운 시기였으며, 1999년은 9라는 숫자가 꽉찬, 그야말로 한 세기가 끝나는 혼돈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한 세기가 위태로운 시기였다. 우리는 그 이전에는 술자리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공동의 적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으나, 1998년 이후로는 모두들 1차를 '간단히' 처리한 후 컴퓨터 앞으로 자리를 옮겨 개별의 가상의 적을 맞이하였다. 모두들 2차를 가자고 할 용기는 없었고, 용기는 각자의 PC방 값과 집에 돌아갈 차비만큼만 주머니 속에 남아있었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오래된 적들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고, IMF라는 경제적 적은 뉴스에만 존재할 뿐 어디에서도 그 실체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테란이니, 저그니 하는 가상의 적들을 만들어 전쟁에 몰두했는지도 모르겠다. 

공간은 어떨까. 영화 속에서도 묘사되는 군인이 외박을 나와서 맞이하는 군대 주변의 공간들(위수 지역이 있으므로 먼 곳으로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으니)은 참으로 이상해 보인다. 그곳은 군대의 울타리 밖에 있는 공간이지만, 이상하게도 군대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 곳에서는 백골부대 마크가 선명히 붙어있는 식당에서 고기를 먹을 수도 있고, '오바로크'를 칠 수도 있으며, 여전히 선임에게 조인트를 까일 수도 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군인들이 먹여살리는 그곳은 군대가 아님을 애써 항변하고 있지만(예를 들어 '서울다방' 혹은 '부산마트'라는 그 곳의 미스테리한 명칭의 간판들을 보라), 마치 군대의 거대한 일부처럼 보이고, 때로는 강원도 전체가 군대의 거대한 주둔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군대에 간 친구를 만나기 위해 향하는 두 (남자) 친구의 여정은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구멍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부 미국영화에서 보이는 중서부의 드넓은 평원이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거대한 그물처럼 보일 때처럼 말이다. 하룻밤의 여정을 다루는 이 <1999, 면회>는 그러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여정이 계속되는, 낯선 마을에서 일이 점점 꼬여가는 것처럼 보였던 <유턴>과 같은 영화처럼 이야기가 이어진다. 두 친구는 친구를 전기가 통하지 않는 철조망안에 되돌려놓고 무사히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까?

결국 세 친구는 그 곳에서 자의든 타의든 한 가지씩을 잃어버린다. 대학생 친구는 동정을 잃었고, 재수생 친구는 카메라를 잃었고, 군인 친구는 사랑을 잃었다. 그 때는 그렇게 무엇인가를 잃어야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아니, 이건 허세고, 무엇인가를 잃어야 조금이라도 덜 찌질해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때로는 억지로 잃었고, 때로는 기꺼이 버렸다. 그리고 그대신 기꺼이 우정을 얻었다, 라고 쓰고도 싶지만, 대신 그들은 그 이후에 이상한 것들을 얻었다. 그 이상한 것들을 얻게된 2013년의 남자들은 이제 떼를 쓴다. 차라리 찌질한 자신으로 되돌아 갈 수 없을까, 이 이상한 것들을 버릴테니, 제발 찌질한 자신으로 되돌려달라고 애타게 울부짖는다. 그것이 어쩌면 <건축학개론>이나 <응답하라 1997>, 혹은 <1999, 면회> 등에 남아있는 밑바닥의 정서가 아닐까. 예를 들어 실제의 적이 보이지 않으니 가상의 적을 만들어 그들과의 싸움을 했었던 찌질한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 지금은 그런 찌질함마저 없어져버렸으니까, 찌질한 자는 콩알만큼이라도 염치가 있으니 찌질해지는 것이니까. 적어도 몰염치, 혹은 파렴치하지는 않으니까.  

영화적으로 볼 때는 너무 도식적인, 있음직한 사건의 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이 영화를 리얼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경험에서 비추어진 리얼함인지, 혹은 들은 리얼함, 만들어진 리얼함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는 우리가 그것이 리얼한 것이기를 바라는 그런 종류의 리얼함이 아닐까.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내가 불일치할 때,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조작함으로써 맞춰나갈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 조작되지 않은 과거의 나의 어떤 부분을 절실하게 끄집어내는 순간, 그것은 현재의 나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가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안타깝게도 상당히 어려워보인다. (CGV 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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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류승완

Ending Credit | 2013.02.06 15:43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약간 들어 있습니다.)


액션 영화는 다른 무엇보다도 액션이 좋아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이 액션'만' 좋아도 된다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액션 영화는 액션 영화이기 이전에 영화이기 때문이다. 즉 이 액션들은 액션이기는 하되 이야기로 이어지는 액션이어야만 하고, 2시간 동안 그것을 앉아서 볼 동력을 제공해주는 액션이어야 한다. 단절적인 액션만이 중요한 것이라면 굳이 그것을 2시간이라는 긴 시간으로 묶어서 영화로 볼 이유가 있는가. 상당수의 평들에서 지적하듯이 영화 <베를린>이 아쉬움을 주는 부분은 액션이 아니라, 액션 이외의 나머지 부분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많은 평들에서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전달하는 북한 리학수 대사(이경영)의 대사가 잘 안들렸다, 발음이 좋지 않았다, 사투리를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등등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 발음이나 사투리가 아니라, 그것을 굳이 설명하는 이야기로 풀어내려고 한다는 점이다. 설명을 특정전략으로 구사한다면 모를까, 대체로 이야기의 이러한 기본 구조를 한 인물의 대사로 풀어낸다는 것은 감독이 그것을 효과적으로 잘 드러낼 자신이 없거나(즉 이야기가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후적 처치이자 고백이거나), 혹은 사실은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다는 뜻이고, 류승완의 선택은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는데, 왜 이렇게 이야기를 복잡한 것처럼 보이려 할까. 그게 아니라면 이야기를 잘 풀어내려 했지만, 그것에 실패한 것일까.

도리어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복잡한 것처럼 꾸며낼 이유가 있을까. 좋은 액션 영화에서 이야기는 도리어 상당히 간결하다. 이 영화와 자주 비교되는 '본 씨리즈'의 핵심도 사실은 간단한, 그러니까 기억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본 요원이 자신의 정체성을, 그러니까 아이덴티티를 찾아나가는 이야기이다. 그 주 플롯은 영화의 처음부터 관객들에게 제시되며, 세부적인 다른 플롯은 본 요원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익스큐즈'된다. 즉 (영리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도, 이유도 없고 처음부터 관객은 본 요원과 마찬가지로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보게 된다. 이 영화 <베를린>의 주 플롯은 뭘까. 처음에 얽혀 있는 여러 개의 플롯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 남는 플롯은, 그러니까 일종의 주 플롯은 북한 내부의 권력 암투와 그것이 주독 북한 대사관의 요원들의 시효 만료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 플롯은 영화의 중반부까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통상 액션 영화가 아니라 미스터리나 스릴러 영화가 쓰는 전략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이 영화 <베를린>은 액션을 보여주고자 하는 영화 같은데, 이상하게도 미스터리나 스릴러 영화인 척 한다. 물론 그럼으로써 어떤 이야기에서 얻게 되는 쾌감을 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얻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잃는 것은 캐릭터를 구체화할 시간이다. 영화의 중반부 북한 요원 표종성(하정우)과 남한 요원 정진수(한석규)는 서로에게 묻는다. 도대체 니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이 일에 매달리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문제는 그게 서로 모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마저도 잘 모르게 된다는 데에 있다. 즉 이야기를 설명하느라 영화의 시간을 소비함으로써 캐릭터를 구축할 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따라서 그럴 수록 캐릭터는 평면화된다. 한석규나 하정우가 좋은 배우들이고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것 같기는 하나, 그들에게 자주 어떤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영화에서 캐릭터를 관객 안에 구축시킬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다보니 관객은 그 캐릭터를 자기 스스로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그들에게서 비슷한 과거의 캐릭터들을, 그러니까 한석규에게는 <쉬리>의 요원이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형사, 하정우에게는 <황해>의 조선족 남자 등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한편으로 그 '중요하게 보이려는' 액션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액션 영화에서 액션의 합 못지 않게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그 액션을 행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즉 '어떻게' 액션을 하는가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누가' 액션을 하는가이며 그 '누가'라는 캐릭터는 액션의 형태와 관객의 쾌감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에게 바라는 액션과 <스카이 폴>의 '제임스 본드'에게 바라는 액션은 다르며, 그것은 그동안 충분히 구축된 캐릭터의 힘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복잡한 것처럼 꾸며낼 이유가 있을까.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감독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야기보다는 액션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 영화에 내내 비장하게 깔리는 배경음악으로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이 비장한 배경음악은 유독 액션씬이 등장할 때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감독은 우리에게 이 액션씬을 비장한 어떤 것으로, 예를 들어 오우삼 영화 속의 어떤 비장함처럼 보아주길 바라는 중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캐릭터들이, 즉 성냥개비를 잘근잘근 씹는 그 쌍권총의 사나이들이 없으니 어쩌나. 즉 이상하게도 이 비장한 음악이 깔리는 액션씬들은 영화의 이야기들과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애써 설명하려던 이야기들은 이것이 사실 그저 소모품 버리기임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사실적으로' 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액션씬에서 이것은 갑자기 비장한 생존투쟁이 된다. 지금까지 이 생존투쟁이 비장한 것이 아니었음을 애써 설명한 다음, 다시 그것이 비장하게 등장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차피 많은 액션 영화에서 이야기는 브릿지에 불과한 것이고, 그것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이면 된다. 그러므로 이 필요 이상의 많은 이야기가 붙은 이 이야기에서 남는 것은 잉여적인 몇 가지의 질문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스파이 첩보 영화일까, 아닐까. 그렇다면 굳이 베를린이라는 분단의 상징과 같은 도시를 배경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없을까. 아니 어쩌면 (사실은 아니지만) 남북한이 얽힌 복잡한 스파이 영화인 척 하는 것, 바로 이것에 정성일의 말대로 무의식적인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일까. 


 - 2013년 2월, 메가박스 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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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소년, 강이관

Ending Credit | 2013.02.01 17:04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강이관의 <범죄소년>은 영화적 화면 구성의 측면에서 흥미로운데, 그것은 영화의 내내 인물의 곁에 카메라가 바싹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즉 <범죄소년>은 다른 어느 샷보다도 인물의 어깨나 가슴께에서 머리끝까지를 찍는 미디엄 클로즈업샷으로 주로 영화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것은 영화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거의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미디엄 클로즈업샷은 통상 인물의 얼굴을 드러내며 그 인물의 표정과 감정을 관객이 읽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는데, 일반적인 클로즈업샷과 다른 점은 인물의 얼굴을 타이트하게 당겨서 찍는, 그럼으로써 인물의 아주 미세한 감정을 잡아내는 클로즈업샷과 달리 인물의 신체 언어가 가지는 의미를 드러내게 해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강이관의 <범죄소년>은 인물들의 눈빛을 주의깊게 보되, 그 눈빛만이 아니라, 그들의 신체가 이야기하는 것, 그러니까 그들의 어깨도 보아줄 것을 요구하는 영화다. 미디엄 클로즈업샷으로 이루어지는 영화에서 인물들은 종종 어깨로 말을 한다. 그러니까 그들의 말이, 그들의 표정이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아도 종종 어깨는 미세하게 움직이며, 우리가 그 미세한 움직임을 보아줄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범죄소년 장지구(서영주)의 어린엄마 효승(이정현)이 노래방에서 업주에게 모욕을 받으면서도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양을 떨며 "언니~"라고 부르기 전의 미세한 어깨의 멈칫거림 같은 것 말이다. 우리는 그 미세한 멈칫거림 앞에서 그녀에게 이런 일이 수없이 반복되었음을, 그래서 그녀가 왜 아양을 떠는 목소리를 꾸며내야 하는지 대략 짐작한다.


왜냐하면 수많은 '범죄소년'들의 표정을 우리는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부 인물에게 바싹 달라붙어 그들의 눈빛을 보여주는 카메라에서 우리는 그들의 무엇인가를 읽어내고 싶어한다. 그들은 왜 범죄를 저지르는가? 그리고 범죄로 처벌을 받았음에도 왜 다시 범죄를 반복하는가? 우리는 혹시라도 그들의 눈빛에 어떤 답이 들어있지 않은가 해서 그들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들의 눈에서 무엇인가를, 그러니까 반성하는 눈빛이라든가, 사회와 어른들에 대한 경멸이라든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라든가, 아무튼 무엇인가를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의 표정을 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범죄소년들은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범죄소년이 되고, 범죄소년이 되었기 때문에 사회에서 내몰리고, 또 내몰렸기 때문에 다시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어깨라도 보여줄 수밖에. 범죄자라는 낙인을 받은 채, 움츠러들어 있는 그들의 어깨, 그리고 그 어깨가 다른 범죄에 빠져들기 전에 아주 잠깐 멈칫거리지만, 다시 새로운 범죄로 나아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물론 미디엄 클로즈업샷이 클로즈업샷, 익스트림 클로즈업샷과 갈라지는 지점은 이 미디엄 클로즈업샷은 인물의 배경마저도 동시에 어느정도 담는다는 점이다. 즉 한편으로 미디엄 클로즈업샷은 일반적인 클로즈업과 다르게 배경을 담으며, 동시에 그럼으로써 보는 우리와 인물과의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즉 우리는 범죄소년과 약간의 거리가 있는 상태에서 그들 자신만이 아니라, 그들의 주위도 함께 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 범죄소년들은 그 배경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으며, 모든 문제를 그들의 어떤 개인적인 문제로 놓을 수 없고,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사회의 책임으로 돌릴 수도 없다. (어려운 위치에 처했어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수많은 소년이 있다.) 아무튼 개인적 문제이건, 사회적 문제이건 간에 범죄를 저지르면 그들은 사회와 분리되어 갇히지만, 다시 언젠가는 사회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는 그들을 맞이할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혹 그들이 사회와 격리된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변했더라도, 그들이 다시 돌아가는 사회는 예전과 그대로인 채로, 즉 예를 들어 범죄소년들에 신경쓰지 않는 어머니도 그대로이고, 범죄소년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도 그대로인 그런 상태, 아니 이제 그것을 넘어서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소년원에 다녀온 자식을 외면하고, 예전에 그를 알던 모든 사람이 이제 그를 멀리하는 그런 상태의 한가운데로 되돌려진다는 점이다. 그런 상태로 돌아간 범죄소년들이 어떻게 되는가, 이 영화 <범죄소년>은 그 메커니즘을 일종의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영화다.

통시적 관점이라는 것은, 결국 이 영화에서 장지구의 엄마 효승의 현재 모습은 장지구의 여자친구 새롬의 미래 버전 중의 하나로서 그려지기 때문이다. 즉 장지구의 아이를 가진 채 가족과 학교에서 모두 떨려나가는 새롬은 효승의 과거의 반복이며, 효승의 현재 모습은 우리가 그릴 수 있는 새롬의 미래의 여러 모습 중의 하나이다. 즉 강이관은 여기에서 묻고 있는 것이다. 범죄소년이 대를 이어 재생산되기까지, 즉 범죄소년이 또다른 범죄소년을 만들어내기까지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 그런데 보다 문제는 이것이 그리 나쁜 케이스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이 영화에는 그럴듯한 악인을 별로 찾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중간에 효승과 같이 사는 효승의 후배나 효승이 만나는 여관의 주인이나 식당의 여주인 같은 사람들을 보면, 일견 야멸차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결코 나쁜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아니 임시로나마 효승과 지구에게 살 거처를 제공하고, 여관비를 깎아주는 모습 등을 보면 도리어 큰 호의를 베풀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문제는 개인적 호의라는 것이 한계가 있고, 오로지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개인적 호의나 범죄밖에 없도록 이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며, 그 구조는 상당히 단단해 보인다는 점이다.

그것이 아마 이 영화가 이렇게 툭 잘라내는듯이 끝나는, 아주 불안하고 미세한 희망을, 희망이라고 부르는 것이 미안할 정도인 그런 것을 애써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며 끝나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물의 눈을 들여다 볼 것을 주문하되, 그 눈에서 아무 것도 읽을 수 없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그 인물의 눈에서 어떤 미세한 반성이라도 읽어낸다면, 우리는 혹시 그것을 조금은 오해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범죄를 오로지 개인의 악의 산물로서 읽어내는 오류같은 것 말이다. 저 눈을 보니 틀려먹었어, 그들은 또 범죄를 저지를거야, 혹은 반성하는 것을 보니 앞으로 잘 살게 될 것 같군, 이라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희망 같은 것. 그러나 그런 희망이란 없다. 우리는 어떠한 희망도 제공되지 않은 이 이야기에, 이 불안한 결말에 스스로 이야기를 붙여나가는 수밖에 없다. 영화에 어떠한 추가적인 희망도, 혹은 절망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이라는 틀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추가적인 이야기가 좋아지려면 우리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든 변화시켜 나갈 도리밖에 없다.


덧.
강이관은 좋은 감독이다. 보통의 감독은 하나의 씬에서 한가지를 전달하는 감독이다. (물론 이런 보통의 감독도 그렇게 널려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어떤 씬은 인물의 캐릭터를 잘 설명하거나, 혹은 인물들 간의 관계를 잘 그려내 보여줄 수 있다. 좋은 감독은 하나의 씬에서 두 가지를 전달한다. (물론 아주 좋은, 그러니까 위대한 감독들도 있다. 그런 감독들은 하나의 씬에서 서너가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밀어넣는다. 그러나 대체로 그 서너가지가 무엇인가가 생각할 틈이 없다. 왜냐하면 그 장면은 동시에 너무 아름다워서 가끔은 숨을 못쉬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씬이 인물의 캐릭터와 인물들 간의 관계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잡아내고 있다면 그 장면은 좋은 장면이고, 그러한 것을 만들어낼 줄 아는 감독은 좋은 감독이다.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처음에 지구가 보호관찰 전화를 받는 장면을 보면, 보호관찰이라는 것의 어떤 서늘한 방식, 그것의 기계화되고 무책임한 구조를 보여주면서도, 할아버지의 병든 숨소리를 넣고, 그 병든 숨소리를 무심히 보는 지구를 보여줌으로써 그 캐릭터를 구체화시켜 나가고 있다. 즉 적어도 관객은 이 장면에서 지구가 보호관찰을 받고 있기는 하나 아주 나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미용실에서 효승이 효승의 후배의 지시를 받는 짧은 씬에서도 이것이 드러나는데 효승이 후배에게 대하는 비굴한 뉘앙스를 효과적으로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관계가 어떤지도 잘 드러내면서 효승이라는 캐릭터의 위치나 성격 역시도 잘 표현하고 있다. 즉 효승은 지금까지 저런 것을 얼마나 반복해왔을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견뎌내야 하나,라고 관객에게 익히 짐작하게 한다. 그런 좋은 감독이 만들어낸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그렇게 생각한다.



- 2013년 1월, 시네마테크 KO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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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모스타파 파루키

Ending Credit | 2013.01.15 15:49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과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한 시골마을. 촌장의 절대권력이 작용하는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일은 급기야 매스컴의 주목까지 받게 된다. 그 이상한 일이란, 이곳은 모든 이미지가 금지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 이슬람 율법의 철저한 신봉자인 촌장은 영혼이 없는 것을 보고 그것을 우상화하여 따르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일체의 영혼없는 이미지를 금지시킨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영혼없는 이미지는 도처에 널려있다. 그곳에서는 반입되는 신문의 모든 사진은 하얀 종이로 가려지고, 텔레비전 시청은 금지되며, 사진찍기는 금기시되고, 컴퓨터, 노트북과 얼굴책('페이스북'을 촌장은 그렇게 부른다)은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휴대폰 역시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미지는 도처에 널려있고, 그것의 공습을 물리적으로 막는 것, 그리고 또한 정신적으로 막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당연히 어떤 소동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영화는 그런 소동을 유쾌한 터치로 다룬다. 물론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이것을 이미지로 보고 있다는 것. 즉 영화라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이미지로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영혼없는 이미지에 기꺼이 영혼을 내맡긴 가련한 상태에서 이 영혼의 수호를 위한 어떤 예정된 패배의 사투를 보고 있는 것.

물론 이것 중에 가장 핵심에 놓여진 것은 영화의 제목으로도 제시된 '텔레비전'이다. 이 영혼없는 이미지들의 총체인 텔레비전의 공습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어서, 이슬람교가 아닌 힌두교 신자라서 어쩔 수 없이 허용해준 바부 선생의 텔레비전에 곧 온마을 사람들이 그 영혼을 기꺼이 가져다 바친다. 바부 선생의 집에는 온마을 사람들이 몰려들며, 마을의 어린아이들은 수학 선생인 그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다른 수학선생님들이 실력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의 집에 수학 과외를 받으러 간다. 촌장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이를 막기 위해 텔레비전을 강물에 내던지지만, 텔레비전의 위력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급기야 일종의 혁명이 일어나는 등 소동은 끊이지 않는다. 모스타파 파루키의 영화 <텔레비전>은 이 소동극을 유쾌한 유머와 풍자를 섞어 결코 무겁지 않게 다루고 있는데,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눈앞에 드러나는 사건들 이외에도 이 소동들이 어떤 이미지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로서, 혹은 그런 이미지들의 마치 일종의 작동방식인 것처럼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텔레비전은 세상의 재현 혹은 어떤 시뮬라크르의 총체이다. 그것은 어떤 기술(技術)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하고, 동시에 기술(記述)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즉 촌장의 말대로 현재 TV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미지는 당연히 그 인물 자신이 아니고, 그 인물의 어떤 기술(技術)적인 모사물이다. 동시에 TV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재현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영화 같은 것에서 이루어지는 재현에서 그 인물은 기술(記述)되는 그 인물이 아니다. 즉 <텔레비전>에서 '촌장'역을 연기한 그 배우는 그 촌장이라는 가상의 혹은 실제의 인물을 모사하고 있는 것이지, 그 인물 자신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도 촌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텔레비전을 대체할 만한 오락거리로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낸 마을의 일종의 극장 - 이것의 무대는 실제의 텔레비전처럼 만들어져 있다 - 에서 이것을 지적해낸다. 즉 역사극에서 역사속 인물을 재현하는 것은 결국 결과적으로 영혼이 없는 이미지를 보는 것과 다를바가 없으며 엄격한 관점에서는 이것 역시 허용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텔레비전은, 특히 마을 사람들이 환장하는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영화는, 이중의 기술적인 시뮬라크르라는 기술(奇術)이다.
 
이 영화가 독특해지는 지점은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촌장이 성지순례를 가기 위해 여권이 필요하므로 어쩔 수 없이 사진을 찍어야할 때 그 곤경을 극복하는 기발한 방식 같은 것 말이다. 촌장과 그의 수하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촌장의 쌍둥이형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개발해낸다. 즉 촌장이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촌장의 쌍둥이형이 사진을 찍는다는 발상의 전환을 꾀하는 것. 이것은 이중의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영화와 사실 그다지 차이가 없다. 아니면 촌장의 아들이 연애를 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재미있는 것은 이 연애에도 이중의 기술이 만들어내는 실제와 실제의 모사물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기술(技術)적인 것이 두 사람이 몰래 숨겨둔 휴대폰으로 통화하며 그 목소리만으로 가상의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이라면, 기술(記述)적인 것은 여기에도 두 명의 인물, 즉 촌장의 아들과 그 아들의 수하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즉 실제 연애를 하는 것은 촌장의 아들이지만, 이 연애를 작동시키는 것, 즉 두 사람을 노트북 화상채팅을 통해 몰래만나게 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촌장아들의 매우 코믹하게 등장하는 수하의 몫이다. 이 연애에서 촌장아들의 수하는 촌장아들의 거의 모든 연애를 대신해주며, 심지어는 그가 실연했을 때 그 실연의 아픔까지도 대신해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수하가 실제로 그 촌장아들의 연애 상대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촌장아들이라는 원본과 촌장아들의 수하라는 시뮬라크르는 동일한 대상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적어도 여기에서는 원본과 복제물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감독은 이를 조금 더 넓은 차원으로 확장한다. 이 소동극을 마치 어떤 극중의 극처럼 보이게 하는 것. 이 영화는 몇 가지 재미있는 장면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바부 선생의 학생이 불어나는 장면을 음성과 시각으로 연결하는 것이나, 휴대폰 음성만으로 이미지를 상상할 때 카메라를 360도 회전시키면서 실제의 이미지로 변하게 하는 등의 장면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특정의 장면 외에도 영화는 유독 인물들을 어떤 창이나 틀 안에 배치시키는 것을 자주 활용함으로써 마치 이것이 어떤 극중의 극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즉 이 영화 <텔레비전>의 이 소동이 일어나는 폐쇄된 마을에서 이 마을사람들은 진심을 다하여 소동극을 '연기'하고 있으며, 그것은 이 이중의 기술이 만들어내는 시뮬라크르가 결국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즉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자신이 원본인지, 복제물인지 모른채, 때로는 진심을 다하여 일상을 '연기'하고 있으며, 그 시뮬라시옹은 때로는 너무나도 정교해 자기자신을 포함한 그 모든 사람들을 속인다. 다시 말해서 소동이 일어나는 이 마을은 현대사회의 작은 축소된 복제물이다. 이 공간에서 마을 사람들은 진심을 다하여 연기하며, 그것은 이미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다. 그것은 물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낼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러한 세상에서 그것을 구별해내는 것, 즉 원본이 복제물이 되고, 복제물이 원본이 되는 시대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내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이 혹시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것을 어쩌면 이 마지막은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사기를 당해 성지순례를 가지못한 촌장은 끙끙 앓아눕다가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고 있는 성지순례 중계화면을 본다. 영화 속에서 내내 텔레비전을 배척하던 촌장은 그제서야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울부짖는다. 나도 성지에 와 있나이다, 나도 성지에 와 있나이다,라고 반복하며 말이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 내내 독선적이고 독단적이었던 촌장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좀 다르게 읽혔다. 결국 얼마나 진심을 다하여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인 것. 결국 성지순례라는 것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지 않을까. 아무리 현재의 성지를 지금 순례해도 그곳은 옛날의 성인이 있던 그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과거의 성지의 일종의 모사물이다. 그러나 그곳을 정말 성지라고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서 참배하는 것, 그 모사물을 원본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것, 그 자체에 중요한 것이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그 마지막에 터져나오던 애타는 울부짖음처럼 말이다. 그것이 복제물인지 원본인지를 가려내는 눈은 결국 자신의 안에 있다. 시뮬라크르를 마음을 다하여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시뮬라크르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영화라는 환상을 더 이상 환상이 아니게 하는 것, 그것은 당신의 몫이다. Use your illusion.


덧.
'ACF 쇼케이스 2013' 영화제에서 관람. 좋은 영화를 볼 기회를 주신 <씨네21>에 감사드립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 2013년 1월, 인디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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