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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류승완

Ending Credit | 2015. 8. 13. 14:41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류승완의 신작 <베테랑>은 전작들, 특히 그 중에서도 <부당거래>의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한 영화다. 물론 어떠한 것들이 대척점에 서 있으려면 그것들은 공유하는 부분이 있어야만 한다. <부당거래>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 역시 경찰 내부가 주 무대가 되며, 그들의 활동이 이야기의 주요 소재가 된다. 류승완은 이를 약점으로 생각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활용하려는 듯이 보이는데, 예를 들어 배우들의 거리낌없는 활용이 그것이다. 황정민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주인공 형사 역할을 다시 맡고 있으며, 천호진, 안길강, 김민재 등의 배우들이 비슷하게 재변주된다. 물론 <베테랑>은 <부당거래>와 다른 점이 훨씬 많은 영화다. 그것을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캐릭터에 보다 확실한 색깔을 입히려 했다는 부분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당거래>나 그 이후 나왔던 <베를린>이나 인물들의 캐릭터는 복합적이고, 구도는 복잡하다. 인물들은 선과 악의 경계에서 모호하게 자리잡고 있고, 이야기는 점점 중층적으로 변해간다. 그러나 <베테랑>은 다르다. 인물들의 선악의 경계는 확실하고, 영화는 그들의 거의 처음 등장 장면에서부터 관객들이 인물의 성향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끔 방점을 찍는다.

 

그러니까 이번 영화에서 류승완은 드라마에서 다시 액션으로 방향을 튼 것처럼 보인다. 예전 <베를린>에 대한 평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쓴 적이 있지만, 좋은 액션물에서 이야기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캐릭터를 어느 정도 명확하게 규정짓는 것은 필수적이다. 어떤 액션물이든 관객은 심정적으로 기댈 곳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액션물이든 설혹 주인공이 지나친 폭력을 휘두르는 듯이 보여도, 관객은 그 캐릭터를 응원하며 영화를 본다. 그 캐릭터가 어느 쪽의 편에 서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까닭에 그렇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액션물에서 캐릭터의 성향을 규정짓는 것은 그들의 액션의 형태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유명한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특유의 액션들이 있다. 성룡의 영화에서 성룡이 보여주는 액션이 있고, 본 시리즈에서 주인공 본이 보여주는 액션이 있으며,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서 주인공 에단 헌트가 보여주는 액션이 있다. 그것은 각각의 형태가 다른, 특유의 액션이며, 캐릭터의 성향과 결합된 액션이다. 이 영화 <베테랑>에서도 주인공 형사 서도철(황정민)이 보여주는 액션과 악역 조태오(유아인)가 보여주는 액션은 다르다. 서도철이 보여주는 것은 그의 느물느물한 성격을 보여주는 듯한 성룡 식의 슬랩스틱 액션이다. 어딘가 허술해보이고, 맞기도 많이 맞지만, 사실은 기술적으로 꽤 다듬어져 있다. 그러나 공격적이기보다는 방어적이며, 치명적인 공격은 피한다(성룡의 공격으로 사람이 죽는 법은 없었다). 반면 조태오의 액션은 비열하고 치졸한 액션이다. 즉 예전 동네 비열한 양아치들이 일대일 주먹 싸움에서 불리해지면 접이칼을 꺼내들던 식이다. 그는 불리해지면 앞뒤 가리지 않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어떤 잔인한 방식도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액션 방식은 아마도 이 영화의 주제와도 연결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이 있다. 쪽팔리게 하지 말자. 이 말은 주인공 서도철이 계속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자, 그가 어떤 삶의 태도로서 지향하는 말처럼 보인다. 서도철은 조태오의 돈의 회유에 넘어간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압력을 가할 때, 늘 되풀이하여 말한다. 쪽팔리지 않아요? 부끄럽지 않아요?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도 부끄럽게 맞기보다는, 차라리 정정당당하게 맞서는 쪽을 택하라고 말하며, 그것은 다시 그의 아내(진경)에게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게 보이는, 그러니까 무리하게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도리어 감독이 가장 하고 싶어하는 말처럼 보이는 장면은 아내가 경찰서에 와서 하는 그 대사이다. 나, 쪽팔리게 하지 말라는 것.) 즉 류승완은 대놓고, 노골적으로 이 영화에서 묻고 있다. 그거 쪽팔린 거잖아,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즉 이 핀트는 조태오에게 어느 정도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조태오의 악행을 돕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맞춰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적어도 영화 상에서의 조태오는 그것이 쪽팔린 건지, 아닌지 이미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인물이니까. 그 메시지는 조태오의 하수인들, 그러니까 최상무(유해진)를 비롯한 조태오의 곁에서 악행을 실행하는 인물들(하다못해 조태오를 수행하는 경호원들에게까지)이나 그의 돈의 유혹에 굴복하여 서도철에게 압력을 가하는 경찰 내외부의 인물들에게 향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감독 류승완이 이 사회에 던지는 나름의 진심어린 호소일 것이다. 부끄러운 일은 하지 말자, 제발.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미안한 말이지만) 그것은 사실 순진한 메시지일 수 있다. 쪽팔리지 말자, 부끄럽지 말자고 호소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어떤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니까. 이것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아주 쉽게 배반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잘 알면서도 류승완은 그것에 건다. 어쩌면, 류승완은 이제 걸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양심이라는 것은 이제 류승완의 영화에서 묘하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류승완의 초창기 영화는 보다 순진했다. 사실 알고보면 순진한 남자들이 순수한 것을 지켜내려고 싸우다가, 혹은 그것에 배반당해 죽었고, 그것을 류승완은 촌스럽게 찍었다. (물론 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제 더이상 그렇게 촌스럽게 찍지는 않기 때문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주먹이 운다>, <짝패>의 인물들. 그 이후에 류승완은 시스템의 문제를 엿봤다. 그것은 아마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들은 양심으로만은 안된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반대편에는 거대한 시스템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혹은 그 시스템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 <부당거래>에서의 시스템의 탐색은 여전히 그것이 견고하다는 재확인이었다. (<부당거래>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한다면, <부당거래>는 결국 그 시스템이 작동하는 그 방식으로 정확하게 끝을 맺으며 거기에는 어떤 절망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 <베테랑>의 어떤 호소가 있다. 쪽팔린 줄 알아. 즉 류승완의 처음 영화들이 거대한 조직에 맞서는 개인들의 실패를 응시했다면, 두 번째에서는 그 조직이 바뀔 수 있는지 가능성을 탐색하며 다시 그것에 절망감을 맛본 다음, 이제 <베테랑>에서는 약간은 우회적이지만, 보다 강력한 접근방식을 택한다. 그것은 그 조직, 시스템 구성원들의 개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거기에 그러고 있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니.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순진한 호소이기는 하지만, 어떠한 의미에서는 가장 근원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설사 어떤 악이 거대할지라도 그 악은 소수의 절대적인 악과 다수의 중간자적 모호함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의 모호함들을 선의 편으로 돌려놓을 수 있으면 악은 뿌리뽑힐 수 있다고 류승완은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류승완의 게임이다. 상대의 알 수 없는 진심을 믿고 벌이는 순진한 게임. 이제 걸어보는 마지막 승부수. (다시 말해서 류승완이 보는 한국사회는 혼탁해지고 도리가 땅에 떨어진 무협영화의 강호이다. 갑은 굳건하고, 을이 을과, 또는 을이 병과 싸우게 만드는 이상한 법칙이 난무하는 세계 - 조태오의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격투는 바로 그 풍경이다. 너무 노골적이기는 하지만 - 그러니 시스템과 맞서는 개인, 그러니까 액션 영웅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이 액션 영웅은 단지 절대악을 처단하는 것이 그 임무가 아니다. 배트맨의 임무도 결국 절대악, 예를 들어 조커를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더이상 선량한 이들이 악에 물들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협영화의 영웅도 절대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땅에 떨어진 강호의 도리를 다시 세우는 것이 목적이다. <베테랑>의 서도철도 이 지점에 비슷하게 위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 승부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이 영화는 사실 정확한 마무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서도철의 승리로 게임이 끝났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게임의 결말은 아직 알 수 없다. 우리는 현실에서 승리처럼 보였지만 승리가 사실 아니었던 것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로 인하여 새삼 화제가 되었던 여러 지난 사건들. 그 지난 사건들에서 가해자들은 어떻게 처벌되었고, 결국 현재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의 결말이 승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안다. 그 끝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어쩌면 류승완은 이 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을 풀어준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에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도 어쩌면 일조한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 하고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류승완의 순진한 호소가 너무 딱해서 내가 말하는 억지일지도 모르겠다. (보여주지 않은 것에서 무엇인가를 봤다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억지이니까.) 다만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자. <베테랑>은 거대한 조직과 단지 가지고 있는 조그만 힘으로 대결하려는 개인을 보여주는 류승완의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영화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개인은 조금 더 느물느물해졌고, 단지 고독한 액션 영웅이 아닌 주위를 돌아보고 활용하는 방법을 조금은 배운 것 같다.

 

그것이 단지 두 시간 동안의 영화적 쾌감으로 끝나는가, 혹은 그 이후의 다른 것으로 조금이나마 연결되는가는 결국 관객의 몫이다. 다시 말해서 상대의 알 수 없는 진심을 믿고 벌이는 순진한 게임. 그 순진한 게임이 순진한 패배로 끝날지 아닐지는 이제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달렸다.

 

 

 

   

- 2015년 8월, CGV 역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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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최동훈

Ending Credit | 2015. 7. 29. 13:28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일부 들어 있습니다.)

 

 

최동훈의 <암살>은 무리없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내는 영화다. 다만, 나는 (요즘의 한국 영화들에서 특히 보이는) 이런 공식에 들어맞는 듯한 전개, 혹은 뭔가 툭 걸리는 게 없는 무리없는 흐름이 좋은 것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지루함을 주는 부분도 없고, 마냥 뒤떨어진다 싶은 장면도 없다. 약간 울컥하게 만드는 장면도 있고, 다시 돌려보고 싶을 정도로 일종의 쾌감을 주는 장면들도 있다. 만약 이것이 다른 감독들의 영화였다면, 나는 상찬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건 최동훈의 영화가 아닌가. 이 정도에 만족해야할까.

 

단적으로 말해서 <암살>은 최동훈의 '놈놈놈'이다. 좋은 놈은 안옥윤(전지현)을 비롯한 독립군들, 나쁜 놈은 일본군의 밀정으로 돌아서는 염석진(이정재)이나, 친일파 강인국(이경영)과 같은 인물, 그리고 이상한 놈은 물론 하와이 피스톨(하정우)과 그의 조력자 영감(오달수)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김지운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과는 그 궤가 조금 다르다. <놈놈놈>은 그 제목이 이미 어느 정도 말해주듯이 그 캐릭터를 극단으로 몰아붙여서 장르적 쾌감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놈놈놈>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말을 건다. 자, 이제부터 내가 아주 좋은 놈과 아주 나쁜 놈과 아주 이상한 놈을 보여줄께. 너는 다른 거(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 배경에서 연상되는 역사 같은 것) 생각하지 말고, 그냥 누가 끝까지 살아남아 이길 것인지 즐기기만 하면 돼,라고 말을 건네는 영화였다.

 

그런데 최동훈의 영화는, 아니 적어도 지금까지 최동훈이 만들어왔던 영화는 조금 다르다. 물론 최동훈의 영화는 캐릭터 중심의 영화다.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범죄의 재구성>의 인식이 강해서 그렇지, 최동훈이 이야기를 그다지 잘 만들었던 적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영화 <타짜>도 이야기 자체가 깔끔하게 짜여져 있지는 않다. 이야기는 캐릭터에 치여 분절되며, 꽤나 산만하다. 최동훈은 이를 중화시키기 위해 두 가지의 장치를 거는데, 하나는 정마담(김혜수)의 회상(진술)이라는 이야기의 형식을 거는 것이고, 그것으로 모자라 챕터를 나눠 분절시켰다. (나는 <암살>도 이런 회상의 형식을 적극 활용하려는 줄 알았다. 영화 초반 염석진에 대해 진술하는 씬이 나왔을 때 말이다. 그런데 영화내내 이 장면은 거의 외따로 떨어진 듯 보이다가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의미가 생긴다.) 즉 이야기가 에피소드별로 분절되는 양상으로 영화는 흘러가지만, 그것이 그렇게 관객에게 이상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표면상의 목적은 이 에피소드들을 그러모아, 결국 고니(조승우)라는 캐릭터가 누구인지 그려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캐릭터를 그려내는 것. 최동훈의 이야기는 그것이었다. 가끔 최동훈은 캐릭터를 철저하게 그려내는 것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캐릭터만 잘 만들어내면 이야기는 저절로 따라온달까. <도둑들>은 그게 과했다. 영화 <도둑들>이 활력을 잃어버리는 것은 캐릭터에 대한 소개가 어느 정도 끝나고, 바로 실제의 도둑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캐릭터들을 구축하려는 노력이 너무 지나쳤던 나머지, 막상 실제의 도둑질은 거의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케이퍼 무비(caper movie)를 표방했는데, 이상하게도 영화에는 그 '케이퍼'가 없었다. 뭐 아무튼 간에.

 

 

최동훈은 이번에는 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언뜻 보면 <도둑들>과 비슷한 구조를 가진다. 캐릭터들을 긁어 모아서, 그 캐릭터들이 어우러지는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을 보여준다, <도둑들>에서 그것이 '도둑질'이라면 <암살>에서는 그것이 '암살'일 따름이다. 그런데 최동훈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여기에 무엇인가 다른 것을 넣고 싶어했다. 예를 들어 역사성이나 정서와 같은 그간 최동훈의 영화에서는 그렇게 어울리지 않았던 낱말들. 영화가 그 궤를 달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영화의 중반부 안옥윤을 둘러싼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부터다. 영화는 비장해지고, 웃음기는 없어진다. 그러니까 장르물(일종의 케이퍼 무비)인 척 하던 이야기는 이 때부터 드라마로 방향을 튼다. 뭐 좋다, 드라마든 장르물이든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다만, 아쉬운 것은 이렇게 방향을 급선회하는 도중에 최동훈의 장기가 잘 보이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바로 그 펄떡펄떡 뛰노는 캐릭터들.

 

최동훈의 캐릭터는 사실 초반에 규정되는 법은 없다. 그의 첫번째 장편 <범죄의 재구성>에서부터 이러한 특징은 잘 드러나는데, 이야기가 중후반을 넘어설 때까지 사실 이야기를 정확히 종잡기 힘든 것은 그의 인물들을 선과 악의 경계로 잘 나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은 <타짜>에서도 마찬가진데, <타짜>에서 아귀(김윤석)와 같은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인물들의 경계는 흐릿하다. 예를 들어 평경장(백윤식)은 어떤가, 그는 고니를 망가뜨린 인물인가, 아니면 그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는가, 정마담은 어떨까, 그녀는 팜므파탈인가, 아니면 고니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순정녀였나. 물론 주인공 고니 역시 마찬가지이며,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결국 주인공 고니를 입체적으로 그려나가는 영화이기도 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도둑들>이 지루했던 것은 그 도둑질이 비어있는 것에 그 까닭이 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캐릭터들이 들인 시간에 비해 입체적으로 살아나지를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악한 인물은 결국 끝까지 악했던 것 같으며, 선한 인물은 결국 끝까지 선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암살> 역시 이 캐릭터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너무 잘 보여서 탈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거의 최동훈의 '놈놈놈'처럼 보인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좋은 놈은 끝까지 좋은 일을 완수하며, 나쁜 놈은 끝까지 악랄하고, 이상한 놈은 마지막까지 조금 이상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그들이 그렇게 되었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조금 이상해보이는 장면들이 있다. 염석진은 왜 밀정이 되었을까. 물론 영화에서 제시하는 해답은 있다. 눈앞에 당장 죽음의 공포가 몰아닥쳤을 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영화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이 질문은 질문 자체로는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이전에 꽤 시간을 들여 염석진의 죽음도 불사하지 않는 자세를 보여주려고 애쓴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십여분이 넘게 구축한 다음, 단지 그 장면 하나로 이것이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도리어 염석진이 마지막에 내놓은 답이 정답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즉 일본이 패망할 줄 몰랐다는 그의 대답.) 하와이 피스톨에게도 같은 것이 적용된다. 그는 왜 갑자기 좋은 놈의 편으로 돌아섰을까. 여러 이유들이 있을 수 있다. 그가 보았던 결정적인 장면 때문일 수도 있고, 안옥윤에 대한 연모의 감정 때문일 수도 있으며, 그가 가진 어떤 마음의 부채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그가 초반에 구축해 놓은 캐릭터, 그러니까 300달러만 주면 아무나 죽여주는 이상한 하와이 피스톨의 캐릭터를 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다. 모호해보였던 속사포(조진웅)는 언제 그렇게 죽음도 불사하던 캐릭터가 되었나. 혹은 강인국(이경영)은 왜 그렇게도 악랄함의 끝에 있는 것과 같은 친일파가 되었을까.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친일파가(그러니까 염석진이나 강인국이) 친일파 되는데에 이유가 있을까. 그저 나쁜 놈인 거지 뭐. 그런데 그것은 결국 그의 캐릭터를 비워 둔 채로 놓아겠다는 얘기이고, 그것은 그의 반대편에 있는 인물들에게 영화가 취하고자 했던(그러나 사실 실패한) 어떤 스탠스와 배치된다. 악인이 왜 악인이 되었는지를 묻는 것은 의인이 왜 의인이 되었는지를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저 그가 태생이 나쁘기 때문에 악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인이 태생이 의롭게 태어났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의 어떤 태도와 모순되는데, 이 영화는 이 의인들을 기억해달라고 말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어떤 역사성을 부여하려 마지막까지 애쓰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억해달라는 것은 이들을 신화화된 영웅으로서 기억해달라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신화화된 영웅들에게는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지점이 없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코 이 영화도 바라는 점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마지막이 보여주는 것은 보다 인간적인 형식으로서의 기억이 아닐까. 춤을 추고 싶었고,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들. 그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내고자 했던 것을 기억해달라는 것은 아닐까. 비록 그 기억을 요구하는 방식은 최동훈답지 않게 아주 촌스러웠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명량>의 이상한 인터랙티브가 여기에서도 반복되며, 이것 역시도 어떤 퇴행의 증거처럼 보인다.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이것은 염석진을 둘러싼 에필로그와도 연관이 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이런 방식의 영화적 카타르시스는 조금 위험해보인다. 그런 선택이 그들의 영웅성을 강화할 수는 있지만, 실제의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문제들은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근원에는 결국 우리 손으로 온전히 이루어낸 해방이 아니라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고 - 실제로 영화 속의 환호와는 달리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고 있던 임시정부 쪽에서는 이 온전하지 못한 독립을 많이 아쉬워했다, 영화 속에 등장한 김원봉의 씁쓸함도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 이 영화에서 물론 그것을 강조하기에는 어려웠겠지만 이 선택이 아쉬워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사실 '역사성을 담아냈는가'라는 물음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결국 이 영화도 최근의 한국영화들이 보여주는 어떤 모습들과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각각의 장면들은 인상적이고, 웃음을 터뜨리게도 하며, 카메라워킹도 빈틈없이 구축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리듬이 없다. 리듬은 모두들 알고 있듯이 5-4-3-2-1의 적절한 조화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4-4-4-4-4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5점 만점 중에 4점 짜리 장면들만 있는 영화들.(요즘에 가장 흔히 보는 영화평이 '차린 건 많은데, 먹을 것은 없다'는 평이다. 다들 먹방 좀 찍어봐서 알잖아요. 고기 반찬만 있다고 많이 먹게 되지는 않잖아요.) 툭툭 걸리는 장면이 없는 영화, 불협화음이 없는 영화. 이것이 최동훈의 영화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 2015년 7월, 메가박스 신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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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테이션 게임, 모튼 틸덤

Ending Credit | 2015. 4. 16. 16:12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튜링 테스트(Turing test)는 앨런 튜링의 모방 게임(imitation game)이라는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기계와 인간이 채팅을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그러니까 사실 튜링 테스트와 모방 게임이 정확히 같은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인간이 어떤 대상과 5분간 채팅을 하여 그 대상이 인간인지 기계인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전체 영화의 구조를 이 튜링 테스트와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우리는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는 동성애 혐의로 경찰서에 소환되었으며, 형사에게 일종의 튜링 게임을 제안하는 중이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을 것, 그리고 다 들을 때까지 어떤 판단도 내리지 말 것. 그리고 그는 영화의 말미에서 형사에게 묻는다. 내가 기계인가, 인간인가. 혹은, 내가 전쟁영웅인가, 범죄자인가.

 

이렇게 앨런 튜링의 삶(전쟁영웅인가, 범죄자인가)과 그의 이론(기계인가, 인간인가)을 등치시키는 것처럼 영화는 전체적으로 앨런 튜링과 그의 이론을 교묘하게 등치시킨다. 예를 들어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키를 파악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앨런 튜링(물론 그가 농담에 가장 취약한 것은 농담에서는 표면적인 발화 내용보다 그 안에 담겨진 숨은 뜻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튜링이 군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도 이와 묘하게 연결된다고 할 수 있는데, 군에서의 대화란 그 반대로 대부분 표면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처럼, 독일의 암호해독기 이니그마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튜링의 크리스토퍼(영화 속에서는 튜링이 그가 사랑했던 친구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처럼 나오지만, 본래는 다른 이름이었다고 한다)는 이니그마가 암호를 생성해내는 키를 파악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튜링이 그 돌파구를 친구 크리스토퍼에 대한 사랑에서 찾는 것처럼, 이 이니그마의 해독에 대한 실마리가 열리는 것은 한 독일군의 여자친구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영화 속 설정을 따른다면 말이다). 그것은 영화의 중후반부에서 다시 비슷한 등치의 형태로 반복되는데, 이는 일종의 진화 양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즉 독일 이니그마의 암호를 깬 영국 측에서 그 암호를 깼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면, 튜링은 위험에서 조안(키이라 나이틀리)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튜링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진화이다. 튜링은 예전에도 친구 크리스토퍼를 모른다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지만, 그 거짓말은 누가 보더라도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의 거짓말에서는 조안의 스매싱을 끌어내는 데에는 성공한다. 다시 말해서 이 등치는 튜링의 진화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튜링이라는 유사기계의 진화를 말해주기도 한다. 거짓말을 하는 기계, 그럼으로써 마치 인간인 것처럼 믿게하는 기계. 그것이 튜링 테스트의 본질이 아니던가.

 

 

그런데 물론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남아 있다. 하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 즉 기계의 사고는 거의 인간과 유사한 수준까지 올라설 수 있는가의 문제. 실제로 작년 유진 구스트만(Eugene Goostman)이라는 인공지능이 최초로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떠들썩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통과한 것인지, 더 나아가 튜링 테스트를 인간과 기계의 구분을 시험하는 리트머스로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까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튜링 테스트의 대안들도 나오고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면, 영화에서 이 문제를 정확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말미에서 앨런 튜링의 남은 삶을 다루는 것을 통해 어떤 짐작을 할 수는 있다. 영화의 말미는 쓸쓸하다. 그것은 앨런 튜링의 남은 삶을 묘사하는 방식으로도 그렇고, 영화 마지막에 붙은 에필로그로도 그렇다(그들이 남은 모든 자료를 불태우는 것). 아니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앨런 튜링은 형사와의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는가? 그것은 결국 실패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데, 형사가 그것을 자신이 판별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왜냐하면 튜링은 그 앞에서 인간으로서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의 튜링은 삶에서도 결국 인간들 사이에 섞이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그 혐오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영화 속에서 어린 시절의 튜링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아니 괴롭힘을 넘어서서 일종의 혐오의 형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튜링은 그것을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크리스토퍼는 그에게 말해준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즉 인간은 많은 부분에서 '다른 것'을 혐오한다. 동성을 좋아하는 것말을 더듬는 것,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것, 뛰어나게 똑똑하거나, 눈에 띄게 어리석은 것, 키가 너무 큰 것, 키가 너무 작은 것, 너무 뚱뚱한 것, 너무 마른 것 등등...셀 수도 없는 수많은 '정상분포에서 벗어난 것'들을 혐오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인간이라는 같은 종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예를 들어 '돼지'에게 너무 뚱뚱하다고 욕할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 역을 의미하기도 하지 않을까. 즉 '기계'라는 다른 종의 문제에서는 이것이 흥미롭게도 반대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서 기계가 너무 인간과 비슷해지면 어느 순간 우리는 혐오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굳이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로봇이 사람과 비슷해지면 질수록 인간의 혐오감이 증가하다가 그것이 어느 순간 변곡점을 넘으면 다시 급격하게 그 혐오감이 줄어든다는 이론)와 같은 이론으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간 수많은 영화에서 이 언캐니 밸리의 골짜기에 빠져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봐왔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다만 이것이 '골짜기'의 형태라고 확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이렇게 인간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까지 로봇의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혐오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은 다시 적어도 다른 두 가지를 나에게 생각하게 만드는데, 먼저 하나는 영화라는 매체에서 작용하는 언캐니이다.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이미테이션 게임, 혹은 튜링 테스트이다. 즉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여 모든 환영을 작동시킨다. 환영은 그들이 실재한다고 계속 거짓말을 하며, 관객은 그 거짓말에 속아넘어간다. 아니 기꺼이 속아넘어감으로써 그 거짓말을 즐긴다. 즉 이 때 흥미로운 것은 관객은 이 거짓말에 동참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튜링 테스트로 비유하자면 네가 기계인 것은 알지만, 그 채팅이 즐겁기 때문에 네가 인간이라고 믿어준다랄까. 그런데 지금까지 영화는 그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무성에서 유성에서, 흑백에서 칼라로, 2D에서 3D로 혹은 더 나아가 4D로. 영화는 어떻게 든 현실이 되려고, 아니 기계는 어떻게든 인간이 되려고 애써왔다. 그렇다면 그것이 자꾸 현실이 되려고 발버둥칠 때 그 혐오감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다시 시간의 방향을 되돌리는 것, 혹은 기술적인 발전을 애써 무시하는 것이 그 해답이 될까.

 

다른 하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혐오와 같은 것이다. 영화 속에서 형사는 튜링에게 묻는다. 기계도 생각을 합니까? 여기에 튜링의 대답이 흥미로운데, 그는 그것이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형사에게 답한다. 기계는 인간처럼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계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되묻는다. "그런데 어떤 것이 당신과 다르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봐야할까요? 그것은 단지 다르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는 기계와 인간의 경우지만, 그것은 영화에서 암시하듯이 인간들 사이의 혐오를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 같은 것들. 어쩌면 우리의 만연한 혐오는 쉽고 달콤한 유혹에 굴복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이코패스, 일베, 혹은 종북과 같은 것으로 낙인찍고 싶은 유혹들, 그것이 달콤한 이유는 그것은 너무나도 간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제정신이 아닐 뿐이다,라는 낙인은 너무나도 간편하며 동시에 우리의 혐오의 욕구를 만족시켜 준다. 우리는 동일하게 여기에 튜링처럼 되물을 필요가 있다. 그들이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들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봐야할까. 그들은 단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더욱 시급한 것은 그들에 대한 혐오나 빠른 격리보다도, 그 다른 생각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아닐까. 왜냐하면 혐오와 격리는 번질 수밖에 없는 속성이 있으며,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을 혐오하거나 다른 모든 사람을 격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 만연한 수많은 혐오스러운 말들을 보며, 그 속에 존재하는 나의 혐오와 당신의 혐오, 이중의 장벽을 뚫고 그 안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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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본 영화들

Ending Credit | 2015. 3. 30. 12:53 | Posted by 맥거핀.

 

(<위플래쉬>, <꿈보다해몽>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3월이 지나가기 전에 3월에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놓고 싶다. 3월에 본 영화라고는 하지만, 사실 3월 중순 이전에 본 영화들이라,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영화를 본 직후에 무엇인가를 쓰는 것과 영화를 보고나서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무엇인가를 쓰는 것은 나름의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있다가 무엇인가 기록에 남기는 것은 희미해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의미도 되겠지. 그것은 무엇일까.

 

 

먼저 <위플래쉬>. 이 영화는 음악을 보여주는 영화이지만, 나는 보는 내내 이 영화가 일종의 스포츠 영화를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신체를 이용하여 정확한 동작을 해내는 것이 중요한, 그래서 예술과 스포츠의 경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체조나 피겨스케이팅 같은 스포츠, 혹은 신체언어를 이용한 예술인 무용이나 발레와 같은 것 말이다. 즉 이 영화는 음악을 다루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음악을 영화에서 나타내는 방법이 예술가의 고뇌나 개인적인 일화, 혹은 그 '음악' 자체를 들려주는 것만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서 음악도 일종의 신체 예술이라는 것. 예를 들어 체조에서 정확한 동작을 정확한 타이밍에 실수 없이 해내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드럼 연주에서도 정확한 위치를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강도로 타격하는 것이 중요하다(사실 드럼이 아니라 다른 악기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 그것을 지속시킬 체력과 근력, 즉 신체의 지탱이 필요하다.

 

그래서 <위플래쉬>의 촬영은 이런 신체를 이용하는 스포츠나 예술을 다루는 영화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예를 들어 이 영화가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 같은 영화를 연상시킨다면, 그것은 내용상의 측면(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자)에서도 그러하지만, 한편으로는 촬영 같은 부분에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클로즈업의 활용을 통해, 신체 그 자체의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점점 분열되어가는 니나(나탈리 포트만)에게 주목하게 만들었던 이런 타이트한 촬영은 이 영화 <위플래쉬>에서도 비슷하게 보여진다. <블랙 스완>에서 발끝이 지면과 충돌하면서 토슈즈에 배어나오는 피를 클로즈업하는 것이 관객에게 고통(이자 쾌감)을 전이시켰다면, <위플래쉬>에서는 손에 아무렇게나 칭칭감은 붕대에서 배어나오는 피를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의 고통(이자 쾌감)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즉 이 영화는 음악을 다루는 영화이지만, 이상하게도 음악을 자꾸 신체언어로 바꾸려드는 것 같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장면이 영화에는 있는데, 앤드류(마일즈 텔러)가 중요한 공연에서 결국 연주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어떤 연습의 부족이나, 정신적인 문제, 심한 긴장과 같은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의 육체가 고장이 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음악은 결국 몸으로 하는 것이라는 문제, 혹은 음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몸이라고 이상한 역설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씨네21> '김중혁의 바디무비'에서 왜 아직 이 영화를 다루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왜냐하면 음악을 다루기는 하지만, 그것은 지속적으로 음악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약간 비유를 섞어서 말하자면 음악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 자꾸 눈에 보이는 땀, 피 혹은 악보의 음표로 치환되어 지속적인 피로감을 준달까. 다시 말해서 음악을 즐기러 갔는데, 고통을 체험하게 된달까.

 

그것은 이 영화가 한계를 넘으려는 자의 이면을 그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다시 스포츠 영화의 화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간 많은 스포츠 영화들은 한계를 넘어서려는 자들을 즐겨 묘사하여 왔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일반적인 스포츠 경기를 보며 한계를 이미 넘어선 사람들의 전면에 있는 그 성취만을 주목했다면, 스포츠 영화들은 그 이면에 있는 한계를 넘기까지의 그들의 고통을 즐겨 그려오곤 했다. 앤드류가 한계를 넘어섰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말많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놓는다고 해도, 결국 이 영화는 앤드류가 그런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여정의 어느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는데, 물론 그것에서 교육에 대한 어떤 문제들을 생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실 나처럼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 영화를 그다지 좋아할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수월성교육의 끝판왕이며, 수월성교육이라는 것을 평소에 찬성했던 교육학자들도 이와 같은 극단적인 수월성교육에는 그리 찬성표를 던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앤드류가 한계를 넘어서 버드, 즉 찰리 파커와 같은 뮤지션이 된다고 해도, 그 와중에 희생양이 되었던 다른 학생들의 인생, 즉 플렛처(J.K.시몬스)가 죽음에 이르게 했던 다른 제자의 삶과 같은 것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이를 '교육'이라는 것과 전혀 무관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플렛처는 실질적으로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영화 속에서 사실 플렛처가 유일하게 강조하는 것은 그저 '마이 템포'이다. 그리고 그는 학생이 그 템포에 맞출 때까지 계속 같은 것을 반복시킬 뿐이다. 학생은 그 템포가 어느 정도인지도 정확하게 모르고, 그것을 맞출 방법이 어떠한 것이 있는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채, 그저 공포 속에서 같은 행위를 반복할 뿐이다. 소통의 단절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반복, 이를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앤드류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를 플렛처에게 그대로 되돌려준다. 즉 지금까지 내가 당신의 템포에 맞추었으니, 이제 당신이 나의 템포에 맞추라는 것.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지점에서 둘은 은밀한 공명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적어도 그 공명은 음악에 대한 공명이 아닌, 어떤 방법론의 공명처럼 보인다. 일방적인 마이 템포로의 방법론. 다시 말해서 앤드류가 나중에 누군가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입장이 된다면 그는 플렛처 교수와 아주 비슷한 방법론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 어쩌면 그는 플렛처에게 음악보다는 그런 방법론을 사실 배우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앤드류는 자신이 싫어하는 과자도 타인을 위해 팝콘 속에 담아오는 것 정도는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후에 여자친구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는 생활마저도 '마이 템포'로 하려든다. 그것이 교육학 석사를 다 마치지 못하고 때려친 나라도, 이 영화를 마음으로 좋아할 수 없었던 이유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영화도 있다. 이광국의 <꿈보다 해몽>. 이 영화가 서 있는 것은 플렛처가 그토록 싫어했던 '굿잡'의 위치이며, <위플래쉬>에서 앤드류의 아버지의 방법론이다. 좌절하려고 하는 사람들, 혹은 힘들어하는 사람들에 보내는 따듯한 격려. '꿈'이라는 말에는 양가적인 속성이 있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것, 허망한 것, 결국 닿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희망,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점, 혹은 희망을 가지려는 자세 그 자체를 말하기도 한다. <꿈보다 해몽>에서의 꿈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훨씬 가까우며, 그것은 제목 그 자체가 한편으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꿈의 무게는 현실보다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있다. 그러나 꿈은 그것이 현실보다 가볍다고 해서 무조건 들고 있을 수도, 혹은 현실보다 무겁다고 해서 무조건 내려놓을 수도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꿈을 받아들이는 자세, 즉 다른 말로는 해몽이다. 즉 누구나 현실과 꿈의 무게를 재지 않고, 그 꿈을 꿀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 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 동시에 또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광국의 이야기 직조 방식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광국은 전작 <로맨스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이야기의 얼개를 이리저리 연결하는 방식, 이야기가 이야기를 불러오고, 현실과 꿈이 뒤섞이고, 처음의 실마리가 끝과 만나다가 다시 사라져버리곤 하는 기이한 연결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즉 일반적인 영화에서 관객은 어떤 이야기의 선을 잡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광국의 영화에서는 그 선은 사라졌다가 종종 다시 나타나며, 그때마다 관객은 꿈에서 현실, 다시 현실에서 꿈으로 빠져든 듯한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즉 처음에는 꿈과 현실, 혹은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가 명확해보였지만, 그 경계는 점점 사라지고 나중에는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경지에 이른다. 이 영화를 독해하는 방식은 그 얼킨 실타래를 어떻게든 찾아내 감독이 어딘가에 남겨둔 꿈과 현실의 경계를 찾아내는 것일까. 나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다 좋은 방식은 꿈과 현실을 굳이 나누려 들지 말고, 그 얼킨 실타래를 스스로 잘라붙여 이어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상한 꿈을 꾸고 난 후, 그 끊어진 꿈의 조각들을 스스로 이어붙여보는 것처럼 말이다. 즉 영화를 통해 꿈을 꾸었으니, 그 해몽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쩌면 삶이란 이 영화에서처럼 늘 얼개가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이 때로는 종종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혹은 좋은 결과를 말해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과 같은 장면이 이 영화에는 있는데, 꿈을 해몽해주는 형사(유준상)와 그의 누나(서영화)의 이야기 같은 것이 그것이다. 뇌출혈 같은 것으로 쓰러졌다가 회복해가는 누나를 형사는 돌보고 있는데, 누나는 쓰러지기 전에 달력에 동그라미 쳐둔 날짜가 무슨 날을 의미하는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형사는 누나가 여행가려고 정해둔 날이었나 보다는 식으로 눙치지만, 그 날은 사실 누나가 죽으려고 정해둔 어느 날이었다. 그러니 삶의 얼개가 더 잘 들어맞았더라면, 즉 누나가 뇌출혈로 쓰러지는 일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더 나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물론 더 좋은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 얼개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을 한바탕 꿈이라고 한다면, 중요한 것은 그 꿈의 전개보다는 그 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 즉 해몽이다.

 

이광국의 영화에서는 이처럼 종종 마음을 건드리는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형사가 사실 그날이 누나가 죽으려고 정해둔 날이었음을 몰래 알게 되는 장면, 혹은 전작 <로맨스조>에서 초희(이채은)가 우연히 촬영장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적힌 대본을 보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힘든 상황에 처해 있지만, 이야기를 통해 그들에게 따듯한 위로를 건네는 것과 같은 마법같은 장면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였듯이 이광국의 영화에는 홍상수 영화의 인장들이 여럿 새겨져 있다. 꿈과 현실을 뒤섞는 것, 영화에 떠도는 죽음의 그림자, 인물의 이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메라(카메라는 좀처럼 인물을 따라가는 법이 없다. 한걸음 곁에서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빈번하게 등장하는 줌인과 줌아웃.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와 이광국의 영화는 약간 결이 다르다. 예를 들어 홍상수의 줌인이 주변의 인물을 프레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라면, 이광국의 줌인은 보고자하는 인물을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이다. 홍상수는 카메라를 현실에 놓고 명계의 세계를 들여다보지만, 이광국은 카메라를 명계에 놓고, 현실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홍상수의 여인들은 겉으로는 연약해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도 강하고, 이광국의 여인들은 겉은 강해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도 여리다. 즉 이광국 영화의 그 결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훨씬 따듯하게 느껴진다.  

 

<씨네21>의 김지미 평론가는 994호에 실린 비평에서 이 영화가 전작의 동어반복이며, 너무 나이브한, 동화같은 순진한 이야기라고 평했다. 동화같은 순진함. 대체로 우리가 분노보다 위무에 더 박한 평가를 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평은 조금 가혹해보인다. 김지미는 이 글의 부제를 '<꿈보다 해몽> 속 순진한 어른들이 도달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달았다. 그 현실은 <위플래쉬>와 같은 현실일 것이다. 오로지 최고만이 살아남는 세계. 그 최고가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계. 그것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꿈보다 해몽>보다 <위플래시>가 더 각광 받고 있는현실(적어도 관객수라는 측면에서라면 말이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자. 어쩌면 이러한 현실에서 더욱 말할 수 없는 이야기는 최고가 아니라면 꿈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보다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어떻게든 꿈을 가지려 노력하자는 이야기가 아닐까. 현실에 더 잘 맞춰주고 있는 것은 <꿈보다 해몽>보다는 <위플래쉬>인데, 그것을 나이브한 동화라고만 말해야만 할까. <위플래시>의 마무리는 개운치않은데, 그것은 내용보다도 그 싹둑 잘라버리는 영리한 쿨함이 보여주는 씁쓸한 뒷맛이다. 나는 그보다는 구질구질하고 시시콜콜한 그 <꿈보다 해몽>의 마무리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다. 구질구질하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더 맛보고 싶은 맛이기 때문이다.     

 

 

 

 - 2015년 3월, 롯데시네마 영등포, 인디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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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캐처, 베넷 밀러

Ending Credit | 2015. 3. 4. 13:07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1.

<폭스캐처>는 '역사상 가장 돈 많은 살인범'의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다. 1996년 1월 21일, 세계 최대의 화학기업 듀폰의 직계 상속자인 존 E. 듀폰은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데이브 슐츠를 자신의 38구경 권총으로 살해한다. 300만㎡가 넘는 펜실베이니아의 듀폰 사유지에는 '폭스캐처' 농장을 중심으로 승마장, 사격장을 비롯해 레슬링 전용 체육관과 선수들을 위한 사택이 있었다. 슐츠는 애틀랜타올림픽 준비를 위해 가족과 함께 이곳 사택에 머물고 있다가 변을 당했다. 출동한 경찰은 다양한 총기와 장갑차까지 보유하고 있는 듀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틀 동안이나 대치를 벌여야 했다. 듀폰은 싱겁게도 보일러를 고치려 잠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가 체포돼 별다른 저항 없이 수갑을 찼다. 듀폰쪽 변호인은 그가 정신질환에 의한 심신미약 상태임을 주장했지만 법원은 3급 살인죄를 적용했고, 듀폰은 2010년 감옥에서 숨졌다.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재벌이 살인을 저지른 데 대해 미국 사회는 들끓었고 살해 동기에 대해 갖은 추측이 난무했다. 한국에서도 <9시 뉴스>를 포함해 뭇 언론에서 비중 있게 보도됐다.

 

<씨네21> 991호에 실렸던 송형국 평론가의 글 서두이다. 이 부분은 글의 서두이자, 이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지만, 사실 영화 상에서 이 부분을 보기 위해서는 거의 2시간 가까이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 '사건'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이 '왜'를 설명하는 것이 그다지 간단하지만은 않다.

 

2.

사실 이 영화의 구성은 조금 흥미롭다. 위에 언급되는 것은 사건의 당사자들인 존 듀폰(스티브 카렐)과 데이브 슐츠(마크 러팔로)이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오프닝이 지나간 후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데이브 슐츠의 동생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이다. 그도 형과 같은 레슬링 선수이자, 역시 LA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그를 보여주는 초반의 씬들은 인상적이다. 아무도 없는 레슬링 도장에서 인형을 잡고 혼자 연습하고 있는 그를 한동안 멀리 바라본 후, 장소는 어느 초등학교로 옮겨진다. 마크가 강연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원고를 손에 들고 중얼거리며 앞을 노려보는 그는 긴장하거나 혹은 이 상황이 짜증이 나는 것 같다. 그리고 미국 국기가 걸린 강당에서 마크는 초등학생을 상대로 강연을 한다. 그는 오륜 마크가 그려진 자켓을 입고 목에 건 금메달을 보여주며, 레슬링과 조국 같은 이야기를 하려하지만, 아이들은 시큰둥하다. 그리고 서류에 날짜를 쓰는 어떤 손이 보인다. 1987년 3월 14일. 학교 행정실이다. 강연료가 20달러라고 말해주며 행정직원은 이름을 묻는다. 데이브인가요, 데이빗인가요? 그리고 마크는 답한다. 마크라고, 형 대신 왔다고. 행정직원은 약간 의아한 눈길을 보내지만, 그리 문제 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마크는 덧붙인다. 둘 다 금메달리스트라고. (이 장면들에서 마크의 옆으로 당시 대통령 도널드 레이건의 사진이 언뜻 비친다.)  그리고 그 이후 찌푸린 얼굴로 낡은 패스트푸드점에서 마치 노동자들처럼 보이는 사내들 틈에서 음식을 주문하려 하는 마크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굳은 얼굴로 차 안에서 햄버거를 먹는다.

 

이 장면은 그 자체로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장면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마크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말해주기도 하고, 마크와 데이브의 관계의 어떤 일단(예를 들어 형의 도움으로, 형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마크)을 보여주기도 하며, 그들이 현재 처한 위치를 말해주기도 한다(즉 데이브는 강연을 초청받지만, 마크는 사실은 데이브가 받았어야 할 강연료를 받아, 낡은 차 안에서 싸구려 음식을 먹는다. 같은 올림픽금메달리스트이지만 데이브와 마크의 처지는 왜 다른가). 그런데 이 장면이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씬들이 영화 마지막의 에필로그 씬들과 일종의 대구를 이루기 때문이다. 영화의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것도 마크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도 마크이다. 그는 형이 죽은 후 UFC같은 격투기대회에 출전하는 것으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 같다. 대기실에서 혼자 외롭게 고개를 숙이고 의자에 앉아 있는 마크의 모습을 비춰준 후(이 장면이 한편으로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이전의 레슬링 경기장에서는 그렇게 의자에 앉아 있는 마크의 옆에 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건네고 힘을 북돋우는 형 데이브가 있었기 때문이다), 올림픽금메달리스트 출신이라는 등의 화려한 소개를 들으며 링으로 올라가는 여전히 굳은 얼굴의 마크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열광하는 관객들은 외친다. USA! USA! USA!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이 장면이 대구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두 장면 모두 관객을 상대로 한 어떤 무엇을 시작하려는 마크의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거니와 어떤 공통적인 요소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작부에 나왔던 강당에 걸려있었던 미국 국기와 행정실에 있던 레이건의 사진 그리고 마크가 강연에서 얘기하려 했던 조국과 같은 것을 기억한다면, 그것에 마치 화답을 보내는 것 같은 마지막의 USA!와 같은 외침들은 조금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왜 그들은 마크의 이름을 외치지 않고, USA를 외치는 걸까. 마크는 국기가 걸려있던 초등학교에서 조국을 이야기했지만, 시큰둥한 반응을 받았고, 이제 몇 년 후 그 시큰둥한 반응은 열렬한 환호로 이상하게 귀환했다. 그러나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크의 얼굴은 굳어 있고, 어쩌면 그 자리에 대신 섰을 수도 있는 데이브는 그 시간들 사이에 누군가의 총을 맞았다. 기의는 달라졌고, 기표는 여전히 비어있다. (그러니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끝과 마지막을 이 비어있는 기표가 장식한다는 것이고, 안타까운 것은 그가 형의 죽음에서도 그다지 배운 것은 없어보인다는 사실이다.)

 

3.

이것이 조금 더 다층적이 되는 것은 그 이전의 오프닝(그러니까 마크가 등장하기 전의 오프닝)과 이것이 묘한 연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사실 많이 이상하다. 영화가 시작되고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문구가 지나간 후, 보이는 것은 낡은 기록사진과 같은 풍경들이다. 오래 전의 폭스캐처 농장을 보여주는 낡은 기록필름. 말과 사냥개들과 사냥을 하러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실제의 기록필름(어린 시절의 존 듀폰과 그의 어머니의 컷이 있는 것도 같지만 확언은 못하겠다. 아마도 영화의 중간에서 존 듀폰이 마크에게 보라고 하는 비디오도 이것과 비슷한 화면일 것이다). 여우를 잡으러 뛰어가는 사냥개를 담은 기록필름의 컷 사이에 제목이 뜬다. '폭스캐처' 그러니까 여우를 사냥하는 무엇. 그리고 이어서 아까 이야기했던 인형을 붙잡고 텅빈 연습장에서 연습을 하는 마크의 모습이 여기에 붙는다.

 

그러니까 사실 여우를 잡는 사냥도구였던 말 혹은 사냥개와 그의 지원을 받아 레슬링 훈련을 하는 마크의 존재의 의미는 존 듀폰에게는 동일하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실제로 영화 중간에 마크가 따온 메달이 결국 여우와 같지 않느냐는 듀폰의 말도 있다. 듀폰의 어머니에게는 여우사냥과 말이었다면, 듀폰에게는 그것이 레슬링과 마크였을 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앞에서 말한 마크가 나온 오프닝 혹은 엔딩과 이것을 연관지어 본다면 여기에서 감독은 다른 질문을 하는 것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게는 마치 그것이 존 듀폰만 그런 것인가,라고 묻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존 듀폰이 마크가 따온 메달을 마치 자신이 딴 것처럼 자신의 진열대에 전시할 때, 혹은 더 나아가 듀폰이라는 가문이 (실제는 자신들이 획득한 것이 아닌) 여우와 메달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할 때, 국가와 USA를 외치는 국민은 거의 비슷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에는 어쩌면 단지 규모나 사적소유(실제로는 아닐지라도 그렇게 믿는 것)의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어쩌면 이런 질문. 당신은 김연아가 딴 금메달을 왜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나.   

 

 

4.

물론 이 영화에서 이런 질문까지 나아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굳이 우리까지 들여다보려 하지 않아도 존 듀폰과 데이브 슐츠, 마크 슐츠 이 세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흥미진진하다. 존 듀폰의 비극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어쩌면 그의 비극은 그가 그의 어머니 이상의 것을 바랬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중간에 그가 레슬링 선수들에게 일종의 도취 상태에서 연설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말들이 단지 먹고  싸는 것밖에 모르는 멍청한 것들에 불과하다고 조롱하며, 동물 위에 앉는 것이 뭐 그리 고상한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동물이 아닌 인간 위에 앉고 싶었다. 인간도 물론 먹고 싸지만, 인간은 한 가지를 더해 주니까. 즉 그를 존경해줄 수도 있으니까. 다시 말해서 그는 멘토가 되고 싶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멘토가 받는 존경을 받고 싶었다(예를 들어 그가 자신이 써낸 조류학 책을 보여주며 자신을 조류학자라고 소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그에게는 조류학이든 뭐든 사실 상관이 없었다. 단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조류학자가 받을 수도 있는 존경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멘토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멘토가 되는 법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배워서 아는 것도, 흉내를 내서 알게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듀폰이 어리석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아니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까웠다. 듀폰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그것은 듀폰이 데이브를 쏘기 전에 보이는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어떤 분노를 보이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단지 그는 그 전에 자신을 본다. 자신이 마크와 데이브를 비롯한 레슬링 선수들의 멘토인 것처럼 만들어진 비디오. 이것이 단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함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는 그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집의 운전기사의 아들에게 돈을 주며 자신의 친구로 '붙여줬을 때'에 그것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는 그 '만들어진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진짜(그러니까 진짜 '멘토')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사실 간단했다. 그것은 진짜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5.

즉 듀폰에게는 데이브의 존경이 필요했다. 마크의 존경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고(아마도 마크는 그를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 존경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형이나 형의 아내에게 듀폰에 대한 태도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는 장면에서 이것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사실 이도 멘토로서의 존경이라기 보다는 그의 금력에 대한 존경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는 데이브와 같은 진짜 멘토의 존경을 받고 싶었다. (멘토로서의) 존경을 받는 것은 다른 멘토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그런데 정말 비극은 데이브는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다. 즉 그는 누군가의 권위에 따르고 존경을 보낸다는 것을 하기 싫어한다기 보다는, 아예 그렇게 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마크 러팔로가 아주 훌륭한 연기로 이를 잘 보여주는데) 데이브에게 "존이 내 멘토입니다."라고 말하라고 비디오 연출가가 시킬 때, 그는 하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수긍하고 하려고 하는 듯이 보이지만, 말 그대로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것은 그의 천성처럼 보이며, 그가 다른 사람들, 특히 듀폰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것이 잘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비극은, 이 전혀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하는 혹은 알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만났을 때 발생했다. 존 듀폰은 멘토가 되는 법을 모르며, 데이브는 멘토라는 것을 대하는 법을 모른다. 존 듀폰이 어떤 의미에서 아직 어린아이였다면, 데이브 역시도 어떤 의미에서는 어린아이같이 깨끗한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김중혁 작가가 <씨네21> 993호에서 이 영화를 다룬 글에 데이브가 차를 고치다가 듀폰을 만나 총을 맞고 죽어갈 때 그의 팔에 쓰인 낙서 'P.U.KIDS'라는 문구를 보고, 혹 이것이 아이처럼 굴지 말자고, 더이상 아이가 아니라고 자신을 나무라는 의미는 아닐까,라고 쓴 구절이 있는데, 그런 해석이라면 위의 얘기가 통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영화와 이 글을 본 후 궁금해져서 이 부분을 찾아봤는데, 이 부분은 마크 슐츠가 데이비드 토마스와 사건 후 쓴 <Foxcatcher: The True Story of My Brother's Murder, John du Pont's Madness, and the Quest for Olympic Gold>라는 책의 시작머리에 나오는데, 차를 고친 후 아이들을 픽업(Pick Up)하러 가야한다고 자신에게 일러주는 의미였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 문구가 도드라지게 처리한 것은 이 영화에서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6.

<폭스캐처>는 이상하게도 영화가 끝난 후 잔상을 많이 남기는 영화다. 예를 들어 몇몇 기억에 남는 잔상들이 있다. "존이 내 멘토입니다."라고 말하라고 지시 아닌 지시를 받았을 때 마크 러팔로의 하고자 하는데 도저히 되지 않는 듯한 어색한 모습이나, 듀폰의 어머니 역을 맡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짓는, 스티브 카렐이 어떻게든 어머니 앞에서 멘토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쓸 때, 애쓰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도저히 못보겠다는 표정, 혹은 스티브 카렐이 고개를 약간 치켜 들고 동공이 비어있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이 멘토라고 만들어진 비디오를 보는 장면 같은 것 말이다. 내가 일부러 극중인물 대신 배우 이름을 쓰는 것은 이 영화에서는 이들이 모두, 이들 자신이 아니면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 같은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포스터에도 있는 가짜 코를 달고 약간 고개를 위로 치켜 뜬 스티브 카렐의 연기에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영화는 사실 그렇게 흔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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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매튜 본

Ending Credit | 2015. 2. 25. 12:54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이하 <킹스맨>)가 어떻게 재미있는지, 혹은 얼마나 글래머러스한 영화인지를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또한 영화 속 소품들의 럭셔리함이나, 킹스맨 요원 해리 역을 맡은 콜린 퍼스의 수트빨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다만 나는 영화 속에서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에 대해 그저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예를 들어 영화 속에 등장했던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와 같은 대사들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 대사는 영화에서 두 번 나온다.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 영화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해리(콜린 퍼스)의 교회 씬이다. 해리가 악당 발렌타인(사무엘 L. 잭슨)의 계략에 빠져 교회 안에서 광란의 살육을 벌인 후 어느 틈에 정신을 차리고 교회 밖으로 나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발렌타인이 그에게 총을 쏘기 전에 그에게 빈정대면서 이 말을 건넨다. "현실은 영화와 달라." 두 번째는 영화가 끝나기 직전이다. 주인공 에그시(태론 에거튼)가 발렌타인의 경호원 가젤(소피아 부텔라)과의 최후의 일전을 벌이며 그녀를 제거한 후, 악당 발렌타인을 처치하기 직전, 발렌타인은 이게 영화라면 원래 이쯤에서 영화 속 주인공들이 악당에게 하는 대사가 있지 않느냐고 이죽거린다(이 영화에서는 '영화'라는 매체 혹은 다른 영화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는 편인데, 예를 들어 악당 발렌타인은 그 언급의 빈번함으로 볼 때 스파이 영화 애호가 정도로 설정되어 있는 듯 하며, 해리가 에그시를 요원으로 끌어들이려 할 때 <프리티 우먼>이나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영화들이 언급되기도 한다. 물론 이 영화가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영화와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 이렇게 '영화'라는 것이 언급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때 에그시는 발렌타인에게 그 대사를 되돌려준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그리고 발렌타인도 그 대사에 수긍한다.

 

위에서 언급한 광란의 살육 축제(적절하지 않은 표현이지만, 사실 이보다 적당한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가 벌어지는 교회에서의 씬은 어떤 액션의 구성이나, 카메라 워크, 혹은 씬 전체의 흐름 같은 부분에서, 많이 언급되었듯이 분명히 매우 인상적이며, 매혹적이다. 그러나 사실 내용적으로 보자면 조금 관객을 뜨악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흔한 말로 이를 일종의 반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왜냐하면 여기에서 광란의 살육을 벌이는 주체가 지금까지 영화의 전반부에서 선(善)의 편에 선 좋은 멘토 해리이기 때문이며,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비록 약간의 극단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죽을 이유는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선한 인물이 무고한 사람을 (그것도 대량으로) 살상한다는 어떤 아이러니가 있다. 물론 영화 속에서 선한 인물이 어떤 계기로 인해(그것이 선한 인물 본인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라도) 돌변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이전에 어떤 암시가 주어지거나, 혹은 그 장면의 처리가 상당히 조심스럽게 진행된다. 그런데 이 영화 <킹스맨>에서 가장 유쾌하게 묘사된 씬 중에 하나는 이 씬이다. 이 장면은 화려하고 즐거운 무엇처럼 묘사되었다. 그리고 이 뒤에 발렌타인의 부기가 따른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즉 간단히 말해서 이 씬은 일종의 영화적 규약, 혹은 믿음을 무너뜨린다. 선한 이는 선한 이를 해치지 않는다는 그런 믿음 말이다. 물론 선한 이가 돌변하여 선한 이를 해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 때에는 물론 그를 더 이상 '선한 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킹스맨>에서는 조금 다른 것이 이 장면이 이어진 후에도 해리는 여전히 선한 인물로 남으며, 영화적 서사흐름은 이 씬으로 전혀 깨지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배가된다. 다시 말해서 이 씬이 건드리는 것은 인물이나 서사가 아니라, 어떤 '영화적 규약' 혹은 '영화'라는 것에 대해 물음이다. 즉 발렌타인이 이 때 현실이 영화와 다르다고 말할 때, 그것의 방점은 '영화'보다 '현실'에 찍혀 있으며, 발렌타인은 '이제 그런 것은 더 이상 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해리의 세계, 즉 이 교회 씬 이전까지 이 영화의 기본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파이 영화의 글래머러스함, 즉 수트, 각종 소품, 매너, 느끼함, 단정함, 매력적인 여자, 신사, 예의, 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대의를 위한 희생과 같은 것들이다. 이는 단지 이 영화에 국한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위에 언급하였듯이 발렌타인은 스파이 영화의 광팬이며, 그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스파이 영화란 다니엘 크레이그 이전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로 대변되는 그런 스파이 영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발렌타인이 현실이 영화와 다르다고 할 때, 이는 이런 스파이 영화는 이제 더 이상 '현실적인 영화'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며(왜냐하면 결국 발렌타인도 영화 속 인물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스파이 영화는 이제 다니엘 크레이그 같은 피로한 노동자 유형의 007이 등장하거나, 제이슨 본과 같은 보다 현실에 발을 디딘 것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것이 물론 실제의 스파이 영화의 흐름에서 생겨난 '현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새로운 타입007, 혹은 제이슨 본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스파이는 기존 스파이 영화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났으, 이러한 류의 영화들은 항상 이것이 '리얼' 즉 현실임을 강조하며 기존 스파이 영화의 글래머러스함에 질린 관객들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세상일이 늘 그렇듯이 반동은 반동을 불러오며, 첨단은 복고를 낳는다. 이 영화 <킹스맨>은 이런 반동의 흐름에 다시 반동을 꾀하는 영화다. 발렌타인이 영화의 중간에 '이러한 것은 이제 영화가 아니야. 현실은 달라'라며 기존의 스파이 영화들에 영화적인 죽음을 선고할 때, 다시 그 발렌타인에게 죽음을 선고하며, '아니 그렇게 말하는 너도 영화잖아. 결국 영화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처음 발렌타인이 해리에게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라고 말할 때 그 방점이 '현실'에 찍혀 있다면, 두 번째 에그시가 발렌타인에게 그 말을 건넬 때에는 그 방점은 '영화'로 옮겨와 있다.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몇몇 구성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영화의 초중반부 에그시와 록시 등이 킹스맨이 되기 위해 받는 훈련들은 리얼인 것처럼 포장되었지만(훈련 중 죽을 수도 있다고 겁을 주며, 마치 실제로 그런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은 시뮬레이션이며(결국 영화는 일종의 고도로 조직된 시뮬레이션이다. 예를 들어 기차길에 묶인 상태에서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강요받는 영화 속 훈련처럼 말이다), 해리가 교회에서 살육을 벌일 때에 그것을 모니터로 바라보는 에그시나 멀린(마크 스트롱)의 뜨악함이 있으며(즉 이 장면에서 이를 멀린이나 에그시, 그리고 악당 발렌타인마저도 마치 영화처럼 모니터로 바라본다는 것이 재미있다. 멀린이나 에그시의 화면을 바라보는 뜨악한 표정이 새로운 유형의 스파이물을 보는 관객의 뜨악함이라는 이 영화의 조롱이 여기에 들어있지 않을까), 결국 에그시는 기존 스파이 영화의 어떤 장면들을 비슷하게 재현한 다음, 악당을 물리치고 사랑을 쟁취한다(예를 들어 기존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상당 부분 영화의 마지막이 결국 007이 여자를 후리는 것(그다지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으로 끝났음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에그시가 발렌타인의 소굴을 부수는 마지막도 기존 본드 시리즈들을 꽤나 떠올리게 하는데, 그 영화들에서 항상 마지막 최후의 대결은 적의 소굴 한복판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거니와 적들의 하얀 위장복 같은 것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물론 감독 매튜 본이 영리한 것은 복고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되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일정 부분 새로운 요소가 가미되어야 하는데, 그가 선택한 것은 이른바 병맛 컨셉, B급 감성이다. 예를 들어 발렌타인의 충복 가젤은 기존의 블랙플로테이션 영화 등에서 신체의 일부가 무기로 변형된 여성들의 계보에 넣을 수 있으며, 영화 속의 어떤 유머들(예를 들어 해리의 집 벽을 장식하는 선(SUN)지 같은 것들 말이다)이나 넘쳐나는 고어적 설정 등이 그러하다. 물론 그 고어적 설정들이 넘쳐나지만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B급 영화들이 기존에 구축해 놓은 구조에 빚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B급 감성이 이러한 이 영화에 잘 결합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이 B급 감성과 이 영화의 이러한 메시지가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편하게 예를 들어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고어나 피칠갑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것이 현실과 적절한 줄타기를 행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현실과 적당하게 비껴서 있다. 현실이 영화에 비척비척 밀고 들어올 때 그 쾌감은 높아질 수 있지만, 그만큼 관객의 자리는 위협받는다. 줄이 높아질수록 줄타기의 쾌감은 올라가지만 떨어질 때의 충격은 더 큰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결국 영화는 '현실'과 다르다는 것이며, 영화는 영화라는 것을 인정하는 한에서, 그 줄의 높이를 어느 정도로 유지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줄을 높일 수 있는 기술은 점점 발달하고 있지만, 그 떨어질 충격파를 계산할 정신은 여전히 빈곤한 것 같다.

 

 

덧.

내게 흥미를 주었던 캐릭터는 에그시나 해리보다는 악당 발렌타인인데, 이 영화의 발렌타인은 최근 몇몇 영화들의 캐릭터를 연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 천재 미치광이는 <인터스텔라>의 만박사나 <설국열차>의 윌포드와 같은 인물을 연상시키는데, 특히 윌포드와는 공유하는 지점들이 꽤 많다. 한정된 자원만을 소비하여야 하기 때문에 결국 인구를 줄이는 방법이 해결책이라는 그의 결론도 그러하거니와 그가 이를 위하여 내놓은 방법론, 즉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도 그러하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자본주의의 끝에 서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에 있던 윌포드, 그리고 0.1%의 플루토크라트 발렌타인).

 

 

 

 

 

- 2015년 2월, CGV 역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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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 잡담

Ending Credit | 2015. 1. 20. 18:05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1.

윤제균의 <국제시장>을 보았다. 이미 여러모로 말이 많은 영화이고, 영화 내외부를 둘러싸고 상당히 구체적이고 풍부한 논의들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 더 붙일 말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영화를 보며 스쳐 지나갔던 몇몇 감상들을 짤막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2.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여기저기에 윤제균 감독의 인터뷰가 많이 실리고 있다. 윤제균 감독은 여러 매체에 거의 비슷한 내용의 소감을 밝히고 있는데, 그 하나는 이 영화를 둘러싼 정치적 이념 논쟁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와 관련된 것이다. 그 인터뷰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윤제균 감독이 이야기하는 이 영화를 만든 동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버지 세대에 보내는 헌사, 다른 하나는 세대 간의 소통과 화합을 위한 것이다.

 

3.

나는 한 가지에는 약간은 동의하지만, 다른 하나에는 조금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먼저 이 영화가 아버지 세대에 보내는 헌사라는 점. 솔직히 나는 영화를 보면서 왜 이런 이야기가 이제서야 나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간 우리 근현대사의 어떤 지점들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 상당수의 영화들이 어떤 정치적 태도를 표면적으로 유지하거나, 특정의 사건을 통해 내부 전체를 깊숙이 들어가 조망하려고 노력하는 모양새였다면, 이 영화처럼 적어도 표면적으로 정치적 태도를 탈각한 것처럼 보이고, 특정의 사건이 아닌 어떤 세대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는 많지 않았다.

 

4.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이 영화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입에 달고 사시는, 수십 년 동안 반새누리(반한나라)라는 기조를 지켜오신 우리 아버지를 영화의 거의 시작부터 끝까지 울게 만들었나. 그러니까 적어도 이 영화에는 반새누리이든, 혹은 반새정치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상관없이 눈물을 짓게 만드는 어떤 지점들이 있다. 그리고 그 지점들은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어떤 정치적인 구호나 이념과 조금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며, 나름의 충실한 재현과 적절한 위로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독일에서 광부로 고생하는 덕수(황정민)의 모습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했던 우리 아버지가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런 부분을 칭찬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5.

그러나 그것이 흔히 논의된 대로 정치성을 완전히 탈색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표면적으로'라는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이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일텐데, 이 영화의 중간중간 비어있는 수많은 지점들을 채우고 있는, 혹은 채우려는 욕망을 보이는 다른 무엇인가가 조심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정치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들이기 때문이다.

 

6.

이 영화는 크게 네 가지의 사건을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국전쟁 중의 흥남철수, 광부들의 파독, 베트남 전쟁, 이산가족찾기가 그것이다. 일각에서는 이 사건들의 선택이 부적절했다고 말한다. 그 이면에 있는 독재정권이나, 그에 맞선 반독재투쟁과 같은 것을 그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물론 반론도 있다. 덕수의 삶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므로 이 사건들이 중심이 되었다는 반론이 그것이다. 나는 이 반론도 충분히 가능한 답변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이 사건들이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국면이었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7.

다만 의아한 것은 이 사건을 그리는 방식인데, 이 사건은 덕수를 축으로 하여 통과하는 듯이 보이지만, 문득문득 그 축을 벗어나는 지점이 있으며, 그 벗어나는 지점들이 어떤 정치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초반의 흥남철수 장면에서 덕수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미군 사령관(아마도 맥아더인듯한)에게 피란민들을 배에 실어달라고 호소하는 한국인 통역관의 모습과 결국 미군 사령관이 무기를 버리고 배에 피란민들을 싣기로 결정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 장면은 덕수의 눈으로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후에 어떤 장면을 보여주기 위함이고, 그 장면은 베트남전에서 자신들을 태워달라고 간청하는 베트남 주민들의 요청을 결국 거부하다가 태우고 마는 덕수의 모습과 정확히 대구를 이룬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오로지 어떤 모습을 연상시키기 위해 존재한다(스토리 상으로는 도무지 필요가 없다). 그 모습이란 성장한 한국이라는 국가로 표상된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살아남고자 애썼던 처지에서 이제는 누군가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위치. 아니 조금 덜 삐딱하게 말하자면 이제는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위치. 이러한 것은 기브 미 쪼꼬렛을 외쳤던 어린 덕수의 모습과 이제 베트남 소년에게 초컬릿을 건네주는 덕수의 모습과 같은 장면(그리고 이 장면에서 마치 필요하다는 듯이 소년은 덕수에게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혹은 독일 광산에서 관리자 앞에 무릎을 꿇었던 영자(김윤진)와 외국노동자를 조롱하는 어린 학생을 훈계하는 덕수의 모습으로 다시 비슷하게 변주된다.

 

8.

그러니까 이 영화의 비어있는 어떤 장면들에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가끔 고개를 들이미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국가라는 이상한 녀석이다. 휴전 소식을 들으며, 국가가 힘이 약하니 자기들 맘대로 하는 것이라는 멘트, 혹은 정주영의 꿈을 비웃는 소년들과 결국 정주영의 꿈이 이루어졌다는 신문기사, 혹은 노년의 덕수와 영자가 대화를 하는 풍경에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부산의 (예전과 비교되는) 발전된 풍경과 같은 것 말이다(그들은 왜 굳이 옥상에 올라가서 이 대화를 하는 것일까, 혹은 감독은 왜 굳이 나비를 통하여 이 풍광을 돌려서 보여주는 것일까).

 

9.

물론 가장 의미심장하고도, 웃긴 장면은 대통령도 감명 깊게 보았다는 그 장면일 것이다. 덕수에게 베트남전에 가지 말라고 호소하는 영자와 이것이 내 팔자니 어쩔 수 없다는 (약간은 이상한) 항변을 하는 덕수의 언쟁을 봉합하는 국기게양식. 이 장면을 일종의 풍자라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나에게는 앞에서 이야기한 장면들과 맞물려 이 장면은 조금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일단 이 영화는 장면들이 기능적으로 분할되어 있다. 즉 웃기고자 하는 장면들이 있고, 울리고자 하는 장면들이 있으며, 그것은 철저하게 구분된다. 즉 음악이나 분위기로 이제부터 울리겠습니다, 혹은 이제부터 웃기겠습니다,라고 이 영화는 장면마다 선언하고 시작한다. 그런 구분으로 보면 이 장면은 명백히 웃기고자하는 장면이 아니며, 도리어 구조상으로 볼 때 갈등이 최고조되는 시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점은 이 장면이 이 영화를 통틀어 유일하게 덕수에게 그의 삶에 대해서 묻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덕수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남은 가족을 지켜내라는 아버지의 말씀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삶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인다(그의 어떤 '욕망'이 드러나는 장면은 고시학원에서 도강을 하다가 쫓겨나는 장면밖에 없다). 그런데 아무도 하지 않고 제기될 틈도 없어 보였던 그 질문을 영자가 한다. 여기에 당신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이때 울려퍼지는 애국가라니. 왜 그는 그 질문에 답변하지 못한채, 여전히 비어있는 무엇인가로 남겨져 있는가. 이 영화에서 덕수에게 부여한 위치는 무엇인가. 사건들을 관통하여 보여주기 위한 투시경일뿐인가(예를 들어 이 영화와 비교되는 저메키스의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가 지능지수가 낮은, 그러므로 사건들을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물론 그런 의미에서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10.

그러니까 나는 이 영화가 헌사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악조건 속에서 엄청난 고생을 했으며, 적어도 그것이 자식 세대들, 혹은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말해진다면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자꾸 슬며시 고개를 들이미는 녀석이 있다. 그것은 국가라는 녀석이며, 국가 발전이라는 환상이다. 나는 이것이 아버지 세대가 이뤄낸 무엇을 자꾸 국가가 가로채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족이 가족 이상의 가족주의가 될 때, 혹은 그 가족주의가 하나의 국가라고 말해질 때, 실제의 가족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그 고리를 어떻게 단절시킬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의 어떤 단초를 <인터스텔라>나 <설국열차>에서 보았다.)

 

11.

그러니까 마지막의 실제 가족은 이상한 위치에 서 있다. 나는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이상한 장면은 이 장면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아버지(의 유령)를 만나고 있는 덕수와 분리된 가족들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윤제균의 컷이다. 자식들은 아무도 덕수에게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고생한 것을 안다, 그러니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것은 그가 오래전 헤어진 아버지의 환영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아버지의 형상으로 나타난 환영'은 누구인가(무엇인가).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겠다. 지금 우리 아버지 세대들에게 그런 위로를 건네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이 사실은 환영(환상)에 불과한 위로라고 해도 말이다.

 

12.

그 환영이 국가라는 아버지이다,라고 도식적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장면은 여러모로 아쉽고 미심쩍어 보인다. 왜냐하면 앞에서 윤제균 감독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이 영화가 세대 간의 화합과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화합과 소통의 가장 첫걸음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이며, 이것을 영화로 말한다면 적어도 상대방을 이해할 여지가 있는 무엇인가로 그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덕수는 이해할 여지가 있지만, 자식들에게는 아무런 이해의 여지도 없다. 이 영화에서의 젊은 세대는 내가 보기에는 (흔히 말하는) 그저 기능적인 나쁜 캐릭터이다. 그들은 괜히 외국인노동자에게 시비를 걸고, 늙고 게다가 아픈 부모에게 자식을 맡기고 놀러가고, 부모의 이야기는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다. 이런 캐릭터들에게 어디 이해할 여지가 있다는 말인가.

 

(덧붙이자면, 물론 이는 영화가 어떤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이산가족상봉을 그린 후 현재로 건너뛰는 선택 말이다. 덕수와 자식들이 단절된 것은 이 시기의 어떤 것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시기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오로지 소통이 단절된 현재를 보여줄 뿐이다. 이도 물론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3이라기보다는 덧.

나는 그래서 윤제균 감독의 인터뷰가 솔직하지 못했다라기 보다는 사실 조금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그래야 더 재미있고, 더 관객이 많이 들잖아요,라고 말하면 안될 이유가 있는가. 우리 이제 그런 정도는 '익스큐즈'할 수 있는 쿨한 관객이잖아요. 이미 그렇게 말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잖아요. (허지웅의 '정신승리하는 사회'라는 코멘트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의 그런 말은 적어도 영리한 멘트는 아니다. 그가 적어도 논란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고 항변한다면 말이다.)

 

 

 

- 2015년 1월, CGV 역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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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을 위한 시간, 다르덴 형제

Ending Credit | 2015. 1. 5. 12:27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할 수 없는, 그렇지만 해야만 하는 선택을 보여주는 영화는 대체로 늘 어렵고 힘들다. 그렇지만 다르덴 형제의 신작 <내일을 위한 시간>은 이 힘든 선택을 직관적으로, 상당히 쉬운 문법으로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생각이 필요없을 정도로 간단하다. 산드라(마리옹 꼬티아르)는 병에서 회복한 후 복직을 희망하지만, 1000유로의 보너스와 자신의 복직 중에서 선택하여 투표하자는 회사의 결정에서, 자신을 선택하도록 회사 동료들을 설득해야만 한다. 월요일 투표를 앞둔 주말의 이틀 동안 말이다. 이 영화는 그런 산드라의 이틀을 그대로 따라가며 16명의 동료들을 차례로 만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게 다다(영화의 원제를 직역한 영어제목은 <Two Days One Night>이다). 별다른 부수적인 플롯도 없고, 별 그럴듯한 사건도 없다. 카메라는 토요일 오전부터, 투표가 이루어지는 월요일 오전까지 산드라를 집요하게 쫓아다닐 뿐이다.

 

언뜻 보면 이 선택은 당연한 선택처럼 보인다. 1000유로의 보너스와 회사동료의 복직 사이에서의 선택 말이다. 왜냐하면 현재 이러한 선택은 어디에서나,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처럼 프랑스의 작은 회사에서나, 혹은 글로벌한 대기업에서나 하다못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복직 문제 같은 것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논리,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선전되고, 받아들여지는 논리이기 때문이다(이 영화의 회사 동료들의 면면을 보면 유럽의 저소득층 노동자들이 당면한 현실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노동시장도 만만치 않다). 우리가 나쁜 놈들이거나, 악마라서 너희들을 자르는 것이 아니야. 누군가가 나가야만 나머지 모두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줄어들지 않거나, 회사가 지속될 수 있는데 어떡하겠니. 누군가는 나갈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원망하지마, 니가 다른 사람들보다 능력이 떨어지는데 어쩌니, 바로 그 논리. 즉 이 영화에서의 각 개인당 1000유로의 보너스는 앞으로 나갈 산드라의 월급을 미리 나누어 주는 것에 불과하다. 자본가의 이익은 어떠한 선택을 한다해도 그대로 유지된다. 다른 대다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딱한 것은 계속 안정제를 입 안에 털어넣으며, 어쩔 수 없이 동료들을 만나야만 하는 산드라만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선택을 강요당하는 동료들 모두가 그에 못지않게 딱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영화 속에 나온 말대로 이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그들이 산드라에게 미안해할 이유, 혹은 그 반대로 산드라가 그들에게 미안해할 이유가 없다. 이것으로 인해 그 노동자들 누구도 아무도 실질적인 이득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그들의 노동의 양은 산드라가 빠진 만큼 늘어날 것이다. 그 보너스의 양만큼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무도 이득을 보지 않는 이 선택은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계속 되풀이된다. 왜? 그것이 노동시장을 제어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며, 제로섬 게임에서 참가자들은 결코 연합(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늘 분열하기를 바라며, 그들이 연대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들을 분열시키려고 애쓴다(영화 <카트>에서 마트 노동자들이 해고된 직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 그러니까 합치는 것이었으며, 자본가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주동자들을 회유하는 것, 그러니까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노동자들의 연대에 대응하는 자본가들의 첫 번째 무기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그리고 그 무기는 언제나 힘을 발휘한다.

 

 

그러니까, 사실 이 영화는 일종의 작은 실험실이자, 거대한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실험은 (사실 모든 실험들이 그렇듯) 잔혹하며, 실험 설계자는 여전히 실험실에서 가장 안락한 위치에 있다. 늘 딱한 것은 미로를 열심히 헤매야만 하는 흰색쥐들, 그러니까 실험 참가자일 뿐이다. 그러나 한탄만 하고 있다고 해서 나아질 것은 없다. 이 영화에는 (거의 실질적으로 보이는) 미로를 탈출할 몇 가지의 힌트가 있다. 마치 어떤 전략처럼 보이는 것들 말이다. 그 하나의 전략은 일대일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말하라는 것. 인간은 집단의 의견이라는 편한 울타리에 쉽게 숨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몇 백만의 굶어죽는 아이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굶어죽어 가는 단 한 명의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늘 더 효과적이다. 아니 그보다는 굶어죽어 가는 아이를 눈 앞에 데려다 놓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이것은 인정에 호소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정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 대신에 선택하여야 하는 것이 한 인간의 죽고사는 문제라는 것, 좋은 말이지만, 그 인간을 실제로 보기 전까지 우리는 그것을 쉽게 잊는다. 그것은 인간이 악해서가 아니라, 약해서 그렇다. 그러므로 그들은 묻는다. 산드라가 동료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이 항상 산드라에게 묻는 질문. (나 외에) 너를 지지하는 사람은 누가 있지. 대체로 인간은 어디에서든 소수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누구나가 많은 쪽의 편에 서기를 원한다. 그것 또한 이들(그리고 우리)이 단지 약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의 남편의 존재도 어쩌면 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사실 이 영화에서 남편의 캐릭터는 보기에 따라서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끊임없이 산드라에게 동료들을 만나도록 독려하는 산드라의 남편이라는 캐릭터는 좋게 볼 수도 있지만, 보는 이들을 짜증나게 만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산드라가 영화의 내내 동료들을 만나는 것을 너무나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왜 남편이라는 작자는 그녀가 그런 고통을 감내하도록 하는 것일까. 나는 다르덴 형제가 분명히 이 문제를 생각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실 이 영화에서 남편이라는 캐릭터가 없어진다해도 영화의 전체 진행에는 큰 문제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동료들을 남편이 같이 만나주는 것도 아니며, 항상 그녀 혼자 동료들을 찾아간다. 그저 산드라를 이혼한 싱글맘으로 설정해도 된다. 별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캐릭터가 필요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캐릭터가 없을 때를 실제로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럴 경우에 생기는 문제는 산드라가 훨씬 강인한 캐릭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의 산드라를 결코 약한 캐릭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자발적으로 그 고통을 감내할 만큼 강인해져서는 안된다고 다르덴 형제는 생각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그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이다. 

 

다르덴 형제는 늘 그런 약한 인간을 이야기해 왔다. 겉으로는 무심한 듯 보이지만, 늘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인간들을. 아니 인간이 아니라 카메라가 흔들린다고 말해야하나. 처음의 몇 장면들은 이것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임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의 곁에 바싹 달라붙어서 흔들리는 카메라, 아무런 배경 설명도 없이 갑자기 시작되어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야기. 다르덴 형제의 영화 속에서 마치 주인공의 실질적인 유일한 친구는 늘 그의 곁에 바싹 달라붙어 떨어질지 모르는 카메라처럼 보였다. 주인공이 흔들리면 카메라도 같이 흔들렸고, 주인공이 숨을 고를 때면 카메라도 같이 숨을 골라주었다. 이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도 카메라는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산드라의 곁에 붙어 있다. 산드라가 동료들을 만날 때, 동료들의 반응숏이 이 영화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반응숏보다는 여전히 카메라는 묵묵히 동료들보다는 산드라를 더 오래 비추었고, 산드라가 실망감과 고통을 애써 감추며 차로 돌아올 때 카메라도 같이 차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런 카메라가 이제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을 때 약간 달라진다. 투표를 마친 후 회사를 걸어나가는 산드라를 카메라는 따라가지 않고 멈춰선 후 묵묵히 계속 걸어가는 산드라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길게 말이다. 그리고 다르덴 형제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음악 없는 엔딩 크레딧이 이어진다.

 

그녀의 발걸음이 어땠을지, 그것은 영화를 본 이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 2015년 1월, CGV 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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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인 영화들

Ending Credit | 2014. 9. 17. 15:55 | Posted by 맥거핀.



(<명량>, <타짜 - 신의 손>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명량, 김한민, 2014

모르면 호로자식이제. 1700만이 넘게 든, 지금도 어딘가에서 흥행신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김한민의 <명량>에서 (의도치 않게) 많이 회자되고 있는 대사이다. 왜병들에 맞서 나라를 수호하는 이들의 노력을 모르는 후세인은 호로자식이라는 영화 속의 이 말이 그 이후에 여러 글에서 많이 인용된 것은 물론 이유가 있다. 일차적으로는 그것이 다른 글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영화 속에서 영화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대화 혹은 훈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상한 인터랙티브. 그것은 영화 안의 인물이 스크린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이상한 순간이면서도, 동시에 그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을 이상한 동질감으로 묶어 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 이 영화를 보러 온 우리는 적어도 호로자식은 아닌거야. 그 기이함이 내포하는 어떤 함의들은 다른 글들에서도 많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길게 할 말은 없지만, 다만 나는 왜 여러 수많은 단어 중에서도 하필이면 '호로자식'이 쓰였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이것이 이 영화가 가지는 어떤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호로자식(혹은 후레자식)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여러 설명이 나오는데, 예를 들어 '호로'를 오랑캐를 뜻하는 호노(胡奴) 혹은 호로(胡虜)로 보는 것, 혹은 '홀의'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즉 호로자식이라는 말은 오랑캐 노비(포로)의 자식이거나, 혹은 '홀의 자식' 즉 아버지 없이 어머니 홀로 키운 자식이라는 해석이다(사실 이 어원설은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고, 다만 여러 견해들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다만 한 가지를 추가하여 말하자면 전자의 견해로 본다면 사실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이 어원설과 연관된 부분에 병자호란 이후 청에 포로로 잡혀있다가 돌아온 여자들('환향녀(화냥년)')이 낳은 자식이 '호로자식'이라는 해석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이라면 사실 이 영화 <명량>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볼 수도 있는데, 병자호란은 임진왜란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랑캐이든 혹은 홀의 자식이든 간에 이 두 가지의 설명이 공유하고 있는 부분은 있다. 즉 이 '호로자식'이라는 말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결국 이 영화가 지향하는 것이 여기에 은밀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가 결국 원했던 것은 어떤 '교육용 비디오'가 아닐까 하는 물음이다. 

교육공학적으로 볼 때 교육용 비디오가 가져야 할 지향점은 명백하다(여기에 전공을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예를 들어 몇 가지 언급되는 지침들이 있다. 초기의 흥미유발과 긴장감 유발이 되어야 하며, 극적 효과를 가져야 한다. 적절한 장면에서 무엇을 다룰 것인지를 미리 알려야 하며, 매 장면의 도입에서 특정의 사인이 필요하다. 반복, 재예시, 비교/대조 등의 기법을 적절히 활용한다. 스타일의 일관성이 필요하다. 명료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재정리, 요약, 일반화 등을 통하여 무엇을 다루었는가를 알려주도록 한다 등등. 이런 지침들은 일반 영화와도 연관되는 부분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상충하는 부분이 많다. 즉 다시 말해서 사실 많은 영화들에서 이런 지침들은 필요가 없다. 초기의 흥미나 긴장감 유발이 필요하지 않은 영화도 많고, 스타일의 일관성이나 명료함은 도리어 일반 영화들에서는 독이 되는 면도 있다. 재정리나 요약 등도 일반적인 영화에서는 불필요하거나 영화의 완성도를 망가뜨린다. 즉 '교육용 비디오'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그것이 좋은 비디오(영화)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것이 교육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김한민 감독의 <명량>은 이 교육용 비디오의 지침들을 충실하게 따른다. 불가능한 싸움을 시도하는 이순신 장군(최민식)의 모습에서 긴장감이 유발되며, 분열 양상을 보여주는 왜의 진영과 우리의 진영은 이상한 대구를 이룬다(즉 분열된 인물들 속에서 이순신 장군만이 중심을 잡고 있다). 인물들은 전형적이며 대체로 그들의 성격은 고정되어 있다. 샷의 구성은 거의 관습적이며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며, 친절한 반복 설명을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친절한 요약정리와 부연설명을 빼놓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명량>은 상업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속살은 거의 교육용 비디오와 동일하다. 물론 어떤 영화들(사실 거의 모든 영화들)은 특정의 메시지를 담는다. 때로는 우리는 그것을 '교훈'이라고 약간은 비꼬는 의미를 담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많은 영화들에서 우리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 메시지가 적절하게 감추어져 있거나 교묘한 메타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한민 감독의 <명량>은 이보다 더 노골적이다. 아니 그 노골적인 메시지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가 가지는 전략이다.

그것이 노골적이지만 거부감을 중화시키면서 1700만이라는 숫자를 끌어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즉 이순신 장군은 어떤 이념과 사상에도 벗어나 있는 말 그대로 국민적인 영웅이고,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감독은 보다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야기의 참신함이나 구성의 독특함이 아니고 모두 아는 이야기를 최대한 멋지게 그려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이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우리는 누가 이겼나를 궁금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승리가 얼마나 멋진 것이었나, 그것을 눈 앞에서 보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관습적인 구도와 관습적인 샷이 필요했다. 새로운 구성과 새로운 샷은 관객을 어지럽게 만들 뿐이고, 기존의 것들을 보다 크게, 보다 세게, 보다 웅장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감독은 판단했을 것이다. 보다 노골적으로 말이다.

<명량>의 전반부는 지루하고 조금은 따분해보였지만, 후반부 해전 씬으로 넘어가면서 점차 영화는 활력을 되찾는다. 나는 그것이 처음에는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결국 해전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점차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처음의 해전의 준비나 우리 진영의 대립 같은 부분은 보다 사실에 가까운 부분, 혹은 사실에 기반한 고증들이 필요한 부분이고, 나중의 해전은 보다 허구에 가까운 부분, 혹은 상상의 나래가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해전에 대해서는 우리는 불가능한 승리를 알고, 약간의 전술에 대해 들어서 알지만, 사실 세부적인 전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영화 <명량>은 그 해전의 시시각각의 흐름을 마치 우리가 옆에서 보는 것처럼 묘사해준다. 다시 말해서 영화 <명량>은 고증할 수 있는 부분은 부실한 묘사를 하거나 어물쩡하게 넘어가거나, 왜곡된 묘사를 하고, 고증할 수 없는 부분은 공들여서 마치 사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묘사한다(나는 단순히 어떤 그 해전의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결과만을 놓고 봐서도 불가능한 승리였음이 사실이므로, 그 해전에는 분명히 불가능해보이는 무엇인가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정씨 여인(이정현)이 치마를 벗어서 흔드는 장면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비웃음을 당하지만, 그런 것이 실제로 있었지 말란 법은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알 수 있는 것에는 지루해하고, 나는 결국 알 수 없는 것만을 즐겁게 보았다. 혹은 이 교육용 비디오는 교육해야 하는 것은 어물쩡 넘어가고,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공을 들여 정밀하게 교육했다.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타짜 - 신의 손, 강형철, 2014

영화를 같이 보고 나온 분은 이런 말을 했다. 아니 뭐 도박을 벗어난다고 하더니, 결국 도박으로 복수하고, 도박으로 행복해지는구만. 나는 사실 그것이 '타짜'라는 영화, 그리고 그 영화가 가지는 어떤 딜레마를 뭉뚱그려서 이야기해준다고 생각한다. 타짜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메시지가 있다. 도박을 끊어라, 도박을 끊어야 행복해진다. 그러나 영화 속 어떤 인물들도 이 메시지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 속 인물들이 이 메시지에 따른다면 영화(혹은 만화)가 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박 끊고 성실하게 벌어서 성실하게 사는 게 도대체 무슨 영화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예 그 메시지를 없앨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메시지는 결코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은밀하게 암시될 뿐이며, 그것은 결말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니(조승우)가 나온 1편의 결말도 어딘지 모르게 어물쩡 넘어가는 느낌이 있으며, 대길(최승현)이 나온 2편의 결말도 그런 면에서는 비슷하다.

다만 내가 느낀 차이가 있다면 2편은 보다 노골적이라는 것이다. 1편은 흐릿하고 모호하게 처리했지만, 2편은 이것을 마치 해피엔딩처럼(혹은 눈밭의 광땡처럼) 찍었다. 글쎄, 영화를 본 분이 있다면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것은 해피엔딩인가, 아닌가. 아니면 질문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그들에게 남겨진 돈 때문에 그들은 해피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이것은 마치 감독의 전작 <써니>를 연상케 만드는 부분이 있는데, <써니>도 이 마지막 장면을 해피엔딩처럼 보이게 찍었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해피엔딩이 아닌데 해피엔딩처럼 '보이게' 찍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보기에 따라 해피엔딩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감독 강형철은 두 번 모두 그것을 행복한 무엇으로 보이게 했으며, 그 무엇에는 어쩌면 구린내 나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구린내 나는 무엇 중의 하나는 단적으로 '돈'과 같은 것, 혹은 돈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돈이 스승이고, 돈이 무엇이라도 규정한다는 영화 속 타짜들의 말은 단지 타짜들의 말일 뿐인가, 아니면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함의인가.

이 영화의 샷들은 <명량>과 거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특히 영화의 초반부부터 중반까지 영화는 계속 화려한 잔재주들을 구사한다. 이야기의 속도감도 있지만, 샷의 어떤 속도감과 재기발랄함이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 지치지 않고 이어지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재기발랄한 잔재주들은 결국 무엇을 위함인가. 이것은 영화의 내용과도 연관되는데, 영화의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화투판에서 어떤 잔재주들, 예를 들어 패를 돌린다거나, 패를 화려하게 섞는다거나 하는 등의 손기술들은 다른 무엇을 숨기거나 무엇을 바꾸기 위함이다. 즉 (영화 속 이야기로 돌아가면) 여자가 팬티를 슬쩍 보여줄 때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시선이 그 쪽으로 돌아간 자들은 반드시 어떤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영화는 계속 잔재주들을 끊임없이 구사한다. 그리고 그 잔재주들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무엇으로 돌리고자 함인 것 같다. 그 우리의 시선 이면에 있는 것들, 그래서 우리가 대가를 치른 것은 무엇일까.
  
즉 잔재주들을 보는 것은 즐겁지만, 그 잔재주들이 과해지면 다른 부작용을 낳는다. 그것은 그 잔재주 이면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화의 패착일까. 혹은 도리어 영화의 노림수일까(이것은 어쩌면 대길의 전략과 비슷한 것일까. 마지막 대길의 전략은 잔재주를 일부러 내보이는 것이다. 즉 그 잔재주를 일부러 잡아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략이 성공하려면 전제가 있는데, 그 이면에는 다른 잔재주가 없어야 한다. 즉 그 이면은 깨끗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깨끗했던가. 그것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영화의 노림수라고 해도 여전히 뭔가 꺼림칙함이 남는 것은 이 영화는 한끗이 장땡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혹은 그것을 말한다고 내세우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끗이 장땡을 이길 수 있는 데에는 결국 아무런 기술이 없다, 그것에는 예를 들어 대길의 진심 같은 것이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사실 이 영화는 그 속에 다른 기술을 슬그머니 감추고 있다. 이 점철된 잔재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감독의 전작 <써니>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즐겁게 보았지만, 이 즐거움 속에 어딘지 모르게 개운하지 않은 뒷맛이 남는다. 무엇인가가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 어쩌면 영화 속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지금까지 수술당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 화려한 손기술들, 혹은 화려한 샷들에 취해 있는 사이에 말이다. 당신의 셔츠를 슬그머니 올려보라. 어쩌면 무엇인가 수술 자국이 남아 있지 않은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

아무튼 두 영화는 흥행했거나, 흥행하고 있다. 스크린 독점에 대해서, 혹은 영웅을 갈망하는 사회에 대해서, 심지어는 박근혜 지지자들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잘 모르는 것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나는 박근혜 지지자가 아닌데도 그 영화 <명량>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영화 모두 노골적이라는 사실이며 그 노골적인 전략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골적인 교육용 영화, 그렇기 때문에 또한 노골적으로 상업적인 영화. 아니면 그 반대. 노골적인 상업적 영화, 그렇기 때문에 또한 노골적으로 교육적인 영화(이 시대에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최근에 한국영화들을 보면서 우려되는 것 중의 하나는 위의 영화들 외에도 점점 노골적인 영화들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점점 노골적으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은 그 노골성이 성공을 거둘수록 더욱 심화될 것이다. 영화는 점점 프로파간다와 경계가 흐려지고, 그것은 단지 영화만이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럴수록 점점 그들을 구별해 내지 못하며, 그 어딘가에서 "나를 가르치려 들지마라!"고 외치며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다. 


- 2014년 8-9월, CGV 역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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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영화 감상기

Ending Credit | 2014. 8. 12. 02:11 | Posted by 맥거핀.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군도: 민란의 시대>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최근에 극장에서 본 2편의 영화에 대한 감상이랄 것도 없는 간소한 감상.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맷 리브스, 2014

이 영화에서 아마도 가장 주목할 만한 순간은 시저가 유인원이 인간보다 낫지 않다, 그러니까 결국 유인원과 인간은 다를 바가 없다고 깨닫는 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장면이야말로 유인원이 일종의 '여명'의 시기에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반격의 서막'이지만, 사실 영화의 원제에는 '반격'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인간과 유인원의 대립구도를 만들고 싶은 수입사의 멋대로 제목일 뿐이고, 원래 제목은 간략하게 'Dawn of the Planet of the Apes'이다). 즉 이 영화에 이르러서야 유인원들은 예전과는 다른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고, 그것은 결코 현재의 인간들조차도 이룩하지 못한 단계였다. 그것은 우리(유인원 혹은 인간)가 다른 개체들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벗어나는 것이고, 그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결국 이 영화 속 세계에서 유인원은 이 행성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집단은 결국 상대방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니까(역사적으로 볼 때 자신들이 타 종족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종족들은 거의 대체로 파멸의 길로 스스로 들어섰다).

그것은 이 유인원이라는 집단의 내적인 부분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그 이전까지는 유인원은 그저 유인원이면 되었다. 즉 리더 시저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는 것이 일종의 유인원의 본성과 같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보다 유인원이 낫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저가 그저 무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격은 유인원이라는 사실, 그 자체면 되었고, 그 받아들여지는 유인원은 오로지 한 가지의 대원칙, 즉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여서는 안된다'의 테두리 안에만 들어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시저가 많은 희생을 얻고 얻을 수 있었던 값진 인식은 사실 유인원의 본성도 그런 것만은 아니며, 유인원도 결국 탐욕스러운 인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 유인원이라는 무리는 그저 '유인원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인원을 유인원이도록 하는 다른 무엇인가(단순히 서로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넘어서는)를 갖추어야 하는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즉 시저가 코바에게 내린 '너는 유인원이 아니다!'라는 정언명제 이후에는 유인원은 유인원이기 위해서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해지게 되었고, 그것은 이제 일종의 법과 질서의 단계(유인원이 유인원이기 위해서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라는 물음)로 이 무리가 진화하는 순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시저가 코바에게 선언하는 이 장면은 이상하게도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조커를 붙잡는 장면을 연상시켰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시저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 예상을 뒤엎는 선언이라니. 이 장면에서 리더의 조건이라든가, 결단력 같은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배트맨이라면 "너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물론 배트맨은 그렇게 선언하지 못해 끝끝내 조커에게 조롱당했지만..) 

그러므로 시저라는 위대한 영웅은 사라져가지만,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결코 인간들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법과 질서라는 새로운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운, 그야말로 '새벽의 단계'로 들어서고 있으니 크게 걱정은 안된다. 도리어 걱정되는 것은 영화 속의, 혹은 영화 밖의 인간들인데, 인간들은 여전히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위대한(사실은 위대하다고 착각하는) 리더의 영도에 따라 파멸의 길로 스스로를 자꾸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로가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믿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우는 어떤가. 시작하면 우리도 결국은 많은 희생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으며 끝끝내 전면전을 피하려 애썼던 시저의 고뇌가 요즘에는 현실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큰 전쟁에서든 작은 전쟁에서든.


군도: 민란의 시대, 윤종빈, 2014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다른 영웅을 보여주는 것처럼 밑밥을 깔았다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욕을 먹고 있는 영화가 있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 영화 <군도>는 초반에는 웨스턴의 형식을 빌려 일종의 영웅설화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처음 돌무치(하정우)의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은 웨스턴과 영웅설화의 이상한 조합이다. 돌무치는 설화 속의 영웅들처럼 비범하게 태어났고(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웨스턴의 영웅들처럼 일반적인 마을 집단에서 유리되어 있다(마을 외부 허허벌판 속에 있는 돌무치의 집). 설화 속의 영웅들처럼 어려서 고난을 받고(그는 18살에 어머니와 누이를 잃는다), 웨스턴의 영웅들처럼 혈혈단신으로 적진으로 침입해 들어간다. 물론 이는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주인공을 강화시키기 위한 장치. 돌무치는 이를 계기로 '추설'이라는 군도(群盜)의 간택을 받고, 이제 그 무리 속에서 성장하며, 그 영웅성을 극대화시켜 복수를 성공시킬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이상하게 비트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은 이제부터다. 돌무치의 영웅적인 성장과 그의 호쾌한 복수를 보여주어도 시간이 모자랄 판인데, 영화는 돌연 악역 조윤(강동원)의 캐릭터를 돌무치만큼 공들여 묘사하더니 그에게 절대힘, 그러니까 아무도, 심지어는 돌무치도 이길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을 부여한다. 이는 사실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는 악역은 주인공의 영웅성을 부각시킬 정도로 강력해야 하기는 하지만, 결국 주인공에게 패배하고 주인공의 영웅성을 극대화시키는 데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당연히 모를 리 없는 미친 영화감독 윤종빈은 조윤에게 그런 어마어마한 힘을 부여함과 동시에 이질적인 나레이션을 붙임으로써 그의 존재를 시작부터 관객들에게 강하게 각인시킨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가 미쳤다고 보는 관점은 이 영화를 영웅담으로 보는 관점에서만 타당한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이 영화를 영웅담으로 만드려는 의지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을 영웅담으로 보며, 왜 영웅이 그것밖에 안되냐는 비난은 오로지 애타게 영웅을 바라는 우리들의 의지가 빚어낸 오해는 아닐까. 왜냐하면 이 이상한 영웅담에는 가장 중요한 부분, 즉 영웅의 각성과 그의 성장이 전적으로 빠져있기 때문이다. 돌무치는 추설의 무리가 된 이후에도 그다지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마음 속에는 사실 백성을 살린다,라는 대의보다는 개인적인 복수가 여전히 더 크게 위치해 있으며, 그는 여전히 어리석고 별로 생각이 없어 보이며, 결국 조윤을 이기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조윤을 이기는 몫은 감독 윤종빈이 그에게 줄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그를 궁극적으로 이기는 것은 그가 아니라 이름모를 한 무리의 백성들이며, 영화의 제목은 '군도: 영웅의 시대'가 아니라 '군도: 민란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윤종빈은 몇 가지 설정들(예를 들어 타이틀롤)이나 음악들로 분명 어떤 착각을 준 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가 애초부터 찍고자 하는 것은 영웅설화나 웨스턴이 아니었다. 보통의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 일반 민중들은 그저 고통과 압제에서 신음하다가 영웅의 등장으로 구원받는 시혜의 대상이거나 혹은 영웅의 활약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구경꾼들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렇게 되면 문제가 있는 게 그렇게 되면 영화는 '군도: 영웅의 시대'가 되기 때문이다. 윤종빈은 선택을 해야했고, 그 선택은 결국 돌무치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고, 결국 민란을 선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민란은 결국 시혜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도 조윤에 대한 1차 습격이 결국 참담한 실패로 끝나는 것은 그들의 이제까지의 습격이 일종의 시혜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추설이라는 조직은 그 이전까지 백성들과 거의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들의 아지트는 아무도 모르는 산속 깊은 곳에 있고, 그들의 조직은 아무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의 조직은 일종의 엘리트 집단이고, 그들은 영웅으로서 백성 앞에 짠 하고 나타나 일종의 혜택을 줄 뿐이다(이런 이들의 일종의 시혜 의식은 그들의 회의 시간에도 잘 드러난다). 그런 그들이 조윤에 대한 재습격에서 결국 승리하는 것은 백성들의 자연스런 참여의 결과, 즉 진정한 민란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물론 이는 그들이 대폭 수가 줄어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국 이는 일종의 개방적인 조직으로 추설이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군도인 것이다).

이는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는 결국 구경꾼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는 자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조윤이 백성들과 대치한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누구든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자는 나오라는 조윤의 외침은 백성들을 향한 외침이면서 결국 자신을 향한 외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조윤이야말로 결국 자신의 운명에 순응한 자이기 때문이며, 아마도 이것이 조윤이라는 캐릭터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이유일 것이기 때문이다. 조윤은 실제의 조선시대의 많은 실제 인물들이 그러했듯이 벼슬길에 나아갈 길이 막혔기 때문에 명예보다는 재물로 방향을 돌린 '땅귀신' 중의 하나였으며, 그것으로 자신의 능력을 아버지에게 인정받기를 바랐다(그가 땅문서를 모아 가장 처음 한 일은 아버지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를 어떤 의미에서는 왜곡된 인정투쟁으로 보아도 될 것인데, 이의 기저에는 결국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일종의 체념이 들어가 있다. 즉 그는 그 자신의 물음처럼 연꽃의 의지가 아닌 신의 뜻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돌무치와 함께 창을 들고 따라 나선 민중들은 다르다. 그들은 그 스스로 신분제라는 신의 뜻을 벗어나려 하였으며, 이는 탐관오리의 손자로 태어났으나 추설의 무리에서 자라난 아이에게도 역으로 마찬가지일 것이다. 즉 이 역시도 연꽃의 의지인 것이다.


덧.
그래서 어떻게든 엮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은 의지는 잘 알겠지만, 이 영화 <군도>를 <명량>과 엮어서 <명량>에는 리더가 있지만, <군도>에는 리더가 없고, <명량>의 영웅담은 잘 짜여져 있지만, <군도>의 영웅담은 약하다느니 하는 비교는 조금은 부당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군도>는 사실 영웅담을 만들 의지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이며,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 일종의 영웅적 배경을 초반에 깔아야 했지만, 사실 하고자 하는 얘기는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반면 <명량>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고, 그저 그의 며칠을 보여주기만 해도 되었다. 적어도 이순신이 영웅인 것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테니. 아무튼 이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이 이상 할 말은 없다). 즉 어떤 사람들은 영웅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영웅을 결국 이야기하지 않는 영화에 그러니까 영웅이 없기 때문에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물론 영화의 흥행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군도>보다 <명량>이 흥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그것은 어떤 징후적인 문제와도 조금은 연관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흥행영화들이 늘 그랬듯이 영화의 완성도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명량>을 보지 않았으므로 이는 <군도>가 <명량>보다 낫다는 코멘트가 아니다).

얘기한 김에 한 마디 더하자면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위의 두 영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이나 <군도: 민란의 시대>나 거의 모든 캐릭터들이 살아 있으며, 그 캐릭터들을 모두 잡고 가려는 노력이 인상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군도>는 윤종빈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그랬듯이 캐릭터들의 열전이며, 그것은 특히 악역 조윤에서 빛을 발한다. 도리어 욕을 먹기는 했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왜 악역이 (주인공보다도 더) 빛을 발하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다크 나이트>가 배트맨의 영화가 아니라 조커의 영화라고 해서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뭐라하지 않는데 말이다. 아무튼 요즘의 누군가들은 악이 그저 맥락없는 악이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어떤 징후적인 문제와 연관되는 것 같다(다만 선한 우리가 그 '맥락없는 악'보다 나을 수 있는 점을 한 가지라도 찾는다면 적어도 우리는 어떤 맥락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을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2014년 7~8월, 대한극장, CGV 영등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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