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끄적거리기 | 2008.05.04 01:15 | Posted by 맥거핀.

시끄러운 세상이다. 말들은 넘쳐나고, 주장은 상반되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은 인터넷 세상을 떠돈다. 같은 사실을 놓고 한쪽에서는 미국산 쇠고기를 먹어도 안전하다고 하지만, 한쪽에서는 광우병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 글쎄, 본질적으로 이것이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이것은 기본적으로 팩트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책의 문제거나, 의견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운하를 건설하는 것이라든가, 대통령 측근들이 비리를 저지른다거나, 의료보험 민영화를 한다거나 하는 문제와는 이는 다른 지점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 즉 결정에 오랜 시일이 걸리는 일종의 회색분자들은 정보가 필요 이상으로 많으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TV를 틀면 우리가 수입하는 미국산 쇠고기는 광우병의 위험성이 높으며, 한국인들은 특별히 그런 광우병에 잘 걸리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다시 신문을 펴면, 그것은 잘못 알려진 정보이며,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며, 한국인이라고 특별히 위험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식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한우라고 그렇게 안전하지도 않으며, 광우병의 위험은 어떤 소에나 도사리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분명히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일 텐데 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상반된 것인가?

그러나 적어도 몇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적어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는 아직 상당히 미스터리한 부분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암의 메커니즘을 아직 완벽히 밝혀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어떻게 광우병에 걸리는지, 그리고 어떤 부분이 정말 위험한 것인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불확실한 확률로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이 확률은 적어도 0%는 아니라는 것. 0.00000......1%가 될 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어떤 확률은 있다는 것.

이렇게 놓고 보았을 때 이것을 놓고 싸우는 것은 그다지 현명해 보이지는 않는다. 가능성을 놓고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미궁 속에 놓여 있는 한, 그리고 현재처럼 광우병의 위험성이 논의의 중심에 놓여있는 한, 이 싸움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아니, 오해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 싸움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단, 우리 모두가 광우병 전문가가 아닌 상황에서 이러한 것이 논의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싸움이 자칫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까 경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싸움은 마치 얼마 전에 있었던 황우석 박사의 복제논란을 둘러싼 황빠와 황까들의 싸움, 그 대리전의 재판(再版)처럼 보인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가 일종의 과학적 캡슐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황빠와 황까들은 꽉 막힌 과학적 캡슐을 둘러싸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싸움을 벌였다. 왠지 지금은 그의 재방송 같지 않은가?

 

나는 그보다는 현 정부가 훨씬 더 공격을 받아야 할 사항은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담보로 하여 국민들에게 충분히 이해를 구하고 진행되어야 할 이 일련의 일들을 총선이 끝나자마자, 기습적으로 처리해버렸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이는 정확히 말하면 기습이 아니다. 총선 전에 이미 시나리오가 적혀 있던 일들을 그대로 시행한 것에 불과하다. 아마도 현 정부는 미국 비자 면제 등의 몇 가지 사탕만 던져주면 국민들이 그대로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단지 쇠고기를 싸게 먹게 해준다니까 국민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너무 단선적인 사고였다. 복잡하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지난 대선에서 사람들이 MB를 1위로 만들어 준 것은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 ‘잘 살게 될 것’의 기본은 ‘산다’는 것이다. 일단 살고 난 다음에야, 잘 살고 못 살고가 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광우병의 위험이 있다고 알려진 순간 어느 누구도 광우병의 위험이 있는 쇠고기를 먹고 죽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이는 현 정부가 발목을 잡히고 있는(아직 잡힐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현재의 지점이 흥미롭게 보여지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대운하도 아니고 의료보험 민영화도 아니고, 장관이나 수석들의 비리도 아니고, 미국과의 협상 때문이라니. 그것도 한우 농가들이 무너져서도 아니고, 식량주권을 내주어서도 아니고, 광우병 때문이라니. 현재의 사람들이 그저 먹고 사는 문제에 얼마나 가치비중을 두고 있는지, 이 사회가 얼마나 물질 기반으로 돌아서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사람들이 광우병으로 뇌에 구멍이 뚫리는 사진에 분노하는 것과 지난 총선에서 강북에 ‘뉴타운’ 공약이 먹혀든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연장선상에 와 있다. 이를 현 정부는 정말 간과했던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어차피 바보들이니까. 또 적당히 구슬러 주거나 적당히 얼버무리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것인가.

 

하기는 그들이 국민을 상병신으로 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상병신’으로 불릴 만큼 이미 바보짓을 저질렀으니까. 각종 비리에 얼룩져 있던, 그리고 단견적인 공약들을 남발했던 MB를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대통령으로 만들어줬고, 그들의 연이은 코믹스러운 그러면서도 공포스러운 행동들을, 마치 어린아이에게 볼펜을 집어주고 벽에 낙서할까봐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면서도 다시 총선에서 그들을 밀어주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야 현재 조선, 중앙, 동아일보 등이 이에 대응하는 방식, 그리고 정부의 고위공직자들이 이에 대응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는 없다. 동일한 내용을 6개월 전과 지금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능력, 같은 팩트를 전혀 다르게 전달하는 능력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한가 아닌가, 광우병 위험성이 높은가 아닌가는 미스터리 속에 놓여 있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이 이에 필요 이상의 공포를 느낀다면, (정부에서 흔히 하는 말대로 ‘오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 공포는 누가 만들어내었는가. 바로 정부, 조선, 중앙, 동아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몇 개월 전만해도 미국산 쇠고기를 절대 먹으면 안된다고 말해오지 않았던가. (지금 정부의 누군가가 그러더군.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의 위험성을 논하는 것은 다리가 무너질까봐 건너지 않는 것과 같다고. 그러나 우리는 이미 백주대낮에 다리가 무너지는 것도 경험해봤다. 왜 안 무섭겠는가?)

 

아무튼 지금의 이 촛불집회를 비롯한 국민들의 분노는 너무 늦거나 혹은 너무 빠르지 않은가 하고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다. 너무 늦었다는 것은 이것이 대선도 총선도 다 끝난 시점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가 아닌가 하는 것이고, 너무 빠르지 않은가 하는 것은 대운하, 삼성 문제, 여러 측근들의 비리, 아직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의료보험 민영화 문제, 여러 자립형 사립고를 비롯한 교육정책들 그리고 FTA 등 건드릴 것은 많은데, 이러한 분노가 잠깐의 분노로 그치지 않을 것인지, 작은 모닥불로 끝나지 않을지, 그래서 도리어 현 정부의 기를 살려주는 꼴을 낳지 않을지 걱정되기 때문이다.

뭐 아무튼 늦었다거나, 빠르다거나 하는 말을 이미 시작된 일에 첨언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촛불집회 같은 것은 좋아하지도 않고 불확실한, 또 하나의 캡슐을 둘러싸는 싸움이 될지 모르는 위험성을 안고 촉발된 일이지만, 지금은 대안이 없다. 소는 집을 나갔지만, 외양간은 언젠가는 고쳐야 한다. 다른 소를 키우려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오늘 ‘논어(論語)’를 읽다가 좋은 구절이 있어 여기에 첨언하고자 한다.

자하가 거보(莒父)의 읍재(邑宰)가 되어, 정치에 대해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속효(速效)를 보려하지 말고, 작은 이익을 추구하지 마라. 속효를 보려들면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작은 이익을 추구하면 큰 일을 이룩하지 못한다.”

子夏爲莒父宰, 問政, 子曰; 無速效, 無見小利. 速效則不達, 見小利則大事不成.

- 논어(論語), 자로(子路) 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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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Chungking Express), 왕가위

Ending Credit | 2008.04.30 01:23 | Posted by 맥거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경삼림>의 개봉일은 95년 9월 2일이었다. 물론 나는 이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겨우 날짜를 알았을 뿐이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개봉일로부터 한참 지나고 아마도 98년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 날짜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날짜를 기억도 못하는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이 영화를 보기 전후의 일들은 꽤나 난삽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와 관련지어서는 하나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학회 사람들과 영화를 보러 갔었다. 영화관에 간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하는 소규모의 영화제였다. 학교는 외대였고, 날짜는...아마도 봄이나 가을이었던 것 같다. 새벽에는 꽤나 추웠으니까. 밤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나는, 야외에 대형의 스크린을 걸어놓고 하는 그런 영화제였다. 말이 영화제였지,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대학의 영화동아리에서 주관하는 작은 행사였었던 것 같다. 거기에 왜 가기로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 학회의 누군가가 외대에 친구가 있었거나, 우연히 PC통신 게시판에서 그런 내용을 보았거나, 우리 학회에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었거나...하는 그런 시덥잖은 이유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다른 기억이 모두 틀렸다고 해도 지금 하나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우리가 매우 화면 가까이에 앉아서 영화를 봤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화면은 매우 컸다는 것이다. 스크린에 배우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 그 배우의 코가 적어도 웅크리고 앉은 나 정도의 크기는 되었으니까. 왜 그렇게 가까이에서 영화를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자리가 없어서였을 수도 있고, 그 곳의 구조가 이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나의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모두 세 편이었는데, 가장 처음에 나온 영화는 롱테이크가 무던히도 반복되는 영화로, 무언가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영화였다. 조금 늦게 도착하여 영화의 줄거리도 전혀 모르는데다가, 바라보는 화면은 곧 나를 지루하게 만들었으므로 꾸벅꾸벅 졸다가 옆의 친구가 옆구리를 찔러 다시 일어나서 보다가, 다시 졸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였다. 아주 훨씬 나중에야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그 영화는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영화가 <하류>였는지, <구멍>이었는지 모르겠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 때문에 지루했던 기억이 있으므로 <구멍>이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미묘한 관계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여 <하류>같기도 하다.

두 번째 영화부터는 비교적 생기를 가지고 졸지 않고 영화를 즐기며 볼 수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같이 갔던 일행 중에 한 친구가 계속 영화를 보며 비명을 질러대는 통에 졸음이 올래야 올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는 나 역시도 지금까지 본 공포영화 중에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그리고 아직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압권 장면 중 하나일 듯한 피바다가 되는 방과 ‘REDRUM’ 그리고,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는, 거대한 스크린에 클로즈업으로 비췄던 잭 니콜슨의 눈빛. (아마도 그 스크린이 과도하게 컸던 것으로 기억되는 것은 클로즈업된 잭 니콜슨의 눈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영화가 끝나고 난 후 다들 너무 공포에 떨어 피곤해진 데다가, 새벽도 꽤 이슥해지는 터라 우리 일행도 자리를 뜰 준비를 하였다. 그러자 영화제 관계자 한 명(아마도 그 동아리 학생 중의 하나인 듯한)이 살짝 다가와 우리를 잡았다. 그리고 미끼를 던졌다. “이 영화도 보고 가세요. 아주 야한 영환데.” 글쎄. 왜 우리를 잡았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많은 관객들이 이미 빠져나갔으므로 우리라도 잡아야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말에 이끌렸는지, 새벽이라 갈 곳도, 갈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정말 많지 않은 관객 속에서 그 날의 마지막 영화이자, 상당히 야하고 상당히 슬픈 영화를 보았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 포르노스타의 등장과 씁쓸한 몰락, 그리고 퇴장. 우리는 초반에는 은밀한 웃음을 교환하며 좋아하다가, 곧 속았다고 생각했고, 종국에는 우리도 역시 씁쓸해졌다. 그리고 슬퍼졌다.

슬퍼서 그랬는지, 아니면 마지막 장면에 쇼킹을 받아서 그랬는지 우리는 그곳을 나오며, 학교 앞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씩을 사서 몰락한 포르노스타 마냥 편의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차가 다니는 시간을 기다리며 나눠 마셨고, 나는 다시 우리 학교 앞까지 와 비디오 방에 가서 이 영화 <중경삼림>을 보다 잠이 들었다. 아마도 다음날 오전 수업을 기다리며 시간이나 때우자는 심산이었겠지만, 학교에서 수업이나 제대로 들었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 영화 <중경삼림>은 어느 날 TV에서 이 영화를 하는 것을 발견하고 비스듬히 누워 볼 때까지 내 기억 속에는 초반부의 임청하의 까만 선글라스와 노란 가발로 기억되거나, 뚝뚝 분절되던 이상한 화면(‘스탭프린팅’이라 불리우는)으로 기억되거나, 차이밍량과 <샤이닝>과 <부기 나이트>와 그저 한 세트로 기억되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을 되새기며 비스듬히 누워서 보다가, 어느 순간 자리에 앉았고, 그 영화가 좋아졌다. 그 후에 나는 이 영화를 주기를 가지고 습관적으로 반복해 보게 되었고, 내 기억 속에서 기억은 다시 <중경삼림>의 내용들과, 그리고 다른 영화들과 합쳐지고 분절되고, 더욱 난삽해져만 갔다.

 

이 모든 기억을 다시 떠올린 이유는 며칠 전 정성일 평론가의 음성해설로 <중경삼림> DVD를 다시 보았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사놓은 DVD인데, 그 동안 이런 음성해설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보게(듣게) 되었다.

정성일 평론가의 목소리는 꽤나 차분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가진 수많은 이야기들을 빨리 청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욕심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음성해설에서 정성일 평론가는 책 한 권으로 내도 될 만한 분량의, 수많은 알려진,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들려주는 동시에, 중간중간 의미 있는 장면을 짚어주는 것 또한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의 배경과 영화의 주제를 다시 되새겨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지만, 영화를 여러 번 본 나도 놓치고 지나갔던 장면들(예를 들어, 영화의 전반부에 왕정문이 가필드 고양이 인형을 안고 가게에서 나오는 장면이라든가)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는 그런 재미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도대체 정성일 평론가는 대본을 써놓고 이 이야기들을 읽어내려 가는 것일까, 아니면 영화를 보면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영화에서 평론가의 음성해설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평론가의 음성해설이란 결국 누군가의 하나의 영화를 본 감상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 되었지, 왜 이것을 본다(듣는다)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난삽한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 것은 정성일 평론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성일 평론가가 해설 중간에 왕가위와 차이밍량을 비교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주문해 놓은 <스틸라이프> DVD가 보고 싶어졌다. 그 DVD에도 정성일 평론가의 음성해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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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I, 진중권

The Book | 2008.04.28 22:00 | Posted by 맥거핀.

한국사, 세계사, 음악사, 미술사, 문학사...대부분의 사람들이 ‘-사(史)’로 끝나는 책에 가지는 공통적인 선입견이 있다. 책에는 수없이 많은 인물들과 사건들과 년도들이 나올 것이며, 그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과 년도들은 종국에는 우리를 매우 지치게 만들 것이라는 점. 하기는 이것은 그간 우리나라의 수많은 교육에서 행해온 방식이기도 하다. 역사 그 자체를 다루는 국사와 세계사 시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어라는 과목도 따지고 보면 결국 하나의 문학사를 배우는 과정이며, 물리나 수학 등도 그간 물리학자나 수학자들이 구축해 놓은 거대한 그 나름의 역사들을 배우는 과정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무튼 간에 우리는 1492년과 1592년 중 어느 것이 임진왜란이고, 어느 것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인지 고등학교 이후로 내내 헷갈려하며, 여전히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 <서양미술사 I>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역시 마찬가지로 겁이 더럭 났다. 이 책에는 또 얼마나 많은 년도들과 작가들과 작품들이 출현하여 머리를 아프게 할 것인가.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단지 진중권의 ‘말빨’ 때문이었다. 그가 여러 지면이나 방송에서 보여주는 현란한 말솜씨를 또 여기서는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그는 복잡하고 고루한 이야기들을 또 어떤 방법을 써서 가공하여 들려 줄 것인가. 그리고 그런 나의 기대는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이 책은 각 장을 시대 별로 분류하면서도 교묘하게 시대별 분류가 낳을 수 있는 지루함을 피해간다. 즉 언뜻 보면, 1장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미술을 다루고, 2장은 중세의 예술을 다루는 식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 책에서는 그러한 표면상의 시대구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이 책에서 각 장을 구별하는 것은 미술의 근원적인 요소이다. 즉 미술의 근본 요소인 ‘형태’를 1장에서 다루고, 또 다른 근본 요소인 ‘색채’를 2장에서 다루고, 다른 요소인 ‘공간에 대한 투시법’을 3장에서 5장까지 다루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서술이 시대 구분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진중권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미술의 각각 원리들의 발전이 곧 서양미술의 발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형태를 구상하고 그것의 색을 생각하고, 그 형태를 공간에 배치하듯이, 서양 미술은 인체의 적절한 비례 묘사를 중시했던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의 미술에서부터, 초감각적 빛(색채)을 중시했던 중세의 예술, 그리고 자연과 공간의 재현을 중시했던 르네상스의 예술로 발전해나가는 식이었고, 결국 이 자체가 미술의 역사인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단순한 시대구분을 놓고 서술하는 방식을 벗어남으로써 역사 서술에서 독자들이 가질 수 있는 지루함의 함정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각 장을 형태, 색채, 공간, 양식의 변화, 비평 등 하나의 소주제들로 통일성 있게 이끌어갈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동시에 위에서 말했듯이 ‘서양미술사’라는 큰 흐름도 놓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구성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를 의도적으로 각 장을 하나의 중요한 미술사의 문헌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도 있다. 즉 1장에서는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논문을 토대로, 각 시대와 문화가 인체의 묘사에 각각 어떤 비례를 사용했는지를 고찰한다면, 2장에서는 로사리오 아순토의 저서를 토대로 미와 예술에 대한 중세인의 생각을 살펴본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은 12장으로 이루어진 서양미술사임과 동시에 12권의 논문(저서)을 효과적으로 재구성한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공시성과 통시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하다 보면 이러한 구성이 갖는 단점이 생길 수 있다. 12개의 주제를 12권의 논문을 통해서 살펴보다 보니 책이 어려워지고 방대해지기가 쉬운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생각 외로 상당히 쉽다. 미술에 대한 문외한인 나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유명한지 처음 알았다;) 쉽게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을 정도다. 아마도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효과를 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나는 각각의 내용을 실제의 작품을 놓고 설명하듯이 서술하고 있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자 ○○○의 이 작품을 보자”는 식의 문장이 매우 많이 나온다. 용어나 설명이 어려워도 대부분 그림을 보다보면 이해되는 부분이 많다. 또 하나는 문장력이다. 진중권 씨의 인터뷰 기사 등을 자주 보는데, 그 때마다 내용 자체를 떠나서 비유를 써서 설명하는 능력이나, 주어와 서술어의 일치, 조리 있게 문장을 끊어서 말하는 능력 등에 감탄할 때가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런 ‘화술’이 ‘문장력’으로 어느 정도 살아나는 느낌이다. (아무리 쉬운 내용도 문장이 엉망이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와 반대로 아무리 어려운 내용도 문장이 정확하고 깔끔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예전의 서양 철학 책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용 자체가 난해하기도 하려니와, 엄청나게 난삽한 번역 문장들이 한 몫을 했다면 내가 지나치게 말하는 것일까.)

 

361페이지로 이루어진 17000원의 책. 책의 가격을 단순히 페이지와 가격의 비례로 따질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비싸다. 그러나 비싼 만큼 값어치가 있고, 게다가 모든 그림은 올 컬러다.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ps. 다만 몇몇 오기나 이상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165페이지의 표에서 ‘해석의 교정원리’를 다루는 부분을 보면, I과 III이 모두 똑같이 ‘양식사’로 되어 있는데, 책의 내용상으로 보면 III에는 ‘상징사’가 들어가는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330페이지의 그림 18은 내용상으로 보면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이 아니라 ‘앵그르’의 그림이 맞는 것 같다.

서양 미술사. 1 상세보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예술 감각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술 이야기! 미학의 시각으로 보는 서양 미술사! 미학의 눈으로 읽는 고전 예술의 세계『서양 미술사 1』. 《미학 오디세이》로 잘 알려진 진중권이 이번에는 미학의 눈을 통해 보는 서양의 고전 예술을 소개한다. 이 책은 시간적 흐름에 따라 소개하던 여느 서양 미술사 도서를 벗어나 '서양미술의 원리'와 '서양미술의 역사'를 하나로 묶어낸 것이 특징이다. 서양미술의 원리를 그 시대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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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eureka), 아오야마 신지

Ending Credit | 2008.04.17 01:56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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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막바지, 사와이 아저씨(야쿠쇼 코지)는 코즈에(미야자키 아오이)에게 외친다. “돌아가자!” 그리고 코즈에의 밝은 웃음이 비치고, 지금까지 잿빛으로 진행되던 화면은 칼라로 바뀐다. 그리고 그 둘은 버스에 올라타고, 화면에는 이 영화의 제목이자, 의미심장한 말이 떠오른다. ‘EUREKA' (참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엔딩이다).............. eureka.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외쳤다고 전해지는 그 말. 깨달음의 언어. 왜 이들은 이렇게 말하는가. 누가 잿빛으로 세상을 보던 코즈에에게 총천연색 세상을 선물했는가.

이 엔딩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아오야마 신지의 아이가 처음으로 집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헬프리스’의 마지막에서 돌아갈 곳을 잃은 야스오는 스스로에게 총알을 선물하고, 켄지는 야스오의 동생 유리를 데리고, 돌아올 기약이 없는 먼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새드 배케이션’의 켄지 역시 집에 돌아가지만, 다시 길을 떠나게 되고, 고의와 실수가 뒤엉켜 수형 생활이라는 또 긴 여행을 다시 떠나게 된다. 이런 아이들이 그 중간 ‘유레카’에서는 집에 돌아간다. 그래서 사와이 아저씨의 입으로 말해지는, 이 영화 전체의 마지막 대사는 반갑다. “돌아가자!” 무엇이 이들을 집에 돌아가게 만드는가. ‘헬프리스’와 ‘새드 배케이션’의 외전(外傳) 격이나, 어떻게 보면 ‘헬프리스’의 켄지와 지극히 비슷한 상태에 빠진 이 소녀는 왜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는가.

 

아오야마 신지의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부모를 잃는다. ‘헬프리스’의 켄지는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리고, 아버지는 병실에서 목을 매며, 코즈에와 코즈에의 오빠 나오키의 부모 역시 버스 납치 사건의 후유증으로 사라져 버리며, ‘새드 배케이션’의 중국인 소년 ‘아춘’은 컨테이너 박스 속에서 아버지가 죽어 버린다. 그러나 ‘헬프리스’의 켄지와 ‘유레카’의 코즈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켄지는 아버지를 잃고 주위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먼 길을 떠나게 되지만, 코즈에는 곧 사와이 아저씨라는 유사 아버지를 가지게 된다. 이는 ‘새드 배케이션’에서는 조금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아춘은 친아버지를 잃고, 곧 켄지라는 유사 아버지를 만나지만, 타의에 의해서 그 유사 아버지와 헤어지게 된다. 친아버지를 잃어버린 켄지는 ‘마미야’라는 유사 아버지를 만나지만, 그 유사 아버지의 친아들을 죽임으로써 유사 아버지를 다시 잃는다. 아무튼 여기에서는 ‘새드 배케이션’은 ‘유레카’ 그 이후의 이야기이므로 논외로 하자면, ‘헬프리스’의 켄지가 먼 길을 떠나고, ‘유레카’의 코즈에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사와이 아저씨’라는 유사 아버지가 있고, 없음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한 인간이 어떤 고비를 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른, 그것도 제대로 된 어른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을 이 영화는 말해주지만, 동시에 작은 불안감도 던져준다. 이 사회에는 과연 그런 어른이란 존재하고 있는가. 그런 어른이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좁게 보자면 일본이라는 사회이고, 넓게 보자면 현대라는 사회가 아닌가. 그것은 영화 중반부터 시작되는 사와이 아저씨의 기침이 계속 반복되면서부터 시작된다. 다름 아닌 그 기침이란 사와이 아저씨가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면서부터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즈에라는 한 생명을 살린 이 사와이 아저씨라는 인물은 과연 이 현대의 일본 사회에서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물인가, 아닌가. (이런 사와이 아저씨를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인물은 아키히코나 시게오 정도. 그러나 아키히코는 이 사회에서 밀려난 인물이고, 사와이를 체포한 형사는 사와이에게 당신이 싫다고, 이유없이 싫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 형사, 혹은 사와이의 형의 시선이 현대의 일본 사회, 혹은 넓게 보자면 현대 사회의 시선일 것이다.)

이러한 불안감은 ‘새드 배케이션’에서는 더욱 증폭된다. 극 중 아춘을 납치해 간 중국인은 켄지에게 말한다. “일본 사람은 아이를 잘 키울 수 없습니다.”이 말은 암시하는 바가 있다. ‘새드 배케이션’에서 사와이와 비슷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는 마미야도 자신의 친아들은 결코 제대로 키워내지 못했다. 그리고 켄지도 자신의 아들인 아춘을 잃는다. 즉 아오야마 신지가 ‘헬프리스’에서는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내고, ‘유레카’에서 그 해답을 제시했다면, 다시 ‘새드 배케이션’에서는 ‘그렇다면 그 유사 아버지들은 이 현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던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아오야마 신지는 ‘유레카’에서 막연한 불안감을 던지며, 다음을 예고했듯이, ‘새드 배케이션’에서 역시 막연한 실마리를 던진다. ‘치요코’라는 강한 어머니의 등장. 이 뺨을 맞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그리고 모두들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오게 될 것이다 라고 켄지에게 당당하게 말하는 이 여자는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 그리고 사와이라는 유사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코즈에라는 이 여자는 또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유레카’에서 남자아이인 ‘나오키’는 아버지를 잃고 야스오와 같은 길을 걷지만, 코즈에는 끝내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헬프리스’의 해답편인 ‘유레카’를 보고, ‘새드 배케이션’의 해답편인 그 다음의 어떤 영화를 기다리게 된다. 그 해답이 제시되면, 아마도 이를 허문영 평론가가 이 3부작 영화를 보고 말한 ‘전후 일본 세대의 정신사’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그 해답은 영원히 제시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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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The Mist), 프랭크 다라본트

Ending Credit | 2008.04.12 21:25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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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에 본 영화인데, 정성일 평론가가 <씨네21>에 실은 무지무지하게 긴 이 영화의 리뷰를 읽고, 그 아우라에 압도되어 뭔가를 적어보려는 것을 포기했다. (정성일 평론가의 그 좋은 리뷰는 아래의 링크에) 그러다가 갑자기 오랜만에 이 영화 생각이 났다. 그리고 뭔가를 적어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하기는 뭐, 평론가야 그걸로 먹고 사는 분이고, 나야 재미로 적는 것 뿐 이니까.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04&article_id=50184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04&article_id=50185

이 영화 <미스트>는 위에 정성일 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많은 드러난 이야기와 함께, 동시에 숨겨진 이야기와 맥락을 담고 있는 영화다. 괴물들이 나오는 B급 공포물의 외양을 두르고 있는 이 영화는 그 내부를 한 꺼풀 들어내 보면 평론가들이 한 번 쯤 글을 쓰고 싶어 죽겠어할 많은 숨은 이야기거리들을 담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정성일 평론가는 이 영화를 해석하는 무려 7가지의 판본을 이 긴 글에 담으셨을 것이다.) 괴물들이 출몰하는 B급 공포물, 생태파괴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재난 영화, 좀비물,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하나의 기묘한 드라마 등 여러 다양한 판본으로 읽힐 수 있는 이 영화를 또한 하나의 심리실험극으로도 볼 수 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이 영화에는 두 가지의 재미있는(?) 심리실험이 있다. 내가 이것을 심리 ‘실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영화의 슈퍼마켓이라는 공간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험이 일어날 수 있는 최적의 조건 - 주위와의 완전한 고립, 외부에서 제공되는 여러 독립변인들(괴물들의 출몰), 피실험집단 내부를 여러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이렇게 다양한 나이와 인종, 경제력, 사회적 계급을 갖춘 실험집단을 구성하기에 최적의 공간으로서 슈퍼마켓 이상 가는 것이 있겠는가?) - 을 갖춘 이 공간은 마치 이 공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착각을 준다. 과연 이 폐쇄된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변해나갈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주위의 위협에 대응할 것인가?

첫 번째 실험은 ‘믿음’의 문제이다. 영화의 초반부, 주인공 데이빗은 괴물의 존재를 믿으며, 슈퍼마켓 뒷문을 열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주위의 사람들은 데이빗을 믿지 못하며, 심지어는 그를 겁쟁이라고 조롱한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죽고 나서야 그들은 데이빗을 믿게 되고, 문을 닫고 돌아온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나 또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불신을 당한다. 하나의 믿음이 어떤 식으로 전파되며, 어떤 식으로 불신되는가를 보여주는 이 장면은 현실의 하나의 작은 축소판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인상적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이를 하나의 종교와 관련지어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신을 절대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하나의 일을 계기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깊이 종교적 신앙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처음의 데이빗을 믿지 못하던, 함께 슈퍼마켓 뒤로 갔던 사람들은 ‘그 일’이 일어난 후 다른 사람들보다 앞장서서 일의 해결에 나서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보다는 절대 부정하는 사람들이 절대 긍정도 가능하다.’

두 번째 실험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인 카모디 부인과 관련지어서 발생한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 영화 <미스트>를 읽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안개를 가스로 보며, 이를 홀로코스트의 느슨한 비유로 보았지만, 나는 여기에서 하나의 파시즘 사회의 탄생을 본다. 파시즘은 익히 잘 알려진 대로 구성원들의 절망과 공포를 그 자양분으로 삼아 기능하는 체제이며, 권력에의 관심을 외부의 적으로, 또는 내부의 희생양으로 돌린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바이마르 정권 하에서의 비참한 독일 민중의 막연한 절망과 공포를 이용하여 탄생이 되고,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등의 외부의 적과 체제 내외부의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을 그 동력원으로 삼아 유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는 외부의 괴물들이 출몰하는 고립된 슈퍼마켓을 배경으로 카모디 부인을 정점으로 한 하나의 작은 파시즘 사회가 탄생한다. 카모디 부인은 외부의 괴물들의 공격을 예언하고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식으로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감을 점점 교묘하게 이용하여 증폭시키며, 그러한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체제 내부의 적, 즉 데이빗 일행들에게 돌림으로써 그 체제를 유지시켜 나간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카모디 부인의 광기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광기를 느슨하게 연상시키며, 카모디 부인이 데이빗 일행과 맞설 때 두 남자가 각각 칼을 빼들고 나서는 것은 마치 SS친위대를 연상시킨다. (물론 두 남자의 직업이 요리사(아마도?)와 정비공임은 파시즘에 열광한 주력 세력이 소상인이나 숙련공 등의 당시 독일 민중의 중하층 계급이었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동시에 이에 맞서는 리더인 데이빗의 직업이 예술가(화가)임은 또 은근히 상징하는 바가 있다.) 그래서 다시 여기에서 파시즘 시대의 광기와 이성의 마비를 보며, 사회 구성원들의 절망과 공포가 한 사회를 어떻게 파괴시키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정성일 평론가는 묻는다. 처음에 모두가 죽은 것으로 생각했던 그 아이 엄마가 살아남은 것을 보며, 과연 그녀의 생존이 무엇을 증언하느냐고. 이 생존의 윤리와 기억의 증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고. 물론 이는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슈퍼마켓을 하나의 거대한 포로수용소로 보고, 안개를 가스로 하는 홀로코스트의 느슨한 비유로 이를 읽을 때 가능하겠지만,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그녀의 생존은 무엇을 증언하는가. 모두가 절망과 공포에 빠져있을 때 자신의 아이를 살리러 그 슈퍼마켓 문을 열고 떠난 그 아이 엄마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현재 점차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으며 사회의 보이지 않는 어두운 구석으로부터 절망과 공포는 점점 그 지형을 넓혀가고 있다. 과연 이런 사회가 파시즘의 무서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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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dotol.tistory.com BlogIcon 도톨 2009.03.26 2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이네요. 잘 보았습니다. 트랙백 남기고 갑니다.

  2. Favicon of http://chiffs.tistory.com BlogIcon 칩순이 2009.07.10 1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혼자 보기 아까운 리뷰라..댓글 남겨봅니다. 제3회 충무로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http://chiffs.tistory.com)에서 잊을 수 없는 내 인생의 영화에 대한 리뷰를 공모합니다. [도전! 나도 리뷰스타] 카테고리에 제시된 4 가지 테마 중 하나를 택해 자신의 블로그에 리뷰를 작성한 뒤, URL을 트랙백 혹은 댓글로 남겨주세요. 당선되신 분에 한해 공식블로그를 통한 해당 리뷰 노출과 소정의 기념품을 제공해드립니다. 1차 이벤트 기간은 8월 10일 까지 입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09.07.10 22: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충무로 국제영화제.
      작년에 거기서 <매드 디텍티브> 등등 좋은 영화 많이 봤던 기억이 나네요.
      내 인생의 영화라..아직 뭐 생각나는 영화가 없는데.
      생각나는 영화가 있으면 글 남겨 볼께요.


 
허지웅 (GQ 1월호)   / 블러그 'ozzyz review  허지웅의 블러그'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사람들이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일은 언뜻 상식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같은 상식은 상식이 아니다. 왜 그럴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하다. 하지만 그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한다. 얼핏 분열증 같아 보이는 이 현상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처럼 진보진영의 논객들을 괴롭혀왔다. 논객과 진보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계급적 정체성에 밝지 못하고, 눈을 뜨지 못하고, 상식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데 분노한다. 그리고 계몽하려 애쓴다. 하지만 이 계몽은 쉽게 작동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인간이 결국에 사사로운 이익관계를 좇아 움직일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실제 대부분의 인간은 사익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한다. 이는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이 상식은 머릿속의 상식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자신의 주머니 사정에 따라 투표하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많은 수의 진보 운동가와 논객, 정치인들은 선택받은 가정에서 온갖 혜택을 받고 자랐다. 그러고도 분배를 논한다. 많은 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와 같은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러고도 집중을 논한다. 앞서 말한 상식이 통했다면 소수의 집중되고 편향된 자본을 위해 종사하는 보수 정당은 절대 집권할 수 없다.  

그 같은 상식이 현실의 상식이라면 다음과 같은 권유는 정당하다. - 당신의 주머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정당과 후보에게 투표하라. 당신의 주머니를 지지하라는 말은 요구라기보다 질문이며, 이는 곧 당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묻는 것이다. - 하지만 사실 이런 식의 주문은 헛되다. 왜 당신의 계급에 따라 투표하지 않느냐고 지적하고 계몽하는 일은 끔찍할 정도로 소모적이다. 궁극적으로, 이런 식의 주문은 실제 가난한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귀에다 대고 소리 질러도, 동의를 구할 수 없다. 실제 들리지 않는다! 가난한 당신이 이명박을 선택했을 때 당하게 될 온갖 종류의 불이익을 도표로 만들어 오른손에 들고, 권영길을 선택했을 때 얻게 될 온갖 종류의 혜택을 도표로 만들어 왼손에 들고 그들에게 외쳐봐라. 당장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가난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결국 이명박을 선택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도대체 왜? 

이 나라에서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70퍼센트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 한국의 중산층은 4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이 놀라운 통계의 마술은 한 가지 명징한 진실을 환기시킨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가상의 필터를 ‘가치관’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장르영화들이 이 같은 소재를 다뤄왔다.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다. 바로 이 가치관에 따라 투표한다.

요컨대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한 정책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들이 부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부유함이나 풍요로움 같은 부자의 가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함께 수반돼 연상되는 보수적 언어를 ‘옳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누가 혹은 어떤 정당이 서민을 대변하고 말고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사람들은 부자를 보며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성공신화에 매료될 뿐이다. 부와 이익이라는 (그들이 생각하기에) 긍정적 에너지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적지 않은 부자들이 적당한 부패와 조작과 위장을 즐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는 않는다. 그저 부자라면 그 정도는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훌륭하게 입신에 성공한 저 부자들은 그만한 권리와 폭력을 응당 행사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것은 단순한 존경이나 예우와 다르다. 겨우 존경심 때문에 사익과 반대되는 선택을 할 정도로 인간의 두뇌가 간단하지는 않다. 그건 우리가 여태 태어나서 자라고 배우고 번식하고 경쟁하고 버티고 버텨 살아온 이 사회가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언어의 토대 위에 건설된 탓이다. 사람들은 부자 - 성공 - 상위 3퍼센트 - 대기업 - 수출 - 재벌 - 시장주의 같은 단어들에서 긍정적 에너지를 느낀다. 반대로 복지 - 중소기업 - 88만원 세대 - 분양원가공개 등에선 무언가를 박탈당하는 듯한 상실감 따위의 부정적 에너지를 느낀다. 시장주의에 반대되는 입장을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단어가 고작 '반시장주의'다. 세상에, 얼마나 부정적인가. 그 내밀한 사정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사람들은 보수적인 단어와 인식의 틀 위에서 살아왔다. 보수성을 ‘궁극적으로 안전하고 탄탄한‘ 것으로 인식한다. 

간단한 예로 TV와 영화 속 가부장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짚어보자. 철옹성 같은 권위를 가진 아버지는 온갖 폭력과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결국에 가서 아들과의 화해에 이른다. 설명되지 않는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으며 관계의 정상화를 이룬다. 가부장으로 대표되는 보수 이데올로기가 뜨거움과 결합하면서 ‘설명되지 않는 끈끈함’ 따위의 수사로 포장된다. 놀라운 건 대중이 이 같은 광경을 보며 감동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천하장사 마돈나>같은 예외도 있다. 그건 그 영화를 만든 자들의 진보성과 현실인식의 탁월함을 증명한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흥행에 실패했다. 간단하다. 사람들은 소위 진보적인 상식이나 언어들을 ‘머리로’ 인식한다. 반대로 보수적인 상식이나 언어들은 ‘가슴으로’ 인식한다. 따로 학습이나 교육이 필요하지 않다. 

그럼으로써 ‘택시기사 농담’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택시기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보수정권을 옹호하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대다수 노동직 근로자들이 그들의 가정에서 가부장적인 권위에 목말라 있으며,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실추되는 가정 내 권력에 대해 큰 피해의식을 갖고 있음을 상기해보자. 간단한 이야기다. 택시기사는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노동자라는 계급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치관과 정체성은 보수주의에 닿아있는 거다. 미국의 고속도로 트러커들 대다수가 공화당을 지지하는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렇다면 지난 10년간 자칭 진보 정권이라고 불린 두 정부의 집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보수와 진보 사이의 경쟁이었다기보다, 개혁세력의 안티 담론이 성공적으로 작동한 것에 더 가까웠다. 실제 이 두 정권의 정책은 조금도 진보적이지 않았다. 그저 과거와의 단절과 안티 담론의 연장선상 위에서 지루한 말싸움을 해온 것에 불과하다. 가끔씩 진보진영의 수사만 빌려왔는데, 이건 그저 한나라당과 자리싸움하는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노무현 정권의 집권은 눈여겨볼만 하다. 그는 보수의 언어를 들고 나와 진보의 탈을 쓰고, 이를 뜨거운 개혁의 이미지로 치환하는데 성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했고, 결국 대선 승리의 드라마로 이어졌다. 욕할 게 아니라 공부해야 할 일이다. 그는 진정 언어의 마술사였던 것이다.

많은 수의 진보주의자들이 노무현 정권에 속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덤을 판 건 진보진영 스스로다. 정권 내내 진보진영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들의 행동에 옳고 그름의 틀을 가져가 비판했다. 어떻게 부정부패 우익 세력을 지지할 수 있냐고 꾸짖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수적 가치관 안에서 살아왔을 뿐이다. 그 위로 당위성을 겹쳐 놓으면 격렬한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아서 보지 못하는 건데, 그에 대해 욕을 하고 보수반동꼴통 소리를 서슴치 않았다. 보수진영이 가지고 있는 언어는 안정적으로 보였지만, 진보진영이 가지고 있는 언어란 고작해야 ‘쟤들은 안 돼’ 정도였다. 조롱이 팔할이었다.

현실 정치에서 진보진영이 얼마나 그릇된 전략에 따라 움직이고 있느냐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안티 담론에 의해 움직이다간 결코 긍정적인 이미지의 틀 안으로 진입할 수 없다. 기껏해야 상대하기 피곤한 사람 취급 밖에 받을 수 없다. 그런데도 진보진영은 도덕의 황폐화를 부르짖고 세상이 당장 망할 것처럼 시일야방성대곡을 목 놓아 불렀다. 유동적인 중간층은 서슬 퍼런 진보진영의 손을 들어주기 힘들어진다. 도무지 안정적인 비전을 제시할 그룹으로 비춰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보수진영에선 진보진영의 언어를 가져다가 잘 활용했다. 이회창 후보가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 천민자본주의, 이거 안 됩니다”라고 말했을 때,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술자리 안주삼아 실컷 비웃었다. 하지만 언어의 힘이란 무섭다. 불안정한 진보주의자보다는 안정적인 보수주의자의 개혁적 언동에 솔깃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명박 후보도 ‘청년 실업’이나 ‘비정규직 문제’ 같은 진보진영의 화두를 고스란히 가져가 자기 언어로 흡수해버렸다. 진보진영은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진보진영의 선동가와 계몽주의자들은 스스로 판 무덤 속에 기어들어갔다. 여기서 탈출하고 싶다면 보다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대중에게 꾸준히 진실을 알리고 보수진영의 부조리를 밝힘으로써 마침내 상식이 통하게 될 것이라 낙관하는 자세는 금물이다. 그 진실은 진보진영에게만 들리는 진실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틀에 의해 판단한다. 이 틀은 그들의 세계관이고 가치관이다. 이 가치관은 주머니 사정과 별개로 작동한다. 상식을 운운하면 반감만 산다. 보수진영의 움직임에 일일이 대응하는 방식으로 무게중심을 가져가다간 결코 집권할 수 없다. 대중이 어떻게 진보의 언어에 관심을 기울일 것인지 연구해야 한다. 그런 관심 안에서 진보의 가치관과 인식의 틀이 보수의 그것 못지않은 안정적 이미지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진보진영이 입에 문 언어들이 닮고 싶고 갖고 싶고 추구하고 싶은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는 다소간의 패션화 전략도 필요하다. 진보의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한국의 진보진영에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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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08.04.10 21: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이번 선거에 관심이 없다. 다만 진보신당의 두 주자 노회찬과 심상정이 궁금할 뿐이다. 내 하나의 미스터리는 어째서 '노원 병'에서 대표적인 서민후보인 노회찬이 '강남부자' 홍정욱에게 패배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위의 글도 복잡한 여러가지 답 중에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식코(Sicko), 마이클 무어

Ending Credit | 2008.04.09 15:15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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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이 영화는 계몽영화다. 그것도 상당히 편파적이고 선동적인 계몽영화다. 물론 ‘계몽’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편파와 선동을 담지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하다. 잘 알려진 대로 미국 의료보험 민영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 영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상당히 중요한 정보처럼 부각시키기도 하고, 동시에 말해주어야 할 것들에서 조용히 입을 다물기도 한다. 일례로 영국과 프랑스의 무상 의료 시스템이 가능할 수 있는 막대한 세금 부과에 대해서는 교묘하게 넘어가기도 하며, 미국의 사례는 지나치게 나쁜 쪽으로 집중되어 있고, 영국과 프랑스의 사례는 지나치게 좋은 쪽으로 집중되어 있다. 급기야 마이클 무어는 ‘그라운드 제로’의 영웅들을 이끌고 쿠바를 방문하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너무 좋은 쪽으로 포장되어 있다. 즉 마이클 무어는 관타나모 기지에서 받아들여주지 않으니 쿠바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아마 쿠바로의 방문은 사전에 계획되어 있었을 것이며, 쿠바는 체제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좋은 쪽으로만 그들을 이끌었을 것이다. 어떤 체제나 외부의 방문자들에게는 체제의 밝은 면만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그러듯이 말이다. 물론 북한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것 또한 마이클 무어에 의해 철저히 계획되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균형한 선동 영화를 기꺼이 관람해줄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의 기본은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우리가 길을 가다가 어느 낯선 사람에게 심하게 맞아서 생명의 위기에 빠져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때 다행히도 경찰이 지나간다. 우리는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자 경찰이 이렇게 말한다. “폭력에서 당신을 구해주는 것은 100만원을 내시면 가능합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이 당연한 일이 미국에서는 의료의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 돈이 없어서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해, 암이 온 몸으로 퍼지고, 잘려나간 손가락을 접합하지 못하고,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누구나 길거리에서 폭력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누구나 아프면 치료받을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는 생과 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죽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누구라도 최소한 (적어도) 살 권리는 있다. 이는 누구라도 아는 일이며, 교과서에도 명시되어 있는 일이다.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이런 말을 했다. “그렇다고 완전한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평등은 결코 이뤄낼 수 없습니다. 당신의 스웨터가 내 스웨터보다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둘 모두가 스웨터를 입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를 이 영화에 빗대어 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아프면 1인 특등실에 입원하고, 내가 아프면 6인 공동실에 입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둘 다 입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마이클 무어는 묻는다. 우리가 도서관도 공짜로 이용하고, 소방서나 경찰서도 공짜로 이용하는데, 왜 의료서비스는 안되냐고. 경찰서나 소방서가 없으면 우리 삶이 위험에 빠지는 것처럼 병원이 없어지면 우리 삶이 위험에 빠지는 것도 마찬가지인데(‘어떤 의미에서는’ 도서관도), 왜 의료서비스만 공공복지의 영역이 아닌, 경쟁의 영역에 들어가 있어야 하느냐고.

 

하기는 몇 년 전에 이 영화가 개봉했더라면 어쩌면 이 영화를 그저 아주 재미있게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저저 미국넘들이란 말이지 ...하고 조소를 보내면서 말이다. (모든 메시지를 제외하고 그저 영화 그 자체로만 본다면 말이다. 마이클 무어는 그의 다른 영화들에서도 그랬듯이 상당히 귀여운 구석이 많다. 그는 적어도 농담을 할 줄 안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 농담들을 말이다. 이번 영화에서는 음악을 가지고 상당히 장난을 많이 치는데, - 난데없이 스타워즈 음악이 나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 내용은 아주 심각하지만, 그러한 몇몇 귀여운 구석 때문에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 교묘한 편집 능력도 여전하고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 이런 마이클 무어 같은 감독이 하나 있어서 MB를 다뤄주면 상당히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난 대선 때 MB의 BBK 의혹 같은 거 말이다. 그가 자신의 안티 사이트 운영자에게 수표를 보냈다는 장면에서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러나 아래와 같은 기사를 보고 이 영화를 보면 마냥 웃기만은 힘들어진다. 정말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이런 생각이 든다. 병원에서 10시간을 기다려도 치료를 받게 된다면 행복한 거라고. 앞으로 병원에서 마냥 기다리라고 해도 뭐라고 하지 않겠다고.)

(솔직히 조선이나 중앙이나 동아일보 쪽 기사를 가져오고 싶었는데, 네이버에서 이들 3개 신문의 뉴스 내용을 ‘의료산업화 이명박’ 혹은 ‘의료보험 민영화 이명박’으로 검색하면 단 1개의 뉴스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편향된 한겨레 기사를.)

 

그래서 계몽이란 건 엿이나 먹으라고 생각하지만, 아주 편파적인 계몽 영화를 보고 이런 계몽적인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 언제나 그렇듯이 정작 계몽을 당해야 할 사람들은 이런 계몽적인 것을 안보는 경향이 있다. (성에 대해서는 지 아버지보다도 더 많이 아는 친구들이 성교육 시간에 눈을 더 많이 반짝이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 단성사 7관에도 딱 10명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하는 얘긴데, 이런 편파적인 계몽 영화는 돈 주고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나, 어차피 그거 봐봤자 마이클 무어의 배나 불러주는 것밖에 안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나(하긴 이미 배가 많이 부르긴 했다), 댓글 올리다가 지쳐 잠시 쉬고 싶은 나라당 알바들이나..그 외 누구라도 원한다면, 쪽지나 댓글을 남겨주면 방금 다운 받은 따끈따끈한 ‘식코’ 무비를 기꺼이 보내드리겠다. 물론 자막의 질은 보장하지 못하지만.


*저도 파일은 더이상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5/4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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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yeah86 BlogIcon cid MILANO 2008.04.09 2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봤어요. 봐야한다고 생각하구요.
    그래도 그나마 마이클 무어 영화라서 홍보들을 때리고 있는 것 같은데.
    시네큐브에는 거의 만원이었습니다. 고마워서 치료를 받게 되는게 감사해서 눈물흘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는 정부에서 해주는 빨래와 또 한편으로는 허경영이 생각나기도.. 암튼 살고 볼 일입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08.04.10 2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그렇군요. 저는 낮에 갔었기 때문에 사람이 없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래요. 저도 그 마이클 무어로 대표되는 화제성이 부럽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 정도로만 화제를 뿌릴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몇 가지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요. 그건 그렇고 허경영은 왜..?^^

  2. cid MILANO 2008.04.11 04: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거 있잖아요 아이 양육비나 결혼하면 돈주는 거라든지;

  3. 2008.04.11 14: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2008.04.26 14: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5. chadrum 2008.04.29 1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좀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여주세요.

    drum-champion@hanmail.net

    emfjacjs@naver.com

    emfjacjswo@nate.com

    중에 하나로 부탁드립니다.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6. donguri 2008.04.30 2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 좋은 게시물 잘 읽었습니다.
    저 죄송하지만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것인데..
    이 영화 메일로 첨부해서 저한테 좀 보내주실 순 없나요?
    꼭 보고 싶은데 극장개봉은 이미 끝나있고.. 디브이디 살 형편은 좀 아니고 해서요.. 어떠신지...ㅠ

    제 메일주소는 song79428282@naver.com
    입니다만... 좀 부탁드릴게요 ! 형편 되시는대로 좀 보내주시겠어요?ㅠ

  7. 남지연 2008.05.01 2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식코좀 보내주세요 ㅠㅠㅠㅠ
    southy89@naver.com
    꼭 보내주세요 ㅠㅠㅠㅠ

  8. 2008.05.03 1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9. 2008.05.03 2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0. 2008.05.04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1. 영화광 2010.04.25 22: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식코 꼭 보고 싶어요. bleusw@naver.com으로 꼭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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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리스(helpless), 아오야마 신지

Ending Credit | 2008.04.05 00:34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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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새드 배케이션>을 보고, 아오야마 신지의 세계관에 흥미를 가지고, 감독이 직접 집필한 동명의 소설 <새드 베케이션>을 읽고(이 소설은 영화 내용과 거의 같기 때문에 특별히 이야기할만한 것은 없지만, 아무래도 소설이다 보니 등장인물 캐릭터가 영화보다는 훨씬 디테일하게 보여지고 있다는 것이 좋았다. 다만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소설을 읽으니 장면장면마다 영화 장면이 떠올라 소설을 읽을 때의 특유의 상상력이 제한을 받는 느낌이다), 이 영화의 10년 전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아오야마 신지의 1996년도 작 <헬프리스(helpless)>를 다운받아 보았다(그러나 아무래도 모든 영화는 영화관의 스크린으로 보아야 제격이다. 다운 받아 작은 컴퓨터 화면으로 나홀로 보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분명히 이 영화도 스크린으로 보았더라면 느낌이 달랐을 것이다. 다운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번은 방법이 없었다-라고 변명 중).

 

이 영화에서는 여전히(사실 이와 반대로 말해야겠지만) 아사노 타다노부가 주인공 켄지 역을 맡고 있고, 야스오의 동생인 유리 역도 여전히 츠지 카오리가 맡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자연스럽게 연속성을 가지는 동시에 <새드 배케이션>의 켄지와 <헬프리스>의 켄지를 나란히 놓고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비교 지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켄지는 여전하다. 선과 악이 혼합된 중첩적인 존재, 그래서 전혀 그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물론 모든 ‘인간’이라는 존재가 선과 악이 혼합된 중첩적인 존재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간들은 그러한 선과 악을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 놓고,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그 일부분을 슬그머니 꺼내 보인다. 그러나 이 켄지라는 인물은 정제되지 않은 선과 정제되지 않은 악이랄까. 때를 타기 이전의 선과 악이랄까). 아사노 타다노부의 속을 알 수 없게 하는 연기는 여전하다.

 

이 영화는 서늘하고 무섭다. 이 영화는 결코 폭력과 살인을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 시선은 말할 수 없이 차가우며, 날카롭다. 이 영화에서 결말은 사실 이미 예정되어 있다. 감독은 이 차가운 결말을 이미 예정지어 놓고, 그 결말을 피해보려 미친 듯이 애쓰는 주인공들을 지극히 차가운 시선으로 관조한다. 아니나다를까, 주인공들은 예정된 비극적인 결말 속으로 조용히 달려간다(이 영화는 많은 폭력 장면을 담고 있지만, 이상스럽게도 조용하다. 그것이 더욱 무섭게 만든다). 그리고 켄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 응시하는 눈빛은 마치 이렇게 묻고 있는 듯 보인다. 왜 우리를 구해주지 않으시나요? 당신은 이렇게 될 것을 모두 다 알고 있었잖아요?

 

야스오(마츠이시 켄)가 보스가 죽어버린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미친 듯이 보스를 찾는 것이나, 켄지가 아버지가 있는 병원으로 자주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다. 켄지가 그나마 지금까지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켄지가 아버지를 잃어버린 순간, 그는 보스를 잃어버린 야스오와 똑같은 인물이 된다. 켄지의 아버지, 그리고 야스오의 유사 아버지, 그리고 이제 그 모두의 부재(不在). 야스오는 이 부재 속에서 자신을 버리는 길을 택하지만, 켄지는 다시 유리라는 새로운 가족을 만나, 멀고 먼 길을 떠난다. <새드 배케이션>에 이르는 긴 길을. (아마도 <새드 배케이션>의 시작부분에도 Johnny Thunders의 노래와 함께, 거리의 풍경을 위에서 부감으로 찍은 화면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영화(헬프리스)의 시작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에도 길이 나온다.)

 

이 <헬프리스>의 아버지의 부재와 <새드 배케이션>의 치요코-사에코-코즈에라는 강한 여성들의 등장(한편으로는 모계사회를 연상시키는)과 ‘마미야 월드’의 기묘한 유사가족이 묘하게 접점을 이루지만, 아직 아오야마 신지의 세계관은 모호하다. 아마도 이는 그의 3부작 중의 하나인 <유레카>를 보아야 뭔가 잡을 수 있을 듯. (이건 여담이지만 이 영화 <헬프리스>는 약 1시간 20분 남짓, 그리고 <새드 배케이션>은 2시간 20분 정도, 그리고 <유레카>는 3시간이 넘어간다. 영화를 개봉하고자 하는 영화사의 입장에서는 절대 반기지 않을 감독이다. 하긴 궁금해서 찾아본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얼굴이 왠지 강단있어 보여서 픽 웃음이 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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