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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천사(Fallen Angels), 왕가위

Ending Credit | 2008. 5. 16. 00:45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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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천사>는 1997년 홍콩반환에 관한 더없는 엘레지일 것입니다. 천사들이 떠나가 버린 도시, 아침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도시, 홍콩. 저는 이 영화가 홍콩영화의 마지막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홍콩영화는 끝났습니다. 홍콩을 무대로 한 중국영화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아마도 또다른 일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이 코멘터리는 끝난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이어지고, 스피커에서는 정성일 평론가가 홍콩의 유명 라디오 시그널 음악이었다고 소개했던 ‘Only You’가 이어진다. 그리고 나는 지친 상태로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 즈음 플레이어의 정지 버튼을 누른다.

정성일 평론가의 코멘터리를 듣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는 1997년 홍콩반환의 의미부터, 왕가위에게 부끄럽게도 물어보았다는 한국어간판의 의미까지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것만 듣고 있을 틈이 없다. 그와 동시에 나는 눈으로는 화면을 바라보고, 머리 속으로는 옛날 일들을 생각하고, 자막을 읽고, 자리를 고쳐 앉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정성일 평론가는 이 모든 이야기를 적어놓고 읽는 것일까, 머리 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일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 철자를 잘못 읽는 류의 실수를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이 이야기를 적어놓고 읽는 게 틀림없다는 섣부른 판단을 내린다.

 

도대체 평론가의 코멘터리를 듣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마도 나에 있어서는 그게 두 가지로 기능을 하는 것 같다. 하나는 일종의 정답을 맞춰보는 기분이다. 영어듣기평가가 끝나고, 뒤에 해설지문을 보며,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처럼, 나는 그가 한 씬에서 구술한 해설이 나의 애초의 생각과 얼마나 들어맞는지를 가늠한다. 그리고 혹여 운 좋게 비슷하기라도 하면, 잠시 우쭐한 기분에 빠져 다음의 해설을 놓쳐 버린다. 그리고 또 하나는 - 이게 더 큰 이유라고 말할 수 있는데 - 단지 목소리 때문이다. 물론 정성일 평론가에만 해당되는 것이지만, 이 목소리는 묘하게 중독성이 있다. 어딘지 어눌하고, 종종 발음도 틀리지만, 어딘지 사람을 잡아끄는 목소리. 목소리에도 진정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 있다면, 이 목소리는 진정성이라는 게 있다.

물론 이것은 오류이고, 허구다. 목소리만 가지고 진정성을 판단할 수는 없다. 단지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빚어낸 허구일 뿐이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그의 글을 연상시키고, 그 글에서 느껴지던 한 영화에 대한 절절한 애정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이미 이 코멘터리는 이동진 평론가 등의 코멘터리와는 이미 다른 지점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우열을 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이동진 평론가의 코멘터리가 분석적이고, 학술적인 어떤 것이 느껴진다면, 정성일 평론가의 코멘터리는 따스하고, 감정적이고, 설득적인 어떠한 것이 느껴진다. 전자의 코멘터리가 관객들에게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공하는 것, 따라서 영화가 새롭게 분석되고, 다른 어떤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어떠한 지점을 제공한다면, 후자의 코멘터리는 관객들에게 영화감상의 폭과 깊이를 넓게 하여 관객들에게 영화에 대해 새로운 감동을 제공한다. 두 가지 모두 영화를 한 번 더 보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 <타락천사>의 코멘터리는 내가 잊고 있었던 새로운 두 가지 사실을 환기시킨다. 하나는 이 영화는 정성일 평론가의 마지막 말대로 1997년 홍콩반환 직전의 홍콩의 분위기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사람들과, 떠나야 함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남는 사람들. 이곳에 살아남아 삶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망기타(忘記他)’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카메라가 말해준다. ‘그대를 잊겠다’는 가사가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는 것, 그것 자체가 아직 떠나간 사람을 잊지 못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찍지 말라고 화내는 자신을 찍은 화면을 아버지가 몰래 보면서 웃고 있고, 그것을 다시 하지무(금성무)가 몰래 보고 있는 장면. 이 장면에 흐르는 하지무의 독백은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독백은 필연적으로 아버지가 이미 세상에 없는 어떤 후일의 시점에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화면이란 결국 최종적으로는 관객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배경이 있고, 배우가 있고, 그 배우들이 아무리 움직이고 있어도 모든 화면이란 그것을 밖에서 바라보는 관객이 있어야만 가능해질 수 있다는 점.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유일하다는 점. “이 장면은 투샷으로 찍기는 했지만,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향해서 앉아있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은 한 번도 마주보지 않습니다. 혹은, 청부업자는 그에게 얼굴을 돌리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의 표정을 모두 볼 수 있는 사람은 영화를 보는 우리들 뿐입니다.....그 때 이 영화는 영화 바깥에 있는 우리들을 포함해서 영화를 진행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화란 결국 ‘관객들에게 말걸기’라는 사실을 다시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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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속으로, 황규덕

Ending Credit | 2008. 5. 15. 01:17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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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 기억(panoramic memory)’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죽음의 위기에 빠졌을 때,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마치 파노라마를 보듯이 눈앞에서 보게 되는 것, 또는 그러한 현상.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서 레스터(케빈 스페이시)는 죽어가면서 아주 평화로운 상태에서 짧은 시간동안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하나하나 천천히 떠올리게 된다. 굳이 영화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실수로 사고를 당하게 된 사람들, 높은 곳에서 추락하게 된 사람들이 겪은 이러한 파노라마 기억을 다룬 연구물들은 꽤 많다고 한다. 이러한 연구물들이 가지는 가장 큰 궁금증은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가?”인데, 여기에는 의견이 꽤나 분분하다. 그러나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학설은 사람이 죽음의 위기에 빠져 정신적 쇼크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일종의 환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극단적인 통증과 스트레스에 몸이 반응하여 일종의 모르핀(엔돌핀)을 뇌가 급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일종의 우리 몸이 살기 위한 하나의 반응이라는 것.

 

이 영화 <별빛속으로>는 어떻게 보면 위와 비슷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의 위기에 빠진 상태에서 보는 환각들이 신비하게도 현실과 연결된다. 또한 영화는 노골적으로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과 이 이야기를 연결시킨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가, 나비가 나인가, 내가 나비인가, 나는 살아있는가, 나는 죽어있는가. 영화의 스토리는 묘하게 중첩되며, 모호한 분위기는 관객들이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꿈인지 알 수 없게 해준다. 액자 안에 또 액자가 있고, 그 안에 또 액자가 있어, 그 액자 안의 사람이 액자 밖의 관객을 그리고 있는 꼴이다. 스토리를 말하는 것은 힘들 뿐이며, 크게 의미도 없다. 다만 영화는 묻고 있다. “시간이 정말 있을까, 파괴하는 시간이. 쉬고 있는 산 위에서 언제 시간이 성을 부수어 버릴까?”

시간과 기억의 문제는 영화가 즐겨 다루는 소재이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의 기억을 다루는데, 때로는 이 기억을 뒤집어서 늘어뜨리기도 하고(<메멘토>), 다른 기억을 이식하기도 하고(<토탈리콜>), 심지어는 현재의 시간에서 미래의 기억을 다루기도 한다(<마이너리티 리포트>). 그러나 이 영화에서 다루는 것은 시간의 장벽을 넘어선 존재의 초월성, 존재의 영속성이다. 무엇이 우리를 이 험난한 세상에서, 혹은 화염병과 돌과 최루탄이 난무했던 시대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가.

여기에 몇 개의 힌트가 있다. 영화의 초반부 나이든 독문과 교수 수영(정진영)이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순간, 학생들은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듯 수영을 바라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있다. 이 수영과 학생들의 단절에서 읽혀지는 묘한 공포감. 이 묘한 공포감이 벗겨지는 순간은 수영과 학생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이다. 그리고 영화는 젊은 수영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의 시작에서 마찬가지로, 늙은 교수는 차분히 원서를 강독하고 있고, 학생들은 모두 말없이 그 내용을 받아 적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여학생의 이해할 수 없는 울음. 이것이 깨어지는 순간은 그 여학생이 수영과 강의실에서 나와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이다. 모두 같은 곳만 바라보는 순간에서 벗어난 서로의 마주보기. 이야기의 시작임과 동시에 누군가와의 연결.

 

다시 ‘파노라마 기억’으로 이야기를 돌려보면 이 연구는 우리에게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가?”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을 환기시킨다. 즉 이 모든 연구는 그 사람이 결국 살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는 것. 그 사람은 죽을 위기에 빠졌지만, 결국에는 극적으로 구조되어 그들의 그러한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줄 수 있었다는 것. 그렇게 본다면,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죽기 직전 아주 평화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살펴보는 것은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살기 위해 아주 힘든 투쟁을 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지나온 인생을 살펴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평화로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사실 우리의 의식을 잃지 않고 깨어있게 해주는 하나의 작용이라는 것. 우리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한편의 연극이 상영을 멈춘 순간, 우리의 인생도 끝날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런 투쟁, 누군가의 기억을 가지고 싸우는 평화로운 투쟁에서 승리하고, 꿈에서 깨어 꽃밭에서 나오는 사람만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며, 다시 다른 기억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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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는 삼성에게 배워라

끄적거리기 | 2008. 5. 7. 01:54 | Posted by 맥거핀.

광우병에 관련된 정부 기자회견을 보다보니 문득 거기 앉아서 많은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힘겹게 막아내던, 농수산부 민동석 농업통상정책관, 이상길 축산정책단장을 비롯한 몇몇 공무원들이 안쓰러워졌다. 그리고 한편으로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먼저,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은 ‘왜 우리끼리 이러나’하는 점이다. 지금 횡성한우에서 광우병이 발견된 것이 아니다. 혹은 제주도에서 쇠고기를 수입(?)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문제가 된 것은 미국소이고, 미국소를 수입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의 공무원들이 저기에 줄줄이 앉아서 “미국소는 참으로 안전합니다.” 이런 소리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

미국소가 실제로 안전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저 자리에는 미국의 농업통상정책관, 축산정책단장이 앉아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소는 참으로 안전합니다.”라고 말하고, 여러 우리나라 기자들이 이에 반박하는 모양새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국민의 세금을 받아 드시는 우리나라 공무원이 저 자리에 앉아서 미국소의 안전함을 항변하는 모양새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도대체 저 모양새를 보고, 정작 저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미국의 농업통상정책관, 축산정책단장은 뭐라고 할까? 우리나라 소의 안전함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서서 무한홍보(?)해주시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낄까, 아니면 비웃고 있을까?

하기는 우리 민동석 농업통상정책관, 이상길 축산정책단장도 그러고 싶어서 그랬을까. 그들이 비록 ‘한 자리’씩 해먹고 있으나, 결국은 그들도 공무원이고, 거대한 조직사회의 일부분인 것을. 한 때 공무원 사회를 가까이에서(?) 봐온 나이기에, 그들이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잘 안다. 그들이라고 이 미스터리한 논쟁에 끼어들고 싶었겠는가. 손에 든 자료는 부실하고, 기자들은 오늘도 어디선가 새로운 사실을 찾아서 들고 왔을 것이고, 오늘 내가 내뱉은 말들은 인터넷에 토씨하나 안 틀리게 그대로 옮겨져, 그 밑에는 어김없이 악플들이 달릴 것이고....다른 사람이 누군가 이 자리를 대신해 줬으면, 차라리 어딘가 도망쳐 버렸으면...그러나 안하면 장관님한테 깨질 것이고, 장관은 대통령한테 깨질 것이고...어떡하지...어쩌면 좋단 말이냐.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0506180013

나도 위의 강양구 기자처럼 말하고 싶다. 아니 적어도 최소한 그랬으리라고 믿고 싶다. 적어도 이번 협상이 미국의 압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MB도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으나, 미국의 압박에 의해서 억지로 도장을 꾹 찍어줬다고 믿고 싶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 미국의 아무런 압박이 없이 MB가 잘 보이기 위해 스스로 나서서 이 협상을 이렇게 만들었다면? 사실 이 쪽이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그런 것이라면 아무 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정부가 취할 태도는 하나다. 위 기자의 말대로 지금이라도 미국의 압박에 의해서 억지로 이 협상이 진행되었음을 시인하고, 지금에 와서는 어쩔 수 없으니, 국민들 스스로 조심하시는 수밖에 없다고,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최대한 관리하겠다고. 그리고 너무 죄송하다고 하는 것 말이다. 물론 이는 단순히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다. 협상의 실무자들, 관련 장관들, 관련 수석들은 물론이고, MB의 거취도 위험해질 수 있다.

 

그러나 MB,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계속 이렇게 안전하다-아니다의 상황으로 사태가 진행되는 것은 이쪽에도 위험하지만, 저쪽에도 위험하다. 결론이 날 수 없는 문제로 계속 싸우는 것은 사태를 점점 커지게 만들뿐이다. 지금이라도 미국의 압박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한다면(혹 스스로 나서서 협상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지금은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냥 몇몇 수석들, 몇몇 장관들 인력시장에 보내는 선에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

저번 박미석 수석 때도 그러더니 MB는 아랫사람들을 너무 사랑해서 탈이다. 왜 그리 모두 한꺼번에 데리고 가지 못해서 안달인가. 이 점에서 MB는 ‘삼성’에게 배울 필요가 있다. 이른바 도마뱀 꼬리자르기 전략. 도마뱀이라고 제 꼬리를 자르고 싶겠는가. 다 살기 위해서 그러는 것 아닌가. 회장 살리려고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김인주 사장 등이 발 벗고 나서고, 결국은 아들 살리려고 회장까지 나서지 않는가. MB가 아랫사람들을 생각해서 차마 말하지 않는다면, 아랫사람들은 다 뭘 하는가. 그리고 조선, 중앙, 동아 등 MB의 충실한 벗들은 모두 뭘 하는가. 그래도 밑의 이 늙은이는 비록 노망 섞인 말이긴 하나, 이리 충심을 보이는데.

http://www.dailian.co.kr/news/n_view.html?id=110530&sc=naver&kind=menu_code&keys=1



그리고 우리가 도마뱀을 잡기 위해선?
그 머리를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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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끄적거리기 | 2008. 5. 4. 01:15 | Posted by 맥거핀.

시끄러운 세상이다. 말들은 넘쳐나고, 주장은 상반되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은 인터넷 세상을 떠돈다. 같은 사실을 놓고 한쪽에서는 미국산 쇠고기를 먹어도 안전하다고 하지만, 한쪽에서는 광우병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 글쎄, 본질적으로 이것이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이것은 기본적으로 팩트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책의 문제거나, 의견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운하를 건설하는 것이라든가, 대통령 측근들이 비리를 저지른다거나, 의료보험 민영화를 한다거나 하는 문제와는 이는 다른 지점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 즉 결정에 오랜 시일이 걸리는 일종의 회색분자들은 정보가 필요 이상으로 많으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TV를 틀면 우리가 수입하는 미국산 쇠고기는 광우병의 위험성이 높으며, 한국인들은 특별히 그런 광우병에 잘 걸리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다시 신문을 펴면, 그것은 잘못 알려진 정보이며,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며, 한국인이라고 특별히 위험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식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한우라고 그렇게 안전하지도 않으며, 광우병의 위험은 어떤 소에나 도사리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분명히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일 텐데 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상반된 것인가?

그러나 적어도 몇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적어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는 아직 상당히 미스터리한 부분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암의 메커니즘을 아직 완벽히 밝혀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어떻게 광우병에 걸리는지, 그리고 어떤 부분이 정말 위험한 것인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불확실한 확률로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이 확률은 적어도 0%는 아니라는 것. 0.00000......1%가 될 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어떤 확률은 있다는 것.

이렇게 놓고 보았을 때 이것을 놓고 싸우는 것은 그다지 현명해 보이지는 않는다. 가능성을 놓고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미궁 속에 놓여 있는 한, 그리고 현재처럼 광우병의 위험성이 논의의 중심에 놓여있는 한, 이 싸움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아니, 오해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 싸움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단, 우리 모두가 광우병 전문가가 아닌 상황에서 이러한 것이 논의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싸움이 자칫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까 경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싸움은 마치 얼마 전에 있었던 황우석 박사의 복제논란을 둘러싼 황빠와 황까들의 싸움, 그 대리전의 재판(再版)처럼 보인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가 일종의 과학적 캡슐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황빠와 황까들은 꽉 막힌 과학적 캡슐을 둘러싸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싸움을 벌였다. 왠지 지금은 그의 재방송 같지 않은가?

 

나는 그보다는 현 정부가 훨씬 더 공격을 받아야 할 사항은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담보로 하여 국민들에게 충분히 이해를 구하고 진행되어야 할 이 일련의 일들을 총선이 끝나자마자, 기습적으로 처리해버렸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이는 정확히 말하면 기습이 아니다. 총선 전에 이미 시나리오가 적혀 있던 일들을 그대로 시행한 것에 불과하다. 아마도 현 정부는 미국 비자 면제 등의 몇 가지 사탕만 던져주면 국민들이 그대로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단지 쇠고기를 싸게 먹게 해준다니까 국민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너무 단선적인 사고였다. 복잡하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지난 대선에서 사람들이 MB를 1위로 만들어 준 것은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 ‘잘 살게 될 것’의 기본은 ‘산다’는 것이다. 일단 살고 난 다음에야, 잘 살고 못 살고가 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광우병의 위험이 있다고 알려진 순간 어느 누구도 광우병의 위험이 있는 쇠고기를 먹고 죽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이는 현 정부가 발목을 잡히고 있는(아직 잡힐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현재의 지점이 흥미롭게 보여지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대운하도 아니고 의료보험 민영화도 아니고, 장관이나 수석들의 비리도 아니고, 미국과의 협상 때문이라니. 그것도 한우 농가들이 무너져서도 아니고, 식량주권을 내주어서도 아니고, 광우병 때문이라니. 현재의 사람들이 그저 먹고 사는 문제에 얼마나 가치비중을 두고 있는지, 이 사회가 얼마나 물질 기반으로 돌아서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사람들이 광우병으로 뇌에 구멍이 뚫리는 사진에 분노하는 것과 지난 총선에서 강북에 ‘뉴타운’ 공약이 먹혀든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연장선상에 와 있다. 이를 현 정부는 정말 간과했던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어차피 바보들이니까. 또 적당히 구슬러 주거나 적당히 얼버무리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것인가.

 

하기는 그들이 국민을 상병신으로 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상병신’으로 불릴 만큼 이미 바보짓을 저질렀으니까. 각종 비리에 얼룩져 있던, 그리고 단견적인 공약들을 남발했던 MB를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대통령으로 만들어줬고, 그들의 연이은 코믹스러운 그러면서도 공포스러운 행동들을, 마치 어린아이에게 볼펜을 집어주고 벽에 낙서할까봐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면서도 다시 총선에서 그들을 밀어주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야 현재 조선, 중앙, 동아일보 등이 이에 대응하는 방식, 그리고 정부의 고위공직자들이 이에 대응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는 없다. 동일한 내용을 6개월 전과 지금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능력, 같은 팩트를 전혀 다르게 전달하는 능력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한가 아닌가, 광우병 위험성이 높은가 아닌가는 미스터리 속에 놓여 있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이 이에 필요 이상의 공포를 느낀다면, (정부에서 흔히 하는 말대로 ‘오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 공포는 누가 만들어내었는가. 바로 정부, 조선, 중앙, 동아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몇 개월 전만해도 미국산 쇠고기를 절대 먹으면 안된다고 말해오지 않았던가. (지금 정부의 누군가가 그러더군.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의 위험성을 논하는 것은 다리가 무너질까봐 건너지 않는 것과 같다고. 그러나 우리는 이미 백주대낮에 다리가 무너지는 것도 경험해봤다. 왜 안 무섭겠는가?)

 

아무튼 지금의 이 촛불집회를 비롯한 국민들의 분노는 너무 늦거나 혹은 너무 빠르지 않은가 하고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다. 너무 늦었다는 것은 이것이 대선도 총선도 다 끝난 시점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가 아닌가 하는 것이고, 너무 빠르지 않은가 하는 것은 대운하, 삼성 문제, 여러 측근들의 비리, 아직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의료보험 민영화 문제, 여러 자립형 사립고를 비롯한 교육정책들 그리고 FTA 등 건드릴 것은 많은데, 이러한 분노가 잠깐의 분노로 그치지 않을 것인지, 작은 모닥불로 끝나지 않을지, 그래서 도리어 현 정부의 기를 살려주는 꼴을 낳지 않을지 걱정되기 때문이다.

뭐 아무튼 늦었다거나, 빠르다거나 하는 말을 이미 시작된 일에 첨언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촛불집회 같은 것은 좋아하지도 않고 불확실한, 또 하나의 캡슐을 둘러싸는 싸움이 될지 모르는 위험성을 안고 촉발된 일이지만, 지금은 대안이 없다. 소는 집을 나갔지만, 외양간은 언젠가는 고쳐야 한다. 다른 소를 키우려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오늘 ‘논어(論語)’를 읽다가 좋은 구절이 있어 여기에 첨언하고자 한다.

자하가 거보(莒父)의 읍재(邑宰)가 되어, 정치에 대해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속효(速效)를 보려하지 말고, 작은 이익을 추구하지 마라. 속효를 보려들면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작은 이익을 추구하면 큰 일을 이룩하지 못한다.”

子夏爲莒父宰, 問政, 子曰; 無速效, 無見小利. 速效則不達, 見小利則大事不成.

- 논어(論語), 자로(子路) 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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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Chungking Express), 왕가위

Ending Credit | 2008. 4. 30. 01:23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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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의 개봉일은 95년 9월 2일이었다. 물론 나는 이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겨우 날짜를 알았을 뿐이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개봉일로부터 한참 지나고 아마도 98년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 날짜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날짜를 기억도 못하는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이 영화를 보기 전후의 일들은 꽤나 난삽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와 관련지어서는 하나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학회 사람들과 영화를 보러 갔었다. 영화관에 간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하는 소규모의 영화제였다. 학교는 외대였고, 날짜는...아마도 봄이나 가을이었던 것 같다. 새벽에는 꽤나 추웠으니까. 밤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나는, 야외에 대형의 스크린을 걸어놓고 하는 그런 영화제였다. 말이 영화제였지,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대학의 영화동아리에서 주관하는 작은 행사였었던 것 같다. 거기에 왜 가기로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 학회의 누군가가 외대에 친구가 있었거나, 우연히 PC통신 게시판에서 그런 내용을 보았거나, 우리 학회에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었거나...하는 그런 시덥잖은 이유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다른 기억이 모두 틀렸다고 해도 지금 하나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우리가 매우 화면 가까이에 앉아서 영화를 봤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화면은 매우 컸다는 것이다. 스크린에 배우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 그 배우의 코가 적어도 웅크리고 앉은 나 정도의 크기는 되었으니까. 왜 그렇게 가까이에서 영화를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자리가 없어서였을 수도 있고, 그 곳의 구조가 이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나의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모두 세 편이었는데, 가장 처음에 나온 영화는 롱테이크가 무던히도 반복되는 영화로, 무언가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영화였다. 조금 늦게 도착하여 영화의 줄거리도 전혀 모르는데다가, 바라보는 화면은 곧 나를 지루하게 만들었으므로 꾸벅꾸벅 졸다가 옆의 친구가 옆구리를 찔러 다시 일어나서 보다가, 다시 졸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였다. 아주 훨씬 나중에야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그 영화는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영화가 <하류>였는지, <구멍>이었는지 모르겠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 때문에 지루했던 기억이 있으므로 <구멍>이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미묘한 관계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여 <하류>같기도 하다.

두 번째 영화부터는 비교적 생기를 가지고 졸지 않고 영화를 즐기며 볼 수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같이 갔던 일행 중에 한 친구가 계속 영화를 보며 비명을 질러대는 통에 졸음이 올래야 올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는 나 역시도 지금까지 본 공포영화 중에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그리고 아직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압권 장면 중 하나일 듯한 피바다가 되는 방과 ‘REDRUM’ 그리고,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 그리고 무엇보다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는, 거대한 스크린에 클로즈업으로 비췄던 잭 니콜슨의 눈빛. (아마도 그 스크린이 과도하게 컸던 것으로 기억되는 것은 클로즈업된 잭 니콜슨의 눈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영화가 끝나고 난 후 다들 너무 공포에 떨어 피곤해진 데다가, 새벽도 꽤 이슥해지는 터라 우리 일행도 자리를 뜰 준비를 하였다. 그러자 영화제 관계자 한 명(아마도 그 동아리 학생 중의 하나인 듯한)이 살짝 다가와 우리를 잡았다. 그리고 미끼를 던졌다. “이 영화도 보고 가세요. 아주 야한 영환데.” 글쎄. 왜 우리를 잡았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많은 관객들이 이미 빠져나갔으므로 우리라도 잡아야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말에 이끌렸는지, 새벽이라 갈 곳도, 갈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정말 많지 않은 관객 속에서 그 날의 마지막 영화이자, 상당히 야하고 상당히 슬픈 영화를 보았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 포르노스타의 등장과 씁쓸한 몰락, 그리고 퇴장. 우리는 초반에는 은밀한 웃음을 교환하며 좋아하다가, 곧 속았다고 생각했고, 종국에는 우리도 역시 씁쓸해졌다. 그리고 슬퍼졌다.

슬퍼서 그랬는지, 아니면 마지막 장면에 쇼킹을 받아서 그랬는지 우리는 그곳을 나오며, 학교 앞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씩을 사서 몰락한 포르노스타 마냥 편의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차가 다니는 시간을 기다리며 나눠 마셨고, 나는 다시 우리 학교 앞까지 와 비디오 방에 가서 이 영화 <중경삼림>을 보다 잠이 들었다. 아마도 다음날 오전 수업을 기다리며 시간이나 때우자는 심산이었겠지만, 학교에서 수업이나 제대로 들었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 영화 <중경삼림>은 어느 날 TV에서 이 영화를 하는 것을 발견하고 비스듬히 누워 볼 때까지 내 기억 속에는 초반부의 임청하의 까만 선글라스와 노란 가발로 기억되거나, 뚝뚝 분절되던 이상한 화면(‘스탭프린팅’이라 불리우는)으로 기억되거나, 차이밍량과 <샤이닝>과 <부기 나이트>와 그저 한 세트로 기억되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기억을 되새기며 비스듬히 누워서 보다가, 어느 순간 자리에 앉았고, 그 영화가 좋아졌다. 그 후에 나는 이 영화를 주기를 가지고 습관적으로 반복해 보게 되었고, 내 기억 속에서 기억은 다시 <중경삼림>의 내용들과, 그리고 다른 영화들과 합쳐지고 분절되고, 더욱 난삽해져만 갔다.

 

이 모든 기억을 다시 떠올린 이유는 며칠 전 정성일 평론가의 음성해설로 <중경삼림> DVD를 다시 보았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사놓은 DVD인데, 그 동안 이런 음성해설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보게(듣게) 되었다.

정성일 평론가의 목소리는 꽤나 차분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가진 수많은 이야기들을 빨리 청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욕심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음성해설에서 정성일 평론가는 책 한 권으로 내도 될 만한 분량의, 수많은 알려진,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들려주는 동시에, 중간중간 의미 있는 장면을 짚어주는 것 또한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의 배경과 영화의 주제를 다시 되새겨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지만, 영화를 여러 번 본 나도 놓치고 지나갔던 장면들(예를 들어, 영화의 전반부에 왕정문이 가필드 고양이 인형을 안고 가게에서 나오는 장면이라든가)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는 그런 재미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도대체 정성일 평론가는 대본을 써놓고 이 이야기들을 읽어내려 가는 것일까, 아니면 영화를 보면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영화에서 평론가의 음성해설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평론가의 음성해설이란 결국 누군가의 하나의 영화를 본 감상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 되었지, 왜 이것을 본다(듣는다)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난삽한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 것은 정성일 평론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성일 평론가가 해설 중간에 왕가위와 차이밍량을 비교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주문해 놓은 <스틸라이프> DVD가 보고 싶어졌다. 그 DVD에도 정성일 평론가의 음성해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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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I, 진중권

The Book | 2008. 4. 28. 22:00 | Posted by 맥거핀.

한국사, 세계사, 음악사, 미술사, 문학사...대부분의 사람들이 ‘-사(史)’로 끝나는 책에 가지는 공통적인 선입견이 있다. 책에는 수없이 많은 인물들과 사건들과 년도들이 나올 것이며, 그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과 년도들은 종국에는 우리를 매우 지치게 만들 것이라는 점. 하기는 이것은 그간 우리나라의 수많은 교육에서 행해온 방식이기도 하다. 역사 그 자체를 다루는 국사와 세계사 시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어라는 과목도 따지고 보면 결국 하나의 문학사를 배우는 과정이며, 물리나 수학 등도 그간 물리학자나 수학자들이 구축해 놓은 거대한 그 나름의 역사들을 배우는 과정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무튼 간에 우리는 1492년과 1592년 중 어느 것이 임진왜란이고, 어느 것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인지 고등학교 이후로 내내 헷갈려하며, 여전히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 <서양미술사 I>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역시 마찬가지로 겁이 더럭 났다. 이 책에는 또 얼마나 많은 년도들과 작가들과 작품들이 출현하여 머리를 아프게 할 것인가.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단지 진중권의 ‘말빨’ 때문이었다. 그가 여러 지면이나 방송에서 보여주는 현란한 말솜씨를 또 여기서는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그는 복잡하고 고루한 이야기들을 또 어떤 방법을 써서 가공하여 들려 줄 것인가. 그리고 그런 나의 기대는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이 책은 각 장을 시대 별로 분류하면서도 교묘하게 시대별 분류가 낳을 수 있는 지루함을 피해간다. 즉 언뜻 보면, 1장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미술을 다루고, 2장은 중세의 예술을 다루는 식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 책에서는 그러한 표면상의 시대구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이 책에서 각 장을 구별하는 것은 미술의 근원적인 요소이다. 즉 미술의 근본 요소인 ‘형태’를 1장에서 다루고, 또 다른 근본 요소인 ‘색채’를 2장에서 다루고, 다른 요소인 ‘공간에 대한 투시법’을 3장에서 5장까지 다루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서술이 시대 구분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진중권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미술의 각각 원리들의 발전이 곧 서양미술의 발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형태를 구상하고 그것의 색을 생각하고, 그 형태를 공간에 배치하듯이, 서양 미술은 인체의 적절한 비례 묘사를 중시했던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의 미술에서부터, 초감각적 빛(색채)을 중시했던 중세의 예술, 그리고 자연과 공간의 재현을 중시했던 르네상스의 예술로 발전해나가는 식이었고, 결국 이 자체가 미술의 역사인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단순한 시대구분을 놓고 서술하는 방식을 벗어남으로써 역사 서술에서 독자들이 가질 수 있는 지루함의 함정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각 장을 형태, 색채, 공간, 양식의 변화, 비평 등 하나의 소주제들로 통일성 있게 이끌어갈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동시에 위에서 말했듯이 ‘서양미술사’라는 큰 흐름도 놓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구성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를 의도적으로 각 장을 하나의 중요한 미술사의 문헌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도 있다. 즉 1장에서는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논문을 토대로, 각 시대와 문화가 인체의 묘사에 각각 어떤 비례를 사용했는지를 고찰한다면, 2장에서는 로사리오 아순토의 저서를 토대로 미와 예술에 대한 중세인의 생각을 살펴본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은 12장으로 이루어진 서양미술사임과 동시에 12권의 논문(저서)을 효과적으로 재구성한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공시성과 통시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하다 보면 이러한 구성이 갖는 단점이 생길 수 있다. 12개의 주제를 12권의 논문을 통해서 살펴보다 보니 책이 어려워지고 방대해지기가 쉬운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생각 외로 상당히 쉽다. 미술에 대한 문외한인 나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유명한지 처음 알았다;) 쉽게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을 정도다. 아마도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효과를 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나는 각각의 내용을 실제의 작품을 놓고 설명하듯이 서술하고 있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자 ○○○의 이 작품을 보자”는 식의 문장이 매우 많이 나온다. 용어나 설명이 어려워도 대부분 그림을 보다보면 이해되는 부분이 많다. 또 하나는 문장력이다. 진중권 씨의 인터뷰 기사 등을 자주 보는데, 그 때마다 내용 자체를 떠나서 비유를 써서 설명하는 능력이나, 주어와 서술어의 일치, 조리 있게 문장을 끊어서 말하는 능력 등에 감탄할 때가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런 ‘화술’이 ‘문장력’으로 어느 정도 살아나는 느낌이다. (아무리 쉬운 내용도 문장이 엉망이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와 반대로 아무리 어려운 내용도 문장이 정확하고 깔끔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예전의 서양 철학 책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용 자체가 난해하기도 하려니와, 엄청나게 난삽한 번역 문장들이 한 몫을 했다면 내가 지나치게 말하는 것일까.)

 

361페이지로 이루어진 17000원의 책. 책의 가격을 단순히 페이지와 가격의 비례로 따질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비싸다. 그러나 비싼 만큼 값어치가 있고, 게다가 모든 그림은 올 컬러다.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ps. 다만 몇몇 오기나 이상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165페이지의 표에서 ‘해석의 교정원리’를 다루는 부분을 보면, I과 III이 모두 똑같이 ‘양식사’로 되어 있는데, 책의 내용상으로 보면 III에는 ‘상징사’가 들어가는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330페이지의 그림 18은 내용상으로 보면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이 아니라 ‘앵그르’의 그림이 맞는 것 같다.

서양 미술사. 1 상세보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예술 감각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술 이야기! 미학의 시각으로 보는 서양 미술사! 미학의 눈으로 읽는 고전 예술의 세계『서양 미술사 1』. 《미학 오디세이》로 잘 알려진 진중권이 이번에는 미학의 눈을 통해 보는 서양의 고전 예술을 소개한다. 이 책은 시간적 흐름에 따라 소개하던 여느 서양 미술사 도서를 벗어나 '서양미술의 원리'와 '서양미술의 역사'를 하나로 묶어낸 것이 특징이다. 서양미술의 원리를 그 시대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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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eureka), 아오야마 신지

Ending Credit | 2008. 4. 17. 01:56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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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막바지, 사와이 아저씨(야쿠쇼 코지)는 코즈에(미야자키 아오이)에게 외친다. “돌아가자!” 그리고 코즈에의 밝은 웃음이 비치고, 지금까지 잿빛으로 진행되던 화면은 칼라로 바뀐다. 그리고 그 둘은 버스에 올라타고, 화면에는 이 영화의 제목이자, 의미심장한 말이 떠오른다. ‘EUREKA' (참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엔딩이다).............. eureka.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외쳤다고 전해지는 그 말. 깨달음의 언어. 왜 이들은 이렇게 말하는가. 누가 잿빛으로 세상을 보던 코즈에에게 총천연색 세상을 선물했는가.

이 엔딩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아오야마 신지의 아이가 처음으로 집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헬프리스’의 마지막에서 돌아갈 곳을 잃은 야스오는 스스로에게 총알을 선물하고, 켄지는 야스오의 동생 유리를 데리고, 돌아올 기약이 없는 먼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새드 배케이션’의 켄지 역시 집에 돌아가지만, 다시 길을 떠나게 되고, 고의와 실수가 뒤엉켜 수형 생활이라는 또 긴 여행을 다시 떠나게 된다. 이런 아이들이 그 중간 ‘유레카’에서는 집에 돌아간다. 그래서 사와이 아저씨의 입으로 말해지는, 이 영화 전체의 마지막 대사는 반갑다. “돌아가자!” 무엇이 이들을 집에 돌아가게 만드는가. ‘헬프리스’와 ‘새드 배케이션’의 외전(外傳) 격이나, 어떻게 보면 ‘헬프리스’의 켄지와 지극히 비슷한 상태에 빠진 이 소녀는 왜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는가.

 

아오야마 신지의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부모를 잃는다. ‘헬프리스’의 켄지는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리고, 아버지는 병실에서 목을 매며, 코즈에와 코즈에의 오빠 나오키의 부모 역시 버스 납치 사건의 후유증으로 사라져 버리며, ‘새드 배케이션’의 중국인 소년 ‘아춘’은 컨테이너 박스 속에서 아버지가 죽어 버린다. 그러나 ‘헬프리스’의 켄지와 ‘유레카’의 코즈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켄지는 아버지를 잃고 주위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먼 길을 떠나게 되지만, 코즈에는 곧 사와이 아저씨라는 유사 아버지를 가지게 된다. 이는 ‘새드 배케이션’에서는 조금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아춘은 친아버지를 잃고, 곧 켄지라는 유사 아버지를 만나지만, 타의에 의해서 그 유사 아버지와 헤어지게 된다. 친아버지를 잃어버린 켄지는 ‘마미야’라는 유사 아버지를 만나지만, 그 유사 아버지의 친아들을 죽임으로써 유사 아버지를 다시 잃는다. 아무튼 여기에서는 ‘새드 배케이션’은 ‘유레카’ 그 이후의 이야기이므로 논외로 하자면, ‘헬프리스’의 켄지가 먼 길을 떠나고, ‘유레카’의 코즈에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사와이 아저씨’라는 유사 아버지가 있고, 없음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한 인간이 어떤 고비를 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른, 그것도 제대로 된 어른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을 이 영화는 말해주지만, 동시에 작은 불안감도 던져준다. 이 사회에는 과연 그런 어른이란 존재하고 있는가. 그런 어른이 존재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좁게 보자면 일본이라는 사회이고, 넓게 보자면 현대라는 사회가 아닌가. 그것은 영화 중반부터 시작되는 사와이 아저씨의 기침이 계속 반복되면서부터 시작된다. 다름 아닌 그 기침이란 사와이 아저씨가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면서부터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즈에라는 한 생명을 살린 이 사와이 아저씨라는 인물은 과연 이 현대의 일본 사회에서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물인가, 아닌가. (이런 사와이 아저씨를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인물은 아키히코나 시게오 정도. 그러나 아키히코는 이 사회에서 밀려난 인물이고, 사와이를 체포한 형사는 사와이에게 당신이 싫다고, 이유없이 싫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 형사, 혹은 사와이의 형의 시선이 현대의 일본 사회, 혹은 넓게 보자면 현대 사회의 시선일 것이다.)

이러한 불안감은 ‘새드 배케이션’에서는 더욱 증폭된다. 극 중 아춘을 납치해 간 중국인은 켄지에게 말한다. “일본 사람은 아이를 잘 키울 수 없습니다.”이 말은 암시하는 바가 있다. ‘새드 배케이션’에서 사와이와 비슷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는 마미야도 자신의 친아들은 결코 제대로 키워내지 못했다. 그리고 켄지도 자신의 아들인 아춘을 잃는다. 즉 아오야마 신지가 ‘헬프리스’에서는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내고, ‘유레카’에서 그 해답을 제시했다면, 다시 ‘새드 배케이션’에서는 ‘그렇다면 그 유사 아버지들은 이 현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던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아오야마 신지는 ‘유레카’에서 막연한 불안감을 던지며, 다음을 예고했듯이, ‘새드 배케이션’에서 역시 막연한 실마리를 던진다. ‘치요코’라는 강한 어머니의 등장. 이 뺨을 맞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그리고 모두들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오게 될 것이다 라고 켄지에게 당당하게 말하는 이 여자는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 그리고 사와이라는 유사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코즈에라는 이 여자는 또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유레카’에서 남자아이인 ‘나오키’는 아버지를 잃고 야스오와 같은 길을 걷지만, 코즈에는 끝내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헬프리스’의 해답편인 ‘유레카’를 보고, ‘새드 배케이션’의 해답편인 그 다음의 어떤 영화를 기다리게 된다. 그 해답이 제시되면, 아마도 이를 허문영 평론가가 이 3부작 영화를 보고 말한 ‘전후 일본 세대의 정신사’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그 해답은 영원히 제시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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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트(The Mist), 프랭크 다라본트

Ending Credit | 2008. 4. 12. 21:25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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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에 본 영화인데, 정성일 평론가가 <씨네21>에 실은 무지무지하게 긴 이 영화의 리뷰를 읽고, 그 아우라에 압도되어 뭔가를 적어보려는 것을 포기했다. (정성일 평론가의 그 좋은 리뷰는 아래의 링크에) 그러다가 갑자기 오랜만에 이 영화 생각이 났다. 그리고 뭔가를 적어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하기는 뭐, 평론가야 그걸로 먹고 사는 분이고, 나야 재미로 적는 것 뿐 이니까.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04&article_id=50184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04&article_id=50185

이 영화 <미스트>는 위에 정성일 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많은 드러난 이야기와 함께, 동시에 숨겨진 이야기와 맥락을 담고 있는 영화다. 괴물들이 나오는 B급 공포물의 외양을 두르고 있는 이 영화는 그 내부를 한 꺼풀 들어내 보면 평론가들이 한 번 쯤 글을 쓰고 싶어 죽겠어할 많은 숨은 이야기거리들을 담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정성일 평론가는 이 영화를 해석하는 무려 7가지의 판본을 이 긴 글에 담으셨을 것이다.) 괴물들이 출몰하는 B급 공포물, 생태파괴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재난 영화, 좀비물,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하나의 기묘한 드라마 등 여러 다양한 판본으로 읽힐 수 있는 이 영화를 또한 하나의 심리실험극으로도 볼 수 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이 영화에는 두 가지의 재미있는(?) 심리실험이 있다. 내가 이것을 심리 ‘실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영화의 슈퍼마켓이라는 공간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실험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험이 일어날 수 있는 최적의 조건 - 주위와의 완전한 고립, 외부에서 제공되는 여러 독립변인들(괴물들의 출몰), 피실험집단 내부를 여러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이렇게 다양한 나이와 인종, 경제력, 사회적 계급을 갖춘 실험집단을 구성하기에 최적의 공간으로서 슈퍼마켓 이상 가는 것이 있겠는가?) - 을 갖춘 이 공간은 마치 이 공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착각을 준다. 과연 이 폐쇄된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변해나갈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주위의 위협에 대응할 것인가?

첫 번째 실험은 ‘믿음’의 문제이다. 영화의 초반부, 주인공 데이빗은 괴물의 존재를 믿으며, 슈퍼마켓 뒷문을 열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주위의 사람들은 데이빗을 믿지 못하며, 심지어는 그를 겁쟁이라고 조롱한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죽고 나서야 그들은 데이빗을 믿게 되고, 문을 닫고 돌아온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나 또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불신을 당한다. 하나의 믿음이 어떤 식으로 전파되며, 어떤 식으로 불신되는가를 보여주는 이 장면은 현실의 하나의 작은 축소판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인상적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이를 하나의 종교와 관련지어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신을 절대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하나의 일을 계기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깊이 종교적 신앙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처음의 데이빗을 믿지 못하던, 함께 슈퍼마켓 뒤로 갔던 사람들은 ‘그 일’이 일어난 후 다른 사람들보다 앞장서서 일의 해결에 나서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보다는 절대 부정하는 사람들이 절대 긍정도 가능하다.’

두 번째 실험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인 카모디 부인과 관련지어서 발생한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 영화 <미스트>를 읽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안개를 가스로 보며, 이를 홀로코스트의 느슨한 비유로 보았지만, 나는 여기에서 하나의 파시즘 사회의 탄생을 본다. 파시즘은 익히 잘 알려진 대로 구성원들의 절망과 공포를 그 자양분으로 삼아 기능하는 체제이며, 권력에의 관심을 외부의 적으로, 또는 내부의 희생양으로 돌린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바이마르 정권 하에서의 비참한 독일 민중의 막연한 절망과 공포를 이용하여 탄생이 되고,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등의 외부의 적과 체제 내외부의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을 그 동력원으로 삼아 유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는 외부의 괴물들이 출몰하는 고립된 슈퍼마켓을 배경으로 카모디 부인을 정점으로 한 하나의 작은 파시즘 사회가 탄생한다. 카모디 부인은 외부의 괴물들의 공격을 예언하고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식으로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감을 점점 교묘하게 이용하여 증폭시키며, 그러한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체제 내부의 적, 즉 데이빗 일행들에게 돌림으로써 그 체제를 유지시켜 나간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카모디 부인의 광기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광기를 느슨하게 연상시키며, 카모디 부인이 데이빗 일행과 맞설 때 두 남자가 각각 칼을 빼들고 나서는 것은 마치 SS친위대를 연상시킨다. (물론 두 남자의 직업이 요리사(아마도?)와 정비공임은 파시즘에 열광한 주력 세력이 소상인이나 숙련공 등의 당시 독일 민중의 중하층 계급이었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동시에 이에 맞서는 리더인 데이빗의 직업이 예술가(화가)임은 또 은근히 상징하는 바가 있다.) 그래서 다시 여기에서 파시즘 시대의 광기와 이성의 마비를 보며, 사회 구성원들의 절망과 공포가 한 사회를 어떻게 파괴시키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정성일 평론가는 묻는다. 처음에 모두가 죽은 것으로 생각했던 그 아이 엄마가 살아남은 것을 보며, 과연 그녀의 생존이 무엇을 증언하느냐고. 이 생존의 윤리와 기억의 증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고. 물론 이는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슈퍼마켓을 하나의 거대한 포로수용소로 보고, 안개를 가스로 하는 홀로코스트의 느슨한 비유로 이를 읽을 때 가능하겠지만,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그녀의 생존은 무엇을 증언하는가. 모두가 절망과 공포에 빠져있을 때 자신의 아이를 살리러 그 슈퍼마켓 문을 열고 떠난 그 아이 엄마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현재 점차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으며 사회의 보이지 않는 어두운 구석으로부터 절망과 공포는 점점 그 지형을 넓혀가고 있다. 과연 이런 사회가 파시즘의 무서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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