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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헐크의 바지는 왜 결국 찢어지지 않는 것일까?

 

영화를 보고 종로거리를 걸어 나오며, 지금 여기에도 헐크가 나타나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괜한 상상을 해봤다. 헐크가 나타나 거리 한가운데를 쿵쿵 걸어 다니는 그런 비주얼 말이다. 국회의원이라는 작자는 말 한마디로 길거리에 나선 100만의 국민들을 천민으로 만들고, LG 투수진은 한 게임에서 14개의 볼넷을 선물하고, 날씨는 슬슬 더워지고...하는 뜨겁고 질척질척하고 꽁기꽁기한 야만의 세계, 그런 세계 한 가운데에 헐크가 나타나,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스트랄한 비명을 질러주면 무언가 낫지 않을까.

왜 슈퍼히어로물이 범람하는가? 라는 질문에, 개인 존재의 유한성과 그의 극복에의 희구에서 찾는 어떤 철학적인 이유를, 또는 세계의 강대국인 미국과 그의 주변국과의 관계에 대한 희미한 반영인 인문사회학적 이유를, 또는 어렸을 적부터 마블코믹스의 팬들이 어른이 된 후 다시 똑같은 소비를 반복하는 경제사회학적인 이유를 댈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는 사람들은 꽤나 단순한 것 같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여서, 그냥 단지, 나도 저러한 힘으로 오늘도 사람들과의 소통에 대해 골몰하시는 소통의 달인 ‘오해’ 이MB 선생님이라든가, 연장 일대일 동점에서 멋지게 에러를 범하시는 LG 모 선수를 날려버리고 싶다는 실현불가능하면서도, 실현불가능하기 때문에 열망하는 그런 상상을 가능케 해주는 하나의 감정이입의 도구로서 슈퍼히어로를 볼 뿐이다.

 

그러나 사실 이 친구 헐크, 아니 브루스 배너 양반은 참 그런 단순한 감정이입의 대상으로만 쓰고 날려버리기에는 꽤나 불쌍한 구석이 있다. 그까이꺼 하기 싫으면 때려 치우면 되는 배트맨이나 슈퍼맨, 아이언맨 등 다른 여타의 많은 슈퍼히어로들과는 달리, 이 친구는 하기 싫다고 안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일단은 아무리 안하려고 해도 화가 나면 어쩔 수 없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무리 틱낫한 스님과 같이 화 다스리기 수행을 한다 해도 한나라당 주 모 의원이 100분 토론에 나와서 날리는 썩소 크리를 몇 번 보고나면, 그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어찌 다스린단 말인가. 그리고 변하고 난 뒤 정상으로 돌아온 후 그 처참한 모습이라니. 도대체가 이것은 새벽 4시까지 술 마시고 지하철 바닥에서 토한 후 집으로 돌아와 쓰러져 잔 다음날의 모습이라든가, 전설의 박신양의 거지 신공(밑의 관련사진 참조)을 능가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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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브루스 배너 박사는 꽤나 소심남이다.  일단은 창백한 피부와 축처진 눈꼬리는 '내가 소심남이오'하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관객 누구나에게 알 수 있게 해주거니와(이는 물론 항상 '소심 이미지'에서 급변하는 캐릭터를 많이 맡아왔던 에드워드 노튼의 캐릭터에 기댄 바도 있다), 영화 곳곳에서도 소심남적 면모는 잘 드러난다. 상대방을 멋지게 제압하고, 혹은 멋지게 제압하지 않더라도 기지와 재치를 발휘하여 적진으로 숨어드는 다른 캐릭터와는 달리, 사람좋은 웃음을 날리며 고작 피자 한 판으로 경비원을 회유하여 건물로 잠입(?)하는 모습이라던가,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도, 일라이저에게 따귀맞고 방문 뛰쳐 나가는 캔디같은 폼으로 뛰어나가 쓰레기통 뒤에 숨는 모습이라니. 하기는 뭐 변한 뒤라고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사랑하는 여자를 안고 울부짖던 킹콩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여자를 안고 괴로워하는 초록 헐크의 그 선량한 눈망울이라니. (글 옮기는 과정에서 이 문단이 누락된 것을 발견하고 뒤늦게 추가.-_-)     
                 
그의 이러한 소심남적 면모는 그가 싸워야 하는 대상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는 하나의 방법으로 그의 적이 누구인가를 살펴보는 방법은 꽤나 추천할 만하다. 그것은 이MB의 적이 초중고딩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논거가 된다.

여타의 다른 슈퍼히어로들이 조커에서 마그네토, 그린 고블린으로 이어지는 그럴싸한 적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헐크 역시 마지막에 <에이리언 VS 프레데터>를 연상시키는 혈전을 벌이며 적과 싸운다. 그러나 그 상대방이 헐크의 가장 큰 적수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헐크의 가장 큰 적은 자기자신이다. 변신하기 전 브루스 배너 박사가 그토록 원하는 것은 자기 안의 헐크를 제거하는 것이다. 지킬박사가 하이드를 없애버리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쓴 것과 마찬가지로 브루스 배너 박사는 과학의 힘을 빌려 헐크를 제압하고자 한다. (물론 이는 한 가지 아이러니를 생각하게 한다. 과학의 힘으로 탄생한 헐크를 제압하기 위해 또다른 과학의 힘을 쓴다?) 이는 소심남들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소심남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안의 소심기(氣)를 없애는 것이다. 과학의 힘을 빌리든 아니든 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얼토당토않은 부제의 답을 생각해 본다면, 답은 이미 나왔다. 그가 엄청난 소심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해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미국산 소고기와는 달리 미국산 청바지는 질이 좋기 때문에 그의 청바지가 고작 무르팍 좀 뜯어지고 허리만 좀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그의 그 거대한 몸집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말이 안 된다. 여자친구가 사온 엄청난 신축성의 쫄바지도 단지 보라색이라는 이유만으로 거부하는 소심남 브루스 배너 박사. 그의 변신으로 바지가 터지게 되면 그의 소심한 마음까지 같이 터질 것을 염려한 신의 현명한 뜻인 게다. 변신에서 깨어난 후 축 처진 눈꼬리로 자신의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아랫도리를 바라보는 브루스 배너 박사. 생각만 해도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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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The Book | 2008.06.08 02:05 | Posted by 맥거핀.

글의 시작머리에서 김연수는 말한다. ‘“겨우 이것 뿐인가”라고 질문하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여행을 할 권리’. 과연 여기가 어떠하길래, 우리는 ‘겨우’ 이것 뿐인가라고 말하며 새로운 세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인가.

 

여행기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눠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이른바, 정보 전달 유형. 세계 각국의 신기한 풍물과 다양한 공간들, 음식들, 음악들, 그림들을 소개하며, 그곳에 다다르는 방법들과 즐기는 방법들을 가이드가 된 심정으로 자세하게 소개하는 유형이다. 두 번째는 자기 과시 유형. 이런 유형의 저자들은 대체로, 꽤나 방송을 통해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외우기가 힘든 긴 이름을 가진 음식을, 그보다도 더 긴 이름을 가진 와인을 곁들여 먹고는 그것을 자랑스레 사진을 찍어 실어 놓는다. 마치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음식을 찍어서 올려놓고는 밑에 짤막한 감상을 단 많은 미니홈피들이 그러하듯이, 그 커다란 사진 밑에는 아주 짤막한 감성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지나치게 매끄러운 감상이 달려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유형은 이 김연수의 책 <여행할 권리>와 같은 유형이다. 여행기를 가장한, 사실은 여행기가 아닌 유형. 이런 여행기에서는 어디에 갔고, 무엇을 보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누구를 만났는가, 혹은 누구를 만나러 갔는데 만나지 못했는가가 훨씬 중요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가가 그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여행기에는 글 전체를 꿰뚫는 맥락, 또는 스토리가 있다. 그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와 얽혀진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은 다음의 여행지의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고, 그 마지막에는 그 여행기를 쓴 저자 자신이 있다.

 

이 책에 실린 11곳의 여행기, 아니 정확히 말해서 11가지의 이야기를 꿰뚫는 키워드는 ‘월경’, 즉 국경을 넘는 것이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니 넘지 못하더라도 국경 근처까지 여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국경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물리적인 ‘국경’ - 총을 든 군인이 지키는, 혹은 철조망이 세워져 있는 - 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국경, 또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암묵적인 국경. 따라서 이 국경이라는 말을 ‘한계’라는 말로 바꿔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각의 개인들이 가지는 한계란, 어떻게 만들어져서 각 개인들을 어떻게 억압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공유되고, 어떻게 넘어서야만 하는가. 그들에게 국경을 넘는다는 것, 즉 한계를 넘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책에 실린 몇몇 여행기에서 살펴본다면, 조선족 이춘대 씨에게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향한다는 것은 그에게 깐두부를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경제적 풍요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김연수의 아버지가 해방 후 일본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리얼리티를 버리고 막연한 이상을 찾는 것이었다. 일본어로 소설을 써 아꾸따까와 상 후보가 되었던 조선인 작가 김사량이 1945년 중국 태항산 조선의용군 근거지로 탈출하는 것은 미래의 언어로 글을 쓸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 이상(李箱)이 현해탄을 건너 토오꾜오로 가는 것, 즉 국경 근처까지 가는 것은(아직 해방되기 전이었으므로), 경계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 혹은 경계 바깥의 세상을 갈망하는 것이었다. 김연수의 말을 빌자면, ‘어두운 방, 오들오들 떨면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일’.

이상(李箱)의 죽기 직전 몇 달 간의 행적을 좇는 마지막 여행기를 제외하자면, 김연수는 여행을 간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한국에서 사만부가 채 안 팔리는 소심한 작가 김연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꽤나 긴장하지만, 결국 그가 마지막에 얻는 깨달음은 하나인 것 같다. 그 사람들이라고 별 것 없다는 것. ‘시차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나이차가 있을 뿐이었다’는 것. 참 별 것도 아닌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역설적인 것은 이는 우리가 국경을 넘어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혹은 국경 근처에 가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오직 질문하고 여행할 권리만이’. 국경을 넘는다는 것, 혹은 이상과 김수영과 같이 ‘국경을 넘어보지 못한 몸으로 월경’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내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내가 할 수 없는 것, 그러면서도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일. 그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아마도 김연수가 명쾌하게 지적한 바대로 최소한의 나를 확인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김연수의 ‘공항의 우화’는 완성되는 것이다.

여권에는 나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만 기재돼 있다. 이름과 국적과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 직장에서의 평판은 어떤지, 가족들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따위는 불필요하다. (중략)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느 시공간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최소한의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우화처럼 느껴진다. 거기에는 치명적인 진실이 있다. 공항을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는 그저 여권에 적혀 있는 생물학적인 존재,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여행할 권리 상세보기
김연수 지음 | 창비 펴냄
소설가 김연수, 그가 들려주는 길에서 만난 사람과 문학 이야기! 작가 김연수가 1999년 도쿄부터 2007년 미국의 버클리까지, 국경과 경계를 넘어 길 위에서 만나는 문학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쓴 산문집. 계간 『한국문학』에 2004년 겨울부터 2007년 가을호까지 연재했던 산문을 중심으로 묶은 이 책은, 생생한 여행 현장과 현지인들의 삶의 기록, 문화적 차이와 문학적 고민을 재기넘치게 풀어놓은 12편의 글들이 수록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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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amorfati.tistory.com BlogIcon 맑은독백 2009.02.25 13: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평 정말 잘 봤습니다.
    여행할 권리를 저도 읽었는데..
    이렇듯 정리하진 못했네요..
    부족한 제 생각을 기억님 서평으로 채우고 갑니다.

MB의 세 가지 오판

끄적거리기 | 2008.06.02 18:11 | Posted by 맥거핀.

조선, 중앙, 동아가 조금씩 그 논조를 바꾸고 있다. 며칠 전까지는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 시민들을 애써 외면하며, 광우병 괴담이니, 배후의 음모니 하고 떠들어대더니 오늘부터는 유언비어에 휩쓸린 국민들도 잘못이지만,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나 대응도 잘못이라는 양비론으로 돌아선 것 같다. 물론 이것은 그간 그들이 꾸준히 보여줬던 일련의 기만술의 연장선이며, 그 내저의 심리에는 여전히 국민들을 얕잡아보고 속이려는 자세가 들어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에는 어느 정도는 진심(?)도 들어있는 것 같다. 즉 이명박 정부 때문에 한나라당이나 조중동이나 꽤나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어떻게 되찾은 정권인데’ 심리.

그들은 어쩌면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가 한나라당 후보로 나왔었더라면...하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단적으로 말해서 MB는 박근혜보다 교묘하지 못하다. 앞에서는 이것저것 챙기는 척 하면서 뒤에서 몰래 일을 처리하는 데에 능숙하지 못하다. 더구나 MB는 이미지 메이킹 능력이 형편없다. 반면 박근혜는 꽤나 오랫동안 박정희의 교묘한 이미지 메이킹을 배워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런 것에 능숙하다. 게다가 MB는 천민 배경의 자수성가형 노복(마름) 유형(박노자 교수님이 노무현에게 지적한 것과 같이)이다. 이런 사람들은 체제에 대해 대단히 충성을 보이지만, 단순하고 일을 크게 벌이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꼼꼼함은 떨어진다.

아마도 박근혜가 현재의 대통령이었다면, 혹은 이회창이나 다른 한나라당 인사였다면, 일을 이렇게 끌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오랫동안 해왔던 방식, 그리고 조중동에서도 즐겨 써먹는 방식을 다시 가동하여, 일단 재협상을 추진해보겠다고 하고 시간을 벌고, 장관 몇 명, 수석 몇 명 경질하고, 여론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다음, 미국에게 한두 가지 양보를 이끌어냈다(실제로는 이끌어내지 않았더라도)고 하면서 일을 마무리 지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고 자만심이 넘치면서도 세심함은 떨어지는 현재 MB의 방식은 무엇인가. 고시 강행, 집회 참여자 연행, 그리고 물대포와 폭력과 소화기. (그리고 그 이후는 무엇이 될까.)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사태를 더욱 확대시킬 뿐 아니라 MB 그 자신에게 독이 될 뿐이다. 그의 오판이 계속되는 한 말이다.

 

첫 번째 오판은, 과연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촛불집회에 나온 사람들을 묶고 있는 유일한 끈은 오로지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에’라는 것이다.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이념을 공유하여서도 아니다. 이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된다고 믿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지도부도 없고, 조직화도 안 되어 있다. 아니 도리어 조직화되는 것에 일종의 반감을 가지고 있다(프락치를 증오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물론 상당히 약점이 되기도 하지만, 엄청나게 큰 강점이 되기도 한다. 예전에 그들이 늘 해오던 방식대로 지도부 연행하여 구속시키는 것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MB가 여전히 촛불집회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궁금해하는 이상, 그가 이길 방법은 없다. 더구나 ‘촛불집회’라는 말이 상징하는 대로 이 집회는 비폭력이 기반이 되어 있다. 비폭력은 종국에는 언제나 폭력을 이긴다.

두 번째 오판은, 인터넷의 위력을 우습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일주일간 컴퓨터를 켜지 못해서 업무를 하지 못했다는 말을 아무 생각없이 내뱉는 사람 아니랄까봐, 2MB로 16년간 부팅을 해오신 ‘컴맹’ 이명박 선생님은 아마도 아직도 인터넷을 유언비어의 집합소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현재가 어떤 시대인가. ‘스타’가 중계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집회’와 경찰들의 폭력 역시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굳이 동영상이 아니더라도, 게시판과 댓글을 통해서 현장의 속보가 속속 들어온다. 즉 한 명의 경찰이 한 사람을 때리면, 예전에는 그 주위에 10사람이 보는 것으로 그쳤다면,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서 10만명이 그것을 지켜본다는 것이고, 그 10만명은 100만명에게 그것을 전달할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처럼 경찰이 계속 맞드라이브로 나가는 것은 집회 현장으로 사람을 더 불러 모으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 번째,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오판은, 이 일련의 사태는 국민에게, 특히 10대와 20대에게 일종의 학습을 시킨다는 것이다. 수구 보수 정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 일련의 사태는 정치에 무관심한 10대와 20대들에게 정치라는 것이 먼 곳의 문제가 아님을, 바로 자신의 안전과 건강과 생명에 직결된 문제임을 상기시켰다. 그와 더불어 진행되는 현재의 일들은 조중동이 지금까지 어떻게 사람들을 속여 가며 어떤 짓들을 저질러왔는지, 한나라당이 어떤 집단인지를 많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좋은 교재가 되고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여론의 주역이 되는 십 수년 후, 조중동과 한나라당은 지금의 이 일들이 가져온 효과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MB가 이 오판들을 빨리 멈추게 되기를 바란다. 혹 본인이 할 능력이 없다면, 주위의 조중동이나 한나라당에서나마 약삭빠르게 사태 파악을 좀 하기를 바란다. 나 역시 밑의 분이 글에서 제기한 것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으므로. 그리고 블로그에 영화평이나 쓰며 조용히 지내고 싶기 때문에.

(그리고 아마도 그 시작은 쇠고기 재협상과 경찰책임자 문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http://enterre.egloos.com/418365 촛불집회 그 이후에 대한 ‘테라포밍’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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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조중동의 치명적 실수

생각거리 | 2008.05.30 21:51 | Posted by 맥거핀.
'박노자 글방'에서 가져왔습니다.
박노자 님의 글 입니다.


조중동의 치명적 실수


요즘 국내에서 "쇠고기 정국"이 돌아가는 걸 보니 한 가지 생각이 계속 머리에 듭니다. 제가 애당초에 삼성과 현대, LG의 대주주나 조중동과 같은 한국 보수 지배층의 표현 기관들의 주역들이 상당히 똑똑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똑똑하지 않았다면 일부 사익 집단의 대변자이면서도 어떻게 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민족지" 탈을 써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니 저들이 교활하긴 해도 생각보다 똑똑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정말 똑똑했다면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그렇게 올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올인을 해서 결국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어버렸는데, 그게 자충수이었습니다. 소탐대실의 태세입니다.

왜 그러는가요? 보수 지배 집단에는, 민중에 불리한 신자유주의적 사회 재편을 진행시키면서도 민중의 저항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대통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재벌가나 조중동 분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정치적 집단과 관계가 안좋기에 제 말을 믿으려 하지 않겠지만, 사실 준주변부 국가의 지배층에 이상적인 대통령은 브라질의 룰라나 한국의 김대중 정도입니다. 오랜 투쟁 생활 동안에 쌓인 "경력"을 무기로 삼아 지식인층을 잘 포섭하고, 민중 지도자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권위를 확보해 민중 진영을 잘 분열시키고, "민주, 인권" 노래를 부르면서 민중에게 실제로 꽤나 아픈 신자유주의적 사회 개악을 강요하고... 그래야 민중을 분열시키고 분리, 통치하고 좌절시키는 데에 성공합니다. 만약에 1997년에 이회창이 대통령이 됐다면 IMF사태로 인해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아도 적어도 몇 군데의 상당한 민중적 저항이 일어났을 것이고 지속적 총파업 정도는 현실화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 지도자의 상당부분마저도 "비판적으로 지지한" DJ가 되니 민주노총의 일부 보수파가 정리해고 등을 사실상 받아들이고, 비정규직의 대규모 양산과 신용불량자 대량 속출 사태의 문이 열렸습니다. DJ의 포섭력, DJ의 "민주, 인권적" 수사학, DJ의 평양 방문과 김정일과의 뜨거운 포옹, DJ의 노벨 평화상이 아니었다면 가능했겠습니까? 민중과 지식층에 대한 교묘한 의식 조절이란, 아무나 할 줄 아나요? 지금 한국이 노동자를 쮜어짜는 데에 세상에 가장 편리한 사회가 된 데에 대해서 조중동의 주인님 분들께서 DJ에게 "감사합니다"하고 큰 절을 올려야지요.


그런데 이런저런 이해 관계로 DJ쪽과 불편한 그들은 결국 그들 자신과 "한 몸"이라고 볼 수 있는 이명박을 권좌에 앉히고 말았지요. 그게 꼼수 중의 꼼수이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시지요. 만약 새 대통령이 김정일과 한 번 더 뜨겁게 포옹하고, "자주 국방"과 "동북아 균형추"를 몇 번 더 언급하고 그리고 농가에 대한 지원책 등에 돈을 약간 더 쓴 뒤에 쇠고기 수입 규제를 차차 풀었다면 지금처럼 민란이 일어났겠습니까? 좌파야 당연히 반대하고 나섰겠지만 대중들이 아마도 크게 동요되지 않았을 걸요. 대한민국처럼 나름대로 복합화되고 여론 형성 과정이 시민 사회 등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에서는 자유주의 좌파 (통합민주당)처럼 개혁 사기를 주도면밀하게, 온갖 좋은 말, 민주적인 말, 민족적인 말을 해가면서 해야지요, "전봇대 뽑기" 식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여기가 1970년대 사우디에서의 공사 현장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자들은 개혁 사기꾼들을 대통령직에서 해고시키고 이명박을 고용한 것이 꼼수입니다, 꼼수! 시민 단체 출신들에게 장관, 차관 등에 해당되는 벼슬과 운전수가 달린 자동차를 주면서 잘 달래고, '네덜란드 모델"이나 들먹이고 그리고 뒤에서 전력 사업 민영화 등 "필요한 일"을 다 하고... 이게 "한국형 신자유주의"의 이상적인 모델일 것입니다.


이 사회의 지배자들이 실수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아주 똑똑하지 않다 하더라도 끝내 자기 실수를 고치려 하지 않는 하우 (下愚)는 아닐 수도 있어요. 즉, 불도저 식의 신자유주의적 사회 개악이 지금처럼 계속 결사 저항에 부딪치고 이명박의 지지율이 계속 바닥을 친다면, 새 마름을 쫓아내고 옛 마름들을 복귀시키려 할 수도 있지요. 즉, "공사판 감독" 식의, 군대 식의 신자유주의자를 용도폐기하고 지난 10년 간에 나름대로 검증된 개혁 사기꿈 무리이거나, 아니면 그들과 구조적으로 닮은 또 다른 정객 (문국현도 있지 않습니까?)을 등용시키려 할 수도 있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박근혜 쪽으로 기울 수도 있구요. 어쨌든 우리 민중이 다시 한 번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10년 동안의 유사 개혁, 모조품 개혁으로 지금 이 지경에 왔는데, 또 그 무리에 속는다면 이는 정말 하우 (下愚)에 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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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08.05.30 2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가 박노자 님의 말대로 '모조품 개혁'으로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켰다면, 이명박 정부의 탄생과 현재의 진행은 다시 어떤 세상을 가져올 것인가. 이명박 정부 이후는 무엇이 될 것인가.
    진정한 진보의 세상이 올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현재의 촛불집회는 조금은 걱정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싸움에서 필요한 건 일단 다치지 않고 승리하는 것)

[펌] 25일 새벽 청계 광장

생각거리 | 2008.05.25 20:12 | Posted by 맥거핀.

Ozzyz Review 허지웅의 블로그
에서 가져왔습니다.

25일 새벽 청계 광장


뭔가 심상치 않다는 말을 듣고 새벽에 청계천을 향했다. 새벽 3시에 목격한 청계천 광장의 풍경은, 그러나 드물게 평화로웠다. 촛불을 든 젊은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자유롭게 발언하고 종종 소리도 지르며 웃음을 섞었다. 잠시 지켜보다 먼저 와 있던 정곤이 형과 청진옥에 들려 해장국에 소주를 삼켰다.

4시 30분 즈음 김작가 형에게 전화가 왔다. 속보가 떴는데 살수차에서 시위대에 물대포를 발사했다는 이야기였다. 에이 설마. 나올 거야? 응. 광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서둘러 나섰다. 동아일보 사옥 뒤로 돌아가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2시간 전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그곳 광장에 분노가 가득했다. 경찰 병력과 시위대가 대치했다. 본격적인 진압에 들어선 듯 보였다. 광화문 우체국 정문 앞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 두 명이 탈진해 쓰러져있었다. 누군가 맞았다고 소리쳤고 밀려 밟혔다고도 했다. 화가 치밀어 올라 도로로 나섰다. 경찰과 시위대의 열이 팽팽하게 맞섰다. “평화시위 보장하라”를 입이 닳도록 물어 외쳤다. 내가 본 시위대는 결코 이성을 잃지 않았다. 경찰들의 안전을 염려하는 건 오히려 시위대 쪽이었다. 밀고 밀리는 가운데 나는 “다치지 맙시다”라고 소리쳤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가 밝아오자 여론을 의식한 탓인지 살수차가 사라졌다. 문득 경찰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여경들이 나타났다. 곧 연행에 들어가리란 예고다. 주변 CCTV가 모조리 꺼져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앞줄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끌려가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이다. 끌고 가려는 사람과 끌려가지 않으려는 사람, 그리고 지키려는 사람들의 완력이 한데 뒤엉켰다. 구호는 "폭력경찰 물러가라"로 바뀌어 있었다. 저 뒷줄의 전경과 눈이 마주쳤다. 어느 영화처럼 증오로 완연한 그 눈이 내게 무어라 욕을 했다. 나는 발끈했다. 그러나 화를 주고받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어 이내 한심해졌다. 너랑 나랑 서로 미워해야할 이유가 뭐니. 눈 안 깔어. 얼씨구.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앞줄의 연행이 시작됐다. 옆에 김작가 형이 끌려갔다. 나도 끌려갔다. 어깨를 잡혀 끌려가는 도중 뒤 쪽에서 누군가 당겨 몸이 허공에 떴다. 다시 땅으로 처박혔다. 몸이 땅에 닿자마자 군화발이 날아들었다. 머리도 잡아당겼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 자꾸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왜 때립니까. 어휴 진짜 아파서. 그렇게 당기고 끌려 우체국 앞까지 밀려갔다. 더 이상 날 끌고 갈 의지가 없었던지, 정신을 찾고 보니 도로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옆에 선, 어느 선량해보이는 청년이 내 대신 화를 내주고 있었다. 왜 사람 머리를 잡아당깁니까. 아끼는 겉옷이 찢어져 걸레가 됐다. 손바닥이 찢어졌다. 검지 손톱 절반이 씹혀 너덜거리며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얼굴에 땀을 닦다가 뺨에 온통 피가 묻었다. 주위 사람들이 걱정해주는 바람에 알았다. 겸연쩍었다. 나는 람보가 아니다. 그래도 꽁지머리를 지탱하던 고무줄이 사라진 걸 알았을 때는 화가 많이 났다. 난 간지남인데. 어디 거울 없나. 처량해서 처연하다.

핸드폰 진동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김작가 형은 닭장차에 실려 연행되는 중이었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다고 했다. 어느 매체에 고자질 기사를 쓸까 농 삼아 재잘거리다 전화를 끊었다. 시위대는 결국 도로를 뺏기고 물러섰다.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이성을 놓지 않았다. 다시 자유 발언이 시작되고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말들이 광장의 하늘을 덮었다.

드물게 피가 묻고 옷이 찢겨 나풀거리는 내 꼴이 유난스러워 창피했다. 옷도 갈아입고 지혈도 해야겠다. 택시에 올라타 집으로 향했다. 6시 10분이었고 날은 완전히 밝아있었다. 귀신같은 꼴을 사진이라도 찍어둬야 하나 싶어 핸드폰을 더듬거리다 관두고 피식했다. 맹장수술을 하고 병원에 누워있는 엄마가 생각났다. 난 일을 핑계로 한 번도 안 가봤다. 일러바칠까. 아마도 엄마는 아이고 아이고 누가 내 새끼를, 안아줄 테다. 연희동을 지나 가좌동을 향하는 동안 창밖의 풍경은 고요하고 청량했다. 평소에는 채 귀에 닿지 않던 새소리마저 드문드문. 아침은 이렇게 아름답구나. 아무 일도 없는 동네 골목길이 너무 평온하고 서운해, 나는 조금 울었다. 허지웅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1211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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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08.05.25 20: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각이 복잡하다. 더이상 누군가가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큰 게 하나 터지면 원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다. 복잡하고, 부끄럽고, 안타깝고...짧은 댓글로는 담을 수 없는 마음.

  2. 모던걸 2008.05.30 0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두 이거 봤어요
    휴..진중권씨도 맞았다는데
    그나저나
    이와중에 인디아나존스도 보시고 빠르십니다. 앗 맞다 묘묘님 블로그 즐겨찾기로해둘게효-.-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08.05.30 2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인디아나 존스는 볼 수 밖에 없는 영화라서요.^^
      하하.저는 예전에 네이버 이웃님들 블로그는 RSS에 등록해뒀지요. RSS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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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얼마만의 시리즈 부활인가. 작은 브라운관이 아닌, 거대한 스크린에서 해리슨 포드의 클로즈업 된 얼굴을 바라보는 느낌은 색다르다. 벌써 시리즈는 이어져, 4탄에 이르렀지만, 나는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도 당연한 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3탄이 개봉했던 것은 1989년이고, 그로부터 벌써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영화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었고, 해리슨 포드는 꽤나 동작이 굼떠졌다. 아무튼 내 느낌 속에는 <인디아나 존스>는 TV에서 하는 ‘설 특선 영화’와 동급의 의미를 가진다. 보통의 주말에는 하지 않고, 설이나 추석이 되어야만 TV에서 인심 쓰듯 틀어주는 영화들. 그 영화들에는 사람을 기대하게 만들고, 몰입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 영화들을 놓치고 연휴를 보낸다는 것은, 꽤나 허전하고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영화들의 첫 머리에는 이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올려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는 일종의 정형화된 패턴이 있다. 영화의 전체 맥락과 크게 상관없는 초반부의 추격씬이나 소동으로부터 시작하여, 곧 뭔가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을 가진, 그리고 지금 어딘가에 묻혀 있는 보물이 소개되고, 인디아나 존스와 그의 조력자들은 이 보물을 찾으러 떠나고, 그와 동시에 이 소문을 전해들은 악당들도 이 보물을 쫓기 시작한다. 악당들과 인디아나 존스의 쫓고 쫓기는 추격씬과 복잡한 암호들이 관객을 지치게 할 무렵, 보물은 홀연히 등장하고, 이 보물은 온갖 소동 끝에 다시 묻히게 되고, 그 와중에 보물에 욕심을 부리다 악당들은 죽는다. 그리고 곧 인디아나 존스는 새로운 보물을 찾아, 혹은 다른 어떤 것을 향해 유유히 발길을 돌린다.

따라서 복잡한, 그러나 사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암호를 해독해야만 찾을 수 있는, 그리고 소유하게 되면 엄청난 힘을 가지게 해 준다는 이 보물에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욕심을 부리다 죽게 되는 악당들과 마찬가지로 관객들에게도 어리석은 일이다. 보물은 어차피 그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마련이고, 인디아나 존스가, 혹은 악당들이 그 보물을 소유해 그 무시무시한 힘을 휘두르는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 물론 대다수의 관객들은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눈에 보이는 맥거핀에 기꺼이 입을 내민다. 그 맥거핀을 물지 않는다는 것은 이 인디아나 존스와 함께 하는 모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맥거핀을 물고 꿀꺽 삼켰을 때만이 우리는 그 모험을 두 배 이상으로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사실 어쩌면 진짜 어리석음은 이 영화를 놓고, 제국주의적 시각이니, 인종차별적인 시각이니 하는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 쫓고 있는 대부분의 보물들은 제3세계의 어딘가에 묻혀 있으며, 그 보물들을 쫓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적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일 뿐이며, 그 와중에서 희생되는 것은 유색의 원주민들뿐이다. 고고학 교수라는 이름으로 여러 보물들을 찾아다니고, 그 보물들을 사로잡기 위해 주위를 마음껏 파괴하는 인디아나 존스라고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도 어떠한 시각에서는 한낱 도굴꾼일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즐기러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에 동참하고자 이미 알면서도 맥거핀을 꿀꺽 삼킨 사람들이다. 어차피 보물은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고, 그 동안 쫓고 쫓기는 신나는 활극에 시각적 쾌감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대다수의 것들은 스필버그의 유머 또는 조롱이 아니었던가. (이 영화는 미국과 러시아의 대립이 한창이던, 그리고 미국에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195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반공산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힌 정부기관 요원들이 인디아나 존스를 추격할 때 반공산주의 피켓에 부딪히던 것과 같은 그런 유머들. 그런 유머들은 어차피 이전 시리즈에서도 계속 반복되던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 관객들은 그저 스필버그가 짜놓은 이 유쾌한 소동극을 지켜보며, 시각적 쾌감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확실한 이 지점에서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는다. 이제 더 이상 옛날의 설 특선 영화를 보면서 느끼던 쾌감이 오지 않는 것이다. 옛날의 시리즈물이 가지던 가장 큰 미덕은 아날로그 액션이었다. 동양에는 아크로바틱한 신기에 가까운 기예를 선보이던 성룡이 있었다면, 서양에는 모자를 안 떨어뜨리고 유려한 채찍술을 보여주던 해리슨 포드가 있었다. 그러나 이 느껴지는 디지털의 미끈한 느낌은 무엇일까.

물론 이것은 막연한 느낌일 수도 있다. 스필버그 역시도 이 <인디아나 존스> 4탄의 상당수의 액션씬을 CG를 배제하고 찍었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왠지 이 <인디아나 존스>는 이전의 전작들보다는 <미이라>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어쩌면 그것은 아날로그적 와이어 액션이냐, 컴퓨터 그래픽에 의한 3차원 액션이냐의 문제가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액션 이외의 어떤 것, 예를 들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성궤나 성배 등이 가지는 종교적인 분위기, 혹은 오컬트 적인 요소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된 것, 그리고 많은 액션씬에서 특유의 유머러스함이 사라진 것 등에 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디지털상영으로 이 영화를 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가끔 화면에 까만 점들도 나오고 그래야 하는데).

 

아무튼 키아누 리브스의 <스피드>를 보러 간 관객이, 비의 <스피드레이서>를 보고 나온 듯한 찜찜한 뒷맛을 남기지만,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심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고, 상대방의 총구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도 옆의 동료에게 농담을 던지는 낙관주의적 품성도 여전하다. 그리고 그 낙관주의적 품성과 한 세트라고 말할 수 있는 ‘유머’ 역시도, 상당히 모자라긴 하나 감은 살아있다. 그리고 전작의 관객들을 위한 몇몇 서비스 컷도 스필버그는 잘 끼워 넣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전의 느낌을 되살리는 건 테마송이다. 모두들 기억하고 있을 그 음악. 설날 저녁, 30개 이상의 광고를 뚫어져라 보고 있을 수 있게 해주는 그 음악이 영화관에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있는 것은 꽤나 즐겁다. 영화관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30대 이상의 관객이 있다면, 십중팔구 영화의 감동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음악 때문일 것이다.




John Williams- 'The Raiders' 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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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천사(Fallen Angels), 왕가위

Ending Credit | 2008.05.16 00:45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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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천사>는 1997년 홍콩반환에 관한 더없는 엘레지일 것입니다. 천사들이 떠나가 버린 도시, 아침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도시, 홍콩. 저는 이 영화가 홍콩영화의 마지막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홍콩영화는 끝났습니다. 홍콩을 무대로 한 중국영화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아마도 또다른 일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이 코멘터리는 끝난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이어지고, 스피커에서는 정성일 평론가가 홍콩의 유명 라디오 시그널 음악이었다고 소개했던 ‘Only You’가 이어진다. 그리고 나는 지친 상태로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 즈음 플레이어의 정지 버튼을 누른다.

정성일 평론가의 코멘터리를 듣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는 1997년 홍콩반환의 의미부터, 왕가위에게 부끄럽게도 물어보았다는 한국어간판의 의미까지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것만 듣고 있을 틈이 없다. 그와 동시에 나는 눈으로는 화면을 바라보고, 머리 속으로는 옛날 일들을 생각하고, 자막을 읽고, 자리를 고쳐 앉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정성일 평론가는 이 모든 이야기를 적어놓고 읽는 것일까, 머리 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일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 철자를 잘못 읽는 류의 실수를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이 이야기를 적어놓고 읽는 게 틀림없다는 섣부른 판단을 내린다.

 

도대체 평론가의 코멘터리를 듣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마도 나에 있어서는 그게 두 가지로 기능을 하는 것 같다. 하나는 일종의 정답을 맞춰보는 기분이다. 영어듣기평가가 끝나고, 뒤에 해설지문을 보며,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처럼, 나는 그가 한 씬에서 구술한 해설이 나의 애초의 생각과 얼마나 들어맞는지를 가늠한다. 그리고 혹여 운 좋게 비슷하기라도 하면, 잠시 우쭐한 기분에 빠져 다음의 해설을 놓쳐 버린다. 그리고 또 하나는 - 이게 더 큰 이유라고 말할 수 있는데 - 단지 목소리 때문이다. 물론 정성일 평론가에만 해당되는 것이지만, 이 목소리는 묘하게 중독성이 있다. 어딘지 어눌하고, 종종 발음도 틀리지만, 어딘지 사람을 잡아끄는 목소리. 목소리에도 진정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 있다면, 이 목소리는 진정성이라는 게 있다.

물론 이것은 오류이고, 허구다. 목소리만 가지고 진정성을 판단할 수는 없다. 단지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빚어낸 허구일 뿐이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그의 글을 연상시키고, 그 글에서 느껴지던 한 영화에 대한 절절한 애정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이미 이 코멘터리는 이동진 평론가 등의 코멘터리와는 이미 다른 지점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우열을 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이동진 평론가의 코멘터리가 분석적이고, 학술적인 어떤 것이 느껴진다면, 정성일 평론가의 코멘터리는 따스하고, 감정적이고, 설득적인 어떠한 것이 느껴진다. 전자의 코멘터리가 관객들에게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공하는 것, 따라서 영화가 새롭게 분석되고, 다른 어떤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어떠한 지점을 제공한다면, 후자의 코멘터리는 관객들에게 영화감상의 폭과 깊이를 넓게 하여 관객들에게 영화에 대해 새로운 감동을 제공한다. 두 가지 모두 영화를 한 번 더 보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 <타락천사>의 코멘터리는 내가 잊고 있었던 새로운 두 가지 사실을 환기시킨다. 하나는 이 영화는 정성일 평론가의 마지막 말대로 1997년 홍콩반환 직전의 홍콩의 분위기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사람들과, 떠나야 함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남는 사람들. 이곳에 살아남아 삶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망기타(忘記他)’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카메라가 말해준다. ‘그대를 잊겠다’는 가사가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는 것, 그것 자체가 아직 떠나간 사람을 잊지 못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찍지 말라고 화내는 자신을 찍은 화면을 아버지가 몰래 보면서 웃고 있고, 그것을 다시 하지무(금성무)가 몰래 보고 있는 장면. 이 장면에 흐르는 하지무의 독백은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독백은 필연적으로 아버지가 이미 세상에 없는 어떤 후일의 시점에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화면이란 결국 최종적으로는 관객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배경이 있고, 배우가 있고, 그 배우들이 아무리 움직이고 있어도 모든 화면이란 그것을 밖에서 바라보는 관객이 있어야만 가능해질 수 있다는 점.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유일하다는 점. “이 장면은 투샷으로 찍기는 했지만,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향해서 앉아있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은 한 번도 마주보지 않습니다. 혹은, 청부업자는 그에게 얼굴을 돌리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의 표정을 모두 볼 수 있는 사람은 영화를 보는 우리들 뿐입니다.....그 때 이 영화는 영화 바깥에 있는 우리들을 포함해서 영화를 진행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화란 결국 ‘관객들에게 말걸기’라는 사실을 다시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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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속으로, 황규덕

Ending Credit | 2008.05.15 01:17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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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 기억(panoramic memory)’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죽음의 위기에 빠졌을 때,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마치 파노라마를 보듯이 눈앞에서 보게 되는 것, 또는 그러한 현상.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서 레스터(케빈 스페이시)는 죽어가면서 아주 평화로운 상태에서 짧은 시간동안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하나하나 천천히 떠올리게 된다. 굳이 영화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실수로 사고를 당하게 된 사람들, 높은 곳에서 추락하게 된 사람들이 겪은 이러한 파노라마 기억을 다룬 연구물들은 꽤 많다고 한다. 이러한 연구물들이 가지는 가장 큰 궁금증은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가?”인데, 여기에는 의견이 꽤나 분분하다. 그러나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학설은 사람이 죽음의 위기에 빠져 정신적 쇼크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일종의 환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극단적인 통증과 스트레스에 몸이 반응하여 일종의 모르핀(엔돌핀)을 뇌가 급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일종의 우리 몸이 살기 위한 하나의 반응이라는 것.

 

이 영화 <별빛속으로>는 어떻게 보면 위와 비슷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의 위기에 빠진 상태에서 보는 환각들이 신비하게도 현실과 연결된다. 또한 영화는 노골적으로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과 이 이야기를 연결시킨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가, 나비가 나인가, 내가 나비인가, 나는 살아있는가, 나는 죽어있는가. 영화의 스토리는 묘하게 중첩되며, 모호한 분위기는 관객들이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꿈인지 알 수 없게 해준다. 액자 안에 또 액자가 있고, 그 안에 또 액자가 있어, 그 액자 안의 사람이 액자 밖의 관객을 그리고 있는 꼴이다. 스토리를 말하는 것은 힘들 뿐이며, 크게 의미도 없다. 다만 영화는 묻고 있다. “시간이 정말 있을까, 파괴하는 시간이. 쉬고 있는 산 위에서 언제 시간이 성을 부수어 버릴까?”

시간과 기억의 문제는 영화가 즐겨 다루는 소재이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의 기억을 다루는데, 때로는 이 기억을 뒤집어서 늘어뜨리기도 하고(<메멘토>), 다른 기억을 이식하기도 하고(<토탈리콜>), 심지어는 현재의 시간에서 미래의 기억을 다루기도 한다(<마이너리티 리포트>). 그러나 이 영화에서 다루는 것은 시간의 장벽을 넘어선 존재의 초월성, 존재의 영속성이다. 무엇이 우리를 이 험난한 세상에서, 혹은 화염병과 돌과 최루탄이 난무했던 시대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가.

여기에 몇 개의 힌트가 있다. 영화의 초반부 나이든 독문과 교수 수영(정진영)이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순간, 학생들은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듯 수영을 바라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있다. 이 수영과 학생들의 단절에서 읽혀지는 묘한 공포감. 이 묘한 공포감이 벗겨지는 순간은 수영과 학생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이다. 그리고 영화는 젊은 수영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의 시작에서 마찬가지로, 늙은 교수는 차분히 원서를 강독하고 있고, 학생들은 모두 말없이 그 내용을 받아 적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여학생의 이해할 수 없는 울음. 이것이 깨어지는 순간은 그 여학생이 수영과 강의실에서 나와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이다. 모두 같은 곳만 바라보는 순간에서 벗어난 서로의 마주보기. 이야기의 시작임과 동시에 누군가와의 연결.

 

다시 ‘파노라마 기억’으로 이야기를 돌려보면 이 연구는 우리에게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가?”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을 환기시킨다. 즉 이 모든 연구는 그 사람이 결국 살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는 것. 그 사람은 죽을 위기에 빠졌지만, 결국에는 극적으로 구조되어 그들의 그러한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줄 수 있었다는 것. 그렇게 본다면, 결국은 많은 사람들이 죽기 직전 아주 평화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살펴보는 것은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살기 위해 아주 힘든 투쟁을 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지나온 인생을 살펴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평화로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사실 우리의 의식을 잃지 않고 깨어있게 해주는 하나의 작용이라는 것. 우리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한편의 연극이 상영을 멈춘 순간, 우리의 인생도 끝날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런 투쟁, 누군가의 기억을 가지고 싸우는 평화로운 투쟁에서 승리하고, 꿈에서 깨어 꽃밭에서 나오는 사람만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며, 다시 다른 기억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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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는 삼성에게 배워라

끄적거리기 | 2008.05.07 01:54 | Posted by 맥거핀.

광우병에 관련된 정부 기자회견을 보다보니 문득 거기 앉아서 많은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힘겹게 막아내던, 농수산부 민동석 농업통상정책관, 이상길 축산정책단장을 비롯한 몇몇 공무원들이 안쓰러워졌다. 그리고 한편으로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먼저,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은 ‘왜 우리끼리 이러나’하는 점이다. 지금 횡성한우에서 광우병이 발견된 것이 아니다. 혹은 제주도에서 쇠고기를 수입(?)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문제가 된 것은 미국소이고, 미국소를 수입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의 공무원들이 저기에 줄줄이 앉아서 “미국소는 참으로 안전합니다.” 이런 소리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

미국소가 실제로 안전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저 자리에는 미국의 농업통상정책관, 축산정책단장이 앉아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소는 참으로 안전합니다.”라고 말하고, 여러 우리나라 기자들이 이에 반박하는 모양새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국민의 세금을 받아 드시는 우리나라 공무원이 저 자리에 앉아서 미국소의 안전함을 항변하는 모양새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도대체 저 모양새를 보고, 정작 저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미국의 농업통상정책관, 축산정책단장은 뭐라고 할까? 우리나라 소의 안전함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서서 무한홍보(?)해주시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낄까, 아니면 비웃고 있을까?

하기는 우리 민동석 농업통상정책관, 이상길 축산정책단장도 그러고 싶어서 그랬을까. 그들이 비록 ‘한 자리’씩 해먹고 있으나, 결국은 그들도 공무원이고, 거대한 조직사회의 일부분인 것을. 한 때 공무원 사회를 가까이에서(?) 봐온 나이기에, 그들이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잘 안다. 그들이라고 이 미스터리한 논쟁에 끼어들고 싶었겠는가. 손에 든 자료는 부실하고, 기자들은 오늘도 어디선가 새로운 사실을 찾아서 들고 왔을 것이고, 오늘 내가 내뱉은 말들은 인터넷에 토씨하나 안 틀리게 그대로 옮겨져, 그 밑에는 어김없이 악플들이 달릴 것이고....다른 사람이 누군가 이 자리를 대신해 줬으면, 차라리 어딘가 도망쳐 버렸으면...그러나 안하면 장관님한테 깨질 것이고, 장관은 대통령한테 깨질 것이고...어떡하지...어쩌면 좋단 말이냐.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0506180013

나도 위의 강양구 기자처럼 말하고 싶다. 아니 적어도 최소한 그랬으리라고 믿고 싶다. 적어도 이번 협상이 미국의 압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MB도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으나, 미국의 압박에 의해서 억지로 도장을 꾹 찍어줬다고 믿고 싶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 미국의 아무런 압박이 없이 MB가 잘 보이기 위해 스스로 나서서 이 협상을 이렇게 만들었다면? 사실 이 쪽이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그런 것이라면 아무 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정부가 취할 태도는 하나다. 위 기자의 말대로 지금이라도 미국의 압박에 의해서 억지로 이 협상이 진행되었음을 시인하고, 지금에 와서는 어쩔 수 없으니, 국민들 스스로 조심하시는 수밖에 없다고,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최대한 관리하겠다고. 그리고 너무 죄송하다고 하는 것 말이다. 물론 이는 단순히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다. 협상의 실무자들, 관련 장관들, 관련 수석들은 물론이고, MB의 거취도 위험해질 수 있다.

 

그러나 MB,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계속 이렇게 안전하다-아니다의 상황으로 사태가 진행되는 것은 이쪽에도 위험하지만, 저쪽에도 위험하다. 결론이 날 수 없는 문제로 계속 싸우는 것은 사태를 점점 커지게 만들뿐이다. 지금이라도 미국의 압박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한다면(혹 스스로 나서서 협상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지금은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냥 몇몇 수석들, 몇몇 장관들 인력시장에 보내는 선에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

저번 박미석 수석 때도 그러더니 MB는 아랫사람들을 너무 사랑해서 탈이다. 왜 그리 모두 한꺼번에 데리고 가지 못해서 안달인가. 이 점에서 MB는 ‘삼성’에게 배울 필요가 있다. 이른바 도마뱀 꼬리자르기 전략. 도마뱀이라고 제 꼬리를 자르고 싶겠는가. 다 살기 위해서 그러는 것 아닌가. 회장 살리려고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김인주 사장 등이 발 벗고 나서고, 결국은 아들 살리려고 회장까지 나서지 않는가. MB가 아랫사람들을 생각해서 차마 말하지 않는다면, 아랫사람들은 다 뭘 하는가. 그리고 조선, 중앙, 동아 등 MB의 충실한 벗들은 모두 뭘 하는가. 그래도 밑의 이 늙은이는 비록 노망 섞인 말이긴 하나, 이리 충심을 보이는데.

http://www.dailian.co.kr/news/n_view.html?id=110530&sc=naver&kind=menu_code&keys=1



그리고 우리가 도마뱀을 잡기 위해선?
그 머리를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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