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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우림- 27

2008. 11. 20.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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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너마저- 끝

2008. 11. 16.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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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 그리고 <이리>

Ending Credit | 2008. 11. 14. 01:54 | Posted by 맥거핀.

녀석은 힘들다 했다. 회사는 경제불안과 환율상승과 지도력부재로 이미 어려움에 빠진 상태였고, 더구나 그 녀석은 회사에 다소간의 빚도 들어가 있었다. 회사는 미끄러지는 중이었고, 그 녀석 역시 그 미끄럼틀에 올라탄 채였다. 그걸 알아차린 나는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수능날이라는 데서 97년 수능이야기로 옮아갔고, 덕분에 녀석과 나는 필요 이상의 몇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다. 내가 그 녀석보다 수능 점수가 8.2점이 좋았다는 것에서부터, 그날 날씨가 상당히 추웠다는 것까지. 그리고,지금은 어딘가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을 시끄러운 여학생에서부터,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결혼해버린 동기의 이야기까지, 몰라도 좋을, 그러나 알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 없는 그런 이야기들을.
나는 녀석에게 필요 이상의 이야기들을 들은 값으로, 그러나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필요 이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값으로 술값을 치렀다. 그리고 우리는 껄끄러운 친구를 불렀다. 아니, 다시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껄끄러운 친구를 불렀다. 나는 녀석이 껄끄러워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어느 정도는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즐김의 한계는 딱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하는 것까지 였다. 그친구가 진짜로 오겠다고 했을 때, 나는 보리의 쓴 맛을 다시 되새기고 있었다. 나는 심지어 내가 그 녀석보다 수능 점수가 8.2점이 앞섰다는 것까지 잊어버렸다.

......................................


똑같은 이야기는 반복된다. <중경>의 쑤이는 성인용품점에 들어가고, <이리>의 태웅 역시 성인용품점에 들어간다. 몇 십년만에 옛 친구를 만난 할아버지의 옆에서 신기하게 그들을 바라보는 진서, 그 옆으로 할머니들이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부르며 지나가고, 벤치에서 자신이 따귀를 때렸던 창녀에게 지친 손을 내밀던 쑤이 옆으로는, 마을 주민들이 '인터내셔널 가'를 부르며 지나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동일한 장면들이, 동일한 느낌으로, 동일한 카메라 워킹으로 반복된다. 단지 이 두 이야기는, 즉 <중경>과 <이리>는 같은 주제를 같은 느낌으로 반복해서 찍은 것에 불과하단 말인가. 결국은 같은 이야기의 또다른 변주란 말인가.

물론 다른 부분은 있다. 동일한 듯 하지만, 두 이야기는 하나의 대구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서 <중경>의 쑤이는 점점 자신의 몸을 일부러 더럽히는 쪽을, 자신의 몸을 일부러 다른 이에게 내주는 쪽을 택하지만, 그 몸은 계속 다른 이에게 거부 당한다. 예를 들어, 한국인 유학생 김광철은 그녀에게 자신의 몸을 확인하게 하며, 노숙자는 그녀가 겁탈하려고 할 때(이것은 겁탈이라고 말할 밖에는...), 그녀의 뺨을 세차게 때린다. 그리고, 경관 역시 그녀의 몸을 거부하고, 커다란 Doll을 껴안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 대신, 즉 그의 성기 대신에, 그의 성기를 닯은 물건인 총기를 소유한다. 
반대로 <이리>의 진서는 대신에 자신의 몸을 지키려고 하나, 그 몸은 계속 유린 당한다. 이리역 폭발사고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진서, 그녀에게 단 하나 정상으로 남아 있는 몸은, 바로 그 정상으로 남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약탈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장률 감독의 다른 영화의 변주와 마찬가지로, 공간의 이야기를 커다랗게 확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제목 <이리>('익산'이 아니라), 그리고 <중경>이 상징하는 것처럼, <이리>의 속성, 그리고 <중경>의 속성을 그냥 그 도시에 살고 있는 개인들에게 커다랗게 투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익히 잘 알고 있겠지만, '이리'는 1977년 폭발사건 이후로 폭발 이후의 어떤 것, 폭발 이후의 허무함과 슬픔과 잿더미를 상징하는 어떤 것으로, 말할 수 있으며, '중경'은 폭발 직전의 어떤 도시, 그리고 우연하게도 이 영화가 촬영된 직후, 대지진으로 알려진 도시로 상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각각의 두 영화의 여자캐릭터, 즉 진서와 쑤이는 폭발 이후의 남겨진 후유증을 상징하는 삶과, 폭발 이전의 끈적하고 불안한 삶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볼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도 생각나는 것이 있다. 어렸을 때 할머니 댁에는, 시골집들이 대개 그러듯이 여러 신문지들로 벽이 발라져 있었다. 그 중 안방벽을 둘러싼 신문들 중에 그 사건 몇 주 후 그 기차 기관사 미망인을 인터뷰한 기사가 있었다. 기사의 내용은 그런 내용이었다. 사건 며칠 후 남편을 찾아, 역에 찾아갔으나 남편의 흔적을 찾을 수 조차 없었다고. 그러나 유일하게 사건 현장에서 남편의 귀로 추정되는 어떤 '조각'을 발견했다고. 아마도 나는 계속 '귀로만 남은 남편(혹은 비슷한 제목의)'이라는 그 통속적이고도, 실존적인 기사를 꽤나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결국 이 영화들은 폭발 이전의 삶과 폭발 이후의 삶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캐니한 삶의 또다른 증명에 불과한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몇몇 부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리>의 태웅과 진서, 그리고 <중경>의 쑤이는 모두 죽으려고 하나, 죽지 못한다. 다시 한 번 반복해 말하지만, 그들을 둘러싸고, '이별의 부산정거장'과 '인터내셔널 가'가 흘러나온다. (도대체 '노래'라는 것의 효용은 무엇인가?) <이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진서는 드디어 한국에 들어온 쑤이에게 또렷한 목소리로, 그리고 중국어로 '안녕하세요, 나는 진서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경에서 계속 반복되는 그 시구, 창가들을 들어보라. 결국은 세상은 슬프고, 어렵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가겠다, 언캐니하게. 그거 아닌가?

.......................................

우리는 결국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고, 다시 필요 이상의 몇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을 뿐이다. 나는 그 친구 역시 회사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역시 결혼하지 못한 또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물론 중요하게 달라진 것은 없다. 나는 여전히 펀드들과 수수료와 언페어한 게임 때문에 정부를 증오할 것이고, 녀석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미끄럼틀에 올라타 있을 것이고, 친구는 내일 아침에 공항으로 마중 나오라고 했던 비상식적인 분 때문에 분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캐니한 삶에 친구가 달려와 준 덕분에 한 때나마 우리는 언캐니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고, 다시 캐니한 삶에 올라탈 동력을 얻게 된 것 뿐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술값을 치렀다. 경제력으로 따지면 그 친구가 치러야만 하겠지만. (물론 여기에는 <중경>과 <이리>에 바치는 값도 포함해서.-)

p.s. 나는 광폰지같이 경사각 15도 이내의 극장에서 정수리와 인중 사이의 거리가 30cm넘는 Big D(<흑사회>가 아니라 일명 '대두')가 D열 이내에 앉아, 머리를 메트로놈 삼는 것을 극렬 반대합니다. 더구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도중 '이 영화 정말 뭔데'라고 옆 사람에게 속삭이는 작자라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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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브한 생각

끄적거리기 | 2008. 7. 6. 16:01 | Posted by 맥거핀.

어느 것이나 대개가 그렇지만, 논쟁이 오래 지속될수록 처음의 논쟁의 주제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그 논쟁의 부산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촛불집회 정국도 그렇다. 처음에 이것은 광우병 위험이 높은가,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미국과의 협상이 잘 진행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논쟁의 초점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대체로 다른 쪽으로 논점이 이탈하고 있는 것 같다. 처음의 광우병 논란은 이제는 ‘광우병 위험은 어느 정도 있으며, 미국과의 협상도 잘 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라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재협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 촛불집회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 그리고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신문사들에 대한 광고 중단 운동을 비롯한 보수언론에 대한 대처 문제, 다음 아고라로 대표되는 네티즌들의 의견 표출과 그것의 여론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의 문제, 촛불집회에서 발생한 경찰들의 과잉진압과 시민들의 대응에 대한 문제 등 여러 다양한 쪽으로 문제들이 발산되어 나가는 것 같다.

이렇게 많은 문제들이 표면 위로 떠오르게 되면서 나 같은 경우는 점점 혼란에 빠지는 것 같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 다양한 측면에서 일어나면서 논지를 정리하기가 점점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점점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지만, 다들 어느 정도는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특히 요즈음에는 대부분의 인터넷 커뮤니티(평소에는 그런 정치적인 문제와 전혀 관계가 없는 스포츠, 음악, 컴퓨터, 친목 동호회들 말이다)에서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입장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침묵하거나, 아니면 ‘반 MB와 조중동, 친 촛불집회’라는 암묵적인 기류 말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모를까, 후자의 경우라면 요즘에 내가 느끼는 것은 무언가 ‘지나치다’는 것이다. 양상이 복잡해질수록,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간의 얘기들은 사라진다. 대부분 극단적인 이야기들이 힘을 얻고, 자극적인 사실일수록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복잡한 진실보다는 단순한 겉 표면만이 금방 부각되고, 널리 퍼져나간다. 예를 들어 요즘에 이슈가 되는 문제 중에 하나인 이른바 조중동 신문에 대한 광고 중단 운동 문제만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심각한 양상도 아니고, 그것에 대해 우려를 가지고 있는 시각도 많다. 그러나 부각되는 것은 그것을 지지하지 않으면, 당신은 조중동 편이라는 지나친 단순화와 흑백논리이다.

나? 글쎄, 나의 경우라면 분명히 이는 지나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중동에 대한 광고 중단 운동을 반대하는 것과 조중동을 지지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다. 확실히 이것은 MBC <뉴스 후>에서 말했듯이 2005년 황우석 박사 사태 때 <PD수첩>에 대한 광고 중단 압력을 넣었던 문제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PD수첩>이 조중동으로 바뀌었을 뿐 사태는 비슷하다. <PD수첩>의 내용이 옳으니 그에 대한 광고 중단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고 해서, 조중동의 내용이 잘못되었으니 그에 대한 광고 중단은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나 역시 조중동은 언론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그에 더 나아가 쓰레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특히 최근 약 한 달 동안의 조중동의 논조는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분노를 넘어서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광고 중단 운동을 지지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조중동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그것을 꾸준히 알리고 그 신문을 더 이상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택의 문제를 내세우기 전에 그에 대한 선택의 기회마저 없애는 것은 아주 특수적인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온당하지 못하다.

 

이와 비슷한 문제로 요즘 논쟁이 되고 있는 촛불집회에 대한 경찰의 대응에 대한 문제가 있다. 시민들의 폭력적인 행동이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에 경찰이 그런 대응을 한 것인가, 아니면 경찰이 과잉진압을 했기 때문에 시민들의 어떤 폭력적인 행동이 있었던 것인가의 문제를 따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닭이냐, 달걀이냐의 문제를 따지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여기에서 불법집회인가, 아닌가는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했는가가 아니라, 실제로 양쪽에서 어떻게 했는가가 중요하다.

이에 대해 저번 <100분 토론>에 나왔던 김민웅 교수가 지극히 온당한 얘기를 했다. 시민들에게서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버스를 끌어낸다거나, 경찰들에게 돌을 던진다거나 하는 행동 같은 것들. 그리고 이 모든 행동들은 당연히 배격되어야 할 것이다), 당연히 법의 제재를 받아야 옳다. 그와 마찬가지로 경찰의 비폭력적인 집회에 대한 폭력적인 대응 역시 당연히 법의 제재가 있어야 한다. 아무 폭력적인 행위를 하지 않은 여성에 대해 방패로 내려찍고, 시민들에게 돌과 이상한 물건을 던지고, 소화기를 뿌려대고, 심지어는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행위는 어떤 진압수칙에도 있지 않고, 당연히 배격되어야 하며 그에 마땅한 제재가 있어야 한다. (혹 진압수칙에 있다고 해도 아무 보호 장구도 갖추지 않은 시위대에 적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은 자명하다) 시민의 폭력이 있었다고 해서 경찰의 과잉진압이 정당화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찰의 폭력이 있었다고 해서 시민의 폭력 역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너무 나이브(naive)한, 당연한 소리가 아닌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극단적이고, 공격적인 것이 아니다. 나이브하고 당연한 것이 세상을 바꾼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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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헐크의 바지는 왜 결국 찢어지지 않는 것일까?

 

영화를 보고 종로거리를 걸어 나오며, 지금 여기에도 헐크가 나타나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괜한 상상을 해봤다. 헐크가 나타나 거리 한가운데를 쿵쿵 걸어 다니는 그런 비주얼 말이다. 국회의원이라는 작자는 말 한마디로 길거리에 나선 100만의 국민들을 천민으로 만들고, LG 투수진은 한 게임에서 14개의 볼넷을 선물하고, 날씨는 슬슬 더워지고...하는 뜨겁고 질척질척하고 꽁기꽁기한 야만의 세계, 그런 세계 한 가운데에 헐크가 나타나,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스트랄한 비명을 질러주면 무언가 낫지 않을까.

왜 슈퍼히어로물이 범람하는가? 라는 질문에, 개인 존재의 유한성과 그의 극복에의 희구에서 찾는 어떤 철학적인 이유를, 또는 세계의 강대국인 미국과 그의 주변국과의 관계에 대한 희미한 반영인 인문사회학적 이유를, 또는 어렸을 적부터 마블코믹스의 팬들이 어른이 된 후 다시 똑같은 소비를 반복하는 경제사회학적인 이유를 댈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는 사람들은 꽤나 단순한 것 같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여서, 그냥 단지, 나도 저러한 힘으로 오늘도 사람들과의 소통에 대해 골몰하시는 소통의 달인 ‘오해’ 이MB 선생님이라든가, 연장 일대일 동점에서 멋지게 에러를 범하시는 LG 모 선수를 날려버리고 싶다는 실현불가능하면서도, 실현불가능하기 때문에 열망하는 그런 상상을 가능케 해주는 하나의 감정이입의 도구로서 슈퍼히어로를 볼 뿐이다.

 

그러나 사실 이 친구 헐크, 아니 브루스 배너 양반은 참 그런 단순한 감정이입의 대상으로만 쓰고 날려버리기에는 꽤나 불쌍한 구석이 있다. 그까이꺼 하기 싫으면 때려 치우면 되는 배트맨이나 슈퍼맨, 아이언맨 등 다른 여타의 많은 슈퍼히어로들과는 달리, 이 친구는 하기 싫다고 안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일단은 아무리 안하려고 해도 화가 나면 어쩔 수 없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무리 틱낫한 스님과 같이 화 다스리기 수행을 한다 해도 한나라당 주 모 의원이 100분 토론에 나와서 날리는 썩소 크리를 몇 번 보고나면, 그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어찌 다스린단 말인가. 그리고 변하고 난 뒤 정상으로 돌아온 후 그 처참한 모습이라니. 도대체가 이것은 새벽 4시까지 술 마시고 지하철 바닥에서 토한 후 집으로 돌아와 쓰러져 잔 다음날의 모습이라든가, 전설의 박신양의 거지 신공(밑의 관련사진 참조)을 능가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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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브루스 배너 박사는 꽤나 소심남이다.  일단은 창백한 피부와 축처진 눈꼬리는 '내가 소심남이오'하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관객 누구나에게 알 수 있게 해주거니와(이는 물론 항상 '소심 이미지'에서 급변하는 캐릭터를 많이 맡아왔던 에드워드 노튼의 캐릭터에 기댄 바도 있다), 영화 곳곳에서도 소심남적 면모는 잘 드러난다. 상대방을 멋지게 제압하고, 혹은 멋지게 제압하지 않더라도 기지와 재치를 발휘하여 적진으로 숨어드는 다른 캐릭터와는 달리, 사람좋은 웃음을 날리며 고작 피자 한 판으로 경비원을 회유하여 건물로 잠입(?)하는 모습이라던가,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도, 일라이저에게 따귀맞고 방문 뛰쳐 나가는 캔디같은 폼으로 뛰어나가 쓰레기통 뒤에 숨는 모습이라니. 하기는 뭐 변한 뒤라고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사랑하는 여자를 안고 울부짖던 킹콩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여자를 안고 괴로워하는 초록 헐크의 그 선량한 눈망울이라니. (글 옮기는 과정에서 이 문단이 누락된 것을 발견하고 뒤늦게 추가.-_-)     
                 
그의 이러한 소심남적 면모는 그가 싸워야 하는 대상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는 하나의 방법으로 그의 적이 누구인가를 살펴보는 방법은 꽤나 추천할 만하다. 그것은 이MB의 적이 초중고딩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논거가 된다.

여타의 다른 슈퍼히어로들이 조커에서 마그네토, 그린 고블린으로 이어지는 그럴싸한 적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헐크 역시 마지막에 <에이리언 VS 프레데터>를 연상시키는 혈전을 벌이며 적과 싸운다. 그러나 그 상대방이 헐크의 가장 큰 적수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헐크의 가장 큰 적은 자기자신이다. 변신하기 전 브루스 배너 박사가 그토록 원하는 것은 자기 안의 헐크를 제거하는 것이다. 지킬박사가 하이드를 없애버리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쓴 것과 마찬가지로 브루스 배너 박사는 과학의 힘을 빌려 헐크를 제압하고자 한다. (물론 이는 한 가지 아이러니를 생각하게 한다. 과학의 힘으로 탄생한 헐크를 제압하기 위해 또다른 과학의 힘을 쓴다?) 이는 소심남들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소심남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안의 소심기(氣)를 없애는 것이다. 과학의 힘을 빌리든 아니든 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얼토당토않은 부제의 답을 생각해 본다면, 답은 이미 나왔다. 그가 엄청난 소심남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해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미국산 소고기와는 달리 미국산 청바지는 질이 좋기 때문에 그의 청바지가 고작 무르팍 좀 뜯어지고 허리만 좀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그의 그 거대한 몸집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말이 안 된다. 여자친구가 사온 엄청난 신축성의 쫄바지도 단지 보라색이라는 이유만으로 거부하는 소심남 브루스 배너 박사. 그의 변신으로 바지가 터지게 되면 그의 소심한 마음까지 같이 터질 것을 염려한 신의 현명한 뜻인 게다. 변신에서 깨어난 후 축 처진 눈꼬리로 자신의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아랫도리를 바라보는 브루스 배너 박사. 생각만 해도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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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The Book | 2008. 6. 8. 02:05 | Posted by 맥거핀.

글의 시작머리에서 김연수는 말한다. ‘“겨우 이것 뿐인가”라고 질문하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여행을 할 권리’. 과연 여기가 어떠하길래, 우리는 ‘겨우’ 이것 뿐인가라고 말하며 새로운 세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인가.

 

여행기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눠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이른바, 정보 전달 유형. 세계 각국의 신기한 풍물과 다양한 공간들, 음식들, 음악들, 그림들을 소개하며, 그곳에 다다르는 방법들과 즐기는 방법들을 가이드가 된 심정으로 자세하게 소개하는 유형이다. 두 번째는 자기 과시 유형. 이런 유형의 저자들은 대체로, 꽤나 방송을 통해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외우기가 힘든 긴 이름을 가진 음식을, 그보다도 더 긴 이름을 가진 와인을 곁들여 먹고는 그것을 자랑스레 사진을 찍어 실어 놓는다. 마치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음식을 찍어서 올려놓고는 밑에 짤막한 감상을 단 많은 미니홈피들이 그러하듯이, 그 커다란 사진 밑에는 아주 짤막한 감성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지나치게 매끄러운 감상이 달려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유형은 이 김연수의 책 <여행할 권리>와 같은 유형이다. 여행기를 가장한, 사실은 여행기가 아닌 유형. 이런 여행기에서는 어디에 갔고, 무엇을 보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누구를 만났는가, 혹은 누구를 만나러 갔는데 만나지 못했는가가 훨씬 중요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가가 그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여행기에는 글 전체를 꿰뚫는 맥락, 또는 스토리가 있다. 그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와 얽혀진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은 다음의 여행지의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고, 그 마지막에는 그 여행기를 쓴 저자 자신이 있다.

 

이 책에 실린 11곳의 여행기, 아니 정확히 말해서 11가지의 이야기를 꿰뚫는 키워드는 ‘월경’, 즉 국경을 넘는 것이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니 넘지 못하더라도 국경 근처까지 여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국경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물리적인 ‘국경’ - 총을 든 군인이 지키는, 혹은 철조망이 세워져 있는 - 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국경, 또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암묵적인 국경. 따라서 이 국경이라는 말을 ‘한계’라는 말로 바꿔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각의 개인들이 가지는 한계란, 어떻게 만들어져서 각 개인들을 어떻게 억압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공유되고, 어떻게 넘어서야만 하는가. 그들에게 국경을 넘는다는 것, 즉 한계를 넘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책에 실린 몇몇 여행기에서 살펴본다면, 조선족 이춘대 씨에게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향한다는 것은 그에게 깐두부를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경제적 풍요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김연수의 아버지가 해방 후 일본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리얼리티를 버리고 막연한 이상을 찾는 것이었다. 일본어로 소설을 써 아꾸따까와 상 후보가 되었던 조선인 작가 김사량이 1945년 중국 태항산 조선의용군 근거지로 탈출하는 것은 미래의 언어로 글을 쓸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 이상(李箱)이 현해탄을 건너 토오꾜오로 가는 것, 즉 국경 근처까지 가는 것은(아직 해방되기 전이었으므로), 경계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 혹은 경계 바깥의 세상을 갈망하는 것이었다. 김연수의 말을 빌자면, ‘어두운 방, 오들오들 떨면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일’.

이상(李箱)의 죽기 직전 몇 달 간의 행적을 좇는 마지막 여행기를 제외하자면, 김연수는 여행을 간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한국에서 사만부가 채 안 팔리는 소심한 작가 김연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꽤나 긴장하지만, 결국 그가 마지막에 얻는 깨달음은 하나인 것 같다. 그 사람들이라고 별 것 없다는 것. ‘시차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나이차가 있을 뿐이었다’는 것. 참 별 것도 아닌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역설적인 것은 이는 우리가 국경을 넘어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혹은 국경 근처에 가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오직 질문하고 여행할 권리만이’. 국경을 넘는다는 것, 혹은 이상과 김수영과 같이 ‘국경을 넘어보지 못한 몸으로 월경’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내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내가 할 수 없는 것, 그러면서도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일. 그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아마도 김연수가 명쾌하게 지적한 바대로 최소한의 나를 확인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김연수의 ‘공항의 우화’는 완성되는 것이다.

여권에는 나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만 기재돼 있다. 이름과 국적과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 직장에서의 평판은 어떤지, 가족들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따위는 불필요하다. (중략)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느 시공간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최소한의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우화처럼 느껴진다. 거기에는 치명적인 진실이 있다. 공항을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는 그저 여권에 적혀 있는 생물학적인 존재,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여행할 권리 상세보기
김연수 지음 | 창비 펴냄
소설가 김연수, 그가 들려주는 길에서 만난 사람과 문학 이야기! 작가 김연수가 1999년 도쿄부터 2007년 미국의 버클리까지, 국경과 경계를 넘어 길 위에서 만나는 문학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쓴 산문집. 계간 『한국문학』에 2004년 겨울부터 2007년 가을호까지 연재했던 산문을 중심으로 묶은 이 책은, 생생한 여행 현장과 현지인들의 삶의 기록, 문화적 차이와 문학적 고민을 재기넘치게 풀어놓은 12편의 글들이 수록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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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의 세 가지 오판

끄적거리기 | 2008. 6. 2. 18:11 | Posted by 맥거핀.

조선, 중앙, 동아가 조금씩 그 논조를 바꾸고 있다. 며칠 전까지는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 시민들을 애써 외면하며, 광우병 괴담이니, 배후의 음모니 하고 떠들어대더니 오늘부터는 유언비어에 휩쓸린 국민들도 잘못이지만,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나 대응도 잘못이라는 양비론으로 돌아선 것 같다. 물론 이것은 그간 그들이 꾸준히 보여줬던 일련의 기만술의 연장선이며, 그 내저의 심리에는 여전히 국민들을 얕잡아보고 속이려는 자세가 들어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에는 어느 정도는 진심(?)도 들어있는 것 같다. 즉 이명박 정부 때문에 한나라당이나 조중동이나 꽤나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어떻게 되찾은 정권인데’ 심리.

그들은 어쩌면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가 한나라당 후보로 나왔었더라면...하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단적으로 말해서 MB는 박근혜보다 교묘하지 못하다. 앞에서는 이것저것 챙기는 척 하면서 뒤에서 몰래 일을 처리하는 데에 능숙하지 못하다. 더구나 MB는 이미지 메이킹 능력이 형편없다. 반면 박근혜는 꽤나 오랫동안 박정희의 교묘한 이미지 메이킹을 배워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런 것에 능숙하다. 게다가 MB는 천민 배경의 자수성가형 노복(마름) 유형(박노자 교수님이 노무현에게 지적한 것과 같이)이다. 이런 사람들은 체제에 대해 대단히 충성을 보이지만, 단순하고 일을 크게 벌이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꼼꼼함은 떨어진다.

아마도 박근혜가 현재의 대통령이었다면, 혹은 이회창이나 다른 한나라당 인사였다면, 일을 이렇게 끌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오랫동안 해왔던 방식, 그리고 조중동에서도 즐겨 써먹는 방식을 다시 가동하여, 일단 재협상을 추진해보겠다고 하고 시간을 벌고, 장관 몇 명, 수석 몇 명 경질하고, 여론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다음, 미국에게 한두 가지 양보를 이끌어냈다(실제로는 이끌어내지 않았더라도)고 하면서 일을 마무리 지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고 자만심이 넘치면서도 세심함은 떨어지는 현재 MB의 방식은 무엇인가. 고시 강행, 집회 참여자 연행, 그리고 물대포와 폭력과 소화기. (그리고 그 이후는 무엇이 될까.)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사태를 더욱 확대시킬 뿐 아니라 MB 그 자신에게 독이 될 뿐이다. 그의 오판이 계속되는 한 말이다.

 

첫 번째 오판은, 과연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촛불집회에 나온 사람들을 묶고 있는 유일한 끈은 오로지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에’라는 것이다.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이념을 공유하여서도 아니다. 이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된다고 믿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지도부도 없고, 조직화도 안 되어 있다. 아니 도리어 조직화되는 것에 일종의 반감을 가지고 있다(프락치를 증오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물론 상당히 약점이 되기도 하지만, 엄청나게 큰 강점이 되기도 한다. 예전에 그들이 늘 해오던 방식대로 지도부 연행하여 구속시키는 것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MB가 여전히 촛불집회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궁금해하는 이상, 그가 이길 방법은 없다. 더구나 ‘촛불집회’라는 말이 상징하는 대로 이 집회는 비폭력이 기반이 되어 있다. 비폭력은 종국에는 언제나 폭력을 이긴다.

두 번째 오판은, 인터넷의 위력을 우습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일주일간 컴퓨터를 켜지 못해서 업무를 하지 못했다는 말을 아무 생각없이 내뱉는 사람 아니랄까봐, 2MB로 16년간 부팅을 해오신 ‘컴맹’ 이명박 선생님은 아마도 아직도 인터넷을 유언비어의 집합소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현재가 어떤 시대인가. ‘스타’가 중계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집회’와 경찰들의 폭력 역시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굳이 동영상이 아니더라도, 게시판과 댓글을 통해서 현장의 속보가 속속 들어온다. 즉 한 명의 경찰이 한 사람을 때리면, 예전에는 그 주위에 10사람이 보는 것으로 그쳤다면,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서 10만명이 그것을 지켜본다는 것이고, 그 10만명은 100만명에게 그것을 전달할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처럼 경찰이 계속 맞드라이브로 나가는 것은 집회 현장으로 사람을 더 불러 모으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 번째,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오판은, 이 일련의 사태는 국민에게, 특히 10대와 20대에게 일종의 학습을 시킨다는 것이다. 수구 보수 정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 일련의 사태는 정치에 무관심한 10대와 20대들에게 정치라는 것이 먼 곳의 문제가 아님을, 바로 자신의 안전과 건강과 생명에 직결된 문제임을 상기시켰다. 그와 더불어 진행되는 현재의 일들은 조중동이 지금까지 어떻게 사람들을 속여 가며 어떤 짓들을 저질러왔는지, 한나라당이 어떤 집단인지를 많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좋은 교재가 되고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여론의 주역이 되는 십 수년 후, 조중동과 한나라당은 지금의 이 일들이 가져온 효과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MB가 이 오판들을 빨리 멈추게 되기를 바란다. 혹 본인이 할 능력이 없다면, 주위의 조중동이나 한나라당에서나마 약삭빠르게 사태 파악을 좀 하기를 바란다. 나 역시 밑의 분이 글에서 제기한 것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으므로. 그리고 블로그에 영화평이나 쓰며 조용히 지내고 싶기 때문에.

(그리고 아마도 그 시작은 쇠고기 재협상과 경찰책임자 문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http://enterre.egloos.com/418365 촛불집회 그 이후에 대한 ‘테라포밍’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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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조중동의 치명적 실수

생각거리 | 2008. 5. 30. 21:51 | Posted by 맥거핀.
'박노자 글방'에서 가져왔습니다.
박노자 님의 글 입니다.


조중동의 치명적 실수


요즘 국내에서 "쇠고기 정국"이 돌아가는 걸 보니 한 가지 생각이 계속 머리에 듭니다. 제가 애당초에 삼성과 현대, LG의 대주주나 조중동과 같은 한국 보수 지배층의 표현 기관들의 주역들이 상당히 똑똑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똑똑하지 않았다면 일부 사익 집단의 대변자이면서도 어떻게 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민족지" 탈을 써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니 저들이 교활하긴 해도 생각보다 똑똑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정말 똑똑했다면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그렇게 올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올인을 해서 결국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어버렸는데, 그게 자충수이었습니다. 소탐대실의 태세입니다.

왜 그러는가요? 보수 지배 집단에는, 민중에 불리한 신자유주의적 사회 재편을 진행시키면서도 민중의 저항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대통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재벌가나 조중동 분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정치적 집단과 관계가 안좋기에 제 말을 믿으려 하지 않겠지만, 사실 준주변부 국가의 지배층에 이상적인 대통령은 브라질의 룰라나 한국의 김대중 정도입니다. 오랜 투쟁 생활 동안에 쌓인 "경력"을 무기로 삼아 지식인층을 잘 포섭하고, 민중 지도자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권위를 확보해 민중 진영을 잘 분열시키고, "민주, 인권" 노래를 부르면서 민중에게 실제로 꽤나 아픈 신자유주의적 사회 개악을 강요하고... 그래야 민중을 분열시키고 분리, 통치하고 좌절시키는 데에 성공합니다. 만약에 1997년에 이회창이 대통령이 됐다면 IMF사태로 인해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아도 적어도 몇 군데의 상당한 민중적 저항이 일어났을 것이고 지속적 총파업 정도는 현실화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 지도자의 상당부분마저도 "비판적으로 지지한" DJ가 되니 민주노총의 일부 보수파가 정리해고 등을 사실상 받아들이고, 비정규직의 대규모 양산과 신용불량자 대량 속출 사태의 문이 열렸습니다. DJ의 포섭력, DJ의 "민주, 인권적" 수사학, DJ의 평양 방문과 김정일과의 뜨거운 포옹, DJ의 노벨 평화상이 아니었다면 가능했겠습니까? 민중과 지식층에 대한 교묘한 의식 조절이란, 아무나 할 줄 아나요? 지금 한국이 노동자를 쮜어짜는 데에 세상에 가장 편리한 사회가 된 데에 대해서 조중동의 주인님 분들께서 DJ에게 "감사합니다"하고 큰 절을 올려야지요.


그런데 이런저런 이해 관계로 DJ쪽과 불편한 그들은 결국 그들 자신과 "한 몸"이라고 볼 수 있는 이명박을 권좌에 앉히고 말았지요. 그게 꼼수 중의 꼼수이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시지요. 만약 새 대통령이 김정일과 한 번 더 뜨겁게 포옹하고, "자주 국방"과 "동북아 균형추"를 몇 번 더 언급하고 그리고 농가에 대한 지원책 등에 돈을 약간 더 쓴 뒤에 쇠고기 수입 규제를 차차 풀었다면 지금처럼 민란이 일어났겠습니까? 좌파야 당연히 반대하고 나섰겠지만 대중들이 아마도 크게 동요되지 않았을 걸요. 대한민국처럼 나름대로 복합화되고 여론 형성 과정이 시민 사회 등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에서는 자유주의 좌파 (통합민주당)처럼 개혁 사기를 주도면밀하게, 온갖 좋은 말, 민주적인 말, 민족적인 말을 해가면서 해야지요, "전봇대 뽑기" 식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여기가 1970년대 사우디에서의 공사 현장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자들은 개혁 사기꾼들을 대통령직에서 해고시키고 이명박을 고용한 것이 꼼수입니다, 꼼수! 시민 단체 출신들에게 장관, 차관 등에 해당되는 벼슬과 운전수가 달린 자동차를 주면서 잘 달래고, '네덜란드 모델"이나 들먹이고 그리고 뒤에서 전력 사업 민영화 등 "필요한 일"을 다 하고... 이게 "한국형 신자유주의"의 이상적인 모델일 것입니다.


이 사회의 지배자들이 실수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아주 똑똑하지 않다 하더라도 끝내 자기 실수를 고치려 하지 않는 하우 (下愚)는 아닐 수도 있어요. 즉, 불도저 식의 신자유주의적 사회 개악이 지금처럼 계속 결사 저항에 부딪치고 이명박의 지지율이 계속 바닥을 친다면, 새 마름을 쫓아내고 옛 마름들을 복귀시키려 할 수도 있지요. 즉, "공사판 감독" 식의, 군대 식의 신자유주의자를 용도폐기하고 지난 10년 간에 나름대로 검증된 개혁 사기꿈 무리이거나, 아니면 그들과 구조적으로 닮은 또 다른 정객 (문국현도 있지 않습니까?)을 등용시키려 할 수도 있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박근혜 쪽으로 기울 수도 있구요. 어쨌든 우리 민중이 다시 한 번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10년 동안의 유사 개혁, 모조품 개혁으로 지금 이 지경에 왔는데, 또 그 무리에 속는다면 이는 정말 하우 (下愚)에 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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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25일 새벽 청계 광장

생각거리 | 2008. 5. 25. 20:12 | Posted by 맥거핀.

Ozzyz Review 허지웅의 블로그
에서 가져왔습니다.

25일 새벽 청계 광장


뭔가 심상치 않다는 말을 듣고 새벽에 청계천을 향했다. 새벽 3시에 목격한 청계천 광장의 풍경은, 그러나 드물게 평화로웠다. 촛불을 든 젊은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자유롭게 발언하고 종종 소리도 지르며 웃음을 섞었다. 잠시 지켜보다 먼저 와 있던 정곤이 형과 청진옥에 들려 해장국에 소주를 삼켰다.

4시 30분 즈음 김작가 형에게 전화가 왔다. 속보가 떴는데 살수차에서 시위대에 물대포를 발사했다는 이야기였다. 에이 설마. 나올 거야? 응. 광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서둘러 나섰다. 동아일보 사옥 뒤로 돌아가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2시간 전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그곳 광장에 분노가 가득했다. 경찰 병력과 시위대가 대치했다. 본격적인 진압에 들어선 듯 보였다. 광화문 우체국 정문 앞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 두 명이 탈진해 쓰러져있었다. 누군가 맞았다고 소리쳤고 밀려 밟혔다고도 했다. 화가 치밀어 올라 도로로 나섰다. 경찰과 시위대의 열이 팽팽하게 맞섰다. “평화시위 보장하라”를 입이 닳도록 물어 외쳤다. 내가 본 시위대는 결코 이성을 잃지 않았다. 경찰들의 안전을 염려하는 건 오히려 시위대 쪽이었다. 밀고 밀리는 가운데 나는 “다치지 맙시다”라고 소리쳤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가 밝아오자 여론을 의식한 탓인지 살수차가 사라졌다. 문득 경찰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여경들이 나타났다. 곧 연행에 들어가리란 예고다. 주변 CCTV가 모조리 꺼져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앞줄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끌려가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이다. 끌고 가려는 사람과 끌려가지 않으려는 사람, 그리고 지키려는 사람들의 완력이 한데 뒤엉켰다. 구호는 "폭력경찰 물러가라"로 바뀌어 있었다. 저 뒷줄의 전경과 눈이 마주쳤다. 어느 영화처럼 증오로 완연한 그 눈이 내게 무어라 욕을 했다. 나는 발끈했다. 그러나 화를 주고받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어 이내 한심해졌다. 너랑 나랑 서로 미워해야할 이유가 뭐니. 눈 안 깔어. 얼씨구.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앞줄의 연행이 시작됐다. 옆에 김작가 형이 끌려갔다. 나도 끌려갔다. 어깨를 잡혀 끌려가는 도중 뒤 쪽에서 누군가 당겨 몸이 허공에 떴다. 다시 땅으로 처박혔다. 몸이 땅에 닿자마자 군화발이 날아들었다. 머리도 잡아당겼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 자꾸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왜 때립니까. 어휴 진짜 아파서. 그렇게 당기고 끌려 우체국 앞까지 밀려갔다. 더 이상 날 끌고 갈 의지가 없었던지, 정신을 찾고 보니 도로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옆에 선, 어느 선량해보이는 청년이 내 대신 화를 내주고 있었다. 왜 사람 머리를 잡아당깁니까. 아끼는 겉옷이 찢어져 걸레가 됐다. 손바닥이 찢어졌다. 검지 손톱 절반이 씹혀 너덜거리며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얼굴에 땀을 닦다가 뺨에 온통 피가 묻었다. 주위 사람들이 걱정해주는 바람에 알았다. 겸연쩍었다. 나는 람보가 아니다. 그래도 꽁지머리를 지탱하던 고무줄이 사라진 걸 알았을 때는 화가 많이 났다. 난 간지남인데. 어디 거울 없나. 처량해서 처연하다.

핸드폰 진동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김작가 형은 닭장차에 실려 연행되는 중이었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다고 했다. 어느 매체에 고자질 기사를 쓸까 농 삼아 재잘거리다 전화를 끊었다. 시위대는 결국 도로를 뺏기고 물러섰다.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이성을 놓지 않았다. 다시 자유 발언이 시작되고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말들이 광장의 하늘을 덮었다.

드물게 피가 묻고 옷이 찢겨 나풀거리는 내 꼴이 유난스러워 창피했다. 옷도 갈아입고 지혈도 해야겠다. 택시에 올라타 집으로 향했다. 6시 10분이었고 날은 완전히 밝아있었다. 귀신같은 꼴을 사진이라도 찍어둬야 하나 싶어 핸드폰을 더듬거리다 관두고 피식했다. 맹장수술을 하고 병원에 누워있는 엄마가 생각났다. 난 일을 핑계로 한 번도 안 가봤다. 일러바칠까. 아마도 엄마는 아이고 아이고 누가 내 새끼를, 안아줄 테다. 연희동을 지나 가좌동을 향하는 동안 창밖의 풍경은 고요하고 청량했다. 평소에는 채 귀에 닿지 않던 새소리마저 드문드문. 아침은 이렇게 아름답구나. 아무 일도 없는 동네 골목길이 너무 평온하고 서운해, 나는 조금 울었다. 허지웅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1211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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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얼마만의 시리즈 부활인가. 작은 브라운관이 아닌, 거대한 스크린에서 해리슨 포드의 클로즈업 된 얼굴을 바라보는 느낌은 색다르다. 벌써 시리즈는 이어져, 4탄에 이르렀지만, 나는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도 당연한 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3탄이 개봉했던 것은 1989년이고, 그로부터 벌써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영화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었고, 해리슨 포드는 꽤나 동작이 굼떠졌다. 아무튼 내 느낌 속에는 <인디아나 존스>는 TV에서 하는 ‘설 특선 영화’와 동급의 의미를 가진다. 보통의 주말에는 하지 않고, 설이나 추석이 되어야만 TV에서 인심 쓰듯 틀어주는 영화들. 그 영화들에는 사람을 기대하게 만들고, 몰입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 영화들을 놓치고 연휴를 보낸다는 것은, 꽤나 허전하고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영화들의 첫 머리에는 이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올려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는 일종의 정형화된 패턴이 있다. 영화의 전체 맥락과 크게 상관없는 초반부의 추격씬이나 소동으로부터 시작하여, 곧 뭔가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을 가진, 그리고 지금 어딘가에 묻혀 있는 보물이 소개되고, 인디아나 존스와 그의 조력자들은 이 보물을 찾으러 떠나고, 그와 동시에 이 소문을 전해들은 악당들도 이 보물을 쫓기 시작한다. 악당들과 인디아나 존스의 쫓고 쫓기는 추격씬과 복잡한 암호들이 관객을 지치게 할 무렵, 보물은 홀연히 등장하고, 이 보물은 온갖 소동 끝에 다시 묻히게 되고, 그 와중에 보물에 욕심을 부리다 악당들은 죽는다. 그리고 곧 인디아나 존스는 새로운 보물을 찾아, 혹은 다른 어떤 것을 향해 유유히 발길을 돌린다.

따라서 복잡한, 그러나 사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암호를 해독해야만 찾을 수 있는, 그리고 소유하게 되면 엄청난 힘을 가지게 해 준다는 이 보물에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욕심을 부리다 죽게 되는 악당들과 마찬가지로 관객들에게도 어리석은 일이다. 보물은 어차피 그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마련이고, 인디아나 존스가, 혹은 악당들이 그 보물을 소유해 그 무시무시한 힘을 휘두르는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 물론 대다수의 관객들은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눈에 보이는 맥거핀에 기꺼이 입을 내민다. 그 맥거핀을 물지 않는다는 것은 이 인디아나 존스와 함께 하는 모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맥거핀을 물고 꿀꺽 삼켰을 때만이 우리는 그 모험을 두 배 이상으로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사실 어쩌면 진짜 어리석음은 이 영화를 놓고, 제국주의적 시각이니, 인종차별적인 시각이니 하는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 쫓고 있는 대부분의 보물들은 제3세계의 어딘가에 묻혀 있으며, 그 보물들을 쫓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적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일 뿐이며, 그 와중에서 희생되는 것은 유색의 원주민들뿐이다. 고고학 교수라는 이름으로 여러 보물들을 찾아다니고, 그 보물들을 사로잡기 위해 주위를 마음껏 파괴하는 인디아나 존스라고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도 어떠한 시각에서는 한낱 도굴꾼일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즐기러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에 동참하고자 이미 알면서도 맥거핀을 꿀꺽 삼킨 사람들이다. 어차피 보물은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고, 그 동안 쫓고 쫓기는 신나는 활극에 시각적 쾌감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대다수의 것들은 스필버그의 유머 또는 조롱이 아니었던가. (이 영화는 미국과 러시아의 대립이 한창이던, 그리고 미국에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195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반공산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힌 정부기관 요원들이 인디아나 존스를 추격할 때 반공산주의 피켓에 부딪히던 것과 같은 그런 유머들. 그런 유머들은 어차피 이전 시리즈에서도 계속 반복되던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 관객들은 그저 스필버그가 짜놓은 이 유쾌한 소동극을 지켜보며, 시각적 쾌감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확실한 이 지점에서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는다. 이제 더 이상 옛날의 설 특선 영화를 보면서 느끼던 쾌감이 오지 않는 것이다. 옛날의 시리즈물이 가지던 가장 큰 미덕은 아날로그 액션이었다. 동양에는 아크로바틱한 신기에 가까운 기예를 선보이던 성룡이 있었다면, 서양에는 모자를 안 떨어뜨리고 유려한 채찍술을 보여주던 해리슨 포드가 있었다. 그러나 이 느껴지는 디지털의 미끈한 느낌은 무엇일까.

물론 이것은 막연한 느낌일 수도 있다. 스필버그 역시도 이 <인디아나 존스> 4탄의 상당수의 액션씬을 CG를 배제하고 찍었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왠지 이 <인디아나 존스>는 이전의 전작들보다는 <미이라>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어쩌면 그것은 아날로그적 와이어 액션이냐, 컴퓨터 그래픽에 의한 3차원 액션이냐의 문제가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액션 이외의 어떤 것, 예를 들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성궤나 성배 등이 가지는 종교적인 분위기, 혹은 오컬트 적인 요소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된 것, 그리고 많은 액션씬에서 특유의 유머러스함이 사라진 것 등에 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디지털상영으로 이 영화를 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가끔 화면에 까만 점들도 나오고 그래야 하는데).

 

아무튼 키아누 리브스의 <스피드>를 보러 간 관객이, 비의 <스피드레이서>를 보고 나온 듯한 찜찜한 뒷맛을 남기지만,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심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고, 상대방의 총구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도 옆의 동료에게 농담을 던지는 낙관주의적 품성도 여전하다. 그리고 그 낙관주의적 품성과 한 세트라고 말할 수 있는 ‘유머’ 역시도, 상당히 모자라긴 하나 감은 살아있다. 그리고 전작의 관객들을 위한 몇몇 서비스 컷도 스필버그는 잘 끼워 넣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전의 느낌을 되살리는 건 테마송이다. 모두들 기억하고 있을 그 음악. 설날 저녁, 30개 이상의 광고를 뚫어져라 보고 있을 수 있게 해주는 그 음악이 영화관에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있는 것은 꽤나 즐겁다. 영화관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30대 이상의 관객이 있다면, 십중팔구 영화의 감동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음악 때문일 것이다.




John Williams- 'The Raiders' 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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