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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시절, 허진호

Ending Credit | 2009. 10. 14. 01:26 | Posted by 맥거핀.



허진호 감독의 장점은 그의 어떤 디테일함에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디테일하다'라는 것은 봉준호 감독이나,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처럼, 영화적인 디테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표현할 마땅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이는 '감정의 디테일함', 즉 감정의 미세한 부분을 잘 포착해내는 능력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첫사랑을 만났을 때의 아련한 감정, 사랑하는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할 때의 미묘하고도 복잡한 심정, 자꾸만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의 두근거리는 설레임..이런 것들을 어떤 사물이나 상황이나 대사들을 이용하여 잘 형상화하여 우리 눈에 드러내주는 것, 그것이 바로 허진호 감독이 지닌 장점들이었다. 그것은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남아있어야만할 아버지를 위하여 비디오를 작동시키는 방법을 세심하게 적어내려가던 남자의 모습을 잡아내는 것이나, 인구에 회자되었던 <봄날은 간다>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면 먹고 갈래요?"와 같은 대사들, 혹은 <행복>에서의 산길을 걸어오다 슬며시 손을 잡는 장면 같은 것들이다.

이 장면들이 기억에 남는 좋은 장면들이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장면의 감정들에 우리가 공감할 수 있어서가 아니었는지 싶다. 즉, 아..나도 언젠가 저런 적이 있었지, 혹은 저런 느낌이 어떤 느낌인지 대강 알 것도 같다..라고 어느 틈에 생각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한편의 이유는 그것이 전체적인 드라마의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진호 감독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한쪽에서 무언가(아마도 '사랑'이) 얻어지고 있는 그 순간에, 다른 한쪽에서는 또다른 무엇인가가 상실되고 있는 것을 그려내보이는 것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남녀가 서로에게 다가가는 조그만 발걸음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서 떠날 준비를 하는 남자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 <봄날은 간다>에서 다가가는 한편, 동시에 멀어지려고 하는 여자의 모습과 세상이나 사랑에 대해 알아가면서 어떤 것(순수?)을 잃어버리는 남자의 모습(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장면도 그렇고), <외출>에서 완전히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상황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사랑...그리고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의 집약판이라고 느껴지는 <행복>. 즉 사랑과 그 사랑을 이루어 내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하는(그러나 사실 한편으로 보면 허진호 영화의 남녀주인공들은 이 방해요소에는 왠지 상당히 초연한 듯한 느낌이 있다. 그것은 이 영화 <호우시절>에서도 그렇다)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상실들, 그리고 한편으로 충족되면 충족될수록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 사랑 그 자체의 속성을 잘 버무려내어 보여주면서, 신파로 흐르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허진호 감독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었고, 그것 자체가 감독의 역량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아마도 한국 감독 중에, 사랑에 대한 어떤 부수적인 것들을 모두 제외하고, 사랑 그 자체의 감정과 진행양상에 대한 보고서를 써내라면 가장 잘 써낼 수 있을 듯한 감독이 허진호 감독이라고나 할까.


근데 왠지 이번 영화 <호우시절>에서 허진호는 상당히 다른 노선을 취하는 듯 하다.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그에 관계된 주변사람들을 상당히 시시콜콜하게 보여주면서, 즉 이야기를 초반부터 만들면서 시작하는 전작들과 달리, 이 영화의 남녀주인공들에게는 어떤 개인사를 보여주는 별다른 장면을 할애하지 않고, 대뜸 두보초당에서 남녀주인공을 대면시킨다. 청두로 출장차 온 동하(정우성)와 두보초당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메이(고원원). 그리고 그 이후에 두 사람의 어떤 밀고당기기(?)를 통해 관객은 조금씩 몇 가지 사실들을 알게 된다. 동하의 유학시절, 이미 이들은 만났던 사이라는 것, 서로 간에 어떤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여차저차첫차막차하다보니, 이들은 연인이 되지 못하고, 서로간의 다른 인생길로 접어들어야 했다는 것 등등 말이다. 그런데 조금은 이상한 것은,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 후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과거의 추억들만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되새겨질 뿐, 정작 중요한 현재의 이야기는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는 후반에 이르러서야 숨겨진 이야기들을 조금씩 끄집어낸다. 그러고는 짧은 시간 속에서 몇 가지 감정의 파고를 급속하게 보여준 후, 다시 중간을 생략해버리고, 마무리를 제시한다.

즉 이 영화 <호우시절>이 허진호 감독의 전작들에 비추어 볼 때, 이상하게 느껴지는 점은, 드라마를 처음부터 밀도있게 쌓아나가며, 관객들에게 그 감정선을 서서히 따라오도록 했던 전작들에 비해, 중반을 넘어 갈 때까지 일종의 로맨스코미디 식으로(정확히 말하면 '코미디'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남녀주인공의 일종의 '사랑만들기(혹은 밀고당기기)'를 보여준 후, 정작 드라마는 후반 짧은 시간에 몰아넣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는 초중반의 밝고 싱그러운 분위기에 비추어볼 때 후반부의 급격한 감정의 변화들을 따라잡기가 어려워지는 면이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후반부의 동하 역의 정우성의 연기가 많이 아쉬웠는데, 한편으로는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이렇게 이어지는 몇 개의 장면들로 감정선을 만들어내기에는 많이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즉 정우성에게 관객을 그 감정으로 끌고 갈 수 있도록 배정된 공간들이 후반부에 짧게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좋은 연기를 설혹 보여줬다고 할지라도, 관객이 그것에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말이다(물론 이 말은 정우성의 연기 '자체'가 좋았다는 말은 아니다). 따라서 후반부의 몇몇 씬들이 - 예를 들어 정우성의 급정색 씬 같은 - 조금은 이해되지 않으며, 혹은 약간은 우스워보인다면, 그것은 감독에게 더 책임을 물을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뭔가 좀 어정쩡해진 감이 있다. 어떤 잘 짜인 드라마라고 보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고, 그저 아름다운 풍광들 속에서 남녀주인공이 귀여운 대사들을 내뱉는, 풋풋하고 상큼한 영화라고 말하기에는 그것도 어색한 감이 있다. 그렇다고, 중국 청두에 대한 관광홍보물이라고 말하거나, 아님, 남녀주인공의 좋은 비주얼을 감상할 그냥 눈만 즐거운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또 이 영화에 대한 너무 가혹한 평가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본 영화의 예고편에서 이미 이 영화에 대한 큰 기대를 버렸기 때문에, 그저 중국 청두의 멋진 풍광이나, 정우성, 고원원 그 자체의 청두라는 공간에 못지 않은 비주얼을 감상하자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의 포스터에 박힌 '허진호 감독 작품'이라는 문구와, 그의 필모그래피들을 살펴보면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예전의 그 좋은 감성들은 다 어디에 던져두고...허진호 감독도 나이를 먹은 것일까. 그의 필모의 정점은 여전히 <봄날은 간다>다.

(비주얼이 좋은 영화니 사진이나 많이 넣자..;)



- 2009년 10월, 씨너스 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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