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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살인사건, 홍기선

Ending Credit | 2009. 9. 12. 02:08 | Posted by 맥거핀.



(영화 내용에 대한 여러 미리니름이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두 가지 생각이 먼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하나는 이 영화는 뭐가 어찌되었건, 그 내용에만 주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의 사건이 가진 주는 아이러니함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훨씬 크기 때문에 '영화적'인 다른 어떤 것에 주목할 틈이 없다. 이 영화가 사건을 어떻게 가공하고, 어떻게 전달하는가라는 방법론적인 측면을 떠나서 이 사건 자체가 가지는 모호함, 또는 무거움이 다른 모든 것을 짓누른다. 따라서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어떠한 측면에서 좋은 영화인가, 혹은 나쁜 영화인가를 따질 틈이 없이, 사건이 가지는 본질적인 측면을 들여다 볼 수 밖에 없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도, 이 영화에서는 이 내용적인 부분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영화 속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은 실제의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에 불과하다고, 즉 , 실제로 벌어진 사건과는 큰 관계가 없다고 영화 시작부 자막에서 밝히고 있으나, 영화를 보는 내내 실제의 사건이 오버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무튼 이 영화는 상당수 관객들의 호응을 얻기는 힘드리라는 생각이다. <씨네 21>에서 지적한 것처럼, 많은 관객들은 어떤 명확한 결론을 선호한다. 이 영화처럼, 명확한 어떤 것도 내려주지 않은채, 관객에게 그 해답을 맡기는 결론은 아마도 어떤 좋은 소리를 듣기는 꽤나 어려울 것이다, 대다수의 관객들은 정해진 도덕률에 의해 명확한 결론이 나오는 결말을 선호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세상의 이치다. 오랜 예전부터 관객들이 선호하는 것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이었지, 모호한 결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다루는 이 사건이 실제로도 그렇게 결말이 났다는 사실이다. 1997년, 한 남자가 패스트푸드점 화장실에서 칼에 여러 군데를 찔려 죽었다. 사건 장소에는 친구 관계인 피어슨(장근석)과 알렉스(신승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이 범행이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신은 다른 사람이 범행을 저지르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여러 증언 및 정황증거에 따라 알렉스는 범인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피어슨은 증거은닉 및 무기소지로 1년여간의 징역형을 받았으나 짧은 징역살이 후 출국금지가 잠시 정지된 틈을 타서 미국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공소시효가 다 되가는 오늘에 이르렀다. 죽은 사람이 있고, 범인도 (둘 중에 하나라는 것은) 명확하나, 둘 다 풀려난 사건, 그 실제 일어난 사건이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인 것이다.

즉 이 영화가 명확한 결론을 내려주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실제의 사건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실제의 사건에서 두 사람 중 어떤 사람의 혐의를 입증할 충분한 증거는 채집되지 않았다. 즉 어떤 측면에서 보면 알렉스가 범인일 수도, 혹은 피어슨이 범인일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 범인일 수도 있다. 즉 알렉스와 피어슨이 같이 범행을 했을 수도 있다. 영화에서는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지만, 이 부분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 사건을 맡은 영화 속 박대식 검사(정진영)은 두 사람을 모두 기소하라는 (즉, 누가 주범이든, 종범이든 간에) 의견을 묵살한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만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 두 사람을 모두 기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즉 이는 어떠한 의미에서, 100%의 진실을 버리고 50%의 진실만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만약 둘 다 기소한다면, 무고한 한 사람을 범행으로 몰아가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그것이 박대식 검사가 가진 생각이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부분에서는 어떤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과연 둘 중의 '한 사람만이' 범인인 것일까. 두 사람이 같이 범행을 했을 가능성은 어떠한 이유에서 제거되었는가. 실제의 사건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영화는 이 부분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즉 '둘 중의 한 사람만이 범인이다'라는 전제는 성립이 가능한 것일까. 성립이 가능하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

처음에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 영화가 미국과 우리나라 간의 수사권의 문제, 그의 어떤 부당한 측면을 강조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그러한 부분이 아니다. 물론 영화 중간에, 미국의 수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부분을 박대식 검사가 토로하는 부분도 있고, 어떤 부당성을 강조하는 듯이 보이는 부분도 있으나 그 부분은 영화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영화에서 포인트를 두고 있는 부분은, 이 사건의 어떤 아이러니한, 혹은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이다. 둘 중의 한 명이 범인인 것은 확실하나, 둘 중 어느 누구도 범인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혹은 범인이라고 보기에는 불충분한 상황. 영화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서는 알렉스 쪽에 더 혐의를 둘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했을 때 여전히 몇몇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은 남는다. 과연 그 둘 중에 범인은 누구란 말인가. 그 답답함은 내내 박대식 검사를 짓누르며, 동시에 관객들도 짓누른다. 

그것이 관객들을 짓누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영화는 철저히 박대식 검사(정진영)의 시점으로 진행되고 있다. 물론 영화 중간중간 다른 시점의 이야기가 삽입된다. 예를 들어 피어슨의 시점에서 본 사건의 진행, 혹은 알렉스의 시점에서 본 사건의 진행과 같은 내용들이 중간에 끼어드는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박대식 검사의 시점에서 들은 재구성된 이야기이다. 즉 박대식 검사가 피어슨이나 알렉스를 심문하면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재구성해서 나열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 둘 중 어느 것에 진실이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박대식 검사가 가지는 이 답답함은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이된다. 그래서 박대식 검사가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사건을 재구성해보는 코믹해보이는 장면마저도 마냥 웃을 수 없는 장면이 된다. 

그래서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 영화보기는 조금 특이해 보이는 면이 있다. 대부분의 영화는 주인공의 시점을 따르지만, 전체적으로 여러 시점을 중간에 삽입하며 관객의 이해와 영화에의 몰입을 높인다. 그러나 이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박대식 검사의 시선으로만 관객을 이끈다. 그래서 그 사건의 어떤 정황을 마치 우리가 수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지만, 그가 느낀 절망과 한계를 우리에게도 같이 느끼도록 이끈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는 이 영화가 사건의 어떤 충실한 재현에만 머물고 있다는 비판도 듣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물론 이로써 얻는 소득도 있다. 그것은 관객을 어리둥절케 하고, 분노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사실 정작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부분에서는 긴 설명을 하지 않는다. 즉, 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범인이 피어슨인가, 혹은 알렉스인가 라는 부분이지, 그 둘 모두가 풀려나게 된 그 결정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정황에 대해서는 애써 입을 다문다. 즉 이 둘 모두 거의 무죄와 다름없는 상태에서 풀려나게 된 이 법의 허점, 혹은 커다란 구멍에 관해서는 간단한 설명으로("이길 수는 없으나, 지지는 않게 해드리죠.") 지나가고 만다. 이것은 불친절하지만, 한편으로는 관객을 분노하게 만든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죠?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죠? 그것을 의도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이 불친절해 보이는 마지막은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그리고 동시에 가슴 속 어딘가의 분노를 끌어올린다. (그러나, 찝찝한 한 마디를 더 덧붙이자면, 이 분노가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알렉스를 향해? 혹은, 피어슨은 향해? 아니면 법원을 향해? 이 영화의 가장 무거운 점은 어쩌면 이것이다. 그것은 영화에서 제시된 부분만 놓고 보았을 때 법원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어떤 명확한 증거가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법원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은 무엇일까.)





- 2009년 9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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