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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지옥, 이용주

Ending Credit | 2009. 8. 24. 00:25 | Posted by 맥거핀.



(영화에 대한 과한 미리니름 있습니다.)



<불신지옥>이 꽤나 무서운 공포영화임을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음산한 스코어나 과도한 효과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효과음들을 적절히 사용하여 공포를 창출하는 것이나, 공간이나 사물을 잘 활용하여- 예를 들어, 아파트 지하실 씬 같은 것 - 말 그대로, '일상의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도 다른 여러 좋은 리뷰들에서 잘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더이상 언급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또 영화의 여러 설명되지 않는 점들을 다시 잘 풀어서 설명하는 것도 나의 몫은 아닌 것 같다. 여러 리뷰들에 보면 재미있고, 기발한 설명들이 많은데, 그보다 더 재미있는 설명을 할 자신도 없다. 다만, 몇 가지를 이 영화는 생각나게 하는 점이 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소진의 엄마(김보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씬이 있다. 교회에서 돌아온 엄마가 아파트 현관 문을 열려고 하는 장면. 주잠금장치와 몇 개의 보조잠금장치가 달려있는 현관. 엄마는 그 몇 개의 자물쇠에 열쇠를 꽂고, 돌리고, 문을 열려고 하나, 문은 열리지 않고, 도리어 잠긴다. 그리고 다시 몇 개의 자물쇠를 열었다가, 문을 당겼다가, 그래도 문은 열리지 않고, 가지고 온 물건을 떨어뜨리며 잠시 패닉에 빠질 즈음, 스르르 열리는 현관. 어떤 다른 리뷰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장면은 '그들'이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고 급하게 나가야만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왠지 의미심장하게 읽히기도 한다. 하나는, 이 영화에서 줄곧 이야기하고 있는 믿음의 문제. 문이 열릴 것이다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행한 행동이 사실은 반대로 잠그는 것이었다는 작은 아이러니,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엄마의 작은 패닉은 왠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전주로서 읽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사실 그 몇 개의 잠금장치들이 더 흥미롭게 보이기도 한다. 그 여러개의 잠금장치들은 어떤 두려움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현관의 팻말 이면의 감추어진 많은 자물쇠들. 종교라는 굳건한 믿음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엄마,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러나 아마도 이는 엄마만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들을 보면, 그 아파트의 다른 집들도 거의 비슷한 여러개의 잠금장치들을 달고 있으며, 대부분 감옥을 연상시키는 방범창들을 설치해놓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고보면, 영화의 시작 부분이 생각이 난다. 영화의 전체 줄거리와 크게 상관은 없는 부분이지만, 영화는 언니 희진(남상미)의 고단한 삶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학교를 다니고, 기침으로 콜록거리면서도 알바를 꾸준히 해야하는, 작은 자취방에 돌아와서는 침대에 쓰러져 죽은 듯이 잘 수밖에 없는 고단한 삶. 그런 희진이 동생 소진이 사라졌다는 전화를 받고, 고속버스에 지친 몸을 싣고 어느 지방 중소도시로 내려와 거대하고, 허름하면서도, 음산한 아파트 앞에 설 때, 어떤 느껴지는 공포감. 아마도 이 공포감은 그녀의 팍팍한 삶에서 전해지는 지독한 공포감일 것이다. 특별히 어떤 요행이 있지 않고서는 앞으로 그저그런 '88만원 세대'로 살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그녀의 지친 삶과 그녀가 한 때 몸담았던 낡은 서민 아파트와의 조합에서 불러일으켜지는 어떤 연민 같은 것들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을 무너지는 중산층의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있을 때만 해도,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삶은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녀의 삶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추락하고 있는 것, 이를 영화는 희진의 삶에 대한 몇 개의 컷과 아파트와 집안의 가재도구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집안의 빨간 전자렌지가 인상적이었다. 그 빨간 전자렌지는 적어도 15년은 된 저가제품. 왜 아냐면 우리집도 아직 그 전자렌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무너진 중산층들은 두렵다. 무엇이? 삶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다. 이 무서운 세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말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영혼을 잠식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속에서 조금씩 변해간다. 조금씩 변해가고 망가진,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삶들 말이다. 어쩌면 그런 것들을 소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에게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진이 신들렸다고 말하는 무당(문희경)과 자신의 병이 낫기 위해 소진에게 부적을 쓰라고 강요하는 여자(장영남)와 주저하면서도 결국 그들에게 동조하는 젊은 여자(오지은)와 과거 참전용사로, 경비복인지 군복인지 모를 옷을 입고 다니는 경비원(이창직). 좀 도식적이긴 하지만, 왠지 이들은 각각 어떠한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뭔가가 무너져 내리는 시대, 그 시대의 무섭고도 기이한 자화상들 말이다. 이상한 사이비 세력('무속' 자체가 사이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 속 무당이 그렇다는 말이다)과 점점 이기적이 되어가는 30대와 방관적이고 무책임한 20대와 그들을 내리누르는 권위와 권력과 폭력의 망령들의 상징이라고 이들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삶의 고통을, 그 고통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무엇인가를 믿는다. 그러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믿음은, 믿는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인 그 무엇(종교이든 무속 신앙이든)도 망쳐 버린다. 일례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사람들이 고통 받았던 시기인 중세시대, 그 중세시대는 한편으로는 강한 믿음만이 존재하던 시기이기도 했고, 지나친 믿음은 종교의 타락을 낳았으며, 루터의 종교개혁을 불러 일으켰다. 명백하게도, 이를 가장 잘 반영하는 캐릭터는 소진의 엄마이다. 그녀의 지나친 맹신은 남편과 아이의 사고, 그리고 그 이후 남편의 죽음과 아이의 후유증이라는 삶의 고통과 큰 관계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며, 그녀 또한 소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 중에 한 명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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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이의 극복을 위해, 즉 무너져가는 중산층이 탐욕이나 방관이나 혹은 맹신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 회복해야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어떤 가족주의, 그 수많은 가족의 힘으로부터 비롯된 어떤 공동체의 힘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떨어지는 희진을 필사적으로 껴안았던 엄마의 팔, 아버지를 잃은 소진, 그리고 아버지가 있지만 늘상 바쁘기만한, 병상에 누운 아이의 말들을 통해서 말이다. "아빠..아빠 언제 데릴러와?"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 속 학의 존재를 통해서도 그렇다. 물론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학을 소진의 영혼과 관계가 있는 어떤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옳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은 옛부터 어떤 전통적인 공동체의 가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말해지기도 했다. 물론 이 영화의 마무리에서 이러한 것을 이끌어내는 것은 지나친 억측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마무리는 여전히 모호하며, 이는 한편으로는 영화가 마지막에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러한 가족주의, 공동체의 회복이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라고 했을 때, 그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하는 또다른 물음이 생겨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질문을 다른 말로 바꾸면 이것이다. 이제는 제2의 소진이라고 할 수 있는 형사의 딸을 (소진처럼) 잃지 않으려면 진정으로 해야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가족주의와 공동체의 회복으로 가능할까.

맹신(盲信)의 반대말은 불신(不信)이 아니다. 영화 속 가장 믿지 않는 캐릭터인, 종교이든 무속이든 코웃음을 쳤던, 엄마에 의해서 사탄이라고 불렸던 형사 역시 이 영화에서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직접적인 책임은 아니지만, 소진의 죽음에 이 형사 역시 완전히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사건 초기에만 해도 형사 역시 단순가출에 불과하다며,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 영화의 제목이 <맹신지옥>이 아니라, <불신지옥>임을 기억해야 한다. 너무 믿거나, 아예 믿지 않거나(종교이든 무속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간에) 모두 어떤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어찌되었던 이 고통의 시기에, 야만의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믿으면서(하다못해 '자신'이라도 믿으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나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 <다우트>에서 찾고 싶다. 올해의 명장면 중에 하나로 꼽고 싶은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의 마지막 그 장면을 보면서 말이다. 나무 밑 벤치에 앉아서 "의심이 들어요."라며 울음을 터뜨리던 그 마지막 장면. <씨네 21>의 정한석 기자는 그것을 '회의(懷疑)'라고 불렀다. 아마도 맹신의 반대말은 회의에 가까울 것이다.



p.s. <불신지옥>...재미있는 제목이지만, 이 제목만 아니었어도 최소 오십만은 더 들었을 듯 싶다.




- 2009년 8월, 씨너스 단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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