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조금씩 시작하라

The Book | 2009.08.19 00:43 | Posted by 맥거핀.
거꾸로, 희망이다 - 10점
김수행 외 지음/시사IN북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여전히 위기는 지속되는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위기가 지속된다기 보다는 위기라는 것이 이제 일상화의 단계로 접어든 것 같다. 이것은 단지 MB 정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MB 정부는 항상 상상하던 것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있고, 전혀 예상치 못하던 일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위기라는 것을 전적으로 MB 정부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물론 오해하지 마시라. 난 그들이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정부가 이 위기들을 헤쳐나가는 어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기 보다는 지속적으로 이 위기들에 기름을 붓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 위기들이 이렇게 계속되는 것에는 보다 근원적이고, 중요한 무엇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다. 여기서 위기라고 해서, 어떤 정치적인, 혹은 사회적인, 경제적인 위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원적인 것은 생각의 위기, 사상의 위기다. 물론, 언제 어느 시대에나 사상의 위기라는 것은 늘상 말해져왔고, 어떤 측면에서는 과장되게 부풀려진 측면도 있다. 그러나 요즘의 이 위기는 심상치 않은 면이 있다. 그래서, 모두가 다른 모두에게 묻는다. 이 위기를 그래, 도대체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

여기 <시사IN>에서 마련된 6개의 강좌는 그런 것을 묻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어떻게 좋은 삶을 살 것인가.''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경계를 묻는다.''세계 공황의 위기 속에서 한국 경제가 갈 길은 어디인가.''상상력은 어떻게 해서 생기나?''위기의 경제, 위기의 사회. 그 대안과 해법을 상상한다.''역사는 후퇴하지 않는다. 때로 에돌아갈 뿐이다.' 그 6개의 주제를 <녹생평론>의 창간인 김종철이, 칼럼니스트이자 심리학자인 정혜신이, 마르크스 경제학의 대부 김수행이, 여성문화와 청소년문화에 대해 늘 날카로운 담론을 생성해온 조한혜정이,  시민운동가 1세대 박원순이, 역사를 보는 따스하고도 날카로운 시선 서중석이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6개의 강좌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내었다. 책은 어떤 커다란 수정이나 가필을 거치지 않고 강의를 거의 그대로 수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순간, 우리는 그 강의실 한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은 수강생이 되어 그 강의를 함께 한다. 그리고 몇몇 순간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살짝 졸기도 하고, 어떤 의문을 품기도 한다.

강의를 다 듣고나니, 2가지 생각이 든다. 먼저 하나는 이 강의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 책은 앞에서 말한대로, <시사IN>에 의해 기획된 6개의 강의를 담고 있다. <시사IN>에서 이 6개의 강의를 시작할 때, 잡은 테마는 '혼돈의 시대, 위기 속에서 길을 묻다'라는 것이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점점 어려워지는 경제상황, 자고 일어나면 문제가 터지는 사회,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삶의 가치관을 잃고 혼란으로 빠져들 때에 그런 우리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 도움이란, 대가(大家)들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다. 여기 6개의 강좌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생태학, 심리학, 경제학, 시민운동, 여성학, 역사학 등 각기 다른 분야에서 연구 및 활동을 해온 분들이지만, 모두 그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혹은 끊임없이 새로운 담론들을 생성하고 있는, 나름 그 분야에서는 일종의 대가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위기를 헤쳐나가는 방법,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약간은 놀랍게도, 그것들은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인 '거꾸로, 희망이다'라는 것과 맞닿아 있다. 지금의 시기가 위기라고 하지만, 역으로 생각했을 때 이 위기라는 것이 결국 기회라는 것이다. 어떤 기회? 지금까지와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어떤 하나의 사회가 하나의 방향으로만 계속해서 나아갈 때, 사람들은 다른 방식의 삶을 생각해 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 사회가 어떤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제서야 사람들은 달리던 발을 멈추고, 자신의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본다. 그리고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뭔가 대단한 답을, 엄청난 대안을 기대하셨던 분들은 맥이 풀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의 분야에서 가장 높은 최정점에서 밑을 돌아보는 이 대가들의 해답은 결국 그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좀 더 자신과 밀착한 삶이 필요하다는 것.

더 이상 증거가 따로 필요 없다 할 만큼 아주 분명한 사례를 들려드릴게요. 아우슈비츠 생존자를 연구한 결과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수감자는 일주일에 생수 한 병 정도의 식수를 배급받았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아주 고된 노동을 하면서 지냈던 거죠. 그걸 다 마셔도 목숨을 연명하기가 어려운데, 반을 남겨서 얼굴을 씻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같이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없고 무모한 행동처럼 보였겠죠. 그런데 연구 결과에 의하면 얼굴을 씼었던 사람들의 생존율이 훨씬 더 높았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자기 존재를 배려하고 보이지 않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게 목숨을 연명하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는 거죠.   

- 정혜신에게 김어준이 '위기의 심리'를 묻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경계를 묻는다.' p. 120-121 
 

다른 하나는 이 책, 그 내용 이상의 것에서 살필 수 있다. 그것은 위기가 일상화가 된 시기, 이 시기에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결국 고리타분한 학문 속에 들어있는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즉 녹색의 생태학에서, 따분한 심리학에서, 철지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 혹은 해방 전후 시기를 다룬 역사학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밖에는 없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을 듣고, 그것에서 어떤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또 의외로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해준다. 여기서 강의를 하고 있는 6명의 학자들과 그 학자들 곁에서 강의를 진행한 또다른 6명의 학자들과, 그 강의를 듣고자 강의실을 가득 메운 수많은 청중들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결국 그 해답이란, 무엇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것에 대해 공부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에 모두들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즉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이성과 지성과 학문의 힘에서 모든 해답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며, 그 해답을 함께 나누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강의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자와 강연자와의 짧은 대담으로 시작하여, 강연자의 강연을 거쳐, 청중과의 질의응답으로 끝맺고 있다. 강연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긴다는 이 책의 원칙에 따라, 청중들과의 질의응답도 거의 그대로 옮겨져 있는데, 이 질의응답들을 보면 재미있다. 대부분 청중들은 강연자의 어떤 기본적인 취지나 사상에는 공감하면서도, 약간은 주저하는 빛(?)들을 보인다. 즉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 혹은 좋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여러 제약들이 따른다는 항변이다. 물론 약간의 말하는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그럴 때마다 대부분의 강연자들이 말하는 결론은 하나인 듯 하다. 그것은 이것이다. "거창하게 시작하려 들지 마라. 항상 중요한 것은 처음 내딛는 작은 발걸음이다.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조금씩 시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