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 (let it rain), 아네스 자우이

Ending Credit | 2009.07.23 23:46 | Posted by 맥거핀.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제목이 <레인>인걸까. 영화 내내, 비는 커녕, 따스한 햇살만 쏟아지는구만. 남(南)프로방스(영화의 배경이 꼭 여기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음. 남..프로방스. 그냥 어감이 좋으니까. 적어도 북 프로방스보단.)의 따스한 햇살이 말이다. 그러다가 영화가 한참을 지나고 어느 순간 비가 온다.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지는 몇몇 장면들. 아, 이제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두 번째 비가 온다. 그리고 미무나의 품에 안겨 있는 플로랑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간 후에서야, 제목이 '레인'인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는 그렇게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니까. 누구에게나.

영화 내내 비는 딱 두 번 온다. 첫 번째 오는 비는, 사람들의 감정을, 혹은 대립을 극단으로 끌어올리는 비다. 높은 산에 올라가 인터뷰를 촬영하려던 미쉘(장-피에르 바크리)과 카림(자멜 드부즈)과 아가테(아네스 자우이)는 양떼의 적절한 도움으로 인터뷰 촬영을 실패하고, 돌아가려 하지만 차는 길바닥에 뒤집어져 있고, 때마침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보기도 어렵지만, 세 사람은 모두 화가 머리 끝까지 났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미루고, 상대방에게 마음 속에 담아놓았던 이야기들을 하고, 상대의 가장 아픈 구석을 찌른다. 두 번째 비는, 치유의 비다. 모든 것이 마무리 되고, 아네스는 이제 떠나려고 할 때 쏟아지는 그 비. 그 비가 치유의 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첫 번째 비와 두 번째 비가 쏟아지는 사이에 지나갔던 몇몇 마법과 같은 장면들에 의해서이다. 아가테가 자신의 어린시절 앨범들을 살펴보다가, 대부분의 사진이 자신을 찍은 것임을, 동생 플로랑스를 찍은 사진은 거의 몇 장 없음을 발견하고, 뒤늦게야 동생을, 그리고 동생을 대했던 자신을 돌아보는 장면, 혹은 카림이 유아세례식에 갔다가, 촬영 알바를 하고 있는 미쉘을 만나는 장면, 그리고 미쉘도 카림도 잘 알고 있으나, 미쉘이 부탁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카림도 이해해주는 척 하는 장면들 같은 것.

아네스 자우이의 이 영화는, 왠지 여러 캐릭터의 특징적인 부분들을 유달리 부각하고, 서로간의 대립항을 두드러지게 보이게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애 같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고압적인 플로랑스의 남편, 마음 속에는 어떤 열정을 품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언니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를 안고 있는 플로랑스, 겉으로는 유능하고 차가워보이나, 사실 주위 사람들의 관계를 약간은 버거워하는 페미니스트 아가테, 능력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알고 보면 허점이 많은 미쉘, 이민자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나,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카림. 그리고 이들 간의 성(性)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성격적인 대립항들, 플로랑스와 남편간, 혹은 플로랑스와 아가테 간에, 카림과 미쉘 간에, 그리고 카림과 (플로랑스+아가테)와의 대립, 아가테와 그녀의 남자친구와의 대립 등등.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모자란지 감독은 여기에 복잡한 사랑 관계를 첨부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여러 특징적인 캐릭터들을 여러가지 복잡한 관계망으로 연결시키고, 거기에서 어떤 관계의 새로운 내포와 외연들을 발견하고, 유머 속에서 은근히 정곡을 찌르려는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감독의 전작 <타인의 취향>이라는 제목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곧 아까 말한 것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왠지 그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비가 금방 그치고,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서로의 약한 모습들이다. 이민자 출신으로 뿌리깊은 차별 속에서, 카림의 날선 말들이, 사실은 약한 부분을 감추려는 일종의 방패에 불과했다는 것. 혹은 농부의 약간은 집요한 시선 속에서 얇은 스카프 속으로 애써 밀어넣는 아가테의 약한 하얀 팔꿈치. 프로듀서와 제대로 계약도 안된 상태에서 알바로 연명하는, 그나마도 제대로 못해 아이의 이마를 맞힌 미쉘의 카메라 마이크. 이런 것들을 서로가 조용히 바라보면서 모두들 깨닫는 것이다. 저 사람도, 별로 다를 것이 없구나. 그저 우리는 그 형태만 다를 뿐이지, 비슷비슷한 효과를 가진 콤플렉스로 둘러쌓인 약한 인간들일 뿐이구나 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오는 비는 말하고 있다. 나는 누구한테나 내려요. 페미니스트라고, 혹은 이민자 출신이 아니라고, 남자라고, 내가 피해가지는 않는답니다. 그저 누구한테나, 골고루, 쏟아질 뿐이랍니다, 라는 것.

그리고 그 순간 영화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안도를 준다. 모두가 다를 바는 그다지 없다는 것, 때로는 많은 일들이 꼬이고, 또 어떤 일들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겠지만, 모두들 비슷하게 누군가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거나, 비슷하게 서로를 미워하고, 비슷하게 서로에게 짜증을 내고, 비슷하게 서로를 몰래 좋아하기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 당신만이 그렇게 유별나게 망가지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은 치유의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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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품격 프랑스 코미디'라는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글쎄.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키에르케고르' 운운하는 농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는 맞을 수도 있겠지만, 동의하기는 힘들다. 이 영화의 웃음이 빵빵 터지는 곳은 그보다는 훨씬 '낮은'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네스가 인터뷰에서 양치기 운운하자 뒤의 양떼들이 '메에~~~'하며 화답을 해주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고품격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사실 빛나는 지점은 그런 '고품격' 프랑스 유머들보다는, 아름다운 프랑스의 풍광 속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몇몇 마법같은 장면들에 있다. 그런 장면들의 일부는 앞에서도 짧게 언급했으므로 여기서 또 중언부언 늘어놓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 되겠지만, 다음의 한 장면만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으므로 언급해두고자 한다. 영화의 마지막, 쏟아지는 비 속에서 만난 남자와 여자. 그들은 손을 맞잡고, 곧 여자는 들고 있던 우산을 머리 위로 날려버린다. 비는, 누구에게나 가릴 것 없이 쏟아지지만, 가끔은 우산이 필요없을 때도 있어요. 어딘가에 맞잡을 누군가의 손이 있다면, 우산 따위는 놓아버려요.




- 2009년 7월, 광화문 씨네큐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