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Mother), 봉준호

Ending Credit | 2009.06.01 00:29 | Posted by 맥거핀.



(미리니름이 상당히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옛날 어느 도시에서 한 마술사가 우물에 묘한 약을 넣어 버렸다. 마술사는 말하기를, 만약 그 우물물을 마신다면 누구나 미쳐버릴 것이라 하였다. 그 도시에는 우물이 딱 두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평민들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왕의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온 도시 사람들이 미쳐갔다. 사람들은 그 우물물을 마시면 미쳐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우물이 그들이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게다가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참을 수 있었겠는가? 얼마 안 가 사람들은 포기했고, 저녁때가 되자 온 도시가 미쳐갔다.
왕은 무척 행복했다. 왕은 궁전 테라스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리고 대신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별개의 우물을 갖고 있지. 신에게 감사한다. 온 도시가 미쳐버렸군 그래." 사람들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날뛰고 깔깔거리며 웃고, 울며 난리들이었다. 그것은 지옥이요, 악몽과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전에는 결코 해본 적도 없었던 일들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행복에 잠겨 있었다. 사람들이 왕궁으로 몰려와 외치기 시작했다. 병사들 역시 도시에 있었기 때문에 그 우물물을 마시고 미쳐 있었다. 다만 몇몇의 호위병들과 요리사, 하인들, 대신들 그리고 왕 자신과 여왕만이 미치지 않고 온전해 있었다. 왕은 크게 걱정이 되었다. 왕이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봉준호 감독이 그리는 세계는 대체로 상당히 이상한 곳이었다. 그 곳은 열려 있으나 실상은 폐쇄된 공간, 예를 들어 한강을 둘러싼 서울의 일부지역이거나, 지방의 작은 중소도시. 그 한정된 공간 안에서 이상한 일들은 벌어졌다. 이상한 약품을 먹고 자라난 물고기는 괴물이 되어 고수부지를 덮쳤고, 지방의 한 도시에서는 비오는 밤마다 빨간 옷을 입은 여자들이 강간되어 버려졌다. 그리고 괴물은 한강을 따라 폐쇄된 공간을 활주하며 그 위용을 뽐냈고, 살인마는 작은 도시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경찰의 눈을 피해 은밀히 사건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그리고 또 여기는 지방의 작은 소읍. 한 여고생이 밤길에 살해되어 옥상에 버려졌고, 한 어리숙한 청년은 살인범으로 지목되어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아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진실을 찾고자 한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두가 미친 세계. 목격자의 불확실한 진술과 작은 골프공 하나를 단서로 범인을 지목한 경찰, 아들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돈만 받아 챙기려는 변호사, 아들과 어머니를 수상쩍은 눈길로 바라보는 이웃들, 도와주기는 하겠으나 돈이 필요하다는 아들의 친구, 그리고 죽은 여고생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은폐된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들. 어머니는 묻는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봉준호 감독은 이번에도 그 전작들과 비슷한 것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 <살인의 추억>, <괴물>을 살펴보면, 감독은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즉 <살인의 추억>에서 살인범이 과연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 혹은 <괴물>에서 괴물이 과연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찾는 것은, 그저 미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맥거핀'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감독은 이러한 것들을 하나의 맥거핀으로 두고, 그보다는 이 모든 것의 이면에 숨은 것들, 이러한 틀을 만든 폭력의 구조에 더욱 관심을 보인다. 감독이 이러한 폭력의 구조를 드러내는 방식은 그러한 폭력의 구조 속에서 망가져 가는 개인을 드러내보이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계속 사라져가는 여자들과 더불어, 경찰들에게 끌려와 폭행당하고 군화발로 짓밟히는 무고한 시민들, <괴물>에서 국가로부터 어떠한 보호와 도움도 받지 못하고, 괴물보다는 오히려 국가로부터 계속 공격당하는 현서네 가족들이 그러한 폭력의 구조 속에서 망가져가는 개인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의 구조가 만들어낸 괴물들(변형된 물고기와 살인마)과 그 괴물을 만들어내고, 만드는 데 일조한 자들(한강에 약품을 뿌린 자들 또는 경찰들, 국가기관)이 은폐되고 처벌받지 않기 위해서, 다른 무엇이 필요했고, 현서네 가족과 경찰서 지하에서 폭행당한 사람들은 그 희생양이 된 것이다.

<마더>도 그러한 면에서 전작들을 연상시킨다. <살인의 추억>이 연상되는 지방의 어느 소읍. 이곳은 상당히 폐쇄된 사회다. 한 다리만 건너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그러한 작은 사회에서, 공동체의 무참한 폭력이 한 소녀에게 가해진다. 이는 폐쇄된 사회, 폐쇄된 공동체에서 가해지는 알려진, 그러나 모두들 쉬쉬하는 그런 폭력. 그러나 이 폭력은 실제로 이러한 폭력을 가한 이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떤 사건이든 별로 공들여 수사할 마음이 없는 경찰과, 변호사와 검사와 병원장이 젋은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는 모습이 중첩된 이곳에서 이 구조가 온전히 이들만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봉준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결코 처벌받지 않는다. 이들이 자신들의 죄를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다른 희생양을 내세우는 것. 도준(원빈)이나 기도원 종팔이와 같은 어리숙한, 사회적인 약자들. 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만들어낸 틈을 가장 약한 곳을 부러뜨려 메우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지금도 일어난다. 그러고 보면, 감독은 영화가 현재의 이야기임을 여러번 상기시킨다. 언뜻 배경이나 상황만으로 볼 때는 <살인의 추억>과 같은 80년대를 다루고 있는 듯 하나, CSI를 언급하거나, 2006년 월드컵을 이야기하며, 이것이 현재에도 일어나는 일임을, 이 폭력의 구조가 여전히 그 그늘을 드리우고 있음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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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은 꽤나 친절하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될 장면까지 세세한 설명과 주석을 덧붙인다. 흥행감독으로써 가끔은 비교 대상이 되지만, 그런 면에서 박찬욱 감독과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 박찬욱 감독이 약간 고약한 이미지의 추상화를 그려놓고 "이 추한 것에도 아름다움이 있지 않니..이 이면의 것들을 보렴..."이라고 말하는 식이라면, 봉준호 감독은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에서 보이는 잘 짜여진 풍경화를 그려내놓고, "자 여기에서 네가 보지 못한 것이 있을거야...그게 뭐냐면 말이지.."라고 말하는 식이랄까. 작은 복선들과 작은 디테일들이 중첩되어 그 이상의 많은 것들을 봉 감독의 영화는 전달한다. 그러나 굳이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을 예로 든 것은, 이유가 있다. 그 그림들에서 풍기는, 이상한 미스테리와 괴기(怪氣)들. 그것 또한 이 영화에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몇 가지 미스테리한 질문이 가능하다. 도준은 과연 어디까지 기억하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엄마의 생각대로, 혹은 우리 모두의 생각대로, 정말 '바보'인가. 이 엄마(김혜자)는 도준에게 왜 이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이를 전적으로 과거의 사건에 대한 죄책감(도준을 그렇게 만들었다는)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을까. 

그러고보면 이 엄마야말로 수상쩍은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도준의 아버지는 누구이며,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돈이 별로 없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에서 숨겨진 돈들이 나오고, 군에서 최고 잘나가는 변호사를 찾아갈 줄도 알며, 이상한 침술은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또 형사 제문(윤제문)이나 아들의 친구 진태(진구)와의 관계도 어딘지모르게 약간 이상한 점이 있어...아니야..그건 단지 김혜자에게서 풍겨나오는 어떤 아우라에 내가 너무 깊숙히 빠져든 탓일꺼야...그래도 그 춤은 좀 이상하잖아...그래...그 춤. 맞아, 그 춤. 이 영화는 시작과 끝이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다. 시작 부분에 엄마의 우스꽝스럽고도 어딘지모르게 슬퍼보이는 그 춤에서, 엄마가 약재를 썰다가 밖을 내다보고 거기에 아들 도준이 서 있는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시작한다면 마지막에서는, 엄마가 산자락에 서 있는(처음의 그 춤 장면은 아마도 시간상으로는 여기에 들어가는 장면일 것이다) 장면에서, 다시 약재를 썰고 그 밖을 내다보면 형사가 서 있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여기에 마지막으로 엄마가 버스에 올라타 침을 찌르고 버스 안의 아주머니들과 한바탕 춤을 추는 것으로 끝난다. 이 마지막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엄마는 약한 존재였다. 시작 부분에 어두운 방안에서 약재를 썰며 좁은 문으로만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 그 아들이 차에 치여도, 갑자기 나타난 형사에게 잡혀가도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이 작은 프레임으로만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은 나중에 도준과 구치소에서 대면하는 장면과 겹친다. 역시 사각의 틀 안에서 작은 틈으로만 아들과 대화할 수 있는 엄마의 모습. 그러나 이 엄마의 모습은 달리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누구와도 만나고 어디든 나타나면서 말할 수 없이 거대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마지막에서 아들 도준 대신 그곳에 앉아 있는 다른 아이를 보면서 "엄마가 없어?"라고 묻는 그 순간, 엄마는 다시 작은 사각의 틀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틀 안에서 더 작은 틀들로 끊임없이 분열된다. (이를 감독은 상징적인 장면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엄마는 고통스런 기억을 잊게 해준다는 부위를 침으로 찌르고, 아주머니들과 섞여서 춤을 춘다. 이로써 엄마는 일종의 공범이 된 것이다. 국가와 사회가 보호해야만 하는 사회적 약자인 어느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과 아프게 손을 맞잡은 것이다. 다른 수많은 모성(母性)들 틈에 섞여서. 내 아들 대신 다른 아들을 밀어넣고, 작은 엄마로 돌아가며.

어쩌면 모두가 미쳐 있는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최대한 지키는 방법은 누구보다도 더 미치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마도 죽을 때까지 내가 이 엄마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누구보다도 자신의 세상을 지키려했던 어머니를 기억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대신이 말했다. "꼭 한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폐하께서도 그 우물물을 마시는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서두르시지요." 그래서 그 왕은 그 우물물을 마셨고, 잠시 후에는 그도 미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군중들이 기뻐하며 소리쳐 외쳤다. "아, 신이여 감사합니다. 우리 왕의 마음이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 오쇼 라즈니쉬, <배꼽> 중에서







- 2009년 5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