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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스티븐 달드리

Ending Credit | 2009. 3. 27. 20:42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생각보다 영화의 이야기는 복잡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의 이야기가 복잡하다기 보다는 그 영화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우리를 복잡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영화는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자신의 아우슈비츠 경험을 기술했던 프리모 레비의 유명한 책과 질문이 겹친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것이 인간인가, 과연 무엇이 인간인가. 이 질문들에 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니 어려운 일이라기 보다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머리 속이 복잡하다 못해 텅 비어 버린 채로 무거운 엉덩이를 의자에서 겨우 떼내는 일 뿐이다.

영화의 시작. 한 15세 소년과 연상의 여인의 위태로운 관계가 시작된다. 흔한 소년 판타지물, 혹은 역 로리타물로서의 상투적인 시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여인 한나는 꽤나 많이 해본 솜씨인 것 같기도 하다. 일부러 석탄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빌미로 옷을 벗기는 저 능숙한 솜씨라니. 뭐 아무튼 여기에서부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기는 하다. 도대체 이런 관계를 용납해도 되는 것인가 하고. 성에 대해서는 꽤나 관대하다고 여겨지는 서양에서도 이러한 관계는 꽤나 중대한 범죄로 여겨진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속으로는 더 꼬여 있지만, 겉으로는 꽤나 엄숙한 체 하는 우리의 '위원회'가 어째 이 수상한 영화를 아무 말 없이 통과시켜 줬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것만 궁금하냐고? 글쎄, 나로써는 이에 대해서 정말 할 말이 없다. 그런 경험도 없을 뿐더러(!), 겉으로는 책임 있는 리버테리언을 표방하는지라, 본인들이 뭐 책임만 잘 진다면...쿨럭...하고 넘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고맙게도 영화는 더 이상 깊게 생각해보기도 전에 2라운드로 넘어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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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법정에서의 대답을 들으면서 우리는 모두 아연해진다. 이것이 아연한 이유는, 이 대답들에는 모두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나의 대답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일자리를 준다기에 자원했다, 방이 모자라기 때문에 뒤에 온 사람들을 위해, 있는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 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이 질문들은 중요한 원칙들을 제외한다면 그다지 틀린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그 원칙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되며, 더 나아가 그들을 죽여서는 안된다'라는 원칙이라면 그녀의 이 대답들은 절대적으로 틀린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피해자들과 이를 바라보는 우리 관객들은 심정적으로는 그녀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녀를 용서하기는 어려운 것이며, 용서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녀를 용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원칙을 저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한나에게는 이 원칙들이 결여된 것일까. 이것이 그녀의 문맹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니 그렇지 않고서는 이 아연하다 못해 순수하기까지 보이는 결여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녀는 교육 기회를 얻지 못해서건, 혹은 난독증이 있어서건 문맹인 상태로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이 문맹은 그녀가 아우슈비츠에서 저지른 이 일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한 가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녀는 왜 그렇게 그녀의 문맹을 수치스러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렇게 문맹을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법정에서의 위증을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말하는 그녀의 그 욕망,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이에서 벗어나기를 욕망하는지 알 수 있다. 어쩌면 너무 욕망하면서도 그것을 벗어나려는 수없는 시도를 그녀는 지금까지 계속 실패해오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앞의 질문들은 바보같은 질문이 될 것이다.

아무튼 여러가지를 고려해보아도 이는 간단한 문제가 될 수 없다. 문맹이라고 해서 그녀의 그런 범죄 행위들이 용납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역으로 말해 그것이 범죄행위임을 충분히 인식했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더 큰 형벌을 내릴 수 있는가. 아니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로, 법으로서 이들을 단죄하는 것이 가능한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이들을 처벌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유태인들을 아우슈비츠까지 수송한 기관차의 기관사는 처벌을 받아야 할까.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 철로를 설치한 모든 노동자들도 처벌해야하는 것이 아닐까...법정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영화 속 교수의 세미나에서 혼란을 느끼던 학생들과 동일한 혼란을 우리 모두 겪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나도 매우 심한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과연 실제의 재판은 어땠는지 궁금해졌다. 자료를 찾아보니 실제 아우슈비츠의 범죄자들을 심판하는 재판은 여러 번 열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가 재판받았던 뉘른베르크 재판도 있고, 아이히만 재판도 있지만, 영화 속 경우와 가장 비슷한 사례로는 196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던 아우슈비츠 재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2명의 피고인은 아우슈비츠에서 보초병, 방역소 직원, 게슈타포, 수용소 책임자, 수용소 의사 등으로 일했고, 이들은 1963년 현재 수출업자, 회사원, 남자 간호사, 농업협동조합 조수, 산부인과 의사, 목수 등의 일을 하다가 재판에 회부되었다. 사람들은 놀랐다. 그들은 가정을 가진 보통 사람들로, 성공하려고 노력하고, 세금도 잘 내고, 점잖고, 의무감이 투철한 사람들이었다는, 괴물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들은 증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리고 판사는 판결을 내렸다. "피고인들이나, 책상에서 인간말살 계획을 수립한 사람들은 다같이 아우슈비츠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판사는 피고인들의 정치적, 도덕적 책임은 묻지 않았다. 다만 오늘날과 똑같이 아우슈비츠 시절에도 유효했던 형법의 자구(字句)를 기준으로 선고를 내렸다. (크리스티안 마이어, <누가 역사의 진실을 말했는가>에서 부분 발췌)

...어쩌면, 그래서 그들의 가장 큰 잘못은 '원칙을 저버린, 혹은 원칙을 배우지 못한 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언제 어느때나 유효하다. 예를 들어 광주에서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공수부대원들 중에는 "나는 국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애국자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도(혹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이 믿음은 틀렸다고 믿고 싶다. 국가는 항상 옳은 것을 지시하는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다. 국가가 내려준 '명령을 따르라'는 원칙 위에는 '민간인을 죽여서는 안된다'라는 대원칙이 있다. 설령 그 원칙을 배우지 못했다고 해도, 그들에게서 어떤 책임을 묻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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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한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영화라고 보았을 때, 그 중심 인물을 서술하는 다른 한 축에는 마이클(랄프 파인즈)이 있다. 생각해보면, 이 마이클도 불행한 인물이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마이클. 그는 옥중의 한나에게 여러 책을 읽은 녹음들을 보낸다. 그가 이 녹음을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에게는 그가 어떤 반성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이클은 다시 처음으로 한나를 대면하는 자리에서 묻는다. 그 때의 일을 기억하냐고. 여기서의 기억이란 반성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한나의 대답이 의미심장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아마 여기서 한나는 깨닫고, 마이클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반성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반성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반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녀는 반성할 수 없으며, 반성해서도 안되는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아우슈비츠는 이해될 수도 이해되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 그녀는 그 깨달음을 다른 방식으로 증명해 보였다. 책을 통해 더 가깝게 다가가는 방식으로. 그녀가 책에서 어떤 원칙을 얻었음을 그녀는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증명해 보였다.

그래서 이 마지막은 마음에 든다. 이 마지막에서 마이클은 자신의 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 책의 효용이란 궁극적으로는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후세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남기는 것 말이다. 후세들이 그 책을 읽음으로써 과거의 이야기에서 무엇인가 교훈을 얻기를, 그리고 절대적인 원칙을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요즘 물만난 고기처럼 날뛰는 뉴라이트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친일의 경험, 베트남 전에의 참전, 군사 쿠데타, 민주에의 탄압 등등을 이야기하는 것을 자학 사관이라고 자학하는 뉴라이트들에게 말이다. 과거의 비극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자는 미래의 희극을 쓸 수 없다.





- 2009년 3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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