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우트>, 존 패트릭 샌리

Ending Credit | 2009.03.12 02:17 | Posted by 맥거핀.

(개인적으로는 한국판 포스터보다 이 외국판 포스터가 더 낫다.)




(스포일러)

난 생각이 많은 편이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의심이 많다는 것이다. 생각이 많은 것과 의심이 많은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냐고? 글쎄, 어쩌면 생각과 의심이란 것은 거의 동의어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의심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고 해도, '의심을 하고 있는 내 존재'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데카르트의 사상(생각)의 출발은 '의심하는 나를 의심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가 그의 생각의 출발을 의심에서 시작한 것처럼, 이 '의심'이라는 것은 실로 오래된 듯 하다. 그 기원을 찾기 어려운 인류의 오래된 저작인 <성경>에도 '믿음'의 반대로서 '의심'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거론된다. 믿음을 보여주는 자, 그 반대편에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이 가까이에서 그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그의 존재를, 그의 말을 의심한다. 예를 들어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가 그렇지 않은가.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니, 나는 종교적 믿음의 문제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단지 이 의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어쩌면 인간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생겨난 것이 의심이 아닌지...의심하는 중이다.
 
뭐 아무튼 쓸데없이 길어졌는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의심이 많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를 보면, 내내 머리가 아프다. 내가 말하는 '이런 영화'라는 것은 대체로 이런 것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영화. 이와 반대로, 어떤 영화들은 영화보기가 안락하다. 나의 감정을 대입시킬 수 있는 주인공이 존재하는 영화. 대체로 착한 누군가가 존재하는 영화. 이런 영화들을 보면, 나는 그저 그 주인공에게 내 감정을 그대로 의지하면 된다. 뚜렷한 선과 악 속에서 악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선과 함께, 나도 그 승리에 밥숟가락 하나 올리고 같이 가는 것이다. 물론 가끔 안락함이 지나쳐 꿈의 세계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위에도 말했듯이 이 영화에는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없다.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진실은, 그래서 우리가 그토록 간명하게 원하는 선과 악은 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정말 그 소년에게 '어떤 행위'를 했을까. 그 이전에 플린 신부가 있던 성당에서는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가 생각한 것은 단지 오해에 불과했을까. 그녀는 왜 플린 신부에게 계속 의심을 품고 있는 것일까[각주:1]. 알로이시스 수녀가 말하는 '자신이 저질렀던 부도덕한 일'이라는 것은 어떤 일일까. 그녀는 결혼을 했었던 적이 있는데, 왜 수녀가 되었을까[각주:2]. 과연 그 소년은 정말 동성애적 성향이 있을까....단지 의심만 끊임없이 늘어날 뿐이다. 우리의 이 의심을 끊어줄 '확실한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 아니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은 나는, 단지 의심할 뿐이다. 영화 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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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영화의 목적은 '우리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알로이시스 수녀와 플린 신부가 충돌하는 것은 그들이 '의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충돌하는 지점은 그들의 '확신'에 있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 신부가 어떤 아동들에게 '어떤 행위'를 저질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반면, 플린 신부는 그의 행동은 자비와 사랑에서 나온 것이며, 알로이시스 수녀가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두 개의 확신은 영화 내내 충돌하며, 긴장을 만들어 낸다.  

의심의 최종의 단계가 확신이다. 인간이 의심하다가 어떤 근거를 확보하게 되면, 그 의심은 확신으로 돌아선다. 그러나 이 확신이라는 것이 반드시 근거를 동반하는 것인가 라고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하다. 알로이시스 수녀도 어떤 결정적 근거 없이 플린 신부를 몰아붙일 뿐이다. 제시되는 증거들은 빈약하고, 어느 한 구석이 무너져 있다[각주:3]. 그래서 그녀의 이 확신은 영화 내내 불어오는 세찬 바람과 맞선다. 대부분의 우리는 그 세찬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다가, 때로는 부러지기도 하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의심이 필요하다. 과연 나의 확신은 어떤 타당한 근거가 있는 것인가. 과연 우리들이 그렇게 믿을 만한 무엇인가가 확실히 있는 것인가. 이 '건전한 의심[각주:4]'은 해도해도 모자르다. 우리는 계속 물어야 한다. 의심하는 나 자신에 이르를 때까지.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마지막이 이 영화에는 있다. 바로 알로이시스 수녀가 자신의 의심이 맞는 것인지 자신을 의심한다며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이 마지막 장면. 이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확신에서 의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람이 멎었다. 이 마지막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서 알로이시스 수녀는 처음으로 '인간답게' 보이기 때문이다. 미사 시간에 조는 학생에게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식사 시간에 덜익은 고기를 내뱉는 제임스 수녀를 말없이 쳐다보던, 마치 인간의 감정이 거세된 하나의 기계처럼 보이던 그녀가 처음으로 인간답게 보였다. 이는 명백한 사실 하나를 떠오르게 한다. 의심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것이란 점. 의심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다운 것이라는 점.

그랬다. 기계는 YES와 NO의 분기에서 어느 길이 더 빠를지 의심하지 않는다. 내비게이션은 남부순환도로를 탈지, 올림픽대로를 탈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계산된 더 빠른 길로 갈 뿐이다. 만약 그 순간에 의심하는 내비게이션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기계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어느 길로 갈지 고민하는 내비게이션을 본다면, 그 순간 우리는 진정으로 무서워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의심하라, 의심하는 나 자신까지 의심하라. 인간이고 싶다면.


- 2009년 3월, CGV 대학로.




  1. 그녀가 플린 신부를 의심하는 것은 제임스 수녀(에이미 아담스)가 사건을 이야기하기 훨씬 전부터다. 플린 신부가 다른 소년의 팔을 잡아당기는 것을 본 이후부터일까. 아마도 그것은 아닌 듯 하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 신부에게 어떤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그 기원은 무엇일까. [본문으로]
  2. 그런데, 결혼했던 사람도 수녀가 될 수 있나요? 잘 몰라서... [본문으로]
  3. 그래서 제임스 수녀는 단지 의심에 머물러 있다. 그녀는 알로이시스 수녀처럼 확신하지 못한다. 단지 의심할 뿐이다. [본문으로]
  4. <씨네 21> 694호 '전영객잔'에서 정한석 기자님은 이를 '회의(懷疑)'라고 말했다. 아마도 '회의'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 더 적확한 표현인 듯 하다. 가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정리해 놓은 이런 글을 보면 맥이 풀린다(방금 전에 봤다). 그래도 나는 쓰련다. 에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