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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이 시계는 전쟁에 나가서 죽은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시계공의 소망을 담아 만들어졌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죽은 자가 살아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그 해에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은 태어났다. 죽을 날을 앞둔 노인의 몸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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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이런 기이한 설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이 제목은 조금 이상해보인다. 과연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의 원제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직역하자면, '벤자민 버튼의 신기한(기이한) 사례' 정도 될 것이다. 아마도 수입하는 측에서는 벤자민 버튼의 '육체'가 점점 젊어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싶어서였겠지만, 이 제목은 자꾸만 무엇인가를 오해하게 만든다. 그래서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정말 과연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거꾸로 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죽은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시계공의 소망처럼 죽은 자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 오늘의 나는 어제 알았던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내가 되어 어제의 인생을 사는 것. 즉 육체적으로만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포함한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어제로 돌아가는 것. 그러나 벤자민은 그렇지 않다. 그는 다만 육체적으로 '젊어질' 뿐이다. 그의 정신과 삶의 진행은 보통 사람과 동일하다. 아무 것도 모르던 '아이'였던 벤자민은 조금씩 집 바깥에 있는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집을 떠나 세계를 알게 되고, 주위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게 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부모의 죽음을 알게 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많은 보통의 사람들이 사는 삶도 약간은 다르지만, 대부분은 비슷한 삶을 살게 된다. 즉 보통 사람들에게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고 있다면, 벤자민에게도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니 나는 수입사의 한글 제목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말장난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단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게는 이 벤자민 버튼은 하나의 거대한 맥거핀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 기이하게 보이는 이 벤자민 버튼도 결국은 태어나고, 삶을 살고, 죽는다는 것. 그가 육체적으로 다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크게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시계공의 질문에 대한 신의 답인지도 모른다.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나요?' '죽은 자가 살아돌아올 수는 없나요?' 라는 질문을 시계공이 자신이 만든 시계를 통해서 신에게 던졌을 때, 신은 벤자민을 태어나게 하는 것으로 답했던 것이다. '이 기이하게 보이는 벤자민도 남들과 같단다. 태어나고, 배우고, 사랑하고, 주위 사람을 잃고, 죽는단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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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았을 때 아마도 이 영화는 크게 두 가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물론 그 두 가지는 각각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연결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는 '결국에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에게 세상을 가르쳐 준 선장 마이크가 죽으면서 하는 말이지만, 이 말은 그 후에도 여러 번 반복된다. 벌어놓은 많은 돈으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이 이승을 떠나고 싶지 않은 벤자민의 아버지[각주:1]. 그러나 그도 최후에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신은 시계공에게 했던 답을 선장에게도, 그리고 벤자민의 친부에게도 들려주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 말하자면, 이 신 앞에서, 신의 세계 앞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말해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를 잘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영화 중간에 제시된다.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의 교통사고 장면. 감독은 이 교통사고가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인가를 자세한 장면으로 제시한다. 벤자민은, 그리고 우리는 가정을 해볼 수는 있다. '...했었더라면'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우연의 결합으로 사고는 일어났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우리의 책임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렇게 말한다. 우연이었어. 우연이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또다른 장면도 있다. 지금 데이지가 누워서 딸에게 벤자민의 일기를 읽어달라고 하는 이 병원. 이 병원에는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닥치고 있다. 그러나 그 폭풍우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른 곳으로 피하거나, 그저 조용히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 죽음이든, 또다른 어떤 것이든 인간이 맞설 수 없는 것이 있다. 그 맞설 수 없는 것에 맞닥뜨릴 때는 방법은 없다. 그저 '받아들일 뿐'.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서 조용히 '받아들이는' 캐릭터인 벤자민의 양모 '퀴니'의 존재는 인상적이다[각주:2]. 그녀는 벤자민 같은 '괴물'이 태어난 것도 모두 신의 뜻이라 생각하고, 그저 그를 잘 키울 뿐이다.

또다른 하나는, 따라서 결국 모든 인간은 단 한 번의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잡혀 와 남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삶을 산 피그미족 청년도, 버튼 공장을 운영하며 부유한 삶을 산 실업가도, 예인선 선장으로 여러 곳을 구경하고, 2차대전에도 참전했던 용감한 선장도, 볼쇼이 발레단과 처음으로 협연한 발레리나였던 호기심많은 여인도, 누구보다도 강단 있는 여성이었으나, 또한 그저 '엄마'였던 어느 여인도, 그리고 벤자민도.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음을 맞게 되리라는 것. 삶의 중간에는 여러 분기가 있을지언정, 그 분기를 되돌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는 것. 하나의 인생을 다시 살 수 없다는 것. 누구나, 결국 벤자민에게도 시간은 거슬러 오를 수 없는 일직선이라는 것. 즉,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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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대다수의) 인간은 처음에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다가, 네 발로 기다가, 두 발로 서서 세상을 바라보다가, 다시 걸을 수 없게 되며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벤자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 역시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양 손에 지팡이를 끼고 네 발로 걷다가, 두 발로 서서 세상을 살펴보다가, 다시 걸을 수 없게 되어 죽음을 맞이했다[각주:3]. 벤자민이 죽음을 맞이하는 이 마지막 장면은 여러가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 2009년 2월. 씨너스 명동.




 
  1. 덕분에 벤자민은 그 이후에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편하게 요트도 타고 잘 산다. 반면 그렇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활하는 노동인 벤자민 버튼이었다면. [본문으로]
  2. 따라서 그녀가 운영(?)하는 공간이 양로원이라는 것은 상징적이다. 양로원은 '받아들여야'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즉 앞으로의 자신의 생은 그저 여생(餘生)에 불과하다는 것을. 언젠가는 찾아올 죽음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 [본문으로]
  3. 개인적으로는 이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서 설정이 조금 아쉬웠다. 마지막 벤자민이 치매에 걸리는 것은 상당히 쉬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얼굴은 아기인데, 말이나 행동은 노인처럼 하면 이상해서 그랬겠지만) 어쩌면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다시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는 대구(對句)를 만들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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