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보다 큰 Bigger Than Life, 니콜라스 레이

Ending Credit | 2009.02.15 22:18 | Posted by 맥거핀.


(스포일러)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으려니 마음이 설렌다. 허리우드 극장에 들어가는 초록색 엘리베이터. 물론 지금은 허리우드 극장이 아니다. 서울아트시네마 또는 허리우드 클래식. 지금은 고전 영화를 많이 상영하는 극장이지만, 예전부터 허리우드는 상당히 고전스러웠다. 일단 이름부터가 '헐리우드'도 아닌 '허리우드'. 그리고 극장을 둘러싼 거리들의 오래되고 낡은 풍경. 세련되지 못한 빛바랜 거리.

생각해 보면, 종로에 나와 극장을 갈 때면, 서울극장이나 단성사보다는 허리우드나 씨네코아를 가곤 했다. 이제는 허리우드도 씨네코아도 없지만, 종로에 있는 극장을 간 기억을 떠올리면, 그 두 극장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에 조금 더 좋아했던 극장은 허리우드였던 것 같다. 허리우드는 앞에서도 말했듯, 관 이름도 '레드'니 '그린'이니 하는 약간은 촌스러운 극장이었고, 거기를 가기 위해서는 약간은 역한 돼지 삶는 냄새가 풍기던 더러운 골목을 지나가야 했지만, 무엇보다도 좋았던 건, 극장 앞 툭 트인 옥상이었다. 지금은 끊어서 그럴 수 없지만, 그 옥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피우는 담배 맛은 꽤나 좋았다. 그저 지금은 하릴 없이 휴대폰을 꺼내 아래의 풍경을 찰칵 찍으며 예전의 기억들을 떠올릴 분이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여기서 교생 때 가르쳤던 학생들을 만난 기억도 있다. 아마 지금은 대부분 대학생이 되었을 그 학생들도 그 때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러 오며 불안해하던 소심한 학생들이었을 뿐이다.

날씨는 흐려서 사진은 잘 나오지 않았지만, 휴대폰에 찍힌 사진을 들여다본다. 회색빛의 풍경이 남아 있는 기억과 비슷해서 그런지, 어쩐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하다.

그리고 '2009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김영진 평론가가 추천한 니콜라스 레이의 <실물보다 큰 Bigger Than Life>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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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선택한 건 단지 시간이 맞아서다. 그 외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다. '시네마스코프 영화미학을 최고조에 올려놓았던 감독 니콜라스 레이의 대표작'이라고 되어 있지만, 내가 그런 걸 알 턱이 없다. 시네마스코프가 무슨 말인지 잘 몰라 사전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나온다. '와이드스크린 방식에 의한 대형영화' 와이드스크린이라..그러고보니 이 제목은 중의적으로 읽힌다. 실물보다 훨씬 사물을 크게 보이게 하는 와이드스크린, 그리고 실제의 삶보다 자신의 삶을 더 크게 지각하고 있는 주인공 에드(제임스 메이슨)의 심리상태. 실제의 삶보다 자신의 삶을 더 크게 지각하고 있다는 것은 한 마디로 제정신이 아니란 거다. 과대망상.

에드를 이렇게 만든 것은 코티존이라는 약이다. 그러나 그는 그 약을 끊을 수 없다. 그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그가 가진 병으로 인해 1년 안에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점점 약에 의지하기 시작한다. 약의 복용-과대망상 작용의 증가-과대망상 작용으로 약을 더욱 복용-그로 인해 더욱 심화되는 과대망상의 악순환. 그는 이 악순환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그러나 이 악순환에서 빠져 나오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왜?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가 왜 이런 과대망상에 빠지는지, 이 약을 어느정도나 사용해야 하는지, 아니 정말 그가 정신병이 생긴 것은 이 약 때문인지, 그리고 그가 정말 낫고 있는 것인지. 의사는 고작 약의 복용량을 조절해보자고 말할 뿐이다. 어쩌면 그는 다시 이 악순환에 빠져 들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 악순환 고리의 크기가 문제일 뿐.

한편으로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가 과대망상에 빠진 후 가지게 되는 교육관에 흥미가 생긴다. 잘 못하는 학생들도 너그럽게 용서해주던 인자한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정신에 문제가 생긴 후 아이들을 나약하고 악한 존재로 보기 시작한다. 이는 한편으로 중세적 아동관을 닮았다. 기독교적 원죄 의식을 바탕으로 인간이 악하게 태어난다고 본 중세에는 강한 체벌과 훈육을 중요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 사탄이나 악마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성서의 아브라함의 일화를 인용하며 아들을 죽이려 하는 장면은 꽤나 섬뜩하다.

이 영화에는 이 장면 외에도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욕실에서 깨진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에드의 여러 갈래로 분열된 거울상. 이는 한편으로는 분열되기 시작하는 그의 머리속과 앞으로의 그의 삶이 갈래갈래 조각날 것이라는 암시를 하는 듯 하다. 또 아들에게 수학 문제를 내며 의자 뒤에서 손을 짚고 바라보는 모습은 어떤가. 앞에 놓여진 전등으로 인해 그의 그림자는 벽 면에 커다랗게 비친다. 이는 왠지 사탄이나 악마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가 그토록 아들에게서 멀리 떼놓으려고 했던 사탄은 그의 속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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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영화는 오래된 영화이지만, 생생한 질문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정신병이란, 혹은 과대망상이란 무엇인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를 정신병, 과대망상으로 보아야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그렇다. 미국정신의학회가 발행하는 DSM(정신장애의 진단과 통계 매뉴얼)이 개정될 때마다 정신장애의 개념은 한 없이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급기야는 '일상적인 행동의 질병화'라는 수준까지 왔는데, 예를 들어 '숙면을 취할 수 없는 것'은 "우울성 장애"이고,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망상성 인격장애"이며, '근심하는 것'은 "전반성 불안장애"라는 식이다(다치바나 다카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에서). 이 영화에서도 에드가 코티존을 복용하던 초반, 갑자기 활달해하며 아내와 아이들을 아주 비싼 옷가게에 데려가 옷을 사주는 장면이 나온다. 아내는 조금 불안해하지만, 또 행복해하기도 한다. 이것이 그의 과대망상의 시작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쩌면 이런 약간의 과대망상은 삶을 행복하게 느끼게 해주고, 미래에의 희망을 가지게 하는 효과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물론 반대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조금 불안해하고, 반대로 그 조금의 불안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 이것은 현대인들의 특질이다. 어쩌면 이 사회는 조금의 과대망상이 결합되어 이루어져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더욱 큰 과대망상의 시작인가, 아닌가. 그것은 앞으로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 2009년 2월. 서울아트시네마.
 

p.s. 할리우드 여배우는 옛날 여배우들이 훨씬 나은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에드의 아내로 나오는 바바라 러쉬(Barbara Rush). 출처는 (nn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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