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감과 부채감

The Book | 2016.04.18 01:32 | Posted by 맥거핀.
천국의 문 - 8점
김경욱 외 지음/문학사상사

 

 

죽음들이 떠돈다. 일단 수록된 거의 모든 작품들이 직접적으로 어떤 죽음들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대상 수상작인 김경욱의 <천국의 문>은 임종을 앞둔 아버지를 돌보는 여자의 이야기이고,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은 미래에 예정된 죽음을 보는 남자가 나오며,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은 사고로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여행기(이것을 '여행기'라고 해도 될까?)이다. 그 뿐인가. 정찬의 <등불>은 "그가 여객선 사고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문경새재에서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며, 김탁환의 <앵두의 시간>은 "치숙痴叔은 쓰는 인간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의 첫머리를 연다. 이 "...이었다"라는 과거형. 그러니까 소설은 이제 그런 인간'이었던' 치숙의 부재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이 소설들이 어떤 죽음들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들이 떠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다. 나는 이상하게도 이야기되고 있는 죽음들이 아니라, 이야기되지 않고 이미 부재하고 있는 것들을 통해 죽음을 들여다보고 싶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되지 않고 있는 것, 내 머리 속이 만들어낸 이상한 상상, 그러니까 그것은 아마도 오독(誤讀)일텐데, 그들을 통해서 말이다. 그 오독의 질문들 몇 가지를 해보자. 김경욱의 <천국의 문>을 가장 단순하게 이해하는 방법은 아마 다음의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그 남자, 즉 여자가 병원에서 만난 사내는 과연 실재하는 인물일까. 아버지를 여자에게서 데려간 사내, 여자에게 위안을 주고, 영혼과 천국의 문을 이야기하는 사내, 그는 어쩌면 여자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 다시 말해서 여자가 만들어낸 어떤 유령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곧이어 등장하는 다른 유령, 김이설의 <빈집>에 등장하는 수정. 소설 속에서 수정이 원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완전한 새 아파트에 방해되지 않는 하나의 유령이 되는 것. 소설은 다음의 문장들로 끝난다. "시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대로 멈춘 것 같았다. 수정은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소파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새 아파트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빈방으로 들어갔다. (p.133)"

 

유령들의 향연은 계속된다.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은 유령들의 여행기이다. 유럽을 여행하던 부부는 한 식당에서 화성에 당도한 우주선에 대한 기사를 본다. 이 대화는 이렇게 끝난다. "미국이 간 거지. 아무도 없어, 저기엔. 무인無人이었으니까. 저기 갈 수 있는 사람은 지금도 없어. (p.295)" 이 비유는 중의적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은 아무도 없는 곳,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곳에 여행을 간 부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곳에 간 이들, 그들이 유령이 아니면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은 보다 복잡하다. 나의 아이를 구해 준, 미래를 보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해진 미래를 사는 남자는 정말 아직도 건너편 빌라 202호 살짝 열어진 창문이 있는 방에 살고 있을까. 왜 나는 "자꾸만 지금 이 자리에 서서 건너편 빌라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 걸 보고 나서야 안심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며 "길을 건너 계단을 오르고, 초인종을 누른 다음 기다리면 되"는 "그 간단한 일을 할 수가 없"는가. 어쩌면 그가 거기에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정해진 미래를 사는 남자라는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 부채감에 못이기는 동화작가 '나'가 만들어낸 환상의 유령 이야기는 아닐까. 아니, 조금 더 오독의 늪으로 빠져 보자면, 이 '동화작가 나'는 존재하고 있는 인물일까.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이미 죽은 이(소설의 초반에 등장하는 그의 꿈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 즉 유령의 목소리가 아닐까.  

 

그렇게 유령들, 아니 갈 곳을 잃은 영혼들은 떠돈다. 왜 이 소설들에서는 이렇게도 영혼이 떠돌고 있는 것일까. 그것에 답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상문학상은 "당해년도 1월부터 12월 말 사이에 발표된 작품을 모두 심사와 수상의 대상에 포함"하며, 그러므로 이 작품집에 실린 2015년에 쓰인 소설들은 대체로 가족을 잃은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우리는 그 소설들이 쓰여지기 얼마 전에 일어난 사고(아니 사건이라고 하자)를 모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찬의 <등불>은 위의 첫 문장에서 보여지듯이 세월호 사건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에서도 이런 언급이 등장한다. "많은 아이들이 죽는다고만 말해두죠. 이런 나라에서 계속 터질 법한, 그렇게 사람들이 말하는, 하지만 정말로 또 터질 거라고 믿고 싶어 하지는 않는 그런 일이, 그래요, 계속 터지는 겁니다. 지금부터 몇십 년 후에도요.(p.250)" 그리고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에서 부부는 아이를 물에 빠지는 사고로 잃는다.) 그러니 그 수많은 영혼들이 계속 이 소설들에는 등장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혹은 가까운 이들을 잃은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갈 곳이 없는 영혼이 된 채로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사건을 같이 지켜본 많은 이들은 그들의 아픔과 고통과 분노와 절규를 바라보며, 그들의 영혼을, 그리고 운이 좋았다면 자신 한구석에 숨어 있는 영혼의 존재도 살짝 들여다보지 않았겠는가.

 

아니, 나는 어떤 애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행스러웠던 사실은 이 소설들이 단지 상처의 확인과 애도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김경욱의 <천국의 문>은 여자가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라는 오래전 시구를 떠올린 다음, 경찰서로 전화를 거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짓는다. 김탁환의 <앵두의 시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치숙의 모습을 보여주며,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에서는 기억으로 겨우 유지되는 선한 마음의 부채감, 그 위태로움을 느끼는 바보스러운 기우들을 애써 믿으며, 이야기가 끝난다.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에서도 그 마지막에는 남자의 외침이 있다. 아이 로스트...... 노, 노, 미스드......로스트......즉 잃어버렸다는 사실 그것을 기억하는 한 그에게는 아직도 모종의 희망이 있다. 그리고 정찬의 <등불>의 마지막도 있다.

 

달빛이 한층 밝아지고 있었다. 달 주위에 엷게 끼어 있던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트럭에 올랐다. 시계를 보았다. 네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진도에 도착하면 아침이 될 것이다. 그 시각에 꽃을 살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백합 다발을 가득 안고 팽목항으로 가고 싶었다. 시동을 걸었다. 길이 떠올랐다. 처음 가는 길이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길이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길에서였다. 처음 가는 길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 가슴이 설렜다. 길 너머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손은 빛처럼 희었다. (p.283)

 

빛처럼 흰 손을 가진 이가 이끄는 길. 그 길은 그녀를 만나는 길이면서, 동시에 '처음 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는 아마도 그녀에게 '죽음을 맡'길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애도하며, 이제부터 가보지 못한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의 이 결말은 전혀 반대되는 지점으로 읽힐 수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읽는가가 아마도 이 소설의 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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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지는 조금 되었는데, 어제 세월호 사건을 다룬 한 다큐 프로그램을 본 후 다시 읽고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프로그램이 끝난 후 TV를 끄고 조금은 멍한 상태에서 다시 읽었다. 그렇게 읽다보니 이상하게도 소설 속의 거의 모든 문장들이 그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의미심장해졌다. (김이설의 <빈집>을 읽으며, 부모들이 기억하기 위해 남겨둔, 아이들이 없는 그 빈방을 떠올리는 식이다.) 그 다큐에서 무엇보다도 계속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아이들이 남겨준 소중한 영상들이다. 아이들이 남겨준 소중한 메시지가 사건이 감추고 있는 것들에 조금씩 다가가게 해주는 열쇠가 된다는 면에서도 그러하지만, 그것은 우리 마음 속의 부채감, 그러니까 윤이형 식대로 표현하자면 "막 쪄낸 감자처럼 포슬포슬하고 따스한 이 현실이라는 것이 너무 눈물겹고, 우리를 제외한 세상 전체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부채감"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 영상들은 그 부채감을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것을 기억하고 무엇인가를 하라고 말이다. 그 무엇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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