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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에 맞서는 혐오

The Book | 2016. 1. 10. 17:03 | Posted by 맥거핀.

 

댓글부대 - 4점
장강명 지음/은행나무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장강명 작가의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책들(<한국이 싫어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댓글부대>)에서는 뭔가 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을 작가가 구사하는 일종의 전략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것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대화체나 구어체를 적극 활용하는 것, 그리고 그에 더 나아가 소설 전체를 누군가가 말하는 구어체의 진술로 구성하는 것(<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을 떠난 계나라는 인물의 편지형식이며,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도 여자의 구어체 진술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며, <댓글부대>의 한 축은 찻탓캇과 기자의 인터뷰 녹취록을 그대로 수록하는 형식을 취한다.), 혹은 되도록 내용을 짤막히 분절시키면서 동시에 전체 내용을 줄이는 것(<한국이 싫어서> 204쪽,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188쪽, <댓글부대> 247쪽) 등이다. 다시 말해서, 결국 이 전략들은 한 가지 목표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목표란 (작가 본인도 인터뷰 등에서 밝히고 있듯이) 어떻게든 읽게 만든다,는 것이고 그 전략은 실제로 어느 정도 먹혀들어가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니, 나는 ('전략'이라는 냉소적인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단지 비판을 하기 위해서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바꿔 말하면 (사실 다른 작가들이 번번이 실패하고 있는) '일종의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단지 이런 형식적인 면 때문에 장강명의 소설이 많이 읽히고 있다고 말하는 것 또한 부당한 말이 될 것이다. 

 

<댓글부대>는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재미있었다. 그 재미는 소설의 한 축, 그러니까 팀-알렙의 멤버들이 '합포회'라는 어떤 비밀조직의 지시를 받고 벌이는 온라인 교란 작전들(이렇게 뭉뚱그려서 표현하기에는 그보다 더 복잡하지만, 편의상)의 생생함에서 나온다. 그들이 벌이는 교란 작전들은 실제 우리가 온라인에서 보고 있는 여러 행태들과 시종일관 교차하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이면에는 이런 것들이 있으리라는, 그 배후에는 권력과 결탁된(혹은 권력 그 자체인) 어떤 거대한 조직이 꾸미는 음모가 있으리라는 상상을 익히 하게 만든다. 그것이 실제이건 아니건, 소설의 핵심 중에 하나는 우리 상상력의 지표를 확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온라인 교란 작전이 벌이는 상상력의 교란이 즐겁지 않을 이유는 없다. 다만 나는 그것이 소설의 나머지 한축과 결합되었을 때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그 결합이 작가의 미숙이건, 혹은 고의이건, 나는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어떤 이상함을 느꼈고, 그것을 여기에 짧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팀-알렙의 멤버인 찻탓캇과 기자가 벌이는 인터뷰 녹취록이 보여주는, 온라인 교란 작전들의 전말이 소설의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그런 팀-알렙과 '합포회'라는 비밀 조직과의 오프라인 커넥션이다. 그리고 이 내용의 상당수는 그들이 각종 유흥업소에서 벌이는 향락에 대한 세밀한 묘사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예를 들어 움베르트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와 비슷한 전략을 취한다.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가 19세기 유럽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위조 문서를 만들며 살아가는 시모니니(어쩌면 이것을 그 당시의 '온라인 교란 작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의 행위를 묘사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탐욕스러운 행동이나 그의 식탐에 대한 묘사를 병행하며 그에 대한 독자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면, 이 소설 <댓글부대>는 온라인 교란 작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동시에 그 교란 작전을 벌이는 주체들이 벌이는 향락을 묘사하며 그들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식이다. (물론 이 묘사가 적절한가, 즉 그 목적에 적절히 부합하고 있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들은 시모니니나 팀-알렙이 구사하는 바로 그 전략을 역이용한다. 시모니니는 소설의 서두에서 위조문서를 만들 때 가장 좋은 전략 중의 하나는 그 문서를 읽게 되는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혐오감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에코는 교묘하게 바로 그렇게 말하는 시모니니에 대한 혐오감을 읽는 이들이 가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댓글부대>에서 팀-알렙이 구사하는 주요한 전략 중의 하나는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혐오와 분노들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다. (이 책 3장의 제목은 (작가가 괴벨스의 어록이라고 떠돌아 다니는 문서에서 따왔다는)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이다.)  

 

나는 사실 이것이 조금 미심쩍다. 바로 소설에서 비판하고 있는 그 전략을 다시 자신의 소설에서 비슷하게 구사하는 것 말이다. 에코의 소설과 이 소설이 다른 것은, 에코의 소설은 그것이 단지 독자의 혐오감을 북돋우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 전체를 일종의 위조 문서처럼 보이게 한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에코는 시모니니가 만들어내는 역사를 기술하며, 동시에 그것을 거짓으로 보이게 하여, 독자들 스스로 그럼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동시에 (에코의 많은 소설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을 에코가 소설로 구사하는 일종의 게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강명 작가의 이 소설은 다르다. 그들이 벌이는 향락이라는 나머지 한 축에는 그런 장치가 없으며, 이 축에는 결국 읽는 이의 어떤 혐오,(혹은 그것이 잘못 작동했다면 어떤 동경)만이 남는다. 이런 모순화법은 사실 조금 이상하다. (거칠게 말한다면) 혐오가 잘못된 것이라 말하면서, 은연중에 누군가를 혐오하게 만드는 것 말이다. (비슷한 것으로 누군가의 독설을 비판하면서 독설적으로 말하는 것, 또는 누군가의 거짓을 비판하면서 그에 대한 거짓정보를 흘리는 것 등등이 있을 수 있다.)

 

(영화 <내부자들>을 보지 않으신 분들은 여기에서 건너 뛰시는 것이 좋겠다. 큰 스포가 들어있으니.) 다른 경우를 여기에서 같이 이야기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다보니 영화 <내부자들>을 일반판과 감독판 모두 극장에서 보게 되었는데, 일반판이든 극장판이든 동일하게 구성된 이 영화의 구조가 있다. 그것은 영화에서 안상구(이병헌)의 기자회견 장면을 영화의 시작부분에 배치하고, 다시 플래시백되어 이야기가 시작한다는 점인데, 사실 이것은 조금 이상하다. 왜냐하면 굳이 이 장면이 앞에 나온 후 다시 과거로 돌아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굳이 이렇게 한 이유가 있을까?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나는 그것이 결국 이 장면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는데, 다시 말해서 그것을 뒤의 우장훈 검사(조승우)의 기자회견과 대비시켜 그 장면의 함의를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다.

 

이 장면의 대비는 결국 말하는 이의 차이에 있다. 기자회견이 벌어지는 풍경도 같고, 말하는 이가 주장하는 내용도 같지만, 여론은 전혀 다르게 형성된다. 다시 말해서 대중은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믿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나온 거대신문사 이강희 주간의 말대로 "누가 깡패새끼 말을 믿겠나"는 것과 일맥상통하며, 동시에 "대중은 개돼지입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대사, 혹은 그가 우장훈 검사 앞에서 벌이는 이상한 논리의 언변과도 통한다. 즉 같은 사건이고, 같은 팩트라도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서 "어떠어떠하다고 보기 힘들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어떠어떠하다고 보여진다" 혹은 "매우 보여진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대중이라는 존재가 매우 휘두르기 쉬운 존재라고, 혹은 개돼지라고 믿고 있는 그의 생각과 통한다. (감독판에서는 이것으로 모자랐는지 뒤에 이강희의 이런 논리를 다시 에필로그 식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영화 <내부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는 대중, 그러니까 바로 우리들에게 계속 반복하여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들은 바보라고. 그러니 저런 인물들이 거대신문사 논설주간이 되어 여론을 조작하고, 바로 저런 인물이 대통령후보가 되거나 대통령이 되는 거라고 말이다. 안상구의 기자회견을 앞으로 빼서 우장훈 검사의 기자회견과 대비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여기에서 반박을 할지도 모른다. 우장훈 검사의 기자회견은 별장 성접대 동영상이라는 확실한 물증이 있지 않는가,하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것이 조금 이상해보인다. 그렇게 성접대 동영상을 무차별적으로 대중들에게 뿌려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사실 대중을 바보로 보는 것과 그렇게 멀리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동영상 하나만으로 지금까지의 거짓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 그것은 거대언론의 어떤 여론몰이와 그렇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는 그 내용의 진실여부와 별개로 그 즉각적인 반응과 태세전환이 한편으로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여기에 더 나간다면 그 영상에서 접대여성들의 얼굴도 모자이크하지 않는 무신경함과 조상무를 처리하는 방식, 그리고 이 영화가 가진 결말의 어떤 미심쩍음 같은 것도 말할 수 있겠지만, 뭐 이 글은 <내부자들> 리뷰가 아니니까.)

 

지금까지의 어떤 의심들을 이런 질문으로 바꿔보자. <내부자들>은 바로 당신들,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대중들이 바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그 바보를 다시 역이용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타개한다. 과연 이 때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이렇게, 그러니까 나는 바보니까 앞으로는 여론에 휘둘리지 말아야겠다,는 식으로 작동하게 될까. 그보다는 어쩌면 조금 다른 식으로, 그러니까 똑똑한 나는 그렇지 않지만, 바보 대중들 때문에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되어가고 있다는 어떤 분노에 가닿아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어쩌면 이 영화는 당신들이 바로 그 대중이라고 말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영화를 보는 똑똑한 대중들은 그들과 자신을 선을 긋는다. 아니, 나는 아냐, 그런 바보가 아니야. 그리고 어쩌면 영화를 만드는 그들도 사실은 우리들이 선을 긋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네가 바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너는 아니지만 바보는 어딘가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당연히 더 쉽게 먹힌다.)

 

나는 장강명 작가의 <댓글부대>에서도 비슷한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온라인 상에 존재하는 혐오를 증폭시키는 이들에게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장강명의 이 책은 책 말미의 '제주4.3평화문학상 심사평'대로 "폭력을 드러냄으로써 궁극적으로 평화를 소망하게"할 수 있을까. 아니면 혹시 어쩌면 다른 방식의 다른 혐오들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덧.

정의를 말하는 영화들, 혹은 정의를 말하는 문학들이 득세하는 것은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그것은 현실이 그만큼 정의롭지 않다는 것의 반증일테니 말이다. 예를 들어 작년에 나온 영화만 해도, 정의를 이야기하는 영화들은 수없이 많았다. 영화에 나온 수없이 많은 괴물들. 그 괴물들은 차례로 영화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현실의 괴물들은 점점 늘어간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괴물이 쓰러지는 것을 통쾌하게 바라보는 우리들은 어쩌면 괴물에 맞서기 위해서 점점 괴물에 가까이 가고 있지는 않을까. 괴물이 되기를 은연 중에 소망하면서.  

 

혐오와 동경은 늘 가까이에 있으며, 그 대상은 종종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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