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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본 것, 보고 있는 것

Ending Credit | 2015. 11. 12. 21:17 | Posted by 맥거핀.

  

(<사도>의 내용, <종이 달>의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 이준익, 2015

 

영화 <사도>에는 몇 가지의 죽음이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우리는 광기의 눈빛을 하고 사납게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사도세자(유아인)를 만난다. 그는 이제 칼을 빼들고 아버지 영조(송강호)를 죽이러 가려는 참이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이 죽음은 시도되었을 뿐 실행되지 않았지만, 다른 죽음도 있다. 영화 상에서 좋지 않았던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급격히 파탄의 국면으로 들어서는 것은 대왕대비 인원왕후(김해숙)의 죽음을 둘러싼 언쟁에서 촉발되었다. 물론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죽음이 있다. 표면상으로 볼 때 이 영화 <사도>는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어가는 8일을 다룬다. 중간중간에 거대한 플래시백들이 자리잡고 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칼을 빼들고 영조를 찾아간 사도세자와 그런 그를 뒤주에 가두는 영조로부터 시작하여, 결국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니까 <사도>에서는 하나의 느린 죽음이 진행되는 셈이다.

 

느린 죽음? 느리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뒤주 속에서 서서히 말라가며 죽어가는 사도세자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영화상으로 볼 때('영화상으로'라는 표현을 자꾸 쓰는 것은, 나는 이 영화의 해석이 실제 사료와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 혹은 이 영화의 해석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타당한가의 문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이미 그 전부터 죽어가고 있거나, 거의 죽어 있었던 것처럼 보이니까. 영화 속에는 수많은 이미지들이 있지만, 영화를 보면서 가장 흥미를 끌었던 것은, 혹은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아 떠도는 것은 '나무아미타불'이 반복되는 옥추경이 울려퍼지는 무덤 속에서 관에 들어가 누워있는 사도세자가 벌이는 기행이었다. 그는 왜 하필이면 상복을 입고 무덤 속 관에 누워있는 것일까. 이것을 단지 죽은 할머니에게 바치는 독경이라고 보기에는 그 형상이 너무도 기괴하다. 혹시 어쩌면 그는 스스로를 이미 죽은 존재이거나, 혹은 죽어가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뒤주 속에서 사도세자는 말라 죽어가고 있었지만, 영화의 플래시백들 속에서 영조는 사도세자를 (대리청정과 반복되는 선위 파동으로) 그 이전부터 거의 말라 죽도록 괴롭히는 것처럼도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영조를 죽이려 했던 것일까? 영화 <사도>는 올해 몇 차례 등장했던 살부 서사의 계보에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가깝기로는 <암살>의 살부. <암살>의 자식, 그러니까 안옥윤(전지현)은 아버지를 죽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 (그가 친일파 아버지를 죽이는 데 실패했더라면, 그는 그의 쌍둥이 자매와 마찬가지로 가차없이 아버지에 의해 제거되었을 것이다.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은 친일파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지만 그 대신에 그것으로부터의 도피(와 그로인한 죽음)를 택한다.) 반면 (아주 거칠게 말한다면), <사도>의 사도세자는 아버지를 죽이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죽음을 맞는다. 아니면 조금 다른 살부 서사들도 있다. 영화 <협녀, 칼의 기억>의 홍이(김고은)나 <차이나타운>의 일영(김고은)이나 그들의 아버지를 향해(<차이나타운>에서 일영이 맞서게 되는 것은 엄마(김혜수)이지만, 사실 여기서 김혜수의 외양에서 감지할 수 있듯, 그녀는 엄마라기보다는 아빠에 가까운 것 같다.) 거의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죽음을 겨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이 기이한 살부 스토리들은 왜 올해 극장가를 떠돌고 있는 것일까? 혹시 현실에서 어떻게든 아버지를 숭앙하려 애쓰는 이들에 대한 반감이 여기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를 고쳐쓰면서까지 그들 정신적 아버지들이 벌인 추악한 일들을 가리려 애쓰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작은 가운데 손가락은 물론 아니겠지.  

 

아무튼 보지 않은 영화나 잘모르는 정치에 대한 얘기는 이쯤 하고 다시 <사도>로 돌아오면, 아버지를 죽이러 가며 기세등등하게 시작했던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묘한 방식으로 봉합된다. 처음 영조와 사도세자라는 부자관계에서 출발했던 영화는 점차 다른 부자관계로 중심점이 이동하는데, 그것은 사도세자와 정조라는 부자관계이다. 영화의 중반부까지 뒤주에 들어가서도 어떻게든 죽지않으려 날뛰는 사도세자는 어느 순간부터 점차 죽음을 납득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 순간은 뒤주를 깨고 나온 사도세자가 다시 뒤주에 갇히며, 그의 장인 홍봉한이 밀어넣어준 부채를 보는 시점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부채는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태어나던 날 사도세자가 기쁨에 겨워 그린 그림이 들어있는 부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세자는 이 시점부터 그가 왕인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세자가 아니라(즉 역모를 일으킨 세자가 아니라), 그저 미쳐 날뛰다가 죽은 세자가 되어야 자신의 아들이 살 수 있다는 논리(그의 장인이 이 부채를 밀어넣어 주는 것도 아마도 그것을 납득하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에 따르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영화는 막바지에 이르러 뒤주 속에서 죽은 세자에게 전하는 영조의 대사로 재확인한다.

 

이것은 사실 조금 이상하다. 영화는 초반부에는 영조를 이상한 성격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며 사도세자에게 중심을 맞춰 놓는다. 즉 <사도>의 초반부는 자식을 괴롭히는(혹은 친일을 하는) 이상한 아버지와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자식들의 전형적인 스토리이다. 그런데 중반부에 이르러 그 고통받는 자식은 이제 아버지가 되어 자신의 자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려 하고, 그 논리를 그 괴롭히던 아버지를 통해 재확인한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중심점은 영화 초반부에는 아들 사도세자에게 놓여져있었지만, 두 개의 부자관계가 교차되면서 아버지들에게 중심점이 옮아간다. 자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아버지(사도세자)에 다른 아버지(영조)를 겹쳐내면서, 마치 영조도 자식을 위해 무엇인가를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것은 명백한 착시일까, 아닐까. 만약 착시라면, 이 착시는 의도치 않게 빚어낸 착시일까, 아니면 고도의 계산이 가미된 착시일까. 단지 무의도라고 보기에는 이 논리가 지금의 현실의 논리들과 비슷하게 닮아있어 어떤 찜찜함이 계속 남는다.

 

 

 

종이 달, 요시다 다이하치, 2015

      

첫 영화를 애초 생각보다 너무 길게 썼으니, 두 번째부터는 짧게짧게 써야겠다. 마지막에 이르러 뭔가 묘하게 방향을 트는 것처럼 보이던 영화는 이준익의 <사도>만이 아니다. 요시다 다이하치의 <종이 달>의 여주인공 리카(미야자와 리에)에게는 거의 정해진 결말만이 남은 것처럼 보인다. 점점 부풀어만 가던 횡령은 전모가 드러났고, 남자와의 관계는 끝났으며, 이제 그녀에게는 정해진 대가를 치르는 것만이 남았다. 동료 여직원 스미의 말대로 이제 그녀가 할 일은 '가야할 곳에 가는 것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다른 어떠한 것이 여기에 끼어든다. 일단 형식적으로는 플래시백의 등장이다. 이 영화 <종이 달>은 리카의 과거, 그러니까 리카가 수녀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을 비추면서 시작하지만, 이 과거는 아주 짧게 등장한 후 곧 이야기가 1994년, 즉 리카가 계약직 은행원이 되어 횡령을 처음 시작하던 때로 점핑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 선형적으로 진행된다. 영화는 정해진 시간의 선을 따라 굴러가고, 그 굴러감에 따라 리카의 횡령 규모도 점차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런데 리카의 횡령이 밝혀지는 이 때 다시 영화는 리카가 교복을 입고 있던 과거의 시점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마치 이 과거가 현재의 어떤 의문들에 대해 답을 주려는 듯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이 과거씬은 왜 지금 이 시점에서야 여기에 등장하는 것일까. 단지 현재의 어떤 의문들, 즉 리카가 왜 횡령을 저질렀는가에 해답을 주기 위해 여기에 등장했을까. 기부를 하기 위해 아버지의 돈을 훔치던 소녀의 도벽이 더 큰 것으로 발전되었을 뿐이라는 식의 해답을 주기 위해 여기에 그 플래시백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영화의 핵심, 즉 '종이 달'이 상징하는 어떤 가짜의 세계에 대한 어렴풋한 실체라도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플래시백은 그녀의 가짜 세계에 대한 인식, 손가락으로 달을 지워낼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어떻게 안에서 만들어졌는지 설명해주지 못한다.

   

(어떤 것의 연원을 밝히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멈추기 위한 시도의 하나가 아닐까. 이 플래시백이 현재의 가짜 세계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그 플래시백은 해답과는 거리가 멀다. 리카의 '종이 달', 즉 가짜세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 플래시백이 등장한 후, 영화는 기어이 가장 가짜같은 장면을 등장시킨다. 창문을 깨고 도망가는 리카. 이것이 가능한가, 아닌가는 차치하더라도, 이것은 이 가짜 세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녀의 도피는 언제까지라도 가능할까.)

 

다만 그 플래시백들은 다른 것을 말한다. 아버지의 돈을 훔쳐서 기부하는 것, 그것이 나쁜가요. 리카는 되묻는다. 어쩌면 리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그 돈 몇 푼 없어졌다고, 재해를 맞은 외국의 소년보다 더 나쁜 상황에 이르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아버지는 결과적으로 기부를 하게 된 셈이니 좋은 것이고, 외국의 소년은 도움을 받아 살아갈 수 있으니 좋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생각에 화답하듯이 이상한 장면들을 붙인다. (횡령의 피해자이지만) 카메라를 들고 관심을 보이는 노인, 여자친구와 즐겁게 걷고 있는 남자(리카의 불륜상대), 여전히 활달하게 잘 지내는 남편, 꿈꾸는 듯한 눈빛의 스미, 그리고 영화 속 어느 때보다 힘차게 달리고 있는 리카. 모두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홍상수, 2015

 

언뜻 보면, 홍상수가 그려왔던 세계의 반복인 것처럼 보인다. 상황을 비슷하게 반복시키고, 같은 대사를 다시 하거나, 같은 공간에 비슷한 인물을 넣어놓음으로서 반복이 만들어내는 어떤 화음을 보고자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과거의 영화들과 이 영화는 몇몇 차이가 있는데,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이 어떤 영화적인 내부장치로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인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던 홍상수의 과거 영화들을 짚어보자. <극장전>은 영화 속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형식이었다. <하하하>는 두 인물이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을 취했다. <옥희의 영화>는 한 영화를 여러 개의 장으로 분절했다. <북촌방향>은 시간을 흩뜨려 버렸다. <다른 나라에서>는 하나의 시나리오를 축으로 해서 이야기를 고쳐쓰는 작업이었다. 즉 여기에는 어떤 장치들이 숨어 있다. 영화 속 영화, 대화, 이야기, 시간의 뒤섞음, 시나리오의 퇴고 등등. 그 외에도 홍상수는 꿈과 같은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장치를 쓰며 이야기를 반복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이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이런 외부적인 장치가 없다. 그저 한 영화가 거의 동일하게 다시 상영될 뿐이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는 두 개의 별개의 영화가 나란히 상영되는 것 뿐이다.(<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한 영화가 끝난 후 다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제목이 등장하면서 다시 영화가 시작된다.) 즉 관객이 보는 것은 그저 두 편의 나란한 영화이다. 제목은 같고, 등장인물도 같고, 내용도 거의 같으나 미세한 몇몇 가지가 달라졌을 뿐인 영화. 이것은 어떤 영화적 내부 장치, 혹은 형식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저 한 영화를 두 번 트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그 전의 영화들과 달리 이것이 가지는 효과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은 조금 더 '차이' 그 자체에 주목하게 만드는 것 같다. 즉 홍상수의 예전 영화들에서는 어떠한 것이 반복된다는 징후가 없기 때문에 관객들은 갑자기 반복이 일어날 때 반복 그 자체의 양상에 주목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 관객이 대체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반복되고 있다'는 그 사실, 그 자체이다. 그러나 한 영화가 다시 반복되는 것은 다르다. 한 영화를 두 번째 볼 때, 이야기 그 자체에 주목하는가? 대부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미 다 알고 어떠한 인물이 어떻게 행동할지 이미 다 알기 때문에 그보다는 주목하지 않았던 배경이나 미세한 뉘앙스, 어떤 숨겨진 의미에 그만큼 더 주목하게 된다. 홍상수의 이 영화도 비슷한 것을 노린 것은 아닐까. 즉 두 번째 반복되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볼 때 우리는 함춘수(정재영)가 이미 어떠한 행동을 하고 누구를 만나게 될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즉 큰 줄거리의 사건은 반복되기 때문에) 반복의 양상보다는 그 반복이 야기하는 차이에 훨씬 더 주목하게 된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복 그 자체에 현혹되지 않고 반복이 야기하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것은 어쩌면 영화 속 인물이 말하는, 표면에 숨겨진 것들을 들여다보는, 그럼으로써 두려움을 이겨내는 길은 아닐까. 어떠한 것이든 표면은 대체로 너무도 심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표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늘 놓친다. 표면은 늘 같으니까, 같은 일들이 반복되니까. 홍상수는 억지로 같은 표면을 두 번 보게 만든다. 그래서 그 표면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차이를 어떻게든 찾아내게 만든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그럴까? 어쩌면 지금은틀리고그때는맞을지도 모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송곳, 김석윤, 2015

 

<어셈블리> 이후로 드라마를 보지 않았는데, 1회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 드라마가 있다. 많은 분들이 반농담삼아 이야기한대로 이 드라마에는 송곳 같은 대사가 많이 나오지만, 나에게 이 드라마에서 가장 송곳같이 파고들었던 대사는 노동상담소 소장 구고신(안내상)이 했던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한편으로 구고신이 늘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하는 이 대사와도 통한다. "당신들은 다를 것 같아?" 드라마 속 뒷부분을 봐야 더 확실해지겠지만, 구고신이 그 '시시함'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그것을 몸으로 체득했던 것이 아닐까. 드라마 속에서 잠깐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과거 고문을 받았고, 아마도 누군가의 이름을 실토한 다음 겨우 풀려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기 위해 누군가의 이름을 털어 놓는 시시한 인간. 이 '시시함'을 깨닫기 위해 그가 바쳐야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 시시함은 결코 가벼운 것이라 할 수 없다. 아니, 꼭 고문이 아니더라도, 그가 수많은 노동운동을 이끌면서 얼마나 시시한 꼴을 많이 봤을 것인가, 살기 위해 배신하는, 혹은 겁내면서 주저하는 시시한 인간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으며, 시시한 일들을 얼마나 많이 벌였을 것인가.

 

그리고 그가 말한대로 거대한 악처럼 보이는 그들도, 사실 거의 대부분 시시한 인간들의 집합이다. 거의 1회에는 절대악처럼 등장했던 정부장(김희원)도 2, 3회에 이르면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중간관리자에 불과할 뿐임을 드라마는 보여준다. 그는 또 얼마나 조인트가 까였으며, 누군가에게 굽실댔을까. 그렇다면 그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사상무(정원중)가 절대악일까, 아니면 그도 시시한 강자일까. 적어도 구고신의 눈에는 그들 모두는 시시한 강자이다. 살기 위해 패악질하는 시시한 녀석들. 그래서 어쩌면 구고신은 노동현장에서 사람들을 밀어내는 용역들에게도 노동상담소 명함을 던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용역질하다가 돈 못받고 떼이면 찾아오라고 말이다.

 

<송곳>은 한편으로 그러한 것을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끄덕거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과거 이수인(지현우)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부장. 그녀는 이수인이 곤경을 받고 있을 때 과거 서사와 함께 뜬금없이 등장해서 그를 도와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시청자에게 갖게 하지만, 그녀는 아무 도움도 없이 다만 실없는 응원을 던지고 가버릴 뿐이다. 그들 대다수는 그런 인간들이니까. 그저 악한것이 아니라 다만 시시할 뿐이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도 노동하는 대상이고, 또 서는 위치가 바뀌면 시시한 강자들과 싸워야 하는 시시한 약자가 되는 것이니까.

 

그렇다. 그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시시한 약자들과 시시한 강자들의 문제이다. 악은 선이 될 수 없지만, 시시한 강자는 시시한 약자가 될 수 있다. 그들 모두는 시시하니까. 그것은 절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아주 희망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악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시시한 이들이 시시하지 않게 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 물론 그 전에 선행되어야할 것은 자신이 시시한 인간임을 깨닫는 것이다. 늘 그것이 가장 어렵다. 그래서 구고신의 일침이 늘 필요하다. "당신들은 다를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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