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각자의 놀이터

The Book | 2015.07.26 23:12 | Posted by 맥거핀.

네메시스 - 10점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문학동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는 작은 이야기이다,라고 첫문장을 쓰려다 멈칫 한다. 작은 이야기인가? 어떤 '규모'나 '배경'이라는 의미에서의 소품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찌는 듯한 더위의 놀이터, 폴리오(척수성 소아마비), 폴리오에 걸리는 아이들, 자신 때문에 아이들이 폴리오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놀이터 감독...기껏해야 한여름 미국 지방소도시의 어느 동네에서 일어난, 몇몇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작은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달라지게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사실 모든 소설의 사건은 그 주인공에게는 결코 '작은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책임과 회피의 문제, 혹은 죄책감과 희생양의 문제, 혹은 신의 무한함과 그에 대비되는 인간의 원초적인 한계(또는 비극)와 관련된 문제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을 결코 작은 이야기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책 뒤편의 뉴욕 타임스의 평에 '매우 잘 만들어진 오 헨리의 이야기 같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나도 언뜻 오 헨리의 이야기들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헨리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작은 이야기인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거의 모든 단편들은 인간 감정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들로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단지 그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대부분 어떤 우화로서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리고 물론 우화가 우화로서의 기능을 하려면 그 이야기 자체에 읽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바로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처럼 말이다.

 

<네메시스>의 공간이 있다. 첵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쇠로 만들어져 언제까지나 닳지 않을 듯한 눈에 띄게 또렷한 얼굴, 언제든지 의지할 수 있는 강인한 청년의 얼굴(p.20)'을 가진 버키 캔터가 감독하고 있던 동네의 놀이터. 모든 것이 불타오르는 듯한 폭염 속에서도 하루 온종일, 이닝에 이닝을 거듭하는 게임을 이어가는 소프트볼을 하는 아이들이 모여놀던 그 놀이터. 한쪽 구석에서는 여남은 명의 여자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줄넘기를 하고, 동네의 '얼간이' 호러스가 나타나, 놀던 아이들이 귀찮음에 못이겨 악수를 해줄 때까지 그 옆을 떠나지 않고 서 있던 그 놀이터. 그것은 아이들이 모여노는 작은 공간일 뿐이지만, 적어도 버키 캔터에게는 그 자신이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는 공간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 하나는 무엇으로부터 그것을 지켜내는가의 문제이다. 필립 로스는 이 '무엇으로부터'의 문제를 초반 흥미롭게 구성한다. 그들이 놀던 놀이터에 어느날 이탈리아 아이들 무리가 찾아온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그들에게 시비를 걸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폴리오를 퍼뜨리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면서 위협적인 자세로 침을 뱉는다. 버키 캔터는 놀이터의 감독관으로서 거의 혼자 힘으로 무리를 제어하고, 그들이 뱉은 침을 신속하게 물과 암모니아로 닦아내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후부터 폴리오는 놀이터의 아이들 사이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는 것, 즉 이탈리아 아이들이나 그들이 뱉은 침은 닦아내면 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폴리오 병균으로부터의 위협은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다른 하나는 그가 '왜' 이 공간에 그렇게 큰 책임을 느끼는가의 문제이다. 캔터는 아이들 사이에 폴리오가 퍼지자, 큰 책임감을 느끼며, 죽은 아이들의 집을 찾아가거나 전화를 하기도 하고, 그들의 장례식장에 가며, 이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 맡은 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닥터 스타인버그나 다른 이들의 말대로 더운 여름날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논다고 해서, 폴리오가 그것으로부터 촉발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탈리아 아이들이 다녀간 것도 물론 마찬가지다. (실제 놀이터가 원인이라면 그것을 임시폐쇄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지만, 당국은 물론 그러지 않는다.) 그것은 막연한 상상이나 두려움에 가깝고, 폴리오가 그 아이들에게 어떻게 침투하였는지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대로 광범위한 역학조사가 실시되지 않는 한 정확하게 밝혀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캔터의 어떤 책임감은 이러한 실제적인 문제(그러니까 놀이터가 폴리오의 온상이라는)와 조금 비껴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을 캔터 개인과 관련된 부분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그가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고 책임감을 가지고 강해질 것을 요구하는 조부모 밑에서 자라난 것에 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친구들과 함께 유럽과 태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싶어했지만, 건강한 신체를 가졌음에도 낮은 시력 때문에 참전하지 못하고 국내에 남아야 했던 그의 이력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여기에 필립 로스의 작가로서의 노회한 능력이 드러나는데, 다시 말해서 버키 캔터의 전쟁터는 친구들이 참전한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이 아니라, 여기 미국 뉴어크 위퀘이크의 작은 놀이터였고, 그의 적은 철모를 쓴 독일군이 아니라 폴리오였다. 이것을 필립 로스는 노련하게 교차하며 구성하는데(내가 이 소설을 영화화하는 영화감독이라면 당연하게도 교차 편집을 적극 활용할 것이다), 그가 소설의 초반에 맞서게 되는 것도 하필이면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이들이며, 그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에서 (본의아니게) 물러났다면 이 폴리오와 싸우는 전쟁에서는 자신의 의지로 물러나며, 전쟁에서 친구를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소년(도널드 캐플로)을 잃고, 이 폴리오와 관련된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러므로 필립 로스의 노회한 세공술에 의해 이 이야기는 단순히 폴리오가 퍼졌던 놀이터 이야기 이상의 것이 된다. 총알이 빗발치는 노르망디 해변과 폴리오가 퍼지는 놀이터, 혹은 그보다 작은 단계로서의 불볕의 더위가 몰아닥치는 폴리오가 퍼지는 놀이터와 상큼한 바람과 시원한 바람이 있는 캠프파이어. 이것은 어떤 단계이자, 혹은 비유(우화)의 공간이며, 소설을 읽는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 있는, 다만 그 형태가 다른 공간이다. 우리들 각자에게도 자신만의 형태가 다른, 감독해야만 하는 놀이터와 그 책임을 벗어나고 도피하여 도착하고 싶은 꿈의 캠프파이어가 있다(노르망디 해변과 미국의 어느 소도시의 놀이터라고 단계를 바꿔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다시 '무엇으로부터'의 책임인가,의 문제로 돌아가는데, 어떤 의미에서 폴리오는 독일군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독일군 철모의 갈고리십자는 눈에 보이지만, 폴리오 바이러스의 갈고리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적일 때, 그것에 대항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폴리오를 퍼뜨리는 이탈리아 아이들, 그들의 침, 아이들이 즐겨먹던 핫도그, 더운 여름날의 놀이터, 병균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더러운 호러스. 혹은 조금 다른 형태도 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이라는 존재이거나 혹은 인디언 정신과 같은 것. 하느님이 폴리오를 만들어내고, 누군가의 기도에 응답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불행을 내린다고 생각하는 캔터의 원망은 어떤 존재에게 책임을 돌린다는 점에서, 설혹 그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앞의 치환들과 묘하게 닮아 있으며, 캠프파이어에서 이루어지는 기묘한 인디언 의식과도 연관된다(이 인디언 의식이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필립 로스의 어떤 비판이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 인디언을 몰살한 미국인들이 그 애국심을 고취하기위해 인디언 의식을 활용한다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캔터의 방식이 있다. 외부가 아닌 내부로 방향을 트는 것.

 

버키 캔터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듯했던 이야기는 말미에 이르러 묘하게 방향을 튼다. 그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보는 또다른 화자가 등장하면서 말이다. 옮긴이의 말대로 이는 작가의 어떤 게임에 대한 제안으로 볼 수도 있다. 캔터의 시각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화자의 시각에 더 무게를 둘 것인가. 나는 필립 로스의 게임에 동참하는 대신, 이 제목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네메시스(Nemesis).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본분을 벗어난 발언과 행동에 대한 신의 노여움과 벌을 의인화한, 흔히 말하는 복수의 여신. 그러나 네메시스는 본래 복수의 여신이 아니었다. 네메시스는 원래 분배의 신이어서 공동체 사회에서 생산물을 사람들에게 고루 분배하던 선한 신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탐욕을 부려 불평등하게 나누게 되자 네메시스의 직분이 달라져 일한 만큼 분배받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재산을 가진 자들에게 복수를 가하는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85196.html 글에서 재인용). 즉 네메시스를 복수의 여신으로 만든 것은 인간들이었고,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희생양을 만들어낸 것도 인간들이었다. 지금 여기에도 네메시스를 복수의 여신으로 만드는 자들은 누구인가.

 

 

덧.

소설을 읽는 내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어 폴 토마스 앤더슨의 지극히 미국적인 영화 말이다. 필립 로스의 묘사는 거의 스크린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지옥불이 쏟아지는 것 같은 위퀘이크의 묘사와 그에 대비되는 스트라우즈버그 캠프에 대한 초반 묘사는 인상적이며, 보지 않았음에도 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The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여된 무엇인가가  (0) 2015.09.17
행복해지든 말든  (0) 2015.08.06
우리 각자의 놀이터  (0) 2015.07.26
기억의 힘  (3) 2015.06.30
그는 무엇을 보는가  (2) 2015.06.24
미래를 위한 시도  (0) 2015.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