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한 적 없는 여자를 생각하는 남자들

The Book | 2014.09.23 18:08 | Posted by 맥거핀.
여자없는남자들무라카미하루키소설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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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조금 특이한 소설집이다. 특이하다는 것은 (국내 출간본에서 나중에 추가한 '사랑하는 잠자'라는 소설을 제외하면) 각각의 소설들이 모두 같은 소재(그리고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인데, 그것은 일단 간단하게 말하면 소설의 주인공들이 모두 말 그대로 '여자 없는 남자'라는 점이다. 즉 소설의 인물들에게는 모두 현재 관계를 가지는 여자가 없다. 이 '관계'라는 것은 육체 관계라고도 혹은 정신적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예스터데이'에 나오는 기타루에게는 어떤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여자친구 구리야 에리카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육체 관계가 없고, 반면 '셰에라자드'에 나오는 하바라와 셰에라자드는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지만, 그들에게는 어떤 정신적인 연관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들에게는 모두 현재 관계를 가지는 여자가 없다. 한편으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현재'라는 말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는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스터데이'에서 기타루와 구리야 에리카의 관계는 이 소설의 시점에서는 이미 과거의 일이며, '셰에라자드'에서 셰에라자드와 하바라의 관계는 현재이지만, 그것이 이제 끝에 이르렀음을 소설은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소설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현재' 여자가 없으나, 그들에게는 과거 어느 순간 여자가 있었고, 그들은 그 여자와 육체적이고도 정신적인 관계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이 소설들의 기묘한 공통점이 드러나는데, 그러한 생각은 어쩌면 그들의 '착각'이거나 '혼자만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들의 주인공 상대역들인 여자들은 과거 그 주인공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남자들과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관계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 소설의 인물들은 과거에는 여자가 있었으나 현재에는 여자가 없는 남자들이며, 그 여자들은 과거에 자신을 만나면서 동시에 다른 남자들도 만났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것은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는데,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없다'라는 말은 '현재'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시점(時點)의 의미를 담은 그 물리성을 의미하는 말로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정신적인 없음, 혹은 아예 존재한적이 없음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어느 순간 그들 곁에 여자가 있던 순간에도 사실상 여자는 그들의 곁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들은 주인공과 육체 관계를 나누는 순간에도 (육체라는 물리적인 실체는 비록 그곳에 있었을지 몰라도) 정신의 어느 부분은 자신과 관계를 나누는 남자들에게 분산되어 있었거나 어쩌면 그곳에 아예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예를 들어 소설 '세예라자드'는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하바라와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는 순간에도 세예라자드의 어떤 부분들은 과거 자신이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가있고, 급기야는 하바라의 육체를 과거의 남자로 대체하여 관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 때 여자와 남자, 하바라와 세예라자드는 한 공간에 있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바라가 과거의 남자로 대체되어 있거나 세예라자드의 육체는 껍데기만 남고 그녀의 어딘가는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질문들이 다른 소설들에서 비슷하게 반복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에게나 '기노'에서 기노에게나 '독립기관'에서 도카이 의사에게. 왜 그녀는 나와 자면서 다른 남자들과 잤을까. 혹은 그녀는 그 때 그곳에 정말 존재하고 있던 것일까.


2.
다시 말해서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어떤 소재를 공유했다,라고 하기보다는 같은 테마를 반복하는 여섯 개의 변주곡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하루키는 능숙한 솜씨를 내보이며 같은 테마를 지루하지 않게 반복한다. 때로는 건조하게, 때로는 단조풍으로, 때로는 미스테리하고 음산한 기운을 담아서 말이다. 나는 이것이 하루키의 일종의 자신감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하루키는 이것을 하나의 소설집으로 묶어서 냈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책에서 같은 테마를 반복한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일종의 자기복제가 될 위험성이 있기도 하지만, 독자에게도 그것이 자칫 지루한 반복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분위기와 시점(視點)에 미묘한 변화를 주며 책을 끝까지 읽도록 만든다. 이것은 어쩌면 그가 말 그대로 소설가로서 구사하는 테크닉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으며, 그에 스스로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나는 그의 소설가로서의 테크닉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소설집은 그가 지금까지 자신의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여러 부분들이 고르게 들어있으며, 그것을 적재적소에서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간의 하루키 소설에 대한 오마주로서) 이것을 섹스로 비유하자면, 그의 단편소설은 어떤 체위를 실험해보는 듯한 느낌이 있었고, 그의 장편은 그 중 그가 특히 잘하는 체위로 집중 공략해서 쾌감을 증폭시킨다는 느낌이 있었다면, 이 단편들은 짧은 단편들에서도 다양한 체위를 다양한 테크닉으로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달까. 그저 당신은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도록 감각을 모으면 되는 것이다.

즉 이 하루키의 소설들에는 그간 그가 다른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요소들이 다양하게 들어 있다. 예를 들어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기묘한 분위기를 띄는 소설의 분위기('기노'나 '독립기관'에서 나타나는 어떤 기묘한 사건들, 혹은 하바라와 셰에라자드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기묘한 배경), 어떤 현실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있는 주인공들(예를 들어 하루키의 소설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주인공을 본 기억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등등의 내용적인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소설의 어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단적으로 말해서 소설의 시점(視點)이나 화자 같은 부분도 그러한데, 하루키의 초창기 소설들에서 화자는 항상 '나'였으며 거의 1인칭 시점에서 소설이 전개되었다. 그랬던 것이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라는 소설집에서부터 본격적으로 3인칭 시점이 등장하여, 그의 대표작인 '1Q84'같은 소설도 3인칭 시점으로 전개가 되는데, 이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은 이런 시점이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드라이브 마이 카' '세예라자드' '기노' 등은 3인칭 시점으로 그리고 '예스터데이'나 '독립기관'은 '나'가 등장하는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각각의 시점 내부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드라이브 마이 카'나 '세예라자드'가 가후쿠나 하바라에 기반한 관찰자적인 시점이라면 '기노'는 보다 전지적인 시점이며, 같은 1인칭 시점이라도 '예스터데이'는 '나'가 이야기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반면에 '독립기관'에서는 이야기의 중심에서 보다 물러나 있다(그러니 예를 들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이 소설들에서 '나'의 존재는 왜 필요한 것일까(특히 '독립기관'과 같은 내용이라면), 흥미롭게도 이 두 명의 '나'는 글을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이 둘은 같은 나인가, 다른 나인가,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 그 자신인가).

이것을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여섯 개의 이야기들, 혹은 여섯 개의 변주들은 묘하게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주제가 비슷하다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소설의 형식이 낳는 어떤 기묘함들인데, 예를 들어 (위에서도 썼지만) '예스터데이'의 나와 '독립기관'의 나는 둘 다 글을 쓰는 남자이면서 동시에 '다니무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여자 없는 남자들'의 '나'에는 이 소설의 어떤 인물을 끼워넣어도 그렇게 크게 무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3인칭으로 전개되는 소설들이라 할지라도 이 소설의 어떤 인물을 다른 소설의 어떤 배경에 던져넣는다 할지라도, 예를 들어서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가 '기노'라는 술집에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혹은 '세예라자드'가 사실은 '독립기관'에서 도카이 의사가 사랑한 여자였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즉 다시 말해서 이 단편들은 각각의 온전한 단편이면서도 연결되어 하나의 장편처럼 보이며, 혹은 (하루키의 여러 단편들이 그랬듯) 각각의 개별적인 장편의 하나의 단초들인 것처럼 보인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느꼈을테지만 '셰에라자드'나 '기노' 등은 이것으로 부족한, 더 많은 이야기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


3.
즉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린 여러 소설들은 과거 하루키 소설의 어떤 부분들을 더 풍성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분명히 비슷한 무엇인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예스터데이'나 '독립기관'에 등장하는 나, 그러니까 소설가 다니무라. 그 소설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화자. 그는 그렇게 특출나게 잘생겼다고도, 혹은 능력이 뛰어나다고도, 혹은 매력이 있다고도, 혹은 성격적으로 특별히 좋은 면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도 않고, 특정의 취미가 있고 어느 정도 삶을 즐길 줄 알며, 자신의 일의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의 루틴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그들 주위에는 기타루나 도카이 의사처럼 어딘지 모르게 특이한 남자들이 있었으며, 그 인물들은 그(나)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남자들은 죽거나, 사라진다(즉 지금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다). 즉 이 나의 주변에는 죽음이 어른거린다(그러나 이들 '나'는 죽음 근처에 있지만, 이들은 대체로 죽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그가 소설 속 화자인 '나'이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여자들이 있다. 그 여자들은 대체로 외모가 뛰어나거나 아름다운 편이며, 하루키가 늘 주목하는 대로 대체로 가슴크기도 적당하다. '예스터데이'의 구리야 에리카, '사진에서 본 대로 멋진 여자였지만 실물을 마주하니 얼굴보다도 온 몸에 넘치는 순수한 생명력 같은 것이 주의를 끄는' 여자. 혹은 '독립기관'의 도카이의 그녀, 그러니까 '종합적인 존재, 강력한 자석처럼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여자.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내부는 여전히 미궁에 놓여져 있다. '예스터데이'에서 기타루는 구리야 에리카를 안는 것을 거의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며, '독립기관'에서 도카이는 그녀의 무엇이 사실 그를 그렇게 끌어당기는 것인지 모른다. 여자들의 내부는 거의 항상 알 수 없는 무엇인가로 가득차 있으며, 남자들은 늘 그것을 독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가후쿠의 죽은 부인이나, 하바라의 셰에라자드나 기노의 전부인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더 거슬러 오르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시로'나 <1Q84>의 '후카에리'도 마찬가지다. 여자들은 겉으로 완벽해지면 완벽해질수록 내부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된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렇게 되면 될수록 더 죽음 가까이로 간다.

그리고 다시 그의 반대편에 위에서 말한 평범한 '나'들을 포함한 남자들이 있다. 다시 반복하지만, 이들은 죽음의 가까이에 있지만 죽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한, 적어도 생활고 때문에 죽음 근처에 가까이 갈 이유는 없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 고민은 이상하게도 그들을 극단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죽기에는 너무 쿨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이 <여자 없는 남자들>의 전작의 남자들이라면 이 <여자 없는 남자들>에는 새로운 유형의 남자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독립기관'의 도카이 의사나 '기노'의 기노같은 남자들. 기노에게 보내는 메시지들은 거의 그간 하루키 소설 속의 남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그것이 하루키의 새 소설을 통해서 느끼는 미묘한 변화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뱀들은 그 장소를 손에 넣고 차갑게 박동하는 그들의 심장을 거기에 감춰두려 하고 있다. (p.266)


4.
마지막으로 두 가지 이야기만 덧붙이고 싶다. 하나는 '사랑하는 잠자'는 넣지 않은 편이 훨씬 좋았으리라는 점이다. 테마의 미묘한 변주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전혀 이질적인 음악이 들어가 있으면 되겠는가. 편집 과정에서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정 넣고 싶다면 차라리 맨 뒤로 돌리는 편이 나았다. (아니면 원서에는 없지만 나중에 추가한 것이라고 최소한도의 설명을 붙이기라도 하든가 말이다. 다만 '사랑하는 잠자'가 그 뒤의 이야기가 많이 궁금하긴 했다.)

그리고 더 한 가지. 예전에 하루키의 소설들에서 늘 어떤 강조점, 방점들이 거슬린다고 했는데, 방점이라는 그 자체가 거슬리는 것인지, 그 '형식'이 거슬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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