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영화 감상기

Ending Credit | 2014.08.12 02:11 | Posted by 맥거핀.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군도: 민란의 시대>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최근에 극장에서 본 2편의 영화에 대한 감상이랄 것도 없는 간소한 감상.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맷 리브스, 2014

이 영화에서 아마도 가장 주목할 만한 순간은 시저가 유인원이 인간보다 낫지 않다, 그러니까 결국 유인원과 인간은 다를 바가 없다고 깨닫는 장면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장면이야말로 유인원이 일종의 '여명'의 시기에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반격의 서막'이지만, 사실 영화의 원제에는 '반격'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인간과 유인원의 대립구도를 만들고 싶은 수입사의 멋대로 제목일 뿐이고, 원래 제목은 간략하게 'Dawn of the Planet of the Apes'이다). 즉 이 영화에 이르러서야 유인원들은 예전과는 다른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고, 그것은 결코 현재의 인간들조차도 이룩하지 못한 단계였다. 그것은 우리(유인원 혹은 인간)가 다른 개체들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벗어나는 것이고, 그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결국 이 영화 속 세계에서 유인원은 이 행성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집단은 결국 상대방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니까(역사적으로 볼 때 자신들이 타 종족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종족들은 거의 대체로 파멸의 길로 스스로 들어섰다).

그것은 이 유인원이라는 집단의 내적인 부분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그 이전까지는 유인원은 그저 유인원이면 되었다. 즉 리더 시저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는 것이 일종의 유인원의 본성과 같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보다 유인원이 낫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저가 그저 무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격은 유인원이라는 사실, 그 자체면 되었고, 그 받아들여지는 유인원은 오로지 한 가지의 대원칙, 즉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여서는 안된다'의 테두리 안에만 들어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시저가 많은 희생을 얻고 얻을 수 있었던 값진 인식은 사실 유인원의 본성도 그런 것만은 아니며, 유인원도 결국 탐욕스러운 인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 유인원이라는 무리는 그저 '유인원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인원을 유인원이도록 하는 다른 무엇인가(단순히 서로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넘어서는)를 갖추어야 하는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즉 시저가 코바에게 내린 '너는 유인원이 아니다!'라는 정언명제 이후에는 유인원은 유인원이기 위해서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해지게 되었고, 그것은 이제 일종의 법과 질서의 단계(유인원이 유인원이기 위해서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라는 물음)로 이 무리가 진화하는 순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시저가 코바에게 선언하는 이 장면은 이상하게도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조커를 붙잡는 장면을 연상시켰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시저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 예상을 뒤엎는 선언이라니. 이 장면에서 리더의 조건이라든가, 결단력 같은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배트맨이라면 "너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물론 배트맨은 그렇게 선언하지 못해 끝끝내 조커에게 조롱당했지만..) 

그러므로 시저라는 위대한 영웅은 사라져가지만,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결코 인간들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법과 질서라는 새로운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운, 그야말로 '새벽의 단계'로 들어서고 있으니 크게 걱정은 안된다. 도리어 걱정되는 것은 영화 속의, 혹은 영화 밖의 인간들인데, 인간들은 여전히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위대한(사실은 위대하다고 착각하는) 리더의 영도에 따라 파멸의 길로 스스로를 자꾸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로가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믿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우는 어떤가. 시작하면 우리도 결국은 많은 희생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으며 끝끝내 전면전을 피하려 애썼던 시저의 고뇌가 요즘에는 현실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큰 전쟁에서든 작은 전쟁에서든.


군도: 민란의 시대, 윤종빈, 2014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다른 영웅을 보여주는 것처럼 밑밥을 깔았다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욕을 먹고 있는 영화가 있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 영화 <군도>는 초반에는 웨스턴의 형식을 빌려 일종의 영웅설화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처음 돌무치(하정우)의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은 웨스턴과 영웅설화의 이상한 조합이다. 돌무치는 설화 속의 영웅들처럼 비범하게 태어났고(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웨스턴의 영웅들처럼 일반적인 마을 집단에서 유리되어 있다(마을 외부 허허벌판 속에 있는 돌무치의 집). 설화 속의 영웅들처럼 어려서 고난을 받고(그는 18살에 어머니와 누이를 잃는다), 웨스턴의 영웅들처럼 혈혈단신으로 적진으로 침입해 들어간다. 물론 이는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주인공을 강화시키기 위한 장치. 돌무치는 이를 계기로 '추설'이라는 군도(群盜)의 간택을 받고, 이제 그 무리 속에서 성장하며, 그 영웅성을 극대화시켜 복수를 성공시킬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이상하게 비트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은 이제부터다. 돌무치의 영웅적인 성장과 그의 호쾌한 복수를 보여주어도 시간이 모자랄 판인데, 영화는 돌연 악역 조윤(강동원)의 캐릭터를 돌무치만큼 공들여 묘사하더니 그에게 절대힘, 그러니까 아무도, 심지어는 돌무치도 이길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을 부여한다. 이는 사실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는 악역은 주인공의 영웅성을 부각시킬 정도로 강력해야 하기는 하지만, 결국 주인공에게 패배하고 주인공의 영웅성을 극대화시키는 데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당연히 모를 리 없는 미친 영화감독 윤종빈은 조윤에게 그런 어마어마한 힘을 부여함과 동시에 이질적인 나레이션을 붙임으로써 그의 존재를 시작부터 관객들에게 강하게 각인시킨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가 미쳤다고 보는 관점은 이 영화를 영웅담으로 보는 관점에서만 타당한 것이다. 어쩌면 그에게 이 영화를 영웅담으로 만드려는 의지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을 영웅담으로 보며, 왜 영웅이 그것밖에 안되냐는 비난은 오로지 애타게 영웅을 바라는 우리들의 의지가 빚어낸 오해는 아닐까. 왜냐하면 이 이상한 영웅담에는 가장 중요한 부분, 즉 영웅의 각성과 그의 성장이 전적으로 빠져있기 때문이다. 돌무치는 추설의 무리가 된 이후에도 그다지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마음 속에는 사실 백성을 살린다,라는 대의보다는 개인적인 복수가 여전히 더 크게 위치해 있으며, 그는 여전히 어리석고 별로 생각이 없어 보이며, 결국 조윤을 이기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조윤을 이기는 몫은 감독 윤종빈이 그에게 줄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그를 궁극적으로 이기는 것은 그가 아니라 이름모를 한 무리의 백성들이며, 영화의 제목은 '군도: 영웅의 시대'가 아니라 '군도: 민란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윤종빈은 몇 가지 설정들(예를 들어 타이틀롤)이나 음악들로 분명 어떤 착각을 준 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가 애초부터 찍고자 하는 것은 영웅설화나 웨스턴이 아니었다. 보통의 영웅설화나 웨스턴에서 일반 민중들은 그저 고통과 압제에서 신음하다가 영웅의 등장으로 구원받는 시혜의 대상이거나 혹은 영웅의 활약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구경꾼들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렇게 되면 문제가 있는 게 그렇게 되면 영화는 '군도: 영웅의 시대'가 되기 때문이다. 윤종빈은 선택을 해야했고, 그 선택은 결국 돌무치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고, 결국 민란을 선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민란은 결국 시혜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도 조윤에 대한 1차 습격이 결국 참담한 실패로 끝나는 것은 그들의 이제까지의 습격이 일종의 시혜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추설이라는 조직은 그 이전까지 백성들과 거의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들의 아지트는 아무도 모르는 산속 깊은 곳에 있고, 그들의 조직은 아무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의 조직은 일종의 엘리트 집단이고, 그들은 영웅으로서 백성 앞에 짠 하고 나타나 일종의 혜택을 줄 뿐이다(이런 이들의 일종의 시혜 의식은 그들의 회의 시간에도 잘 드러난다). 그런 그들이 조윤에 대한 재습격에서 결국 승리하는 것은 백성들의 자연스런 참여의 결과, 즉 진정한 민란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물론 이는 그들이 대폭 수가 줄어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국 이는 일종의 개방적인 조직으로 추설이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군도인 것이다).

이는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는 결국 구경꾼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는 자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조윤이 백성들과 대치한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누구든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자는 나오라는 조윤의 외침은 백성들을 향한 외침이면서 결국 자신을 향한 외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조윤이야말로 결국 자신의 운명에 순응한 자이기 때문이며, 아마도 이것이 조윤이라는 캐릭터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이유일 것이기 때문이다. 조윤은 실제의 조선시대의 많은 실제 인물들이 그러했듯이 벼슬길에 나아갈 길이 막혔기 때문에 명예보다는 재물로 방향을 돌린 '땅귀신' 중의 하나였으며, 그것으로 자신의 능력을 아버지에게 인정받기를 바랐다(그가 땅문서를 모아 가장 처음 한 일은 아버지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를 어떤 의미에서는 왜곡된 인정투쟁으로 보아도 될 것인데, 이의 기저에는 결국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일종의 체념이 들어가 있다. 즉 그는 그 자신의 물음처럼 연꽃의 의지가 아닌 신의 뜻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돌무치와 함께 창을 들고 따라 나선 민중들은 다르다. 그들은 그 스스로 신분제라는 신의 뜻을 벗어나려 하였으며, 이는 탐관오리의 손자로 태어났으나 추설의 무리에서 자라난 아이에게도 역으로 마찬가지일 것이다. 즉 이 역시도 연꽃의 의지인 것이다.


덧.
그래서 어떻게든 엮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은 의지는 잘 알겠지만, 이 영화 <군도>를 <명량>과 엮어서 <명량>에는 리더가 있지만, <군도>에는 리더가 없고, <명량>의 영웅담은 잘 짜여져 있지만, <군도>의 영웅담은 약하다느니 하는 비교는 조금은 부당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군도>는 사실 영웅담을 만들 의지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이며,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 일종의 영웅적 배경을 초반에 깔아야 했지만, 사실 하고자 하는 얘기는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반면 <명량>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고, 그저 그의 며칠을 보여주기만 해도 되었다. 적어도 이순신이 영웅인 것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테니. 아무튼 이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이 이상 할 말은 없다). 즉 어떤 사람들은 영웅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영웅을 결국 이야기하지 않는 영화에 그러니까 영웅이 없기 때문에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물론 영화의 흥행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군도>보다 <명량>이 흥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그것은 어떤 징후적인 문제와도 조금은 연관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흥행영화들이 늘 그랬듯이 영화의 완성도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명량>을 보지 않았으므로 이는 <군도>가 <명량>보다 낫다는 코멘트가 아니다).

얘기한 김에 한 마디 더하자면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위의 두 영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이나 <군도: 민란의 시대>나 거의 모든 캐릭터들이 살아 있으며, 그 캐릭터들을 모두 잡고 가려는 노력이 인상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군도>는 윤종빈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그랬듯이 캐릭터들의 열전이며, 그것은 특히 악역 조윤에서 빛을 발한다. 도리어 욕을 먹기는 했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왜 악역이 (주인공보다도 더) 빛을 발하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다크 나이트>가 배트맨의 영화가 아니라 조커의 영화라고 해서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뭐라하지 않는데 말이다. 아무튼 요즘의 누군가들은 악이 그저 맥락없는 악이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어떤 징후적인 문제와 연관되는 것 같다(다만 선한 우리가 그 '맥락없는 악'보다 나을 수 있는 점을 한 가지라도 찾는다면 적어도 우리는 어떤 맥락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을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 2014년 7~8월, 대한극장, CGV 영등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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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4.08.17 1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혹성탈출: 반격의서막>은 보고난뒤 다음편이 저절로 예측이 되더군요. 시저와그의무리들은 말씀하신것처럼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 라는 계명을 지키기위해 "법과 질서의 단계"로 진화의 과정을 밟게될것 같고 인간,인류는 그와 역행하는 길을 걷게 될것 같더라구요. 마치 1968년도판 혹성탈출에서 봤던 뇌가 제거된 노예상태의 인류를 향해서말이죠. 다음편에서 유인원과 인간사이의 대결이나 갈등이 어떤식으로 펼쳐질지..

    <군도,민란의시대> 재밌게잘 봤고 조윤에 포커스맟춤도 불만이 없어요.
    좀 거슬렸던건 영화중간중간 뜬금없는 조윤나레이션 이었지만..
    아 그리고 돌치 하정우의 전라도사투리가 좀 겉도는 느낌.
    정말 "캐릭터들의 열전"! 그자체. ^^
    *강동원이 보여준 칼과 춤의 동선은 길이 회자될듯 합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4.08.19 1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저의 깨달음은 꽤 울림이 깊었습니다. 우리가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매번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고 할 수도 있겠죠. 아무튼 저는 혹성탈출 리부트 1탄보다는 훨씬 좋게봤구요. 이렇게 오락성과 메시지를 적절히 균형잡는 할리우드의 능력은 여전히 우리 영화들에 부족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다음번 3편이 나와도 즐거운 마음으로 볼 것 같아요.

      무술감독 정두홍 씨던가..강동원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칼을 잘 쓰는 배우 중의 하나라고 하더군요. 확실히 이 악역은 강동원만의 것이다,라는 느낌이 있어요. 다른 누가 이 역을 했어도 강동원 만큼의 어떤 분위기를 내기란 힘들겠죠. 윤종빈 감독 영화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특정의 대사들이 계속 회자되는 것은 그가 그만큼 캐릭터를 만드는 데에 능한 감독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의 영화 속 대사들 중에 (특히 남자들 사이에서) 계속 활용(?)되는 대사들이 참 얼마나 많은지요.

      날씨가 슬슬 썰렁해지는 군요. 이 지겨운 비들이 지나가면 가을의 얼굴이 살짝이라도 보일는지요..환절기에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