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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속죄

Interlude | 2014. 7. 22. 16:20 | Posted by 맥거핀.




속죄(贖罪), 구로사와 기요시, 2012

(작품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속죄>를 5부작 드라마로 만든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를 보다 보면 뇌리에 남을 수 밖에 없는 장면들이 있다.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공을 가지고 노는 소녀들, 그리고 음산한 남자의 등장과 부탁, 그리고 그것에 응하는 에미리, 소녀들을 등지고 떠나는 에미리와 남자의 뒷모습, 그리고 사건이 벌어진 후 다시 만난 네 소녀들과 에미리의 어머니(아사코, 코이즈미 쿄코), 그리고 살아남은 네 소녀들에게 가해지는 속죄의 강요. 물론 이것이 뇌리에 남는 이유는 일련의 이 장면들이 이야기의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들이며, 작품 속에서 에미리의 어머니(아사코)를 포함한 이 다섯 여자들의 이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장면들인 것에 이유가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어떤 기묘한 느낌을 주는 장면들이기도 하며 일련의 질문들 - 예를 들어 이런 질문들. 이 남자는 누구인가, 남자가 데려간 학교 체육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소녀들은 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해도 이 속죄의 강요는 정당한가, 등등 - 을 생각케 하는 장면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조금 더 단순하게 말하면 이 장면들이 계속 반복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드라마의 구성으로는 약간 특이하게도 이 일련의 시퀀스는 일종의 액자로서 매회 반복이 된다. 물론 그것에도 이유는 있을 터였다. 그것은 개개의 소녀들이 주인공이 되어 매회를 이끌어 간다는 이 드라마의 구조(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도 이 드라마처럼 화자가 바뀌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구조라고 알고 있다)에서 연유하기도 했을 것이고, 그것이 그만큼 중요한 장면이니 주의 깊게 보라는 신호인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 반복은 이상한 다른 잔상들을 남긴다. (한 마디 더 붙여두자면 후에 이 드라마는 영화판으로 재편집되기도 했는데, 이 일련의 시퀀스들은 드라마와 비슷하게 중간중간 계속 반복된다. 전편의 이야기를 리마인드 시키는 것이 중요한 드라마라면 이러한 반복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 굳이 이렇게 해야만 했을 이유란 무엇일까. 또 한편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구로사와 기요시가 이 장면들을 반복시키기는 하지만 미묘한 변주로 중간중간 다른 느낌을 주며, 각각의 주인공들을 주목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가장 마지막에 반복되는 속죄 강요 씬은 아사코가 말하기 직전 그녀가 묶고 있던 머리를 푸는 장면을 넣음으로써 그녀에게 효과적으로 주목하게 만든다. 즉 지금까지 반복되는 장면 속에서 우리가 그것을 듣고 있던 네 소녀들의 심정만을 생각해 왔다면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이를 말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복이 남기는 잔상 중에 하나는 바로 반복한다는 것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반복되는 이 '장면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 반복한다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 알게 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반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체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개별적인 장면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어 이 반복되는 시퀀스 중 남자가 에미리를 데려가는 것을 소녀들이 뒤에서 바라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오래전 아사코(에미리의 어머니)가 벌인 일들의 반복이며, 동시에 이후에 변형된 형태로서 다시 아사코에 의해 반복 시도된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다. 아사코가 과거에 한 것은 자살의 방조이지만 소녀들의 행위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남자가 에미리를 데리고 갈 때 소녀들은 어렴풋하게 알고 있으며, 그것을 보는 우리 역시 대개 짐작한다. 에미리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말이다. 그것을 구로사와 기요시는 효과적인 컨트롤로 보여주는데, 예를 들어 남자와 에미리가 학교 건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모습을 잡은 소녀들의 시점숏 옆에 매회 贖罪라는 제목을 띄우는 것의 의미가 그것이다.) 이러한 작은 부분들은 각각의 이야기에서 약간은 변형된 형태로 반복되는데, 예를 들어 5편에서 아사코가 부잣집 남자와 결혼했다는 진술은 1편의 사에(아오이 유우)의 이야기로 변주되며, 질투와 시기의 고백은 2편 마키(코이케 에이코)나 4편 유카(이케와키 치즈루)의 이야기에서, 누군가가 가진 중요한 것을 빼앗는 것이 복수라는 5편의 이야기는 다시 4편 유카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 상으로 볼 때 아사코가 벌인 일련의 일들은 에미리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거쳐 기묘하게도 살아 남은 네 소녀들에 의해 일정부분 반복되며 이는 이 아사코가 소녀들에게 강요한, 그리고 소녀들이 수행하려고 애썼던 속죄(贖罪)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속죄'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이 이야기에서 '속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속죄'라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했지만, 이 이야기는 도리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에나 마키, 아키코에 의해 수행된 속죄는 사건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그 자신의 삶만 망가뜨렸다는 점에서 속죄라고 보기는 힘들고, 사건의 해결에 도움을 준 유카는 사실상 타인의 삶을 망가뜨린다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속죄가 아니다(그것을 마지막 "행복하게 살라"는 아사코의 대사로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마지막 아사코의 속죄 시도 역시 경찰에 의해 실패한다. 즉 이 영화의 모든 속죄는 사실상 실패한다. 아마도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결국 이 소녀들이 속죄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즉 이 이야기에서 가장 기묘한 것은(그리고 이 이야기가 흥미를 주는 것은) 이들이 저지른 '죄'라는 것이 명확하지가 않고 그것이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녀들이 저지른 '갚아야 하는 죄'라는 것은 뭘까.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아이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가, 기억하지 않는 것인가)? 두려움에 나서지 못한 것? 혹은 에미리를 죽게 내버려 둔 것? 아니면 그의 근원에 있는 에미리에 대한 질투? 아니면 그 총체로서의 무엇? (이것이 어쩌면 이런 이야기에서 보는 이에게 흥미를 가지게 하는 기이한 점이다. 예를 들어 <친절한 금자씨>의 기묘한 변주. 사실 '속죄'를 하겠다고 나선 금자씨의 죄도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다. 사실 이상하게도 속죄는 늘 그 속죄가 필요하지 않은 자들에 의해 수행된다)

그러나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속죄라는 것이 속죄가 필요하지 않은 자들에 의해 수행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단지 결과물에 불과하고,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 속죄라는 것이 결국 반복이기 때문에, 즉 그 반복이 어떤 잔여물을 계속 남기기 때문은 아닐까. 이 '속죄'라는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조금 기묘한 것이 사전을 찾아보면 '지은 죄를 물건이나 다른 공로 따위로 비겨 없앰'이라고 되어 있다(그래서 이 속죄할 속(贖)이라는 한자를 보면 물건을 의미하는 조개 패(貝)를 변으로 쓰고 있다). 즉 중요한 것은 속죄는 결국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이 죄에 비길 만한 다른 어떤 것(공로나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속죄는 있던 죄를 없애는 과정이 아니라, 다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며, 필연적으로 이 과정은 그 수행 과정에 있어서 다른 잔여물들을 만들어내며, 그 잔여물의 크기는 죄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커진다. 즉 속죄는 종종 복수와 비슷한 것이 되어간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 것처럼, 속죄의 이름을 가진 복수는 다른 속죄의 이름을 가진 복수를 낳는다. 그것을 이 일련의 반복들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주 오래 전의 사건은 15년 전의 에미리의 죽음을 불러왔고, 에미리의 죽음은 다시 현재의 사건들로 돌아왔다. 일련의 시퀀스는 반복되고, 이야기는 반복되며, 속죄는 다시 속죄로 돌아온다(즉 이 이야기 이후에 거의 모든 인물들은 다른 속죄를 행해야만 할 것이다). 어쩌면 이 반복되는 시퀀스들은 이 속죄의 불가능성에 대해, 그 필연적인 반복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것은 아닐까. 완전히 끝으로서의 속죄란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죄는 결코 그런 방식으로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죄는 여전히 인간들에게 달라붙어 있으며 인간들은 계속 무엇인가를 반복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늘 그런 것에 능했다. 일련의 공포물로 유명해진 감독이지만, 사실 그의 공포는 귀신이나 혼령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달라붙음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을 일종의 사회파 미스터리라 부른다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들을 일종의 사회파 공포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의 공포물은 사회 속에서 이 사회에 달라붙어 있는 것들을 집요하게 그리려 노력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공포의 원형, 인간이 가진 두려움의 근원에 있는 원죄와 같은 것(꼭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가 아니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드라마 <속죄>에서의 색감은 보통의 구성과 반대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과거의 회상 장면의 색감을 빼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과거 15년 에미리의 사건이 벌어질 때는 강한 색감이지만, 현재에는 도리어 물감이 빠진 듯한 화면이다. 아니 그것은 무엇인가가 빠졌다기 보다는 그 총천연색의 화면에 무엇인가가 달라붙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사로 잡고 있는 것은 '속죄'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반복이다. 완전한 속죄를 꿈꾸는 순간, 속죄는 늘 실패한다. 적어도 인간이 행하는 속죄란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죄는 여전히 그렇게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고,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은 늘 그것이 만들어내는 두려움을 향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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