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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인의 고백, 아틱 라히미

Ending Credit | 2013. 10. 10. 18:09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지속된 전쟁으로 페허가 된 아프가니스탄. 그곳에서 한 때 전쟁영웅이라고 불렸던, 이제는 총상을 입고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돌보는 한 여인의 삶. 포성은 계속 울려퍼지고, 먹을 것을 달라고 딸들은 보채고, 끊임없는 기도에도 남편은 도무지 깨어날 기미가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는 왠지 익숙하다는 선입견을 준다. 이 여인은 끊임없는 내부와 외부의 압박에 시달릴 것이고, 그것을 보는 우리들 역시 고통스럽지만, 스크린 밖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무력감과 또한 우리는 그런 것에 멀어져 있다는 안도감을 동시에 줄 것이라는 선입견 말이다. 그런데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영화는 슬슬 이상한 방향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고통 속에서 기도와 인내 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보였던 여자는 빨간 옷을 입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남편 옆에 요염하게 앉아 있다. 이 여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영화 <어떤 여인의 고백>에서 영화가 달라지는 것은 (영화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녀가 고백을 하는 시점부터다. 무엇이 그녀를 달라지게 만드는가. 중요한 것은 고백의 내용이 가지는 어떤 파괴력이 아니라, 단지 그녀가 고백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즉 그녀가 발화자가 된다는 사실 말이다. 지금까지 그녀가 발화자가 된 적은 없었다. 그녀는 항상 듣는 쪽이었고, 받아들이는 쪽이었다. 메추라기들을 싸움 붙이는 도박에 미쳐있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언니를 도박빚 대신 나이든 남자에게 넘겼고, 그녀 역시 단지 전쟁영웅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인내하는 삶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남편은 밖에서는 전쟁영웅일지 모르지만, 집에서는 가부장적인 남편이었고, (영화에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항상 말을 하는 쪽은 그녀의 남편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이제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물론 그녀의 남편이 이제 말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니 말을 넘어서 이제 둘 사이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쪽은 아내이다. 식물인간이 된 남편은 그녀의 보호 없이는 죽고 말 것이다.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 부부의 관계, 즉 역전되어 버린 말을 하는 자와 듣는 자의 관계를 이 인습과 굴레의 총체라고 부르는 것조차 표현하기에 부족해보이는 이 이슬람 사회 전체에 확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시작은 그녀를 몸을 파는 여자라고 오인한 한 젋은 군인과 그녀와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이 관계는 역전되어 있다. 어린 그녀가 남자와의 성관계를 처음 배운 것은 거칠고 나이든 그녀의 남편으로부터였고, 그 관계에서 그녀는 단지 남편이 이끄는 대로 무조건 따라야만 했다. 그러나 이 관계는 다르다. 이 젊은 군인은 여자와의 관계가 처음이고, (처음의 시작은 남자의 오인과 일방적인 공격으로 이루어졌지만) 결국 관계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그녀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성적인 관계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물론 가장 큰 메타포는 그 남자가 극도로 말을 더듬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대화를 이끄는 것은 그녀고, 이 남자에게 어린 나이에 원치 않는 군대에 끌려간 소년병 출신이라는 고백을 끌어내는 것도 그녀다. 즉 이 관계에서 다시 우위를 점하는 것은 그녀이고, 그 남자의 마음을 이끌어내는 것도 그녀이다.

즉 이 영화에서 조금씩 희망 비슷한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남자들이 입을 닥치고 난 이후이다. 영화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것은 이어지는 폭력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포격과 총소리, 종교지도자들의 지나친 간섭, 식물인간으로 큰 짐덩어리처럼 보이는 남편, 총을 들고 위협하는 군인들과 잔혹한 살해, (그녀의 고백으로 알게 되는) 어린 시절에 그녀를 지배했던 아버지의 폭력. 이것은 남자들의 세계이고, 남자들의 폭력이다. 그런데 그녀의 고백과 맞물려 이야기의 중심이 조금씩 여성들에게로 옮겨오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나아져 간다. 짐덩어리에서 이제 그녀의 말을 들어야만 하는 존재가 된 남편, 그녀가 피신하는 그녀 이모집의 기이해 보이는 여성공동체(물론 이것이 기이해보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또 한편으로 그녀의 조력자가 되는 사람이 '고모'가 아니고 '이모'임을 주목해 볼 수도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아들이 아니라 두 명의 딸이 있다는 사실과도 연관될 것이다), 그녀와 젊은 군인과의 관계에서 그녀가 점하는 우위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것을 그녀의 이모는 약간의 유머 섞인 말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사랑을 잘 하는 남자가, 전쟁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국가적인 폭력, 외부의 만연한 폭력은 사회 내부의 폭력, 작게는 한 집안 내부의 폭력과도 연결되어 있다. 남자들이 집 안에서 벌이는 메추라기들을 데리고 하는 투기(鬪技)는 외부의 지독한 전쟁의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여성이 지배하는 작은 사회에서는 폭력은 없다. 여인은 식물인간인 남편에게 고백을 하며 돌보고, 이모는 비참한 상황에 놓인 여인을 감싸 안으며, 또 여인은 소년병으로 학대받아야 했던 젊은 남자를 품어준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결국 폭력과 전쟁이 지배하는 부계사회가 아니라 사랑과 포용이 지배하는 모계사회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그녀의 결정적인 고백과 그녀가 보여준 행위로 연결되는데, 이는 이 영화를 뻔하지 않게 만들면서, 동시에 이러한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자, 새로운 시각으로서의 진전이기도 하다. 그것의 시작은 단지 몇 마디의 말, 고백이었다.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는 것의 힘, 그것이 가지는 작은 파괴력이 어쩌면 사회를 바꾸는 거대한 동력으로도 변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덧. 
이 영화의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좁은 실내에서 이루어지는데, 빛을 효율적으로 잘 활용하여 답답함을 많이 벗어나고 있다. 또한 클로즈업, 때로는 익스트림한 클로즈업까지 여러 번 등장하는 것이 인상적인데, 이는 인물의 감정을 잘 잡아낸다는 주된 효과 외에도 좁은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유려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잘 어울려 영화 전체를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여주인공을 맡은 골쉬프테 파라하니의 연기도 인상적인데, 영화 초반부와 영화 마지막에 이른 그녀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 보이는지.



- 2013년 10월, 롯데시네마 신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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