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투리들 - 박쥐와 스토커

Ending Credit | 2013.10.05 14:02 | Posted by 맥거핀.

(<박쥐>, <스토커>의 일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몇 가지는 남겨두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박찬욱의 영화 <박쥐>와 <스토커>에 대한 리뷰는 이미 쓴 적이 있지만, 연작의 선상에서 몇 가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자투리들 몇 가지를 간단하게 남겨본다.


1.
<박쥐>에서 인물들은, 그리고 사건들은 계속 반복되는 구조, 혹은 일종의 순환(악순환)의 구조에 놓여져 있다. 먼저 이 이야기들의 전제로서 혹은 하나의 비유로서 영화에 등장하는 바이러스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부 상현(송강호)의 몸 속에서 바이러스들은 돌고돈다. 상현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나, 그만큼 치명적인 위험 또한 가지고 있는 이브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실험에 자원한다. 그러나 그 댓가로 죽음을 맞을 위험에 처한다. 그 순간에 그를 살려내는 것은 수혈 과정에서 그의 몸 속에 주입된 뱀파이어 바이러스다. 즉 상현의 몸 안에는 두 가지의 바이러스가 공존한다. 이브 바이러스와 뱀파이어 바이러스. 이브가 그의 몸을 더 지배한다면 그는 고통스러운 죽음에 가까이 갈 것이고, 뱀파이어가 그의 몸을 더 지배한다면 그는 죽지는 않겠으나 인간의 피를 갈구하게 될 것이다. 즉 상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져 있다. 신부로서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그렇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스러운 죽음에 다다른다. 그래서 그는 영화 속에서 두 가지의 극단 안에서 왔다갔다 하며 내내 괴로워한다. 그는 죽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뱀파이어라는 괴물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 사이에서 그는 이상한 딜레마에 처해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하나의 비유인 것처럼도 보인다. 상현이 이브 바이러스를 스스로 몸 속에 주입한 것은 전적으로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 그가 얻은 것은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시게 된다는 악이다. 즉 상현은, 아니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몸에 지니고 있으며, 그 사이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는 존재이다. 악이, 즉 뱀파이어 바이러스가 그를 더 지배한다면 그는 악해질 것이며, 선이, 즉 이브 바이러스가 그를 더 지배한다면 그는 더 선해질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 속에서 일종의 비유로서 보여지듯이 그렇게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선이 더 몸을 지배하도록 한다면, 즉 다시 말해서 이브 바이러스가 몸을 더 지배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며, 죽음에 가깝게 다가서는 것이다. (이 바이러스의 이름이 '이브'이고 이것이 젊은 남성들에게만 효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설정된 것은 박찬욱의 유머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이브'는 남성에게 즐거움을 주었으나, 그것이 곧 위해가 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영화 속 태주(김옥빈)처럼 말이다.) 즉 선해지기 위해서는 댓가가 따른다. 악의 길은 늘 더 쉬우며, 늘 더 가까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악행에 댓가가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 중에 하나는 죄책감과 같은 댓가다.

그래서 대체로 (상당히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우리 인간들은 선행과 악행 속에서 적당히 왔다갔다 한다. 마치 '박쥐'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박쥐는 이중의 비유라고 말할 수 있다. 이솝 우화의 박쥐일 수도 있고, 뱀파이어의 비유로서의 박쥐일 수도 있다.) 우리는 완전한 선의 무리에도 그리고 동시에 완전한 악의 무리에도 낄 수가 없다. 그 중간 어디에서 끊임없이 양쪽에 왔다갔다 하여야 하는 일종의 순환 지옥에 우리는 놓여져 있다. 그것을 영화의 영어제목에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thirst, 즉 목마름이라는 것은 결국 결핍의 상태이며, 그것은 뱀파이어의 혹은 인간의 천형과도 같은 것이다. 뱀파이어 상현은 목이 말라서 끊임없이 피(욕망)를 갈구하지만, 그는 피라는 욕망, 혹은 태주라는 욕망을 충족하고 나면 다시 일시적으로 죄책감에 빠져 그것을 멀리한다. 그러나 그것을 멀리하는 것을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고, 그를 목마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영화 속에서 계속 반복(악순환)되며, 그것은 보통의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속에서 이는 직관적인 장면으로 보여지기도 하는데, 상현은 태주를 죽이려 하고, 죽어가는 태주에게 순간적으로 욕망을 느낀 상현은 그녀의 피를 마신다. 그러나 일시적인 목마름이 충족된 상현은 다시 죄책감이 들어 태주를 (뱀파이어를 만드는 것으로) 살리려 하고 뱀파이어가 된 태주는 다시 상현의 피를 마신다. 즉 상현과 태주의 피는 돌고돈다.) 그리고 이 '목마름-악행-죄책감-악행을 멀리함-고통-목마름'이라는 순환은 계속 반복된다. 마치 그의 이름 '현상현'처럼 말이다.

2.
이 돌고 도는 것은 박찬욱의 전작들에서 계속 이야기되는 것이기도 했다. 바로 복수의 등가교환이라는 환상으로서 말이다. 계속 이야기했지만, 박찬욱의 주인공들은 어떻게든 등가교환을 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박찬욱의 전작들이 보여주듯이 완전한 등가교환은 존재하지 않고 늘 추가적인 무엇인가를 남긴다. 그러므로 복수라는 것이 등가교환의 형식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복수는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 등가교환으로서의 복수는 계속 무엇인가를 남기고, 그 남긴 무엇인가는 실물이 되어 다시 다음의 복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즉 등가교환은 환상이나 정신병에 가깝고, 등가교환의 시도는 늘 잔여물들을 남기고, 대체로 그 잔여물들은 조금씩 조금씩 (대체로 오인과 오해를 담아) 확대되어 거대한 실물로서 박찬욱의 주인공들에게 되돌아왔다. 그 주인공들은 진짜 실물을 보기도 했고, 때로는 실물이라고 믿어지는 환상을 보기도 했다. 그것은 이 영화 <박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태주에 대한 일종의 복수로서 강우(신하균)의 살해를 감행한 상현과 태주는 이제 당연하게도 실물로서의 강우를 만난다. 기괴한 표정을 짓고 몸의 모든 구멍에서 물을 흘리는 강우를 말이다. 그렇다면 박찬욱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그 잔여물들이 남긴 것, 즉 다음의 복수는 이어질까. 다시 말해서 그렇다면 이 영화를 결국 라여사(김해숙)에 의해 이루어지는 태주와 상현에 대한 복수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마지막 복수는 전작의 연작들과 상당히 양상이 다르다. 지금까지의 복수와는 달리 이 복수에서 라여사는 지켜볼 뿐, 결국 복수(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를 감행하는 것은 상현 자신이기 때문이다. 상현은 영화 속에서 두 번째 자살을 감행한다. 두 번째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 그가 이브 바이러스를 이용한 실험에 참여하는 것은 순교를 가장한 자살이기 때문이다(이 연구를 담당하는 박사는 심리적으로 자살과 순교의 차이를 가려내는 것은 어려우며, 그가 자살의 방편으로 이 연구에의 참여를 자원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 번째의 자살은 다르다. 처음이 순교를 가장한 자살이라면, 이 두 번째는 자살을 가장한 순교다. 그는 결국 돌고도는 복수, 혹은 고통스러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 없음을 안다. 그것은 멈추는 것이다. 일종의 소멸이라는 형태로의 자살. 그는 자신이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될 수 없음을 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순교를 실행하기 전, 자신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신도들을 일종의 거짓 퍼포먼스로 밀어낸다(선에서의 탈출). 그는 자신이 그저 선과 악에서 왔다갔다 하는 복수와 정념에 휘둘리는 인간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3.
이것은 물론 상징으로서, 혹은 하나의 비유로서의 죽음이며,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어떻게든 애쓰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영화 속 상현이 처한 딜레마라는 것은 그가 결국 애쓰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보다 쉬운 길은 태주처럼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사용하여 마음껏 욕망을 채우는 것이며, 이러한 인물들은 딜레마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는 애를 쓴다. 어떻게든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혹은 어떻게든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서. 그리고 결국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 그는 소멸의 길을 택한다. 즉 복수 연작의 인물들과 상현은 다르다. 복수 연작의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고, 그 결과 그들은 죽거나, 혹은 겨우 죽음을 면했지만 미치거나, 혹은 죽지도 않고 미치지도 않았으나 영혼의 구원에는 결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아마도 상현은 그 육체를 기꺼이 소멸함으로써, 혹은 그 애씀의 댓가로서 영혼의 구원은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반면 태주는 이렇게 말하는 인물이다. 죽으면 끝,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나는 이렇게 말하는 영화 속 인물을 그 이후에 한 번 더 보았다. 홍상수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의 해원. 그래서 나는 해원이 조금 무서워졌다.)

이 마지막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 연작들의 대단원이며, 결국 우리가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이 라여사의 강한 응시로 끝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이 장면은 우리가 영화라는 사각의 스크린을 보듯이, 라여사가 차창이라는 사각의 프레임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이 때 박찬욱은 우리가 라여사의 위치에서 이들의 소멸을 지켜보기를 바란다.) 이 때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것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떻게든 애쓰는 그의 모습과 그들의 발에서 툭 떨어지는 두 켤레의 구두이다. (그 구두는 영화의 중반부 그들의 욕망을 매개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4.
그리고 그 다음 박찬욱은 할리우드로 건너가 구두 이후의 이야기, 구두를 신었던 인디아(미아 와시코브스카)가 결국 구두를 벗고 하이힐로 갈아신는 이야기인 <스토커>를 찍었다. 구두를 벗고 하이힐을 신는다는 것은 결국 이것이 성장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두에서 시작하여 결국 구두로 끝났던 <박쥐>의 루프가 아니라, 이 영화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영화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형철은 <씨네21>에서 이 영화가 은유로서의 성장담임을 훌륭한 글로 잘 보여줬는데, 나도 그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신형철이 말했듯이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은유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논리가 없다. 은유는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은유는 마지막에 하나의 장면으로서 보여지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인디아는 아버지의 벨트를 매고, 어머니의 블라우스를 입고, 삼촌이 준 하이힐을 신고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그녀는 영화 속에서 (하나의 은유로서) 아버지가 되어 보았다가, 삼촌이 되어 보았다가, 어머니가 되어 보았다가, 결국 그 모든 것의 혼합으로서 자신이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성장하는 이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성장하는 이들은 타인이 되어 보면서 조금씩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그러나 예전 박찬욱의 복수 연작의 인물들은 타인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자신만이 존재하였고, 타인과의 공감에 이를 수 없었다. 그들은 성장하지 못했고, 여전히 과거의 어느 순간에 발목이 붙잡힌 올드보이들이었다. 그것은 다른 부분에서 살펴볼 수도 있는데, 인디아가 성장이 가능한 인물이라는 것은 타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다시 반복하자면 박찬욱의 복수 연작들에서 인물들은 타인의 말을 듣지 못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신하균)는 청각장애인이었으며,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는 타인의 말을 듣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말만 하기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 결과 <올드보이>에서는 혀를 잘리는 징벌을 받고,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선생(최민식)은 입이 꽁꽁 틀어막힌 채로, 자신에 대한 죽음을 놓고 벌이는 격정적인 토론을 들어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인디아는 다르다. 인디아는 들을 뿐더러, 심지어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까지' 듣는다(그리고 그것은 <박쥐>의 상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아주 잘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강렬하게 타인이 되어 볼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교차편집의 효과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영화의 교차편집이 인디아와 다른 인물을 동일하게 놓고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이 때 인디아는 '영화적으로도' 그 순간 그 인물이 되어보는 중이다.)

지금까지 놓고 보면 박찬욱의 <스토커>는 할리우드라는 '새로움'과 동시에 이야기로도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찬욱의 길고 긴 복수의 이야기는 상현의 소멸과 함께 막을 내렸고, 이제 박찬욱은 그것을 뒤로 하고, 새롭게 성장하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5.
여담으로서 하나 붙여두자면 오우삼의 비둘기와 같은 것이 박찬욱에게는 계단인 것 같다. 박찬욱의 영화들에서 이야기에 계단을 활용하는 것과 그것을 촬영하는 방식이 전체적으로 꽤 흥미롭다.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들자면, <복수는 나의 것>에서 처음 류가 장기밀매업자들을 만나는 공사장 건물의 비계(飛階)처럼 보이는 빈 계단과 그것을 역광으로 잡는 숏과 같은 부분, <올드보이>에서 독특하게 생긴 회상 장면에서의 학교 계단과 카메라의 움직임(동선),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이영애)가 오르는 나선형의 아파트 계단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 <박쥐>에서 상현과 태주가 하늘을 날기 위해 오르는 계단을 건물 외부에서 창을 통해 보여주는 것, 그리고 <스토커>에서 인디아의 집에 있는 나선형 계단. 특히 <스토커>는 계단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계단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그 계단들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인디아와 다른 인물들의 모습이 그녀와 여러 인물들간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잘 드러나게 해준다. 박찬욱의 영화들은 계단의 영화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덧.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지만, 뭔가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것 같아서 블로그에 올 때마다 내심 찜찜했는데, 이제 왠지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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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10.05 18: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지난달 문학동네 팟캐스트 들으셨어요? 초대손님이 박찬욱감독이었는데 신형철씨가 <스토커> 이야기중에 은유로서의 성장담이라는 말을 꺼냈고 그러자 박찬욱감독도 동의하면서 자기가 표출하고자 했던 의도를 가장 잘 읽어내고 표현한 글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글을 찾아봐야지 했는데.. 오늘(마침내!)맥거핀님 리뷰를 통해 읽게되네요.(감사__)

    박쥐와 스토커가 이렇게 구두라는 매개물로 연결될 수 있다니! (휴우~ 놀라와라 )

    스토커에서 계단이 정확하게 기억나는 장면은요 인디아가 아빠거실에서 삼촌이 보내준 엽서와 편지들을 읽으며 한껏 감동하다가 그 편지뭉치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죠. 편지가 떨어지고 그걸 집으면서 그 모든 우편물의 발신이 정신병원이라는 걸 발견하고 안고있던 편지들을 다 내던지는 장면입니다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10.07 14: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팟캐스트 신형철씨 방송에 나왔다는 얘기는 들었어요. 아직 듣지는 못했지만..(사실 방송이 너무 긴 것 같아요.) 말하는 건 잘 모르겠지만, 최근에 박찬욱 감독이 예전에 쓴 책들을 중고서점에서 샀는데,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참 글 잘 쓴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습니다. 부럽지요. 그렇게 다방면에 재주가 있는 건 참 부러운 일입니다. (물론 글보다는 영화가 훨씬 더 좋기는 하지만요.)

      네..그 장면 기억납니다. 인디아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듯이 인디아의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직관적으로 드러난 장면이었죠. 박찬욱의 영화들을 다시보기 하면서 느낀 것은 박찬욱이 공간의 활용에 아주 능한, 그러니까 공간을 왜곡시켜 보이게 하는 것(마치 공간 자체가 감정을 담고 말하고 있는 듯이)에 아주 능한 감독이라는 거죠. <스토커>도 <박쥐>도 공간활용이 아주 멋졌습니다. (정성일씨는 박쥐의 라여사의 집이 마치 2층의 방들이 자동증식하는 것 같다,고 했었죠. 귀신들린 집이라 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