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게임을 벌이는 영화들

Ending Credit | 2013.09.02 21:38 | Posted by 맥거핀.

(<나우 유 씨 미 : 마술사기단>, <짚의 방패>의 일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관객과 게임을 벌이는 영화들이 있다. 물론 사실 이 말은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영화는 관객과 게임을 벌인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임이란 결국 참여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거의 모든) 영화는 결국 관객을 참여시키기 위해 애쓰는 무엇인가이다. 관객에게 이야기의 내용을 추론하게 만들거나, 이야기되지 않은 무엇인가를 상상하게 만들거나, 혹은 이야기된 무엇인가라도 일부러 오해를 하게 만들거나 하는 등등의 직접적인 참여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영화는 기본적으로 숏과 숏의 연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다. 숏과 숏의 연결, 그 아주 찰나적 순간에 관객은 영화에 끊임없이 참여를 한다. 즉 어떤 숏의 이후에 다음의 다른 숏이 붙을 때 우리는 그 사이의 무엇인가를 아주 짧게라도 상상을 한다(그리고 그것이 영화가 이어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의 숏들을 보는 것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 때 우리는 감독이 제안하는 게임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내용에 대한 이해를 둘러싼 게임일 수도 있고, 어떤 철학적인 고찰에 대한 게임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들거나, 혹은 누군가를 증오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결국 관객의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게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물론 어떤 게임은 성공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게임은 실패하기도 한다. 그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혹은 감독의 입장에서 다르게 작동하는 나름의 성공 혹은 나름의 실패이다(즉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감독이 이긴다고 관객이 지는, 혹은 관객이 이긴다고 감독이 지는 그런 게임은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에 본 아래의 두 편의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들보다 훨씬 더 게임의 위치에 가깝게 다가가 있다. 물론 나는 감독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으니 관객의 입장에서 제멋대로 성공하거나 실패할 뿐이다. 그 성공 혹은 실패의 기록들.  


나우 유 씨 미 : 마술사기단, 루이스 리터리어, 2013

사실 이야기 자체로는 별로 흥미로울 것은 없다. 이 영화는 결국 4번의 마술공연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영화이다. 4번의 마술공연이란 영화의 주인공들인 4명의 호스맨이 보여주는 3번의 마술 공연과 감독이 관객에게 행하는 1번의 마지막 공연이다. 이 마지막 공연은 지금까지 영화의 모든 트릭을  만들어낸 최종의 마술사(범인)가 누구인지를 맞추는 마술이며, 지금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과 벌이는 일종의 마술 혹은 게임이다. 즉 이 영화는 마술과 영화를 일종의 동일 선상에 놓고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으며, 영화를 통해서 마술을 보여줌은 물론, 마술을 통해서 영화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다보니 이야기와 별개로 영화와 마술이라는 것이 꽤 공통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영화와 마술 모두 기본적으로 수많은 관객을 앞에 놓고 벌이는 일종의 눈속임이다. 마술이 마술사의 현란한 손놀림이나 어떤 도구적인 트릭으로 관객을 속인다면, 영화는 배우의 연기, 카메라 트릭, 편집의 활용, 사운드나 기타 도구의 활용 등등 무궁무진한 방법으로 관객을 속인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속이기 위해서는 일부분을 관객에게 숨김없이 보여주어야 한다(혹은 숨김없이 보여준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마술사는 카드를 섞는 모습을 일부러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카드가 어떤 트릭없이 섞였음을 관객에게 믿게 만들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영화도 추리물이라면 추리를 하기 위해 필요한 일정 정도의 정보를 관객에게 제공할  필요가 있다. 또한 모두 비슷한 수법을 활용하는데 예를 들어, 이 영화 속에서도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만, 마술은 기본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다른 것으로 이끌면서 이루어지는 트릭이다. 예를 들어 마술사가 기를 불어넣는다며 특이한 동작을 하거나, 기합을 넣는 것, 혹은 늘씬한 미녀 조력자를 등장시키는 것 등등은 시선을 그쪽으로 유도시키고, 다른 곳에서 무엇인가를 벌이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영화들은 관객의 정신을 끌만한 장치(맥거핀)를 영화 속에 일부러 삽입한다. 또한 영화나 마술이나 철저한 사전준비가 필요하며, 그것에 이 공연의 성패가 달려있다. 영화든 마술이든 그 표면만 볼 때에는 말 그대로 일종의 마법이나 초능력처럼 보이지만, 그 숨겨진 내부에는 미리 철저하게 준비된 무엇 혹은 때로는 아주 복잡하거나 더럽고 이상한 무엇인가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을 얼마나 세심하게 준비하는가에 따라서 이 공연의 성패가 달려있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표면적인 공통점이고, 보다 깊숙히 들어가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마술이든 영화든 결국 관객과의 일종의 규약으로 성립이 된다는 점이다. 즉 두 가지 모두 관객은 속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속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의 규약이란 이미 마술사와 사전에 약속을 한 특정의 관객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마술을 보고 있는 모든 관객들은 '저것이 마술이다' 즉 일종의 속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잘 인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앞 부분에서 보여주듯이 정해진 시간 내에 물이 가득한 수조를 탈출해야 하는 마술을 마술사가 벌일 때 모든 관객들은 마술사가 결국 빠져나오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혹은 빠져나오게 된다고 믿는다.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관객은 마술을 즐길 수가 없을 뿐더러, 그 마술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과거의 어떤 마술사의 이야기처럼 금고에 갇힌 채로 강물에 뛰어드는 마술을 보여준다고 했을 때, 그 결말이 결국 마술사가 금고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이미 마술이 아니라 비극이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영화 속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그 누군가가 실제로 죽지 않았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와 관객이 맺는 일종의 규약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규약을 지키지 않고 즐기려는 자들이 생겨난다는 데 있다. 즉 실제로 어떤 이들은 마술사가 결국 수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에 더 쾌감을 느낀다. 또 어떤 이들은 누군가가 실제로 죽었다는 데에서 그 죽음을 보는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는 이미 마술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다. 그저 (내 관점으로 보면) 참혹한 것일 뿐이다. 즉 이것을 즐기는 것은 마술이나 영화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마술을 하나의 영화로서 보는 입장에서 결국 이 영화 안에서 결국 가장 곤란을 겪을 자가 누구인지는 자명한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첨언하고 싶은 것은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비밀을 밝혀내는 과정의 아쉬움이다. 왜냐하면 관객의 입장에서 이 마지막은 상당히 치밀하지 못한 트릭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차피 관객은 영화관에 속기 위해서 가며, 또한 감독과 관객의 게임 역시 기본적으로 상당히 불공정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카드 마술로 말하자면 카드를 섞을 때 관객의 눈앞에서 섞는 것이 아니라 모자 속에 숨겨놓고 섞는 식이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마술사가 내가 골라낸 카드를 아무리 맞춰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이 영화는 시작부에 관객이 가까이에서 볼수록 속이기 더 쉽다, 고 관객에게 조언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조언은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마술은 대신 면적 1 제곱미터의 방에서 이루어지는 마술이라는 점이다. 멀리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짚의 방패, 미이케 다카시, 2013

일곱 살 짜리 여자아이를 단지 쾌감을 위해 때려 죽인 연쇄 살인마가 있다. 그런데 그 죽은 여자아이는 재계 거물의 손녀였고, 그 재계 거물은 그를 죽이는 자에게 10억엔을 준다는 신문광고를 낸다. 실제적인 위협 앞에서 그 살인마는 도리어 경찰에 자수하는 방법을 택하고, 그를 심문하고 재판에 넘기기 위해 그가 자수한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이송하는데 경호팀이 동원된다. 이송 도중에 경찰 및 정예 경호요원이 포함된 이들 경호팀에게 끊임없는 공격(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일반인의 공격보다 주위 경찰들의 공격이다)이 이어지고, 이들의 위치가 인터넷에 노출되고, 미수자에게도 1억엔을 주고, 그 재계 거물의 관련 회사에 취업시켜 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건은 겉잡을 수 없이 혼돈에 빠져든다. 특히 그들의 위치가 계속 알려진다는 점은 그들 경호팀 내부에 내통자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데...

이런 것이 내용이고 보면, 여기서의 게임이란 과연 이들 중에서 내통자가 누구인지 맞추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들 중에서 이 연쇄 살인마를 결국 죽이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다. 영화 속 정예 경호요원인 메가리(오사와 타카오)의 말을 빌어서 보면, 정작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고 변변한 무기도 없는 일반인들이 아니라, 훈련받고 무기도 갖춘 경찰들, 즉 이 호송 차량의 경호를 위해 나선 주위의 경찰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확장하면 결국 가장 위험한 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 경호팀이다. 이들은 그들이 이송해야 하는 연쇄 살인마에게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을 뿐더러, 모두 무기의 사용이 용이하다. 또한 이들 조직은 여러 다른 배경을 가진 오늘 처음 구성된 조직으로 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도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금 걸리는 것은 감독의 이름이다. 감독은 (요즘 들어서 많이 약해졌다고는 해도) <비지터 Q>, <카타쿠리가의 행복>, <이치 더 킬러>의 소소한 변태 미이케 다카시니까. 그러므로 어쩌면 문제는 <씨네21>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어울릴 듯한 이 이야기에 이 미이케 다카시가 끌렸는가라는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포인트는 호송 과정의 스릴이나 스펙터클, 혹은 누가 내통자인가를 찾는 추리가 아니라 다른 것에 있을 것이다.

그 다른 것이란, 예를 들어 과연 악은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물음이다. 즉 이 연쇄 살인마를 어떻게든 죽이고 돈을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이 사람들을 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 여기 이 남자가 연쇄 살인마라면 그를 죽이는 것이 도리어 선의 실천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들을 경호하는 경호팀이 아무리 상부의 지시라고 해도 도리어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와 같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들. 즉 명확해 보였던 선과 악의 경계는 점점 옅어지고 관객은 점점 명확히 판단을 할 수 없는 세계로 이끌려 들어간다. 이상한 변태 행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줄줄이 이어나감으로써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즉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흩뜨려놓고 관객을 점점 알 수 없는 세계로 이끌었던 그의 전작들처럼 말이다. 더 수상한 것은 연쇄 살인마 기요마루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이 기요마루라는 남자는 마치 악 그 자체, 악의 극단의 끝까지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단지 쾌감을 위해 일곱 살 짜리 여자아이를 때려 죽였다는 사실로도 그러하지만, 자신을 보호하려던 주위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그는 그 죽음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며, 자신의 어머니가 자살한 소식을 탈출의 기회로 이용하는 등 그는 보호할 가치가 없을 뿐더러, 도리어 죽이는 것이 당연히 마땅한 인물로 보인다(이 기요마루 역할은 <데스노트>의 키라로 등장해 잘 알려진 후지와라 타츠야가 맡고 있는데, 그 이미지와 겹쳐서 더 사악해 보인다).

미이케 다카시가 수상한 것은 영화 내내 이 연쇄 살인마 기요마루의 사악한 반응숏과 그의 행동들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관객들에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즉 이 때 미이케 다카시는 영화의 인물들에게만이 아니라, 관객들마저 이 게임에 동참시키고 있다. 이 기요마루라는 남자를 죽이는 게임, 혹은 이래도 이 남자를 죽이지 않을 거냐고 묻는 게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 내내 이 기요마루를 죽이고 싶어서 혼났다, 혹은 왜 이런 살인마를 보호해야 하지? 영화의 설정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와 같은 이 영화에 대한 짧은 100자평들은 영화평이면서 동시에 이 게임에 참가한 참가자들의 소감이기도 하다. 또한 이는 동시에 사형제에 대한 물음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영화 전체가 거대한 사형에 대한 비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영화 내내 충돌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이 살인마를 보호하려는 사람들 각자의 내부에 싹트는 가치관의 충돌이다. 이 당연히 죽여야 할 자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 혹은 국가기관이 보호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은 사형제에 내재된 질문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형제에 반대한다는 것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가 설혹 악마 그 자체라도 살려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메가리를 비롯한 경호팀들이 그를 살려서 데려가도 결국 사형을 받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를 여기서 죽게 내버려두는 것, 혹은 죽이는 것은 다른 범주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도 보인다. 모든 인간은 결국 죽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사악한 살인마라도 말이다. 그가 '결국에 죽는다는 것'과 '그를 여기서 죽이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후회한다. 어차피 사형을 당할거라면 이왕이면 더 많이 죽일 걸 그랬다."라고 이 남자는 당신과 눈을 마주치며 말하고 있다. 당신은 그를 죽이고 싶어할까, 아닐까. 미이케 다카시는 당신에게 사악한 게임을 제안한다. 아무래도 그는 변태인가 보다.      

(근데 '짚의 방패'라는 제목은 '짚으로 만든 방패' 등으로 바꾸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의'라는 사용이 아무리 보편화되었다해도 이것은 아무래도 어색해 보인다. 아무리 일본 영화라고 해도.)
  



 

- 2013년 8월, 롯데시네마 피카디리, 부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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