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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된다

The Book | 2013. 8. 17. 16:33 | Posted by 맥거핀.


색채가없는다자키쓰쿠루와그가순례를떠난해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민음사,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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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잘 외우기 힘든 소설,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제목을 가진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다. 제목이 외우기 힘든 것은 단순히 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제목이 뭔가 일반적이지 않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냥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란 무슨 의미일까? 이 말이 굳이 제목에 들어간다는 것은 '색채가 없다'는 것이 다자키 쓰쿠루라는 사람을 나타내기에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는 꽤 드물기는 하지만, 색채가 없다, 혹은 색깔이 없다는 말을 사람에게 쓰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개성이 없다'와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전부일까. 아마도 그것만으로 이 이상한 말이 제목에 붙어야 할 모든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니? 일반적으로 보면 이것은 조금 이상한 문장이다. 이 문장과 동일한 의미의 무엇인가를 전달하고자 할 때는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라고 쓰면 된다. 즉 여기서의 '그'가 다자키 쓰쿠루라면 이 문장은 이상하게 중첩되고 낭비된 문장이다. 다자키 쓰쿠루와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라니.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의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하다. 과연 여기에서 '그'는 다자키 쓰쿠루일까. 이 제목만 봐서는 '그'가 그 앞에 있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고 확실하게 주장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그리고 그래야만 이 문장이 도리어 말이 조금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아무튼 간에 하드 커버를 넘겨 소설을 들여다봐야만 할 것만 같다.

하루키의 많은 소설들이 그러했듯, 이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한 가지 미스테리한 것, 혹은 무엇인가 기묘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다자키 쓰쿠루가 대학교 2학년 때 겪은 일인데,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 그룹으로부터 아무 이유도 없이(다자키 쓰쿠루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추방당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그룹의 나머지 친구들은 모두 이름에 색채를 표현하는 한자가 포함되어 있고, 다자키 쓰쿠루만 이름에 색채를 표현하는 한자가 없었던 것이다. 아오(靑)와 아카(赤)라는 두 사람의 남자아이, 그리고 구로(黑)와 시로(白)라는 두 명의 여자아이, 그리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런데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 테지만) 이 네 사람의 이름의 조합은 그 자체가 너무나도 기묘하게 여겨진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남자아이들과 하얀색과 검은색의 여자아이라니, 이 완벽한 대비의 구조라니, 이게 과연 가능한 조합일까. 과연 이들은 존재하는 무엇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일까. 아, 물론 나는 모든 소설이 허구라는 지극히 자명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비유의 구조가 너무 도식적이라 도리어 조금은 의아해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이 완벽한 구조인 것은 단지 색상표의 색채대비의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다. 하루키의 묘사를 빌리자면 아카는 성적은 탁월하지만, 그것을 내세우지 않고 배려한다. 아오는 체격이 좋고 성격이 활달하며 운동을 좋아한다. 시로는 외모가 뛰어나고 피아노를 잘 치지만, 말수가 적고 차분하다. 구로는 외모는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애교가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한다. 그러니까 이 조합은 두뇌와 건강과 외모와 재치의 조합이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조합이라고 감히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색상대비표에서 각각의 색들이 어떤 완벽의 극단에서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것처럼, 이들 역시 각각 무엇인가를 표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있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딱히 뛰어난 재능도 없고, 공부를 아주 잘하거나 특별한 면도 없고, 외모마저도 돌아서면 잊기 쉬운 외모이다.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가 이 친구 그룹을 그야말로 완벽한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이 그룹에서 추방당하자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게 되는 것도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당시 쓰쿠루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이었고, 이 완전한 존재들과 일체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쓰쿠루에게는 일종의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끼는 것이었다. 즉 쓰쿠루는 이들에게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떤 완전함을 보았고, 그것들의 조화를 보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꼈다. 그것은 쓰쿠루가 철도와 역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놓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철도와 역은 쓰쿠루에게 완전함이 어우러지는 조화의 공간이다.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고 다시 정확한 시간에 떠나는 기차역의 열차들, 각자 도착하여야 하는 목표지점을 가지고 조화롭게 움직이는 역의 사람들, 이들이 어우러지는 철도와 역은 조화로운 물결, 이미 정해져있는 어떤 흐름이 반복되는 조응의 공간이다. 그리고 쓰쿠루는 머리가 어지럽고, 생각이 많아질때면 역에 가서 그 사람들과 열차들의 흐름을 바라본다. 그 정시 등장과 정시 퇴장의 정확한 흐름들을 말이다. 

그러나 조화로운 공간에서 조화롭게 존재하는 것이란 그 자체만으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는 도식적인 구조가 깨지는 데에서 긴장이 생겨나고,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색채가 없는 쓰쿠루가 완전한 자들을 위한 이 그룹에서 추방되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에서 뿐만아니라 구조로 볼 때 어쩌면 필연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리고 죽음만을 생각했던 쓰쿠루를 죽지 않게 하려면 두 가지의 길이 있다(물론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라고 작가가 첫 문장을 쓰는 것은 그를 죽일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는 그에게 색채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다자키 쓰쿠루는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답게 후자의 길을 간다.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주위의 색채를 빼야한다. 다시 말해서 다자키 쓰쿠루만이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님을, 주위의 모든 것들이 사실 색채가 없었음을, 혹은 모든 것이 나름의 색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고 했을 때, 이 말 앞에는 '완전한' 혹은 '눈에 띄는'이라는 말이 빠진 것이다. 누구나 색채는 있다. 노르스름하다던가, 희뿌옇다던가 하는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색채말이다. 완전한 파랑이나 완전한 빨강이나, 완전한 검정이나 완벽한 흰색은 아니어도 말이다(그것은 실제보다는 이렇게 소설 속에 등장한다). 다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이 명확하지 않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상태 즉, 청과 적과 흑과 백이 나름의 비율로 섞여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루키도 처음의 그룹을 보여준 후 이제 색채를 섞기 시작한다. 하이다(회색)와 미도리카와(녹색)의 등장이 그것이다(그것도 하필이면 흑과 백 사이에 있는 회색과 청과 적 사이에 있는 녹색이라니, 하루키 씨 정말 귀엽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을 만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름에 아무 색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라를 만나고, 그리고 다시 네 명의 옛친구들을 만나며 쓰쿠루는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그것은 후반부의 네 친구를 보면 잘 드러난다. 이제 그 친구들은 예전의 강렬한 그 색채가 아니다. 붉그스레한 무엇인가, 혹은 파르스름한 무엇인가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강렬한 색채를 가졌던 그들은 더 이상 원색의 그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다고 자신의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니니까. 색상대비표의 가장 가장자리의 색들은 오히려 위험하니까. 예를 들어 흰색은 어쨌든 검어지는 길밖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까. 흰색이 검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친다면 오히려 그 반대편 낭떠러지에 있는 악령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 친구들의 말대로 오히려 쓰쿠루에게 그들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 그리고 그 그룹을 유지시키기 위해 쓰쿠루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쓰쿠루는 만들다(作)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쓰쿠루는 이 소설에서 역을 만드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이고, 그리고 동시에 색을 섞어 새로운 색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그러므로 쓰쿠루가 빠지면 그룹은 유지될 수 없다). 쓰쿠루는 그렇게 색채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는, 그럼으로써 도리어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색을 만들어가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제목에서 '그'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왜냐하면 순례를 떠난 다자키 쓰쿠루는 예전의 색채가 없는(스스로 '완전한(원색의)' 색채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 제목이 이해가 되며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그는 이제 예전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덧.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이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 대다수는 다자키 쓰쿠루처럼 색채가 없다고, 혹은 자신이 뭔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완전한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예정된 인간의 운명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이야기 역시도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이 자신만의 에덴동산을 찾으려 발버둥치는 이야기이다). 물론 소설은 불완전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만은 없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주인공이 아닌(혹은 아니라고 믿고 있는) 당신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니까. 불완전한 시대의 불완전한 인간들은 그렇게 현대 소설에서, 특히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여 왔다. 물론 하루키의 이런 인물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아직까지는 이 소설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닌,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이다. 

사실 구조상으로 보면 이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노르웨이의 숲>과 상당히 동일한 부분들이 있으며, 따라서 그 소설의 다른 버전, 혹은 2000년대 버전으로 보인다(나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읽었다). <색채가 없는...>은 현재의 쓰쿠루, 즉 30대 중반에 접어든 쓰쿠루가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사건에 맞닥뜨리는 이야기이며, <노르웨이의 숲> 역시 서른일곱 살의 '나'가 비행기 안에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비틀즈의 음악을 들으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데에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에서 출발하는 이야기가 결국은 사라에게 전화를 하는 것에서 끝나는 <색채가 없는...>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의 숲>의 시작은 '죽음과 마주했던 열일곱살의 봄날'(2장의 제목)이며, 마지막은 미도리에게 전화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마지막 전화에 담겨진 의미는 두 소설 모두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즉 인물로 보면 <노르웨이의 숲>의 나오코에게 이 소설의 시로를 매칭하고, 미도리에게 사라를 매칭할 수 있다. 즉 열일곱살 혹은 스무살(<색채가 없는...>의 대학교 2학년)의 나는 죽음에서 시작하지만 각자 나름의 순례를 마친 후에 미도리와 사라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하루키가 그들에게, 아니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자신을 긍정하는 것, 혹은 '그래도 된다'와 같은 것들이다.

하루키는 오랫동안 소설들에서 여러가지를 이야기해왔지만, 어쩌면 그것은 비슷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된다는 것.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것. 지금 그러고 있어도 괜찮다는 것. 하루키가 대학교  때의 나에게 말해준 것도 그런 것이었다. 대학 어느날의 나는 도서관에서 네 마리 째의 '태엽감는 새'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푸른 검색 화면은 그것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해줬지만, 그것은 어딘가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그것을 숨겨놓았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도서관을 헤매고 다녔다. 도서관은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와 같았고, 안쪽 깊숙한 곳에는 양사나이나 일각수가 있을 것 같은 어두침침한 방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도서관 앞 광장에서는 연일 목적을 알 수 없거나, 애써 목적을 모른채 했던 집회가 이어졌고, 나는 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는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하루키의 소설들을 읽었다. 들리지 않으면, 한 때 같은 목소리를 냈던 그들의 목소리들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깊숙한 곳에 가서도 웅웅, 웅웅 이상한 진동이 느껴졌고, 나는 그럴 때마다 창이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빈 벽을 살금살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게 진짜 울리는 것일까, 아니면 내 머리 속의 무엇인가가, 혹은 하루키의 소설이 만들어낸 무엇인가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하루키는 그런 이들에게 오랫동안 '그래도 된다'고 말해왔다. 아카가 했던 이야기에서처럼 하고 싶어서 하는 선택들이 아니라, 어떤 것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없이 하는 선택들이 하루키는 정작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런 것 중의 하나는 악령을 피하는 것이다. 완벽해지려는 악령, 일체감을 느끼려는 악령, 정확해지려는 악령, 누구보다도 뛰어나려는 악령들을 우리는 피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일단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색채가 없어도 괜찮다고,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아도, 무엇인가가 완전하게 조화되지 않아도 괜찮아고 생각하는 것. 불완전한 당신은 불완전한 선택을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것. 마음은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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