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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찬욱

Ending Credit | 2013. 7. 10. 00:20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2006년 12월 박찬욱은 복수 연작의 어떤 변주, 혹은 색다른 복수를 보기를 원했던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상당히 이상해 보이는 소품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내놓고 돌아왔다. 기괴한 행동과 말들을 거듭하는 캐릭터와 반질반질하고 아기자기하고 키치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도리어 괴이하게 보였던 정신병원이라는 공간도 그렇지만, 사실 가장 이상해보였던, 그러므로 불친절하게 보였던 것은 그 이야기의 방식이었다. 박찬욱 영화에 으레 있으리라고 기대되었던 충격적인 사건도 없었고, 충격적인 반전도 없을뿐더러, 사실 변변한 '사건'이라고 부를만한 것조차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에 있는 것은 오로지 이상한 틀니를 끼우고 멍한 눈으로 손끝에서 총알을 발사하는 여자주인공과 이상한 토끼가면을 뒤집어 쓰고 살금살금 걸어다니는 남자주인공과 그들 못지 않게 이상해보이는 행동을 거듭하는 주위의 다른 정신병을 가진 인물들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 캐릭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마도 영화의 거의 전부를 이야기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시작은 그들의 정신병이 왜 촉발되었는지, 특히 여자주인공 영군(임수정)이 왜 스스로를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지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영화는 그녀가 왜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지를 그리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영화의 오프닝에서 이미 스스로를 싸이보그라고 생각하고 있는 영군을 본다(박찬욱 영화의 오프닝이 대체로 멋진 것이 사실이지만, 특히 이 영화의 오프닝은 그 어떤 다른 영화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정신병(우리가 그것을 '정신병'이라고 부른다면 말이다)의 원인을 대강 추론하여 짐작하는 수밖에 없다. 먼저 한 가지 전제해 두어야 할 것은 많은 정신병자들이 그러하듯이 이 영군도 나름의 확고한 논리의 체계가 있으며 그 체계에 따라 사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군은 영화 내내 밥을 먹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영군이 스스로를 싸이보그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한 귀결이다. 기계장치를 몸 안에 가진 싸이보그가 밥을 먹을 이유는 없다(그래서 영군은 남들이 밥을 먹을 때 건전지를 입에 대고 충전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밥을 먹지 않는 것에는 무의식적인 다른 것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녀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대상이었던 할머니의 존재 말이다. 영군은 자신을 쥐라고 생각하며, 무만 갉아먹었던 할머니가 정신병원에 끌려가며 틀니를 놓고가서 더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쩌면 영군의 단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즉 자신이 틀니를 전달해주지 못해 할머니는 굶고 있는데, 자신만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죄책감이 여기에는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표면상으로 이 죄책감을 드러내는 것은 그녀를 더 괴롭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신을 지탱하게 해줄 편리한 하나의 논리체계를 만들어냈다(그것은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극단적인 경우에 이 죄책감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 그리고 박찬욱은 이미 <올드보이>에서 죽는 것보다는 정신병을 가지고라도 살아남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즉 그녀에게 '싸이보그라는 망상'은 그녀를 지탱하게 해주는 것이다). 싸이보그는 밥을 먹을 필요가, 아니 밥을 먹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하고 많은 것 중 싸이보그일까. 싸이보그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그것의 겉모습과 안이 다르다는 것, 즉 원래의 인간의 내장이 다른 것, 즉 싸이보그의 경우라면 기계장치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몇 가지를 연상시키는데, 예를 들어 그녀가 가장 소중하게 가지고 다니는 할머니의 틀니 같은 것이다. 틀니는 원래 있던 이의 대체품이다. 즉 틀니는 원래 있던 것이 사라지고 기계장치적인 어떤 것이 인간의 신체 일부를 대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망상이 실재를 대체하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하다. 그것은 망상이 어떤 의미에서는 (죽지 않고) 그 망상을 가진 존재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면에서도 그렇지만, 그것이 오랜기간 실재를 대체할 경우, 그 실재를 망가뜨린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할머니는 영군에게 충고한다. 틀니를 끼우지 말라고, 왜냐하면 자꾸 끼우면 진짜 이가 망가지니까). 그러나 아무튼 영군은 안을 기계장치라도 좋으니 무엇인가로 채워넣어야만 했다. 그것은 할머니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안이 비어버린 영군의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일단 무엇인가 안을 채우면 된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어머니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아니 이상한 농담은 그녀의 어머니가 순대를 만드는 일을 한다는 점이다. 순대란 돼지의 창자에서 원래 있던 것을 비워내고 당면을 채워넣은 음식이다. 한 마디로 싸이보그와 같은 음식.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저 그녀의 빈 것을 아무 것이라도 좋으니 채워넣기를 바란다. 자신이 싸이보그라고 고백하는 진지한 영군에게 그녀의 어머니는 입에 순대를 밀어넣으며, 그녀가 받아먹자, 그럼 되었다고, 싸이버..인지 뭐인지는 상관이 없으니 먹으니까 되었다고 답한다. 이는 정신병원의 하얀맨(의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는 사실 영군의 망상이 무엇이든, 즉 그녀가 싸이보그인지 뭐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강제로 주입하여 그들이 믿는 치료를 행하는 것이다. 그 강제로 주입되는 것들, 예를 들어 그것은 대통령이 누구야, 와 같은 질문들이고, 답을 하지 못하는 영군은 원래 그것을 몰랐다고 답한다. 물론 사실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결국 밥을 먹게 만드는 것은 하얀맨들이 아니라 일순(정지훈)이다. 일순의 접근법은 하얀맨들과 다르다. 하얀맨들은 그녀 고유의 망상의 체계를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인 주입의 방식을 택했지만(그녀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의 방식은 그녀의 망상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즉 이 고유의 망상에 음식을 기계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장치를 몸 속에 집어넣었다는 망상을 추가하는 것,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은 멋지게 성공을 거둔다(이 일순의 수술(?) 장면은 평론가 김혜리 씨가 박찬욱 영화들의 가장 로맨틱한 장면으로 꼽기도 했다. 사실 나는 이 두 배우를 모두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의 말에는 적극 동의한다. 일순은 이 수술로 영군을 치료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 어머니가 남기고 간 물건을 그녀 안에 심음으로서 그것에 대한 고착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럼 일순에게는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것의 단초는 일순이라는 캐릭터의 어떤 특성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정신병적인 부분이란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에게서 훔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가 훔치는 것이 어떤 '물질적인 물건'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한 환자에게는 탁구를 치는 능력을 훔치기도 하고, 다른 환자에게는 타인에게 매우 미안해하는 마음을 훔치기도 하며, 영군에게는 그녀의 부탁으로 동정심을 훔치기도 한다. 즉 조금 더 명확하게 표현한다면, 그의 정신병이란 무엇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어떤 특성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그의 정신병이란 '타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한 가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타인이 되어 보는 것, 그것은 그의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주인공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 동진(송강호)은 영화 속에서 결코 타인이 되어 본 적이 없었고, 그러므로 어떠한 동정심도 갖추지 못했으며, 그 댓가로 배에 칼이 꽂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이 동진을 살릴 수도 있었던 동정심, 이것은 일순에게는 이미 갖춰져 있다. 그것은 그가 타인의 입장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화 속에서 영군이 밥을 먹지 못할 때, 그녀가 독방에 홀로 갇혀있을 때 누구보다도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그녀를 돕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런 캐릭터는 일찍이 박찬욱의 영화에서 존재하지 않은 캐릭터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영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속에서 영군은 반복되는 메시지를 듣는다(물론 이것은 그녀가 그전에 듣던 라디오에서 혹은 공장의 기계적인 지시음에서 유래한 망상이다). 동정하지 않기, 망설이지 않기,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슬퍼하지 않기 등등의 메시지를 말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이 중의 으뜸은 동정하지 않기라고 이야기해준다. 즉 이것은 일종의 그녀가 만들어낸 스스로의 금기이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해보면 어떤 것이 지금부터 금기된다는 것은, 그것이 이미 이전에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즉 그녀가 스스로에게 그것을 금하는 것은, 그녀가 망설이고,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고, 슬퍼하고, 무엇보다도 동정하는 캐릭터임을 말해준다. 즉 영군 역시 일순 못지 않게 동정심을 갖추고 있다. 다른 모든 가족은 할머니를 어딘가로 치워버려야 하는 존재로만 생각했지만, 그 할머니를 진심으로 동정하고 할머니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노력한 것은 영군 뿐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생각해보면 복수 연작들과 동떨어져 보였던, 그래서 상당히 기괴한 소품으로만 보였던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사실 이 복수 연작의 거울 선상에 위치한 것을 알 수 있다. 복수 연작에서 수많은 인물들은 미치지 않은 상태에서 점점 미쳐갔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미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 중의 상당수는 이미 미쳐 있었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와 반대로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영군과 일순은 미쳐 있었지만, 다시 미치지 않은 상태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거나, 사실은 처음부터 미치지 않았던 것처럼도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복수 연작의 어떤 인물도 갖추지 못한(금자씨는 미약하게나마 갖추게 되었지만), 동정을 가진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영군과 일순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다른 주변 인물들 역시 동정심을 갖추게 된 것처럼도 보인다. 영화의 끄트머리에 다다라, 영군이 억지로 밥을 먹는 장면을 보면 식당의 모든 환자들은 영군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하며, 그녀가 밥을 먹기를 응원한다. 어떠한 하얀맨도 없이 이루어지는 이 장면에서 모든 정신병자들은 이미 타인이 되어가는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정신병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좁은 의미로 보면 '싸이보그지만 (먹어도) 괜찮아'라는 것이지만, 사실은 '싸이코지만 괜찮아'이다. 비록 그들은 싸이코지만 괜찮다. 그것은 '그들의 그 미쳐 있는 상태'가 그들에게 크게 안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약간은 좁은 의미에서도 그러하지만(즉 그들은 '미치는' 상태가 아니라, '미친' 상태이며 이는 망상을 가지고서도 그것이 그들의 삶의 유지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보다 넓은 의미로 보면 그들이 도리어 '정상'이라고 말해지는 사람들보다 낫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싸이코지만 (싸이코가 아닌 자들보다) 괜찮아'이다. 그러므로 영군의 할머니는 영군의 환상 속에서 나타나, 그녀가 10만 볼트의 충전을 하여 핵폭탄이 되기를 원한다. 물론 그 핵폭탄은 동정의 파편들을 세상 천지에 넓게 퍼뜨리는 핵폭탄일 것이다. 박찬욱은 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라는 이상한 우화를 통해 우리가 걸러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지켜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미완의 해결이다. 남들보다 유난히 뛰어난 동정심을 가진 이들이 이미 이야기를 정신병원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즉 이 사회는 '남들보다 뛰어난 동정심'을 원치 않는다. 사회는 여전히 등가교환과 그에 따른 대체로 이루어져 있다. 영군이 처음 싸이보그라는 망상을 가지게 된 것에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 외에도 그녀를 단지 하나의 싸이보그로밖에 여기지 않는, 그녀가 처음 일했던 공장의 시스템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줄지어 늘어선 여공들이 같이 동작을 되풀이하는 이 처음의 장면에서 영군은 그 공장의 거대한 부속물이고, 영군이 빠지게 된 자리는 아마 다른 부속물, 다른 여공이 대체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자신의 몸이 기계로 대체되었다고 믿는 것에는 이러한 공장에서 얻게 된 것들도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지나친 동정심은 등가교환을 무너뜨린다. 일순이 말한 평생보장 AS는 이 사회에 없다. 즉 어떠한 관점에서는 동정심은 등가교환하는 자본주의적인 원칙을 어지럽히는 일종의 바이러스이며, 그런 측면에서 바이러스는 하얀맨들에 의해 치유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 바이러스의 보균자들은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또다른 바이러스가 있다. 아니 어쩌면 두 가지의 바이러스'들'이 있다. 박찬욱의 복수 연작들에서 복수는 돌고 돈다. 즉 복수는 교환되고, 그 교환의 고리를 끊지 않는 한, 그들에게 영혼의 구원이란 없다. 그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우화로 숨고르기를 한 박찬욱은 그 등가교환과 대체의 지독한 고리를 끊기 위한 하나의 가능성을 이 바이러스들의 탐구를 통해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영화 <박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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