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www.kmdb.or.kr/indie/board/column_list.asp?seq=83&GotoPage=1

 


언제나 윤리의 편에서서

- 글: 김종관 (영화감독)

프로파간다는 상업영화의 전략이 되었다. 잔혹한 살인과 인신매매를 일삼는 악한의 내장을 뜯고 눈알을 파내는 잘 생긴 남자가 나오는 영웅담이 흥행이 된 것처럼 (동시에 개봉했던 두 개의 잔혹한 액션 영화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 같은 잔혹성에도 확실한 주적이 있는 아저씨는 흥행했고 주적을 찾을 수 없는 악마를 보았다는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사회의 모순과 무조건적인 악의를 겨냥한 호전적인 영화들이 상업영화의 진영에서 달려들고 있다. 그들은 우라까이 액션영화처럼 단순하고 저돌적인 힘을 추구하기 위해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만들고 사회 저편의 절대적인 악을 설정해 놓고 그들과 치열하게 싸운다. 타깃화 된 이념, 그룹, 종교는 단순화되고 그 특징적인 단면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분노케 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뜨겁게 움직인다. 아무도 영화에서 이성적인 균형감을 원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싸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화를 내고 있다. SNS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의 분노를 자주 목격할 수 있다. 그 분노는 일리 있고 현명할 때도 있지만 상당수는 그렇지 못하다. 커다란 강물처럼 흘러가는 트윗의 타임라인에서 사람들은 분노에 가장 많이 모여든다. 어떤 범죄, 어떤 진영, 어리석은 식견과 아둔한 실언들은 공분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 중 누군가는 연대하기 위해, 한편의 무리에 섞이기 위해 분노를 이용한다. 또 누군가는 자기 안의 결함을 사회적인 분노로 치환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분노의 뇌선을 건드려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대중들이 확보된 셈이다. 사회의 의식을 겨냥한 영화, 특히 화를 내는 방식의 영화는 대중영화로써 요소를 가지고 있게 된 것이다. 독립영화는 그보다 현명하고 다양한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노골적으로 화를 내는 영화도 심심치 않게 본다.

먼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라는 굳건한 범주 안에서 화를 내고 논쟁하며 연대를 만들어 간다. 어찌 보면 많은 창작자들도 창작물들로 열심히 싸우고 있다. 여기까지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느새 많은 이들 그중에 창작자들이 윤리의 편에 서고 있다. 자기 혹은 자기를 지탱하는 테두리의 사람들을 선한 위치에 두고 저 건너에 비판을 둔다. 그들은 저 멀리의 괴물을 본다. 스스로의 괴물, 스스로의 모순에는 눈을 두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돼 버렸다. 상업영화는 대중을 위해 화를 내고 몇몇의 독립영화를 포함한 작가주의 영화들은 예술적 보상을 위해 무척 단순한 방식으로 화를 낸다. 상업영화가 애초에 대중적 기호에 맞춰간다 판단을 하더라도, 균형 없는 독립영화는 보는 이들에게 더욱더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좋은 예술가는 자기 안의 모순을 응시하면서 성장하고 성취한다. 가면을 걷어내고 옷을 벗고 자기 안의 추醜를 꺼내어 해부해야 한다.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부 마쓰모토 세이초는 매우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둔 소설을 쓰지만, 그가 메스를 들고 도려내는 것은 그 스스로의 개인적 욕망에서 반추한 인간의 속성들이다. 그는 악인의 범행을 차갑게 기술하지만 욕망을 자기 안에서 찾고 대입하기에 세월이 지나도 그 이해의 깊이가 훼손되지 않는다.

그처럼 창작자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균형을 가지려고 노력한다면 예술적 가치가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내부에 대한 응시 없이 비판의 날만 휘두르는 창작자들을 많아지는 것은 하품만 나오는 일이다. 오늘날 정의롭지만 비겁한 문학과 영화들이 종종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 편협한 속성에 이질감을 느낀다. 그런 창작물들이 피곤하다. 창작자가 윤리의 편에 서서 악을 단순화하는 것도 재미없거니와 모든 개인의 악행 이면에 사회적인 현상이 있더라는 식의 시류 적이며 쉬운 결론도 재미없다. 조직이 아니라 사람,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부를 자각하는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길 바라고 나 스스로도 그러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세월이 지나 이 재미없는 시류에 돋보이는 창작물들이,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려 결국은 세상을 찌르는 이야기들이 독립영화 안에 있었으면 좋겠다.



<폴라로이드 작동법>, <연인들>, <조금만 더 가까이> 등의 영화로 주목받았던 김종관 감독의 글. 요즘 우리 영화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는 분노의 유령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다. 아니 분노보다 기이한 것은, 대부분 이 분노의 유령들은 결국 깊은 허무와 승리의 (혹은 패배의) 자기기만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분노로 시작되어 허무로 끝나는 lose-lose 게임들. 이 글의 제목은 최근 개봉하는 어떤 영화를 연상케 하기도 하는데, 그 영화는 정말 '분노의 윤리학'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