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 이안

Ending Credit | 2013.01.11 00:24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한 TV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내용을 보니, 원주율이 주소명인 사이트가 있다.  일본의 한 기업에서 만든 '3.1415926535898.com'이라는 주소를 가진 이 사이트는 외계인에게 지구를 홍보하는 사이트인데, 다른 건 몰라도 그 주소의 발상이 재미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라면 적어도 원주율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는 것. 다시 말해서 비록 숫자라는 제한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의 값 만큼은 우주불변의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일종의 우주의 소통언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 <미지와의 조우>에서 '화음'이 일종의 언어였던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1977년 쏘아 올려져 하염없이 외계로 날아가고 있는 보이저호에는 55개의 언어로 된 인사말과 함께 아름다운 화음이 담긴 여러 음악과 원주율(파이)을 포함한 수학기호들이 실려있었고, 외계의 지적인 신호를 찾는 SETI 프로젝트 같은 것에서도 원주율은 일종의 소통언어로서 사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파이(수라즈 샤르마)가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의 어떤 아름다운 수영장에서 수학기호 파이로 바꾸어 설명하는 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특정의 맥락을 알아야만 이해하게 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는 심지어 외계인도 알고 있는 보통의 언어로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것, 다시 말해서 외계인에게 보내는 우리가 당신들과 공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던 원주율(파이)로 그의 이름이 바뀌면서 이야기가 시작하는 것은 꽤나 흥미롭다.

이름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이제 '리처드 파커'라는 기이한 이름을 가진 호랑이에 대해서 말해보자. 영화 속에서도 나오듯이 '리처드 파커'라는 이 이름은 원래 호랑이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이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외계인도 알 수 있는 보통명사를 이름으로 가진 한 소년과 어떤 고유의 내막을 가지고 있는 특정의 이름을 가진 호랑이가 같이 지내는 227일 간의 공존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름만을 놓고 보면 사실 이 두 개체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며 이 두 개체가 사실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즉 호랑이는 인간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인간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러므로 사실은 '호랑이'와 같은 보통명사 형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 파이의 아버지가 파이에게 가르치려는 이성에 바탕을 둔 메시지, 즉 인간과 짐승은 다르다는 메시지와 조금은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파이의 아버지가 파이에게 가르치려던 것은 일종의 동물의 생존본능이다. 즉 호랑이가 작은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며, 이는 종교나 인간의 감성으로 재단할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을 아버지는 이야기하려 했다.

다시 말해서 생태계라는 큰 계는 그런 식으로 유지가 된다. 더 힘이 센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으며, 대신에 약한 동물은 왕성한 번식력에 따른 많은 개체수로 보상받고, 또 먹이사슬의 구조에 의해 그 개체수는 일정하게 유지가 된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수없이 많은 날치떼가 더 큰 고래에게 잡아먹히지 않는다면 바다는 곧 날치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그 반례가 영화 속 미어캣으로 뒤덮인 섬이다.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그 섬이 식인의 섬, 죽음의 섬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지만, 그것은 미어캣의 존재로도 설명이 된다. 그 수많은 미어캣의 존재는 그곳이 생태의 섬이 아님을, 생태계의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 곳임을 말해준다. 물론 이것에는 영역의 문제가 있다. 이런 수많은 힘이 다른 동물들이 이 지구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은 그들 모두가 각자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게는 배 위에서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공존하기 위해 각자의 영역이 필요했음을 통해서 볼 수 있기도 하고, 크게는 바다 위에 던져진 파이와 리처드 파커의 존재로도 알 수 있다. 즉 바다라는 짠물은 그들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다라는 지금까지 지냈던 곳과 전혀 다른 영역에서 생존의 사투를 벌어야만 했다. 


즉 이 파이라는 인간과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의 바다 위의 227일은 다른 여러 가지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공존의 원리라는 것을 일깨운다. 그것에는 생태계의 균형과 영역의 확보가 들어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살아있는 인간과 살아있는 호랑이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이성적인 믿음으로 생각해보면 둘 중의 하나는 이야기 속에서 사라졌어야 사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그래서 이야기를 들은 이성적인 일본인들은 그 이야기를 믿지 못하고, 파이에게 다른 이야기를 요청한다. (예를 들어 그들이 내세우는 논거는 바나나는 물에 뜨지 않는다는 '과학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가 지적했듯이 사실은 두 이야기는 형태는 같다. 차이가 있다면 첫 번째에는 종의 차이가 있었고, 두 번째에는 같은 인간 종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이 수긍한 것은 결국 두 번째 이야기이다. 즉 같은 종 사이에서 벌어진 지극히 배타적인 이야기가 사실은 이성적인 그들이, 어쩌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태계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라. 사실은 다른 종이 다른 종을 잡아먹는, 공격하는 이 첫 번째 이야기가 실제 생태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며, 두 번째 이야기는 아주 지극히 특수적인 상황에서 벌어진 그로테스크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므로 사실 첫 번째의 이야기,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본 이야기는 지구에서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하이에나는 오랑우탄이나 얼룩말을 공격하며, 물론 그런 하이에나는 호랑이 앞에서 꼼짝을 못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은, 즉 개체가 멸종하고 있지 않는 것은 이들이 각자의 영역을 확보하고, 이것에는 위에서 말한 절묘한 생태계의 공존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생태계는 너무나도 절묘하게 짜여져 있어 그것에서 우리는 그것을 관장하는 어떤 다른 존재, 예를 들어 신을 상상하게 된다. 이 신이 정해준, 각자의 영역에서 적절한 숫자를 유지하며 존재하는 커다란 동물원, 그것이 어쩌면 배, 혹은 지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파이의 이야기를 믿는다면 우리는 그 둘의 기적적인 생존에도 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파이는 리처드 파커를 물에서 건져주었고, 파이는 그가 되뇌이듯 리처드 파커가 있었기 때문에 그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또한 파이가 인간으로서는 유일하게 큰 배에서 살아남은 것은 신을 경배하기 위해 선상으로 나왔기 때문이며, 그가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겼을 때 신은 그에게 떠다니는 섬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계속 버텨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공존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신 외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공존이라는 것에는 '매우 다름' 혹은 '차이'가 이미 들어 있다는 것. 우리가 '호랑이와 인간의 공존'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둘이 이미 매우 다름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즉 공존은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이 같이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이 같이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것은 물론 호랑이와 인간만의 관계에서만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파이 안의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의 종교의 공존, 혹은 채식주의자와 비채식주의자와의 공존 같은 경우에도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오늘날 우리는 흔히 공존보다는 비공존을 믿는다. 즉 서로 다른, 그것도 아주 이질적인 호랑이와 인간이 공존했다는 이야기는 믿지 않지만, 같은 종인 인간 끼리 비공존했다는 이야기를 결국에는 믿으며, 절대 같이 공존할 수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런 믿을 수 없는 공존이 실제로 이 지구상에는 벌어지고 있다. 생태계라는 거대한 계에서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면서, 그러면서도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 말이다. 그것은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잘짜여진 계라 가끔은 우리는 그 계 위의 어떤 것, 그 계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노아의 방주' 같은 이야기들. 그 비가 쏟아지는 동안 노아의 방주 속 한쌍의 동물들은 어떻게 서로서로를 잡아먹지 않고 버텼을까,라는 질문 같은 것 말이다. 물론 그것은 <라이프 오브 파이>의 다른 버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다시 결국 믿음의 문제로 돌아간다.


덧.
이 영화를 3D로 감상하였기에, 몇 가지의 이야기를 붙여둔다. 3D는 영화라는 매체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지만, 사실 이 3D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물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기술상의 문제이다. 가장 기본적인 3D의 형태를 예로 들어 이야기하면 3D는 두 대의 카메라의 2D 이미지를 붙이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즉 이 붙여진 두 개의 2D 이미지 사이의 간극은 컴퓨터의 계산이 메꾸고 있다. 그러나 이 컴퓨터의 계산이 아무리 빨라도, 즉 아무리 사이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도, 우리의 뇌가 만들어내는 계산, 눈이 실제로 지각하는 이미지의 층을 완벽하게 메우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종종 3D 영화에서 인물이나 물체는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일종의 포토샵에서 사용되는 레이어와 같은 것이랄까. 여기에는 몇 개의 층이 있어서 인물이나 물체는 이 사이 어딘가에서 입체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단순하게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놀랍게도 이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는 이상한 위력을 발휘하는데, 그것은 이 영화가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떠 있음'이 만들어내는 이중의 부력은 이 영화의 3D를 종래의 다른 3D와 다른 것처럼 보이게 한다.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이 영화의 3D를 너무 폄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안 감독의 이 3D 영화가 가장 놀랍게 하는 것은 이 영화는 그것을 보는 자에게 종종 3D임을 잊게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못 만들어진 3D영화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란, 어쩌면 역으로 그것이 3D임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런 영화들에서는 종종 3D의 효과를 과시하듯 내보이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불쑥 끼어드는 그런 장면들이 3D의 효과를 극대화하여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나, 동시에 그것은 영화의 이야기를 종종 잊게 만든다. 즉 이 장면을 3D효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넣었군, 이라고 관객이 생각하는 순간 관객은 그 영화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에서 처음 소리라는 것이 등장했을 때, 혹은 음악이 거슬릴 때와 비슷하다. 지금의 우리는 영화에서 소리(음성)가 나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그것이 영화의 감상을 저해하지 않는다. 즉 '음..지금 배우의 목소리가 나오는군'이라고 (당연히)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 처음 소리가 등장했을 때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것이 영화의 감상을 저해한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에는 한편으로 영화에 소리를 통합하는 영화적 문법이(기술이 아니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지금 어떤 영화에서 음악이 계속 거슬린다면 그것은 감독이 영화에 음악을 넣는 문법을 잘못 적용한 탓이다.) 즉 3D가 완전해지는 때는 사람들이 아..이거 3D효과군,을 더 이상 인식하지 않는 미래의 어느 때, 당연히 3D안경도 필요없는 미래의 어느 날이다.

그런 면에서 이안 감독의 이 3D영화가 3D영화로서 좋은 점은 그것이 이야기의 흐름을 끊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에는 지금부터 3D가 나와요, 그 효과를 만끽하세요,라는 과시의 장면이 없다. 그 3D효과는 상당부분 이야기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종종 나는 이것이 3D영화임을 잊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예전 안경을 쓸 때의 버릇처럼 코를 계속 문질렀지만 어느틈에 나는 코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영화를 보았다.


- 2013년 1월, 메가박스 동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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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1.20 2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아! 3D로 봐야할 영화였구나 싶었어요. 아직 3D영화체험이 없답니다.(혹시 배벌미할까 싶어서;;) 하지만 그냥 영화로도 정말 훌륭한(이런 표현이 좀 그렇긴하지만요)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양위에서 펼쳐지는영상들은 압도적이었고 고래가 헤엄치던 장면은 환상 그자체였어요! 조난당하고 뱅골호랑이와 단둘이 남은 십대소년이 227일간을 사투를 벌이는 스토리인데도(물론 놀라고 가슴은 졸였지만) 한편으론 편안하더라구요.. 이상하게 ^^; 아마 파이의 이야기를 들은 작가는 두개의 스토리중에서 저랑 똑같은쪽을 믿고 그렇게 소설을 쓸거같아요 ㅎㅎ

  2.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3.01.20 2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참! 글 너무 잘 읽었답니다. 그냥 하는 이야기아니고 이번 글은 전한테 아주 중요한 것들을 알려주셨으니까요 감사 ~

  3.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3.01.21 0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저도 사실은 3D를 그다지 즐겨서 보지 않아요. 3D로 같이 개봉하는 영화들도 왠만하면 2D를 선택하고는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안경을 너무 견딜 수가 없어서요. 그런데 이 영화는 여러 소개글을 읽고는 3D로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엇보다도 3D는 절대 찍지 않을 것 같은 감독이 굳이 3D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거든요.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 있길래,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근데 이 영화의 재밌는 것은 이 영화를 다룬 여러 리뷰들에서 그런 믿음의 문제가 다시 반복이 되더군요. 즉 첫 번째의 믿음을 2시간이 넘게 영화속에서 재현해줬지만, 어떤 재현도 없이 그 이야기로밖에 나오지 않은 두 번째의 믿음을 선택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할까요. 그래서 기꺼이 불신이라는, 혹은 상징의 해석이라는 '다른 형태의 믿음'을 선택하는 기이한 현상. (그러나 저는 여전히, 영화를 다루는 글은 자신이 본 것을 쓸 뿐이라는 그 간단한 믿음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상징적인 해석마저 자신이 본 것이라고 한다면 더 할 말이 없습니다만...)

    자신이 보는 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보게 된다는 말이 이 영화에서도, 그리고 이 영화를 둘러싼 이차적인 담론에서도 다시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그리고 제 글도 크게 다를 바는 없구요.)

    기꺼이 들러서 늘 읽어주시니, 저야말로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