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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소년, 조성희

Ending Credit | 2012. 12. 11. 16:53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전체적 내용이 들어있음)


영화 <늑대소년>은 동화다. 조성희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했듯, 이 영화는 철저하게 '동화'라는 컨셉을 가지고 시작을 했으며, 조성희 감독은 그 컨셉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플롯이 아니라, 단선적인 기승전결의 구조와 캐릭터들의 활용이 그런 부분일텐데, 예를 들어 엄마(장영남)나 마을 사람들의 캐릭터, 악역인 지태(유연석) 등을 보면, 이들은 철저하게 기능적인 활용에 머물러 있으며, 적시적소에 나타나,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고 나가는 데에만 도움을 줄 뿐, 그 활용이 제한되어 있다. 즉 외로운 산골 마을에서 딸 둘을 데리고 사는 엄마의 어려움이나, 지태의 내면적 갈등 같은 것은 이 영화가 동화를 표방하고 있는 한, 이 영화에는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동화 <빨간모자>에서 늑대가 소녀를 잡아먹을까, 말까 내적갈등을 겪는다면 그건 이미 동화가 아닌 것이다. 물론 이를 한편으로는 순이(박보영)와 철수(송중기), 이 두 메인 캐릭터에게 덧씌워진 어떤 적절한 한계와 같은 부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즉 이 두 메인 캐릭터는 사랑을 하되, 그것은 동화적인 사랑이어야만 한다. 즉 이 영화는 호소다 마모루의 <늑대아이> 혹은 <트와일라잇> 시리즈처럼, 두 메인 캐릭터가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는 데에까지 나아갈 생각은 없다. 두 사람이 이루어지지 못해서가 아니라, 설혹 사랑을 이루어냈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왜? 동화니까. 동화는 '그 후로 오래도록 잘 살았습니다.'로 끝내야지, '그 후에 섹스도 하고, 애도 낳고, 부부싸움도 하면서 잘 살았습니다.'로 끝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늑대소년>은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고,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도 그런 부분이다. 앞과 뒤에 액자를 씌워 놓고, 여기에 할머니가 된 순이를 등장시킨다는 것. 이게 명백히 동화를 표방하고 있다면, 이것은 상당히 이상하게 느껴진다.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동화 <백설공주>가 다 늙은 백설공주가 나와 과거를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할 때를 상상하는 그 이질감 말이다. 즉 영화 <늑대소년>은 동화, 판타지를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그 시작과 끝은 그 판타지를 스스로 무너뜨리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감독이든 혹은 제작사이든 이것이 판타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판타지를 강화해주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일단 하나. 다시 현재로 돌아온 마지막 씬들에서 과거의 모든 것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시골집도, 카라멜도, 심지어는 철수도 말이다. 그 모든 것이 보존된 공간이 순이에게 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전과 완전히 똑같아, 라고 말해줄 때, 이것이 어떤 판타지를 강화한다고 보는 것일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꿈이 깼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꿈속의 인물이 나타나, 아니야 너는 아직 깨지 않았어, 라고 말하는 것이 그 꿈을 억지로라도 지속시킨다고 보는 것일까. 아니면 여기에 어떤 영화의 잠재된 핵심, 그러니까 여기에 영화의, 혹은 감독의 무의식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이 앞과 뒤의 액자들은 영화의 주플롯과 분리되어 있으며, 당연히 그것이 존재하지 않아도, 이 아름다운 동화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니 모든 영화제작사들은 1분이라도 영화에서 줄어들기를 바라므로, 이 액자가 사라지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리뷰들을 보면 상당수의 관객들도 이 액자를 그렇게 바라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필요치 않은 것을 억지로 집어넣었다는 이 사실이, 다른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늑대소년>을 다룬 글(씨네21)에서 철수를 '어정쩡한 타자'로 규정한다. 즉 철수는 '10대 소녀의 백일몽(김혜리)'이라는 견해와 '근대의 정상성에 맞선다(이용철)' 라는 견해 사이에 어정쩡하게 위치해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10대 소녀의 꿈속에 나타날 수 있는 미소년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기도 하다. 철수라는 늑대와 인간 사이에 위치한 이 존재는 도대체 어떠한 존재인가. 이 질문은 영화의 마지막 철수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질문이기도 했다. 지태나 군인의 의견은 철수가 위험한 존재이므로 - 그 자체로 위험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어떤 것을 감추기 위해서 -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고, 박사나 순이의 가족, 마을사람들의 의견은 철수가 위험한 존재가 아니므로 이곳 인간세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타자를 만났을 때 제기되는 즉각적인 질문, 이 타자는 나에게 위험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영화가 의도한 바대로 대부분의 관객은 순이의 편, 그러니까 철수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에 동조하게 된다. 왜? 우리는 지금까지 철수의 '길들여짐'을 보았기 때문이다. 즉 철수는 위험한 존재였을지도 모르지만, 순이의 조련으로 인해 길들여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철수는 기다리라는 순이의 간절한 외침에도 다시 야수성을 드러내 보이고, 철수의 인간세상에로의 편입은 실패한다.

즉 이 영화 <늑대소년>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 간단하게 말해 '괴물'을 인간과 비슷한 어떤 것으로 길들이려다 결국에는 실패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이 생긴다. 인간이 되는 것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몇십 년 후 순이가 돌아왔을 때, 그 괴물은 스스로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 길들여짐은 몇십 년이 지나서야 완성이 된다. 그것도 조련사의 도움이 없이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괴물은 조련사가 길들이는 데 실패하였지만, 기어이 스스로 길들여졌고, 더 나아가 조련사보다 훨씬 나은 위치에 서 있다. 즉 조련사는 늙고, 괴물이 되었지만, - 영화의 첫 대사를 기억해보라. 할머니는 거울을 보며 말한다. "이런 괴물을 봤나..." - 괴물은 잘생기고, 뽀송뽀송한 예전의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내가 묻는 것은 물리적인 가능성이라기 보다는, 이 영화에 깔린 어떤 전제이다. 즉 철수는 길들여지기 훨씬 이전부터, 괴물인 적은 없지 않았나, 이미 시작부터 이 영화는 철수를 인간이라는 틀 안에 집어넣고 시작하지 않았나,하는 물음이다. 즉 순이의 길들이기는 어쩌면 '가짜 길들이기', 아장아장 소꿉장난과 같은 것은 아니었나 하는 물음이다. 

몇 가지의 힌트들이 있다. 철수와 순이의 첫 조우. 예를 들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철수는 왜 순이를 공격하여 잡아먹지 않았나. 그가 늑대라면 도리어 인간인 순이를 공격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누군가는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철수는 늑대가 아니라, '늑대인간'이라구요. 그래서 철수는 순이와 엄마가 내민 감자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감자를 먹는 늑대인간이라. 그런데 우리는 그 전에 사실 철수의 먹이를 이미 본 적이 있다. 철수를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인물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들고 있던 양동이에 가득담긴 생고기 조각들. 그런데 이제 와서 감자와 밥과 국과 잡채를 먹는 늑대인간이라. 뭐 좋다, 늑대인간은 잡식성일 수 있으니까. 다음의 장면. 김혜리는 짤막한 글(씨네21)에서 예리하게 다음의 장면을 집어낸다. 철수가 마을의 염소를 해쳤다는 누명을 쓰자 순이가 "네가 그런 거 아니지?"라고 캐묻는 장면. 그러면서 설명을 단다. '그녀도 영화도, 늑대소년을 슬픈 인간으로 볼 뿐, 그의 수성(獸性)까지 받아들이진 못한다.' 김혜리의 지적대로 늑대소년이 염소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것이 도리어 당연한데도, 그녀도 영화도, 나를 포함한 관객들도 그가 그럴 리 없다고 굳게 믿는다. 지태가 저지르는 일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그것도 그것이지만, '처음부터' 그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반농담으로 돌아가자면, 그가 처음부터 감자를 먹었기 때문이다. 즉 그가 괴물이라는 가능성은 순이에게도, 마을사람들에게도, 그리고 관객들에게도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그는 완벽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송중기니까.    

즉 우리는 이 영화에서 어정쩡한 타자 늑대소년을 보며, 그의 밝은 면만 들여다본다. 늑대소년의 기원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박사에게 엄마가 "아..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구요."라고 말하는 영화 속 장면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관객이 나빠서가 아니라, 영화의 구조가 그렇게 짜여진 탓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에서 '늑대소년'이라는 사실 이 복잡한 타자는 무엇인가가 제거되어 있고, 소녀도, 영화도, 관객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 예를 들어 수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타자가 가지는 불온성이라고 할 수도 있는 - 가 제거된 늑대소년, 혹은 송중기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과거의 모든 것이 그대로 보존된, 심지어는 당연히 변해야 할 늑대소년마저도 그대로 보존된 공간을 본다. 그래서 이를 과거로의 타임머신, 혹은 과거의 박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제를 하겠다는 것은 그것을 어떤 상징으로 만들고, 그 상징에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냥꾼들의 동물 박제이건, 북한의 김일성 박제이건 간에 그 박제물에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뒤따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굳이 액자로 만들어낸 과거의 박제는 무엇을 담고 있는가?

그것은 혹시 시간의 망각과 같은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북한의 김일성 박제가 시간을 망각시키는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시작부 "이런 괴물을 봤나...'라고 중얼거리는 할머니를 보며, 그것은 어떤 중의적인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늙고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대한 한탄이면서, 동시에 과거의 어떤 시간에 대한 회한이나 안타까움 같은 것을 담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결국 과거로 돌아가 보게 되는 것은 과거 자신과 늑대소년을 둘러싼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더욱 완벽히 제거되어 완전히 인간이 되어버린 괴물, 아니 그 괴물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은, 아름답고 뽀송뽀송하게 스스로 정화된 과거의 어떤 박제물이다. 즉 이 과거에는 과거 그 시간 이후로 사십 여년이 넘게 흐른 그간의 세월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깨끗하게 보존된 김일성의 박제에 몇십 년 간의 인민들의 고난의 행군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이 늑대소년은 김일성이 아니라 송중기다. 과거의 괴물에게는 이미 어느정도 이 수성이 제거되어 있기는 했지만, 다시 퇴행하여 돌아간 이 현재적 과거에서는 그 수성의 흔적조차 이제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소녀의 성장담도 아니고, 철수의 성장담도 아니고, 그저 박제담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액자의 시작부분에서 그녀의 대사 "이런 괴물을 봤나...'에만 정신이 팔려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그녀가 거울을 보며 그 대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 싸이보그지만 (예쁘니까) 괜찮아. 괴물이라도 잘생겼으면 괜찮아. 인간이라도 늙었으면 괴물인걸. 늙음, 그 늙음이 보여주는 시간은 그렇게 망각되어 다시 타자들을 분리해낸다. 물론 여기에는 근대가 만들어낸 '정상성'이라는 기제가 여전히 작동된다. 아름다운 아리아인, 아름다운 육체, 아름다운 인간성. 

아..물론 글의 첫머리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이 이야기는 동화다. 동화는 물론 동화로 남겨두어야만 한다. 하지만 모든 동화는 동화 이면의 기담을 담고 있음이 또 사실이 아니던가. 한 잉여의 늑대소년 기담, 쯤이라 해두자.



- 2012년 12월, CGV 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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