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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칭 포 슈가맨, 말릭 벤젤룰

Ending Credit | 2012. 11. 12. 19:58 | Posted by 맥거핀.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안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영화의 전체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며칠 전 이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을 얘기한 리뷰에 나는 처음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페이크 다큐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댓글을 썼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도 어쩌면 페이크 다큐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진짜처럼 만들어진 가짜가 가짜처럼 만들어진 진짜를 밀어내는 시대에 만들어진 잡동사니형 인간. 그 인간은 그래서 위키 검색을 해보기로 했다. 인터넷 시대에는 아무리 가짜여도 많이 언급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진짜가 되니까. (그래서 누구나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즉 많이 수정되면 수정될수록 더 진짜일 확률이 높다고 받아들여지는 이 위키라는 것은 현생 인터넷이 만들어낸 최고의 물건이자 최고의 판정가가 아니겠는가.) Rodriguez 혹은 Sixto Diaz Rodriguez 혹은 Jesus Rodriguez라는 이 인물은 곧 위키가 판정을 내려준다. 1942년 7월 10일이라는 태어난 날이 기록된 진짜. 죽은 날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살아있는 뮤지션이라는 판정.

영화를 보고 나서도 여전히 믿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몇 가지의 이상한 얘기들이 여기에는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도 기록되어 있고, 위키에도 기록되어 있는 몇 가지의 이상한 이야기. 그는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미국에서 몇 명의 프로듀서에 의해 발굴된 후 <Cold Fact>와 <Coming From Reality>라는 두 장의 앨범을 냈으나, 그 앨범은 거의 사장되어 버렸고, 그는 그대로 묻혀버렸다. 뭐 여기까지는 흔히 있는(뭐 그에게 앨범을 내준 레코드사 사장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참담한 실패'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는 그의 앨범이 미국에서 총 6장이 팔렸다고 주장하니까) 그저 그렇고그런 실패담이다. 그런 그가 다시 되살아난 것은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지구 반대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이다. 알 수 없는 경로로 들어온 그의 앨범은 당시 폭압적이고 체제에 의한 검열이 횡행하는 남아공에서 자유와 해방의 상징으로 각광받았고, 그는 남아공에서 비틀즈나 앨비스 프레슬리 못지 않을 정도로 알려진 뮤지션이 되었다. 단, 무대 위에서 오래전에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미스테리 뮤지션으로서 말이다. 물론 위키에서도 친절하게 요약하고 있듯이 그가 죽었다는 것은 잘못된 소문이고, 그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채로 1990년대 말의 어느날 남아공에서 걸려온 한 전화를 받게 된다. 당신은 남아공에서 비틀즈만큼 유명하며, 수십만장의 앨범이 팔렸으며, 당신을 보고 싶어하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있다는 그런 전화를 말이다.

이 이야기 자체에는 표면적으로 몇 가지의 이상한 사실들이 들어있다. 남아공에서는 그가 이미 죽은, 그것도 무대에서 분신을 꾀한 전설적인 뮤지션으로 알려져 있었던 사실이나, 로드리게스 역시 남아공에서 자신의 앨범이 그렇게나 많이 팔리고 유명한 뮤지션이 되었다는 점을 전혀 알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은 물론이거니와 그 로드리게스가 그 이후 남아공에 지속적으로 머물지 않고, 단 몇 번의 공연 후 건설노동자라는, 음악 실패 후 20년 동안 생계를 지탱하게 해준 직업으로 돌아갔다는 사실도 그렇다. 물론 가장 놀랍고도 믿기 어려운 사실은 그의 앨범이 남아공에서 수십만장 넘게 팔리며 큰 인기를 얻었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 영화의 힘은 바로 그 부분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에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바로 그의 노래가 체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검열과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과 그의 삶을 병치하여 보여주는 이 영화의 후반부 구성이 만들어내는 힘 말이다. 그가 다시 평범한 노동자라는 자신의 삶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증명하는(우리네 상식으로는 이제 남아공에서 추억팔이 공연이나 하면서 평안하게 사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 것 같은데도) 그의 삶에 대한 태도로 만들어진 노래가 남아공에서 체제의 검열과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부분 말이다. 즉 그는 차갑고 비참하나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디트로이트의 가난한 이민 노동자의 의식을 그대로 그의 노래에 반영했고, 그의 노래들은 그러므로 노동의 노래, 노동자의 노래, 도시빈민의 노래, 가난한 자들의 노래였다. 그리고 그 노래들은 지구 반대편이라는 거리와 20년이라는 시차를 넘어 더 나은 삶을 희망하던 남아공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에게 따스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상한 일이면서 동시에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참하고 억압된 삶을 살지만,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들은 비슷한 것을 공유하니까 말이다.

영화의 전반부에 흐르는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대체로 디트로이트의 차가운 풍경을 부감으로 찍은 화면이나 남아공의 과거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여 흐르나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의 음악이 현재의 그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여 흐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노동일을 하러 나가면서도 정장을 갖춰입는 그, 더 나은 삶을 만들어내기 위해 실현가능성이 별로 없음을 알면서도 시장 후보에 출마하고, 가난하게 살지만 문화적으로는 풍성하게 딸들이 자라나기를 바라면서 박물관, 도서관에 늘 딸들을 데리고 다녔던 그가 비틀비틀 쓰러질 듯한 걸음걸이로 일을 하러 나갈 때 울려퍼지는 그의 음악들과 그의 현재의 삶이 겹치는 순간을 보는 것 말이다. 희망을 잃지 말자고, 언젠가는 그 희망이 삶이 될 거라고 말하는 수십년 전 그가 만들어낸 음악들이 현재의 그에 겹치는 것을 보는 것은, 극도의 보수적인 체제 억압에 시달리던 남아공 사람들에게 진보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영화 전반부의 사실 외에도, 동시에 희망을 가지고 그 희망의 성취를 결국 본 현재의 그에게도 일종의 자기충족적인 예언이 됨을 받아들이게 된다(크리스마스 2주 전에 실직될 것을 예언하던 그의 노래처럼 말이다). 물론 이 자기충족적 예언은 로드리게즈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십여 년만의 남아공 공연에서 로드리게즈가 단지 무대에 서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쏟아지는 기립박수들, 그 박수들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타나준 로드리게즈에게 보내는 박수이자, 지난 십여 년간을 잘 버텨낸 자신들에게 보내는 박수이며, 십여 년전에 자신들이 로드리게즈에게 위안받았듯이, 이제는 로드리게즈가 자신들에 의해 위안받음을 알고 있는 박수이다. (아마도 로드리게즈가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 것은 그 박수들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만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은 아닐까. 결국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온전히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그 노래를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합쳐서 이루어진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니까. 그러므로 그도 돌아가 자신의 삶을 계속할 밖에. 위안은 어딘가에서 얻어질 수 있으나, 그 위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자신이므로.) 그렇게 지구 반대편의 거리와 몇 십년간의 시차를 두고 위안은 반복되며 결국에는 되돌아온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그러니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 관객들도 위안받지 혹은 위안을 보내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위안은 반복되니까. 지금 우리가 받는 혹은 보내는 어떤 위안은 언젠가, 어느 곳에서나 알 수 없는 형태로 돌아와 우리에게 위안이 되거나, 우리가 누군가의 위안이 되도록 할 것이다.


덧.
다만 한두 가지 정도는 더 언급해두고 싶다. 먼저 한 가지는 이 영화의 어떤 선택에 대한 부분이다. 로드리게즈의 죽음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며, 그런 로드리게즈가 어떠한 뮤지션이었나를 추적하는 형식으로 전개되는 초중반부까지의 흐름에 대해서 말이다. 즉 현재 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시점에서는 감독과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로드리게즈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있고, 이미 그와의 재회도 이루어진 후다. 즉 이것을 일종의 추적의 형식으로 구성하는 것(그리고 제목을 'Searching for Sugar Man'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감독의 선택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선택이 유용했는지, 그리고 어떤 효과를 낳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물론 후반부의 극적인 효과를 더 강화하며, 전반부에 관객이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하는 측면이 있다. 또 한편으로는 후반부의 로드리게즈의 삶의 궤적을 더 도드라지게 하는 면도 있다. 즉 로드리게즈가 죽었다고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말 그대로 음악적인 활동을 완전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노동자라는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여기는 그의 어떤 삶의 태도와도 연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에 관객을 로드리게즈의 미스테리에 대해 궁금해하며 그의 삶을 추적하던 남아공의 그의 팬들과 동일한 위치에 놓음으로써 그들이 로드리게즈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았을 때 받게 되는 위안을 관객들 역시 고스란히 경험하도록 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후반부에 남아공에서 그의 공연이 펼쳐질 때 우리도 눈물을 흘리며 그들 남아공 관객들과 같이 박수를 보내고 싶은 충동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조금은 비정직한 방식이 만들어낸 어떤 위안, 서사적인 강화가 만들어내는 힘이 다큐라는 것에 작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다큐를 보는 것은 극영화를 보는 것과 달리 환영 바깥에 우리를 위치시키는 것이며, 환영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게끔 하는 것에 일반적인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다큐도 '그것이 거짓'이라고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원치 않는다.) 그런데 그런 환영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그 환영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다큐의 서사가 작동할 때, 우리는 그 힘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그 환영인가, 아니면 그 환영의 작동방식인가, 아니면 그 환영을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인가. 우리가 환영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계속 그 환영의 형태만을 구체화해나갈 때 우리는 분명 위안을 받기는 하지만, 그 위안은 점점 의심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그 위안마저도 환영이 아닌가 의심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와 많은 다큐멘터리들은 이야기를 점점 서사적인 방향으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들의 서사화가 가끔 의심스러워지는 때가 있다. 극영화의 환영은 적어도 그들 자신이 환영임을 밝히는 데 비하여 다큐의 그것은 종종 그것 자신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잊게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는 조금 다른 의문인데, 이 영화를 보고 남아공의 당시의 현실에 대해서 조금 궁금해지기는 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로드리게즈의 공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모두 백인들이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잘 알려져 있듯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제도로 극심한 흑백차별이 존재하던 국가였다. 그들에게 위안이 된 이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오로지 백인들만의 한정된 위안이었나? 영화에서 극도로 보수적인 남아공의 당시 상황, 검열과 억압, 그에 따른 젊은이들의 저항에 대해 나오는데, 이것과 흑백차별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또 현재 남아공의 상황은 어떤지 (젊은이들의 분노와 저항은 무엇을 위한 분노와 저항이었나, 그 저항은 흑백문제와는 또다른 위치에서 존재하고 있었나) 잘 모르겠다. 관련 책을 찾아서 좀 들춰봐야겠다.



- 2012년 11월, CGV 상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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