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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얼마만의 시리즈 부활인가. 작은 브라운관이 아닌, 거대한 스크린에서 해리슨 포드의 클로즈업 된 얼굴을 바라보는 느낌은 색다르다. 벌써 시리즈는 이어져, 4탄에 이르렀지만, 나는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도 당연한 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3탄이 개봉했던 것은 1989년이고, 그로부터 벌써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영화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었고, 해리슨 포드는 꽤나 동작이 굼떠졌다. 아무튼 내 느낌 속에는 <인디아나 존스>는 TV에서 하는 ‘설 특선 영화’와 동급의 의미를 가진다. 보통의 주말에는 하지 않고, 설이나 추석이 되어야만 TV에서 인심 쓰듯 틀어주는 영화들. 그 영화들에는 사람을 기대하게 만들고, 몰입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 영화들을 놓치고 연휴를 보낸다는 것은, 꽤나 허전하고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영화들의 첫 머리에는 이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올려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는 일종의 정형화된 패턴이 있다. 영화의 전체 맥락과 크게 상관없는 초반부의 추격씬이나 소동으로부터 시작하여, 곧 뭔가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을 가진, 그리고 지금 어딘가에 묻혀 있는 보물이 소개되고, 인디아나 존스와 그의 조력자들은 이 보물을 찾으러 떠나고, 그와 동시에 이 소문을 전해들은 악당들도 이 보물을 쫓기 시작한다. 악당들과 인디아나 존스의 쫓고 쫓기는 추격씬과 복잡한 암호들이 관객을 지치게 할 무렵, 보물은 홀연히 등장하고, 이 보물은 온갖 소동 끝에 다시 묻히게 되고, 그 와중에 보물에 욕심을 부리다 악당들은 죽는다. 그리고 곧 인디아나 존스는 새로운 보물을 찾아, 혹은 다른 어떤 것을 향해 유유히 발길을 돌린다.

따라서 복잡한, 그러나 사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암호를 해독해야만 찾을 수 있는, 그리고 소유하게 되면 엄청난 힘을 가지게 해 준다는 이 보물에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욕심을 부리다 죽게 되는 악당들과 마찬가지로 관객들에게도 어리석은 일이다. 보물은 어차피 그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마련이고, 인디아나 존스가, 혹은 악당들이 그 보물을 소유해 그 무시무시한 힘을 휘두르는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 물론 대다수의 관객들은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눈에 보이는 맥거핀에 기꺼이 입을 내민다. 그 맥거핀을 물지 않는다는 것은 이 인디아나 존스와 함께 하는 모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맥거핀을 물고 꿀꺽 삼켰을 때만이 우리는 그 모험을 두 배 이상으로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사실 어쩌면 진짜 어리석음은 이 영화를 놓고, 제국주의적 시각이니, 인종차별적인 시각이니 하는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 쫓고 있는 대부분의 보물들은 제3세계의 어딘가에 묻혀 있으며, 그 보물들을 쫓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적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일 뿐이며, 그 와중에서 희생되는 것은 유색의 원주민들뿐이다. 고고학 교수라는 이름으로 여러 보물들을 찾아다니고, 그 보물들을 사로잡기 위해 주위를 마음껏 파괴하는 인디아나 존스라고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도 어떠한 시각에서는 한낱 도굴꾼일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즐기러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에 동참하고자 이미 알면서도 맥거핀을 꿀꺽 삼킨 사람들이다. 어차피 보물은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고, 그 동안 쫓고 쫓기는 신나는 활극에 시각적 쾌감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대다수의 것들은 스필버그의 유머 또는 조롱이 아니었던가. (이 영화는 미국과 러시아의 대립이 한창이던, 그리고 미국에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195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반공산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힌 정부기관 요원들이 인디아나 존스를 추격할 때 반공산주의 피켓에 부딪히던 것과 같은 그런 유머들. 그런 유머들은 어차피 이전 시리즈에서도 계속 반복되던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 관객들은 그저 스필버그가 짜놓은 이 유쾌한 소동극을 지켜보며, 시각적 쾌감을 느끼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확실한 이 지점에서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는다. 이제 더 이상 옛날의 설 특선 영화를 보면서 느끼던 쾌감이 오지 않는 것이다. 옛날의 시리즈물이 가지던 가장 큰 미덕은 아날로그 액션이었다. 동양에는 아크로바틱한 신기에 가까운 기예를 선보이던 성룡이 있었다면, 서양에는 모자를 안 떨어뜨리고 유려한 채찍술을 보여주던 해리슨 포드가 있었다. 그러나 이 느껴지는 디지털의 미끈한 느낌은 무엇일까.

물론 이것은 막연한 느낌일 수도 있다. 스필버그 역시도 이 <인디아나 존스> 4탄의 상당수의 액션씬을 CG를 배제하고 찍었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왠지 이 <인디아나 존스>는 이전의 전작들보다는 <미이라>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어쩌면 그것은 아날로그적 와이어 액션이냐, 컴퓨터 그래픽에 의한 3차원 액션이냐의 문제가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액션 이외의 어떤 것, 예를 들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성궤나 성배 등이 가지는 종교적인 분위기, 혹은 오컬트 적인 요소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된 것, 그리고 많은 액션씬에서 특유의 유머러스함이 사라진 것 등에 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디지털상영으로 이 영화를 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가끔 화면에 까만 점들도 나오고 그래야 하는데).

 

아무튼 키아누 리브스의 <스피드>를 보러 간 관객이, 비의 <스피드레이서>를 보고 나온 듯한 찜찜한 뒷맛을 남기지만,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심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고, 상대방의 총구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도 옆의 동료에게 농담을 던지는 낙관주의적 품성도 여전하다. 그리고 그 낙관주의적 품성과 한 세트라고 말할 수 있는 ‘유머’ 역시도, 상당히 모자라긴 하나 감은 살아있다. 그리고 전작의 관객들을 위한 몇몇 서비스 컷도 스필버그는 잘 끼워 넣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전의 느낌을 되살리는 건 테마송이다. 모두들 기억하고 있을 그 음악. 설날 저녁, 30개 이상의 광고를 뚫어져라 보고 있을 수 있게 해주는 그 음악이 영화관에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있는 것은 꽤나 즐겁다. 영화관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30대 이상의 관객이 있다면, 십중팔구 영화의 감동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음악 때문일 것이다.




John Williams- 'The Raiders' 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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