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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변영주

Ending Credit | 2012. 7. 4. 18:18 | Posted by 맥거핀.




(글에 영화의 내용 및 결말과 관련된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뒤늦게 본 영화 <화차>는 예상보다 훨씬 막막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영화였다.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대강의 스토리와 결말을 알고 영화를 봤음에도, 영화는 생각했던 것보다 막다른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철저히 영화에 기반한 글이다. 소설과의 비교를 원하시는 분들은 다른 글을 읽으시길.) 아마도 이는 변영주 감독의 선택일 것이다. 처음 변영주 감독이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를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약간 고개를 갸웃했는데, 이 소설의 어떤 부분이 감독의 흥미를 끌었을지 대략 상상이 간다.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리뷰들을 보면 소설은 흔히 말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로서 말그대로 추리적인, 미스터리와 관련된 지점에 상당부분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미스터리적인 부분이 상당히 걷어내어져 있고, 그 나머지 부분들을 어떤 정서적인 부분이 메우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의외로 상당히 잉여적인 씬들이 많이 보인다. 즉 영화의 흐름상 전체 구도와 크게 관계가 없는 부분인데도, 짚고 넘어가는 부분들이 있다. 만약 이것이 추리물을 지향하고 있다면, 이 부분들이야말로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체로 추리물들에서 단서들은 이런 부분에 숨겨져 있었으니까. (반면 최근에는 이를 역이용하여 도리어 이 부분에 맥거핀을 심어놓는 경우들이 더 많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잉여적인 부분들은 대체로 정서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남자주인공 문호(이선균)가 동물들을 진료하고 수술하는 모습이나, 문호의 사촌형이자 차경선(김민희)의 뒤를 쫓는 종근(조성하)과 관련된 부분들은 걷어낸다 해도 전체 흐름과 크게 관계가 없으며, 그게 단서나 맥거핀의 기능을 하지도 않는다. (예외적으로 한 장면이 있다.) 그것은 도리어 이 영화의 정서적인 부분을 이끌어가는데 기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로 인해 이 영화를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물로 보게 되면 리듬이 자꾸 끊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이를 추리물로 보면 필요할 때마다 알아서 단서가 주어지는, 말 그대로 관객의 '추리'가 필요하지 않은 기이한 추리극이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는 그 잘짜여진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버리고, 어떤 정서적인 세태극으로 가려는 것일까. 변영주 감독을 위해 한가지 변명을 해주자면, 원작 소설 <화차>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20여년 전에 출간된 소설이라는 점이다. 20년 전의 일본과 사회적 배경과 사회적 정서도 많이 달라졌을 뿐더러, 단순히 스토리만 놓고 보았을 때, 그것은 이미 읽을 사람은 어느 정도 읽은, 사건도 범인도 어느정도는 예상가능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즉 이것이 소설과 동일하게 미스터리로 갔을 경우에는 원작의 팬들은 그 재현을 환영할지 몰라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뭔가 뻔한 예상치를 벗어나지 않는 영화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아마도 감독은 이 소설을 가지고 지금의 우리의 이야기를 해보자는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원작의 활용, 혹은 리메이크는 과거 그 원작이 탄생한 시점이 아니라, 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 현재에 재현되는 그 원작의 의미이다. 즉 왜 하필이면 지금 2012년에 이 <화차>의 이야기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 현재에 근거하지 않는 과거의 단순 재현은 그저 회고적 취미일 뿐이다.) 그렇다면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아마도 이 영화로 이야기하고 싶은 현재적 시간들일 것이다. 변영주 감독이 보는 현재의 우리 사회는 어떤 곳인가. 그것은 이미 얘기한대로,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막막한 세계이다.

원작이 있는 영화들의 경우 그 영어제목이 보다 직접적으로 그 영화의 주제를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완득이'나 '은교' 같은 경우는 원작의 제목을 그대로 따온 경우이면서, 그 고유명사인 제목들은 영화의 배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아무런 추측도 제공하지 못하지만, 그 영어제목인 'Punch'나 'Muse'같은 경우에는 그 내용이나 주제에 보다 직접적으로 가깝게 다가가 있다. 이 영화는 조금 케이스는 다르지만, 영화의 내용을 보면 '화차'라는 제목보다 그 영어제목인 'Helpless'가 조금 더 가까이 가있지 않나 싶다. 즉 신용사회의 이면에 있는 숨겨진 낭떠러지로 어떠한 제어도 없이 달리는 '화차', 그 욕망이 촉발한 작은 불씨의 무서움과 관련된 제목인 '화차'와 달리 이 영화 <화차>에서 그려내고 있는 세계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속수무책인 세계, 예를 들어 아오야마 신지가 동명의 영화 <Helpless>에서 그려냈던 것처럼 어떠한 도움도 가능하지 않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기어나올 수밖에 없는 세계, 그야말로 'help'가 'less'되어 있는 세계다.       


마지막에 문호는 경선을 다시 만나지만, 그녀를 다시 보내준다. 아니 고쳐서 말하면 그녀를 보내준다기 보다는 그녀를 감당할 재간도 의지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것은 비겁해보이기도 하지만, 이 과정을 보는 관객은 아마도 문호를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전남편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즉 과정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문호는 경선의 전남편과 동일한 선택을 했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그녀는 일종의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본인이 지옥으로 달리는 불수레이자, 그 옆에 있는 사람까지 같이 태워 달리는 시한폭탄이다. 즉 그러므로 이러한 문호의 행위는 일종의 폭탄돌리기가 된다. 그러니 문호가 자신을 사랑하기는 했었냐고 묻고, 경선이 아니라고 답하자 그녀를 놔주는 것은 일종의 거짓된, 비겁한 퍼포먼스(이나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이다. 아마도 문호의 죄책감은 그런 것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눈앞에서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으니까. 그가 그녀를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포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더라면, 그녀의 (적어도) 그곳에서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다. (이 마지막 뒤에 문호의 품에 있는 경선의 모습을 돌려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그런 부분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대신 문호는 묻는다. "니가 사람이야?" 여러 리뷰들에서 보면 이 우문이 여러 사람들의 실소를 터뜨리게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그다지 웃기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질문이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조건을 묻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될 수 있는 조건, 그것 중의 하나는 물론 파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강현이 다큐멘터리 <파산의 기술>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파산한 자는 일종의 범죄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들에게 하는 협박과 폭력은 상당수 정당화되며(이 영화에서도 사채꾼(조폭)이 경찰을 부르라며 큰 소리를 치는 장면이 있다), 그들은 TV에 나와 돈을 다 갚고 다시 보통인의 지위를 회복할 것을 간증한다. 그리고 경선은 대답한다. "나 사람 아니야. 나 쓰레기야." 이 대답이 막막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이야기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청소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인간쓰레기가 잉여인간이 되려다 그나마도 실패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차경선이 타겟으로 삼았던 강선영은 종근이 말한대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다해도 아무도 알 수 없는, 아무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잉여인간이다. 그러나 차경선에게는 가능한 선택지가 없다. (뒤에 나오는 선택지들도 그렇게 나아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 뒤를 쫓고 있는 종근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말한대로 이 영화에는 잉여적인 씬들이 상당히 나오고, 그것의 대부분은 종근의 배경과 관련되어 있다. 왜 이 영화에는 그토록 종근의 이야기가 필요한 것일까. 아마도 그것이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근의 삶 역시, 그 자신이 말한대로 거의 끝난 것처럼 보이는 잉여의 삶이니까.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어떤 비정함일 것이다. 즉 변영주가 보는, 그려내는 이 세계는 한 인간쓰레기가 그보다 겨우(이 단어를 쓰는 것을 용서하시길) 한 단계 위인 것처럼 보이는 잉여인간이 되려다 다른 잉여인간의 추적으로 인해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이 무섭고도, 막막한 세계에는 어떤 엘리베이터도 어떤 에스컬레이터도 어떤 출구도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긴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어디론가로 가려다 결국 막다른 낭떠러지에 몰리게 되는 이 마지막은 아마도 예정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에스컬레이터의 중간에는 그 에스컬레이터에 어쩌면 같이 올라타 줄 수도 있는 문호가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놔버렸고, 그녀는 끝까지 올라가버렸다. 그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 낭떠러지로 그녀를 보냈고, 스스로 청소하도록 했다. 그러고보면 그녀가 처음 사라진 장소는 고속도로 휴게소였고, 다시 나타난 곳은 역의 대합실이었다. 역과 고속도로 휴게소. 끊임없이 이동하여야만 하는 사람들의 공간. 유목하는 자들은 늘 정주하는 꿈을 꾸고, 그 정주의 시도는 늘 한낱 꿈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아마도 경선은 모델하우스를 찍은 사진을 그렇게 몰래 끼워두었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정주에 실패했고, 그녀의 시체는 여전히 기차길 한 가운데에 놓여져 있다. 더 절망적인 것은 아마도 그 이후에 문호도 꿈을 꿀 것이라는 사실. 이 모든 것이 그저 없었던 과거로 돌아가는 꿈. 그녀의 전남편이 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덧.
결국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회적인 안전망이다.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종교도 이들을 구원할 수 없다면, 이 사회가 무엇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좋은 사회를 꿈꾸는 감독 변영주가 2012년의 한국사회에 다시 이 이야기를 끌고 들어온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 우리는 이 사회에서 기껏 폭탄돌리기나 하고 있어도 좋습니까, 라는 물음. (물론 세상은 늘 반대로 가니까.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종교가 버리기 전에 늘 먼저 나서는 것은 사회이니까. 폭탄을 안전하게 제거할 사회적 안전망은 커녕, 폭탄의 세기만 점점 커진다.)  

미스터리물의 껍질을 벗겨내도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여전히 문호의 캐릭터와 관련된 부분이다. 정서적인 부분을 강조하려는 영화라면 어떤 심리적인 요인, 동기를 묘사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일 텐데, 문호가 그녀를 끝까지 추적하려는 동기는 여전히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왜 그는 그녀의 실체를 알고난 후에도 그녀에 대한 추적을 멈추지 않는가. 동물을 돌보고, 수술하는 잉여적인 씬들과 이러한 부분들이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단순히 로맨스로 치부하기에는 여전히 모호한 구석이 있다.

조성하 씨는 예전에 다른 작품들에서는 그다지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이 아저씨가 꽤 연기를 하는 편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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