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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 리들리 스콧

Ending Credit | 2012. 6. 30. 12:12 | Posted by 맥거핀.



 

(글 중간중간에 영화의 스포일러성 내용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은 보시지 않기를 권합니다.)

 

에이리언 시리즈는 상당수의 다른 프랜차이즈 시리즈들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1편의 성공과 그보다 나은 2편, 그리고 조금 모자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예전의 유산들을 모아 가까스로 선방을 해낸 3편, 그리고 만들지 않았던 것이 나은 것처럼 보이는 4편, 그리고 시리즈는 결국 막을 내리게 된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갖춘 감독들이 시리즈를 이끌어나갔을 때 그나마 적용되는 것이다. 2편부터 망가진 시리즈들이 얼마나 많던가. 에이리언 시리즈는 그야말로 대단한 이름값을 자랑하는데, 1편은 리들리 스콧, 2편은 제임스 카메론, 3편은 데이빗 핀처, 4편은 장 피에르 주네이다.) 더 보여줄 것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올해 1편의 감독 리들리 스콧은 관객의 예상을 뒤엎는 새로운 이야기, 즉 에이리언 시리즈의 일종의 프리퀄인 <프로메테우스>를 들고 나왔다. 리들리 스콧 자신이 이야기하였듯이 어쩌면 이 이야기는 프리퀄이 아니라 별개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많은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 <프로메테우스>의 느슨한 서사, 빈공간이 뻥뻥 뚫린듯한 모호한 이야기는 이어지는 시리즈를 염두에 둔 의도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래서 이 이야기는 여전히 여러 논쟁들을 낳고 있는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는 팀 버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혹은 <인셉션>)나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제시하는 꽉 짜여진 세계가 아니다. 이 영화는 그간 에이리언 시리즈와 새로운 시리즈를 연결하는 일종의 연결고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프레데터와 연결된 이야기들을 제외하더라도 에이리언 시리즈는 그 자체가 이미 헐거운 부분이 많은 시리즈였기도 했다. 그러므로 여전히 게시판들에서 이어지고 있는 논쟁들을 보면 정말 궁금하기는 하다(조롱의 의미가 아니라 순수한 궁금증이다). 서로가 자신이 맞는 답이고, 다른 해석이 틀렸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정답지는 어디에 있는지. 그런 이야기는 이어지게 될 몇 개의 이야기를 놓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마치 이는 낚인 물고기들이 바구니에 담겨서는 내 떡밥이 더 맛있었다, 혹은 네 떡밥이 더 맛있었다며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프로메테우스>는 구멍이 많은 서사라고 해도, 흥미로운 이야기인 것만큼은 사실이고, 설혹 프리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에이리언 시리즈의 기괴하고 끈적끈적하고 음울한 분위기만은 잘 살려내고 있다. 그것은 디자인이나 미술적인 부분, 혹은 캐릭터의 활용(아마도 많은 에이리언 시리즈의 팬들은 이 <프로메테우스>에서 누가 가장 먼저 희생당할지 쉽게 예상했으리라고 생각된다)과 같은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이 영화가 그간 에이리언 시리즈의 큰 줄기를 훌륭하게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그간 에이리언 시리즈에는 두 가지의 흥미로운 캐릭터가 나왔다. 그 하나는 여전사 리플리이고, 다른 하나는 비숍으로 상징되는 안드로이드이다. 이것을 한편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진화론의 세계와 창조론의 세계. 진화는 결국 수없이 반복되는 생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창조에는 그러한 생식의 과정이 없다.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은 이 생식 혹은 임신(수태)에 대한 상징 혹은 이미지들인데, 여성 전사 리플리, 인간(숙주)의 배를 뚫고 나오는 에이리언의 형상, 2편에서 리플리와 소녀의 관계 등에서 이러한 부분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괴생물체 에이리언 역시도 그러한 번식과 관련된 부분들이 계속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에이리언도 번식을 한다는 것. 이것은 한편으로 비슷한 루트를 걸은 프랜차이즈인 영화 <주라기공원>에서 가장 섬뜩한 이야기 중의 하나였던 섬의 공룡들도 번식을 한다는 사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반면 창조된 안드로이드에게 결여된 것은 흔히 감정에 관계된 부분으로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생식과 관계된 부분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감정이라는 것은 생식 혹은 번식과 꽤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가장 비통한 괴성이 터져나왔던 장면은 인간의 그것이 아니라, 퀸 에이리언이 자신의 알을 불지르는 리플리를 보고 내뱉은 괴성이었다. (이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도 감정이 없는 안드로이드 데이빗(마이클 파스빈더)이 쇼 박사(누미 라파스)가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꾸는 꿈을 훔쳐보는 장면이 있다. 왜 그는 이 꿈을 보는가.)

이 에이리언 시리즈에서는 외부의 괴물말고도 이 창조된 안드로이드를 보는 (생식하는) 인간의 섬뜩한 감정이 내내 지배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에이리언'이라는 이 시리즈의 제목은 한편으로는 밖의 괴물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부의 안드로이드에게도 해당된다. 이 <프로메테우스>의 장점은 마이클 파스빈더가 이 섬뜩한 느낌을 잘 살려냈다는 것이다. 그가 "모든 자식은 아비가 죽기를 바란다."고 대사를 할 때를 보라.) 그리고 그 섬뜩한 기분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이 안드로이드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그러나 승리하는 것은 결국은 진화론 쪽이었다.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국 여전사 리플리였으니까. 물론 한편으로 그것은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단지 '살아남는 것', '살아남아 탈출하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밖에는 여전히 에이리언이 우글우글하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에이리언은 그 창조와 진화가 결합된 것이니까. 창조와 진화가 결합된 일종의 헤테로, 그것이 에이리언이다. (<프로메테우스>에서 그것을 조금 더 확연하게 알 수 있는데, 결국 이 에이리언이라는 괴물은 창조와 진화가 결합된 것이다. 최초의 에이리언은 쇼 박사의 임신 과정을 통해 시작되었고, 다시 그것이 엔지니어(스페이스 자키)와 결합되면서 탄생되었다. 즉 최초의 에이리언은 인간의 정자, 그리고 불임의 수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기이한 역설이 시작된다. 즉 그것은 창조되었지만, 생식의 과정으로 이 세상에 기어나왔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는 이러한 측면에서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인간의 탄생에도 단지 진화만이 아닌 창조가 개입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창조에는 외부의 손길, 외계인들의 어떤 작용이 개입되었다는 것. 즉 이는 일종의 변형된 지적설계론 혹은 창조과학론이다. (예를 들어 캄브리아기 대폭발에 어떤 외부의 무엇인가가 개입되었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놓고보면 인간은 에이리언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에이리언이 처음 엔지니어들의 (군사적인) 필요에 의해 개발되었다가, 우연히 진화의 과정(영화 속 쇼 박사의 임신의 형태)을 거쳐 탄생된 것처럼, 인간도 결국 엔지니어들이 먼 옛날 뿌려둔 씨앗에서 진화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그 무엇이 된다. 즉 그 태생적 뿌리는 인간이나 에이리언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에이리언이 괴물이라면 인간도 괴물이 아닌가. 에이리언의 행동들은 결국 번식을 향한 본능이고 생존본능이다. 'Alien'이라는 것은 '외계의', '이질적인'이라는 뜻일 뿐이므로 그들에게는 인간이 에이리언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에이리언과 같은 지위를 벗어나려는 인간의 발버둥이 생기며 창조론의 오래된 믿음 저편에 있는 것, 그러니까 신이 등장하게 된다.

진화론이 과학의 영역이라면 창조론은 믿음의 영역이다. 창조론에는 한 가지 뿌리깊은 믿음이 들어있다. 그것은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가 필요에 의해 자신과 닮은 어떠한 것을 이 세상에 내보냈다는 믿음이다. 즉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고귀함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겨우 원숭이에서 튀어나온 존재가 아니라 완벽에 가까운, 적어도 완벽의 시작지점에 있는 어떠한 것, 그것이 인간이 되려면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가 그 창조의 시점에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그러한 믿음에 몇 가지 불길한 가설을 제시한다. 만약 인간을 만들어낸 존재가 완벽하지 못한, 자신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면. (불사(不死)를 향한 웨이랜드 회장의 믿음과 그것의 깨어짐은 이미 엔지니어들의 죽음이 발견된 처음에 예정된 것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보면 죽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안드로이드야 말로 영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 안드로이드 데이빗이 들여다보고 있는 쇼 박사의 꿈을 생각해보라. 그 장례식 장면. 생과 사에 대한 동경. 모든 안드로이드들의 질문은 우리는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이었음을 생각해보라. <은하철도 999>에서 <블레이드 러너>까지.) 아니면,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실수로 만들어진 존재, 혹은 어떤 형벌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면.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가 매일 간을 독수리에 쪼아먹히는 형벌을 받듯이, 처음 지구에 남겨진 엔지니어는 마치 사약을 받는 죄수의 모습처럼도 보인다.) 그래서 결국 창조주들에 의해 파괴되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되었다면. (잘못 만들어진 것이니까.)

이의 반대편에 안드로이드 데이빗이 있다. 영화 초반부 데이빗이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몇 번 따라하는 대사가 있다. "어떻게 불을 잡을 수 있지?" "뜨겁지 않다고 믿으면 되지." 영국인으로서 아랍인들의 편에 서서 싸우는 이 영화를 선택한 것도 흥미롭지만, 이 대사들도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뜨겁지 않다고 믿는 것. 이는 마치 인간에 대한 데이빗의 조롱처럼 보인다. 웨이랜드 회장은 데이빗을 인간들에게 소개하며 말한다. 그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그러나 데이빗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한편으로 웃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데이빗이 보기에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은 단지 그들의 믿음, 그러니까 불을 뜨겁지 않다고 믿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내내 데이빗은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다. 왜냐하면 자신을 그토록 무시하고, 섬뜩한 존재로 여겼던 인간들이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게,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도 훨씬 못한, 단지 잘못 창조된 존재로 점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 박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아니 쇼 박사가 아니라 어떤 인간도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데이빗이 이 와중에 그것을 하고 싶냐고 조롱하지만) 데이빗이 벗겨낸 십자가 목걸이를 다시 목에 걸고 자신들을 창조한 존재를 만나러 간다. 왜냐하면 그 목걸이는 인간이 잘못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죄를 가진 존재이기는 하지만, 신(창조주)과 닮은 형상의 어떤 것이라는 믿음. 그녀는 그 믿음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 두 명의 생식기능이 없는 존재, 즉 불임의 쇼 박사(그리고 이를 전시라도 하듯 그녀의 배에는 거대한 칼자국이 이제 생겨났다)와 안드로이드 데이빗은 창조주들의 별로 간다. 두 번째 이야기가 아마도 거기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묻게 될까. 그리고 어떤 대답을 얻게 될까.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아마도 이 마지막 장면에서 많은 SF 영화의 팬들은 어떤 장면들을 연상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스타워즈>의 그 유명한 장면. "내가 네 아버지다." 혹은 <블레이드 러너>의 엔딩)


 

- 2012년 6월, CGV 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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