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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맛, 임상수

Ending Credit | 2012. 6. 4. 18:50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결말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1.

돈의 맛은 어떤 맛일까. 여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짠맛에 가까운 맛일 것이다. 짭조름한 땀의 맛. 돈이라는 것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돌아야 하는 것이니까.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그것이 쾌락의 땀이든, 고통의 땀이든 간에)이 그것들에는 아마도 깊숙이 배여들어가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아마도 그래서 같은 짠 것인 돈과 소금의 어떤 비슷한 점을 유추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소금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너무 많아지면, 그것은 우리의 일부분에 악영향을 미치고 망가뜨린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그 짠맛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그것에 길들여진다. 그리고 그것은 돈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비슷해진다. 돈은 '필요하지만', 과도한 돈은 우리를 '망가뜨리고', 우리는 결국 돈에 '길들여진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보통의 돈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이다. 임상수의 영화 <돈의 맛>에 나오는 윤회장(백윤식)의 집 금고에 가득 쌓여있는 반질반질한 새 돈뭉치들, 그것에서도 짠맛이 날까.

임상수의 전작 <하녀>의 느슨한 후속편, 혹은 스핀오프, 혹은 이본(異本)인 이 영화 <돈의 맛>은 <하녀>처럼 인상적이지는 않으나, 꽤나 흥미로운 시작을 보여준다. <하녀>는 고층건물에서 떨어지는 여자를 보여주면서 시작했고, 카메라는 수직하강하여 땅 위에서 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는 잠깐의 흥미거리 이상은 아니었다. 그것에 관심을 두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돈의 맛>은 마찬가지로 윤회장과 그의 비서 주영작(김강우)의 수직하강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그러나 이 수직하강은 돈을 가득 채운 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하강이다. 하늘에서 돈가방을 들고 내려오는 왕의 강림. 그리고 그들은 차를 타고 그 돈을 전달하러 유유히 가는 중이다. 말 그대로 유유히. 그리고 동시에 임상수는 흥미롭게도 다른 차들을 그저 달리는 불빛들로 처리해버린다. 그 빠른 이동과 대비되어 유유히 달리는 이 윤회장. 그것은 아마도 두 가지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 하나는 윤회장은 다른 차들처럼 그렇게 한푼의 돈이라도 더 벌려고 아등바등 달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윤회장의 눈에는 아마도 실제 다른 차들은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점. 인간이 타고 있는 자동차가 아닌 그저 수평으로 내달리는 불빛으로. 

2.

그래서 윤회장의 집에서 주영작의 동선을 따라 펼쳐지는 영화 초반부의 씬들은 꽤 흥미롭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윤회장의 집은 참으로 흥미로운 공간이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집인지 알 수 없게 만들어진 이 집은 집보다는 거대한 갤러리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하는 직원들, 그러니까 하녀들은 흥미롭게도 갤러리 직원들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의 갤러리와 다른 점은 이 갤러리의 양식을 정확히 짚어내기가 꽤 어렵다는 점이다. 모던한 장식들과 동양적인 여백의 공간, 복잡한 이중계단과 심플한 벽면이 혼재되어 있는 이 공간은 고전예술과 현대예술이 만나고 서양의 것과 동양의 것이 조인트 콘서트를 하는 공간이다. 그 맥락을 알 수 없게 짬뽕된 이 공간은 그래서 도리어 키치적이 되어간다. 그것의 상징은 아마도 윤회장의 장인, 즉 백금옥(윤여정)의 아버지인 노회장의 모습일 것이다. 그 부의 끝에서 만들어진 그 키치, 그 우스꽝스러움(그래서 현실세계의 모 회장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쁘띠'의 상징이 되어 귀여움을 받는 것인가).

물론 흥미로운 것은 이 공간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들을 찍는 방식, 그리고 그것에서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면서 얻게 되는 어떤 심상에 관한 부분이다. 나는 초반의 이 장면들이 어떤 동물원을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으르렁대는 동물원의 맹수들처럼 이들 가족들은 세상을 향해 으르렁댄다. 돈만 밝히는 것들, 어떻게든 우리 돈을 뜯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저 아랫것들, 교수고 정치인이고, 사업가이건 간에 모두들 똑같아 돈이라면 환장들을 하지. 그리고 그 맹수들을 우리는 사육사 주영작의 안내에 따라 차례로 관람한다. 그러나 이 관람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그들을 저  멀리서 지켜본다, 관찰한다는 것이다. 이 초반부의 씬들이 흥미로운 것은 그 내용적인 면보다도 임상수는 관객을 이들과 동일한 눈높이에서 보도록 허락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동선은 그들과 동일한 눈높이에서 대부분 설계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그들을 우러러보거나, 아래에서 내려다본다. 즉 우리는 그들을 감시하는 입장이 되거나, 아니면 '피핑 톰'이 된다. (이 영화에는 동시에 감시카메라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것도 여러 차례.) 이는 물론 우리와 그들의 어떤 계급적 차이를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이로써 우리는 이 영화를 보는 것이 일종의 불유쾌한 경험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 <돈의 맛>이 상당수의 관객들에게 불유쾌한 경험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어떤 특정의 장면들이 낳은 효과도 있겠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관객을 일종의 몰래 숨어서 보는 자, 때로는 감시하는 자로 만들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감시가 유쾌할리가 있겠는가. (아마도 임상수의 의도는 후자쪽,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들을 감시해야 한다,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3.

이러한 윤회장 가족 중에서 조금은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나미(김효진)다. 그렇다, <하녀>의 그 '나미'다. 지난 <하녀>를 보고 쓴 리뷰에서 나는 '나미'가 아마도 괴물이 되지 않을까,라고 썼고, 임상수의 의도도 아마 그런 것이었던 것 같다. (<돈의 맛>과 관련한 인터뷰를 보니 본인도 나미가 괴물이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누군가의 충고에 따라 나미를 이 영화에서 조금 다른 인물로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나미도 사실 주영작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는 어떤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며, 자신에게는 그렇게 인사하지 말라고 주영작에게 말하면서도 이는 한편으로 어떤 반응을 떠보는 것처럼도 느껴진다(아마 주영작의 머뭇거림도 그런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다른 종류의 인간들을 대하는 것, 그러니까 다시 동물원으로 돌아간다면 처음보는 동물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을 떠보는 것이라고 할까. 그러나 아무튼 그것은 오해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의 어떤 (좋게 말하면) 지향점, (나쁘게 말하면) 체념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미는 괴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괴물이 아니라고 해서 그녀를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해하지 마시길 바란다. 여기서의 '인간'은 '니가 인간이냐!'라고 말할 때의 그 인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이른바 홍상수의 구분법을 쓰고 싶다. "우리 인간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라고 말할 때의 그 구분법, 그 인간.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늘 '찌질한 인간'들이 나온다. 그러나 상당수의 경우 우리는 그들을 찌질하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괴물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찌질한 말을 내뱉고 찌질한 짓거리를 벌이는 '찌질이'일 뿐이다. 아마도 (초창기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 홍상수의 영화에서 좀처럼 죽음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홍상수 영화 속의 인물들은 죽음을 마주할 용기마저도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영화에도 '찌질이'라는 말이 나오며, 막판에 이르러서는 주영작은 자신이 찌질이라고 체념하듯 내뱉는다. 그러나 이 때의 '찌질이'라는 대사는 자조적인 맥락에서 내뱉어진 것이기는 하나, 그것은 관객에게 도리어 이 인물은 괴물이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음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주영작은 그런 인물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살짝 갈등하지만, 결국에는 거울 뒤편에 돈다발을 쌓아두고,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그저그런, 보통의 그저그런 인간, 결코 A급은 아닌, 그런 것밖에는 할 수 없는 그런 인간. (그러나 이것이 쉬울까.)

그리고 이것은 영화의 결말에까지 이어진다. 주영작과 나미의 비행기에서의 섹스씬. 이 섹스씬을 행복한 결말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그 아래에는 에바의 시신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들이 막을 수도 있었던 에바의 죽음. 그 위에서 벌어지는 이 섹스씬을 보며 못내 마음이 불편한 것은 이것은 결국 어떤 자신들의 찌질함, 그 체념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에바의 관 속에는 주영작이 던져넣은 돈다발마저 들어있으니까. (에바가 그 돈을 보고 어찌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이들은 자신들의 '찌질함'을 추인하는 것으로 괴물이 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한다. 그리고 어쩌면 임상수(그리고 비슷한 이름의 홍상수)가 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도의 희망이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도 싶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 몸부림을 치는 것. 인간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 고 다짐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결말이 께름칙한 이유는 이 마지막은 결국 재생산이기 때문이다. 나미와 주영작의 이 결합은 전개 과정은 다를지 몰라도, 결국 백금옥과 윤회장의 결합의 되풀이니까.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라고 윤회장을 말하는 백금옥도 처음에는 윤회장을 이렇게 만난 것이 아닐까. 나미와 주영작은 그들과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까. 희망을 걸어봐도 될까.) 

4.

그렇다, 그런 세상이다. 돈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능한 세상. (그것과 관련하여 영화에 재미있어 보이는 장면이 있다. 무례한 말들을 내뱉는 윤회장의 아들 윤철(온주완)과 싸우려드는 주영작. 겁을 먹은 듯이 보이는 그 아들을 주영작은 자신만만하게 차에서 끌어내리지만, 도리어 얻어터지는 것은 주영작이다. 그 (아마도 돈으로 만들어진) 싸움의 기술. 돈은 없지만, 주먹과 깡을 믿고 살아가는 사나이들의 세계는 이제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할 수가 없다.) 그 거대한 지옥도, 최대한 좋게 말해 어느 정도의 '체념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자신의 몸에 불을 싸지르는 것으로 끝내버렸던 그 <하녀>에 가득한 체념과 이 <돈의 맛>의 같지만 다른 체념을 결국 결말에서 보게 되는 것. 그러니까 스핀오프, 혹은 이본.

우리의 최선은 결국 찌질해지는 것일까. 그 체념을 결국 받아들이는 것, 그러니까 그 체념한 자신을 견뎌내는 것 말이다. 그러나 물론 이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다. 타인을 견뎌내는 것보다 자신을 견뎌내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니까. 그 견뎌냄의 끝에는 결국 인간이 되는 길이 있을까. 



덧.
이 영화를 본 서울극장 8관은 손님을 받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우퍼가 울릴 때마다 무대가 심하게 흔들리며 천둥치는 소리가 나는 데다가, 스크린 오른쪽의 일부분은 검은 얼룩이 크게 있었다. 서울극장 관계자는 빨리 조치를 취하시길.


- 2012년 6월, 서울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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