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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정지우

Ending Credit | 2012. 4. 29. 20:18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있음)


박범신 원작, 정지우 연출의 <은교>를 보았다. 사실 원작을 보지 않아서, 원작은 어떤 흐름의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전체적인 사건의 전개는 원작과 동일하다고는 하지만, 사실 같은 사건이라도 노시인 이적요(박해일), 그의 젊은 제자 서지우(김무열), 그리고 이들 사이에 끼어드는 은교(김고은) 이 세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묘사하는가,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매우 다른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시인이 소설 '은교'에 쓴 대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제자의 말대로 단지 추문이 될 수도 있다. (또 여기에는 물론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영화와 소설의 차이에 대한 문제도 개입하게 될 것이다.) 정지우의 선택은 그중 어느 쪽일까, 아마도 상당수의 관객들이 가졌던 의문은 그런 쪽에 가까웠을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몇몇 우려들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해석들과는 달리), 정지우가 의도했던 것은 현재의 이적요와 은교와의 일대일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즉 늙은 시인이 젊은 여자의 육체에 빠져 타락의 길로 접어드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는 말이다. 그 근거 중의 하나는 은교와 이적요의 섹스씬 혹은 성적 유희의 장면들이다. 이적요의 상상, 혹은 그의 문학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 장면들에서 늙은 이적요는 젊은 이적요로 돌아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젊음의 활력을 맛보며 활력적인 육체를 드러내보인다. 즉 이적요의 상상 속에서 이적요가 궁극적으로 보고자하는 것은 은교의 벗은 몸이 아니라, 젊은이로 돌아간 자신의 모습이다. 은교는 단지 그를 젊은이로 돌려놓는 매개물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에서 은교의 캐릭터가 거의 빈 것처럼 보이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여러 평들에서 이 은교라는 캐릭터가 거의 빈 것처럼 그려진다, 알 수 없다, <은교>라는 영화에 정작 '은교'는 없었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에서 의도했던 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은교는 리뷰들에서 지적한대로 거의 빈 것처럼 보이는 캐릭터이다. 순수함과 팜므파탈을 교묘히 넘나들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방점을 찍는 것은 그 텅빈 것처럼 보이는 순수함이다. 즉 은교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니 영화 속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육체 뿐이다. 영화에서 탐미적으로 뒤쫓는 것은 그녀의 육체의 운동이지, 그 알 수 없는, 불가해한 내면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은교에게 집안일을 시키고, 그녀의 육체를 따라잡는 카메라는 그녀의 육체를 드러내보이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다. 청소나 빨래같은 집안일만큼 온몸을 쓰는 것이 있던가. 누드로 청소를 해준다는 서비스가 괜히 있는게 아니다.) 은교를 이렇게 비워놓는 이유는 하나다. 은교가 비어있어야 이적요는 늙은 자신을 그것에 투과시켜 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적요에게 은교는 자신의 모습을 젊게 비추게 하는 거울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그의 제자 서지우와 비교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같은 젊음이면서도 서지우와 은교는 다르다. 은교가 비어있는 캐릭터라면 서지우는 꽉 차 있는 캐릭터이고, 그의 내면을 꽉 메우고 있는 것은 세속적인 것들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별을 그저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고정관념일 것이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려는 욕망일 것이고, 이상문학상이라는 권위일 것이며, 어쩌면 시기심이나 열등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하나 흥미로워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서지우를 죽이는 방식이다. 서지우가 길을 내려가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로 다시 올라오다가 죽는 그 방식, 굳이 그 방식일 이유가 있을까. 마치 이 장면은 이적요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결과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이적요의 조작이 없었다면 서지우가 자동차 점검을 하러 갈 일도 없었을 것이고, 다시 돌아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적요가 이 일에서 책임을 면하기란 힘들다. 결과가 같다면 결국 보아야 할 것은 아마도 과정일 것이다. 그 죽음의 과정이란 것. 과정이 이렇게 바뀌어버리면서 서지우의 죽음에는 이적요 말고도, 책임져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겼다. 그것은 서지우 본인의 젊음이다. 그를 죽음으로 보낸 것은 분노에 가득찬 그의 젊은 혈기이다. 그는 젊은 혈기에 가득차 한시라도 빨리 이적요를 만나고자 무리한 주행을 했고, 그것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보낸 것이다. 

즉 이 젊음은 문학적으로 대적할 수 없는 이적요에게 그가 가진 거의 유일한 무기였지만, 이 유일한 무기가 결정적 순간에 이르러 자신을 해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영화 속에서 아쉽게 느껴지는 점은 이 대비가 명확히 그려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적요에게 있으나 서지우에게 없는 것, 즉 천부적인 문학에 대한 소질은 그 대비가 비교적 명확한 반면에, 서지우에게 있으나 이적요에게 없는 것, 즉 젊음에 대한 대비는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내내 약간 불만스러웠던, 혹은 의아했던 점은 이적요의 늙음은 관념으로는 관객들에게 주어지지만(즉 '이적요는 늙었다'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주입시키려 하지만), 그 실물로서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 내내 이적요는 굳이 은교의 도움이 필요없는 늙은이이며(그가 은교 대신 청소를 하거나, 은교의 옷을 말려주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자, 이 장면에서 왜 은교는 누워있고, 그녀의 옷은 대신 늙은 이적요가 말려주는가), 자동차 정비를 손수할 정도의 나름 강건한 노인이기도 하다. 물론 가장 당연한 힌트는 정지우가 나이든 배우를 쓰지 않고, 박해일에게 노인 분장을 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오히려 이 젊음과 늙음의 대비는 은교와 그녀의 말로밖에 등장하지 않는 은교의 어머니와의 사이에 드러나는 것처럼도 보인다. 발꿈치의 굳은 살을 긁어내는 은교의 어머니와 깨끗하고 예쁜 발과 발목을 가지고 있는 은교와의 대비. 은교는 언제가 되어서야 발꿈치의 굳은 살을 칼로 긁어내게 될까.)


이렇게 됨으로써 상딩히 복잡하고 미묘하게 묘사되어야 할 캐릭터인 서지우는 단지 열등감과 시기심 밖에 남지 않은 캐릭터가 되었다. 즉 질시의 주체이자, 대상이어야 할 이 인물은 단지 '욕망하는 것'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는 전형적인 악역의 역할만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것은 이 전체 영화의 구조와도 연관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초중반까지는 섬세한 심리극의 양상을 가지고 있던 이 영화는 이적요와 서지우의 '은교' 발표를 둘러싼 첫번째 결별 이후로 서사극으로 슬슬 변화하여, 마지막에는 몰아치는 사건들로 급속하게 마무리된다. 즉 영화 초반, 존경심과 보호본능 그리고 시기심, 질투의 사이에서 미묘하게 부유하던 서지우가 영화의 결말부에 이르러 하나의 이미지로 고착되는데, 이것은 한편으로 마지막에 이르러 인물에게 심리를 드러내보일 틈을 주지 않는 영화의 구조와도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이 아쉬운 이유는 서지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서지우의 대척점에 있는 이적요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런 질문과도 연관된다.

왜 마지막에 이르러 이적요는 힘없는 노인으로 돌아갔을까.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영화 내내 '팔팔한, 무늬만 늙은이'로 보이던 이적요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술독에 빠져,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노인이 되었다. 물론 이것에는 여러가지 이유를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지우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은교가 떠나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답일까. 이것은 이렇게도 물을 수 있다. 왜 애초에 이적요는 서지우를 제자로 받았을까. 이적요는 첫만남에서 그의 문학적 능력이 없음을 이미 어느정도 간파했다. 그렇다고 해서 서지우가 다른 감각 - 예를 들어 대중적 감각 - 이 뛰어난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적요가 쓴 '은교'를 서지우가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그는 아름다웠기 때문에 세상에 내보냈다고 했지만, 그가 그것을 볼 때에는 분노로 가득했을 때였다. 그는 단지 그것을 더러운 이야기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이후에 어찌 평가받았는가.) 어쩌면 이적요가 그를 제자로 받아준 이유는 그가 결코 자신만큼 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즉 어떤 의미에서는 이적요는 그를 이용한 것이다. 이적요에게 서지우는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 없는 소설을 그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 있는 자신보다 한참 떨어지는 (그나마 스스로 쓸 수도 없는) '소설가'일 뿐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적요와 서지우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소설은 시에 비해서 이류에 불과하다'는 점이라는 사실.) 이적요는 그가 결국 자신의 '구겨진 뒷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 아닐까. 그것이 견딜 수 없게 자신을 혐오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이렇게도 볼 수 있다. 은교는 이적요를 젊게 만드는 그의 깨끗한 앞면, 그리고 서지우는 그의 가득한 내면의 욕망을 보여주는 구겨진 뒷면이다. 이 둘이 만나 '외롭다'며 섹스를 할 때, 이적요는 몰래 숨어 무엇을 보았던가. 자신이 곧 은교이며, 동시에 서지우인 것을, 그 외로운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임을 깨닫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찾아온 은교에게 결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저 뒤늦게야 깨달은 자의 눈물을 흘렸을 뿐이다. 동전을 뒤집어도 동전이 아닐 수 없으며, 예쁘고 가녀린 소녀의 발이건, 굳은 살을 긁어내야 하는 늙은 어미의 발이건 결국 발인 것, 서지우에게 '별이 별인 것을 모른다'고 힐난했지만, 정작 그것을 모르는 것은 자기자신일 뿐이라는 것. 이제 남은 것은 관객들의 몫이다. 적요(寂寥)한 이에게 찾아온 '은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녀는 은혜로운 만남(恩交)인가, 은밀한 관계(隱交)인가. 아님 그것도 아니라면 음란한 요부(淫嬌)인가.



덧.
영화 속에서 소설 '은교'는 이상문학상을 받지만(적어도 영화 속에서 '이상문학상'은 대중문학과 가장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현재 우리의 세계 속에서 <은교>는 도리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화되며 대중문학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텍스트 속에서 규정한 자신과 점점 반대가 되어가는 이 텍스트, 이 흥미로운 현상을 어찌 볼 것인가. 그와 더불어 이 자기반영적으로 보이는 텍스트를 기꺼이 쓴 박범신 작가에게도 경의를. 정지우 감독에게는 물음표를. 



- 2012년 4월, 롯데시네마 피카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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