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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천사(Fallen Angels), 왕가위

Ending Credit | 2008. 5. 16. 00:45 | Posted by 맥거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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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천사>는 1997년 홍콩반환에 관한 더없는 엘레지일 것입니다. 천사들이 떠나가 버린 도시, 아침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도시, 홍콩. 저는 이 영화가 홍콩영화의 마지막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홍콩영화는 끝났습니다. 홍콩을 무대로 한 중국영화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아마도 또다른 일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이 코멘터리는 끝난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이어지고, 스피커에서는 정성일 평론가가 홍콩의 유명 라디오 시그널 음악이었다고 소개했던 ‘Only You’가 이어진다. 그리고 나는 지친 상태로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 즈음 플레이어의 정지 버튼을 누른다.

정성일 평론가의 코멘터리를 듣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는 1997년 홍콩반환의 의미부터, 왕가위에게 부끄럽게도 물어보았다는 한국어간판의 의미까지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것만 듣고 있을 틈이 없다. 그와 동시에 나는 눈으로는 화면을 바라보고, 머리 속으로는 옛날 일들을 생각하고, 자막을 읽고, 자리를 고쳐 앉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정성일 평론가는 이 모든 이야기를 적어놓고 읽는 것일까, 머리 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일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 철자를 잘못 읽는 류의 실수를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이 이야기를 적어놓고 읽는 게 틀림없다는 섣부른 판단을 내린다.

 

도대체 평론가의 코멘터리를 듣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마도 나에 있어서는 그게 두 가지로 기능을 하는 것 같다. 하나는 일종의 정답을 맞춰보는 기분이다. 영어듣기평가가 끝나고, 뒤에 해설지문을 보며,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처럼, 나는 그가 한 씬에서 구술한 해설이 나의 애초의 생각과 얼마나 들어맞는지를 가늠한다. 그리고 혹여 운 좋게 비슷하기라도 하면, 잠시 우쭐한 기분에 빠져 다음의 해설을 놓쳐 버린다. 그리고 또 하나는 - 이게 더 큰 이유라고 말할 수 있는데 - 단지 목소리 때문이다. 물론 정성일 평론가에만 해당되는 것이지만, 이 목소리는 묘하게 중독성이 있다. 어딘지 어눌하고, 종종 발음도 틀리지만, 어딘지 사람을 잡아끄는 목소리. 목소리에도 진정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 있다면, 이 목소리는 진정성이라는 게 있다.

물론 이것은 오류이고, 허구다. 목소리만 가지고 진정성을 판단할 수는 없다. 단지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빚어낸 허구일 뿐이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그의 글을 연상시키고, 그 글에서 느껴지던 한 영화에 대한 절절한 애정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이미 이 코멘터리는 이동진 평론가 등의 코멘터리와는 이미 다른 지점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우열을 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이동진 평론가의 코멘터리가 분석적이고, 학술적인 어떤 것이 느껴진다면, 정성일 평론가의 코멘터리는 따스하고, 감정적이고, 설득적인 어떠한 것이 느껴진다. 전자의 코멘터리가 관객들에게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공하는 것, 따라서 영화가 새롭게 분석되고, 다른 어떤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어떠한 지점을 제공한다면, 후자의 코멘터리는 관객들에게 영화감상의 폭과 깊이를 넓게 하여 관객들에게 영화에 대해 새로운 감동을 제공한다. 두 가지 모두 영화를 한 번 더 보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 <타락천사>의 코멘터리는 내가 잊고 있었던 새로운 두 가지 사실을 환기시킨다. 하나는 이 영화는 정성일 평론가의 마지막 말대로 1997년 홍콩반환 직전의 홍콩의 분위기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사람들과, 떠나야 함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남는 사람들. 이곳에 살아남아 삶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망기타(忘記他)’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카메라가 말해준다. ‘그대를 잊겠다’는 가사가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는 것, 그것 자체가 아직 떠나간 사람을 잊지 못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찍지 말라고 화내는 자신을 찍은 화면을 아버지가 몰래 보면서 웃고 있고, 그것을 다시 하지무(금성무)가 몰래 보고 있는 장면. 이 장면에 흐르는 하지무의 독백은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독백은 필연적으로 아버지가 이미 세상에 없는 어떤 후일의 시점에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화면이란 결국 최종적으로는 관객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배경이 있고, 배우가 있고, 그 배우들이 아무리 움직이고 있어도 모든 화면이란 그것을 밖에서 바라보는 관객이 있어야만 가능해질 수 있다는 점.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유일하다는 점. “이 장면은 투샷으로 찍기는 했지만,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향해서 앉아있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은 한 번도 마주보지 않습니다. 혹은, 청부업자는 그에게 얼굴을 돌리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의 표정을 모두 볼 수 있는 사람은 영화를 보는 우리들 뿐입니다.....그 때 이 영화는 영화 바깥에 있는 우리들을 포함해서 영화를 진행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화란 결국 ‘관객들에게 말걸기’라는 사실을 다시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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