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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이 부분적으로 들어 있음)



원작소설과 원작영화도 보지 않고, 별다른 정보 없이 데이빗 핀처의 새 영화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하 <밀레니엄>)을 보았다. (그러니 아마도 아래 글의 몇몇 부분은 원작과 이어지는 나머지 연작들을 보면 자연히 묻지 않아도 될 의문인지는 모르겠다. 미리 그것을 보신 분들이 있다면, 뻘소리가 나오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데이빗 핀처는 확실히 스타일리스트에 가깝다. 이 영화는 영화관에 차가운 북구의 칼바람이 몰아닥치는 듯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냉랭한 기운을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으며, 흰색의 눈과 대비되어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세기말(밀레니엄)의 어두운 색조도 잘 드러내보이고 있다. 그것은 야심차보이는 타이틀롤에서부터 잘 드러나는데, 이 타이틀롤은 상당히 기묘하면서도 교묘한 인상을 준다. 컴퓨터그래픽으로 제작되어 계속 검푸른 진액들이 인간의 형상을 가진 물체, 혹은 키보드와 같은 디지털 물건들에 넘쳐흐르는 이 타이틀롤은 뭔가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것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적인 것의 결합, 욕망과 차가움의 결합, 이성과 반이성의 결합, 과학과 초자연의 결합과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이 타이틀롤의 기조와 분위기는 그대로 이어져 영화의 전체적인 부분을 지배하고 있으며, 결국에는 이 영화의 내면에 담겨 있는 어떤 주제의식까지 가닿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았을 때 이 영화는 이 스타일이 조금은 과하다 싶은 부분들이 있으며, 핀처 감독이 나름 내리누르려고 한 것 같지만, 미처 제어되지 않은 폭주와 같은 부분들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아무튼 이 영화를 본 전체적인 감상은 스타일을 한껏 살린 양질의 스릴러물이긴 하지만, 어딘지모르게 기묘하고,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겠다.

먼저 가장 의아하게 느껴지는 점 중의 하나는 이 영화는 전체적인 이야기가 분절되어 있는 양상으로 영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글쎄, 원작소설이나 원작영화에서의 구성을 그대로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이것이 핀처 감독이 새로 고안한 구성인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는 일종의 버디 무비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보통의 '버디'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일반적인 버디 무비에서 주인공들은 이미 결합되어 있거나, 아니면 극 초반에 결합되는 반면에 이 영화에서는 거의 한 시간이 훌쩍 넘어서기까지 두 주인공의 조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조우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각자에게 나름의 사건들이 진행된다. 이 시간들을 일종의 주인공들의 '캐릭터 만들기'라고 보아도, 이 긴 시간의 분리된 진행은 독특한 인상을 준다. 여기까지가 1부라면, 2부는 두 주인공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이들이 각자의 재능을 발휘하여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숨어 있는 적과 대결하고, 마침내 적을 쓰러뜨리고 사건을 해결하는 일반적인 버디 무비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영화 <밀레니엄>은 이 결말에서 예기치못하게 3부의 잉여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것은 헨리크 방예르에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부패한 워너스트롬의 비리를 폭로하고, 리스베트(루니 마라)가 그의 돈을 빼돌리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가 하리예트의 실종이 해결된 이 마당에, 사족처럼 끝에 따라붙는 것은 약간은 수상쩍다. (아마도 원작소설에서는 조금 더 밀접한 결합이 있었던 듯 싶지만) 하리예트의 실종과 워너스트롬의 부패에 대한 폭로가 거의 별개의 사건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그 이유인데, 이 영화에서 거대한 하나의 사건 해결 후, 뭔가 미완적으로 보이는 추가적인 사건이 그 뒤에 붙을 이유가 있을까. 아마도 그 이후에 이어질 다음 편의 이야기와 연관이 있는 듯도 싶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로 볼 때, 이 3부로 나뉘어진 듯한 구성은 어딘지모르게 엉성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에서 몇몇 해결되지 않은, 혹은 어렴풋하게 제시된 이야기들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영화는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복선으로 깔아둔 듯한 인상을 준다. 그것은 이 영화는 사실 사건만 제시할 뿐, '왜'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왜'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해답은 3부작이 마무리될 즈음에 가서야 말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때에도 뭔가 해답이 나올지 의문이다. 어디선가 보았는데, 이 소설의 원작자가 원래 10부작으로 계획하였는데, 중간에 급작스럽게 사망하여 현재와 같은 3부작의 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한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들이 왜 여자를 증오하게 되었는지는 애써 캐묻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화 속 실마리를 통해서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첫번째 이야기에서 복선처럼 깔아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나치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실종된 하리예트의 아버지를 비롯한 방예르 가문의 여러 남자들은 나치 추종자인 것으로 등장하며, 화면 곳곳에도 이와 연관된 상징적인 부분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미카엘(다니엘 크레이그)의 집앞에서 죽은 고양이의 모습은 마치 나치의 갈고리십자(하켄크로이츠)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범인의 집 지하에 설치되어 있는 가스실의 모습 등이 그러한 일부분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영화 속 등장한 나치추종자의 모습인데, 그는 자신의 나치 시절 사진들을 자랑스럽게 전시하고 있으며, 자신이 스웨덴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떳떳하다고 주장한다.


즉 이 이야기는 한편으로 유럽의 어떤 지워지지 않는 외상적인, 부끄러운 기억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청산하려 애썼지만, 완벽히 청산되지 않은 나치 부역의 역사, 과거의 기억이며, 거대한 제노사이드의 기록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영화 속 어떤 남자들은 여자를 증오한다. 그러나 그들이 증오하는 것은 그 중에서도 속칭 '더러운' 여자이다. 성적으로 방종한 여자, 믿음이 부족한 여자, 생활이 방탕하고, 타락한 여자. 즉 그들이 여자를 증오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깨끗하지 못하기',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나치즘과 연관된 어떤 한 부분을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 속에도 등장하지만, 영화 속 살해된 여자들은 동시에 유대인이며, 나치 추종자들은 유대인이 더럽기 때문에, 그들 종족을 말살하여야 하며, 아리아인의 순수한 혈통을 그러한 말살을 통하여 지켜내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실제로 유대인 제노사이드는 나치가 유대인의 경제권을 빼앗아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건설 후 1차 세계대전 실패의 책임을 그들에게 돌려 정국의 주도권을 획득하려는 문제 등과도 연관되어 있지만, 표면적으로 그들이 내세운 것은 이러한 순수에의 추구, 순결에의 갈망,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추구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나치의 모습은 한편으로 리스베트의 방탕함을 비난하면서도, 도리어 그보다도 훨씬 정신적, 육체적으로 망가져있는 악질 후견인 닐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이의 반대편에 아마도 리스베트가 있을 것이다. 리스베트는 순수와는 아마도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며, 동시에 사회에 의해서 '미쳤다'고 규정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편으로 유럽에서 중세에 (사실이건 아니건) 생활이 방탕하다고 지목된 여자들이 마녀로 규정된 것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즉 중세에는 종교법정에서 그녀들을 '마녀'라고 규정했다면, 지금은 우리가 그녀들을 사회적으로 '미친 여자'라고 규정하여 낙인찍을 뿐이다. 예를 들어 성적소수자- 영화 속 리스베트의 모습처럼 -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가? 성적소수자들은 성적으로 타락했다고 여겨지며, 때로는 정신적으로 '문제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한다.) 그것은 문신과 피어싱이 가득한 리스베트의 모습에서부터 상징적으로 보여지며, 자유롭게 행동하고 사고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부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 남성 위주의 사회 구조에서 혼자 힘으로 생각하고,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나가는 강력한 여성 주체의 모습, 그것이 리스베트의 모습이다. 예를 들어 리스베트의 주무기는 컴퓨터 해킹, 즉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즉 현재의 사회시스템은 남성 위주의 시스템이며, 나치와 같은 이들이 순수한 혈통, 고전적인 균형미를 그토록 부르짖은 것은 이 남성 위주의 공고한 사회 지배 시스템, 아버지의 법을 그야말로 '순수하게' 유지시켜 나가겠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 <하얀 리본>에서 잘 보여진다.) 그 시스템을 리스베트는 해킹하여, (시스템의 눈으로 보면) '더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 영화 속 반복되는 이미지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아버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딸에 대한 성(性)적인 집착과 간음이다. 하리예트는 아버지에게 강간당하며, 리스베트 역시 예전에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부르짖는 이상한 순수혈통에의 집착과 연관된다. 이러한 근친상간은 역설적이게도 고대로부터 순수함을 지키기위한 방편(예를 들어 왕실에서)으로 이야기되기도 했으며, 실제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즉 이것은 아버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딸(여자)에 대한 지배이다. 그러나 이의 반대편에 리스베트와 미카엘의 섹스가 있다. 영화 속에서 기이하게 보였던 것은 이 리스베트와 미카엘의 관계 역시 이상한 부녀관계의 뉘앙스를 풍긴다는 점이다(영화 속에서 미카엘은 리스베트에게 자신들의 나이차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자(前者)의 관계들과 다른 점은 이의 주도는 미카엘이 아니라, 리스베트라는 점이다. 이들의 첫 섹스는 미카엘이 가장 약해졌을 때 이루어지며, 리스베트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영화 속 두번의 섹스가 모두 여성상위임은 아마도 상징적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결국 미카엘을 구해내는 것은 다름아닌 리스베트이다. 즉 리스베트는 새로운 밀레니엄에서 나약한 아버지를 구원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여전사이다.

그러나 순수를 부르짖던 전자의 아버지들은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 그들은 딸에 의해 살해당했거나, 거의 반불태워졌거나, 가슴에 '강간범'이라는 표식을 새겨야만 했다.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들은 더러운 여자, 유대인들을 심판하려 했으나 심판당한 것은 그들 자신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딸들에 의해 이루어진 과거에 대한 청산, 과거에 대한 심판이다. 나치에 대한 부역, 유대인들의 제노사이드라는 부끄러운 과거, 청산되어야 하는 역사에 대한 심판이다. 과거의 천년 동안 끔찍하게 사람들을 얽어매었던 아버지의 법들, 그것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열기 전에 청산되어야 한다. 무엇에 의해? 문신과 피어싱에 의해, 혼돈과 귀를 찢는 오토바이의 소음에 의해, 그리고 차가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이질적인 결합에 의해(리스베트의 방식과 미카엘의 방식의 차이), 과학과 초자연, 이성과 반이성, 욕망과 차가움, 그 모든 잡종적인 것의 혼합에 의해. 우리는 그 첫째 장을 이제 겨우 열어젖혔을 뿐이다. 아직 청산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카오스를 찬양하라. 이제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다.



덧.

근데 헨리크 아저씨는 그 사십여 년동안 도대체 무엇을 하셨길래, 그 비밀을 풀지 못하고, 이제서야 미카엘을 불렀을까. 영화의 시작부 이것을 보며, 이 사십여 년이라는 시간에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영화 <올드보이>처럼) 별 게 없군요. 혹시 원작에는 뭐라도 있나요?



- 2012년 1월, 대한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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