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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정글, 송윤희

Ending Credit | 2011. 12. 29. 17:54 | Posted by 맥거핀.


 

의사는 너무 늦었다고 했다. 특별한 방법이 없다고 했다. 나는 뭐라고 말을 좀 더 듣고 싶은 눈길을 의사에게 애타게 보냈지만, 그는 이제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제 그만 나가달라는 투로 문을 힐끗 바라보았을 뿐이다. 불과 몇 주 전의 일이다.

그 몇 주 전의 경험. 기침이 너무 심해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고, 목은 부어 올랐다. 어지간하면 피하고 싶었지만, 버티다 못해 종합병원에 갔다. 이비인후과 진료를 신청했더니, 진료가 가능한 의사가 특진의사뿐이라며, 그래도 괜찮으면 진료를 받으라고 했다. 특진이라는 게 그 이름이 보여주는 만큼의 그런 '스페샬'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의사는 내 목구멍을 아주 잠깐 들여다보더니 감기는 이미 다 나았는데 병원에는 뭐하러 오셨냐는 투로 이야기하고는, 처방전을 적어주었다. 1분 남짓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아마도 내가 입을 잘 벌리라는 의사의 지시에 조금 더 효과적으로 따랐더라면 그 시간은 훨씬 단축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특별한 시간을 입 하나 제대로 벌리지 못해 몇 십초나 잡아먹다니, 아주 죄송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나는 아주 효과적이고, 게다가 효율적으로 병원 진료를 받을 수 있었고, 기본진료비에 거의 준하는 특진비가 추가된 처방전과 진료권을 손에 쥔 채 병원을 나왔다. 정말 스페샬한 것은 이제 막 만들어져 반짝반짝 빛나는 마그네틱 진료권뿐이었다.

의사이기도 한 송윤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하얀 정글>은 그 짧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중반부, 감독은 대형종합병원의 진료실에 들어가는 각각 환자의 진료 시간을 카운트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러한 대형병원의 형식적이고도 짧은 진료를 비판하는 인터뷰를 그 위에 작게 붙인다. 위의 인터뷰어가 몇 마디 채 끝내기도 전에 들어갔던 환자가 나오는 것이 보인다. 30초도 안되는 시간. 연이은 환자들의 진료 시간은 모두 1분에 미치지 못했고, 이 5명의 환자의 평균 진료 시간이 계산되어 자막에 뜬다. 평균 31초. 물론 이것은 이 영화의 여러 이야기들 중 그나마 가장 애교있는 편에 속한다. 당연히 위에 적었던 내 짧은 경험은 그런 애교축에도 못 들어간다. <하얀 정글>은 간단히 말해서 '의료판 도가니'이다. 여기에는 현재 병원들이 저지르고 있는 여러 다양한 행태들이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소개된다. 나쁜 짓의 향연, 스페샬한 퍼레이드. 그것은 일일이 적기에도 지치는데, 병원 광고가 허용된 이후, 광고 회사에 의뢰해 만들어지는 각종 후기 식의 광고들, 돈을 더 벌기 위해 행해지는 과잉검진과 과잉시술, 그에 비례해서 줄어드는 환자당 진료시간들, 부당한 과다 의료비 청구, 일반실을 줄이고 특실을 늘리는 병원의 새로운 재테크, 제약회사와 의료기기회사와의 커넥션으로 이루어지는 특정약품과 특정기구들에 대한 거의 반강제적 강요... 급기야는 부당 의료비 청구를 제소하였다는 이유로, 다행히 병이 다 나아 돌아간 환자에게 "나중에 재발하였을 때 보자"는 식의 폭언, 또는 부당한 진료에 대해 항의하면 "아니 다른 가족분들도 다 우리 병원 다니시는데, 나중에 어쩌실려고 그러세요"는 식의 멘트를 날리는 경우를 보고 있으면, '아 이게 병원일까, 아니면 조폭집단일까'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본 분들은 '그런 이야기는 요즘 점점 여러 다양한 논의들이 나오는 의료 민영화가 되었을 때 이야기가 아닌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현재 우리의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영화 전반부에 이런 다양한 이야기를 한 후, 영화 후반부에 앞으로 우리 현실로 다가오게 될지도 모를 의료 민영화나 건강보험 민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세하게 소개되는데, 그러므로 그것을 본 내 느낌은 의료 민영화란 "지금까지 뒷구멍으로 해오던 나쁜 일을, 이제는 대놓고 떳떳하게 하겠다"라는 소리로 들린다. 영화 속에서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회답변에서 말한다. 의료서비스 질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데, 서비스가 나쁘면 안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자연히 도태되지 않겠습니까. 아이고, 정남아, 정남아, 아니 증현아, 증현아, 이거 마 궁둥이를 확 주차삐까. 당신이 이해를 잘 못하는 듯 하니, 예를 하나 들어주겠다. 당신이 지금 엄청난 설사로 집을 향해가는 매시매초마다 예수님과 부처님을 번갈아 영접하는 중이다. 그 때 가까이에 상당히 더러워보이는 화장실이 보인다. 당신은 더럽다며 그걸 멀리하고 꼭 집에 가서 일을 치르겠는가. 괄약근의 기능이 좋은 증현 씨는 가능할지 몰라도, 나라면 불가능하다. 의료 서비스는 산업이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마이클 무어는 <식코>에서 간단하고도 효과적으로 이야기했다. 당신이 지금 막 강도를 당했는데, 운좋게 바로 앞에 경관을 만났다. 그런데 그 경관이 "이봐요, 특별근무수당을 지금 내셔야, 저 범인 쫓아드릴 수 있는데요."라고 한다면? 아니면 지금 막 집에 불이 붙어 소방서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소방서에서 "일단 출동비부터 결제하세요. 그럼 출동합니다."라고 한다면? 그러나 현재 병원이 하는 행동은 어떤가. 사람이 죽어가도, 일단 원무과가서 '정산'부터 하라고 한다. 아니면, 나가세요. 이게 병원의 행태라는 것이다. 병원이라는 것이 소방서나 경찰과 같은 공공서비스와 같음을 보여주는 즉, 소방서나 경찰서나 병원이나 사람의 목숨, 생활과 직결되어 있다는 효과적인 비유. 

한편으로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것을 단순히 선과 악의 대비로만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부당하게 당하기만 하는 환자가 선이고, 의사들이 무조건적인 악은 아니라는 점(실제로 영화 중 좋은 의사를 만난 경험을 들려주는 환자 부모의 이야기도 있다). 의사들을 무조건적인 악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그들 역시 압박과 유혹에 시달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자세하게 이야기되는 부분은 아니지만, 의료수가(酬價) 역시 상대적으로 낮으며, 의사들은 끊임없이 더 많은 환자를 상대하고 더 많은 수익을 올릴 것에 대한 압박을 받는다. 현재시각 병원에 내원한 환자수가 일정한 간격으로 의사들에게 문자메시지로 통보되며, 연속되는 회의에서는 각 과별로 수익이 비교되어 1등부터 꼴찌까지 등수가 매겨진다. 그리고 동시에 MRI를 한 번 촬영할 때마다 월급이 만원씩 올라간다고 노골적으로 의사들을 회유하기도 한다. 의료수가는 낮고 환자들을 많이 상대해야 수익이 올라가니 각 환자별 진료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과잉검사와 시술이 늘어날밖에(과잉검사는 한편으로 의료사고와 관련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들만이 악일까. 문제는 시스템이다. 그들을 둘러싼 거대한 시스템.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내고 운영하는 정부. 영화는 영리하게 그 시스템의 기원을 밟아 그것의 문제점을 파고 들어간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의해 탄생한, 태어나기는 태어났으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은 건강보험제도. 그것이 노태우, 김영삼을 거쳐 진보정권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이제 '그분'에 의해 어떠한 운명에 처했는지.

다큐멘터리라는 관점으로만 보았을 때, 이 영화 <하얀 정글>은 아주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내러티브는 산만하고, 이야기는 때로 중심축을 조금 잃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고, <식코>를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식코>만큼 재기발랄하지는 않다. 어떤 부분은 더 설명이 필요할 듯 싶은데, 그냥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고, 어떤 부분은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손바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컷들이 몇 번 삽입되는 것은 의료에 있어서 낙수효과(落水效果, trickle down effect : 쉽게 표현하면 번짐을 의미한다. 물이 번짐처럼, 어떤 기업이 돈을 많이 벌면 투자와 고용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개인의 소득이 증가하여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듯 한데, 그 의미를 설명하지 않으니, 조금 쌩뚱맞은 컷으로 보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다큐의 문제라고 보이는 것은, 문제의 제시와 강조에만 그칠 뿐 그 다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다큐가 해결책을 제시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결국 제시하는 결론은 '민영화 반대'인데, 그렇다면 민영화만 안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미 병원들은 각종 나쁜 짓을 하고 있다. 중간에 그 대안으로 스치듯이 제시된 것이 '주치의 제도'인데, 그것도 설명이 상당히 빈약한 감이 있다. 아마도 이러한 것은 이 영화의 모호한 지향점과도 관련이 있다. 이 영화에서 결국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은 분노와 행동이다. 그러나 분노와 행동 이전, 관객을 사로잡는 것은 '공포'가 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의사이고, 동시에 그 남편도 의사이다. 그런데 이들 역시도 앞으로 닥쳐올 미래에 대해 일종의 두려움을 보여준다. 부부 의사도 이럴진대, 그렇다면 일반 우리들은? 일반인들은 의료에 있어서는 영원한 약자이며, 병원에서 우리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의사의 지시에 거의 무조건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근원에 있는 것은 결국 공포감이다. 분노를 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 공포감부터 제거해야 한다. 단순한 감정적인 분노가 아닌 필요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분노는 결국 이성의 힘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 <하얀 정글>은 우리의 의료 현실이 하얀 정글임을 보여준다. 우리들은 그 정글에 놓여진, 놓여질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다. 중요한 것은 그 정글의 묘사에 치중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정글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할 말은 이것밖에 없다. 보아라, 무조건 보아라. 내부 고발자들의 통렬한 내부 고발이 줄줄이 이어지는 이런 이야기를 아마도 브라운관에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찾아서 볼 수 밖에. 누군가는 이것은 이미 다 아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크린으로 다큐멘터리를 볼 때, 관객이 미리 지녀야 할 오로지 한 가지의 마음가짐이 있다면, 불꺼진 극장에서 넓은 스크린으로 한 시간 이상을 집중해서 보는 것은, 거의 대부분 상상 이상의 체험이 되며, 동시에 당신에게 새로운 관점의 가능성을 던져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섣불리 재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올 한 해, 여러 영화들에 대해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잘도 떠들어댔지만, 그 영화들 모두 안 봐도 좋고, 지금 쓰는 이 리뷰도 엉망진창의 거지 같은 리뷰라고 생각해도 좋으니, 보아라.

어디든 안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피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자유가 있으니까. 우리는 영광스럽게도 '새로운 자유주의'라고 이름붙여진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아마도 우리가 끝끝내 피하지 못할 것은 병원일 것이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하얀 정글에서.


덧.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923.html
http://goo.gl/XRKV5

링크한 글은 <한겨레 21>과 <라포르시안>에 실린 송윤희 감독과 의사이자 영화평론가인 황진미 씨의 '자칭' 설전. 그러나 어차피 황진미 씨에게 비판을 기대한 것도 아니고, 뭔가 다른 비판적인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본 글도 봤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현직 의사의 글도 좋고. 그런데 의사 분들은 30초 진료로 워~낙 바쁘셔서 이런 영화는 안보시는 듯 하다. 찾아보기는 하는데 영 눈에 안 띄네. 


추가 덧(2012.1.3.).

글쓴분의 허락을 얻어, 블로그 글을 하나 링크해둔다. 의사분의 글인 것 같은데, 아마도 현직임상의이신듯한 글쓴이의 이야기가 영화의 이해에 있어 또다른 관점을 줄 수 있을 듯. (확실히 의사분들 입장에서 보는 것과 일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온도차가 있는 듯.)
http://ayako.egloos.com/4653228



                                                                                              - 2011년 12월, 인디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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