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춤, 윤기형

Ending Credit | 2011.11.19 23:52 | Posted by 맥거핀.

(왠지 이 사진은 작가들이 '저자 소개'에 걸어놓기 좋아하는 사진 같다.)



이 영화 <고양이춤>은 마하트마 간디의 말로 시작을 연다.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수준은 그 나라에서 동물이 어떤 취급을 받는가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 간디의 동물에 대한 이런 말은 일견 색달라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말의 배경에는 아마도 낮은 곳을 늘 뒤돌아보는 간디의 인식이 배어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의 사회는 불평등한 계급의 사회이고, 그 가장 밑바닥의 인간보다 더 낮은 곳에 아마도 동물들이 위치하고 있을 것이니까. 그러니까 간디의 그 말은 결국 한 국가의 수준이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것들을 그 국가가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일 것이며, 동시에 한편으로는 간디의 이 말에는 거의 동물과 같이 취급받았던 인도 사회의 천민들에 대한 오랜 인식이 스며들어 있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아주 오랫동안 동물은 적어도 국가적인 수준에 있어서는 소모되고 (인간의 필요에 의해) 철저하게 활용된 후 폐기되어야 할 자원에 불과하였고, 이 영화의 주인공들인 길고양이들은 그나마의 취급도 받지 못하고 우리 인식 속의 동물 계급에서마저 거의 가장 아래편에 위치하였다. <고양이 대학살>이나 <검은 고양이> 등에서 나타나는 고양이들에 대한 뿌리깊은 부정적 인식이나 늘상 악당들이 가장 사랑하는 동물로 묘사되었던(가가멜의 오랜 충복인 '아즈라엘'이 대표적..) 오랜 편견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고양이 특히 길고양이는 단지 쓰레기봉투를 뜯어낸다는 이유만으로 '도둑고양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하사받아 왔다는 것이 가장 단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 <고양이춤>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본질은 그러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야기를 전해가면서 그런 이야기들이 언뜻 내비치기는 한다. 특히 길고양이들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는(죽는) 가장 주된 이유인 로드킬(Road Kill)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나, 쓰레기봉투를 뜯는다는 이유만으로 매질을 당하고, 모든 고양이는 죽여버려야 한다,는 발언 등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그러하다. (길고양이들이 쓰레기봉투를 뜯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길고양이들이 쓰레기봉투를 뜯는다고 증오하면서도, 그런 길고양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표시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아마도 그런 것이 가장 간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길 위의 사람들과 길고양이들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길고양이들은 길 위에서 태어나고 길 위에서 먹고, 길 위에서 자고, 길 위에서 죽는다. 그런 고양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교차하여 길 위에서 물건을 주워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은 그러므로 묘한 성찰을 낳고, 처음 간디의 말을 되새기게 만든다. 길 위의 고양이들과 길 위의 사람들. 그들은 오랫동안 국가에 의해서, 그리고 그런 국가관에 길들여진 우리들에 의해서 어떠한 취급을 받아왔는가.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의 전면에 흐르고 있는 것은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결국 '관계 맺기'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화자들이 보여주는대로 길고양이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던 사람들의 관계의 시작은 길고양이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거기에 있었음을 깨닫고 그들을 응시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몇 번의 예기치않은 마주침이 이어진 후 그들을 조금씩 알아보기 시작하였고, 그들을 구분하기 위해 이름을 붙여서 불러주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그들 각자의 마른 모습, 병든 모습, 먹을 것을 구하려다 여러 고초를 처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고, 언젠가부터 조금씩 먹을 것을 챙겨주게 되었다. 결국 이 영화는 '관계의 시작'이란 것이 어떠한 것으로부터 비롯되는가를 짧은 영상과 사진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쉽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러므로 아마도 이 영화의 홍보문구들에서, 이 영화는 고양이를 사랑하는 관객들보다 아무런 관심이 없거나, 별로 좋아하지 않던 관객들이 보기를 바란다, 고 했었던 것은 이 관계의 시작을 쉽게 받아들여 영화를 보는 우리가 길고양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기를 바랬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관계란 결국 응시에서부터 시작하니까. 그것이 스크린을 통한 응시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맺었을 때만이 우리는 그들과의 이별 또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물론 이것은 로드킬에 대한 사회적 관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에 나온 말을 돌이켜보면, 집고양이는 일반적으로 15-20년의 수명이 보통인 반면에, 길고양이는 평균 3년 정도의 수명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길고양이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결국 잦은 이별을 감당할 각오를 조금은 한다는 의미도 된다. 하기는 굳이 길고양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와 관계를 조금씩 맺어 나간다는 것은 결국 언젠가는 어떠한 방식이든 간에 이별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간다는 것, 그것을 감당한 내성을 조금씩 쌓는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리고 길고양이의 경우에는 때로는 그 내성을 쌓을 틈도 없이 급속하게 이별이란 것이 찾아와 버린다. 

예를 들어 영화 속 길고양이 '바람이'와의 갑작스런 이별이 그런 것일 것이다. 그렇게 공들여 묘사되지 않았음에도, 무심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도, 이 '바람이'와의 이별 장면은 이상하게 울컥하게 만든다. 영화라는 것을 수많은 사람이 아주 어렵게 정의하기 위해서 노력해왔지만, 그저 최대한 간단하게만 말한다면, 영화란 그것을 보는 사람이 울컥하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예술일 것이다. 단언하건대, 어떤 사람에게든간에 단 한 순간씩만이라도 울컥한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영화는 좋은 영화일 것이다. 물론 그 울컥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같지 않다. 누군가는 영화에 완전히 빠져들었기 때문에 울컥하지만, 누군가는 그 영화가 다른 어떤 것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울컥한다. 누군가는 정밀하게 구성된 숏과 숏의 연결, 씬과 씬의 환상적 접붙임으로 울컥하지만, 누군가는 단지 카메라가 어떤 순간 그것을 그 각도에서 찍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울컥한다. 누군가는 어떤 배우가 환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기 때문에 울컥하지만, 누군가는 그 배우가 단지 자신의 어머니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울컥한다. 그렇다면 이 '바람이'와의 마지막이 만들어낸 울컥거림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어쩌면 그 전까지 만들어낸 여러 길고양이들과의 관계의 시작을 그것이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처음의 응시를. 단지 잠깐의 호기심이 전부였던 그 응시를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길고양이들만이 아니라, 모든 관계의 마지막에서 결국은 그 처음의 시작을 되돌아 응시한다는 것을 깨닫게 됨이,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이 영화 <고양이춤>은 쉬운 다큐멘터리이다. 굳이 문법이라 이야기할 것도 없지만, 아주 쉬운 이야기 방법을 가지고 있고, 산뜻하고 편안한 느낌으로 이야기를 끝까지 이끌고 간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것은 TV에서 하는 자연 다큐멘터리들보다도 훨씬 못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며, 굳이 이런 이야기까지 극장에서 보아야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바람이', '희봉이, '깜냥이', '예삐' 등 수많은 길고양이들 중에서의 몇몇의 길 위에서의 단편적인 삶일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길거리를 나서게 되면, 영화를 본 사람들 중 반수 이상은 그간 있었으나 보이지 않던 것들을 길 위에서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딘가에 숨어서 먹이를 먹고 있거나, 잠을 자고 있거나, 차를 피해 조심스럽게 도로 가장자리에 숨어 있는 길고양이들이다. 그것을 응시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들과의 관계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영화는 묻는다.


- 2011년 11월, KU시네마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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