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 뱅크시

Ending Credit | 2011.09.01 16:29 | Posted by 맥거핀.


 


(작품의 내용을 꽤 담고 있습니다.)



지난 G20 전후에 이루어진 일명 '쥐그림' 공판을 보면서, 뱅크시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공판에서 검사는 쥐그림이 뱅크시의 작품에 영감을 얻은 것이라는 작가이자 피고의 항변에, 뱅크시의 권위에 기대지 말라며 일갈한다. 한국 검사님이 '뱅크시의 권위' 운운해 주시는 뱅크시는 어떤 사람인가. 뱅크시는 루브르와 대영박물관에 자신의 작품을 게릴라 전시했고, 체포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을 격리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이 쌓은 거대한 장벽에 평화의 염원을 담은 벽화를 그리는 등 저항적인 작품 활동을 펼치는 세계적인 그래피티(거리미술) 아티스트(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런 뱅크시가 직접 감독한 영화가 개봉되었다길래 시간을 내어 보러 갔다왔다. 제목은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Exit Through the Gift Shop)>.

재미있다. 그리고 재미있는 와중에 여러 생각해볼 이야기거리를 담고 있다. 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먼저 작품의 간략한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뱅크시가 얼굴을 숨긴 채로(그래피티 작업이 일종의 불법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뱅크시의 얼굴은 끝내 가려진다) 이 영화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고 말하며 영화는 시작한다. 뱅크시는 먼저 티에리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티에리는 자신의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이유로 주위의 모든 것을 캠코더에 담고 있는 괴짜로 그는 자신의 사촌의 작업을 계기로 그래피티에 관심을 가지고, 그 모든 것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여러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담았던 티에리는 그래피티계의 거목 뱅크시에게 집착하고 결국 그의 작업에도 참여하며, 그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자신의 의도와 달리 상업화되는 그래피티에 불편함을 느끼던 뱅크시는 티에리에게 그래피티의 진실함을 보여줄 다큐 영화를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지만, 티에리가 가져온 것은 참담한 수준의 결과물. 결국 뱅크시는 생각을 바꿔 그동안 간간이 그래피티 작업도 했던 티에리에게 그의 그래피티를 전시해 볼 것을 권유하고, 그것을 도리어 기록해보기로 한다. 결국 티에리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MBW(Mr.BrainWash -세뇌)가 되어 전시회를 열기에 이른다.

사실 이렇게 줄거리를 적으면, 조금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뱅크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고 영화를 시작했는데, 줄거리를 보니까 온통 티에리인지 뭔지 하는 사람의 얘기잖아. 사실 그렇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상당수가 조금은 의문을 가졌을 법도 하다. 영화는 필요 이상으로 티에리의 지난 배경이나, 그의 기록벽들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영화는 결국 티에리의 전시와 그 전시의 예기치못한 성공으로 끝을 맺는다. 뱅크시의 영화라고 했지만,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티에리의 영화에 가깝다. 왜 그럴까. 왜 뱅크시의 이야기를 하는 듯이 시작했던 이 영화는 티에리의 거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뱅크시에 대해서는 거의 지나가는 조연 수준으로만 다루고 영화를 끝맺는 것일까. 의문과 이야기는 거기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 같다.
 


티에리의 위치의 시작은 '기록하는 자'이다. 기록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다. 기록은 보존의 욕구이며, 수집의 욕구이다. 동시에 일종의 감시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런 기록의 복합적인 의미는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티에리를 대하는 복합적인 태도와도 연관되어 있다. 여러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은 티에리를 불편해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래피티는 감시되어서는 안되지만, 기록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거리에 몰래 그림을 그리거나, 붙이는 그래피티의 특성상 그래피티는 여러 불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감시의 밖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동시에 그래피티라는 것 자체가 권위의 감시에 저항하며 생겨난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래피티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작업이 기록될 필요가 있다. 그래피티는 언젠가는, 혹은 빠른 시간안에 자연적으로, 혹은 인위적으로 제거된다. 따라서 그래피티 예술가들은 티에리를 조금은 불편해하기도 하지만, 그의 기록을 반기기도 하고, 때로는 작업에 깊숙이 동참시키기도 한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도리어 티에리의 기록으로 작업이 완성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입장의 반대로, 티에리의 입장은 어떨까. 티에리의 기록에서 주목할 점은 이렇게 모든 것을 기록하고자 하는 티에리의 욕구가 기록을 넘어서서 일종의 수집에 가까워진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보여졌듯이 티에리의 기록은 그것의 재생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다. 티에리는 수많은 테이프에 그것을 기록하고, 그것을 창고 어딘가로 깊숙이 던져 버린다. 즉 이것은 일종의 수집벽에 가까워진다. 수집은 어느 순간, 오로지 창고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어떤 수집가들은 한 번 수집한 이후에는 그것을 결코 쳐다보지 않는다. 그가 쾌락을 느끼는 것은, 수집의 순간이다. 이미 손에 들어온 수집품은 더 이상 그에게 쾌감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수집은 '희소'라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수집가들이 가장 쾌감을 느낄 때에는 아마도,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손에 넣었을 때일 것이다. 조금은 다른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예를 들어 명품에 대한 일종의 집착에도 관련이 있다. 명품이 명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것의 희소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누구나 이야기하듯이, 개나 소나 매고 다니는 것은 더이상 명품이 아니다. 즉 명품은 일정 정도 이상의 퀄리티를 가지되, 희소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는 티에리의 뱅크시를 향한 집착으로 설명이 된다. 티에리가 뱅크시를 찍을 것을 열망하고, 그의 연락을 받자마자, 모든 것을 제쳐두고 달려가는 것은 이 조건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뱅크시는 일정 정도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주면서(확실히 그의 작업은 영화 속 다른 아티스트들의 작업보다 작업의 퀄리티나 전달하는 메시지의 측면에서 우위에 있다), 그 누구도 촬영하지 못한 대상이다. 티에리에게는 즉, 명품이다.


자,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뱅크시가 티에리에게만 명품은 아니라는 점이다. 뱅크시는 그의 희소한 가치로 미술계의 주목을 끌게 되고, 그의 작품들은 점차 미술 경매 시장에서 고가의 가격에 팔리게 되었다. 거리에 재빨리 그려지고, 사라졌던 그의 작품들은 이제 어느 대저택의 벽면을 장식하게 되었다. (이 비유가 용서된다면) 뱅크시는 아주 맛있으나 거의 파는 곳을 찾아보기 어려운 불량식품이 되었다. 뱅크시의 고민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거리미술이 대저택의 벽면을 장식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거리미술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거리미술이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은 거기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보여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말했던 낙원(휴양지)의 그림은 그것이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를 격리한 장벽에 그려졌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대저택의 벽면에 그려진 휴양지의 그림이 가치가 있을까. 마찬가지로, 관타나모 구금자의 모형이 바로 디즈니랜드에 세워졌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미국의 대표적인 꿈의 세계라고 일컬어지는 디즈니랜드에 세워진 주황색 옷을 입은 구금자를 수많은 관광객이 볼 때의 그 이질감.

그러므로 여기에서 뱅크시에게 티에리라는 상(象)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은 티에리의 전시를 보여주는 것이다. 단지 모방과 조잡한 아이디어와 수많은 다른 예술가들의 손을 빌려 만들어진 티에리의 전시가 여러 사람들에게 각광받고, 좋은 비평을 받고,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여주는 것. 즉 당신들의 소비하는 수준이 딱 이 정도라는 것. 당신들은 어떠한 것이 왜 가치가 있는지를 깊숙이 따져보기도 전에 그것이 단지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티에리의 전시는 이를 한편으로 우스꽝스럽게 보여준다. 티에리는 자신의 전시를 성공시킬 아이디어 중의 하나로 선착순 관객명 200명에게 각각의 다른 '하나밖에 없는' 포스터를 나눠줄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 전략은 성공을 거둔다) 열광할 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이는 티에리에 대한 조롱이 아니다. 어떠한 의미에서는 뱅크시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티에리는 결국 뱅크시의 일종의 왜곡된 허상을 일부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티에리의 작업이란 잡지를 넘겨다보다가 괜찮은 이미지가 있으면, 여러가지를 적당히 조합하는 것이다. 물론, 그 조합도 자신의 손이 아니라 다른 장인의 손을 빌려 이루어진다. 그러면서도 티에리는 자신이 대단한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소위 예술가의 권위를 세우려 한다. 물론 뱅크시의 작업은 이와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래피티는 다른 이미지들의 차용으로 상당 부분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거리예술의 특성상, 동시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빠르게 얻으려면 알려진 이미지들을 - 예를 들어, 엘비스 프레슬리, 버락 오바마, 스페이스 인베이더(게임), 혹은 쥐 - 활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티에리는 뱅크시의 왜곡된 일부분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희소성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일부분(수집에 가까운 기록벽)도 동시에 담고 있다.

티에리는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뱅크시가 딱 활용하기 좋은 대상이다. 그의 수집벽과 얼토당토 않은 작업과 그것의 성공을 보여주면서, 뱅크시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 즉 영화 속에서 티에리의 작업이 상찬을 받고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것은 뱅크시 자신이 놓여진 상황과 같지만, 그 상업적 성공 속에는 결국 무엇이 놓여져 있는가, 그것은 어쩌면 희소한 가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앙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점을 티에리를 통해서 보여준다(그리고 재미있게도, 영화 속에서 뱅크시는 티에리의 작업에 엄청난 칭찬을 보탠다. 즉 칭찬 속에서 티에리는 거의 뱅크시 이상의 수준이 된다). 따라서 티에리는 거의 뱅크시의 만들어진 허상을 반영하고, 뱅크시는 그런 티에리를 조롱함으로써 이 상황을 풍자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뱅크시의 조롱은 자신을 향해 있지만, 그는 그 조롱을 통해 자신을 긍정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 영화를 일종의 모큐멘터리(Mockumentary)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티에리를 실재하는 인물이라 생각한다면, 그가 뱅크시가 활용하기에 너무도 딱 맞춘 사람임이 의아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영화 자체가 티에리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운 일종의 거리예술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사실 이를 면밀히 따지는 것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실 뱅크시가 어떤 인물인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씨네21>에 나온 이야기를 보니, 뱅크시는 한 번도 그 얼굴을 공개한 적이 없으며, 뱅크시는 한 명이 아닐수도 있고, 일종의 창작집단의 대명사일수도 있으며, 어쩌면, 여기나온 티에리일지도 모른다(즉 그가 티에리 역할을 연기했을 것이라는)...고 하니까.)

그러므로 영화는 재미있었지만, 사실 마지막에는 거의 웃지 못했다. 자꾸 다른 생각이 들어서다. 예를 들어 이 이야기들은 일종의 딜레마를 생각하게 한다. 예를 들어 인디밴드 팬들의 딜레마. 일부 팬들의 경우 인디밴드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밴드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누구나 아는 가수가 아니라, 나만이 알고 있는 가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일종의 수집벽과 닮았다. 그 수집이 가치가 생기는 것은 오로지 나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조금은 그 수집과 다른 점은 음악은 결국 일종의 공유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팬이 적은 것은 좋지만, 그 음악을 정말 나혼자 밖에 모른다면, 그 음악의 향유로서의 가치는 반감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일종의 딜레마가 생긴다. 이 인디밴드는 어느 정도 알려질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알려져서는 안된다는 것. 웃지 못했던 이유는, 어쩌면 내가 영화를 보는 방식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블록버스터를 잘 보지 않고, 작은 영화들, 때로는 영화제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을 즐기는 나의 심리도 결국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아이스 커피는 다 마시고 없는데, 올라가는 엔딩크레딧을 보며, 한 입 깨문 남은 얼음이 쓰다.

미술관을 나오게 되면, 출입구 앞에는 늘 선물가게가 있다. 그 선물가게를 지나치지 못하고 결국 들르게 되는 것에도 결국 이 수집의 욕구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내 휴대폰 고리에 걸려있는 나만의 미술작품을 가지고 싶은 욕구. 이 제목은 그 욕구를 버릴 것을 충고한다.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다. 그 출구를 벗어나면, 아마도 다른 예술을 보는 새로운 입구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나는 그래피티가.



- 2011년 8월, 광화문 스폰지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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