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2일, CINDI

Interlude | 2011.08.23 17:06 | Posted by 맥거핀.

 

영화를 한 편, 한 편 계속 보면서, 결국 영화만의 그 어떤 결정적인 특성에 주목하게 된다. '영화만의 그 결정적인 특성' 중의 하나는 카메라다. 영화는 필름이든, 디지털이든 결국 카메라로 '촬영'되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그 카메라를 든 자의 주관적인 시선 혹은 입장, 권력이 개입되며, 같은 이야기라도 그것이 어떻게 촬영되는가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매우 다르게 전달된다. 하나의 경우로, 남녀가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담는다고 했을 때, 같은 대화라도 그것이 어떻게 촬영되는가에 따라 분위기는 매우 달라진다. 예를 들어 남녀를 각각 오른쪽 왼쪽에 배치하고 하나의 프레임안에 담으면 어떤 친밀한 분위기를 느끼게 할 수 있다. 반면, 남녀 각각을 따로 잡아 번갈아 배치하며 잡으면 이전 보다는 친밀성이 떨어지며 각각의 입장이 도드라질 것이다. 아니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 남 녀를 동시에 잡되, 그들을 카메라를 등지게 한다면... 그 때는 어떤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될 것이다. 더욱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다면, 카메라를 바닥으로 끌어당겨 그들의 발만을 잡을 수도 있다.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하다. 남녀를 동시에 잡되, 사운드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 대사야 자막으로 처리하면 된다.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 사운드를 매우 증폭시킬 수도 있다. 배경소리가 증폭되고, 남녀의 대화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될 때의 묘한 분위기는 어떨까. 아니면, 남녀 중에 한 명만 흐릿하게 처리한다면....선택의 수는 무한대로 증폭되고, 그 때마다 영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어제 본 두 편의 영화 모두 카메라의 활용이 흥미롭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각각의 독특한 촬영 방법들은 영화를 종종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 버린다. 즉 카메라는 이야기보다 우위에 있다. 이 이야기가 다른 각도로 전달되었으면,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분명히 다르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환호성 (Hurrahh!) - 정재훈 감독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의 연장선이지만, 이 영화는 카메라의 활용이 독특하다. 사실, 이야기로만 봤을 때는 이 영화는 거의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혼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있다. 이야기는 그저 이 남자의 일상을 따라간다. 그는 집에서 누워있다가, 마을을 어슬렁거리다가, 당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다시 집에 돌아와서 잠을 잔다. 이야기는 이것이 거의 전부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다양한 카메라, 사운드의 활용이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먼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운드다. 이 영화의 사운드는 전반적으로 묘하게 증폭되어 있다. 당구장이나 세차장에서 일할 때는 주위의 소음들이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크게 증폭되어 있다. 또한 영화 중간중간에 산의 풀숲들을 찍은 화면들이 지속적으로 삽입되는데, 이 때는 웅하는 바람소리 비슷한 것들이 스며들어가 있고, 이상한 소리들이 끼어든다. 이 풀숲 장면들만 놓고 보았을 때 영화는 거의 어떤 공포물처럼 보인다. 이외에도 마치 촬영을 잘못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 영화에는 이상한 소리들이 스며들어 있다. 카메라 역시 마찬가지다. 화면은 때로 핀트를 잘못 잡은 듯이 나가버리고, 때로는 일부분이 거의 깨져버리기도 한다. 어떤 장면에서는 인물을 찍었는데, 마치 이 인물이 유체이탈을 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가까이에서 일부의 조명으로만 인물을 잡아, 인물은 매우 기괴하게 보인다. 이러한 효과들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므로 이 영화는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수도 있다. 이것은 별 의미없는 실험같은 것의 총체가 아닐까, 아니면 만든 이의 여러 실수가 너무 지속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닐까, 그도 아니면, 이것은 그저 카메라를 가지고 노는 장난같은 것일까, 또는 어느 영화과 학생의 쓸데없이 과잉된 자의식의 치기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감독의 전작 <호수길>을 본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조금은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어떤 효과적인 측면에서는 이 영화는 <호수길>의 연장선에 와 있다. (이야기적인 측면에서도 연결지어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호수길>에서도 마치 실험과도 같아 보이는 장면들이 있었고, 그것은 사실 영화 전체에 의도적으로 주의깊게 삽입된 것이었다. 여러 효과들로 인하여, 그저 평범한 산길과 마을의 모습을 담은 것처럼 보였던 이 영화는 사라져 가는 것들을 기억하는, 동시에 거대한 폭력을 고발하는 영화가 되었다. 그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마지막에 마을 한 가운데에서 마을을 때려 부수던 포크레인이 '드디어'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경험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쌓은 그 효과들로 인하여.

그러므로 이 이야기도 조금은 다르게 읽힌다. 몇몇 효과들은 그 장면을 거의 다르게 우리에게 인식시킨다. 예를 들어, 사운드의 증폭. 누구나 알고 있듯이 혼자 있는 사람에게는 주위의 배경음은 늘 크게 들린다. 당구장이나 세차장에서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도 마찬가지. 그 상황에서는 어쩌면 그 소리들은 그렇게 크고 무시무시하게 들릴 것이다. 남자의 배가 비춰지며, 이상한 꼬르륵 소리가 들리는 것은 어떨까. 배고픈 자에게 자신의 꼬르륵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린다. 아무 것도 없는 방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것은 자신의 꼬르륵 소리 뿐이다. 그 소리는 무언가를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내면의 필사적인 외침이기도 하다. 반면, 밤의 외부 화면을 찍은 화면이 일종의 공포물이 되어 있는 것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외부는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처럼, 화면 속의 그에게도 공포이다. 그가 외부로 나간다는 것은 결국 돈을 벌지 못하고, 이 집에서 쫓겨나는 것이니까. 이 겨울에 바깥은 공포이다(겨울산의 배경). 그러므로 그 바깥에서 그는 때로 유체이탈이 되고, 화면의 깨진 픽셀은 유령처럼 서 있다. 그 유령은 깨진 화면 속에서 '으스스하게' 존재하고 있다. 돈 없고, 배고픈 자여 이리로 오려므나. 

한 젊은 남자가 있다. 그는 낮에 집에 누워 자신의 꼬르륵 소리를 듣고, 밤에는 유령처럼 일어나 때로 티비를 본다. 때로는 밖을 어슬렁거리고 뒷산에 올라가 산길을 하염없이 느리게 바라본다 (뚝뚝 끊어지던 느린 풀숲 트래킹). 그는 살아 있지만, 때로 죽어있다. 그를 가끔 반겨주는 소리는 오로지 '밥이 다 되었습니다'라는 밥통의 소리 뿐이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고, 쌀이 떨어지면, 그는 아르바이트를 나선다. 그러나 남자의 지루한 사투도 거기까지. 어느날 밤, 남자는 밤의 산 속에서 무엇인가를 '저질렀다' 혹은 '시도했다'. 그리고 원경으로 잡은 산 속의 불빛 속에서 명멸하던 생명은 결국 꺼져버렸다. 남자는 어디론가로 사라졌고, 남은 집은 거의 페허가 되었다. 집은 철거되었고, 그 곳에는 오래된 음식들만이 남아 있다는 그런 이야기. 다시 <호수길>의 리와인드.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시 제목에 생각이 미친다. 지금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아마도 영화의 시작부분에 관객의 귀를 찢었던 그 환호성은 사실은 거의 비명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공포에 질린 자의 마지막 단말마의 비명. 물론 이것은 어쩌면 하나의 오독.

시종일관 절망도 희망도, 기쁨도 슬픔도 아무 것도 보여지지 않는 남자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지금의 시대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대일까. 젊은이들이 절망할 수도, 그렇다고 그 절망의 끝에서 분노하는 것마저 쉽게 허락되지 않은 지금의 풍경들. 그 속에서 남아 있는 것은 으스스한 공포뿐이다. 또는 남아 있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느껴지던 이상한 구멍일 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그 구멍 속에 빠져 있다. 기어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영화가 끝난 후, 영화가 정신을 멍하게 만들어, 기분 전환이나 할까 하고, 스마트폰을 열어 몇 개의 뉴스를 들여다보니, 한 여당 고위 공직자의 친인척이 783명의 구조조정 속에서 단 한개의 정규직을 쟁취한 놀라운 인간승리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지금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자는, 어쩌면 이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한 개의 '환호성' 속에 783개의 사라져 버린 다른 <환호성>의 이야기들. 늘 하는 이야기지만, 때로 현실은 영화보다 잔혹하다.

플라잉 피쉬 (Flying Fish) - 산지와 푸시파쿠마라 감독


이 영화의 카메라는 줄곧 등장인물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있다. 때로는 카메라는 몇 걸음 더 물러서서 이들을 몰래 찍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카메라가 때로는 깊이 들어가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이미지들이다. 썩어가는 생선들과 가득 붙은 날벌레들, 동물의 사체에 달라붙은 벌레들, 거의 나무 등걸처럼 되어버린 다리와 거기를 기어올라가는 벌레들, 누군가가 뱉어버린 오물을 그대로 뒤집어 쓰는 카메라. 썩어가고 있는 것들, 역겹고, 더러운 것들을 때로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가까이에서 잡는다. 어쩌면 신체의 일부를 가까이에서 잡는 것도 비슷한 것일까. 왜냐하면 등장인물들은 썩어가고 있으니까. 그들은 안에서부터 조금씩 변해가고 있으니까. 그들은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을 저지른다. 파국은 예정되어 있고, 영화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그 파국을 조용히 바라본다.

카메라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서 있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몇 걸음 뒤로 물러섬으로써 관객이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너무 깊이 빠져드는 것을 가로막는다. 어쩌면, 그것은 관객의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감독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우리는 마지막 충격의 삼연타를 맞았을 때 버텨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시종일관 물러서 있었음에도 우리는 어질어질하니까. 또 한 가지는, 그럼으로써 감독은, 우리가 사건 그 자체보다는 사건의 외면을 둘러싼 것들을 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런 질문들이다. 등장인물들이 왜 결국 이러한 일들까지 저지르는가. 혹은, 이렇게 되도록 이들을 몰고간 것들, 이러한 극한까지 이들을 몰아붙인 것들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나.

사실, 이 영화는 영화의 배경을 모르고서는 조금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영화에서 어렴풋이 드러나지만, 이 영화는 스리랑카 내전과 타밀 반군들을 둘러싼 정황 속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모든 전쟁은 사실 그 나름의 이유를 안고 시작되지만, 그 속에서 죽어나가고, 망가지는 것은 그 이유에 대해 거의 관심도 없던 다른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영화를 보고서도 우리는 마찬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영화 속 군인(타밀 반군)들은, 타밀 족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가를 건설한다는 명분 속에 죽어나가고, 망가지는 것은 그 국가가 결국 보호해야 할 타밀인들이 상당수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이 인상에 강하게 남는다. 그 세 사람을 태운 버스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운전하는 사람도 없이 이 버스는 어디로 굴러가고 있는가.  아무 보호도 없이 내버려진 이들은 이제 어디로 흘러갈 수 있을까. 이들을 보호해야 할 자들에 의해 망가지고, 버림받은 이들에게 두려움 속에서 남아 있는 것은 위태로운 운전뿐이다.

이 영화의 구성은 한편으로 독특하다. 조금은 느리게 진행되는 것처럼도 보였던 이 영화는 마지막 충격적인 장면들을 연달아 붙여서 내보낸 후, 관객에게 어떤 수습할 틈도 주지 않은채 막을 닫아 버린다. 글쎄. 나로서는 이렇게 마지막에 강한 씬들을 잇따라 붙이(고 끝내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가,라는 생각이 조금은 든다. 이것은 어떤 너무 거짓된, 선택이 없는 속에서 영화적인 끝맺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감독이 등장인물을 너무 놓아 버리고, 그저 이 비극을 관객들에게 던져버리는 느낌도 들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그을린 사랑>과 비슷한). 검게 변해버린 스크린 위에 감독이 관객에게 놓아버린 진통만이 남아 있고, 그 속에서 나름의 욕망과 희망으로 애써 살아내려 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사라져버리고, 얼얼한 충격만이 남아 있다.

(모든 사진은 CINDI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 2011년 8월, CGV 압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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