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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브, 강우석

Ending Credit | 2011. 2. 6. 22:22 | Posted by 맥거핀.



(스포 조금)



이 영화 <글러브>에 대해서는 <씨네 21> 789호 '전영객잔'에 실린 안시환의 평에 대체로 동의한다. 안시환의 평은 이 영화가 맹목적인 공동체주의로 회귀하려는 혐의가 있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사실 이 영화를 보다보면 조금은 이상한 점이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그간의 스포츠 영화들, 특히 한국적인 감동 강조류 스포츠 영화들에 나왔던 거의 모든 클리셰들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는 것에 비해, 단 하나만은 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하나 빠져있는 것은 선수들 개개인의 개인사를 의식적으로 들춰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류의 영화들에서 선수들 개인의 여러가지 힘든 개인사를 들춰내면서 그것에서 감동의 눈물을 짜내는 것은 거의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개인사가 조금이라도 나오는 것은 투수인 명재 뿐이다. 그 외의 다른 야수들은 그 흔한 아버지 한 명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편집과정에서의 어떤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중간에 팀을 떠나는 선수는 그 이후로 단 한번도 그 뒷이야기가 펼쳐지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선택하여 떠나는 이 어린 선수에게 카메라는 비정하게 등을 돌린다. 이 영화에서 그는 결코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저 그는 공동체를 버렸을 뿐이고, 공동체도 그를 버렸을 뿐이다. 이것에는 안시환의 평대로 확실히 맹목적인 공동체주의의 혐의가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강우석의 최근의 다른 영화들도 (익히 분석되었듯이) 비슷한 혐의들이 도사리고 있다. <실미도>, <공공의 적> 시리즈, 최근작 <이끼>까지도.


안시환 평론가가 '전영객잔'에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거의 해버렸으므로, 특별히 더 덧붙일 말은 없지만, 그저 나름의 생각을 조금  더 붙여본다. <글러브>는 따뜻한 감동스토리의 외관을 두르고 있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면 과연 그런걸까..하는 부분들이 드러나는 것 같다. 위의 공동체주의 같은 부분들도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간 강우석이 그려왔던 세계들이 여기에도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무서운 아귀들이 우글거리는 세계,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물어뜯는 무서운 사회이다. <실미도>나 <한반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공의 적>의 아주 차갑거나, 아주 뜨거운 지옥의 세계, 그리고 <이끼>의 선인지, 악인지 알 수 없는 심연의 세계.

<글러브>는 조금은 달라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은 이상한 선택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감독의 분신같은 캐릭터인 김상남(정재영)이 2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야수에게 주자가 무릎을 아작내겠다(?)라는 기세로 달려들라고 가르치는 부분 같은 것. 김상남에게 그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김상남에게 야구는 이겨야 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기는가는 그에게 그렇게 크게 고려해봐야 할 사항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주 당연하게도, 왜 이겨야하는가, 혹은 이기는 것이 왜 필요한가는 아주 조금도 고려할 사항이 못된다(즉 이기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니다는 사실). 아니면 다른 부분, 군산상고 선수들에게 성심의 선수들을 철저하게 짓밟으라고 하는 부분. 이 부분은 음악과 편집의 효과로 김상남이 매우 옳은 말을 하는 것처럼 처리되지만, 나는 조금은 의문이 들었다. 저것이 옳은 것인가. 약자를 동정하는 것, 약자를 배려하며 게임을 하는 것은 지탄받아야 될 일인가.

물론 이 장면은 여러 효과들이 개입되어 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군산상고 선수들이 마치 이들을 놀리듯이 성의없이 게임을 하는 것처럼 이 장면이 처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효과를 배제하고 보면, 이 장면은 확실히 조금은 이상해 보이는 부분이 있다. 스포츠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지만, 약자를 조금이나마 배려하며 게임을 하는 것이 그렇게 욕먹을 일인가. 더구나 어떻게 보면 이 게임은 불공정한 게임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성심의 선수들은 청각장애라는 결정적인 핸디캡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 누군가는 분명히 반박할 것이다. 핸디캡을 고려하지 않고 야구를 하려는 것은 분명히 그들의 선택이었다고 말이다. 똑같은 조건에서, 정정당당히 승부하여 승리하는 것, 혹은 패배하는 것, 바로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점이라고 말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비장애인과 동일한 위치에 서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다고.

강우석 감독은 명백하게 후자의 손을 든다. 김상남이 원하는 것은 이들이 비장애인의 세계, 이들에게 배려가 없는 약육강식의 이 세계에 뛰어들어 이기는 것이다. 그것은 즐기면서 하는 것이 좋지 않는가라는 나교사(유선)의 시각과 대립하는 것이기도 하고, 더욱더 철저하게 짓밟혀서 가슴 속 울분을 이끌어 내라는 것이기도 하고, 2루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야수의 무릎을 날려버리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김상남은 감독의 분신이기도 하다. 이러한 강우석 감독의 태도는 다른 몇몇 곁가지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김상남 본인과 관련된 부분들. 김상남이 야구계를 떠나게 된 사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여러 사고를 연이어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이 야구계에서 퇴물이 되었기 때문에, 즉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아직도 한국야구의 엄청난 스타였다면 그가 버려졌을까. 어떻게든, 그는 구제되었을 것이 아닌가. 김상남의 매니저는 항변하지만, 한편으로는 결국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한편으로는 강우석의 항변이기도 하면서 그가 결국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즉 퇴물이 되면 버려지는 것, 그것은 가슴아프고 비정한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힘을 길러야 한다. 마찬가지. 아무리 장애인이라고 할지라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면, 그들은 살 수가 없다. 그것은 가슴아프고 비정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은 어떻게든 그 세계에 뛰어들어 이겨내야 한다. 이것은 이 영화에서 말해지는 강우석 감독의 시선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 반대쪽에 서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장애인도 장애를 가진 상태에서, 충분한 배려를 받으며 살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꾸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이들을 배려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저 말할 뿐이다. 이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야. 그런 힘들로 이루어진 세계야. 이 세계는 어차피 바뀌지 않아. 그러니 그저 중요한 것은 네가 강해지는 것 뿐이야.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상대방의 장점을 쪽쪽 빨아먹어야 하는 것 뿐이야.

그러므로 한편으로 나는 그가 말하는 일종의 '희망'에 의문이 생긴다. 그 희망은 어떻게든 이 힘겨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사투에 의해서밖에 얻어질 수 없는 것인가.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시스템으로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보다는 맹목적인 공동체주의에 의지해서, 혹은 그마저도 없다면, 각 개인의 처절한 고투와 기적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은 확실히 안시환의 지적대로 맹목적인 공동체주의이다. 대표적인 장면. 투수인 명재의 어머니는 명재가 성심학교 야구부에 들어가는 것을 못 마땅해한다. 왜냐하면 그는 아들이 장애인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명재에게 항변한다. 너는 비장애인과 똑같이 살 수 있어. 걔네들과 달라. 이렇게 말하는 명재의 어머니와 강우석 감독의 논리는 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즉 장애인을 점차 비장애인처럼 보이게 하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장애인을 비장애인으로 만드는 것. 그러나 이상해 보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영화는 이 어머니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심는다. 즉 이상하게도 강우석 감독은 자신의 생각을 대변해주는 이 어머니에게는 부정적인 점수를 준다. 그것은 강우석 감독이 맹목적인 공동체주의만을 너무 강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강우석의 '희망'에 대한 정의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 마지막을 보고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우석의 세계는 여전하구나. 그 세계는 가장 아이러니컬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패배가 주어지는 세계다. 혹은 승리했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이 주어지는 세계다. 그 세계는 여전한 '그 세계'다. 위에도 잠깐 말했지만 예를 들어 <실미도>의 그들에게는 어떠한 마지막이 결국 주어졌는가. <공공의 적>의 강철중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끼>의 류해국은 어떤가. 그러므로 그들은 그런 세계에서 최소한(이것이 중요하다. 최소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힘을 길러야한다. 그들이 힘을 길렀을 때만이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마지막의 박수는 결코 그들이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능력을 보였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이 '비장애인과 거의 동일한 능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 궁금해진다. 시스템에 밀려나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시스템안으로 들어가려는 싸움. 시스템은 그대로 내버려둔채 벌어지는 별개의 사투들, 유리된 희망들. 이것을 '희망'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덧.
짧게 쓰려고 했는데, 역시 쓸데없이 글이 (조금은) 길어졌다. 그러나 이 얘기는 덧붙이고 싶다. 아무튼 강우석 감독은 스트레이트하다. 물론 가끔은 영화의 이야기 뿐만이 아니라, 영화의 다른 부분들까지 너무 스트레이트한 것이 (꽤나 큰) 흠이긴 하지만 말이다. 스트레이트한 것은 때로 촌스러움과 연결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이 영화의 몇몇 부분은 거의 80년대 <공포의 외인구단>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그는 이야기에서 에둘러 돌아가지 않는다. 즉, 그는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그대로 던진다. 그것이 강우석 감독의 단점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는 확실한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그만의 색깔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 2011년 2월,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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