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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자, 김민석

Ending Credit | 2010. 12. 5. 23:51 | Posted by 맥거핀.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초능력자>가 며칠 전 200만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그렇게 탄력있게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개봉일에 최다관객수 신기록을 세웠다는 뉴스도 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것 같다. 곧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데, 그 때까지 극장에 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 <초능력자>는 그대로 묻히기에는 사실 의외로 진중한 물음들을 던지고 있기도 하다. 강동원, 고수라는 꽃미남 배우들을 앞세운 그저그런 슈퍼히어로 영화로만 보기에는 그 질문들이 던지고 있는 깊이가 아쉽고, 그렇다고 좋은 영화로 보기에는 질문들에 대해 내놓은 해답들이 아쉽다. 그저 이래저래 아쉬운 영화이다.

그리고 이 영화 <초능력자>는 상당히 도식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초인(강동원)의 세계와 그에 맞서는 규남(고수)의 세계는 정확히 갈라져 있다. 초인이 사는 호텔방의 샤프한 세계와 규남이 사는 공간인 뒷골목의 허름한 세계는 그 자체로 대립적이다. 그리고 초인은 혼자서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으로 대항하지만, 규남은 외국인 친구들과의 연대를 통해 초인에게 맞선다. 이를 한편으로는 초인은 자꾸 사회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규남은 자꾸 사회속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영화 초반의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초인은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할 괴물과 같은 존재다. 그리고 동시에 초인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를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처럼도 보인다. 반면 규남은 "나 유토피아 임 대리야!"라고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여 설명한다. 즉 규남이 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유토피아의 임 대리로서, 즉 이 사회 안의 관계망의 일원으로서 보이는 것이다. 

이는 왠지 우리사회의 일면을 자꾸만 들여다보게 만든다. 예를 들어 초인의 초능력은 자꾸만 무엇인가를 연상하게 만든다. 타인의 생각을 조종하여 자신의 뜻대로 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단순히 초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인가. 굳이 초능력을 쓰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것들에 조종당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대부분 아무것도 자각하지 못한다. 혹은 자각한다고 할지라도 그 감도는 아주 어렴풋하다. 그러므로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장면들도 있다. 초인과 규남의 지하철 대결 장면에서 초인의 초능력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규남은 쓰러진 후 겨우 기어서 지하철 벤치까지 오는데, 아무도 그를 돕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길을 바쁘게 갈 뿐이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작은 화면을 바라보며. 왠지 이 장면은 초인의 초능력이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무엇인가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초인에게 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CCTV가 자꾸 활용되고 있는 것도 재미있는 설정으로 보인다. '유토피아'에 설치된 CCTV는 물론, 규남과 친구들은 CCTV를 찾아 초인의 자취를 살펴보려 한다. 또한 규남과 초인의 경찰서 씬에서도 CCTV는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조종하는 권력에 대한 대항물로서의 감시의 눈으로 CCTV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물론 규남이 CCTV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되는 것처럼, CCTV는 기본적으로 권력 가까이에 있다.) 

한편으로는 규남의 친구들이 외국인들로 설정된 것이 흥미롭다. 이는 어떤 우연의 산물로만 보여지지는 않는데, 예를 들어 유토피아의 사장인 정식(변희봉)의 부인 역시 외국인으로 설정되어 있고 그들의 (혼혈인) 딸 영숙과 규남을 굳이 영화에서 묶는 것이 그 하나의 증거이며, 굳이 그 이름이 '유토피아'인 것이 또다른 증거이다. 즉 초인의 초능력에 맞서는 일종의 글로벌한 긍정적인 연대가 있는 셈이다. 이것 역시 우리사회의 어떤 일면을 말해주는 것일까. 아무도 그를 돕지 않는 규남 곁에 끝까지 남는 규남의 외국인 친구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한편으로 이 장면들은 <괴물>에서 송강호와 외국인이 같이 괴물에 맞서던 초반 장면들을 생각나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와는 묘하게 다른 점들이 있다. 그것은 이 장면들에 흐르는 특유의 어떤 정서들이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들은 이어지는 몇 개의 코믹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유대를 공고히 하고, 끝내는 그 공감을 관객에게까지 넓힌다. 즉 규남과 그 외국인 친구들이 만드는 연대는 물질적인 관계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닌, 그저 우리네 보통 동네친구들이 보여주는 연대이고, 이들이 만드는 정서는 영화의 전체톤을 지배한다.

이런 대결의 장 속에 또다른 질문들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변형된 슈퍼히어로물이라는 이 영화의 다른 부분들에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다크 나이트>를 떠올렸다는 분들이 있는데, 왜냐하면 이 영화가 <다크 나이트>와 비슷한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초인은 계속하여 같은 논리로 규남을 밀어붙인다. 그것은 규남이 자꾸 문제를 크게 만들고 있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 논리는 우리사회에서 보수신문들이 잘 쓰는 방식이기도 하다. 왜 시위(점거)를 해서 문제를 크게 만드는가? 그러니까 정부가(혹은 회사가) 강경대응을 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어쩌면 초인의 말대로 규남이 굳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연이은 사람들의 죽음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초인은 그저 돈이나 훔쳐가는 데에 만족했을 것이고, 굳이 사람들을 죽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즉 대응하는 선이 커지면 커질수록 악은 계속해서 커진다. 이것은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계속 배트맨을 압박하는 논리와 닮아 있고, 배트맨이 계속 고민하던 딜레마이기도 하다. 즉 자신의 존재가 도리어 조커를 계속 자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이 사회에 존재하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조커가 사회의 괴물이고, 도려내야 할 존재인 것처럼, 배트맨 역시 사회의 (다른 이름으로서의) 괴물이고, 언젠가 사라져야할 존재이다. <초능력자>에서 초인의 일종의 자포자기적인 삶도 궁극적으로는 여기에 이유가 있다. 그가 아무리 사회에서 조용히 살아가고자 해도, 그가 사회 속으로 스며든 순간 그의 괴물성은 필연적으로 드러날 것이고, 그는 사회에서 괴물로 축출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에 스스로 격리되어 지금처럼 살아가는 것, 아마도 그것이 초인이 할 수 있는 몇 가지 안되는 선택 중의 하나인 것이다. <초능력자>가 흥미로워 보였던 이유는 여기에 다른 대답을 던지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규남이 초인에게 이름을 묻는 것은, 그를 사회 속의 다른 개체들로, 즉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존재로서 본다는 것처럼 보였고, 초인이 머뭇거리는 순간 <다크 나이트>와는 다른 출구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화는 안전한 선택을 한다. 규남은 어느덧 배트맨이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그건 좋지만, 아마도 그 순간부터 그도 배트맨처럼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그 딜레마에 대하여 진지하게 숙고해야 될 것이다. 

지금은,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될 것인가를 물을 때보다는,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될 것인가를 물을 때이다. 물론 후자의 질문이 훨씬 답하기가 어렵다. 후자의 질문을 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끝내 전자의 질문을 답하고만 영화의 선택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덧. 3주 전에 본 영화에 대해 뭔가를 끄적거리기란 상당히 힘들다...



- 2010년 11월, CGV 왕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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