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The Book | 2010.08.11 02:27 | Posted by 맥거핀.
세속적영화세속적비평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 영화 > 영화이야기
지은이 허문영 (강,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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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지난 763호 '정성일, 허문영의 씨네산책'에서는 평론가들끼리의 대화를 담고 있다. 한국의 영화 비평의 최일선에 서 있고, 또 가장 대중적인 평론가라고 말할 수 있는 김영진, 김혜리, 이동진 평론가들과의 대화. 거기에 정성일 평론가의 말 중에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지금도 저에게 영화비평이란 결국 영화를 본다, 는 문제입니다. 해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본다는 문제. 내가 본 것을 쓸 것. 내가 만들어낸 착란상태에 빠지지 말 것."


한국 영화비평에 있어서 일종의 상징적인 존재가 그런 말을 할 때에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내가 본 것을 쓸 것, 내가 만들어낸 착란상태에 빠지지 말 것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몇 가지의 갈래로 나누어 생각해야 함을 느낀다. 먼저 비평이라는 것. 즉 단순한 리뷰나 외부를 돌면서 말하는 것과 비평과의 어떤 차이. 비평에 대한 정의를 여러 각도에서 할 수 있겠지만, 눈에 가까이 띄는 것부터 가져와 보자. 진중권은 <서양미술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근대적 의미의 '비평'이 되려면, 그것은 문학적 텍스트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 예술에 대한 언급을 텍스트로 옮겨놓았다고 저절로 비평이 되는 것도 아니다. 비평문 안에는 반드시, 첫째, 작품의 특성에 대한 기술, 둘째, 작품에 관련된 역사와 이론의 제시, 셋째, 작품의 예술적 수준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빠진 글은 비평이라고 할 수 없다. (p.273)"

이를 영화라는 것으로 그대로 가져와 생각해 본다면, 영화비평의 필수적인 요소 중의 하나는 이 영화의 예술적 수준이 어떤지, 즉 예술적으로 보았을 때 왜 다른 작품들보다 뛰어난지, 혹은 뒤떨어지는 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다른 보통의 리뷰나 영화 외곽을 둘러싼 글들과 갈라지는 부분일 것이다. 보통의 영화 리뷰에서는 이 영화가 왜 다른 영화들보다 뛰어난지를 밝힐 필요는 없다. 즉 영화 리뷰는 우열의 문제라기 보다는 취향의 문제에 가깝다. 예를 들어 그것에는 그저 나는 <인셉션>이 이러이러한 면에서 좋다라고 밝히는 것이 중요하지, <인셉션>이 왜 다른 영화들보다 뛰어난지 악다구니를 쓸 이유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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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인셉션>은 흥미를 주는 요소들이 있으나, 그렇게 매혹적이지는 못한 영화였다. 영화평론가 듀나 씨가 그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인셉션은 여러 많은 규칙들을 가지고 있고, 그 규칙들을 영화 속에서 철저하게 지켜나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영화다. 즉 일부의 영화들은 어떤 규칙을 애써 세워놓고는, 그 규칙들을 나중에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으로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린다. 즉 과잉이 되거나, 혹은 함량 미달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영화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몇 가지의 규칙들을 구축하고는, 그 규칙들을 스스로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관객의 기대에 부응했다. 다만, 그것을 말할 수는 있다. 놀란 감독은 그 규칙들 모두를 친절한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몇 개의 규칙들은 영화 속에서 급박하게 지나가며, 또 몇 개의 규칙들은 쉽게 제시되지 않고, 복잡한 내러티브 속에서 슬그머니 제시되며, 또한 일부만 보여지기도 한다. 마치 이는 감독의 전작 <메멘토>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 영화도 역시 어떤 정확한 규칙이 지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규칙은 예상보다 간단한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 규칙은 너무나도 쉽게 관객들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놀란 감독은 여기에 어떤 트릭을 건다. 즉 이야기를 거꾸로 뒤집어 버리는 트릭. 그 트릭은 성공했고, <메멘토>는 일종의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 <인셉션>에도 그런 몇 개의 트릭들이 존재하며, 그 트릭들은 관객을 지속적으로 현혹시킨다.

그것이 아마도 영화 외부에서 영화의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의 세계가 정확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면, 그렇게 영화의 이야기, 혹은 규칙들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들이 행해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영화를 둘러싼 많은 '완벽 분석'의 시도들이 그 영화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구축된 세계인지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그 세계는 아마도 영원히 '완벽 분석'될 수는 없을 것이다. 놀란 감독은 트릭으로 그것을 방어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니, 나는 관객들이 트릭에 속아넘어가서 멍청하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트릭의 승자는 언제까지나 설계자인 놀란 감독일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그런 세계에는 그다지 크게 관심이 없다. 정확히 만들어진 세계를, 몇 가지 불충분한 정보만을 가지고, 그 세계를 탐험해 나가야 하는 것 말이다. 그보다는 다른 세계가 더욱 관심이 많다. 예를 들어 박찬욱의 세계. 잘 짜여졌다고 보기는 어렵고, 여러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어떤 뭉툭한 원형질의 세계. 그러나 그 속에 많은 아름다움과 비참함과 안타까움과 괴기스러움과 기묘한 열락을 가지고 있는 세계.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불충분하고 혼란스러운 정보들 사이에서 영화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급급해야 하는 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가 마친 후 남는 것은 그저 어떤 이야기 그 자체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감독이 만들어낸 잘 짜인 그 이야기 속에 내가 스며들 틈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보다는 그저 영화 중에는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바라볼 수 있는 마술적인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영화가 끝난 후에는 생각과 감정을 천갈래, 만갈래로 흩어놓는 영화들이 좋다. 물론 이것은 그저 개인적인 취향.

개인적으로는 사실 그 스토리 자체보다는 그 이야기의 외곽에 존재하고 있는 몇몇 의문들이 더욱 관심이 간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 '인셉션'은 가능한가. 영화 속 아서(조셉 고든 래빗)는 '인셉션'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비유를 든다. 코끼리를 연상하지 말라고 하면, 무엇이 연상되지요? 그러나 이 질문은 영화 속에서 충분히 대답되지 않았다. 그저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불충분한 반박으로만 이어질 뿐이다. 글쎄. 나도 아서와 같은 의문이 든다. 타인의 꿈 속으로 들어가 어떤 생각을 심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도리어 어떤 반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적인 어떤 다음의 행동으로 연결되는가. 예를 들어 꿈 속에서 냉면을 먹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그것이 다음날 그에게 냉면을 먹게 할까. 즉 꿈은 그의 의지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래서 사실 영화 <인셉션>의 가장 허술해(이상해) 보이는 부분은 그 인셉션의 내용이다. 즉 너무나도 직접적인 인셉션. 다른 말로 하자면, 그에게 냉면을 먹게 하기 위해서는 그의 꿈 속에는 냉면 그릇을 앞에 두고 못 먹게 만드는 것이 더욱 효과를 가질 것이다라는 일종의 역설이 반영되지 않은 그 인셉션. 이것은 아마도 최면이나 암시의 메커니즘과도 연관되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솔직히 최면이나 암시를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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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튼 간에 이 이야기는 (내게는) 매혹적이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요소를 많이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심리학, 철학, 문학, 인류학, 신화, 뇌과학 그리고 물리학과 수학까지도 연결지어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 영화를 다양한 각도로 해석해보려고 할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뭔가를 이해하려고 들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중의 몇몇은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조금씩 착란상태에 빠져들어갈지도 모른다. 영화는 보이지 않고, 해석만 보이는, 그래서 자신의 해석에 조금씩 도취되는 일종의 정신착란. 그리고 정신착란의 제1의 요소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주위의 모든 것이 왜곡되어 보이고, 주위의 모든 것이 자신을 공격하는 듯이 느껴지는, 오로지 자신만이 그 안에서 존재하는 일그러진 세계. 그리고 영화 리뷰에 있어서도 일종의 비슷한 현상들이 일어난다. 오로지 자신의 의견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여전히 별점과 몇몇 담론이라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지독한 찬반의 세계.

물론 정성일 평론가가 이야기하는 착란상태는 이것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평론가는 계속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영화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과감히 찬반의 입장에 서야 한다. 그는 아마도 그보다는 보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자꾸 그것을 해석하려고만 드는 일종의 경향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그것은 일종의 경향이다. 영화 외부를 둘러싼 담론들을 자꾸 영화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그것을 해석하려는 태도. 많은 담론들이 영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찔러 죽이는 일종의 칼이 되는 그런 경향들. 어떤 영화들이건 간에 어떤 담론에 완전히 들어맞는 영화란 없다. 아니,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아마도 물어야할 것이다. 그것을 어떤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지 없는지. 어떤 영화들이건 담론에 넓고 느슨하게 걸쳐져 있고, 조금씩 그 담론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어떤 담론을 너무 광범위하고 무리하게 어떤 영화에 적용하려 할 때에 그 영화는 조금씩 평론가의 머리 속에서 정신착란의 길로 나아간다. 

즉 담론은 영화를 잡아먹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영화는 영화 내부적인 것들로 이야기될 필요가 있다. 글쎄.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의 하나의 힌트가 허문영 평론가의 책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에 있다. 허문영 평론가의 글들은 몇몇 장점이 있다. 일단 가장 눈에 띄는 장점은 쉬운 글쓰기다. 그는 한 영화를 놓고 차분하게 앞뒤 주변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세세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한 지점으로 푹 찌르고 들어간다. 정성일 평론가가 이 책의 발문에서 말한 것처럼 '이상한 일이다'라는 문장을 통해서. 그리고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혹은 발견하였더라도 지나쳤던 부분들을 다시 펼쳐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현학적인 문장들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주 조심스럽게 쉬운 말들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기 때문에 관객들은 어떤 이물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틈에 관객들은 조금은 색다른 지점에 도착해 있다. 그 색다른 지점에 그대로 머무를지, 아니면 다른 지점으로 넘어갈 것인지는 오로지 관객의 선택의 몫이다.

그것들이 어렵지 않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그는 거의 대부분 영화의 내부에 머물러 있도록 노력한다. 즉 어떤 외부의 담론이나 방대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영화에서 제기된 질문을 영화 내부의 다른 부분들에서 답을 구하려고 노력한다. 즉 이것은 일종의 영화의 정합성을 찾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몇몇 그 정합성이 떨어지는 영화들은 그의 어떤 의문들을 통해 뒷자리로 밀려나게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담론에 비추어 보았을 때만이 보이는 그 영화에 대한 문제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의 흐름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내부의 어떤 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하지 않거나, 너무 지나치게 많이 존재하고 있을 때 그는 그 영화에 어떤 의문을 제기한다. 즉 그와 함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다른 담론들을 같이 공부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그와 함께 같이 스크린을 들여다보면 된다. 단, 아주 주의깊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그 영화를 보는 것이다. 영화를 이야기하는 좋은 글들은 영화와 분리되어서도 그 나름의 어떤 문학적인, 또는 예술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적당한 착란도를 유지하는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그러나 영화평론가의 글은 아마도 그와는 약간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평론가의 좋은 글들은 영화 그 자체와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다시 그 영화를 보는 행위로 환원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평론가의 입장에서 어떤 목적 중의 하나는 '그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화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보게 만들고, 보았다면, 다시 보게 만든다. 평론가가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말이다. 그것을 이 책에 실린 수십개의 한국영화, 그리고 외국영화 평론들이 증명한다. 이 책에 실린 여러 영화들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다시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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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허문영 평론가의 책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의 리뷰를 쓰려고 글을 시작했는데, 쓰다보니 뭔가 책에 대한 얘기보다는 다른 얘기들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것도 리뷰라 할 수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 볼 틈이 없다. 난데없이 정성일 평론가의 두 권의 비평집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알라딘에서 난데없이 받은 적립금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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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papierlune.tistory.com BlogIcon papierlune 2010.09.20 21: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역시 <인셉션>을 보고나서 정신이 오락가락하긴(?)했지만 그 복잡다난하게 보이는 영화의 구조보다는 스토리, 즉 감성적인 축에 더 매료가 되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당신과 나 우리 같이 늙어가기로 했잖아.." 같은 대사들, 그리고 기나긴 코브의 꿈 속 오딧세이는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속죄의 여정에 다름이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다시 한 번 이 영화 보고싶어요, 그땐 또 어떻게 영화를 읽게 될 지 궁금해져요.

    • Favicon of https://noracism.tistory.com BlogIcon 맥거핀. 2010.09.24 21: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도 같아요. 제가 너무 영화를 이성적인(?) 측면에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저도 다시 한 번 보면 감상이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구조보다는 감성을 보라...요즘에 저에게 필요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